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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50주년의 종전기념일을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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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후 50주년의 종전기념일을 맞아 발표된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전쟁 범죄와 침략 행위에 대한 사죄를 담고 있다.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담화를 통해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여러 국가에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준 것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사죄했다. 이 담화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역사적 견해로, 이후 역대 내각에 계승되었다. 담화 발표 이후, 일본 내에서는 찬반 양론이 있었으며, 한국,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은 담화의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구체적인 조치를 요구했다. 이후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등 역대 총리들도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거나,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담화를 발표하며 일본의 역사 인식에 대한 입장을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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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50주년의 종전기념일을 맞아
정보
무라야마 도미이치
무라야마 도미이치
개요
발표일1995년 8월 15일
발표자무라야마 도미이치 (당시 내각총리대신)
내용과거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한 반성 및 사죄
항구적인 세계평화에 대한 결의 표명
배경
시점제2차 세계 대전 종전 50주년
정치적 상황자유민주당, 사회민주당, 신당 사키가케의 연립 정권 하에서 발표
내용 상세
과거사 인식지난 대전에 의해 많은 국가,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 국민에게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
식민지 지배와 침략멀지 않은 과거,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행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안겨주었다.
반성과 사죄의심할 여지없이 이러한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
미래 지향잘못을 두 번 다시 범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표명한다.
평화 국가로서의 의지평화 국가로서 세계 평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공헌해 나갈 것
평가 및 영향
국내 반응긍정적 평가: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 표명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음.
비판적 시각: 표현의 모호성 및 진정성 부족에 대한 비판 존재.
국제적 반응대체로 환영: 특히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음.
일각의 우려: 일본의 과거사 문제 해결 의지에 대한 의구심 제기.
역사적 의미일본의 과거사 인식에 대한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됨.
기타
관련 항목고노 담화
간 담화
기시다 담화

2. 배경

무라야마 담화는 1945년 8월 15일 종전 50주년을 맞아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당시 내각총리대신이 각의 결정을 거쳐 발표한 성명이다. 이 담화는 이후 내각에도 계승되어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역사적 견해로 자주 언급된다.

무라야마 총리는 종전 50주년을 맞아 국내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매듭짓고 21세기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종전 50주년 국회 결의는 자민당과 각 파벌의 보수 강경파의 반발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에 무라야마 총리는 역대 총리가 표명했던 "사죄"를 집대성하고, 21세기 아시아 외교의 기본 이념을 담은 총리 담화를 발표하기로 결심했다.[34]

담화는 일본의 평화와 번영을 이룩한 국민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고, 여러 국민들의 지원과 협력에 감사하며, 평화 우호 교류 사업과 전후 처리 문제에 대한 대응을 추진할 것을 약속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국책을 그르쳐 전쟁을 일으키고 국민을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여러 국민들에게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준 것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를 표명했다. 특히,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고노 담화에서 언급된 군의 관여를 인정하고, 이에 대한 대응을 계속 성실하게 해나가겠다고 밝혔다.

한국중국에 대한 사죄 문제에 대해서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인해 많은 국가,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라고 언급하며, "미래에 과오가 없도록 하기 위해 의심할 여지 없는 이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여기에서 다시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하는 마음을 표명합니다."라고 밝혔다.

담화 작성 과정에서 무라야마 총리는 당시 통상산업대신이었던 하시모토 류타로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사전 조율을 부탁했다. 하시모토는 담화 내용에 동의하며, "패전"과 "종전"이라는 표현 중 "패전"으로 통일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무라야마 총리도 이에 동의했다.[35]

당시 자민당 간사장이었던 모리 요시로는 종전 50주년 국회 결의 과정에서 사회민주당이 '침략 행위에 대한 반성'이라는 표현을 강하게 주장하여 어려움을 겪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일본 유족회나 구 군인 전우 단체 등이 '침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36]

노동대신으로 각의 결정에 참여했던 히라누마 다케오는 갑작스러운 담화안 제출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37] 또한, 시마무라 요시노부, 노로타 요시나리, 후카야 타카시, 에토 세이시로 등 다른 각료들도 무라야마 총리가 사전 조율을 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38]

무라야마 총리는 담화 발표 후 기자회견에서 천황의 책임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국책을 그르쳤다"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시기나 정책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일본 정부의 개인 배상 문제에 대해서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등을 통해 법적으로 이미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밝혔다.

2005년 종전 60주년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가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발전시킨 고이즈미 담화를 발표했다.[41] 아베 신조 총리는 2015년 종전 70년 담화인 아베 담화를 발표하면서, 무라야마 담화의 "진심으로 사죄하는 마음" "통절한 반성" 문구를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침략' '식민지 지배' 문구는 일본의 행위가 아닌 일반론으로 언급하여 무라야마 담화와는 다른 맥락으로 담아냈다.[42][43]

2. 1. 일본 제국주의와 전쟁 범죄

무라야마 담화는 특히 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저질러진 일본의 전쟁 범죄와 잔혹 행위에 대해 사과했다. 이 일본의 전쟁 범죄는 주로 수백만 명의 사망자를 낸 일본 제국 육군일본 제국 해군이 저질렀다. 이러한 행위에는 포로에 대한 고문, 강제 노역, 생물학전, 약탈, 강간, 위안부 동원 등 광범위한 범죄가 포함된다. 일본 외무성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이 초래한 피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2. 2. 고노 담화 (1993)

전 내각관방장관 고노 요헤이


1993년 8월 4일, 자유민주당 내각 관방장관 고노 요헤이는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를 통해 일본 정부는 일본군이 군 운영 매춘 시설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으며, 위안부에게 일본군을 위한 성행위를 강요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했다.[1][2]

3. 담화의 전개 과정

1995년 1월, 자유민주당과 일본 사회당의 연립 정부가 출범하면서 공식적이고 포괄적인 사과를 발표하자는 제안이 나왔다.[3]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아시아 국가들의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본 내 보수 세력은 일본이 이미 충분히 사과했다는 이유로 반대했다.[3]

무라야마는 담화 문구와 표현을 놓고 자유민주당과 일본 사회당 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각의 결정" 방식을 통해 담화의 구속력을 확보하고자 했다.[4] 외무성 소속 타니노 사쿠타로는 성명서 초안 작성에 기여했으며, "침략"이라는 단어를 삽입하여 모호한 표현을 변경했다.[4]

하시모토 류타로자유민주당 내 주요 인사들이 담화에 동의하면서, 담화 발표가 가능해졌다.[35] 일본 유족회 회장 등을 역임한 하시모토는 "이견은 없습니다."라고 답하며 동의했다. 또한, 담화문에서 "패전"과 "종전"이라는 단어가 모두 사용되는 것에 대해 "패전"으로 통일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고, 무라야마도 이에 찬성했다.[35]

모리 요시로 (전 자민당 간사장, 당시 건설대신)는 당시 '사회민주당에서 '침략 행위에 대한 반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하게 나와, 정리하는 데 난항을 겪었다'고 회고했다.[36] 히라누마 다케오는 각의 중 갑자기 담화안이 나왔으며, 서명하지 않으면 자사사 연립정권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37]

4. 담화의 주요 내용

무라야마 도미이치일본어 총리는 담화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인해 아시아 여러 국가에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준 것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사죄했다. 특히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이러한 역사의 사실"이라고 지적하며, "깊은 반성에 서서 독선적인 내셔널리즘을 물리치고, 책임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국제 협조를 촉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5]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개별적인 전후 처리 과제에 대해서는 "계속 성실히 대응해 나가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5] 또한, 일본이 "유일한 피폭국이라는 체험"을 바탕으로 핵무기 폐기와 핵확산 금지 체제 강화를 위한 국제적인 군축 노력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5]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에 대해서는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 국내적으로도 국제적으로도 천황의 책임을 묻지는 않는다"며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5]

이 담화는 1945년 종전 50주년을 맞아 발표되었으며, 이후 내각에도 계승되어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역사적 견해로 자주 언급된다.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와 2006년 아베 신조 총리도 이 담화를 계승한다고 밝혔다.[41]

5. 담화 이후의 반응과 평가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당시 내각총리대신은 종전 50주년을 맞아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역사적 견해로, 이후 내각에도 계승되어 왔다.

담화는 일본의 평화와 번영을 이룩한 국민의 노력에 대한 경의, 평화 우호 교류 사업 추진,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한 반성과 사죄, 국제 협조와 핵무기 폐절을 목표로 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현재 추진하고 있는 전후 처리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나라와 이들 국가와의 신뢰 관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저는 계속 성실하게 대응해 나가겠습니다."라는 내용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응과 관련하여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34] 한국중국에 대한 사죄 문제에 대해서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인해 많은 국가,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라며, "통절한 반성의 뜻"과 "진심으로 사죄하는 마음"을 표명했다.

담화 작성 과정에서 하시모토 류타로 당시 통상산업대신은 무라야마 총리의 사전 조율 요청에 "이견은 없습니다."라고 답하며, '패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도록 제안했다.[35] 모리 요시로 당시 자민당 간사장은 "'침략 행위에 대한 반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하게 나와, 정리하는 데 난항을 겪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36]

히라누마 다케오 당시 노동대신은 "각의 중에 갑자기 담화안이 나왔다. 서명하지 않으면 자사사 연립정권이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있어,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증언했다.[37]

무라야마 총리는 담화 발표 후 기자회견에서 천황의 책임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아닙니다."라고 부정했으며, "어떤 내각의 어떤 정책이 잘못되었는가"라는 질문에는 "단정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라고 답했다. 또한, 일본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등에 따라 태평양 전쟁에 관련된 배상 문제는 법적으로 이미 해결되었다는 인식을 보이며, 개인 보상은 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40]

2005년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발전시킨 고이즈미 담화를 발표했으며,[41] 2015년에는 아베 신조 총리가 아베 담화를 발표하여 무라야마 담화의 "진심으로 사죄하는 마음" "통절한 반성" 문구를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침략' '식민지 지배' 문구는 다른 맥락으로 담아냈다.[42][43]

5. 1. 일본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의 담화에 대해 일본 내에서는 찬반 양론이 존재했다. 일본 국민 대다수는 담화를 지지했지만,[6] 일부 보수 세력은 일본의 전쟁 책임이 이미 해결되었으므로 더 이상의 사죄는 불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였다.[7]

아키히토 천황은 기념일을 기념하는 의식에서 무라야마의 사과를 지지하고 일본의 과거사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하며 전쟁 희생자들을 애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격려를 주었다.[6]

당시 문부대신이었던 시마무라 요시노부는 반복적인 사과에 의문을 제기하며, 일본이 침략 국가가 아니었다는 발언을 했다가 대중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항의를 받고 사과하며 발언을 철회했다.[7]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도 무라야마 담화를 인용하여 아시아 여러 나라에 사죄하는 담화를 발표했고, 2006년 아베 신조 총리 역시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다고 밝혔다.

5. 2. 대한민국

대한민국 국민들은 무라야마 담화의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구체적인 조치와 일본 정부의 직접적인 배상을 요구했다. 아시아여성기금은 대한민국 위안부 피해자들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거부당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등 일본 총리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과거사 관련 발언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부정적인 감정을 심화시켰다. 2012년 아산정책연구원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민들은 무라야마 담화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독도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5. 3. 중국

村山富市|무라야마 도미이치중국어 담화에 대한 중화인민공화국의 반응은 대체로 차분했다. 모든 아시아 국가가 이 담화에 대한 공식적인 반응을 발표하지는 않았다.[17]

5. 4. 기타 국가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은 일부 서방 국가들은 무라야마 담화를 따뜻하게 환영했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일부 아시아 국가들은 중국, 대한민국과 유사한 반응을 보였다. 서방 국가들에 비해 반응은 대체로 차분했으며, 모든 아시아 국가가 무라야마 담화에 대한 공식 반응을 발표하지는 않았다.[17] 그러나 중국 및 대한민국과는 달리, 일본은 이 담화를 통해 타이완 및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상당한 수준의 화해를 이룬 것으로 보이며, "용서하되 잊지 않겠다"는 태도를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된다.[18]

6. 역대 일본 총리들의 대응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발표한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역사적 견해로, 이후 역대 내각에도 계승되어 왔다. 무라야마 담화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준 것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했다.

담화 작성 과정에서 무라야마는 당시 통상산업대신이었던 하시모토 류타로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사전 조율을 부탁했고, 하시모토는 "이견은 없습니다."라고 답하며 담화에 동의했다. 또한, 하시모토는 담화 내에서 '패전'과 '종전'이라는 단어가 혼용되는 것을 지적하며 '패전'으로 통일할 것을 제안했고, 무라야마도 이에 찬성했다.[35]

당시 건설대신이었던 모리 요시로는 "사회민주당에서는 '침략 행위에 대한 반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하게 나와, 정리하는 데 난항을 겪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일본 유족회나 구 군인의 전우 단체"의 반발을 우려하며, '침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밝혔다.[36]

노동대신이었던 히라누마 다케오는 "각의 중에 갑자기 담화안이 나왔다. 서명하지 않으면 자사사 연립정권이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있어,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증언했다.[37]

무라야마는 담화 발표 후 기자회견에서 천황의 책임 문제에 대해서는 "전쟁이 끝난 당시에도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폐하의 책임은 묻지 않았습니다."라고 언급하며 그 존재를 부정했다.[40] 또한, 일본 정부의 배상 문제에 대해서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등을 통해 "법적으로는 이미 해결되었다"라는 인식을 보이며, 개인 보상을 국가로서는 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이후 2005년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발전시킨 고이즈미 담화를 발표했으며,[41] 2015년에는 아베 신조 총리가 아베 담화를 발표했다.

6. 1. 고이즈미 담화 (2005)

2005년 자유민주당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아시아 여러 나라에 사죄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에서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통해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의 여러 나라의 사람들에게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여기에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나타내 진심으로 깊이 사과드리는 마음을 표명합니다"와 같은 내용은 무라야마 담화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19]

무라야마 담화와 마찬가지로, 고이즈미 담화는 "식민지 지배", "침략", "깊은 유감"과 같은 용어를 명시적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고이즈미의 반복적인 참배는 이 지역의 화해라는 맥락에서 일본과 이웃 국가 간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야스쿠니 신사는 1868년부터 1954년까지의 기간 동안 250만 명의 일본 전쟁 사망자를 기리고 있으며, 여기에는 A급 전범 14명이 포함되어 있다. 현직 일본 정부 관계자의 신사 참배는, 사적인 자격이라 할지라도, 중국대한민국으로부터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20]

6. 2. 아베 담화 (2015)

아베 신조 총리는 2015년 8월 14일, 전후 70주년 담화인 아베 담화를 발표했다.[24] 아베 담화는 무라야마 담화와 같은 이전 담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20세기 역사와 21세기 일본의 역할 및 세계 질서"를 재고하기 위해 만들어진 위원회 패널의 보고서도 참고했다. 패널과 아베 담화의 근본적인 목적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70년 동안의 화해와 국제적 기여라는 맥락에서 21세기의 비전을 설계하는 것이었다.

아베 담화 -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의 역할


아베는 역대 일본 내각이 발표한 담화의 일반적인 내용은 유지하되, 무라야마 담화에 나타난 것과 같은 문구를 사용하는 것은 꺼리며 "이전 문구를 사용했는지 새로운 문구를 추가했는지에 대한 논쟁"을 피하고 싶다고 말했다.[22] 이러한 아베의 발언에 대해 오카다 가쓰야 당시 야당 민주당 대표는 "식민 통치와 침략을 '조각'이라고 부르는 총리의 발언은 용납될 수 없으며, 원래의 담화는 이미 강력한 국제적 인정을 받았다"고 비판했다.[22] 에다 겐지 유신회 대표는 무라야마 담화의 문구를 변경하면 "주변 국가들에게 다른 메시지를 보낼 것"이라고 경고했고, 일본 공산당 시이 가즈오 위원장은 아베에게 무라야마 담화의 핵심 내용을 유지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 공명당 야마구치 나쓰오 대표는 무라야마 담화에 사용된 표현의 형식이 중요하므로 새로운 담화도 이와 유사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22]

중국 관영 언론은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발언이 사과를 표명하지 않았다고 비판했으며,[25] 대한민국은 "실망스럽다"고 평가했다.[26] 대만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일본 정부가 전쟁 당시의 침략 행위를 검토하고 역사의 교훈을 배우라고 촉구했다.[26]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는 담화 발표 2시간 만에 아베 담화가 무라야마 담화의 단어를 차용하여 더 추상적인 버전을 만들었다고 비난했다.[27] 그는 아베 총리가 담화에서 "침략"과 같은 단어는 사용했지만, 전쟁 중 일본의 구체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이 담화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언급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28] 무라야마는 자신의 담화를 옹호하며 아베 총리에게 같은 입장을 취할 것을 촉구했다.[29][30]

6. 3. 기타 총리들의 입장

역대 일본 총리들은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거나 존중하는 입장을 대체로 표명해 왔다.

총리내용
하시모토 류타로1996년 중의원 본회의에서 담화의 의의를 바탕으로 아시아 외교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44][45]
오부치 게이조1998년 중의원 본회의에서 담화에 기초하여 외교를 추진하겠다고 답변했다.[46][47] 같은 해, 중일 공동 성명에 무라야마 담화를 중시하는 문구가 포함되었다.[48]
모리 요시로2000년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무라야마 담화가 일본 정부의 공식 견해이며, 이를 바탕으로 외교 교섭을 하겠다고 밝혔다.[49]
고이즈미 준이치로2005년 종전 60주년을 맞아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 고이즈미 담화[41]를 발표하고, 아시아 국가에 다시 사죄했다. 고이즈미 담화에는 "중국과 한국"이라는 국명이 명시되었다.[41]
아베 신조2006년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다고 명확히 밝혔다.[50]
후쿠다 야스오2008년 중일 정상 회담 후 공동 성명에서 무라야마 담화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51][52] 그러나 2007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후보 기자 회견에서는 "총리가 말했으니 옳은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53]
아소 다로2008년 중의원 본회의에서 무라야마 담화와 고이즈미 담화를 계승하겠다고 밝혔다.[54]
하토야마 유키오2009년 미중 정상 회담에서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다고 표명했다.[56]
간 나오토2010년 한국 병합 100주년을 맞아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 사죄 담화(간 담화)를 발표했다.[57][58] 그러나 중국, 대만, 북한 등은 간 담화가 한국에 대해서만 사죄하는 담화라고 비판했다.
노다 요시히코2012년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서 무라야마 담화의 표현을 사용했다.
아베 신조2013년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무라야마 담화를 그대로 계승하는 것은 아니라고 답변했다.[59] 그러나 2015년 신년 기자 회견에서는 무라야마 담화를 포함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겠다고 밝혔다.[62]
스가 요시히데2021년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고 있다는 답변서를 각의 결정했다.[64]
기시다 후미오2023년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앞으로도 계승하겠다고 밝혔다.[65]


7. 한국의 관점과 과제

대한민국 국민들은 무라야마 담화의 구체적인 조치와 그 취지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다고 느껴 해당 성명의 진정성에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해당 성명의 정신으로 설립된 아시아여성기금은 대한민국 위안부 피해자들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거부당했다.[8] 이들은 일본 정부의 직접적인 배상을 요구했다.[9][10] 또한 한국의 지식인들은 일본 정부가 1910년 강제 병합 사실을 인정하고 선언할 것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이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11]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한국인 피해자들은 법적으로 일본 정부나 일본 기업에 개인적인 청구를 할 수 없게 되었다.[12]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2001년 4월 26일 ~ 2006년 9월 26일)와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발언 철회는 대한민국 국민들 사이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지속시켰다.[13]

2012년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민들은 무라야마 담화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며, 이를 독도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14] 이 연구는 독도 문제가 "한일 관계 개선의 가장 큰 장애물"로 여겨진다고 결론지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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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뉴스 Japanese Apology for War Is Welcomed and Criticized https://www.nytimes.[...] 2020-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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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웹사이트 The Long Road to Reconciliation in East Asia https://www.nippon.c[...] 2020-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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