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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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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서는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1580년에 태어나 1637년 병자호란 중 사망했다. 효령대군의 후손으로, 어려서 성혼과 김장생에게 학문을 배우고 1603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냈다. 광해군 시절 남포 현감을 지냈으나 탄핵으로 파직되었고,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 1등에 녹훈되고 호조판서에 올랐다. 이괄의 난 이후 경기도 관찰사, 어영대장, 총융청사를 역임하며 남한산성 수축과 군비 강화에 힘썼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과로로 사망했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화포식언해》 등이 있으며, 국방력 강화에 기여했다.

2. 생애

1580년 11월 22일 경기도 양주군 별비면 고산리(현 의정부시 고산동)에서 조선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7대손으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의 장군이자 영의정 완녕부원군 이경록이다. 어려서 우계 성혼에게서 성리학을 배웠고, 임진왜란 후에는 사계 김장생의 제자가 되었다.

1603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이항복의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1611년 남포현감이 되었으나, 사헌부로부터 형벌이 가혹하고 간통했다는 이유로 탄핵받고 파직되었다. 이후 양주군 청송면 대탄(현 연천군 한탄대교 부근)으로 내려가 빈곤하게 살았다. 복직 후 포도청 종사관, 장련현감, 곡산군수, 진도 군수 등을 역임했다. 1617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여 북인의 미움을 사 장단부사로 좌천되었다. 1618년 어머니 상을 당해 3년상을 치렀다.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 1등에 책록되고, 호조판서에 올라 대동법 시행을 건의했다. 1624년 이괄의 난 때는 부원수로 출정했으나, 이괄 군의 기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백의종군 후 복직되었다. 총융사가 되어 남한산성 수축을 건의, 1년 만에 완공하였다. 삼혈총과 조총 등의 제조를 건의하여 화포 제작과 화약 기술을 발전시켜 국방력 강화에 힘썼다.

1625년 병조판서를 거쳐 어영대장이 되었고, 1628년에는 형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훈련도감, 원유사 등을 겸직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했으나, 1637년 1월 남한산성 공성전 중 과로와 중풍으로 사망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남한산성 온조왕 묘 사당과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1652년 충정(忠定)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2. 1. 초기 활동

1580년 11월 22일 경기도 양주군 별비면 고산리(현 의정부시 고산동)에서 출생하였다. 조선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7대손으로, 증조부는 풍덕군수 증 병조판서 이광윤이고, 할아버지는 오위장과 의흥위부호군을 지내고 병조판서와 좌찬성에 거듭 추증된 이간이며,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의 장군이자 제주목사, 영의정 완녕부원군 이경록이고, 어머니는 덕수 이씨(德水李氏)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이학증(李學曾)의 딸이다. 자는 인숙(寅叔), 임숙(任叔), 인숙(仁叔), 호는 월봉(月峰)이다.

부인은 해남 윤씨로 윤서중(尹瑞中)의 딸이다. 부인 해남윤씨에게서는 딸 1명을 두었는데, 딸 전주이씨는 채유후에게 시집갔다가 자녀 없이 일찍 죽었다. 양주 고산리 출신으로, 오도일이 쓴 신도비문에 의하면 후일 잠시 양주 청송면 대탄 근처에서도 살았다 한다.

아버지 이경록은 무과에 급제하여 군공으로 당상관에 올라 집안을 다시 일으켜세웠다. 형 이도(李悼)는 문과에 급제하여 첨정을 지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과거 합격이 취소되고 삭방되었다. 삼촌 이경유는 무관으로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다. 어려서 우계 성혼에게서 글과 성리학을 배웠고, 임진왜란 종전 직후 성혼이 사망하자, 그의 제자이자 수제자였던 사계 김장생의 문하생이 되어 글을 배웠다. 그는 독서를 좋아했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2. 2. 광해군 시절

1603년(선조 36) 의위(義衛)로 재직 중, 정시(庭試) 무과에 병과(丙科) 38등으로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얼마 뒤 도체찰사 이항복의 체찰사부 비장(裨將), 종사관이 되었다. 이후 행사용(行司勇) 등을 지냈다. 종사관으로 재직 중 부장 고대근(高大根)과 함께, 연식(輦飾)을 훔친 도적 심사룡(沈士龍) 등 3명을 추격, 체포하여 모두 전형(典刑)을 가하였고, 인신(印信)을 위조한 도적 홍언방(洪彦邦) 등도 체포하였다.

1611년(광해군 3) 1월 이항복의 천거로 남포현감이 되었는데, 이항복은 그가 큰 그릇이 될 것으로 봤다고 한다. 1611년 3월 22일 남포현감 재직 중 사헌부로부터 형벌이 엄하고 가혹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고, 사저봉고(私儲封庫)를 칭탁하고 근무지에 사는 재물과 미색이 있는 평민 과부의 집을 왕래하다 간통했다 하여 탄핵을 받고[2] 파직되었다. 그해 4월 탄핵으로 파직되자 그는 양주군 청송면 대탄(大灘, 현 경기도 연천군 한탄대교 부근)으로 내려가 우거하였다. 이때 그는 가세가 매우 가난했다 한다.

그 뒤 복직하여 포도청 종사관이 되었다가 도적들을 체포하여 형조로 넘겼다. 1612년(광해군 4년) 3월 10일 장련현감(長連縣監)이 되고, 이후 도적 체포의 공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진되고, 황해도관찰사의 인사고과(考課)에서 최상(最上)을 받아 바로 1615년 1월 29일 곡산군수(谷山郡守)로 부임하였다. 지방관 근무 중 삼가지 않은 일이 많다며 사간원의 논계를 당하기도 했으나 광해군이 이를 무마시켰다. 이듬해 6월 호랑이를 잡은 공으로 가선대부로 가자되었다. 이후 행 사용, 진도 군수(珍島郡守)를 거쳐 비변사 낭청이 되었다. 당시 명나라에서 병사들을 징발하다가 병력 부족으로 요심역(遼瀋役)으로 사람을 보내 조선인 군사를 징발하려 하자,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때의 5만 군사를 파병받은 일 때문에 쉽게 거절 못하고 어렵게 여겼다. 이때 그가 앞장서서 명나라에 보내는 봉장(封章)을 올려 형편이 어려우니 양해를 바라는 자문을 써서 명나라로 보내, 이후로 조선인 병사 징발 요청은 사라졌다.

1617년(광해군 9년)부터 북인 대북파에서 인목대비의 폐모론을 주관하자 이에 반발, 정청(庭請)에 불참하였는데 무인으로서 정청에 불참한 사람은 이서가 유일하였다. 그는 인목대비 폐모론에 적극 반대하였다가, 인목왕후가 서궁에 유폐된 뒤 대북파의 눈밖에 나서 중형을 받을 뻔했으나, 우연히 화를 면하고 장단부사로 좌천되었다. 이때 그가 어머니 덕수이씨에게 "국모를 폐출하라고 청하는 것은 진실로 차마 하지 못할 일이나 참여하지 않으면 화 또한 참혹할 것이니 어찌하옵니까?"하고 아뢰니, 덕수이씨가 "너의 뜻이 어떠한가? 나에게 구애되지 말라."하여, 그가 마침내 폐비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한다. 1618년 봄 어머니 덕수이씨의 상을 당해 사직, 3년상을 마쳤다.

1618년부터 신경진(申景禛) 등이 그를 찾아왔다. 1621년 장단부사로 복직, 그 뒤 장단부사로 재직 중 경기방어사를 겸하였고, 1622년(광해군 13) 당시 조정의 대립과 혼란에 염증을 느껴 개탄했다 한다.

2. 3. 인조 반정과 이괄의 난

1623년(광해군 15) 이귀, 김류 및 사촌 이기축 등과 정변을 모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이귀, 김류에게 당시 황해도관찰사로 있던 먼 친척 이명을 살려줄 것을 부탁하였고 약속받았다. 이서는 친척 황해감사 이명에게 가서 반정에 가담할 것을 권고했지만, 이명은 이를 거절하였다. 대신 이명은 조정에 그가 다녀간 것, 그가 정변을 기도한다는 것을 알리지 않았다.[1]

1623년 3월 13일 은평 영서역으로 들어온 사촌 이기축의 군대가 창화문으로 내습한 뒤 광해군 일가를 사로잡았다. 반정이 성공하고 광해군이 인목대비의 폐위교서 발표 후 인조가 즉위하였으며, 주변에서 호위하였다. 인조 즉위 직후 광해군 폐출과 정변을 지원한 공로로 분충찬모입기명륜정사공신(奮忠贊謨立紀明倫靖社功臣) 1등에 녹훈되고, 이후 호조판서에 승진되고 완풍군(完豊君)에 봉군되었다. 호조판서가 되어서는 호조의 사무가 매우 많고 어지러웠으나, 엄하게 다스리고 해결하니 교활한 아전이 잔머리를 굴리지 못하였다.[1] 호조판서 재직 중, 당시 재상 이원익이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3개 도에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는 이원익의 주장에 적극 동의하여 대동법의 시행을 확산시켰다. 그러나 이괄의 난 이후 기근, 교통 시설 손실 등의 이유로 세금을 절반만 걷게 했다가 도리어 반쪽짜리 대동법이라고 시중의 야유를 듣게 됐다.[1]

1624년(인조 2)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다가 같은 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 한명련 등이 거병을 일으켜, 반란이 발생하자 원수부 부원수(副元帥)로서 출정, 이괄군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개성까지 이괄군을 추격했지만 여건이 되지 않아 더 나가지 못하고 요해처에 들어가 지체했는데, 오히려 밤에 이괄군의 기습을 당하기도 했다. 더 나가지 못해, 반란군을 추격하다가 중간에 멈춘 죄로 간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곧 인조의 명으로 백의종군의 명이 내려졌으나 얼마 뒤 인조가 특별히 용서하여 다시 서용되고, 완풍군에 다시 봉해졌다.[1]

2. 4. 성곽 수축과 군비 강화

1624년(인조 2) 총융사가 되어 남한산성 수축을 건의, 왕의 허락을 얻어 기술자와 장정을 선발하여 1년 만에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성곽 공사를 완료했다. 그는 남한산성을 답사하고 인조에게 "백제 시대에 남한(南漢)에 도읍을 세우고 지키어 적이 감히 엿보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형승지(形勝地)입니다. 청하건대 이곳에 성을 쌓아 경도(京都)의 방패가 되게 하소서."라고 건의하였다. 그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남한산성 개보수 공사가 진행되었다.

총융청사로 재직하면서 삼혈총과 조총 등의 제조를 건의, 인조의 허락을 받아 직접 제작에 참여하였다. 화포 제작과 화약 굽는 기술을 알고 있던 그는 총기류를 다량 생산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인조는 이서의 총기 제조 및 전쟁 준비 노력을 높이 평가하여 경연 특진관으로 삼아 국방, 군사 문제에 대해 항상 자문하였다.

이후 비변사 당상, 1625년 병조판서를 거쳐 다시 어영대장이 되었다. 정묘호란 직후 1628년(인조 6) 형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훈련도감, 원유사, 사복시, 군기시 제조를 겸직하고 판의금부사 직도 모두 겸직하였다.

2. 5. 병자호란과 최후

1636년 병조판서로 재직 중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어영청 제조로 인조를 호종하여 인조와 왕실을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성을 방어하던 중 그의 병이 짙어지자 인조원두표를 총융청 부사로 임명하여 그의 업무를 일부 나눠서 보게 했다.[3]

1637년 1월 청나라군이 남한산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홍타이지가 항복을 재촉했지만 거절하였다. 남한산성 공성전 중에 그는 출병을 준비하다가 과로로 대풍(大風)에 걸려 쓰러졌다. 그러나 제대로 진료를 받지도 못하고, 성중의 막사에서 중풍과 과로로 성 안에서 죽었다. 그가 사망하기 6일 전 작은 별이 남한산성 안으로 떨어지자 사람들이 놀라 불길하게 여기거나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는 죽어가면서 사위 채유후(蔡裕後)에게 '내가 죽어도 한이 없으나 눈을 감을 수 없는 것은 패전하여 당한 잊을 수 없는 치욕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최종 관직은 보국숭록대부 완원부원군 겸 판의금부사 병조판서였으며, 당시 향년 57세였다.[3]

그는 직접 경기도 광주 남한산을 답사하고 산의 형세를 살핀 후, 백제 온조왕이 이곳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 남한산성이 좋은 요새였기 때문이며, 백제가 고구려와의 전투 시 이 곳을 빼앗기지 않은 점을 들어 남한산성의 수축과 개보수를 인조에게 적극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사후 바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가 죽자 인조는 통곡했는데, 그 소리가 밖으로까지 들렸다고 한다. 인조는 의복과 명주를 하사하여 염습하게 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하였으며, 조회를 철조하고 부의와 예장을 지원하고 치제하였다. 또한 삼 년 동안의 제전(祭典)에 필요한 것을 모두 지원하였다. 임시로 남한산성 내에 매장했다가 1637년 4월 양주 선산으로 이장하였다.

남한산성의 온조왕 묘(溫祚王廟) 사당에 배향되고, 인조 사후 종묘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당초에는 종묘 제향 공신에 빠져 있다가 이서 역시 배향해야 한다는 여론이 나오면서 효종이 재논의 끝에 허락하여 종묘에 배향된 것이다. 효종 즉위 후 1652년(효종 2년) 이경석(李景奭)의 시장(諡狀) 상소로 충정(忠定)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3. 저술 활동

4. 평가

이서는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 1등에 녹훈되고 호조판서가 되었으며, 이원익의 주장에 동의하여 대동법 시행을 확산시켰다. 또한 총융청사로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삼혈총과 조총 등의 제조를 건의하여 인조의 허락을 받았다. 화포 제작과 화약 굽는 기술을 직접 알고 있던 그는 화포, 총기류 제작에 직접 참여하였으며, 인조는 이서의 총기 제조와 전쟁 준비를 높이 평가하여 경연 특진관으로 삼아 국방, 군사 문제에 항상 참여시키고 자문하였다.[1] 평소 남한산의 산세와 지형을 확인한 이서는 백제고구려와의 전투 시 혹은 외부의 침입을 대비해서 이곳을 도읍으로 삼은 것을 알고, 인조에게 남한산성 수축을 건의하였다.[1]

그러나 이괄의 난 때 초기 대응이 미흡했고 적극적으로 추격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개성까지 이괄군을 추격했지만 여건이 되지 않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요해처에 머물렀는데, 오히려 밤에 이괄군의 기습을 당하기도 했다.[1] 반란군을 추격하다가 중간에 멈춘 죄로 간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1]

4. 1. 긍정적 평가

인조반정으로 정사공신 1등에 녹훈되고 호조판서가 된 이서는 이원익의 주장에 적극 동의하여 대동법 시행을 확산시켰다. 1624년 이괄의 난 때는 부원수로 출정했으나, 반란군을 중간에 멈춘 죄로 탄핵을 받았다가 백의종군 후 복직되었다.[1]

이후 총융청사(摠戎廳使)로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삼혈총과 조총 등의 제조를 건의하여 인조의 허락을 얻었다. 화포 제작과 화약 굽는 기술을 직접 알고 있던 그는 화포, 총기류 제작에 직접 참여하였다. 인조는 이서의 총기 제조와 전쟁 준비를 높이 평가해 경연 특진관(經筵特進官)으로 삼아 국방, 군사 문제에 항상 참여시키고 자문하였다.[1]

남한산(南漢山)의 산세와 지형을 평소에 확인한 이서는, 백제고구려와의 전투 시 혹은 외부의 침입을 대비해서 이곳을 도읍으로 삼은 것을 알고, 인조에게 남한산성 수축을 건의하였다. 인조는 그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경연 특진관으로 삼아 국방 문제를 항상 상의하였다.[1]

4. 2. 부정적 평가

이괄의 난 때 초기 대응이 미흡했고 적극적으로 추격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괄군을 개성까지 추격했지만 여건이 되지 않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요해처에 머물렀는데, 오히려 밤에 이괄군의 기습을 당하기도 했다.[1] 반란군을 추격하다가 중간에 멈춘 죄로 간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1]

5.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증조부이광윤(李光胤)풍덕군수 역임, 증 병조판서
조부이간(李幹)오위장, 의흥위부호군 역임, 병조판서와 좌찬성에 추증
아버지이경록(李慶祿)제주목사 역임, 임진왜란 때의 장군, 영의정 완녕부원군
어머니덕수 이씨(德水李氏)사헌부 감찰 이학증(李學曾)의 딸
서모이름 미상
이탁(李晫)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 역임
형수한산 이씨(韓山李氏)이경익(李慶翼)의 딸
서형수이름 미상형 이탁의 첩, 이만적의 생모
서조카이만적(李萬敵)
동생이흔(李昕)요절
누나전주 이씨(全州李氏)
매형황영중(黃瑩中)직장(直長) 역임
누나전주 이씨(全州李氏)
매형정지담(鄭之聃)
누나전주 이씨(全州李氏)
외조카딸정씨채유후(蔡裕後)의 처
매형이의배(李義培)
외손자이목(李木)
전주 이씨(全州李氏)
사위유준(柳浚)주부(主簿) 역임
이복동생(서제)이호(李日+戶)권관 역임
부인해남 윤씨(海南尹氏)윤단중(尹端中)의 딸
전주 이씨(全州李氏)
사위채유후(蔡裕後)


  • 아들이 없어 먼 친척인 이량의 손자 호조판서 좌찬성 이명(李溟)의 아들 이민백(李敏白)을 양자로 입양하였다.
  • 딸 전주 이씨는 채유후(蔡裕後)에게 시집갔지만 자녀 없이 일찍 죽었다.[4] 채유후(蔡裕後)는 다시 이서의 매형인 정지담의 딸, 이서의 외조카딸과 재혼하였다.[5]

참조

[1] 문서
[2] 사료 "사헌부에서 임숙영의 용납과 남포 현감 이서의 포학을 논하니 이서를 파직하게 하다" 광해군일기 1611-03-22
[3] 웹인용 완풍 부원군 이서의 졸기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1637-01-02
[4] 문서 이서 신도비문
[5] 문서
[6]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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