유동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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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동열은 평안북도 출신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제국군 장교로 복무했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신민회에 가담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사부 참모총장을 지냈으며, 한국 광복군 창설에 참여했다.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국방부 고문을 거쳐 통위부 부장을 역임했으나,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사망했다. 그는 또한 조선경비대 장교의 조건으로 양반 출신을 고집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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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류동설 |
한글 | 유동열 |
한자 | 柳東說 |
가타카나 | 유・돈요루 |
로마자 표기 | Yu Dong-yeol |
기본 정보 | |
원래 이름 | 柳東說 (유동설) |
출생일 | 1879년 3월 26일 |
사망일 | 1950년 10월 18일 (향년 71세) |
출생지 | 조선 평안북도 박천군 박천읍 매화리 199번지 |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희천시 |
종교 | 유교(성리학) |
본관 | 문화(文化) |
부모 | 류종식(부), 최씨 부인(모) |
배우자 | 정보 없음 |
자녀 | 류미영(적녀), 류정순(서녀) |
친인척 | 최덕신(사위), 류동술(사촌 형), 류동헌(사촌 남동생), 최동오(사돈), 전성호(사돈), 전덕원(사돈), 전재일(사돈), 전경찬(사돈), 최건국(적통 외손), 이초남(서얼 외손), 전해종(종조카사위), 류지수(종조카딸) |
경력 | |
군 복무 | 대한제국 육군 참령 영관 장교 |
최종 계급 | 참령 |
학력 | 중화민국 국방참모학교 |
직책 | 미군정청 통위부 부장(美軍政廳 統衛部 部長) |
임기 | 1946년 6월 11일 ~ 1948년 7월 22일 |
사령관 | 존 리드 하지 (미군정청 군정사령관) |
수상 | 안재홍 (미군정청 민정장관) |
정당 | 무소속 |
후임 | 이범석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 |
훈장 | |
서훈 | 1989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사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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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 |
웹사이트 | 정보 없음 |
2. 생애
1879년 3월, 평안북도박천군에서 태어났다. 1898년,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조 중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사관후보생으로 기병연대에 입대했다. 1903년, 육군사관학교 제15기 기병과를 졸업했다. 견습사관으로 기병연대에 배속되었다. 러일 전쟁에서는 만주군에 종군했다. 1904년 8월에 귀국하여 대한제국군의 무관학교와 유년학교 학도대에 부임했다.
1905년 3월, 기병 부위(중위). 같은 해 10월 17일, 기병 정위(대위), 유년학교 교관[2]。12월, 군무국 기병과원.
1906년, 참령(소령), 기병대 대대장. 1907년 4월, 시위 기병대 대대장. 6월, 참모국 제2과장. 대한제국군 해산 후에도 군에 남아 8월 26일(음력 7월 18일)에 군무국 마정 과장이 되었으나[3], 안창호, 양기탁, 이갑 등과 신민회를 조직했다. 1909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자금 조달을 위해 베이징에서 활동했다.
1910년 8월, 105인 사건으로 1년 6개월 복역했다.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망명했다. 만주에서 서일부와 함께 마적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조달했다. 1919년에 결성된 상하이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군사부 참모총장. 이후 만주의 독립군에서 활동했다. 1939년, 임시 정부 수석 보좌관으로서 한국 광복군 창설에 힘썼으며, 이듬해 9월에 창설되자 동 군의 참모총장이 되었다.
1945년에 귀국하여 통위부(국방부) 고문을 거쳐 1946년에 통위부 부장에 취임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 머물다 납북되었다. 북으로 연행되었으나, 가혹한 행군으로 인해 평안북도 희천에 도착했을 때 사망했다.
2. 1. 구한국 시절
류동열[4]은 1879년 3월 평안북도 박천군 박천읍 매화리 199번지에서 태어났다. 19살 때 사촌형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체류하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예비학교인 성성학교(成城學校)에 입학하여 군인이 되었다.[4] 190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육군 견습사관으로 일본 황실 근위사단에서 근무하다 귀국했다.[4]귀국 후 류동열은 대한제국 육군 장교로서 노백린, 이동휘 등과 비밀결사 효충회를 조직해 친일파 대신 암살을 계획했다.[4] 1904년 러일전쟁에 대한제국 파견 무관 자격으로 일본군에 종군하여 평안남도 선천 부근에서 러시아군과 교전하기도 했다.[4] 러일전쟁 종결 후 경성부에 주둔하던 일본군 6군사령부에 파견근무하다가 대한제국 육군으로 복귀하였다.[4]
이후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 교관, 유년학교 교관을 거쳐 1905년 군무국으로 전출되었다.[4] 참령(參領)으로 승진하여 황실 시위대 기병대장, 참모국 제2과장에 임명되었다.[4] 1906년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를 만나 1907년 4월 신민회 창립에 참여했다.[4]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반일 독립운동에 가담했다.[4]
군대해산 이후 만주 서간도로 가서 군관학교를 설립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귀국, 안창호, 윤치호, 이상재 등과 교류하였다.[4]
1909년 8월 대한제국 참령(소령)으로 군대를 떠난 뒤 서우학회와 신민회, 서북학회에 관여하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했다.[4] 1909년 일제의 침탈을 결사 반대하는 격문을 발표했고,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체포되기도 했다.[4] 이러한 활동으로 일본의 감시가 심해지자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했다.[4]
2. 2. 망명과 독립운동
유동열은 평안북도박천군 출신으로, 1898년 일본 유학 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제국군 장교로 복무했다.[2] 1905년 기병 정위(대위)로 진급하여 유년학교 교관을 역임했다.[2]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에도 군에 남아 군무국 마정과장이 되었으나,[3] 안창호, 양기탁 등과 신민회를 조직했다. 1909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군 자금 모집을 위해 베이징 등지에서 활동했다.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서일과 함께 마적단을 조직,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다. 1913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이동휘 등과 신민회 부활을 선언하고 권업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1917년 러시아 연해주 쌍성에서 김립, 문창범 등과 전로한족회 결성에 참여했다. 1918년 서일의 중광단에 가입했고, 1919년 2월 김좌진, 김동삼 등과 함께 만주지역 독립운동가들의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이후 신한혁명당, 한인사회당, 고려공산당을 창립하고, 고려군정의회를 설립, 군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18년 3월 하바로프스크에서 개최된 조선인 인민혁명가 대회에 이동휘, 김립 등과 함께 참석하고, 한인사회당을 창당, 발기했다. 같은 해 5월 한인사회당 군사부장 겸 군사학교장에 임명되었으며, 한인사회당에서 출판하는 역사와 지리 교과서 등의 편집과 조선어 번역을 담당하였다. 1918년 7월 한인적위대 지휘관으로 이만 전투에 참가했다.
2. 3.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1919년 국내외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추진될 때, 유동열은 한성임시정부의 참모부총장, 노령 대한국민회의에서는 참모총장,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군무총장에 각각 임명되었다. 1919년 8월 통합임시정부 설치 이후 군무부장을 지냈다. 같은 해 7월 만주 동삼성에 있던 각 한인 독립운동 군벌의 통합을 추진하기 위해 임시정부의 명으로 길림에 파견되었다. 이때 대한민국 길림 주재 군정사독판(軍政司督辦)에 임명되어 만주내 한인 독립군 파벌의 통합운동 추진,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1921년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대회(高麗共産黨大會)에 참가, 고려혁명당 중앙위원이 되었고, 임정을 일시 떠났다. 1922년부터 1924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을 역임했다. 1926년 4월 만주 지린성에서 고려혁명당이 창당될 때 창당발기인으로 참가, 고려혁명당 중앙당 위원에 임명되었다. 193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복귀, 임정 국무위원, 군무부장에 취임하였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한 뒤 중국 관내에서 중한민중대동맹을 조직하고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35년 난징에서 김규식, 지청천, 김원봉 등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에 참가했다. 1938년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의 통합을 추진할 때 통합된 한국독립당에 참여,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에 임명되었다. 1938년 5월 6일 중국 창사의 남목청에서 김구와 함께 회의 중 전 고려혁명당 간부 이운한의 총격을 받아 부상을 입기도 했다.
1939년 10월 25일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내각 참모총장에 선출되었다. 1940년 5월 기강에서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의 한 사람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충칭에서 광복군 창군 후 광복군 참모총장으로 통수부의 막료가 되어 임시정부의 군사정책과 활동을 주관했다.
1945년 2월 한국독립당을 탈당, 홍진(洪震) 등과 신한민주당을 창당하고 당을 지도했다.
2. 4. 광복 이후
1945년 귀국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에 참석, 김구를 중심으로 이승만, 이시영, 김규식 등과 함께 환영행렬을 맞이하였다.[5] 1946년 조병옥의 추천으로 미 군정청 통위부장에 임명되어 이범석, 이청천, 원용덕, 손원일 등과 함께 조선국방경비대 창설에 관여하였다. 조선국방경비대는 후에 대한민국 국군의 모태가 되었다. 그러나 국방경비대와 경찰 간 체포 관련 분쟁이 발생하면서 조병옥과 갈등하게 된다.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국방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6] 1949년 8월 2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7]2. 5. 납북과 사망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난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납북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과 이북의 정치일꾼들은 ‘모시기 공작’을 통해 남북협상에 참여한 인사들과 출옥인사들을 북으로 데려갔고, 류동열도 이 '모시기 공작'의 대상이 되어 북으로 가게 되었다.[8] 1950년 10월 18일 평안북도 희천의 어느 농가에서 사망했다.[8] 사후 평양 서남쪽 신미리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다.[8]3. 논란
3. 1. 비 양반 출신 고위 장교 임용 반대
미 군정청 통위부장 재직 시절, 양반 가문 출신이 아닌 사병의 고위 장교 임용을 반대하여 미군정을 당황하게 했다.[9]당시 군정청에 파견되었던 미군 육군 대위 제임스 하우스만은 김종갑의 임용 반대 사례를 기록으로 남겼다. 6.25 전쟁 기간 동안 사단장과 육군 중장, 국방차관까지 지낸 김종갑은 춘천 8연대의 수석장교로 대위 진급 예정이었으나, 통위부장 유동열이 제동을 걸었다.[9] 유동열은 조선경비대의 장교는 반드시 양반 출신이어야 한다는 이유로 김종갑의 승진임용을 반대했다.[10]
제임스 하우스만은 '능력과 관계없는 양반 논쟁으로 인사의 차질을 빚고 있었다'며, '단 1명의 장교도 아쉬운 상황에서 유 장군은 계속 장교의 조건으로 “양반”을 들고 나왔다'[12]고 하였다. 그러나 '미군 조직법에는 양반만이 장교가 돼야 한다는 근거가 없었다'[13]고 반박했다. 유동열은 양반 출신이 아닌 사람이 고위 장교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고집했고, 미군들은 미국의 군대 조직법에는 귀족출신만 장교를 해야 된다는 근거가 없다고 설득했다.
4. 가족 관계
류동열의 딸 류미영은 조선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을 지냈다. 사위 최덕신은 대한민국 외무장관을 지내고 월북했다. 사돈 최동오는 독립운동가이다.
5. 상훈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4]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에서는 2008년 7월 31일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하고 무장 독립운동과 광복군 양성에 힘쓴 류동열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4]
6. 평가
참조
[1]
웹사이트
유동열(柳東說)
http://encykorea.aks[...]
2022-08-23
[2]
웹사이트
日省錄 1905年9月19日(陽曆十月十七日)
http://e-kyujanggak.[...]
ソウル大学奎章閣韓国学研究院
2017-10-12
[3]
웹사이트
承政院日記3211冊(脱草本141冊)、純宗1年7月18日丁未
http://sjw.history.g[...]
国史編纂委員会
2017-10-12
[4]
웹인용
나라사랑 포털사이트, 유동열
https://web.archive.[...]
2008-08-23
[5]
서적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6]
서적
대한민국 임시정부 30년사
국학자료원
2006
[7]
서적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
역사비평사
2008
[8]
저널
기구한 참으로 기구한…
http://h21.hani.co.k[...]
한겨레21
2000-08-23
[9]
서적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한국문원
1995
[10]
서적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한국문원
1995
[11]
서적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한국문원
1995
[12]
서적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한국문원
1995
[13]
서적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한국문원
1995
[14]
저널
“분명히 있었는데, 왜 몽양과 죽산의 묘가 없지?” - 평양 애국렬사릉의 사라진 묘, 생겨난 묘
https://web.archive.[...]
2008-06-21
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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