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요시스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토 요시스케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이토 가문의 당주였다. 형의 요절로 가독을 상속받았으며,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에게서 편휘를 받아 이름을 '요시스케'로 바꾸었다. 그는 무용이 뛰어나 휴가 지역의 세력을 확장하여 이토 가문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으나, 기자키바라 전투에서 시마즈 가문에 패배한 후 세력이 쇠퇴했다. 결국 가신들의 배신과 시마즈 가문의 공격으로 인해 영지를 잃고 도피 생활을 하다가 객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휴가 이토씨 - 이토 스케타케 (1559년)
이토 스케타케는 1559년 휴가국에서 태어나 이토 요시스케의 차남으로, 규슈 정벌에서 공을 세워 다이묘로 복귀했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하고 세키가하라 전투 후 사망했다. - 휴가 이토씨 - 오비번
오비 번은 에도 시대에 이토 씨가 14대에 걸쳐 다스린 휴가국의 도자마 다이묘 번으로, 삼나무 재배와 어업을 통해 재정을 운영했으며, 폐번치현 이후 미야자키현에 편입, 고무라 주타로를 배출했다. - 1512년 출생 - 게라르두스 메르카토르
게라르두스 메르카토르는 16세기 유럽의 지도 제작자, 수학자, 천문학자, 지리학자로, 항해에 유용한 메르카토르 도법 개발과 세계 지도첩 《아틀라스》를 '아틀라스'라는 명칭으로 처음 출판하여 지도 제작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512년 출생 - 로버트 레코드
로버트 레코드는 웨일스 출신의 영국 의사이자 수학자로, 영어로 쓰인 최초의 대수학 서적인 《제예(諸藝)의 기초》를 저술하고, 저서 《지혜의 숫돌》에서 등호를 처음으로 인쇄물에 사용했으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한 선구자 중 한 명이다. - 1585년 사망 - 니와 나가히데
니와 나가히데는 센고쿠 시대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무장으로 오다 노부나가와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며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감각을 발휘, 아즈치 성 건설 총괄, 시즈가타케 전투 기여, 에치젠 국과 가가 국 통치 등으로 활약했다. - 1585년 사망 - 다테 데루무네
다테 데루무네는 1544년에 태어나 1585년에 사망한 다테 가문의 16대 당주이며, 세력 확장을 위해 노력하다가 아들에게 납치되어 살해당했다.
이토 요시스케 | |
---|---|
인물 정보 | |
![]() | |
기본 정보 | |
씨명 | 휴가 이토 씨 (후지와라 남가 다메노리 류구도 씨) |
이름 | 이토 요시스케 (伊東 義祐) |
로마자 표기 | Ito Yoshisuke |
생몰년 | 1512년 – 1585년 8월 29일 |
다른 이름 | 호랑이곰 (어린 시절 이름) 요시키요 가스이 요시스케 쇼겐 |
통칭 | 로쿠로고로 삼위 입도 |
관위 | 정5위하 수리대부 종4위하 대선대부 정4위하 종3위 |
막부 | 무로마치 막부오소반슈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이토 사다스케 |
어머니 | 후쿠나가 스케아키라 딸 |
형제자매 | 후쿠나가 겐베에 부인 남자 (생모는 나카무라 씨) 스케미쓰 요시스케 교쿠렌 부인 (시마즈 다다하루 부인) 스케요시 |
배우자 | 아라타케 씨 딸 모미키 씨 딸 가와사키 스케나가 딸 오히가시 (후쿠나가 겐베에 딸: 요시스케의 조카) 후쿠조노 (가와사키 요시나가 딸) |
자녀 | 다카조 (기모쓰키 요시카네 부인, 스기타 무네모리 부인) 아소 (기타하라 가네모리 부인, 바칸다 우에몬노스케 부인) 간코마루 요시마스 아마고보 조코안 마치노우에 (이토 스케하루 부인, 이토 만쇼의 어머니) 이토 스케노부 부인 쇼카쿠인 스케타카 |
생애 | |
출생 | 에이쇼 9년 (1512년) |
사망 | 덴쇼 13년 8월 5일 (1585년8월 29일) |
기타 | |
특기 사항 | 센고쿠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다이묘 고토반쿠에 따르면 아오바 성주였다고 함 |
2. 생애
이토 요시스케는 덴분 2년(1533년) 형 스케미쓰가 요절하자 가독 상속 분쟁을 겪었다. 동생 스케요시가 옹립되었으나, 요시스케는 이에 불만을 품고 출가했다. 3년 후 스케요시가 병사하자 환속하여 가독을 상속하고 반란을 진압했다.[4]
요시스케는 무용이 뛰어난 인물로, 기타하라 씨를 멸하고 시마즈 다다치카(豊州 시마즈 씨 3대)와 휴가 남부의 권익을 둘러싸고 다투었다. 에이로쿠 12년(1569년) 오비 일대를 손에 넣어 시마즈씨를 압도하고 휴가노쿠니 48개 지성을 거느리며 이토 씨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이토 48성)[6]
1558년 이토 요시스케는 기타하라 씨의 가독 계승 문제에 개입하여 영지를 찬탈하려 했으나, 1562년 시마즈 다카히사 등의 협력으로 실패했다. 이후 사가라 씨와 동맹을 맺고 1563년 다이묘진 성을, 1564년 이마 성을 함락시키며 마사키노인 지역을 공략했다.[7] 1566년 고바야시 성을 축성하고, 1568년 이토 스케야스를 시켜 시마즈 요시히로의 이이노 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7]
1572년 5월, 요시스케는 사가라 요시하루와 연계하여 시마즈 씨의 가쿠토 성을 공격했지만,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군세에 패배했다(키자키하라 전투).[7] 이 전투에서 이토 가문의 주요 무장들이 전사하면서 마사키노인 공략은 좌절되었다.[7]
겐키 3년(1572년) 기자키바라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대패한 후, 요시스케의 세력은 점차 쇠퇴했다.[1] 1577년 다카하라 성이 시마즈 요시히사에게 항복하고, 노지리 성주 후쿠나가 스케토모 등 주요 가신들이 시마즈 측으로 돌아서면서 이토 가문은 붕괴되기 시작했다.[1]
1577년 12월, 요시스케는 휴가를 버리고 친척인 분고의 오토모 소린에게 의탁하기로 결단하고, 오치아이 도쿠로의 배반으로 인해 다카치호를 통해 분고로 도피했다.(분고 도피)[1]
오토모 소린의 도움으로 1578년 미미가와 전투에 참전했으나 패배하고, 요시스케는 아들 스케타카와 함께 이요로 떠나 고노씨에게 의지했다.[1] 이후 각지를 유랑하던 요시스케는 1585년 병을 얻어 사카이로 향하던 중 사망했다.[1][2]
2. 1. 가독 상속
덴분 2년(1533년), 형 스케미쓰가 요절하자 동생 스케요시가 옹립되었다. 그러나 요시스케는 이 조치에 불만을 품고 출가했다. 3년 후 스케요시가 병사하자 환속하여 가독을 상속받았다.[4] 이때 일부 가신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요시스케는 이를 진압하고 당주가 되었다.2. 2. 휴가 최대 판도 형성
요시스케는 무용이 출중한 인물로, 기타하라 씨를 멸하고 시마즈 다다치카(豊州 시마즈 씨 3대)와 휴가 남부의 권익을 둘러싸고 다투었다. 에이로쿠 12년(1569년)에는 오비 일대를 손에 넣었다. 이렇게 하여 시마즈씨를 압도하고 휴가노쿠니의 48개 지성을 거느리게 된 요시스케는 이토 씨의 최전성기를 쌓아올린다. ('''이토 48성''')[6]에이로쿠 3년(1560년) 6월, 아시카가 요시테루로부터 화해 명령이 내려졌고, 9월 4일에 막부 상사 이세 사다유키가 휴가국으로 내려왔다. 오비를 막부령으로 하는 막부 조정안으로 이토 씨와 시마즈 씨의 조정을 실시하여, 일시적으로 양측으로부터 큰 틀의 합의를 얻었지만, 오비 성의 관리자를 누구로 할 것인가 등 구체화 과정에서 교착 상태에 빠져 조정은 실패로 끝났다. 그 결과, 다음 해 에이로쿠 4년(1561년) 3월에 오비에서의 교전이 재개되었다.[6]
같은 해 12월, 도요주가를 압박하여 교섭을 통해 오비의 일부를 할양받았고, 에이로쿠 5년(1562년) 5월에는 완전한 영유에 성공한다. 그러나 같은 해 9월에 도요주가에 공격을 받자 불과 4개월 만에 철수하게 되었다.[6]
에이로쿠 11년(1568년) 1월 9일, 이토 세력은 오비 성을 공격했다. 시마즈 다다치카가 지키는 오비 성을 약 5개월 동안 포위하고, 원군으로 출진한 기타고 토키히사의 군대를 코고에 전투에서 격파했다. 이 대패를 받아 같은 해 5월, 시마즈 도요주가는 오비 성을 이토 씨에게 넘겨주었다. 그 결과, 오스미 국의 기모츠키 씨와 도요주가의 영토를 나누는 형태로 에이로쿠 12년(1569년)에 오비를 지행했다. 이렇게 하여 시마즈 씨를 정치적으로 압도하고, 이토 씨의 최성기를 구축했다(이토 48성).[6]
2. 3. 마사키인 공략과 기자키바라 전투
1558년, 이토 요시스케는 오랫동안 인척 관계를 유지해 온 기타하라 씨의 가독 계승 문제에 개입하여, 기타하라 가네모리에게 시집갔다가 과부가 된 딸 아소(麻生)를 기타하라 서류(庶流)의 마세키타 우에몬노스케에게 시집보내 실질적인 찬탈을 획책했다.[7] 이듬해 1559년 3월 17일, 요시스케는 반대파를 숙청하고 우에몬노스케와 아소의 혼인을 강행하여 기타하라 씨의 영지를 모두 빼앗았다.[7] 그러나 1562년, 시마즈 다카히사 등의 협력으로 기타하라 씨에게 영지를 빼앗기게 된다.[7] 이에 요시스케는 사가라 씨와 동맹을 맺고 1563년에 다이묘진 성을, 1564년에는 이마 성을 함락시켰다.[7] 그 후 기타하라 씨는 이반자가 잇따르면서 마사키노인의 이이노 지역을 제외하고는 다시 이토 씨의 영지가 되었다.[7]마사키노인이 비옥한 곡창 지대였고, 휴가(日向)의 완전한 지배를 위해 이이노 지역 공략이 불가피했기 때문에, 1566년에 이이노 지역 공략의 전선 기지로서 고바야시 성을 축성하게 한다.[7] 하지만, 시마즈 요시히사 등이 성이 완성되기 전에 공격을 걸어왔으나, 메라 시게카타는 고전하면서도 이를 격퇴한다.[7]
1568년, 이토 요시스케는 이토 스케야스에게 시마즈 요시히로의 이이노 성을 공격하게 했지만, 실패하고 오케다이라 성을 축성하고 군세를 철수시킨다.[7] 하지만, 오케다이라 성은 히시카리·사가라 양씨를 지원하기 위한 성이기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가라 씨에게 일절 통고하지 않고 철병했기 때문에, 이것이 사가라 씨의 유한(遺恨)을 사게 되었다.[7]
1572년 5월, 이토 요시스케는 사가라 요시하루와 연계하여 시마즈 씨의 가쿠토 성을 공격했지만,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300명의 군세에 패배한다(키자키하라 전투).[7] 이 전투에서 이토 스케야스, 이토 스케노부 등 다섯 명의 대장을 비롯하여, 오치아이 카네오키, 메라 시게카타 등 이토 가문의 유명한 무장이 전사했다.[7] 이 이후, 마사키노인 공략은 좌절되게 된다.[7]
2. 4. 이토 가문의 붕괴와 몰락
겐키 3년(1572년) 사가라 요시히와 연합한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노성을 공격했을 때, 이토 측은 3000명의 군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300명 남짓의 병사에게 대패하였다(기자키바라 전투). 이 전투에서 이토 스케야스 등 5명의 대장과 이토 가문의 주요 무장 다수가 전사했다.[1]이 패배를 계기로 요시스케의 세력은 점차 쇠퇴하였다. 덴쇼 4년(1576년), 이토 48성 중 하나인 다카하라 성이 시마즈 요시히사의 공격에 저항하지 못하고 항복했다. 인근의 미쓰야마 성과 스키 성도 연이어 항복하여, 시마즈의 영토와 경계선이었던 노지리와 아오이다케가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 노지리 성주 후쿠나가 스케토모는 요시키요에게 여러 차례 상황 타개를 요청했지만, 요시스케의 측근들에 의해 묵살되었다. 요시스케의 가신단은 국경의 실정을 알고 있었음에도 요시스케의 사치스럽고 교만한 나날에 대해 간언할 수 없었다. 이는 요시스케가 자신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는 가신을 멀리하고, 자신의 기분을 맞춰주는 가신만을 측근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1]
1577년에 들어서자 정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6월에는 남쪽 요충지인 구시마 성이 시마즈 다다나가의 공격에 함락되었다. 요시스케는 오비성주인 셋째 아들 스케타카에게 구시마 성으로 출병할 것을 명했지만, 오히려 다다나가에게 반격당해 오비성으로 패주하고 성을 포위당했다. 동시에 휴가 북부의 주민 쓰치모치 씨가 가도가와를 공격해 왔다. 이로 인해 이토 가문은 북쪽으로는 쓰치모치, 남쪽과 북서쪽으로는 시마즈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1]
같은 해 12월, 노지리 성주 후쿠나가 단바노카미가 시마즈 측 다카하라 성주 우에하라 나가토노카미의 설득을 받아들여 시마즈 측으로 돌아섰다. 후쿠나가 가문은 이토 가문과 인척 관계였기 때문에 이 모반은 요시스케는 물론 다른 씨족들에게까지 큰 충격을 주었다. 이를 알게 된 우치야마 성주 노무라 교부쇼우, 카미야 성주 메라 미노노카미도 시마즈 측으로 돌아서 사도와라 서쪽 방어는 완전히 시마즈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요시스케는 영내의 여러 장수를 동원해 가미야 성 탈환을 위해 출병했지만, 도중에 이토 가문을 대대로 섬겼던 가신들이 뒤에서 모반의 움직임을 보이자 즉시 철군하여 사도와라 성으로 돌아갔다.[1]
2. 5. 도망자
다음해 12월 9일, 요시스케는 사도하라 성에서 평정을 열었다. 남쪽의 시마즈측이 오비를 넘어 사도하라에 쳐들어 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농성으로 시마즈군을 받아치자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성을 포위당해 도망쳐온 아들 스케타카도 사도하라성에 도착했다. 이미 요시스케에게 남아있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날 정오가 지난 시각에, 요시스케는 휴가를 버리고 친척인 분고의 오토모 소린에게 몸을 의탁할 결단을 내린다.본거지인 사도하라를 버리고 분고를 향한 요시스케 일행은 길에서 니이로인 다카라베 성의 성주・오치아이 도쿠로도 시마즈에 영합해 거병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오치아이씨는 휴가에 정착하기 이전부터 이토 씨의 중신이었던 오래된 가신 가문으로 가신의 필두 격이었다. 오치아이 도쿠로의 배반에 요시스케는 다카라베 성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서쪽으로 우회해 메라 산을 거쳐 다카치호를 통해 분고로 달아나는 길을 잡는다. 여자들과 동행한 도망길은 괴롭고 고생스러웠다. 당초 120~150명 정도였던 일행은 도중에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자살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아, 분고에 도착했을 때에는 불과 80명 미만으로 줄었다고 한다. ('''분고 도피''', 豊後落ち)
도망자 중엔, 이후 덴쇼 겐오 소년사절(로마를 방문한 가톨릭 소년 사절단)의 한사람이 된 이토 만쇼의 어릴적 모습도 있었다.
2. 6. 최후
오토모 소린과 만나 휴가 공격의 도움을 청한 요시스케는 소린의 도움으로 덴쇼 6년(1578년) 가도가와의 쓰치모치 씨를 멸하고 미미가와 남쪽에서 시마즈와 격돌한다(미미가와 전투). 하지만 오토모는 시마즈에게 참패를 당한다. 오토모 씨의 참패는 요시스케 일행에게 큰 타격이었다. 요시스케는 아들 스케타카를 데리고 이요로 떠나 고노씨를 의지했다.[1]그 후 스케타카가 하시바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어 급료를 받게 되고 요시스케도 히데요시와 알현할 기회를 얻었지만, "유랑하는 몸이라 하여도 후지와라 가문의 三位入道가 어찌 하시바 씨를 추종할소냐"라 대답하며 완고히 알현을 고사했다. 이후 각지를 유랑하던 요시스케는 덴쇼 13년(1585년)에 병이 들어 사카이로 향하던 중 배 안에서 병세가 악화되어 뱃사공에게 모래사장에 버려졌다. 행려병자와 같은 상태로 지역 주민에게 발견되었고, 사카이에서 7일 남짓 간호를 받았지만, 효험 없이 사망했다. 향년은 75세(73세)였다.[1][2]
요시스케는 祐兵(스케타카)가 관직에 나가는 것을 지켜본 후, 잠시 하리마에 머물렀지만 덴쇼 12년(1584년) 祐兵(스케타카)가 붙인 수행원인 쿠로키 소우에몬노조와 함께 주고쿠 지방을 마음대로 유랑하다가, 스오 국 야마구치의 옛 신하 집에 머물렀다. 그 후 쿠로키를 따돌리고 혼자 여행을 하다가 병을 얻어 祐兵(스케타카)의 저택이 있는 사카이로 향했다고 한다.[2]
3. 인물
어릴 때부터 불문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불교에 조예가 깊었고, 어떤 때는 정치를 돌보지 않은 채 승려와 종일 법담을 나누며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나 만년의 술회 등을 보면 온화하며 패기 없는 인물이 상상되지만, 한편 매우 히스테릭하고 호전적인 행동 또한 사료에 나타난다. 무장으로서 또 승려로서의 강경함과 온화함이라는 이면성을 필요 이상으로 함께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1]
기자키바라 전투는 요시스케의 영화가 종언을 고하게 된 전투로, 그 전황이 역전되는 구도에서 「규슈의 오케하자마」라고도 불린다. 더불어 요시스케에겐 「규슈의 이마가와 요시모토」란 별명이 있다. 공적들을 따져볼 때 절대로 무능한 무장이 아니었지만, 문예에 빠져 교토의 귀족과 같은 생활을 한 것이 치명적인 몰락을 불러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1]
사치에 빠져 국외로 추방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중에서도 불교에 대한 심취가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1551년 야마토국에서 불사를 초빙하여 대불을 조립했으며, 금각사를 본떠 금백사(킨파쿠지)라는 절을 짓고 밤낮으로 염불과 법담에 힘썼다고 한다.[1]
참조
[1]
서적
Dictionnaire d’histoire et de géographie du Japon
http://www.unterstei[...]
1906
[2]
웹사이트
伊東義祐とは
https://kotobank.jp/[...]
kotobank
2021-10-20
[3]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0
2000
[4]
서적
伊東義祐・義益
戎光祥出版
2023
[5]
간행물
中世日向伊東氏関係文書の基礎的研究
2012
[6]
간행물
永禄期足利義輝による伊東氏・島津氏間の和平調停
2022
[7]
서적
壱岐加賀守年代覚書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