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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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심액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고 청송군에 봉해졌다. 심전의 손자이자 심우준의 양자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다. 인조, 효종 시대를 거치며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특히 효종에게 열 가지 '말라'는 내용의 십무자(十無字)의 소를 올려 칭찬을 받았다. 가계는 명현 심달원의 증손이며, 인평대군의 외조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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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액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한자 이름 | 沈詻 |
| 자 | 중경(重卿) |
| 호 | 학계(鶴溪) |
| 시호 | 의헌(懿憲) |
| 출생일 | 1571년 |
| 사망일 | 1654년 |
| 국적 | 조선 |
| 학력 | 1589년(선조 22년) 사마양시에 합격 1596년(선조 2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
| 당파 | 남인 |
| 봉호 | 청송군(靑松君) |
| 종교 | 유교(성리학) |
| 가족 관계 | |
| 아버지 | 친부: 심우준 양부: 심우승 |
| 배우자 | 정경부인 안동 권씨 |
| 자녀 | 심광수(장남) 심광사(차남) |
| 친척 | 심달원(증조부) 심전(조부) 권징(장인) 오단(사위) 인평대군(외손서) 복녕군(외증손) 복창군(외증손) 복선군(외증손) 복평군(외증손) 심단(종손자, 윤선도의 외손자) 윤두서(외증손, 심광사의 외손자) 심각(고손자) 정학유(7세손서, 정약용의 차남) 정대무(8세손서, 정학유의 아들) |
| 관직 | |
| 주요 관직 | 이조판서 좌참찬 판의금부사 |
2. 가계
기묘명현 심달원의 증손이자 청파부원군 심전의 손자이며, 증 이조참판 심우준의 아들로 태어나 청계부원군 심우승에게 입양되었다.
아들로는 남인 산림 심광수와 심광사가 있으며, 사위 오단을 통해 인조의 아들 인평대군 가문과 연결된다. 또한 동생 심서를 통해 고산 윤선도 가문과, 고손자 심각을 통해 다산 정약용 가문과도 인척 관계를 맺고 있다.
2. 1. 주요 가계도
- 기묘명현 심달원 (승문원 판교, 증 이조판서)의 증손이며, 경기도 관찰사 · 증 영의정 · 청파부원군 심전 (沈銓)의 손자이다.
- 생부는 심우준 (진사, 증 이조참판)이며, 양부는 심우승 (호조참판, 경기도 관찰사, 증 영의정, 청계부원군)이다.
- 부인은 정경부인 안동 권씨로, 병조판서 권징(權徵)의 딸이다.
- 아들로는 남인 산림이었던 심광수 (세자시강원 진선, 공조참의, 증 이조참판, 청안군)와 심광사 (종친부 전부, 증 이조참판)가 있다.
- 딸은 관찰사 오단에게 시집갔다. 사위 오단은 인평대군 (인조의 셋째 아들)의 장인이다.
- * 인평대군의 아들: 복녕군,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 동생은 심서 (평시서령, 증 이조판서)이다.
- * 심서의 아들 심광면 (증 영의정)은 남인 산림이자 예조참의였던 고산 윤선도 (尹善道)의 사위이다.
- ** 심광면의 아들 심단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판중추부사, 봉조하)은 윤선도의 외손자이다.
- 아들 심광사의 외손자는 공재 윤두서 (尹斗緖)이다. 윤두서는 윤이석(尹爾錫, 심광사의 사위이자 윤선도의 손자)의 아들이다.
- 고손자 심각 (예조판서, 판의금부사, 판중추부사)의 증손서(증손녀사위)는 다산 정약용 (丁若鏞)의 차남 운포 정학유 (丁學游)이다.
- 심각의 고손서(고손녀사위)는 정학유의 아들 정대무 (丁大懋)이다.
심우선 (장수현감)
* 부인 : 파평 윤씨
** 심양 (사헌부 감찰)
*** 심광한 (증 이조참판)
심상 (심광사의 아들, 사간원 정언, 증 이조판서)
* 심득량 (순흥부사, 증 좌찬성)
** 심각 (예조판서, 판의금부사, 판중추부사, 기로소)
*** 심창석
심유
* 심동량
** 딸 : 청송 심씨
** 사위 : 정대무 (丁大懋, 1824년 ~ ?) - 정학유의 아들, 참봉, 현감
*** 심오 (심경석에 입양됨)
*** 심경석 (용궁현감)
심오 (심창석의 아들)
* 딸 : 청송 심씨
* 사위 : 정학유 (丁學游) - 다산 정약용의 차남, 실학자
** 아들 : 정대무 (丁大懋, 1824년 ~ ?) - 참봉, 현감
심우준 (진사, 증 이조참판) - '''심액의 생부'''
* 부인 : 증 정부인 죽산 박씨
* 부인 : 증 정부인 은진 송씨
** '''심액''' (심우승에게 입양됨)
** 심서 (평시서령, 증 이조판서)
*** 심광면 (증 영의정)
부인 : 증 정경부인 해남 윤씨 - 남인 산림 예조참의 고산 윤선도의 딸
* 심단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판중추부사, 기로소, 봉조하)
** 부인 : 정경부인 광주 이씨
*** 심득천 (승문원 권지정자)
*** 심득경 (진사, 윤두서가 그린 초상화의 모델)
*** 심득행 (용인현령)
*** 심득성 (생원, 증 이조참의)
심치 (증 이조참판)
* 심영석 (병조참판)
** 심문 (제릉참봉, 증 이조판서)
*** 부인 : 증 정부인 풍산 홍씨 - 병조판서 홍명주(洪命周)의 딸
심동신 (병조참판, 지춘추관사, 대사헌)
심동헌 (승지)
심우승 (沈友勝, 호조참판, 경기도 관찰사, 호성공신 2등, 증 영의정, 청계부원군) - '''심액의 양부'''
* 부인 : 증 정경부인 순흥 안씨
** '''심액''' (沈詻, 심우준의 아들,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청송군, 기로소)
*** 부인 : 정경부인 안동 권씨 - 병조판서 권징의 딸
심광수 (沈光洙, 남인 산림, 세자시강원 진선, 공조참의, 증 이조참판, 청안군)
* 부인 : 증 정부인 안동 권씨
** 심백 (심광사(沈光泗)의 아들, 병조좌랑)
심광사 (沈光泗, 종친부 전부, 증 이조참판, 다섯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
* 부인 : 증 정부인 전의 이씨 - 병조참판 이명준(李命俊)의 딸
** 딸 : 청송 심씨
** 사위 : 윤이석(尹爾錫) - 해남 윤씨, 고산 윤선도의 손자, 종친부 전부
*** 외손자 : 윤두서 (尹斗緖) - 조선의 삼재(三齋) 중 한 명인 화가
** 심백 (심광수에 입양됨, 병조좌랑)
** 심상 (심광한에 입양됨, 사간원 정언, 증 이조판서)
** 심벌 (황해도 관찰사)
** 심방 (진주목사)
** 심탱 (승지)
딸 : 청송 심씨
사위 : 오단 - 관찰사
* 외손녀 : 복천부부인 동복 오씨
* 외손녀사위 : 인평대군 - 인조의 셋째 아들
** 외증손자 : 복녕군,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 심보 (沈譜, 무과 박천군수)
*** 심광숙 (沈光淑, 무과 만호)
심륜 (沈棆, 첨지중추부사)
* 심득망 (沈得望, 무과 첨절제사)
심우단 (사헌부 감찰)
* 부인 : 수원 최씨
** 심선 (단천부사)
2. 2. 가계 관련 추가 정보
기묘명현 심달원의 증손이며, 경기도 관찰사와 증 영의정을 지낸 청파부원군 심전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진사를 지내고 이조참판에 증직된 심우준이며, 숙부이자 호조참판, 경기도 관찰사를 지내고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된 청계부원군 심우승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부인은 정경부인 안동 권씨로, 병조판서 권징의 딸이다. 자녀로는 아들 심광수(남인계 산림, 청안군)와 심광사(종친부 전부, 증 이조참판), 딸 청송 심씨 등이 있다. 심광사는 다섯 아들(심백, 심상, 심벌, 심방, 심탱)을 두었는데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위는 관찰사를 지낸 오단이다. 오단은 인평대군의 장인이기도 하여, 이를 통해 심액의 가계는 왕실과도 연결된다. 인평대군은 인조의 셋째 아들이며, 그의 아들로는 복녕군,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이 있다.
동생 심서는 평시서령을 지냈고 사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심서의 아들 심광면(증 영의정)은 남인계 산림이자 예조참의를 지낸 고산 윤선도의 사위이다. 심광면의 아들이자 심액의 종손자인 심단은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아들 심광사의 외손자는 조선 후기의 유명한 문인화가인 공재 윤두서이다. 윤두서는 심광사의 사위이자 고산 윤선도의 손자인 윤이석의 아들로, 윤선도의 증손자이기도 하다.
고손자 심각(예조판서, 판의금부사 등 역임)을 통해서는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 가문과도 인척 관계를 맺게 된다. 심각의 증손녀는 정약용의 차남 운포 정학유와 혼인하였고, 현손녀는 정학유의 아들 정대무와 혼인하였다.
3. 생애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선조, 광해군, 인조, 효종 4대에 걸쳐 관직 생활을 하였으며, 특히 인조와 효종 대에는 이조판서, 예조판서, 형조판서, 공조판서 등 판서직과 대사헌, 도승지 등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3. 1. 선조조 (1589년 ~ 1599년)
1589년(선조 22년) 사마양시에 합격하고, 1596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1597년에는 세자시강원 설서와 예문관 봉교를 지냈으며, 1598년에는 홍문관 부수찬과 수찬을 역임했다. 1599년 경성판관이 되었으나,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이후 다시 등용되어 여러 관직을 지냈다.
3. 2. 광해군조
광해군 때 여러 벼슬을 지냈다.3. 3. 인조조 (1626년 ~ 1649년)
1626년 (인조 4년)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1634년 인천부사로 재직할 당시,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의 부인 복천부부인 동복 오씨의 외조부라는 이유로 인평대군의 혼례를 주관하게 되자 논란이 일었다.[1]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며, 주요 경력은 아래와 같다.
| 연도 | 주요 관직 |
|---|---|
| 1635년 | 좌부승지, 경연 참찬관, 우승지 |
| 1636년 | 좌승지 |
| 1637년 | 강원도 관찰사 |
| 1639년 | 도승지, 동지경연관사 |
| 1641년 | 예조참판 |
| 1644년 | 대사간, 대사헌 |
| 1645년 | 대사간, 도승지 |
| 1646년 | 대사헌 |
| 1647년 | 형조판서, 대사헌, 예조판서 |
| 1648년 | 대사헌, 예조판서 |
| 1649년 | 이조판서 |
1649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청송군(靑松君)의 작위를 세습받았다.
3. 4. 효종조 (1649년 ~ 1654년)
1649년 효종 즉위년에 문관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집안 자제를 등용하여 상피제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양사의 탄핵을 받아 잠시 파직되었다.[2] 이후 다시 서용되어 우참찬과 좌참찬을 지냈으며, 1650년에는 예조판서, 1651년에는 좌참찬과 판의금부사를 역임했다. 1652년에는 이조판서, 우참찬, 판의금부사, 좌참찬을 거쳐 다시 이조판서에 임명되었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1653년에는 공조판서가 되었으며, 선조의 시종신(侍從臣)으로서 식물(食物)을 하사받았다.[3] 1654년 10월에는 군주의 덕목 수행을 위한 십무자(十無字)의 상소를 올려 효종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4]4. 십무자(十無字)의 소
청송군 심액(沈詻)은 효종 5년(1654년) 10월 10일, 죽음을 앞두고 효종에게 차자(箚子)를 올려 마지막 충언을 고했다. 그는 스스로 정신이 흐릿하여 좋은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견마(犬馬)의 정성을 다해 열 가지 '무(無)' 자로써 왕의 덕을 보좌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그가 제시한 열 가지 경계할 점, 이른바 '십무자(十無字)'는 다음과 같다.
| 순번 | 내용 | 원문 |
|---|---|---|
| 1 | 스스로 성철(聖哲)하다 하여 신료들을 가벼이 보지 말 것 | 無以聖哲自居而輕忽臣僚 |
| 2 | 격노하여 형벌에 중정(中正)을 잃지 말 것 | 無以震怒之極而或失刑獄之中 |
| 3 | 허물을 숨기고 직언 듣기를 싫어하지 말 것 | 無以諱過拒諫而不樂聞其失 |
| 4 | 소인을 등용하여 거듭 인심을 잃지 말 것 | 無以濫用小人而重失人心 |
| 5 | 편벽되게 한쪽으로 쏠려 취사(取捨)가 공명하지 않게 하지 말 것 | 無以偏徇一己而致失取舍之公 |
| 6 | 나태하고 소홀히 하여 시작만 있고 끝은 없게 하지 말 것 | 無以怠忽庶政而有始無終 |
| 7 | 아첨하는 무리를 가까이하여 사(私)가 통할 수 있는 길을 열지 말 것 | 無以昵比讒諛而或開私謁之門 |
| 8 | 이름만 있고 일은 헛되이 하지 말 것 | 無以名存實亡而徒爲虛文之事 |
| 9 | 사치를 숭상하여 제도를 무너뜨리지 말 것 | 無以崇尙侈靡而漸廢祖宗之制 |
| 10 | 재물을 손상하여 백성을 곤궁하게 하지 말 것 | 無以傷財害民而終困生靈之命 |
심액은 이 열 가지가 현재 왕에게 잘못이 있어서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커지기 전에 미리 막고 끝을 시작처럼 삼가야 한다는 뜻에서 올리는 것이라며, 노망스러운 말이라 여기지 말고 살펴주기를 간청했다. 이에 효종은 심액이 아뢴 열 가지 가르침이 진실로 충심에서 우러나온 말이니 감탄하며 마음에 새기겠다고 답했다.
참조
[1]
역사기록
인조실록 30권, 인조 12년 10월 20일 계묘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2]
역사기록
효종실록 1권, 효종 즉위년 8월 25일 임자 5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3]
역사기록
효종실록 11권, 효종 4년 9월 21일 계축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4]
역사기록
효종실록 13권, 효종 5년 10월 10일 병인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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