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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쿠라 시게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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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타쿠라 시게노리는 에도 시대의 무사로, 이타쿠라 시게마사의 장남이다. 그는 오고쇼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를 알현하고, 시마바라의 난에 참전하여 아버지의 전사 후 가독을 상속받아 미조노번의 번주가 되었다. 이후 오사카 성주, 로주, 교토 쇼시다이를 역임하며 도쿠가와 막부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유학을 장려하고, 재판에 신중을 기하는 등 뛰어난 통치력을 보여 '괴물'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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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쿠라 시게노리
기본 정보
이타쿠라 시게노리 초상 (이타쿠라 온고회 소장)
시대에도 시대 전기
출생1617년 11월 22일
사망1673년 7월 13일
관위종4위 하・주수우、내선정
주군도쿠가와 히데타다이에미쓰이에쓰나
막부에도 막부오사카 정번、노중、교토 소사대
미카와후코즈 번 번주 → 나카지마 번 번주 → 시모쓰케가라스야마 번 번주
씨족이타쿠라 씨
부모아버지: 이타쿠라 시게마사、어머니: 하야시 요시사다 딸
형제시게노리、시게나오、오가사와라 마사노부 정실、미조구치 노부카쓰 정실
배우자고이데 요시치카 4녀
자녀시게요시、시게즈미、시게타네、다카기 마사모리 정실、마쓰다이라 지카요시 계실、소마 사다타네 정실、오우메(사가라 요리후쿠 정실)、양자:나카노인 미치시게 정실와키자카 야스무라 실
관직 경력
후코즈 번 (이타쿠라 가문) 번주 대수2대
후코즈 번 (이타쿠라 가문) 번주 임기 시작1639년
후코즈 번 (이타쿠라 가문) 번주 임기 종료1639년
후코즈 번 (이타쿠라 가문) 번주 후임폐번
미카와 나카지마 번 (이타쿠라 가문) 번주 임기 시작16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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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스야마 번 (이타쿠라 가문) 번주 후임이타쿠라 시게타네
교토 쇼시다이 대수5대
교토 쇼시다이 임기 시작1668년
교토 쇼시다이 임기 종료1670년
교토 쇼시다이 전임마키노 지카시게
교토 쇼시다이 후임나가이 나오쓰네
기타 정보

2. 생애

이타쿠라 시게노리는 이타쿠라 시게마사의 장남으로 태어나, 1637년 시마바라의 난에 아버지와 함께 참전했다. 이듬해 아버지가 전사하자 가독을 상속받아 미조노번의 번주가 되었다. 이후 오사카성 성주, 로주, 교토 쇼시다이 등을 역임하며 에도 막부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2][3][4]

1638년 시마바라의 난 당시 하라성 공격에서 공을 세웠으나 군령 위반으로 근신 처분을 받기도 했다.[3] 1660년 오사카 정번이 되어 1만 석을 추가로 받았고, 1665년에는 로주에 취임하여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를 보좌했다.[4] 1668년부터 1670년까지 교토 쇼시다이로 재직하며 조정과 막부 사이의 관계 개선에 힘썼으며, 1670년 다시 로주로 복귀했다.[1] 1672년 시모쓰케국 가라스야마번으로 이봉되었으며, 가라스야마성 정비에 힘썼다. 1673년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

2. 1. 가독 상속

이타쿠라 시게마사의 장남이다.[1] 간에이 5년 오고쇼 도쿠가와 히데타다에도 막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를 알현했다. 간에이 11년 2월 29일 종5위 하 주수에 서임되었다.[2]

간에이 14년 시마바라의 난 때 아버지와 함께 시마바라에 출진했다. 간에이 15년 1월 1일 아버지가 전사했고, 2월 27일 조상(弔い) 전투를 위해 히젠 사가번나베시마 가쓰시게 군세와 함께 하라성으로 쳐들어갔다. 2월 28일 책(柵)을 부수고 창을 맞대며 전공을 세웠지만, 군령 위반으로 그해 12월 30일까지 근신 처분을 받았다. 간에이 16년 6월 15일 가독을 상속받아 미조노번 번주가 되었다.[3] 이때 동생 시게나오에게 5000석을 분여하고 번청을 미조노에서 나카지마로 이전했다.[2]

2. 2. 막부 중추 역할

이타쿠라 시게노리는 오사카성의 성주를 거쳐[2] 로주가 되었다.[3] 1665년부터 1668년까지 로주로 재직한 후 에도를 떠나 교토로 갔다.[4]

1668년 7월 19일부터 1670년 4월 3일까지 제4대 교토 쇼시다이로서 쇼군의 수도 대표로 활동했다.[1] 1670년부터 1673년까지 두 번째 로주 임기를 위해 에도로 복귀했다.[4] 도쿠가와 막부에 봉사한 공로로 후코즈와 미카와나카지마에서 연이어 포상을 받았으며, 1672년 시모츠케국 가라스야마의 다이묘가 되었다.[2]

만지 3년(1660년) 11월 22일 오사카 정번에 임명되어 1만 석을 추가로 받았다. 간분 4년(1664년) 4월 5일 영지 주인장을 받았고, 이듬해인 간분 5년(1665년) 12월 23일 로주에 취임, 27일 종4위하에 서위되었다. 이는 로주 수좌(이후 오로지) 사카이 다다키요가 발탁한 인사로 여겨지며, 다다키요 등과 함께 병약한 제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를 보좌했다. 간분 6년(1666년) 7월 28일에는 2만 석을 추가로 받았다.

간분 8년(1668년), 마키노 치카나리가 퇴임하자 후임 교토 쇼시다이(정확히는 임시직)로 전임되었다. 이는 조부 이타쿠라 가쓰시게와 백부 이타쿠라 시게무네가 2대에 걸쳐 교토 쇼시다이를 역임한 실적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교토 쇼시다이 취임과 함께 직무 재편성이 이루어져 교토 마치 부교가 성립되었고, 민사 소송은 교토 쇼시다이의 직무에서 분리되어 교토 마치 부교로 이관되었다. 이후 교토 쇼시다이는 정치, 교토 마치 부교는 교토 민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교토 쇼시다이 재임 중 조정과 막부의 관계 개선에 힘썼다.

같은 해, 조정에서 두 명의 여종을 둘러싼 세력 다툼이 벌어졌다. 레이겐 천황이 총애하던 보조노 덴시와, 산조니시 사네토미가 추천한 니시노토인 토키요시의 딸, 두 사람이 임신한 것이다. 천황의 후계자 다툼을 포함한 이 대립에서 사네토미는 타우치노 코지노 츠보네를 뇨고와 같은 대우로 하고, 그녀가 낳은 황자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레이겐 천황은 사네토미를 배척하고자 오구라 사네모리를 통해 나카노인 토시모치에게 밀명을 내렸다. 시게노리는 토시모치와 함께 천황을 간언하여 사네토미 배척을 단념시켰다. 쇼군 이에쓰나의 신임이 두터운 사네토미를 배척하기 어려웠고, 태어날 아이의 성별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간분 9년(1669년) 2월과 3월에 태어난 두 아이는 모두 황녀였고, 천황과 측근, 토시모치, 시게노리 등 사이에 기청문이 오가며 수습되었다. 막부는 궁중 내부 통제의 필요성에 직면, 간파쿠 타카츠카사 후사스케의 여동생 타카츠카사 후사코를 입내시키려 했으나, 천황의 본의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8월 14일에는 사네토미를 배척하라는 요구와 함께,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양위하겠다는 압박까지 가해왔다. 결국 시게노리는 사네토미에게 칩거를 명했다.

교토 쇼시다이 시절 시게노리에 대해, 『오구소』(권 제74)에는 "내선(시게노리)이 교토 서민들의 사치는 규제했지만, 공가 문적의 유흥은 문제 삼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레이겐 천황과 무가 덴소 사이의 갈등, 공가에 의한 추문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조정 내부 상황이 심각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노중에서 교토 쇼시다이로 이례적인 인사가 단행되었고, 시게노리는 문제 해결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천황에게 조정의 여러 문제에 대해 숨김없이 의견을 제시하고, 상담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응하며, 막부 노중과의 협의를 제외하고는 쇼시다이가 일절 내용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기청문을 양녀의 남편 나카노인 토시모치에게 전달하여 함께 조정 개혁에 나설 것을 맹세했다(『나카노인 문서』). 노중 복귀 후에는 천황의 무가 덴소 오기마치 사네토요 파면 요구를 인정하는 대신 토시모치를 후임 덴소로 삼았다. 또한 막부에 요청하여 조정과 막부의 교섭은 앞으로 쇼시다이와 무가 덴소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도록 하고, 제3자가 관여하지 않도록 하는 막부 각서(간분 9년 2월 9일자)를 얻어, 천황 측근 공가와 고케키라 요시히사를 조막 교섭에서 배제했다. 그 결과, 노중(이타쿠라 시게노리) - 교토 쇼시다이(나가이 나오츠네) - 무가 덴소(나카노인 토시모치·히노 히로스케) - 조정(레이겐 천황 및 원·공가 문적)이라는 조막 교섭 루트가 일원화됨과 동시에, 공가의 불상사에 대한 막부·소지다이에 의한 처분에 대한 관여가 이루어졌다. 막부에 의한 조정 통제가 이루어져 조정 내부 공가 통제의 원활화가 이루어졌다. 고미즈노오 법황·토후쿠몬인에 의한 궁중 뇨보슈 통제를 이해함으로써, 이후 막부는 이 방침에 따라 궁중 통제도 진행해 갔다.

교토 쇼시다이를 역임한 조부, 백부, 그리고 시게노리가 관여한 것으로 추정되는 재판 설화는 『이타쿠라 정요』 권6~10에 실려 있다. 시게노리의 재판은 6화(또는 7화)가 게재되어 있으며, 권8에는 사기로 사형에 처해진 화가 야마모토 유가와 그의 아들이자 유학자인 야마모토 타이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은 교토 쇼시다이 직무인 음미 선(음미 = 형사 재판)이었으며, 허구에 가까운 『이타쿠라 정요』에서 몇 안 되는 실화로 확인되는 사건이다.

『이타쿠라 정요』 권8에 따르면, 유가는 타이준의 결혼을 위해 집 수리를 계획했지만, 돈이 부족하여 친구에게 사기를 부추김받았다. 나가사키에서 들어오는 생사의 가짜를 만들어 전당포에서 돈을 받고 집 수리에 사용한 후, 결혼 지참금으로 가짜 실 짐을 사들이는 제안을 받았다. 이야기에 넘어간 유가는 가짜 실 짐으로 전당포에서 돈을 받았지만, 수리 과정에서 결혼 이야기가 깨지고 지참금이 없어지면서 가짜 실 짐을 사들일 수 없게 되었다. 전당포가 사기를 눈치채고 시게노리에게 고소하자, 유가 부자는 소환되어 견벌(본보기)로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간분 9년 10월 14일 유가 부자와 공범 4명이 교토 시내를 끌려다닌 끝에 아와타구치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진 사건은 당시 사람의 일기 『코마 헤이스케 일기』, 『기슈 번 이시바시 가 가승』에 기록되어 있다.

1670년(간분 10년), 다시 노중에 복귀했다. 이듬해 간분 11년(1671년 2월 10일), 막부로부터 가즈사야마베군(토킨시)의 카미주쿠, 타니, 이와사키, 신주쿠(=헤다카타무라), 타마, 토요나리의 후타마타 지역을 하사받았다. 같은 해 3월, 츠키방 노중으로서 다테 소동 재정에 임하여 다테 무네시게, 시바타 아사오, 하라다 무네스케 등 당사자들을 자택에 불러 동료 츠치야 카즈나오와 심문했지만, 심의 장소인 다다키요 저택에서 무네스케가 아사오, 무네시게를 살해하고 타다키요 가신에게 살해당하는 결말이 났다. 심의는 중단되었고, 조정과의 관계는 계속 이어져 나가이 나오타케, 나카인 미치시게 등과 협력하여 천황이나 공가의 불상사에 대한 상담에 응했다.

간분 12년(1672년) 6월 3일 시모츠케 카라스야마번으로 5만 석에 이봉되었다. 이는 시마바라의 난 전공, 오사카성 낙뢰 당시의 처치, 교토 쇼시다이 근무 공적 등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2. 3. 평가 및 일화


  • 유교를 좋아하여 하야시 가호에게 높이 평가받았으며, 자택에서 대학, 소학, 춘추 등의 강설을 정기적으로 했다.[1][2]
  • 시마바라의 난에서 아버지가 전사하자, 직후의 총공격에서 복수전을 하여 공을 세웠지만, 군령 위반으로 처벌받았다. 하지만 역전의 명장인 미즈노 가쓰나리 등은 그 군공을 칭찬하며 나기나타를 보냈다고 한다.[3]
  • 사카이 다다키요가 다이로가 되어 "게바 장군"이라고 불리며 권세를 휘두르자, 많은 막료들은 다다키요에게 아첨하려 했지만, 시게노리는 초연했다. 이 때문에, 오히려 다다키요는 시게노리를 중용했다고 한다.[3]
  • 오사카성 번을 맡고 있을 때, 낙뢰로 오사카성 천수각이 불탔다. 하지만 시게노리는 주의를 위해 영민들에게 화재 시에 사용하라며 조개 껍질 한 조각을 건네주었다. 이것을 할찰 대신으로 성에 들어간 영민들은, 화재로 혼란스러운 성 안에 들어가 여자와 아이들을 구출하고 소화에 진력했다고 한다. 또한, 이 낙뢰로 큰 일이 된 원인은 화약고가 폭발했기 때문이라며, 마치 부교를 통해 화약을 해자에 버리게 했다.[3]
  • 시게노리는 몸통이 길고 다리가 짧은 곰보 얼굴로 풍채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에도에서 교토로 부임할 때, 교토의 마을 사람들은 시게노리를 얕보았다. 하지만 시게노리의 통치는 훌륭했고, 백부이자 교토 쇼시다이였던 스오노카미 시게무네의 이름에서 따와 "괴물"이라고 칭송받았다.[3]
  • 교토 쇼시다이로서 천황에게 배알할 때, 천황의 얼굴을 알고 싶으니 어렴을 높이 들어달라고 지주에게 요청했다. 이는 쇼시다이의 의무인 금리 수호를 다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3]
  • 간분 연간 무렵에 걸인이 늘어났기 때문에, 야나기하라 쪽에 구제 오두막을 지었다. 어느 날, 시게노리의 눈에 어머니를 업은 걸인이 나타났다. 시게노리는 효자로서 부치미를 주었지만, 이로 인해 가짜 부모를 업고 걷는 걸인이 속출했다. 막료들 중 많은 수가 이러한 자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시게노리는 "설령 거짓이라도 벌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성의가 없으니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시게노리가 말한 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가짜 부모를 업은 걸인은 사라졌다고 한다.[3]
  • 애용하던 당궁이 시게노리가 부재중일 때 어린 스님에 의해 부러졌다. 용인이 격노하여 어린 스님을 감금하고 시게노리에게 보고했지만, 시게노리는 기쁜 표정으로 "어린 스님을 용서하도록"이라고 말했다. 용인이 "어째서?"라고 묻자 "어린 스님으로 무예에 마음을 둔다는 것은 기특한 일. 게다가 어린 스님 정도가 당겨 부러질 정도의 활이라면, 중요한 때에 쓸모가 없다. 오히려 사전에 그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은 길한 일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4]
  • 에도의 감옥은 좁고 비위생적이었다. 그래서 한 막료가 감옥 확장을 신청했지만, "넓고 좁음이 문제가 아니다. 죄인이 적어지면 넓어진다. 좁다는 것은 천하의 정치의 수치이니, 옥을 넓게 하는 데 힘쓰도록"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 다테 소동 때 칼 부상 사건이 일어나자, 평정소 주임이었던 시게노리는 책임을 지고 근신계를 스스로 막부에 제출했지만, 각하되었다.
  • 노중이 되자, 다이묘로부터 많은 증여품이 보내져 왔다. 이런 증여품은 대개 가신에게 받게 하고, 불하하여 금품으로 바꾸는 것이었지만, 시게노리는 항상 상대에게 머리를 숙이고, 가신과 빈궁자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가신이 이 행위를 질문하자, "이것은 내가 노중이 되었기 때문에 증여된 물건. 노중이 아니었다면 이런 물건이 증여될 리가 있겠는가. 즉, 이 증여품은 쇼군에게 증여된 소중한 물건. 그 소중한 물건에 내가 인사하지 않고 어찌하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3]
  • 시게노리가 소송의 심리나 재판을 담당하는 봉행의 마음가짐을 설파한 『자심수용집』에 따르면, "인간은 신분의 상하에 관계없이 모두 신불과 같이 존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를 다하지 않고 사형에 처하면, 무서운 천벌이 내릴 것이다. 사형수를 처형하는 것은 신불의 몸을 칼로 상처내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그렇게 각오하고, 심리는 의문점을 남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재판을 담당하는 봉행은, 이 사실을 밤낮으로 명심해야 한다"고 한다.
  • 『자심수용집』에서 시게노리는 억울한 옥살이를 방지하기 위해, "재판 시에는 피고와 원고 쌍방의 주장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설령 주장이 옳더라도, 말주변이 없거나 무지 때문에 그것을 전달하지 못하고, 이야기가 빗나가 요점을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긴장과 동요로 말해야 할 것을 충분히 말하지 못하는 자도 있다. 반대로 말솜씨나 로비가 뛰어나, 본래라면 질 재판에서 승소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봉행은 쌍방의 심리나 말투까지 꼼꼼히 간파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억울한 옥살이나 오심을 피할 수 없다"고 설파했다.
  • 그 외에도, 재판 당일에는 누구보다 먼저 출근하여, 그날의 소송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소송인의 말솜씨에 현혹되지 않고, 그 "심지(본심)"를 간파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또한 "도둑을 잡는 것은 쉽고, 도둑질을 그만두게 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은 어렵다. 도둑질을 금지하는 치죄(방책)보다, 도둑질을 할 수 없는 치죄가 더 낫다"라고 설파하고 있다.

3. 계보

구분내용
아버지이타쿠라 시게마사
어머니하야시 요시사다의 딸
정실고이데 요시치카의 넷째 딸
장남이타쿠라 시게요시 (생모는 정실)
차남이타쿠라 시게즈미 (생모는 정실)
삼남이타쿠라 시게타네 (생모는 정실)
다카기 마사모리의 정실
마쓰다이라 지카노부의 계실
소마 사다타네의 정실
요신인 사가라 요리토미의 정실, 이타쿠라 시게타네의 양녀
양녀나카인 미치시게의 정실 - 오가사와라 마사노부의 딸
양녀와키자카 야스무라의 정실 - 다카기 마사모리의 딸


참조

[1] 웹사이트 Gouverneure von Kyôto in der Edo-Zeit https://uni-tuebinge[...] 2008-04-11
[2] 서적 Nobiliare du Japon -- Itakura, pp. 16–17 http://www.unterstei[...] 2012-11-07
[3] 서적 A History of Japan https://books.google[...] 1996
[4] 서적 State and Diplomacy in Early Modern Japan: Asia in the Development of the Tokugawa Bakufu https://books.google[...]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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