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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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휘소는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 이론 물리학자이다. 그는 서울대학교를 중퇴하고 미국으로 유학하여 마이애미 대학교, 피츠버그 대학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다. 이후 고등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스토니브룩 대학교, 시카고 대학교에서 물리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페르미 국립 가속기 연구소 이론물리학과장을 역임했다. 이휘소는 자발적 대칭 깨짐과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맵시 쿼크의 질량 예측 등 입자물리학 분야에 기여했으며, 1977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사후 국민훈장 동백장을 추서받았고, 한국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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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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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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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Benjamin Whisoh Lee |
한국어 이름 | 이휘소 |
한자 표기 | 李輝昭 |
출생일 | 1935년 1월 1일 |
출생지 | 일제 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
사망일 | 1977년 6월 16일 |
사망지 | 미국 일리노이주 헨리군 케와니 |
거주지 | 미국 일리노이주 글렌 엘린 |
학력 | |
출신 대학 | 마이애미 대학교 |
박사 지도 교수 | 에이브러햄 클라인 |
학문 지도 교수 | 시드니 메슈코프 |
경력 | |
제자 | 강주상 |
주요 학생 | 아너스트 S. 에이버스 |
연구 분야 | |
영향 | 에이브러햄 클라인, 시드니 메슈코프 |
영향을 준 인물 | 스티븐 와인버그, 헤라르뒤스 엇호프트, 압두스 살람 |
수상 및 훈장 | |
수상 | 국민훈장 동백장 |
기타 정보 | |
종교 | 불가지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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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이휘소는 서울 용산구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의사였으며, 4형제 중 장남이었다. 어머니는 가계를 책임졌으며, 처음에는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다가 나중에는 소아과 및 산부인과를 개원했다.[1]
어릴 때부터 학문적 재능을 보였고 경기중학교에 입학했다. 4학년 때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가족은 부산 경상도로 피난을 가 그곳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으며, 졸업 1년 전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대학 재학 중 한국 전쟁 참전 군인 부인회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1]
마이애미 대학교에서 최우등으로 이학사 학위(1956년)를,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이학 석사 학위(1958년)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1961년)를 받았다. 고등연구소에서 연구를 수행한 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스토니브룩 대학교, 시카고 대학교에서 물리학 교수로 재직했다. 페르미 국립 가속기 연구소(Fermilab)의 이론 물리학과장을 지냈으며, 1976년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2]
1977년 6월 16일, 일리노이주 키와니 인근 80번 주간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3] 사망 당시 이휘소는 게이지 이론과 약력을 전문으로 하는 세계적인 입자물리학자로 널리 인정받았다.[4][5][6][7]
2. 1. 유년기 및 학창 시절
1935년 1월 1일 일제강점기 경성부 원정(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에서 의사 부모 사이에서 3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원정(모토마치)의 《자혜병원》(慈恵病院|지케이 뵤인일본어)에서 의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아버지 또한 의사 면허를 가지고 있었지만 어려운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치료하는 것을 싫어하여 개업의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집안 생계는 어머니가 도맡아 꾸려나갔다.[44]1941년 일곱 살 때 경성사범학교 부속제1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 시험을 치러 입학하였고, 이휘소가 재학할 당시 이곳에는 조선인이 두 명쯤 재학하고 있었다. 이 무렵, 이휘소 일가는 모토마치에서 신설정(신세쓰마치, 新設町|신세쓰마치일본어)로 이사했다. 이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신설동 및 성북구 보문동에 해당하는데, 이휘소 일가가 이사한 곳은 신설정 중에서 특히 지금의 성북구 보문동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어머니는 이곳에서 소아과와 산부인과를 전문으로 하는 《자애의원》(慈愛医院|지아이 이인일본어)을 개업하였다.
당시 이휘소에게는 민희식이라는 부유한 집안을 가진 친구가 있었는데, 그의 집에는 광복 후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책이 많았고, 이휘소는 그의 집에서 일본어 서적을 자주 빌려 읽곤 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던 책은 월간지 《어린이 과학》(子供の科学|고도모노 가가쿠일본어)이었다고 전한다. 국민학교 4학년 재학 중에 광복을 맞이하였고 광복과 함께 경성사범학교가 폐지됐기 때문에, 1947년에 졸업할 무렵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국민학교 소속이었다. 그 해에 경기중학교에 진학하였고 중학교 시절 화학반에서 주로 활동하였다.[44]
1950년 이휘소가 중학교 4학년[45] 때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휘소 일가는 잠시 서울 근교 광릉의 친척 집으로 옮겨 지내다가 9.28 서울 수복 이후 다시 집에 돌아갔지만, 1·4 후퇴 때 다시금 충청남도 공주시에 있는 부친의 옛 고향 집으로 피난을 갔다. 어머니는 이곳에서도 병원을 개업하여 활동하였으며, 이휘소는 그런 어머니를 도와 이웃 도시 대전까지 나가서 병원 운영에 필요한 약품을 사오곤 했다.
이후 부친의 어느 소학교 제자의 권유로 경상남도 마산시로 옮겼다. 이때 부친은 창원보건소장으로서 공직생활을 시작하였다. 마산에서 창원까지는 출퇴근을 할 만 한 거리가 아닌 탓에 그는 창원보건소에서 주로 지내다가 주말 무렵에야 마산의 집에 돌아가곤 했다. 그런데 그는 직장 생활이 1년 남짓 되던 1951년 12월의 어느 날 밤에 귀가하던 중 개울 둑에서 발을 헛디뎌 사망하였다.[44]
한편 이휘소는 서울에서 공주, 마산으로 피난 생활을 이어가면서 학교에 못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학교 교육에 대한 전시 훈령이 발효돼 이휘소는 위탁생 신분으로 인근 마산중학교에 임시 편입할 수 있었다. 얼마 후 경기중학교가 부산으로 옮겨와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5학년 과정을 마쳤다.[44]
2. 2. 서울대학교 중퇴 및 미국 유학
1952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하였으나, 물리학에 대한 관심으로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로 전과를 시도하였다.[26] 그러나 서울대학교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26] 물리학을 독학하던 중, 한국전 참전 미군 장교 부인회의 후원으로 유학 장학생에 선발되어 1955년 1월 마이애미 대학교 물리학과 3학년으로 편입하게 되면서 서울대학교를 중퇴하였다.[26][47]1956년 마이애미 대학교 물리학과를 최우등(summa cum laude|숨마 쿰 라우데영어)으로 졸업하고, 학과장 등의 추천으로 피츠버그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였다.[26] 1958년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산란행렬의 해석적 특성과 그 응용〉(On the Analytic Properties of the S-Matrix with Some Application영어)이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26] 지도교수였던 시드니 메슈코프(Sydney Meshkov영어)의 추천으로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박사 과정에 진학하여,[26] 1960년 11월, 25세의 나이로 〈K+ 중간자와 핵자 산란 현상의 이중 분산 관계〉(Study of K+ Scattering in the Double Dispersion Representation영어)라는 논문으로 물리학 박사(Ph.D.) 학위를 취득하였다.[26]

2. 3. 연구 활동 및 교수 재직
1961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연구원으로 초빙되었으며, 동시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조교수로 임용되었다.[49] 1962년 말레이시아계 화교 출신 마리안 문 칭 심(Marianne Mun Ching Sim, 瀋蔓菁)과 결혼하여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26]1963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로 복귀하여 부교수를 거쳐 1965년 정교수로 승진했다.[26] 1966년 양전닝의 초청으로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 교수로 부임하여 양전닝 이론물리학 연구소에서 활동했다.[26]
1968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26] 1973년 페르미 국립 가속기 연구소 이론물리학 부장으로 부임, 시카고 대학교 교수를 겸임했다. 1976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연구회원 및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2]
2. 4. 박정희 정권과의 관계
1971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교환 교수로 재직하던 중, 이휘소는 한국과학원 정근모 부원장과 함께 한국에서 물리학 여름 학교 개최를 추진했으나, 한국의 독재 체제 강화에 대한 우려로 무산시켰다.[26] 1972년 유신 헌법 선포 이후,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 부회장 강경식 교수의 모국 방문 학술회의 연사 초청을 박정희 독재를 이유로 거절했다.[26]1974년, 미국 국제 개발처(USAID) 차관에 의한 서울대학교 원조 계획의 미국 측 평가위원 자격으로 20여 년 만에 모국을 방문했다. 이휘소가 박정희가 독재를 계속하는 한 한국에 발을 들여놓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 결심했었기에, USAID의 평가위원 위촉을 수락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26] 이 과정에서 신변 보장을 위해 주한미군 용산기지 옆 주한 미국 대사관 직원 숙소에 묵는 등 극도로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2. 5. 사망
1977년 6월 16일 오후 1시 22분경, 미국 일리노이주 80번 주간 고속도로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페르미 국립 가속기 연구소의 여름 연구 심의회를 위해 가족과 함께 콜로라도주 아스펜으로 향하던 중이었다.[34][35] 대형 트레일러가 중앙 분리대를 넘어 그의 차와 충돌했다. 사고 당시 이휘소 가족들은 경미한 부상을 입었지만, 이휘소는 즉사했다.[3]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10월 이휘소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을 추서했으며,[34] 2006년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은 그를 한국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했다.
3. 주요 연구 업적
이휘소는 페르미 연구소 이론물리학 부장으로서 이론 연구와 실험 계획 수립에 참여했다.[65] 1974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제17회 고에너지 물리학 국제회의에서 전약 이론 발전 상황을 발표하며, 와인버그와 살람의 이름을 따 '와인버그-살람 이론'으로 명명했다. 이는 압두스 살람이 1979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하는 데 기여했다.[67]
같은 해, 미국 국제개발청의 서울대학교 원조 계획 평가위원 자격으로 귀국, 박정희 정권에 대한 경계로 주한미군 용산기지 옆 주한 미국 대사관 직원 숙소에 묵었다.[69][70] 1976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연구회원,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71]
3. 1. 자발적 대칭 깨짐과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1964년, 이휘소는 지도교수인 아브라함 클라인(Abraham Klein)과 함께 자발적 대칭 깨짐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여, 소립자의 질량 존재를 설명하는 힉스 메커니즘의 등장에 기여했다.[8][36]기본 입자들은 게이지 입자를 공유하면서 상호작용을 하는데, 이때까지 세워진 게이지 이론만으로는 자연스럽게 질량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었다. 국소 게이지 대칭성을 갖는 라그랑지언에는 게이지 보손의 질량 항이 없고, 임의로 만든다고 해도 국소 게이지 변환에 대해 불변이지 않아 국소 게이지 대칭성을 위반하게 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게이지 보손은 질량이 없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한편 20세기 중반, 난부 요이치로와 제프리 골드스톤 등에 의해 “반드시 대칭적인 상태만이 가장 안정적이지는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대칭적인 상태보다도 더 안정적인 상태가 있을 수 있고, 만약 그렇다면 자연계는 스스로 대칭을 깨서라도 더 안정적인 상태가 되는 쪽을 선택한다”는 자발적으로 대칭성이 깨지는 가능성이 제기됐다. 그리고 골드스톤의 정리에 의하면 자발적으로 대칭성이 깨진 이론에는 반드시 무질량 입자가 존재하며 그러한 입자를 골드스톤 보손이라 정의한다. 이휘소와 클라인은 대칭성의 자발적인 깨짐의 예로서 당시 유명했던 초전도체와 하나하나 비교해가며 무엇이 골드스톤 보손이 될 수 있는지를 논했고, 결국 무질량 입자로서 추가적인 스푸리온(Spurion영어)이 필요하다고 제기하였다. 이 논문이 쓰여질 당시에는 힉스 보손의 존재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논문은 힉스 메커니즘과 같은 이론의 등장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 셈이다.
1969년, 이휘소는 자발적 대칭 깨짐을 논의할 때 사용되는 장난감 모델인 시그마 모형의 재규격화에 성공했다.[12][30][31]
이 무렵, 당시 네덜란드 대학원생이었던 헤라르뒤스 엇호프트는 힉스 메커니즘을 양-밀스 이론에 응용하여 국소 게이지 대칭성이 자발적으로 깨지는 모형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1970년 코르시카에서 열린 카르제(:en:Cargèse) 여름 학교에서 이휘소의 강의를 들었는데, 이때 그는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에 관해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얻고, 이에 성공했다.[83][13][14] 이 업적으로 엇호프트는 당시 그의 지도교수였던 마르티뉘스 펠트만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37][38][84][85][86]
데이비드 폴리처는 2004년 노벨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이휘소가 전약 통일 이론에 대한 엇호프트의 연구 결과를 재해석하여 알기 쉽게 설명해준 덕분에, 당시 학자들이 그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39][40][87] 여기서 폴리처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이휘소가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에서 1972년 가을학기에 강의했던 내용을 대학원생 어니스트 에이버스와 함께 정리해서 《피직스 리포트》에 단행본 형식으로 발표한 〈게이지 이론〉이라는 논문이다.[62]
3. 2. 맵시 쿼크 (Charm Quark) 질량 예측
셸던 글래쇼, 이오아니스 일리오풀로스, 루차노 마이아니는 1970년에 기묘도를 가진 입자의 베타 붕괴 시 중성 보존류가 없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맵시 쿼크(참쿼크)의 존재를 가정하였다.[41] 1974년 여름, 이휘소는 메리 게일러드, 조너선 로즈너와 함께 〈참쿼크를 찾아서〉라는 논문에서 케이온의 섞임과 붕괴에 해당하는 양을 계산하여 맵시 쿼크의 질량 범위를 예측하였다.[88]이 논문은 맵시 쿼크 탐색 실험의 지침서 역할을 하였다. 1974년 11월 11일, 스탠퍼드 선형 가속기 센터의 버튼 릭터 연구진과 브룩헤이븐 국립연구소의 새뮤얼 차오 충 팅 연구진이 제이/프시 중간자를 발견하여 맵시 쿼크의 존재가 간접적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이휘소 등이 논문을 저널에 기고하면서 프리프린트로 공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3. 3. 리-와인버그 경계 (Lee-Weinberg Bound) 계산
1977년 이휘소는 스티븐 와인버그와 함께 〈무거운 뉴트리노 질량의 우주론적 최소 경계치〉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72] 이 논문에서 그들은 초기 우주 팽창의 흔적으로 쌍소멸을 통해 다른 입자로 바뀌는, 충분히 무거우며 안정적인 입자가 남아있다면 그 상호작용의 세기는 최소한 2GeV일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여기서 다룬 입자는 윔프(WIMP)이다. 윔프의 질량이 작아질수록 그 쌍소멸 반응 단면적의 크기도 작아져야 하는데, 이는 대략 $m^2/M^4$ 정도이다. 여기서 $m$은 윔프의 질량이며, $M$은 Z보손의 질량이다. 이것은 초기 우주에서 풍부하게 생산된 윔프들 중 가벼운 윔프는 무거운 윔프보다 일찍 상호작용을 그만둔, 즉 우주의 온도가 더 높았을 때에 상호작용을 그만둔 윔프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휘소와 스티븐 와인버그의 계산에 의하면, 윔프의 질량이 2 GeV보다도 가볍다면 그 흔적의 밀도는 우주의 스케일을 뛰어넘는, 즉 있을 수 없는 값을 갖게 된다. 윔프의 질량이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는 이 경계를 리-와인버그 경계라고 한다.이 논문은 《피지컬 리뷰 레터》가 1977년 5월 13일에 접수되었고, 1977년 7월 25일에 제39권의 네 번째 호에 실렸다. 그러나 이휘소는 그해 6월 16일에 교통사고로 숨졌기 때문에 이 논문의 출판을 볼 수 없었고 이 논문은 사실상 그의 유작이었다.
4. 유산 및 평가
이휘소는 뛰어난 물리학자로서 학문적 업적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특히 그의 죽음을 둘러싼 여러 의혹과 논란은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다양한 형태로 재해석되기도 했다.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1993년)는 이휘소를 대한민국의 핵무기 개발을 돕다가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 묘사해 대중적 인지도를 높였다.[1]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며, 이휘소는 박정희 독재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핵 개발에 협력하지 않았다.[1] 페르미 국립 가속기 연구소(Fermilab)의 추모 내용에 따르면, 이휘소는 1977년 일리노이주 고속도로 I-80에서 대형 트레일러가 중앙 분리대를 넘어 그의 차와 충돌하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3]
4. 1. 대중적 인식
1993년에 출판된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이휘소를 대한민국의 핵무기 개발을 돕다가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 묘사한다.[1]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며, 이휘소는 박정희 독재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핵 개발에 협력하지 않았다.[1] 페르미 국립 가속기 연구소(Fermilab)의 추모 내용에 따르면, 이휘소는 1977년 일리노이주 고속도로 I-80에서 대형 트레일러가 중앙 분리대를 넘어 그의 차와 충돌하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3]소설의 내용 때문에 이휘소의 죽음에 대한 여러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SBS의 당신이 혹하는 사이 3기 6회(2022년 방영)에서는 이휘소 박사의 사망 음모론을 다루기도 했다.
이휘소의 유족들은 소설의 내용이 고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5. 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이봉춘 (李逢春) | |
어머니 | 박순희 (朴順姬) | |
둘째 여동생 | 이영자 | 한 살 아래 |
셋째 남동생 | 이철웅 | 네 살 아래[1] |
막내 남동생 | 이무언 | 여섯 살 아래 |
배우자 | 마리안 문 칭 심 ({{lang|zh|沈曼菁|} | } Marianne Mun Ching Sim|영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