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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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채명신은 일제강점기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활동하다가 1947년 월남한 대한민국의 군인이다.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백골병단을 이끌고 유격전을 지휘했으며, 5.16 군사정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감찰위원장을 역임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주월한국군 사령관을 지냈으며, 이후 브라질, 스웨덴, 그리스 대사를 역임했다. 2013년 사망했으며, 유언에 따라 병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베트남 전쟁 중 민간인 학살 의혹과 5.16 군사정변 가담 등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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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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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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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채명신 |
한글 | 채명신 |
한자 | 蔡命新 |
로마자 표기 | Chae Myeongsin |
일본어 표기 | 蔡命新 |
출생일 | 1926년 11월 27일 |
사망일 | 2013년 11월 25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조선 황해도 곡산군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북도 곡산군) |
사망지 | 서울특별시, 대한민국 |
종교 | 개신교(순복음교회) |
배우자 | 문정인 |
본관 | 인천 |
정당 | 무소속 |
군사 경력 | |
소속 | 대한민국 육군 |
복무 기간 | 1948년 ~ 1972년 |
최종 계급 | 중장 |
근무 | 육군본부 육군 제2군사령부 |
지휘 | 제38보병사단 제5보병사단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주월한국군사령부 제2작전사령부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송악산 전투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
수상 내역 | |
훈장 | 태극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3) 을지무공훈장(2) 보국훈장 국선장 방위포장 미국 공로훈장 베트남 공화국 최고훈장 |
기타 | 사ントス・デュモン勲章 藍綬褒章 검도錬士 오단 |
기타 이력 | |
이후 활동 | 대(對) 스웨덴 대사 대(對) 그리스 대사 대(對) 브라질 대사 대한태권도협회 초대 회장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병사 묘역 |
2. 생애
1926년 11월 27일 황해도 곡산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국 독립 운동가였고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1]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47년 공산주의 체제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왔다.[2]
1948년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 5기로 입교하여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임관 후 제주 4·3 사건 진압, 개성 송악산 전투, 태백산맥 지역 공비 토벌 등에 참여했다.[2]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최전선에서 싸웠으며, 특히 유격부대인 '백골병단'을 창설하고 지휘하여 조선인민군 후방에서 큰 전공을 세우며 게릴라전 전문가로 이름을 알렸다.[2][3]
휴전 이후에는 여러 부대의 연대장, 사단 참모장, 훈련소장 등을 역임하며 군 경력을 쌓았다.[4][23] 1958년 준장으로 진급하여 제1야전군 작전참모, 제38보병사단장, 제5보병사단장 등을 지냈다.[4]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제5보병사단장으로서 정변에 참여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감찰위원장을 맡기도 했다.[5][23] 이후 소장으로 진급하고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차장,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 유학 등을 거쳤다.[23]
1965년부터 1969년까지 초대 주월한국군사령관으로 부임하여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을 지휘했다. 그는 파병 초기에는 베트남의 특수한 환경과 게릴라전의 어려움을 이유로 파병에 반대했으나,[7] 박정희 대통령의 설득과 국가적 상황을 고려하여 사령관직을 수락했다. 베트남 현지에서는 미군과의 지휘권 문제 조율, 한국군의 독자적인 작전 수행, 태권도 보급 등에 힘썼다.[8][12] 그러나 그의 강경한 작전 수행 방식은 퐁니·퐁넛 학살과 같은 민간인 학살 의혹을 낳기도 했으며, 이는 미군과의 갈등 요인이 되기도 했다.[9][10][11][24]
1969년 귀국하여 제2군사령관을 역임했다.[13] 그러나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헌법을 통한 장기 집권 시도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면서 군 내부에서 입지가 좁아졌고, 결국 대장 진급에서 제외된 채 1972년 6월 1일 중장으로 예편했다.[14]
전역 후에는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주 스웨덴 대사, 주 그리스 대사, 주 브라질 대사를 역임하고 1981년 공직에서 완전히 은퇴했다.[15] 은퇴 후에는 베트남 참전 전우회 회장, 한국전쟁 참전유공자회 회장 등을 맡아 참전 군인들의 권익 보호에 힘썼다.[16]
2013년 11월 25일 담낭암으로 별세하였다. 그는 생전에 장군 묘역 대신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한 병사들 곁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유언을 남겼고, 이에 따라 국립서울현충원 사병 묘역에 안장되었다.[17][26]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채명신은 1926년 11월 27일 황해도 곡산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항일운동가였던 채은국(蔡殷國)이었고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채명신은 모태 신앙인으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광복 직후 감옥에서 석방되었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1945년 12월 초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교회 권사로 활동하였다.[1]1944년, 19세의 나이로 제2국민병으로 징집되어 일본군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부대 식당은 장교 및 부사관용과 병사용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
광복 후 평양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였고, 평안남도 용강군의 덕해소학교 교사로 처음 부임했다. 이후 진남포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소련군정 시기, 평양군관학교 개교식에서 김일성을 만나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1947년, 공산주의 체제를 피해 미군정이 있는 남쪽으로 홀로 월남하였다. 이 과정에서 교회 권사였던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과 헤어지게 되었다.[2] 서울에 도착한 채명신은 1948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 제5기 생도 모집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그는 9개월간의 사관학교 생활 동안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며, 졸업 시 400명 중 26등을 기록하고 소위로 임관하였다.[2]
2. 2. 군 경력
대한민국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으며, 베트남 전쟁 참전 전우회장, 6·25 참전유공자회 회장, 베트남 참전 유공전우회 총재 등을 역임했다.교사로 재직하다가 1948년 육군사관학교 5기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였다. 임관 직후 제주 4·3 사건 진압 작전에 참여했으며, 1949년에는 개성 송악산 전투와 태백산맥 지역 공비 토벌 작전에 참전했다. 한국 전쟁 발발 후에는 최전선에서 부대를 지휘했으며, 특히 '백골병단'이라는 유격부대를 이끌고 적 후방에서 활동하며 전공을 세웠다.
휴전 후에는 제7보병사단 제5연대장, 제3보병사단 참모장, 제20보병사단 제60연대장, 제3군단 작전참모, 육군본부 작전기획과장, 논산 제2훈련소 참모장, 제1야전군 작전참모, 제38보병사단장, 제5보병사단장 등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제5보병사단장으로서 정변에 가담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감찰위원장을 지냈다.
이후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차장,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 유학, 제3관구 사령관 등을 거쳐 1965년 베트남 전쟁 파병이 결정되자 초대 주월한국군사령관으로 부임하여 1969년까지 약 4년간 한국군을 지휘했다. 베트남에서 귀국 후에는 제2군사령관을 역임하고 1972년 중장으로 예편했다.
2. 2. 1. 한국전쟁 이전
1944년, 19세의 나이로 징병되어 일본군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았고, 이후 평안남도에 배치되었다.[2] 1945년 광복 이후에는 평양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였다.[2] 평양사범학교 졸업 후 교사로 발령받아, 평안남도 용강군의 덕해 초등학교에 부임하였다. 이후 진남포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소련군정 시기, 평양군관학교 개교식에서 김일성을 만났으나 그의 동행 제안을 거절하였다.[2] 1947년, 공산주의 체제를 피해 미군정 하의 남한으로 홀로 월남하였다. 이 과정에서 교회 권사이던 어머니와 다른 가족들과는 이별하게 되었다.[2]
서울에 도착한 후, 목사가 되려던 본래의 꿈 대신 군인의 길을 선택하여 1948년 4월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 제5기 생도 모집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당시 사관학교는 강도 높은 훈련과 식량 부족 등 열악한 환경이었으나, 채명신은 9개월간의 교육 기간 동안 우수한 성적(수석, 졸업 시 400명 중 26등)을 거두었다.[2] 육군사관학교 제5기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였다.
임관 직후인 1948년, 동기 8명과 함께 제주도 9연대로 발령받았다. 당시 제주도는 정부 수립 반대 여론이 강하고 제주 4·3 사건의 여파로 혼란스러워 장교들 사이에서 기피 지역으로 여겨졌다. 부임 후 부대 내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세력의 감시와 위협에 시달렸으며, 직속 상관인 중대장마저 그의 목숨을 노리는 등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채명신은 진심으로 소대원들을 대하며 마음을 얻었고, 이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목숨의 위협을 받는 등 힘든 시기를 보냈다. 그는 제주 4·3 사건 진압 작전에 참여하였다.[2]
1949년 5월 4일에는 개성 부근 송악산 전투에 보병중대장으로 참전하여 포병중대장 노재현 대위가 이끄는 포병 1개 중대와 함께 싸웠다. 같은 해 11월에는 남파된 북한 공작원과 빨치산 등 공산 게릴라를 토벌하기 위해 태백산맥 지역에 투입되었다. 당시 강원도와 경상북도 산악 지대는 게릴라 활동이 활발한 곳이었다. 이 시기 강원도에서 월남 후 2년 만에 어머니와 잠시 재회했으나, 3주 만에 다시 헤어져야 했다.[2]
2. 2. 2. 한국전쟁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참전하였다. 초기에는 25연대 1대대장으로 복무하다가 영천 전투 이후 제8사단 21연대 1대대장(1950년 8월 8일 대리[21])으로 임명되어 북진 작전에 참여했다. 부대는 평안북도 희천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해야 했다. 1950년 12월, 적진에 고립된 21연대장을 구출하기 위해 특공대를 이끌었으나, 구출 과정에서 민가에 숨어있던 조선인민군에게 포위되었다. 채명신은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지만 연대장은 포로가 되었다. 며칠 후 채명신 자신도 부하 두 명과 함께 민가에서 조선인민군에게 포위되었으나, 자살을 결심했던 순간 운 좋게 탈출에 성공했다.[2]
1951년 2월, 채명신은 '백골병단'이라 불리는 유격부대를 창설하고 지휘했다. 백골병단은 조선인민군 점령지에 침투하여 후방 교란 작전을 펼치며 뛰어난 전과를 올렸다.[2] 부대는 38선 이북 깊숙이 진출하여 활동했으며, 두 차례나 조선인민군의 포위망에 고립되었지만 성공적으로 탈출했다.[2] 1951년 5월에는 조선인민군의 대규모 포위 공격을 받았으나, 성공적인 돌파를 이끌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인해 부대원들의 인명 피해가 컸다.[3] 백골병단의 활동과 전투 경험은 이후 대한민국 육군의 중요한 전사 연구 자료 및 실전 교육 사례로 활용되었으며,[3]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콩에 대한 전술 개발에도 영향을 미쳤다.[3] 채명신은 이 경험을 통해 대한민국 육군의 게릴라 전술 전문가로 인정받게 되었다.[3]
그러나 당시 백골병단에는 민간인 출신 대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전쟁 후 대한민국 정부나 군으로부터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했으며, 일부는 다시 군에 입대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채명신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들에 대한 사후 대책 마련을 위해 노력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안타까웠다고 술회했다.
3개월간의 백골병단 활동을 마치고 귀환한 채명신은 대령으로 진급했다. 1951년에는 11연대 편성에 참여하고 스스로 연대장을 자원하여 부대를 이끌었다.[3] 이후 제7사단 제5연대장(1951년 9월 취임), 제3사단 참모장(약 2개월), 제3사단 제22연대장(약 1개월)을 거쳐 1953년 5월 27일에는 제20사단 제60연대장[22]으로 임명되어 동부전선의 M1고지 전투를 지휘했다. M1고지를 최종적으로 점령한 이후 휴전을 맞이했다. 한국 전쟁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소장까지 진급했다.
2. 2. 3. 한국전쟁 이후

1953년 한국전쟁 휴전협정 체결 후 채명신은 대령으로 진급하여 제7보병사단 제5연대장, 제3보병사단 참모장, 제20보병사단 제60연대장을 역임했다. 제3보병사단 참모장으로 근무할 당시 사단장이었던 박정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4] 연대장 시절에는 경북 영덕의 재력가 집안 출신으로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한 문정인과 결혼하여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1954년에는 제3군단 작전참모와 육군본부 작전기획과장(작전계획처장)을 지냈다. 1955년 10월에는 논산 제2훈련소 참모장으로 부임하였다. 당시 4만여 명의 훈련병이 있던 논산훈련소는 각종 비리와 부정이 만연한 상태였다. 채명신은 처음에는 부임을 거부했으나, 신임 훈련소장 양국진 중장과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의 강권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훈련소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훈련병들의 열악한 피복 상태와 권력층 자제들의 병역 회피 문제 등을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유력 가문의 자제들에게 속달우편을 보내 입소를 명령했으며, 경무대 비서관이 특정 훈련병의 부당한 휴가 처리를 요구했을 때도 논리적으로 맞서 이를 거절하기도 했다.
1958년 8월 준장으로 진급하여 제1야전군 작전참모로 부임했고, 이후 제38보병사단장(1959년 4월)과 제5보병사단장(1960년 4월)을 역임했다.

제5보병사단장으로 재직 중이던 1961년, 채명신은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정변에 참여했다. 이 군사정변으로 대한민국 제2공화국은 종식되고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수립되었으며,[5] 채명신은 국가재건최고회의 감찰위원장을 맡았다.[23]
1962년에는 대한택견협회를 공동 설립하고 1964년까지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택견과 군의 연계를 강화하고 여러 문파를 통합하여 공통 규정을 제정했으며, 대한민국 최초의 택견 승단 심사를 조직하는 등 택견 발전에 기여했다. 다만 군사정부의 다른 직책을 겸임하면서 협회 실무는 주로 부회장에게 위임되었다.[6]
1963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차장을 지냈다. 1964년에는 미국 캔자스주 포트리븐워스의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에서 수학했으며,[23] 귀국 후에는 제3관구 사령관에 부임했다.[23]
2. 2. 4. 베트남 전쟁
1965년 4월, 채명신은 박정희 대통령의 소환 명령을 받고 청와대로 갔다. 박정희는 그에게 베트남 전쟁 전투부대 파병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33] 당시 자신이 주월한국군 사령관으로 내정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채명신은 파병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 그는 한국 전쟁 경험을 통해 게릴라전의 어려움을 알고 있었고, 베트남 파병 시 호찌민이라는 지도자와 밀림 지형을 가진 베트콩을 상대로 힘든 싸움이 될 것을 예상했다. 또한, 당시 미국은 명분 없는 전쟁이라는 국제적 비난과 국내 반전 운동에 직면해 있었다.[7]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파병을 거부할 경우 주한미군 2개 사단을 철수하겠다는 미국 측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 당시 북한에 비해 군사적 열세였던 한국에게 미군 2개 사단의 이탈은 국방력에 큰 부담이었다. 또한 박정희는 과거 베트남 파병 제안이 거절되었다가 결국 미국의 요청으로 수락된 점, 그리고 파병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경제적, 군사적 이점을 고려하여 파병을 결정했다. 결국 그 해 8월, 채명신은 박정희의 간곡한 설득을 받고 주월한국군 사령관직을 수락하여 베트남으로 파견되었다.

베트남에서 주월 미군사령관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미군 주도의 통합 사령 체계를 구상했으나, 채명신은 한국군이 용병처럼 보이는 것을 원치 않아 이를 거부했다. 대신 두 사령관은 '신사협정'을 맺어 3개국 위원회를 설립하고, 채명신과 주월 미군 참모가 참여하는 방식으로 지휘 문제를 해결했다. 실질적으로는 미 육군 스탠리 R. 라르센 소장이 한국군의 임무, 작전, 지역 역할을 개발하며 지휘권을 행사했다. 채명신은 한국 전쟁 당시의 게릴라전 경험을 바탕으로 베트콩에 대응하기 위해 강경한 전술을 시행했다.[8]
베트남 전쟁 중 그는 지하 조직과 군 내외부에 침투한 베트콩 프락치들의 암살 위협에 시달렸으며, 무좀과 풍토병으로 고생했다. 1969년 3월에는 미국 닉슨 대통령으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고, 1969년 5월에는 응우옌 반 티에우 남베트남 대통령으로부터 최고 훈장을 수여받았다. 1969년 4월에는 헬리콥터로 이동 중 베트콩의 공격을 받아 국군 9사단 28연대 주둔지인 투이호아 인근에서 헬기가 추락하여 부상을 입었으나 목숨을 건졌다.

채명신은 게릴라전 전문가로서 베트콩의 소행으로 위장한 인질극과 보복 등 강경한 전술을 채택했으며,[9] 이는 미군 사령관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와의 갈등을 유발하기도 했다.[10] 1968년 퐁니·퐁넛 학살이 발생했을 때, 웨스트모어랜드는 여러 차례 조사를 요구했지만 채명신은 베트콩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11][24] 그러나 미 육군 감찰관실 로버트 모어헤드 쿡 대령의 조사 결과, 학살의 범인이 한국 해병대 청룡부대라는 보고서가 발표되었다.[11] 후일 채명신은 미군의 조사 요청에 따라 한국군 자체 조사가 이루어졌음을 인정했다.
한편, 채명신은 베트남에서 태권도 보급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대한태수도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한 경험을 바탕으로 태권도 교관단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으며, 태권도를 군사 전술 및 대민 심리전의 일환으로 활용했다.[34] 1965년 월남태권도협회 창설을 지원하여 태권도 보급을 체계화하고 저변을 확대했다.[34] 그는 맹호부대 군수참모였던 우종림 중령에게 태권도 시범단을 조직하게 하여 퀴논 지역의 베트남 군부대, 경찰, 학교, 민간인들에게 시범을 보이도록 했다. 다만, 베트남 고위층 인사가 격파 시범에 거부감을 보이자 격파는 되도록 삼가도록 지시했다고 한다.[34] 채명신은 "주월 한국군의 작전 중 하나는 태권도의 보급이었다"[35]고 말하며, 태권도 교관들의 활약을 높이 평가했다.[35] 그는 기술 보급뿐만 아니라 태권도 정신 함양에도 중점을 두어, '태권도 5개 수칙'을 만들어 수련생들이 암기하고 준수하도록 강조했다.[36] 1966년 퀴논의 한 고등학교에서 태권도를 배운 불량 학생들이 교사에게 반항하는 문제가 발생하자, 채명신은 직접 학생들을 훈육하고 태권도가 심신 단련과 예의 함양에 도움이 된다고 설득하여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36][37]
베트남에서 귀국 후에는 제2군 사령관을 역임했으며, 베트남 전쟁 회고록인 《베트남 전쟁과 나》를 집필했다.[12] 그는 손미 학살을 지휘한 윌리엄 칼리 중위의 행동에 대해 "전쟁에서는 흔한 일"이라며 이해를 보이는 발언을 했고,[25] 2000년에는 베트남 전쟁 중 발생한 사건들에 대해 "우리는 누구에게도 사죄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2. 3. 전역 이후
1969년 5월 3일 특별군용기편으로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하였고, 같은 해 5월 12일 육군 제2군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1972년 초, 대통령 박정희는 채명신을 호출하여 자신의 집권 연장 의사를 밝히며 군부 내 지지를 확보해 줄 것을 요청했다.[13] 그러나 채명신은 "각하. 정권을 연장하시겠다는 건 결국 이중플레이 아닙니까? 정치라는 건 국민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 이게 지도자의 생명인데 그렇게 나가시면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하며 신의가 정치인의 생명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처음에는 민족 중흥과 자주국방을 명분으로 내세우던 박정희는 채명신의 반대에 분노했다. 이후 두 차례 더 독대했으나 채명신은 계속 반대 의사를 굽히지 않았고, 결국 인사상 불이익을 받아 대장 진급에서 탈락하게 되었다.[14] 당시 박정희는 대한민국 제4공화국 수립을 준비하며 유신헌법 통과를 통해 권력을 강화하려 했고, 채명신은 이러한 시도에 지속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14]
결국 1972년 6월 1일, 제2군사령관직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중장 계급으로 전역하였다.[38][14]
군에서 물러난 후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1972년 주 스웨덴 대한민국 대사로 임명되어 스톡홀름으로 파견되었고, 1973년에는 주그리스 대사로 임명되어 아테네로 부임했다.[15] 1977년 4월에는 주브라질 대사로 임명되었다.[40] 외교관으로 활동하는 동안 박정희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는 대체로 침묵을 지켰다.
박정희의 장기 집권에 반대하여 군복을 벗었음에도, 박정희와의 관계는 복잡하게 이어졌다. 한 기자가 서운한 감정이 없는지 묻자 채명신은 "1972년 말부터 1980년까지 줄곧 해외 근무를 했는데, 박 대통령이 나한테는 참 잘해 주었어요. 아이들 학비에 보태라며 봉투도 자주 보내 박동진 외무 장관이 '청와대에서 웬 봉투를 그리 많이 보내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라고 답했다.[39]
1979년 10월 26일, 주브라질 대사로 재직 중 박정희의 서거 소식을 접했다.[40] 1981년 5월, 주브라질 대사를 끝으로 모든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40][15]
2000년에는 베트남 참전 전우회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2004년에는 한국전쟁 참전유공자회 회장과 베트남 참전 전우회 회장을 겸임하였다.[16]

2013년 11월 25일,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담낭암으로 투병 중 향년 88세로 별세하였다.[17] 그는 생전에 장군 묘역이 아닌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한 병사들 곁에 묻히기를 희망했으며, 유언에 따라 국립서울현충원의 사병 묘역에 안장되었다.[17][26]
3. 논란 및 비판
채명신은 군인으로서 여러 활동을 했지만, 그의 행적에는 논란과 비판 역시 존재한다. 5·16 군사정변에 가담하여 박정희 군사 정권 수립에 기여했으며,[5]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감찰위원장을 역임했다.[23]
베트남 전쟁 당시 주월한국군사령관으로서 퐁니·퐁넛 학살과 같은 민간인 학살 의혹에 연루되었고, 해당 사건을 베트콩의 소행으로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미군 사령관에게 허위 보고했다는 비판을 받는다.[24] 또한 손미 학살을 일으킨 미군 장교의 행동에 대해 "전쟁에서는 흔한 일"이라고 발언하거나,[25] 2000년 베트남 전쟁 중 사건들에 대해 "우리는 누구에게도 사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등 전쟁 범죄에 대한 그의 인식은 지속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 1972년 박정희의 3선 개헌을 넘어선 유신헌법 추진에 대해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지도자의 생명"이라며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38] 이로 인해 대장 진급에서 누락되고 1972년 6월 1일 중장으로 예편하는 등 군 경력에서 불이익을 받았다.[38][14]
3. 1.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의혹
채명신은 베트남 전쟁 파병 초기에는 한국군의 현지 적응 문제와 국내 영향 등을 이유로 파병에 반대했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결정에 따라 결국 동의하고 주월한국군사령관으로 부임했다.[7] 당시 주월 미군 사령관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는 미군 중심의 통합 지휘 체계를 원했지만, 채명신은 한국군이 용병처럼 보이는 것을 우려하여 독립적인 지휘권을 주장했다. 양측은 '신사협정'을 통해 3개국 위원회를 설립하는 절충안에 합의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미군이 한국군의 작전을 상당 부분 통제했다.[8]
채명신은 한국 전쟁 당시의 게릴라전 경험을 바탕으로 베트콩에 대응하기 위해 강경한 전술을 채택했다. 이 전술에는 베트콩의 소행으로 위장한 민간인 대상 작전이나 보복 행위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9] 이는 미군 지휘부와의 심각한 갈등을 유발했다.[10]
1968년 퐁니·퐁넛 학살 사건이 발생하자, 웨스트모어랜드 사령관은 채명신에게 여러 차례 조사를 요구했다. 그러나 채명신은 이 학살이 베트콩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며 관련 의혹을 부인했다.[11][24] 하지만 이후 미국 육군 감찰관실의 조사 결과, 해당 학살은 한국 해병대 청룡부대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밝혀졌다.[11]
채명신은 미군과의 전술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훗날 미군이 한국군의 대게릴라 전술을 채택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미군에 의한 손미 학살을 지휘한 윌리엄 칼리 중위의 행동에 대해 "전쟁에서는 흔한 일"이라며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25] 2000년에는 베트남 전쟁 중 발생한 여러 사건들에 대해 "우리는 누구에게도 사죄할 필요가 없다"고 발언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3. 2. 5.16 군사정변 가담
제5보병사단장으로 재직 중이던 1961년 5·16 군사정변에 가담하였다. 그는 휘하 제5보병사단 병력을 동원하여 정변에 참여했으며, 이는 박정희가 주도한 군사 정권 수립과 제2공화국의 종식으로 이어졌다.[5]

정변 하루 전인 1961년 5월 15일 저녁, 채명신은 육사 후배인 조창대 중령을 통해 다음 날로 예정된 '거사'를 알리는 박정희의 밀서를 받았다. 당시 쿠데타 계획은 이미 주한 미군 방첩대(CIC)에 누설된 상태였기 때문에 발각될 경우 관련된 모든 이들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채명신은 잠시 망설였으나, 제1야전군사령관 이한림과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를 만나 담판을 지어 정변 참여를 결정했다.
5·16 군사정변 직후 혁명 5인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5월 20일 군사혁명위원회가 구성되자 위원으로 참여했다.[28] 같은 해 7월,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면서 채명신은 국가재건최고회의 감찰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23] 채명신 본인은 야전 지휘관으로 남기를 원했으나, 박정희 의장 주변에서는 그가 실질적인 병력을 지휘하는 것에 부담을 느껴 중앙 직책에 임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3. 박정희 3선 개헌 반대와 그 이후
1969년 5월 12일 육군 제2군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38][13]1972년 초 대통령 박정희의 호출을 받았다.[38] 당시 박정희는 3선 개헌을 넘어 영구 집권을 위한 유신헌법 제정과 대한민국 제4공화국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으며,[14] 채명신에게 군부 내 지지를 모아줄 것을 요청했다.[38] 그러나 채명신은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정치인의 생명이라며 이를 강하게 반대했다.
> 각하. 정권을 연장하시겠다는 건 결국 이중플레이 아닙니까?
>
> 정치라는 건 국민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 이게 지도자의 생명인데 그렇게 나가시면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 아닙니까?[38]
채명신은 이후 두 차례 더 이어진 독대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대통령 임기 연장과 권력 강화를 위한 유신헌법 추진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14] 처음에는 민족중흥과 자주국방을 명분으로 설득하던 박정희는 그의 거듭된 반대에 분노했다.[38]
결국 채명신은 군 인사에서 불이익을 받아 대장 진급에서 탈락했으며,[38][14] 1972년 6월 1일 제2군사령관직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중장으로 예편하였다.[38][14]
4. 저서
- 《사선을 넘고 넘어: 채명신 회고록》 (매일경제신문사, 1994)
- 《베트남전쟁과 나(채명신 회고록)》 (팔복원, 2006)
5. 상훈
6. 가족 관계
- '''부인''': 문정인(文貞仁)[41]
- * 이화여자대학교 졸업.
- * 문명기의 손녀.
- * 오빠는 문태준으로, 대한의사협회장, 보건복지부장관, 국회의원을 지냈다.[41]
- '''자녀''': 슬하에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다.[18]
- '''의붓동생''': 채 모씨
- * 채 모씨는 1951년 초, 채명신이 강원도에서 유격부대 ‘백골병단’을 이끌던 당시 생포한 조선노동당 제2서기 겸 북한군 대남유격부대 총사령관 길원팔이 아들처럼 데리고 다니던 전쟁고아였다.[42] 길원팔은 전향을 거부하고 채명신이 준 권총으로 자결하면서, 채명신에게 소년을 남쪽에 데려가 공부시켜 달라고 부탁했다.[42]
- * 채명신은 길원팔의 부탁을 받아들여 소년을 자신의 동생으로 호적에 입적시키고 직접 돌보았다.[42] 이 소년은 채명신의 보살핌 아래 서울대학교에 진학하여 이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이후 서울의 한 대학에서 교수를 지내다 은퇴했다.[42]
- * 두 사람은 채명신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깊은 우애를 나누는 형제로 지냈으며, 채명신의 자녀들은 그를 삼촌으로, 채 교수의 자녀들은 채명신을 큰아버지로 불렀다.[42]
- '''종교''': 개신교 신자였다.[1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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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5일 소천 前 주월사령관 채명신 장로 "전장의 불길 속에서 하나님은 나의 방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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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베트남戰의 영웅 채명신 장군, 그는 왜 사병 묘역에 잠들어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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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베트콩 적장 만난 채명신 장군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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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영웅' 채명신 장군, 사병묘역에 묻히다(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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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채명신 장군, 유언대로 파월 사병 묘역에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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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의 아내로 살아온 60년 인생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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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이 만난 사람] "그의 리더십은 '骨肉之情(골육지정)'… 부하를 친혈육처럼, 책임은 자신이 져"
https://www.chosu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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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戰의 영웅 채명신 장군, 그는 왜 사병 묘역에 잠들어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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洛東江戦 防御作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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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한복판에 내던져졌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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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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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도 많이 당했다” 채명신 전 주월한국군총사령관 인터뷰… 남베트남군 사령관 만나 사과한 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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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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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ld Warri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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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week
200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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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채명신은 전우를 사랑해 이곳에 묻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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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5일 소천 前 주월사령관 채명신 장로 “전장의 불길 속에서 하나님은 나의 방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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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아직 그가 주월한국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기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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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국평전-48] “증거 보자”며 찾아온 친일파 후손
http://blog.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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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신 장군이 평생 묻어둔 비밀 적장이 맡긴 고아, 교수로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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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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