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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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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상은은 당나라 후기의 시인으로, 812년 또는 813년에 태어나 858년에 사망했다. 그는 몰락한 종실 출신으로, 관료 생활을 했으나 파벌 다툼과 환관의 영향으로 인해 고위직에 오르지 못하고 지방관을 전전했다. 그의 시는 신라의 술을 소재로 한 "공자"와 "금슬"을 비롯하여, 수수께끼 같은 표현과 상징적인 이미지로 유명하다. 이상은은 당나라 멸망 후에도 후대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에도 그의 작품은 다양한 분야에서 인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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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당나라)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이상은
한자 표기李商隱
로마자 표기I Sang-eun
義山 (의산)
출생813년 (추정)
사망858년 (추정)
출생지정주 형양현
직업시인, 정치가
생애
시대당나라
가문농서 이씨
작품
대표 작품무제시

2. 생애

회주(懐州) 하내(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친양 시沁陽市) 사람으로, 아버지 이사(李嗣)는 당나라 황족이었지만 그 무렵에는 몰락하여 획가현의 현령(県令)이나 감찰사(監察史), 절도사(節度使)・자사(州刺史)의 막료 같은 지방관료로 지내고 있었다. 형양에서 태어난 이상은은 세 살 때 절강 소흥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왔다가 나이 10세에 아버지를 병으로 잃었고, 다른 두 동생과 여섯 명의 자매가 남아 있었다. 이상은은 아버지의 3년상을 마친 뒤 낙양으로 이주했다.[3]

당시 궁정 관료들은 우승유(牛僧孺)・이종민(李宗閔) 등을 중심으로 하는 과거 급제자 파벌과 이덕유(李徳裕)가 거느린 문벌 귀족 출신자 파벌로 나뉘어 정쟁을 벌이고 있었다. 우이의 당쟁이라고 불리는 이 정쟁 가운데, 우승유파의 중진이었던 흥원윤(興元尹) 산남서도절도사(節度使) 영호초(令狐楚)의 비호를 받아 837년에 26세로 진사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영호초가 그 해에 사망하고 이듬해에는 상급 시험에도 낙방하여, 다시 이덕유파였던 태원공(太原公) 왕무원(王茂元)의 부름에 응하여 그의 비호를 받게 되고 왕무원의 딸까지 아내로 맞아들였다. 839년에 왕무원의 천거로 문인관료로서는 가장 이상적인 자리로 선망받던 비서성(秘書省)의 교서랑(校書郎)이 되었지만, 우승유파는 예전 영호초의 비호를 받았던 이상은을 은혜를 저버린 배은망덕한 자로 몰아붙였다.[4]

결국 이상은은 양 파벌로부터 변절자로 몰려 혹독한 비판을 받으며 지방관리를 전전하면서 불행한 생애를 보냈다. 관직에 나선 그 해부터 중앙에서 내쳐져 홍농현(弘農県, 지금의 허난성 링바오현霊宝県 남쪽)의 현위로 지방에 부임하게 되었다. 이후 충무군절도사(忠武軍節度使)가 된 장인 왕무원의 장서기(掌書記)나 비서성의 정자(正字), 계관방어관찰장서기(桂管防禦観察掌書記), 관찰판관(観察判官) 검교수부원외랑(検校水部員外郎), 경조윤유후참군주서연조(京兆尹留後参軍事奏署掾曹), 무령군절도판관(武寧軍節度判官, 또는 장서기), 태학박사(太学博士), 동천절도서기(東川節度書記), 검교공부낭중(検校工部郎中), 염철추관(塩鉄推官) 지방관을 지냈으며 중앙에서도 실직(実職)은 얻지 못했고, 이나마도 가끔씩 사직하거나 면직되기도 했다. 842년에는 어머니가, 851년에는 아내 왕씨가 차례대로 세상을 떠났다.

858년, 염철추관을 다시 실직한 이상은은 향리로 돌아오던 도중에(혹은 돌아온 뒤에) 병으로 형양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47세였다.

3. 시의 특징

이상은의 시는 화려하고 관능적이며, 때로는 상징적이다. 특히 연애시에서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나는데, 이상은은 사랑에 빠진 남녀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여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는다.[27] 그는 '무제(無題)'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작품들을 포함해, 제목을 아예 짓지 않거나 시구에서 제목을 따오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를 통해 만당시의 유미주의적 경향을 더욱 추구하며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수법을 구사했고, 몽롱하면서도 환상적이고 관능적인 독특한 세계를 구축했다. 그의 시는 주로 '파국'으로 끝나는 '불륜'과 같은 순탄치 않은 연애, 감미로운 꿈과 같은 청춘의 기억을 주제로 다룬다. 내용은 몹시 슬프지만, 우아한 시구와 대구, 고전의 인용으로 장식하여 탐미주의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아름답고도 슬픈, 지극히 사적인 기억과 감회를 시로 승화시키는 것이 바로 이상은 시의 특징이다.

예로부터 시는 높은 뜻을 노래하는 데에 쓰였는데, 이상은이 문학적 스승으로 여겼던 두보에게서도 그러한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상은이 살았던 만당 시대는 이러한 경향을 용납하지 않았다. 궁궐 안에서는 당쟁으로 인한 정변이 끊이지 않았고, 아침에 재상이었던 사람이 저녁에 변방으로 유배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실권은 황제의 폐위와 옹립까지 좌우했던 환관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궁궐 밖에서는 군사권과 행정권을 장악한 유력한 절도사들이 국토를 나누어 차지하고 있는 것이 마치 전국시대와 같았다. 대당 제국은 사실상 일개 지방정권에 불과한 상태였다. 자신의 뜻이 아무리 높다 한들, 꽉 막힌 시대에 주변으로부터 백안시당하며 자신의 행적 때문에 박해받는 이상은은 전통적인 시의 방식을 외면하고 오로지 개인적인 미의 완성을 추구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뼛속까지 예술가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는 연애시가 우정을 그린 시보다 경시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상은은 많은 뛰어난 연애시 작품을 남겼다. 기녀나 아내를 향해 쓴 것으로 여겨지는 시들이 있으며, 그의 연애시는 한 사람을 위해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 통설이다.

이상은은 『수궁(隋宮)』, 『마외(馬嵬)』 등 역사에서 제재를 따온 영사시(詠史詩)나 영사시(詠事詩)에도 정평이 났으며, 장안(長安) 동남쪽 교외의 고대(高台)에서 읊었다는 『낙유원(楽遊原)』은 이상은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상은 시의 또 다른 기교적 특징은 벽전(僻典)을 많이 사용했다는 점이다. 제한된 글자 수 안에서 뜻을 표현하는 한시의 경우, 누구나 아는 에피소드 등에서 등장하는 인상적인 말을 써서, 원래 에피소드의 내용을 감상자들에게 떠오르게 함으로써 시의 내용을 부풀리는 기교를 사용하는데, 이를 전고(典故)라고 한다. 지식인 계급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에피소드, 예를 들면 경서(経書)나 《장자》(荘子), 《사기》(史記), 《한서》(漢書), 《삼국지》(三国志) 등에서 전고를 응용해야 했다. 그러나 이상은은 이러한 서적들뿐만 아니라 패사(稗史)나 소설(小説) 같은, 당대 지식인 계급이 손대서는 안 된다고 여겨지던 잡서에서도 전고를 끌어다 사용하였다. 이것이 시에 깊이를 주는 동시에 난해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상은이 시를 지을 때, 좌우에 많은 서적들을 늘어 놓고 참고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수달이 물고기를 잡아먹으면서 물고기를 눈앞에 나란히 놓고 제사 지낸 다음에 먹는다는 전설에 착안하여 이상은을 달제어(獺祭魚)라고 불렀다고 한다.

3. 1. 대표작

이상은의 시는 화려하면서도 관능적이며, 때로는 상징적인 특징을 지닌다. 특히 연애시에서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지는데, 이상은은 사랑에 빠진 남녀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여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는다.[27] '무제(無題)'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작품들을 포함하여, 제목을 짓지 않거나 시구에서 간단히 제목을 빌리는 방식을 통해 유미주의적 경향을 추구했다.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수법을 사용하여 몽환적이고 관능적인 독특한 세계를 구축했으며, 주로 '파국'으로 끝나는 '불륜'의 연애, 감미로운 청춘의 기억 등을 주제로 다루었다. 이러한 내용은 애수를 띠지만, 우아한 시구, 댓구, 고전 인용을 통해 탐미주의적 경지에 이른다.

이상은은 자신의 문학적 스승으로 두보를 존경했지만, 그가 살았던 만당 시대는 당쟁으로 인한 정변이 잦았고, 환관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절도사들이 국토를 나누어 통치하는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상은은 개인적인 미의 완성을 추구하는 예술가적 면모를 보였다.

『수궁(隋宮)』, 『마외(馬嵬)』와 같은 영사시(詠史詩)나 영사시(詠事詩)에도 뛰어났으며, 장안(長安) 동남쪽 교외의 고대(高台)에서 읊은 『낙유원(楽遊原)』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또한, 《수사동》(隋師東)이라는 작품에서는 한사군(漢四郡)을 두둔하고 고구려를 정벌하지 못한 (隋) 왕조를 비판하는 등 철저한 중국인의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28]

이상은의 시는 벽전(僻典)을 많이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한시는 제한된 글자 수 안에 뜻을 표현하기 위해 전고(典故)를 사용하는데, 이상은은 경서나 《장자》(荘子), 《사기》(史記) 등뿐만 아니라 패사(稗史)나 소설(小説) 같은 잡서에서도 전고를 끌어다 사용했다. 이는 시에 깊이를 더하는 동시에 난해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상은이 시를 지을 때 좌우에 많은 서적을 참고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를 '달제어(獺祭魚)'라고 불렀다. 이는 수달이 물고기를 잡아먹기 전에 늘어놓고 제사 지내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대표작 중 하나인 '금슬(錦瑟)'은 56자로 구성된 시로, 여러 이미지를 담고 있으며, 그의 경력에 대한 좌절, 사망한 아내에 대한 기념 등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15]

'''당시 삼백수'''에는 이상은의 시가 두보, 이백, 왕유 다음으로 많이 실려 있다. 이상은의 시는 사랑을 주제로 다루고, 제목을 붙이지 않는 파격적인 결정을 통해 주류 고시와 구별된다.[6][7]

다음은 이상은의 대표작 몇 가지이다.

이상은의 대표작
제목내용
금슬(錦瑟)56자로 구성된 시로, 여러 이미지를 담고 있으며, 그의 경력에 대한 좌절, 사망한 아내에 대한 기념 등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떨어지는 꽃잎 (낙화, 落花)(내용 필요)
무제 (무제, 無題)(내용 필요)


4. 역사적 배경

이상은이 살았던 당나라 말기는 정치,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의 정치 및 경제 구조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중앙 정부는 반군 장군들에게 군사 지사직을 허용하고 그들의 독립을 용인해야 했다. 또한, 북서쪽 토번의 침략은 수도에 끊임없는 위협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방 군사 지도자들은 세습 승계를 주장하며 황제의 권위에 반복적으로 도전했고, 이는 잦은 반란과 유혈 사태로 이어졌다. 더불어 환관들의 발호와 당쟁은 당나라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4. 1. 환관의 발호

당나라 조정이 환관들의 발호로 내부적으로 고통받고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환관 집단이 정치적 영향력을 처음 얻게 된 것은 고력사가 당 현종의 즉위를 도우면서부터였다.[5] 이후 이보국 역시 당 숙종을 즉위시키는 데 기여했다.[5] 왕실의 후원을 얻으면서 환관들은 점차 황제에 대한 개인적인 접근을 통제하고 중앙 정부의 업무에 참여하게 되었다.[5] 그들은 또한 지방 관직 임명에도 관여했으며, 때로는 황위 계승 분쟁에 무력을 동원하여 개입하기도 했다.[5] 이상은 시대에 이르러 황제들은 환관들이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도록 허용했다.[5] 현종 이후, 모든 당나라 황제(경종 제외)는 환관에 의해 즉위했다.[5]

황제들은 완전히 무력해진 채, 서로 다른 세력들을 이용해 균형을 맞추려 했다.[5] 이상은 사후 50년이 지나서야 군벌들의 도움으로 환관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었고, 이는 당나라의 멸망을 재촉했다.[5]

4. 2. 감로의 변

835년, 문종 치세에 감로의 변이 일어났다. 문종의 환관 제거 시도를 지지하기 위해 이순(재상)과 정주(봉상 절도사)가 계획한 궁정 쿠데타는 실패했다. 구사량이 이끄는 환관들은 많은 고위 관리들과 재상들의 일족을 학살했고,[5] 이 사건과 관련하여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살해되었다.[5] 통제 불능 상태로 권력이 커져가던 환관들은 이제 황제와 국정을 완전히 장악했다.[5]

4. 3. 우이 당쟁

당나라 궁정 관료들은 우승유, 이종민 등을 중심으로 하는 과거 급제자 파벌과 이덕유가 거느린 문벌 귀족 출신자 파벌로 나뉘어 정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를 우-이 당쟁이라고 불렀다. 이 당쟁은 목종, 경종, 문종, 무종, 선종 황제의 통치 기간 동안 조정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젊은 이상은은 우승유파의 중진이었던 령호초의 비호를 받아 837년 26세로 진사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그 해에 영호초가 사망하고 이듬해에는 상급 시험에도 낙방하여, 이덕유파였던 왕무원의 부름에 응하여 그의 비호를 받게 되고 왕무원의 딸과 결혼하였다. 839년 왕무원의 천거로 비서성의 교서랑이 되지만, 우승유파는 이상은을 배은망덕한 자로 몰아붙였다.

결국 이상은은 양 파벌로부터 변절자로 몰려 혹독한 비판을 받으며 지방관리를 전전하면서 불행한 생애를 보냈다.

5. 이상은과 신라

이상은의 시 가운데 '공자(公子)'라는 제목의 시는 신라(신라주)이 당나라에서 유행했음을 짐작하게 한다.[29]

이상은의 시 〈공자(公子)〉
원문해석
一盞新羅酒잔 가득히 신라 술 마시며
凌晨恐易消이른 새벽에 술기운 쉬이 사라질까 두려워한다.
歸應衝鼓半,저녁 북소리 한참이나 지나서야 돌아갔다가
去不待笙調생황 음 고르는 것도 기다리지 않고 다시 떠난다.
歌好惟愁和노래 좋아하지만 다만 화답하라 할까 근심하고
香濃豈惜飄향기 짙어도 어찌 향 날리는 것 아까워하리.
春場舖艾帳봄 사냥터에 가림막(艾帳)을 펴놓고
下馬雉媒嬌말에서 내리니 길들인 (雉媒)이 아양을 떤다.



이상은의 시 '공자'는 어느 귀한 집 자제의 무분별하고 무능한 삶을 묘사한 것이다. 시의 1-2구에서는 밤에 외국산 수입품인 신라주를 마시고 새벽에 그 술기운이 날아가 버릴 것을 걱정하는 모습을, 3-4구에서는 간밤의 술자리를 늦게야 파하고 돌아왔다가 이른 아침부터 생황 소리도 기다리지 않고 또 놀러 나가는 모습을 그렸다. 청나라 시인 굴복은 이러한 공자의 모습을 "성정이 무상하다(일정하지 않다)"고 평했다. 5-6구에서는 자신이 노는 곳에서 노래 듣는 것은 좋아해도 거기에 제대로 맞춰 화답할 줄을 모른다고 자신의 재주 없음을 드러냈고, 그러면서 향기가 진하도록 피워도 바람에 날아가버린 향을 아까워하지 않는다고 하여 사치스러움을 드러냈다. 7-8구에서는 밖으로 나가 꿩 사냥을 하는 모습을 그렸다.[29]

6. 후대의 평가 및 영향

이상은의 시는 화려하면서도 관능적이며, 때로는 상징적인 특징을 지닌다. 특히 연애시에서 그의 독특한 시풍이 잘 드러나는데, 사랑에 빠진 남녀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여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는다.[27] '무제(無題)'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작품들처럼, 제목을 짓지 않거나 시구에서 간단히 빌려오는 방식으로 제목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만당시의 유미주의적 경향을 반영하며,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수법을 통해 몽환적이고 관능적인 세계를 구축한 결과였다. 그의 시는 주로 파국으로 끝난 불륜, 감미로운 청춘의 기억 등을 다루며 애수 어린 정서를 담고 있지만, 우아한 시구, 댓구, 고전 인용을 통해 탐미주의적 경지로 승화시켰다.

이상은은 높은 뜻을 노래하는 전통적인 시의 방식에서 벗어나, 개인적인 미의 완성을 추구한 예술가였다. 그가 살았던 만당 시대는 당쟁으로 인한 정변이 잦았고, 환관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절도사들이 국토를 나누어 통치하는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상은은 자신의 뜻을 펼치기 어려웠고, 주변의 냉대 속에서 오직 개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상은은 역사에서 소재를 가져온 영사시(詠史詩)나 영사시(詠事詩)에도 뛰어났으며, 장안 동남쪽 교외의 고대(高台)에서 읊은 『낙유원(楽遊原)』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한편, 《수사동》(隋師東)이라는 작품에서는 한사군(漢四郡)을 옹호하고 고구려 정벌에 실패한 (隋) 왕조를 비판하는 등 철저한 중국인의 입장을 드러내기도 했다.[28]

이상은 시의 또 다른 특징은 벽전(僻典)을 많이 사용했다는 점이다. 한시는 제한된 글자 수 안에 뜻을 표현하기 위해 널리 알려진 에피소드에서 인상적인 말을 인용하는 전고(典故) 기법을 사용한다. 이상은은 경서(経書)나 《장자》, 《사기》, 《한서》, 《삼국지》와 같은 주류 서적뿐만 아니라, 당시 지식인들이 기피하던 패사(稗史)나 소설(小説) 같은 잡서에서도 전고를 끌어다 썼다. 이는 시에 깊이를 더했지만, 동시에 난해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상은이 시를 지을 때 많은 서적을 참고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를 수달이 물고기를 잡아 제사 지내는 전설에 빗대어 '달제어(獺祭魚)'라고 불렀다. 일본 메이지 시대의 문인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는 이 별호에서 따온 '달제서옥주인(獺祭書屋主人)'을 자신의 호로 사용했다.

관료로서는 불우했지만, 이상은의 시는 생전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백거이는 만년에 "죽어도 너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지며,[26] 같은 만당 시인 온정균과 당 멸망기의 한악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 5대 10국 시대 후촉의 위곡이 편찬한 『재조집』에는 이상은의 시가 많이 실려 있어, 그의 문학이 지속적으로 사랑받았음을 알 수 있다.

북송 초기에 이상은의 시풍은 크게 유행하여, 서곤체(西崑体)의 시조가 되었다. 양억, 전유연, 유균 등 조정 문관들이 중심이 되어 화답한 시를 모은 《서곤수창집》(西崑酬唱集)에서 유래한 서곤체는 이상은의 시풍을 모방하여 수사와 상징적 수법을 특징으로 했다. 그러나 북송 중기에 구양수매요신 등의 비판을 받아 배척되었다. 이후 왕안석은 이상은의 시에 두보와 같은 깊은 인간 통찰이 담겨 있으며, 화려한 표현 뒤에는 진실된 인격이 엿보인다고 평가했다. 오늘날 이상은에 대한 평가는 왕안석의 설에 영향을 받고 있으며, 온정균과 함께 '온이(温李)', 두목과 함께 '소이두(小李杜)'로 불린다.

7. 한국어 번역

이지운 교수와 김준연 교수가 공동으로 이상은의 시집을 번역해 전 3권으로 출간했다. 출판사는 학고방이다.[22][12][23]

'''비단 비파 (금슬, 錦瑟)'''

錦瑟無端五十弦,

一弦一柱思華年。

庄生曉夢迷蝴蝶,

望帝春心托杜鵑。

滄海月明珠有淚,

藍田日暖玉生煙。

此情可待成追憶,

隻是當時已惘然。|뜻밖에도 비단 비파는 오십 현을 지니고,

각 현, 각 기둥은 화려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네.

장주의 새벽 꿈, 나비에 홀리고,

망제의 봄 마음은 뻐꾸기에 깃들었네.

푸른 바다에 달이 밝으니 구슬에 눈물이 있고,

남전은 해가 따스하니 옥에서 연기가 피어나네.

이 마음은 기억이 되기를 기다릴 수 있지만,

그저 그 당시에는 이미 멍하니 잊혀졌네.중국어

— 스티븐 오웬 번역

나는 왜 이 화려한 비파가 오십 현을 가졌는지 궁금하네

모든 현, 모든 기둥은 그 영광스러운 봄을 연상시키네

현자는 나비의 꿈에서 깨어나 혼란스러워하네

왕처럼 뻐꾸기에게 내 영원한 마음을 맡기네

달은 푸른 바다에서 눈물 방울의 진주를 적시네

해는 남산의 빛나는 옥을 비추네

이런 감정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네

하지만 나는 이미 그 순간에 길을 잃었네영어

— 리엔 W.S.와 푸 C.W.의 번역

'''떨어지는 꽃잎 (낙화, 落花)'''

高閣客竟去, 小園花亂飛。

參差連曲陌, 迢遞送斜暉。

腸斷未忍掃, 眼穿仍欲歸。

芳心向春盡, 所得是沾衣。|

높은 누각의 손님은 결국 떠나가고,

작은 정원에는 꽃잎이 어지럽게 날리네.

구불구불한 길에 들쑥날쑥 이어지고,

멀리 저무는 햇살을 보내네.

애가 끊어져 차마 쓸어낼 수 없고,

눈이 빠져라 기다리며 돌아오기를 바라네.

향기로운 마음은 봄과 함께 다하고,

남은 것은 옷자락을 적시는 눈물뿐.중국어

— 위터 바이너 번역

'''무제 (무제, 無題)'''

相见时难别亦难,东风无力百花残。

春蚕到死丝方尽,蜡炬成灰泪始干。

晓镜但愁云鬓改,夜吟应觉月光寒。

蓬山此去无多路,青鸟殷勤为探看。|

만나기는 어렵고 헤어지기도 어려워라

봄바람 힘없이 백화는 시들어 가네

봄 누에는 죽을 때까지 실을 토하고

촛불은 재가 되어 눈물이 마르네

아침 거울에 수심 어린 구름 같은 머리

밤에 읊조리니 달빛이 차갑게 느껴지네

봉래산 가는 길 멀지 않으니

청조가 부지런히 소식 전해주오.중국어

참조

[1] 논문 Pseudo-Pseudotranslation: On the Potential for Annotation in Translating Li Shangyin / 李商隱英譯本中的注釋 2016
[2] 웹사이트 Li Shangyin https://www.nyrb.com[...] 2023-10-30
[3] 문서 1977
[4] 웹사이트 The art of allusion in Li Shangyin https://tspace.libra[...] 1997
[5] 논문 Li Shangyin and the Art of Poetic Ambiguity https://journals.uni[...] 2024-09-20
[6] 문서 1977
[7] 문서 1977
[8] 문서 2008
[9] 문서 1977
[10] 학위논문 A Failure to Communicate: Li Shangyin's Hermetic Legacy 2015-05-31
[11] 논문 Liu, "The Poetry of Li Shang-yin: Ninth-Century Baroque Poet" (Book Review) 1969-Fall
[12] 서적 Tang poems revisited: a choice selection in English EPB Publ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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