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 (136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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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진은 1361년에 태어나 1427년에 사망한 인물로, 정도전과 경숙택주 경주 최씨의 아들이다. 고려 말 관직에 진출하여 사재감령, 전농감령 등을 지냈으며, 조선 건국 후 개국원종공신에 녹훈되고 연안부사, 도승지, 원주목사 등을 역임했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아버지 정도전이 살해당한 후, 전라도 수군으로 충군되었으나 복직하여 나주목사, 판한성부사, 평안도 관찰사 등을 거쳐 공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지냈다. 세종은 그에게 애도의 뜻을 표했으며, 사후 의정부 우찬성에 추증되고 희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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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 (1361년) | |
---|---|
기본 정보 | |
![]() | |
휘 | 전(顓) |
시호 | 공민왕(恭愍王) |
묘호 | 없음 |
성 | 왕(王) |
본관 | 개성 왕씨 |
자 | 패(πά) |
생년월일 | 1330년 5월 23일 |
몰년월일 | 1374년 10월 27일 (음력 9월 21일) |
능묘 | 현릉(玄陵) |
가계 | |
아버지 | 충숙왕 |
어머니 | 공원왕후 홍씨 |
배우자 | 노국대장공주 |
재위 정보 | |
즉위년도 | 1351년 |
폐위년도 | 없음 |
복위년도 | 없음 |
퇴위년도 | 없음 |
기타 정보 | |
종교 | 불교 |
2. 생애
2. 1. 생애 초기
정진은 1361년 정도전과 경숙택주 경주최씨의 네 아들 중 첫째 아들로 개경(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관직에 올라 1382년 낭장(郞將)이 되고 이후 사재감령, 전농감령 등을 지냈다.공양왕 즉위 후 1391년 정몽주 등 온건파가 역성혁명파를 탄핵할 때 탄핵을 받고 아버지 정도전과 함께 파직당하고 유배되었다.
2. 2. 조선 건국과 관직 생활
1392년 7월 조선왕조가 건국되자 개국원종공신에 녹훈되고 공신의 적자로 외직을 자청하여 연안부사(延安府使)가 되었다. 연안부사 재직 시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1393년 판사재감사를 지내고, 1396년(태조 5년) 승정원 도승지로 승진했다.이후 외직인 경흥부윤·영원주목사 등으로 나갔다가 공조전서와 형조의 전서를 역임하였다. 원주목사로 재직 중 아버지 정도전의 삼봉집 초본을 간행하였다.
2. 3. 제1차 왕자의 난과 시련
1398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事)로 있을 때, 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아버지 정도전이 남은, 심효생과 함께 이방원에게 살해당하고 정담 두 명도 살해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태조를 수행하여 삼성재(三聖齋) 방문 길을 수행하여 안변군 석왕사에 체류 중이라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하였다.정도전의 네 아들 중 유일하게 목숨을 건졌으나 정진은 병력으로 충군(充軍)되어 전라도수군으로 충군 징용되었다.
이후 조준과 권근 등이 그의 복직을 주청하였고, 1407년 다시 복직하였다. 그 해 좌의정 성석린(成石璘)의 천거로 판나주목판사(判羅州牧事)로 부임했다.
2. 4. 생애 후반과 죽음
1416년(태종 16년) 인령부윤(仁寧府尹)이 되고, 1417년 판안동대도호부사가 되었다. 그 뒤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세종 즉위후 1419년(세종 1년) 충청도도관찰사로 부임했다.이후 자헌대부로 승진, 1419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제수되었고, 1420년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 연경에 다녀오기도 했다. 1421년 판한성부사로 부임하였고, 1422년까지 판한성부사를 역임하였다.
그 뒤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423년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개성부의 유후(留後)로 부임했다. 1425년 형조판서가 되었다. 형조판서 재임 중 1427년(세종 9년)에 병사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67세였다.
2. 5. 사후
세종대왕은 각별히 애도의 뜻을 표하여 3일간 조회를 정지하였고, 친히 제문을 지어 내렸다. 의정부우찬성에 추증되고 희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사후 경북 영주의 모현사에 배향되었으며, 평택의 희절사에 제향되었다.3. 가계
본관은 봉화 정씨(奉化 鄭氏)이다. 조부는 형부상서 정운경(刑部尙書 鄭云敬, 1305 ~ 1366)이고, 조모는 산원(散員) 우연(禹淵)의 딸로 증 정경부인 영주 우씨(贈 貞敬夫人 榮州 禹氏)이다. 아버지는 정도전(鄭道傳, 1337년 ~ 1398년)이며, 어머니는 경숙택주 경주 최씨(慶淑宅主 慶州 崔氏)로 외조부는 찬성(贊城) 최습(崔濕)이다.
고모부는 공조판서 황유정(工曹判書 黃有定 , 1343 ~ ?)이다. 숙부는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낸 정도복(鄭道復, 1351 ~ 1435, 호는 일봉(逸峯))이다.
동생은 정영(鄭泳), 정유(鄭遊)이다. 부인은 정부인 연일 성씨(正夫人 延日 成氏)이다. 아들은 정래(鄭來)와 정속(鄭束)이다. 정속은 직산현감(稷山縣監)을 역임하였고, 사후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손자는 의정부 우의정을 지낸 정문형(鄭文炯, 1427∼1501)으로, 자는 명숙(明叔), 호는 야수(野叟), 시호는 양경(良敬)이며, 세조 때 청백리(淸白吏)였다.
4. 평가 및 작품
평소 겸양과 치덕으로 일관하였으며, 겸손하여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한다.
4. 1. 평가
평소 겸양과 치덕으로 일관하였으며, 겸손하여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한다.4. 2. 등장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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