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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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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봉의는 1839년 전라남도 영광에서 태어났으며, 효령대군의 후손이자 이경우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무과에 급제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 양주 목사, 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대한제국 육군 부장과 군부대신을 역임했다. 1908년 대동학회 회원이 되었으나 병으로 활동하지 못했고,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아들이 남작 작위를 받았다.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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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봉의
원어 이름李鳳儀
작위남작
지겸(志謙)
별호자: 선익(善翼), 호: 송부(松阜)
출생일1839년 3월 28일
출생지조선 전라남도 영광군 대마면 섬암
사망일1919년 3월 13일
사망지일제강점기 한국 경성부
가문전주
경력
복무조선/대한제국 육군
복무 기간1854년 ~ 1910년
최종 계급판돈녕부사
근무조선/대한제국 육군
훈장
서훈 내역1912년 한국병합기념장
가족 관계
후임자이기원

2. 생애

이봉의는 1839년 음력 2월 14일 전라남도 영광군 대마면 섬암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지겸(志謙)이었으나, 후에 이경우의 양자가 되면서 봉의(鳳儀)로 개명하였다.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후손으로, 몰락한 왕족 가문 출신이었으나 양아버지 이경우의 집안은 대대로 고위 무관 벼슬을 지낸 명문가였다.

1869년(고종 6) 양주목사를 시작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 흥선대원군에 의해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임명되었다. 1877년 경기도 수군절도사, 1879년 충청도 병마절도사, 1883년 좌변 포도대장, 1885년 한성부 판사 및 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1893년 포도청 우포도대장이 되었고, 1894년 형조판서, 경무사,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다.

1894년 제1차 김홍집 내각에서 총어사 겸 경리사를 맡았고, 이후 여러 차례 경무사를 역임했다. 훈련대장, 어영대장, 포도대장 등을 거쳐 1896년 대한제국 중추원 1등 의관, 강원도 관찰사강원도 재판소 판사를 지냈다. 1897년 경무사, 승정원승지, 궁내부 특진관 등을 역임하고 8괘장을 받았다. 1898년 궁내부 특진관, 돈령부판사를 거쳐 완성군에 봉해졌으며,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1901년 대한제국 국군 헌병 사령관, 1902년 경무사 및 육군 참장을 지냈다. 1903년 원수부 회계국 총장, 육군 부장을 거쳐 이완용 내각에서 군부대신을 지냈다. 같은 해 군부대신으로 원수부 군무국 총장을 겸임하고, 의정부 찬정이 되었다. 1904년 원수부 검사국 총장, 1906년 돈령원판사, 태의원경을 역임하고 훈3등 태극장을 받았다. 1907년 군대 해산으로 육군 부장에서 퇴역하였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 1911년 아들 이기원이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와 25000JPY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이봉의는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정5위에 서훈되었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특별회원으로 이름을 올렸으며,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9년 3월 13일 경성부 자택에서 사망했으며, 묘소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있다.

2. 1. 생애 초반

이봉의는 1839년 음력 2월 14일 전라남도 영광군 대마면 섬암에서 추증 이조판서 이태순(李泰純)과 부인 연일정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지겸(志謙)이었는데, 뒤에 이경우의 양자로 가면서 봉의(鳳儀)로 개명하였다.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후손으로 보성군의 15대손이며, 보성군의 손자 여양군의 아들인 전성군 대의 12대손이었다. 5대조는 기장현감 이중철(李重喆)이고, 증조부는 흥해군수를 지낸 이득강(李得江)이다. 어머니 연일정씨는 진사사헌부지평 정예환(鄭禮煥)의 딸이다.

생가는 효령대군의 후손이었으나 몰락하여 전라남도로 낙향했다. 훗날 친군별영사(親軍別營使)를 지낸 이경우(李景宇)가 영광군으로 내려왔는데 아들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생부는 아들들 중 이봉의를 양자로 보냈다.

첫 부인은 정경부인 반남박씨로 선공감감역 박종안(朴宗顔)의 딸이었는데 사별하고, 강릉김씨 참봉 김연식(金演植)의 딸과 재혼하였다.

고종 때 친군별영사를 지낸 이경우(李景宇)의 양자가 되었다. 양아버지는 총어사를 지낸 무인 집안 출신이었다.[3] 이봉의는 몰락 왕족의 후손이었지만, 전라남도 영광군에서 이경우의 양자로 낙점되면서 서울로 상경하였다.

양아버지 이경우의 집안은 대대로 고위 무관 벼슬을 지낸 가문으로, 소론 무반 가문에서 5대 동안 6명의 대장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이경우는 1854년(철종 5) 특별 천거로 선전관에 임명된 후 순천군수, 남양부사, 창성부사 등을 지냈으며, 이후 무과에 급제하였다.

2. 1. 1. 출생과 가계

이봉의는 1839년 음력 2월 14일 추증 이조판서 이태순(李泰純)과 부인 연일정씨의 아들로 전라남도 영광군 대마면 섬암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지겸(志謙)이었는데, 뒤에 이경우의 양자로 가면서 봉의(鳳儀)로 개명하였다.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후손으로 보성군의 15대손이었다. 보성군의 손자 여양군의 아들인 전성군 대의 12대손이었다. 5대조는 기장현감 이중철(李重喆)이고, 증조부는 흥해군수를 지낸 이득강(李得江)이다. 어머니는 정경부인 연일정씨로 진사사헌부지평 정예환(鄭禮煥)의 딸이다.

효령대군의 후손이었으나, 생가는 몰락하여 전라남도로 낙향했다. 훗날 친군별영사(親軍別營使)를 지낸 이경우(李景宇)가 영광군으로 내려왔는데 아들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생부는 아들들 중 한 명인 이봉의를 양자로 보냈다.

첫 부인은 정경부인 반남박씨로 선공감감역 박종안(朴宗顔)의 딸이었는데 사별하고, 강릉김씨 참봉 김연식(金演植)의 딸과 재혼하였다.

2. 1. 2. 양자 입양

고종 때 친군별영사를 지낸 이경우(李景宇)의 양자가 되었다. 양아버지는 총어사를 지낸 무인 집안 출신이었다.[3] 전라남도 영광군에 정착한 몰락 왕족의 후손이었지만, 이봉의가 이경우의 양자로 낙점되면서 서울로 상경하였다.

양아버지 이경우의 집안은 대대로 고위 무관 벼슬을 지낸 가문으로, 소론 무반 가문에서 5대 동안 6명의 대장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이경우는 1854년(철종 5) 특별 천거로 선전관에 임명된 후 순천군수, 남양부사, 창성부사 등을 지냈으며, 이후 무과에 급제하였다.

2. 2. 관료 생활

1869년(고종 6) 여러 벼슬을 거쳐 양주목사로 부임했다. 같은 해 9월 효령대군의 후손이라 하여 흥선대원군이 특별히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임명하였다. 흥선대원군 실각 후에도 숙청되지 않고, 1877년 4월 경기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1879년(고종 16) 12월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 1883년(고종 20) 5월 좌변 포도대장을 역임하고 1885년(고종 22) 3월 한성부 판사를 거쳐 한성부 판윤으로 발탁되었다. 1889년 5월 다시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1891년(고종 28) 수릉산릉친제(綏陵山陵親祭) 때 별군직을 맡아 가자되고, 1892년 우변 포도대장이 되었다. 1893년(고종 30년) 한규설의 후임으로 포도청 우포도대장이 되었고[4], 1894년 7월 형조판서에 임명되고, 경무사, 다시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다.

1894년 제1차 김홍집 내각에서 총어사 겸 경리사(摠禦使兼經理使)에 임명되었다. 이후 1902년 12월까지 여러 번 경무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훈련대장, 어영대장, 포도대장 등을 지내고, 1896년 5월 대한제국 중추원 1등 의관(一等議官) 칙임관(勅任官) 2등을 거쳐 그해 9월 강원도 관찰사강원도 재판소 판사에 임명되었다.

1897년(건양 1년) 경무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승정원승지가 되었다가 명성황후 국장 인산시 배왕대장(陪往大將)으로 차출되었고, 궁내부 특진관 때 서훈 4등에 올라 8괘장(八卦章)을 받았다. 1898년(광무 1년) 1월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돈령부판사에 이르렀으며 완성군에 봉군되었다. 1898년 이어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1901년 11월 대한제국 국군 헌병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02년 9월 경무사에 임명된 뒤 대한제국 육군 참장으로 승진했다. 그해 11월 다시 헌병 사령관에 재임명되었다.[1]

1903년 3월 대한제국 원수부 회계국 총장을 거쳐, 그해 5월 대한제국 육군 부장(陸軍副將)이 되어 이완용 내각에서 군부대신을 지냈다. 그해 7월 군부대신으로 원수부 군무국 총장을 겸임하고, 11월 행의정부 찬정이 되었다. 그 뒤 호위대 총관을 거쳐 1904년 2월 원수부 검사국 총장에 임명되었다. 1906년 돈령원판사에 임명된 뒤 태의원경(太醫院卿)이 되어 훈3등 태극장을 받았으며, 그해 9월 다시 돈령원판사에 올라 칙임관 1등이 되었다.[1]

1907년 9월 군대 해산으로 육군 부장으로 퇴역하였다.[1]

2. 2. 1. 관료 생활 초반

1869년(고종 6) 여러 벼슬을 거쳐 양주목사로 부임했다. 같은 해 9월 효령대군의 후손이라 하여 흥선대원군이 특별히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임명하였다. 흥선대원군 실각 후에도 숙청되지 않고, 1877년 4월 경기도 수군절도사로 나갔다가 1879년(고종 16) 12월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 1883년(고종 20) 5월 좌변 포도대장을 거쳐 1885년(고종 22) 3월 한성부 판사를 거쳐 한성부 판윤으로 발탁되었다. 1889년 5월 다시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1891년(고종 28) 수릉산릉친제(綏陵山陵親祭) 때 별군직을 맡아 가자되고, 1892년 우변 포도대장이 되었다.

1893년(고종 30년) 한규설의 후임으로 포도청 우포도대장이 되었고[4], 1894년 7월 형조판서에 임명되고, 경무사, 다시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다.

2. 2. 2. 김홍집 내각 시절

1894년 제1차 김홍집 내각에서 총어사 겸 경리사(摠禦使兼經理使)에 임명되었다. 이후 1902년 12월까지 여러 번 경무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훈련대장, 어영대장, 포도대장 등을 지내고, 1896년 5월 대한제국 중추원 1등 의관(一等議官) 칙임관(勅任官) 2등을 거쳐 그해 9월 강원도 관찰사강원도 재판소 판사에 임명되었다.

1897년(건양 1년) 경무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승정원승지가 되었다가 명성황후 국장 인산시 배왕대장(陪往大將)으로 차출되었고, 궁내부 특진관 때 서훈 4등에 올라 8괘장(八卦章)을 받았다. 1898년(광무 1년) 1월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돈령부판사에 이르렀으며 완성군에 봉군되었다. 1898년 이어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2. 2. 3. 대한제국 시절

1901년 11월 대한제국 국군 헌병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02년 9월 경무사에 임명된 뒤 대한제국 육군 참장으로 승진했다. 그해 11월 다시 헌병 사령관에 재임명되었다.[1]

1903년 3월 대한제국 원수부 회계국 총장을 거쳐, 그해 5월 대한제국 육군 부장(陸軍副將)이 되어 이완용 내각에서 군부대신을 지냈다. 그해 7월 군부대신으로 원수부 군무국 총장을 겸임하고, 11월 행의정부 찬정이 되었다. 그 뒤 호위대 총관을 거쳐 1904년 2월 원수부 검사국 총장에 임명되었다. 1906년 돈령원판사에 임명된 뒤 태의원경(太醫院卿)이 되어 훈3등 태극장을 받았으며, 그해 9월 다시 돈령원판사에 올라 칙임관 1등이 되었다.[1]

1907년 9월 군대 해산으로 육군 부장으로 퇴역하였다.[1]

2. 3. 한일 병합 이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1911년 1월 아들 이기원이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와 25000JPY의 은사공채를 수령하였다. 그의 작위는 아들인 이기원이 습작했다. 그해 2월 조선총독부 총독 관저에서 열린 작기본서봉수식에는 부축을 받고 행사에 참석하고 되돌아왔다. 이후 계속 병석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이후 그는 병석에서 의식불명상태로 9년간 있다 사망하였으므로 친일행위 여부로 단정짓기 어렵다.[5]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을 수여받았다.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12월 정5위에 서훈되었다.

1915년 7월 조선총독부의 주도하에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시정사업을 선전하기 위한 총독부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가 개최되자 특별회원의 명단에 올랐다. 그해 11월 다이쇼 천황 즉위식에는 병으로 불참하였으나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대례기념장을 특별히 수여받았다. 1919년 3월 13일 경성부 자택에서 사망했다.

2. 4. 사망

1911년 1월 아들 이기원이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와 25000JPY의 은사공채를 수령하였다. 그해 2월 조선총독부 총독 관저에서 열린 작기본서봉수식에는 부축을 받고 행사에 참석하고 되돌아왔다. 이후 계속 병석에 누워 있었다.[5]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12월 정5위에 서훈되었다. 1915년 7월 조선총독부 주도로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시정사업을 선전하기 위한 총독부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가 개최되자 특별회원 명단에 올랐다. 그해 11월 다이쇼 천황 즉위식에는 병으로 불참하였으나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대례기념장을 특별히 받았다. 1919년 3월 13일 경성부 자택에서 사망했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친아버지이태순(李泰純)
친어머니연일 정씨진사, 증 사헌부 지평 정예환(鄭禮煥)의 딸
이원의(李瑗儀)1834년 ~ 1896년
형수장흥 고씨고학진(高學鎭)의 딸
양아버지이경우(李景宇)
부인반남 박씨선공감 감역 박종안(朴宗顔)의 딸
부인강릉 김씨참봉 김연식(金演植)의 딸
아들이기원(李起元)1880년 ~ 1937년
손자이강식(李康軾)1909년 ~ 1939년
사돈신익희(申翼熙)1892년 ~ 1956년


4. 한규설 가문과의 관계

한규설 가문과 이봉의 가문은 대대로 친하게 지냈으나, 한일합방 이후 작위를 받는 문제를 놓고 원수 사이가 된다.[6]

신익희는 후일 이봉의 집안과 당시 한성부의 양반집에 대한 내력을 증언하였다. 일본 총독이 이봉의에게 작위 승인서를 내밀며 도장 찍기를 강요하자, 이봉의의 아들 이기원은 규장각 직각이었는데, 한규설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6] 이봉의가 우포장으로 있을 때 한규설은 좌포장으로 있었고, 두 사람은 매우 친했기 때문이다. 이기원은 한규설에게 "제 아버지가 병환 중에 계셔서 제가 이 일(일본이 작위를 주는 일)을 판단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을사 5조약 체결 당시 끝까지 반대했던 참정 대신 한규설은 "받으라는 것 받게"라고 답했다. 이기원은 내키지 않았지만 어른의 말씀이라 어쩔 수 없이 도장을 찍고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발표된 내용을 보니 한규설은 작위 받기를 끝내 거부했다. 이 일로 두 집안은 원한을 품고 반목하게 되었다.[10]

이 일로 한규설 가문과 이봉의 가문은 대대로 친하게 지냈지만, 훗날 이봉의 후손들은 절교를 선언하고 원수가 되었다.

참조

[1] 내용
[2] 내용
[3] 서적 매천야록 서해문집 2006-10-20
[4] 내용
[5] 내용
[6] 서적 내가 모신 해공 신익희 선생 해공신익희선생기념회 1989
[7] 서적 내가 모신 해공 신익희 선생 해공신익희선생기념회 1989
[8] 내용
[9] 문서 작위 수여
[10] 서적 내가 모신 해공 신익희 선생 해공신익희선생기념회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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