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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라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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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하라 하루키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감독, 해설가, 평론가이다. 선수 시절에는 내야수(3루수)로 활약했으며, 1970년 니시테쓰 라이온스에 입단하여 요미우리 자이언츠,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를 거쳐 1980년 은퇴했다. 은퇴 후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코치로 활동하다 2002년 감독으로 부임하여 퍼시픽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오릭스 블루웨이브,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도 코치와 감독 대행을 역임했다. 2013년 세이부 라이온스 감독으로 복귀했으나, 2014년 사임했다. 현재는 사회인 야구팀 이바라키 토요펫의 어드바이저로 활동하며,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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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라 하루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요미우리 코치 시절의 이하라 하루키
이름이하라 하루키
로마자 표기Haruki Ihara
출생일1949년 1월 18일
출생지히로시마현 고누군 조게정 (현 후추시)
포지션내야수 / 감독 / 코치
타석우타
투구우투
선수 경력
데뷔1971년 7월 4일
마지막 경기1980년 6월 30일
니시테쓰 라이온스/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 (1971–1975)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6–1977)
크라운 라이터 라이온스/세이부 라이온스 (1978–1980)
감독 경력
세이부 라이온스 (2002–2003)
오릭스 블루웨이브 (2004)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2014)
이바라키 토요펫
코치 경력
세이부 라이온스 (1981–1999)
한신 타이거스 (2000)
세이부 라이온스 (2001)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7–2010)
선수 상세 정보
타율0.241
홈런12
안타189
드래프트1970년 2순위
등번호73
신장184
체중82

2. 선수 시절

도소
속경




2

3







자희





4









O
P
S
1971년니시테쓰
다이헤이요
3912311513316024383021302242.270.298.374.6711972년11836633223801517118322210200134111.241.310.355.6651973년325548413010152000050221.271.364.313.6761974년4480785193012580101100122.244.250.321.5711975년2225244300030010000102.125.160.125.2851976년요미우리9550000000000000010.000.000.000.0001978년크라운
세이부80908310211022852100502131.253.311.337.6481979년85102937222002430121501132.237.280.258.5381980년21660000000000000010.000.000.000.000통산 : 9년45085278466189272122565876533902110721.241.294.327.621

2. 1. 프로 입단 전

이하라는 6남매 중 차남으로, 여동생 4명과 남동생 1명이 있었다.[2] 상하 중학교를 졸업하고 1964년 기타가와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바 다케시의 친동생 고바 후쿠오의 지도를 받았으며, 3학년인 1966년 여름 고시엔 현 예선에서 4번 타자 겸 3루수로 활약했다. 후쿠야마 공고와의 준결승전에서 홈런을 기록하여 결승에 진출했지만, 히로시마 상고의 야마모토 가즈유키에게 완봉패를 당하며 고시엔 진출에는 실패했다.

1967년 시바우라 공업대학에 진학, 도토 대학 야구 리그에서 재학 중 2번의 우승을 경험했다. 4학년이던 1970년 춘계 리그에서는 동기인 에이스 전노 가즈히로(도시바)와 함께 시바우라 공업대의 3시즌 만의 3번째 우승에 공헌했고, 3루수로서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대학 1년 후배 포수 미치하라 히로유키와 함께 3번 미치하라, 4번 이하라가 타선의 중심을 맡았다. 같은 해 가을 리그에서는 대학 분쟁의 영향으로 부원이 급감하는 가운데 감독 겸 주장을 맡아 리그 5위로 1부 리그 잔류를 결정지었다. 훗날 프로 야구 선수 명감 내 프로필에서도 대학의 선수 겸임 감독 시절을 추억으로 꼽고 있다.[3] 1부 리그 통산 49경기 출장, 128타수 29안타, 타율 .227, 3홈런, 14타점을 기록했다.

2. 2. 니시테쓰 라이온스 /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 (1971~1975)

이하라 하루키는 1970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니시테쓰 라이온스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1971년부터 백업 3루수로서 1군에 정착했다. 1971년 7월 4일, 대 난카이 호크스 12차전(오사카 구장)에 7번·3루수로서 첫 선발 출장했으며, 5회초에 다카하시 사토시로부터 첫 안타를 기록했다. 같은 해 7월 13일, 대 난카이 호크스 14차전(헤이와다이 야구장)에서는 5회말에 사토 미치오로부터 선제 솔로 홈런을 기록하며 첫 홈런과 첫 타점을 올렸다. 한편 2군의 주니어 올스타 게임에도 선출되었다.

1972년에는 다케노우치 마사시의 외야 컨버전, 후나다 가즈히데의 야쿠르트 이적이 겹쳐 주전 3루수로서 118경기에 출전, 주로 7번 타자로 기용되었다. 같은 해 리그 최다 23실책을 기록했다.

1973년에는 내야 개편으로 주전 자리를 기쿠카와 쇼지로에게 넘겨주었다. 같은 해 미국의 마이너 리그 1A급에 속하는 로디 라이온즈로 야구 유학을 떠났다.

1974년에는 유격수도 겸했지만, 출전 기회는 감소했다.

1975년, 캠프에서 오른쪽 무릎을 다쳐 참아가며 플레이했지만, 한계에 달해 시즌 도중부터 팜으로 내려갔다.[4] 괄괄한 성격으로 경기에서 선수가 사소한 실수를 저질러도 코치를 불러 발로 차는 선수 겸임 감독인 에토 신이치와 맞지 않아 트레이드를 자원했고,[4] 11월 26일, 세키모토 시주・타마이 노부히로와의 교환 트레이드로 가토 하지메와 함께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며칠 후 에토는 감독에서 해임되었다.[4] 니시테쓰 /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 시절 등번호는 '''7'''번 이었다.

2. 3.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6~1977)

이하라 하루키는 1976년에 세키모토 시토시, 다마이 노부히로와의 2:2 트레이드로 가토 하지메와 함께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4] 1975년, 캠프에서 오른쪽 무릎 부상과 선수 겸임 감독인 에토 신이치와의 불화로 트레이드를 자원하여 이적이 성사되었다.[4] 이적 후 2년간(1976~1977)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동했지만, 1976년에 9경기에 출전하여 5타수 무안타를 기록했고, 1977년에는 1군 출장 기록이 없었다. 결국 자유 계약 선수로 풀려났다.

2. 4.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 / 세이부 라이온스 (1978~1980)

이하라 하루키는 1970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니시테쓰 라이온스로부터 1순위로 지명을 받아 내야수(3루수)로 입단하였다. 1976년에 가토 하지메와 함께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였으나, 1978년 친정팀인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로 복귀하여 활약하다가 1980년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1971년부터 백업 3루수로 1군에 정착했다. 한편 2군의 주니어 올스타 게임에도 선출되었다.

1972년에는 다케노우치 마사시의 외야 컨버전, 후나다 가즈히데의 야쿠르트 이적이 겹쳐 주전 3루수로서 118경기에 출전해 주로 7번 타자로 기용되었다. 같은 해 리그 최다 23실책을 기록하였다.

1973년에는 내야 개편으로 인해 주전 자리를 기쿠카와 쇼지로에게 넘겨주었다. 같은 해 미국의 마이너 리그 1A급에 속하는 로디 라이온즈로 야구 유학을 떠났다. 1974년에는 유격수도 겸했지만 출전 기회는 감소했다.

1975년, 캠프에서 오른쪽 무릎을 다쳐 참아가며 플레이했지만, 시즌 도중부터 팜으로 내려갔다.[4] 에토 신이치 선수 겸임 감독과 맞지 않아 트레이드를 자원했고,[4] 세키모토 시주・타마이 노부히로와의 교환 트레이드로 가토 하지메와 함께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며칠 후 에토는 감독에서 해임되었다.[4]

1976년부터 2년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재적했지만, 출전 기회는 없었고 자유 계약이 되었다.

1978년에 크라운 라이터 라이온즈로 복귀하여, 주로 3루수 야마무라 요시노리의 백업으로 기용되었지만, 1루수2루수도 겸해 20경기에 선발 출장했다.

1979년 4월 7일 긴테쓰와의 개막전(니세이)에서 9번 타자・2루수로 선발 기용되었다. 16일 니혼햄전(세이부)에서 7번 타자・3루수로 선발 출장, 스기야마 도모타카로부터 3타수 3안타를 기록했다. 5월 12일 한큐전(세이부) 이후 13경기 연속 유격수로 선발 기용되었고, 19일 긴테쓰전(헤이와다이)에서 2안타를 날려 타율이 .317까지 올랐지만, 이날을 정점으로 타격은 하락하여 주전 확보에는 이르지 못했다. 6월 이후 선발 출전은 줄었지만, 내야 어디든 수비할 수 있다는 점으로 수비 강화 선수로 기용되어, 최종적으로 같은 해 85경기에 출전했다.

1980년 개막은 2군에서 시작되었고, 4월 후반에 1군으로 승격되었다. 20일 롯데전(세이부) 도중, 테일러 덩컨의 수비 강화로 첫 출전했다. 그 후 5월, 6월에도 1군에 동행했지만, 거의 수비 요원으로 교체 출전이 이어졌다. 이하라는 10년차 선수임에도 주전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백업에 머무르는 상황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 "현역"에 미련을 버리려 하기 시작했다. 여름 쯤 원정지에서 네모토 리쿠오 감독으로부터 2군행을 통보받았을 때 스스로 현역에서 은퇴하고 지도자의 길로 가고 싶다는 희망을 전했다. 네모토와의 1시간에 걸친 면담 끝에, 시즌 후반부터 다키우치 야미즈오 2군 수비・주루 코치의 보조를 돕는 것이 결정되었고, 시즌 종료 후에 정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3. 지도자 경력

1981년부터 1999년까지 세이부에서 2군 코치와 1군 수비 주루 코치, 작전·주루 코치 등 오랜 기간 동안 코칭 스태프로 활동했고,[41][42][43][44][45][46] 2000년에는 한신 타이거스의 타격 코치, 2001년에는 친정팀인 세이부에 복귀하여 작전·주루 코치를 맡았다.

2002년에 세이부 라이온스의 감독으로 부임했다.[7] 부임 첫 해인 2002년에 팀의 퍼시픽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8] 2004년에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 감독 취임 요청(변칙 3년 계약=2년 계약+옵션 1년)을 수락하여 정식 부임했다. 그러나 2년 연속 최하위에 가라앉고 있는 팀의 재건이 기대되었지만 이렇다할 만한 팀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서 선수와 코치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등 결국 최하위 성적(6위)에 끝났다. 또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합병의 선동을 받아 계약 연수가 남아 있었지만 1년 만에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2005년부터 닛폰 방송, J SPORTS(CS위성 TV)의 프로 야구 해설위원, 닛칸 스포츠 평론가, 베이스볼 매거진사 고문(2005년의 요코하마 vs 세이부의 경기인 교류전 1경기만 TV 가나가와의 야구 중계로 해설자가 되었다)을 역임했다.

2006년 10월 10일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1군 야수 종합 코치(3루 코치 겸임)로 임명되었고,[21] 2007년 시즌 개막 전에 1군 수석 코치로 직함이 변경되었다.[21] 2009년에는 요미우리의 하라 다쓰노리 감독이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한 관계로 3월에 열린 시범 경기에서 감독 대행을 맡기도 했다.[21] 일본 시리즈에서 팀의 승리를 이끌면서 그때까지 기록하고 있었던 일본 시리즈 출전자 중에서의 시리즈 연패 기록은 6으로 멈추었다.

이듬해 2010년에는 리그 4연패와 일본 시리즈 연패를 놓친 책임을 물어 요미우리 코치직에서 사임했고,[22][23] 이후 요미우리 구단 편성 본부 시니어 어드바이저로 부임해 2011년 12월 31일까지 역임했다.[24]

2013년 시즌 오프에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감독직에 복귀했다.[27] 그러나 2014년 시즌 초반 팀 성적이 하위권을 맴돌고, 이와 동시에 엄격한 훈련 방식과 통제로 인해 선수들과 불화가 생겼다.[47] 결국 이하라는 6월 3일 감독직 휴양을 신청했고 세이부 구단은 6월 4일 경기를 끝으로 이하라를 휴양시키고 타격 코치 다나베 노리오를 감독 대행으로 임명했다.[30] 그 후 이하라는 6월 27일 구단에 정식으로 감독직 사임을 신청했고 구단은 이를 승낙했다.[31] 그리고 7월 1일부로 세이부 구단 본부 어드바이저에 취임했지만[31] 같은 해 연말에 사임했다.[32]

2018년 3월, 활동을 재개한 사회인 야구팀인 이바라키 토요펫의 헤드 코치로 취임했다.[38] 2022년부터는 어드바이저로 보직이 변경되었다.[38]

3. 1. 세이부 라이온스 코치 (1981~1999, 2001)

이하라는 1981년부터 1999년까지 세이부에서 2군 코치와 1군 수비 주루 코치, 작전·주루 코치 등 오랜 기간 동안 코칭 스태프로 활동했다.[41][42][43][44][45][46] 2000년에는 한신 타이거스의 타격 코치를 맡았고, 2001년에는 친정팀인 세이부에 복귀하여 작전·주루 코치를 맡았다.

사사키 마코토는 "존경했던 것은 이하라 씨입니다. 누구에게나 분명하게 말하고, 아첨하지 않으니까요."라고 말했다.[41]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는 "이하라 씨는 엄격했고, 항상 화를 냈어요."라고 말했다.[42] 다카기 다이세이는 "주루의 재미라는 것을 이하라 하루키 씨에게 배웠습니다."라고 말했다.[43]

과거에는 철권 제재도 마다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는데, 기요하라 가즈히로는 데뷔 1년차에 세이부 제3구장에서의 훈련 중에 다수의 팬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하라에게 맞아 "덧니가 (입술을) 관통했다"고 말했으며, 오쿠보 히로모토는 이하라에게 "경식구를 든 채로 맞아서, 얼굴이 (경식구의) 봉제선 투성이가 되었다"고 말했다(당시 세이부에서는 이하라 이외의 코치도 철권 제재를 하는 것이 상시화되어 있었다).[44] 이시게 히로노리는 "인간적인 교육은 엄격하게 할 수 있지만, 기술론을 설파하거나 세세한 기술 지도를 하거나 하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라고 말했다.[45]

1990년 시즌 전 감독 회의에서 심판과 각 구단에서 코치 1명씩 참가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이하라는 긴테쓰아와노 히데유키의 견제는 "모두 보크"라고 주장했다.[46] 4월 22일의 긴테쓰전(세이부)에서는 3루 베이스 코치인 이하라와 1루 베이스 코치인 카타히라 신사쿠가 "보크다. 심판. 잘 봐라."라고 외쳤다.[46] 아와노는 그 이후 견제하지 않는 일이 늘었고, 도루 대책을 위해 시즌 중에 퀵 연습을 거듭한 결과, 오른쪽 팔꿈치 인대를 손상해 버렸다.[46] 이하라는 "긴테쓰 측에서 '이하라에게 망가졌다'는 원망 섞인 이야기도 들려왔지만, 이쪽도 생활이 걸려 있다. 프로의 세계란 이처럼 가혹한 것이다."라고 말했다.[46]

3. 2. 한신 타이거스 코치 (2000)

이하라 하루키는 2000년에 한신 타이거스의 타격 코치를 맡았다.

3. 3. 세이부 라이온스 감독 (2002~2003)

이하라 하루키는 2002년 세이부 라이온스의 감독으로 부임했다.[7] 부임 첫 해인 2002년에 팀의 퍼시픽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8] 2002년, 90승을 거두며 4년 만에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는데, 이는 구단 사상 최다 승리 기록이자, 신인 감독 승리수의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이었다.[8] 타선에서는 마쓰이 가즈오를 1번에 고정하고, 2번은 잔기술이 뛰어난 고세키 다쓰야를 기용했다. 3번은 1군에서 좀처럼 결과를 내지 못했던 이누후시 도모나리를 좌타자 상대, 미야지 가쓰히코를 우타자 상대로 기용했다.[8] 4번은 알렉스 카브레라, 5번은 와다 가즈히로를 기용했다. 스콧 맥클레인은 6번, 7번에서 편하게 타격하게 하고, 8번은 이토 쓰토무, 9번은 다카기 히로유키를 기용했다.[8] 투수진은 마쓰자카 다이스케가 개막 6연승으로 좋은 출발을 보였지만, 도중에 팔꿈치를 다쳐 전력에서 이탈했다. 장즈 , 니시구치 후미야, 이시이 다카시 등 다른 투수들이 분투했고, 모리, 도요다 기요시의 구원진도 탄탄했다.[8] 히가시오 감독 시대에 중간 계투였던 시오자키 데쓰야가 선발로 전향하여 6승을 거두었다.[8] 포수였던 와다를 외야수로 전향시켰고,[9] 와다는 5번·좌익수 레귤러로 정착했다. 한편 투수진은 마쓰자카가 전반기 6승을 거뒀지만, 부상 복귀 후에는 승리 없이 끝났고, 니시구치가 팀 최다인 15승을 거뒀다.[7] 2년차 좌완 미이 히로유키가 10승을,[10] 베테랑 이시이 다카시가 후반에 컨디션을 끌어올려 8승을 거뒀다.[7] 요미우리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마쓰자카가 후반기 승리가 없었던 점, 그리고 니시구치가 제1전의 경기장이었던 도쿄 돔에서 성적이 좋지 않았던 점 때문에, 제1전 선발 투수로서 이토는 미이를, 마쓰누마는 이시이를 각각 추천했다.[7] 그러나 이하라는 마쓰자카를 선발로 내세웠고, 마쓰자카는 3회 4실점으로 패전 투수가 되었고, 팀은 그대로 4연패로 패퇴했다. 스즈키 겐은 이하라의 오락가락하는 기용법에 양자 간의 골이 깊어져 출전 기회를 잃었고, 2002년 오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로 이적했다.[11]

2003년에는 2위를 기록했다. 처음부터 예정되었던 이토의 감독 취임을 받아들여 9월 17일에 퇴임이 발표되었다.

연도소속순위경기승리패전무승부승률팀 홈런팀 타율팀 평균자책점연령
2002년세이부1위14090491.647183.2783.2053세
2003년2위14077612.558191.2714.4354세



# 2001년부터 2003년까지는 140경기제

3. 4. 오릭스 블루웨이브 감독 (2004)

2003년 10월 14일, 세이부 라이온스 감독에서 물러난 후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계약 조건은 변칙 3년 계약(2년 계약+옵션 1년)이었다. 2년 연속 최하위에 가라앉고 있는 팀의 재건이 기대되었지만, 2004년 시즌에는 패배가 거듭되면서 선수 및 코치진과의 갈등이 생기는 등 결국 최하위(6위)의 성적에 그쳤다. 특히, 야마자키 다케시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합병의 선동을 받아 계약 연수가 남아 있었지만 1년 만에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3. 5. 요미우리 자이언츠 코치 (2007~2010)

2006년 10월 10일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1군 야수 종합 코치로 임명되었고,[21] 2007년 시즌 개막 전에 1군 수석 코치로 직함이 변경되었다.[21] 공격 시에는 3루 베이스 코치를 담당했다. 당시 한신 감독이었던 오카다 아키노부는 이하라가 3루 코치였을 때 사인을 전부 알고 있었다고 회고했다.[21]

2008년에는 3루 베이스 코치직을 오가타 코이치에게 넘기고 수석 코치에 전념했다. 2009년에는 하라 다쓰노리 감독이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3월에 열린 시범 경기에서 감독 대행을 맡았다.[21] 일본 시리즈에서 팀의 승리에 공헌했다.

2010년에는 리그 4연패와 일본 시리즈 연패를 놓친 책임을 물어 코치직에서 사임했고,[22][23] 요미우리 구단 편성 본부 시니어 어드바이저로 부임해 2011년 12월 31일까지 역임했다.[24]

3. 6. 세이부 라이온스 감독 복귀 및 사임 (2014)

2013년 시즌 오프에 와타나베 히사노부의 후임으로 세이부 라이온스 감독에 복귀했다.[27] 등번호는 '''73'''번[28]을 사용했다. 과거 세이부 감독 시절에는 공격 시 3루 베이스 코치를 담당했지만, 복귀 후에는 감독직에 전념했다.(3루 베이스 코치는 가와다 유스케 외야 수비 주루 코치가 담당).[29]

하지만 2014년 시즌 개막 후 3연패를 당하고, 양대 리그에서 가장 먼저 30패를 기록하는 등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하라 감독의 시대에 뒤떨어진 지도 방식과 과도한 훈련은 선수들의 반발을 샀고,[47] 팀은 최하위로 처졌다. 결국 6월 3일 구단에 휴식을 요청했고, 다음 날인 6월 4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전(세이부 돔)을 마지막으로 휴양에 들어갔다. 동시에 타격 코치였던 다나베 노리오가 감독 대행으로 취임했다.[30] 6월 27일, 이하라 감독은 구단에 정식으로 사임 의사를 밝혔고 구단이 이를 수락하면서, 7월 1일부로 구단 본부 부속 어드바이저로 취임했지만,[31] 그해 연말에 퇴단했다.[32]

이하라 감독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세이부 라이온스 황금기를 함께 이끌었던 명참모로서, 팀의 부활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취임 직후 와쿠이 히데아키 (지바 롯데 마린스로 이적)와 가타오카 야스유키(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가 FA 권한을 행사하여 팀을 떠나는 등 불안한 시작을 보였다. 이하라 감독은 선수들에게 긴 기장의 유니폼 착용과 수염을 금지하고, 오후 10시로 통금 시간을 정하는 등 야구 외적인 부분에서도 엄격한 규율을 요구했다. 또한, 모회사인 세이부 철도의 기본 운임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선수들을 질책하는 등 정신론을 강조하는 모습이 자주 보도되었으며, 이는 와쿠이와 가타오카 이적의 원인 중 하나로 언급되기도 했다. 시즌 개막 후에도 팀 성적이 부진하자, 경기 후 선수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일이 잦아졌고, 이로 인해 일부 선수들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48]

5월 16일, 아키타 원정 중 폭풍우 속에서도 야외 훈련을 강행하여 선수들의 불만을 샀다.[49] 이하라 감독은 "부정적인 기운을 날려버릴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선수들 사이에서는 장기 원정으로 인한 피로 누적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나왔다.[49]

3. 7. 사회인 야구 지도자 (2018~)

2018년 3월, 활동을 재개한 사회인 야구팀인 이바라키 토요펫의 헤드 코치로 취임했다.[38] 2022년부터는 어드바이저로 보직이 변경되었다.[38]

4. 해설가 및 평론가 활동

1981년부터 1999년까지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2군 코치와 1군 수비 주루 코치, 작전·주루 코치 등 오랜 기간 동안 코칭 스태프로 활동했고, 2000년에는 한신 타이거스의 타격 코치, 2001년에는 친정팀인 세이부에 복귀하여 작전·주루 코치를 맡았다. 2002년에는 세이부 감독으로 부임하여 팀의 퍼시픽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2004년에는 오릭스 블루웨이브 감독으로 취임했지만, 팀 성적 부진과 선수단과의 불화로 1년 만에 사임했다.

2005년부터 닛폰 방송, J 스포츠(CS위성 TV)의 프로 야구 해설위원,[14][15][16][17] 닛칸 스포츠 평론가, 베이스볼 매거진사 고문[18]을 역임했다. 2005년 요코하마 vs 세이부의 경기인 교류전에서는 TV 가나가와의 야구 중계 해설을 맡기도 했다.[19] 2006년 10월 10일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1군 야수 종합 코치(3루 코치 겸임)로 임명되었고, 2007년 시즌 개막 전에 1군 수석 코치로 직함이 변경되었다. 2009년에는 하라 다쓰노리 감독이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여 3월에 열린 시범 경기에서 감독 대행을 맡기도 했다. 일본 시리즈에서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2010년 요미우리 코치직에서 사임한 후, 요미우리 구단 편성 본부 시니어 어드바이저로 부임해 2011년 12월 31일까지 역임했다. 2012년부터는 도쿄 스포츠 평론가(전속[25][26]) 외에도 J SPORTS, 아사히 뉴스 타 (부터는 테레 아사 채널 2) , BS 아사히의 야구 해설자를 맡았다. 2013년 시즌 오프에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감독직에 복귀했다. 그러나 2014년 시즌 초반 팀 성적 부진과 선수들과의 불화로 6월 3일 감독직 휴양을 신청했고, 6월 27일 정식으로 감독직 사임을 신청했다.

2015년 2월부터 다시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로 복귀했다.[33][34] 도쿄 스포츠 전속 평론가[33]를 비롯하여, 각 방송국에서 해설을 맡고 있다.[34] 7월 3일, 분카 방송에서 방송된 세이부 대 롯데전 중계에 게스트 해설로 복귀 후 첫 해설을 했다.

5. 논란 및 비판

5. 1. 노무라 가쓰야와의 갈등

노무라 가쓰야와는 사이가 좋지 않다고 여겨진다. 당시 한신의 치프 스코어러였던 미야케 히로시는 갈등이 원인이 되어 사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50]

노무라가 이끄는 라쿠텐과의 교류전 (2008년 5월 29일)에서, 라쿠텐이 2점 리드하는 9회 2사 1루 상황에서 야노 겐지가 도루에 실패하여 게임이 종료되었다. 경기 후 노무라는 "바카쟈나카로카 룸바, 요미우리는 재밌는 야구를 하네, 야구는 의외성의 스포츠"라고 언급했다。

다음 해인 2009년 교류전에서 요미우리가 라쿠텐에 4전 전승을 거두자, 이하라는 취재진 앞에서 "노무라 감독님, 올해 교류전에서 4연승을 거두게 되어 감사합니다. 이것도 다름 아닌 '노무라의 생각' 덕분입니다. 작년에 해 주신 말씀은 매우 참고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1년 동안 받아두었던 그 말씀을 그대로 돌려드리겠습니다. 바카쟈나카로카~, 룸바!"라고 노무라를 비꼬았다[51]

이하라와 노무라는 선수 시절인 1979년부터 1980년까지 함께 세이부에 소속된 동료였으며, 1980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함께 은퇴했다.

5. 2. 지도 방식 비판

6. 기타

2003년, 중퇴 처리되었던 시바우라 공업대학에 재입학하여[52], 남아있던 학점을 취득하여 2004년에 졸업[53]하였다. 졸업식은 당시 학장 에자키 레오나 등을 포함하여 언론에도 소개되어 화제가 되었다[53]

현역 시절, 택지 건물 거래 주임자 자격 시험에 단번에 합격하였다. 이는 당시 이하라의 거주지 주인이, 대학 졸업을 하지 못했고, 특히 자격증도 없던 이하라에게 "유니폼을 벗어도 직업에 곤란을 겪지 않도록" 시험을 볼 것을 권했기 때문이다. 이하라는 후년에 이 집주인의 딸과 결혼했다.

부터 까지 등번호 78번을 사용했지만, 히가시오 오사무가 감독 취임 시 78번을 희망했기 때문에[54], 부터 등번호 73번을 착용했다[54]。이는 부인의 조언에 따라, 부인의 이름과 어울리는 것으로 채택했기 때문이다[54]。세이부[54], 오릭스의 감독 취임 시에도 이를 관철했지만, 2007년부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야수 종합 코치로 취임하면서 78번을 착용했다. 이는 오가타 코이치가 은사인 후지타 모토시의 등번호 73번을 이미 착용하고 있었고, 자신이 8번의 일본 제일을 달성한 행운의 번호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세이부 감독 재임 시에는 다시 73번을 착용했다[54]

도코로자와시로의 구단 이전과 관련하여, 히가시오, 다케노우치 마사시 등과 함께 끝까지 반대하며, "농담하지 마! 매각이든 인수든 알 바 아니지만, 회사는 그걸로 괜찮을지 몰라도,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 사이타마현은 들어본 적도 없어. 누가 가겠어"라고 발언했다고 사카이 야스유키는 자서전 『파란 흥망의 구보』에서 기술하고 있지만, 본인은 『우리들의 퍼시픽 리그 크라운 라이터 라이온즈』(베이스볼 매거진, 2022년) 인터뷰에서, "없어. 없어. 애초에 시바우라 공업대학은 사이타마현 오미야에 합숙소와 그라운드가 있어서, 사이타마에 있으면 세이부가 어떤 회사인지 알 수 있다"고 증언하며, 아울러, 학생 시절에 친구들과의 합동 데이트로 유네스코 촌을 방문한 일이나, 요미우리 시절에 개축 전의 세이부엔 구장에서 2군 경기에 출전한 일도 언급하며, "사이타마도 세이부도 잘 아는 내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잖아(웃음). 그 세이부가 구단을 갖게 된다니, 기쁨이 더 컸으니까"라고 증언하며, 사카이의 기술을 부정했다. 세이부 감독 시절에는 토미 라소다의 "나에게는 다저 블루의 피가 흐르고 있다"에 따라 "나에게는 라이온즈 블루의 피가 흐르고 있다"라고까지 발언하고 있다. 요미우리 수석 코치 취임 후에도, 당시 수비가 늘지 않던 세이부의 나카지마 히로유키를 "나카지는 어떻게 지내? 걔는 3루가 제일 잘 어울리는데…"라고 걱정했다.

세이부 감독 시절, 2002년 오프에 방출한 스즈키 켄이 야쿠르트 스왈로스로 이적한 다음 해인 2003년 시즌에 맹활약했다. 올스타에 선출되어, 전년도 리그 우승팀 감독으로서 퍼시픽 리그를 이끌었던 이하라에게 인사를 갔지만 부당하게 호통을 맞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강한 인상의 반면, 립 서비스도 싫어하지 않는다. 닛폰 방송의 해설자 시절, 중계 시작 전에 노무라 가쓰야의 성대모사를 하기도 했다.

좋아하는 음식은 카레라이스로, 그것도 일반 사람이라면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수준의 매운 맛을 좋아한다. 2010년 요미우리 스프링 캠프에서는, 숙소가 된 호텔에서 제공되는 카레라이스가 이하라의 요청으로 날이 갈수록 매워져, 다른 선수·스태프가 도저히 먹을 수 없게 되어, 캠프 후반에는 일반 선수용 "중간 매운맛"과 이하라용 "매운맛"의 2종류가 준비되었다고 한다[55]

휴대 전화를 몹시 싫어한다. 세이부 시절에 수뇌진이 갖게 하려고 했지만, "휴대 전화로 자신의 행동 범위를 묶이는 감각을 이해할 수 없다"고 거부, 이후에도 갖고 있지 않다. 이하라에게의 전언은 모두 부인이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2008년, 하기모토 킨이치가 요미우리의 캠프를 방문하여, 팬들 앞에서 "킨짱 달리기"를 하도록 이하라에게 권했다. 이하라는 "이미지를 망치니까요…"라고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이미지를 망가뜨리고 다른 곳으로 가는 요미우리를 보고 싶다"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하기모토의 태도에 굴복하여, 킨짱 달리기를 선보였다.

자서전에 따르면 2군 코치 시절부터 감독 시절을 포함하여, 20년 동안 공격 시에는 3루 코치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처음 1군 코치로 배치 전환되었을 때는 1루 코치를 맡았던 시기도 잠깐 있었다고 한다[56]

이하라의 딸 이하라 카나는 모델, 여배우로 활동하고 있다[57][58]

6. 1. 학력

히로시마 현 기타가와 공업고등학교(현재의 히로시마 현립 후추히가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시바우라 공업 대학에 진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52] 2003년, 시바우라 공업대학에 재입학하여[52] 2004년에 졸업하였다.[53] 졸업식은 당시 학장 에자키 레오나 등을 포함하여 언론에도 소개되어 화제가 되었다.[53]

현역 시절, 택지 건물 거래 주임자 자격 시험에 한 번에 합격하였다.

6. 2. 개인적인 정보

시바우라 공업대학을 중퇴했으나 2003년 재입학하여 2004년에 졸업했다.[52][53] 졸업식은 당시 학장 에자키 레오나 등이 참석하여 언론에 보도되었다.[53] 현역 시절 택지 건물 거래 주임자 자격 시험에 합격했는데, 이는 당시 거주지 주인의 권유 때문이었다. 이후 이하라

6. 3. 수상 경력

2002년에 퍼시픽 리그 우승 감독상을 수상했다.[5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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