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암리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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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암리 학살 사건은 1919년 3.1 운동 이후 일본군이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에서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한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1919년 4월 15일, 일본군은 제암리 교회에 주민들을 모아 총격을 가하고 불을 질러 20여 명을 살해했으며, 인근 민가에도 방화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 군부는 사건을 은폐하려 했으나,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 등에 의해 진실이 알려지면서 국제적인 비판을 받았다. 이 사건은 일본의 조선 통치 방식을 무단 정치에서 문화 정치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2019년에는 일본인들이 학살 현장을 방문하여 사과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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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학살 사건 | |
---|---|
사건 개요 | |
위치 | 티건, 수이겐, 게이키도, 대한민국, 일본 제국 (현재 화성시, 경기도) |
대상 | 제암리 거주 한국인 |
날짜 | 1919년 4월 15일 |
가해자 | 일본 제국 육군 |
유형 | 학살 |
사망자 | 20명에서 30명 사이 |
사건 상세 | |
한국어 명칭 | |
한글 | 제암리 학살 사건 |
한자 | 提巖里虐殺事件 |
로마자 표기 | Jeamni haksal sageon |
매큔-라이샤워 표기 | Cheamni haksal sagŏn |
2. 역사적 배경
1919년 3·1 운동 이후, 경기도 화성 지역에서도 독립 만세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제암리를 비롯한 인근 주민들은 발안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를 외쳤고, 밤마다 뒷산에 봉화를 올리며 만세 운동을 이어갔다.
3·1 운동의 여파로 전라북도를 제외한 조선반도 전역에서 조선인에 의한 폭동(조선 소란)이 발생했다[9]。경기도에서도 헌병 주재소, 경찰서뿐만 아니라 민가에 대해서도 파괴와 방화가 이루어졌고, 일본인이 피난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1919년 4월 13일, 조선군 보병 제40여단으로부터 폭도 진압 명령을 받은 아리타 토시오 중위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발안(향남면)에 도착했다. 일본 측 재판 기록에 따르면, 아리타 중위는 제암리 주민으로부터 폭동을 일으키는 것은 기독교도, 천도교도이며, 그 섬멸을 요청받았다고 하며[11], 조선군의 폭동 진압 지령을 匪賊 토벌로 이해하고 주모자들의 소굴을 멸망시키기로 결심하였다.
이후,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쇼필드(Frank William Schofield)와 AP통신의 앨버트 테일러 등에 의해, 이 사건은 일본군에 의한 학살 사건으로 세계에 보도되었다[20][21][22]。미국과 영국 영사 등도 본국에 사건을 보고하자 일본 비판 여론이 높아져, 미영으로부터 조선 통치의 개선이 일본에 요청되었고, 일본의 조선 통치가 "무단 정치"에서 "문화 정치"로 전환되는 원인이 되었다[23]。
2. 1. 3.1 운동의 확산
1919년 3월 1일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난 얼마 뒤, 1919년 3월 31일 발안 장날에 경기도 화성시(당시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제암리를 비롯한 인근 주민 천여 명은 발안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날 이후 주민들은 밤마다 뒷산에 올라 봉화를 올림으로써 만세운동을 계속했다.[9]3·1 운동의 여파로 전라북도를 제외한 조선반도 전역에서 조선인에 의한 폭동(조선 소란)이 발생했다. 4월 상순에는 경기도에서도 폭동이 발생하여 헌병 주재소, 경찰서뿐만 아니라 민가에 대해서도 파괴와 방화가 이루어졌고, 일본인이 피난하는 사태가 되었다. 4월 3일, 2천여 명의 군중이 몽둥이를 들고 장안, 우정의 사무소를 습격하여 파괴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화수리 주재소를 습격하여 방화로 전소시켰다. 주재하고 있던 가와바타 도요타로 순사는 포위되어 몽둥이 등으로 구타당해 살해된 후, 시체가 손괴(이를 뽑고, 코와 귀를 자르고, 관절을 꺾는 등)되었다.[10][13]
2. 2. 지역 주민들의 저항
1919년 3월 31일 발안 장날,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 주민들은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9] 이들은 밤마다 뒷산에 올라 봉화를 올리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9] 이는 일제의 탄압에 대한 제암리 주민들의 저항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3. 사건의 경과
1919년 3월 31일, 발안 장터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일본군은 시위 주모자들을 검거하기 위해 제암리를 비롯한 인근 마을을 수색하고 탄압했다.
4월 1일 발안 인근의 마을 주민들은 발안장 주변 산에 봉화를 올리고 시위를 하였다.
4월 3일, 수촌리 구장 백낙렬 천도교 전교사, 수촌 제암리 감리교회 김교철 전도사, 석포리 구장 차병한, 주곡리 차희식 등이 주축이 되어 우정면, 장안면 주민 2천여 명이 모여 각 면사무소를 부수고 화수리 주재소로 몰려가 주재소를 불태우는 한편 순사 가와바타를 처단하였다.
4월 5일 새벽 3시 반경에 검거반이 수촌리를 급습하여, 종교 시설은 물론 민가에 불을 질러 마을 전체 42호 가운데 38호가 소실되었다(수촌리 학살 사건).
4월 9일부터 16일까지 검거반은 제2차 검거 작전을 벌였다.
4월 13일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발안에 도착하였다. 토벌 작전이 끝난 발안 지역의 치안 유지가 그들의 임무였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시위 주모자들은 2차에 걸친 검거 작전으로 대부분 체포된 반면 발안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모자들은 체포되지 않아 불안 요소로 남아 있음을 안 아리타는 제암리를 토벌할 계획을 세운다. 제암리는 두렁바위로 주로 안씨들이 모여사는 집성촌이며 일찍부터 천도교의 교세로 민족정신이 고양되었고, 제암리감리교회에서는 문맹퇴치 및 신문화 운동 교육이 이루어졌다. 또한 대한제국 시위대 해산군인 홍원식이 낙향하여 동리 사람들을 모아 교육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구국동지회를 만들었던 민중저변의 의식화가 상당히 이루어졌던 동네이다.
이후의 자세한 사건의 경과는 하위 문단인 '발안 장날 만세 운동', '일본군의 탄압', '제암리 학살 (1919년 4월 15일)'에 상세히 나와 있다.
3·1 운동의 여파로 전라북도를 제외한 조선반도 전역에서 조선인에 의한 폭동이 발생했다[9]。4월 상순에는 경기도에서도 폭동이 발생하여 헌병 주재소, 경찰서뿐만 아니라 민가에 대해서도 파괴와 방화가 이루어졌고, 일본인이 피난하는 사태가 되었다.
2007년에 이와나미 서점에서 간행된 당시 조선군 사령관이었던 우쓰노미야 타로의 일기(일본 육군과 아시아 정책 육군 대장 우쓰노미야 타로 일기)에 따르면, "사실을 사실로 처분하면 가장 간단하겠지만, 이렇게 해서는 그렇게 아닌데도 독필을 휘두르고 있는 외국인 등에게 학살, 방화를 자인하는 것이 되어, 제국의 입장은 매우 불이익이 되고, 한편으로는 선내의 폭민을 증장시키고, 또한 진압에 종사하고 있는 장졸에게 의혹의 마음을 생기게 하는 불이익으로, 저항한 것을 살륙한 것으로 학살 방화 등은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밤 12시에 산회한다."[17]라고 학살은 인정하지 않는 방침을 결정했지만, 다음날 조선총독의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학살을 인정하고 과실로서 행정 처분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에, 군 관계자는 협의 끝에 아리타 중위에게 30일간 중근신 처분을 내렸다[18]。그 후 군법 회의에 의한 판결(1919년 8월 21일자)에서, 아리타가 훈시 명령을 오해한 것으로 과실에 의한 범죄로 해야 하지만, 직무상 필요하다고 확신하고 행한 것이므로 범의는 없다, 이러한 경우에 처벌하는 규정은 없다고 하여, 살인·방화에 관해 무죄가 확정되었다[13]。
하세가와 조선 총독이 "제암리 부근의 상황은 경성에 거주하는 외국인에게 선전되고, 영국 총영사 대리, 미국 영사, 및 외국 선교사, 일부 현상을 시찰했다. 참고로."라고 하라 다카시총리대신에게 보고하고[19], 우쓰노미야가 "독필을 휘두르고 있는 외국인 등에게 학살, 방화를 자인하는 것이 된다."라고 우려했던 대로, 재경성 캐나다인선교사프랭크 윌리엄 쇼필드와 AP통신에 특별 채용된 앨버트 테일러 등에 의해, 사건은 일본군에 의한 학살 사건으로 세계에 보도되었다[20][21][22]。미국 영사나 영국 영사 등도 본국에 사건을 보고하자 일본 비판의 여론이 높아져, 미영으로부터 조선 통치의 개선이 일본에 요청되었고, 일본의 조선 통치가 "무단 정치"에서 "문화 정치"로 전환되는 원인이 되었다[23]。
3. 1. 발안 장날 만세 운동
1919년 3월 31일 정오 경, 발안 장터(5일장, 음력으로 개시. 양력장은 1937년 이후)에서 팔탄면 가재리 유학자 이정근, 장안면 수촌리 천도교 지도자 백낙렬, 향남면 제암리 안정옥(천도교), 고주리 천도교 지도자 김흥렬 등이 제암리 감리교회 김교철 전도사, 권사, 교인들과 함께 독립 만세 운동을 준비했다. 이정근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장터에 모인 천여 명이 따라 외쳤다. 일본 경찰의 위협 사격과 군중의 투석이 이어졌고, 시위대는 인근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질렀다.[27]일본군 수비대는 주재소로 다가서는 군중에게 칼을 휘둘렀다. 이정근과 그의 동생 등 3명이 칼에 맞아 사망했고, 홍원식·안종후·안진순·안봉순·김정헌·강태성(제암리 감리교회 기독교인), 김성렬(천도교인) 등은 수비대에 붙잡혀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흥분한 시위 군중은 일본인 가옥이나 학교 등을 방화, 파손했다. 정미업자 사사카(佐々坂) 등 43명은 3리 밖 삼계리로 피신했고, 사사카는 4월 15일 제암리 학살 사건 당시 일본 군대의 길 안내를 맡았다.
3. 2. 일본군의 탄압
일본군은 1919년 3월 31일 발안 장터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대대적인 병력을 파견했다. 4월 2일, 경기도 경무부에서는 하세베 이와오(長谷部巖) 대장을 중심으로 헌병, 보병, 순사로 구성된 검거반을 보내 시위 주모자들을 검거하고 시위의 근원지를 방화하는 작전을 펼쳤다.[27]4월 3일, 수촌리, 석포리, 주곡리 주민 2천여 명은 우정면과 장안면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화수리 주재소를 불태웠으며, 일본 순사 가와바타를 처단했다.[27] 이에 일본군은 4월 5일 새벽 수촌리를 급습하여 마을 전체 42호 중 38호를 불태우는 등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수촌리 학살 사건)[27]
4월 9일부터 16일까지 제2차 검거 작전이 벌어졌고, 4월 13일에는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발안에 도착하여 치안 유지 임무를 맡았다.[27] 아리타는 발안 시위를 주도한 제암리 주모자들이 체포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제암리를 토벌할 계획을 세웠다.[27]
3. 3. 제암리 학살 (1919년 4월 15일)
4월 15일 오후 2시경,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는 부하 11명과 일본인 순사 1명, 그리고 제암리에 살았던 순사보 조희창과 정미소 주인 사사카(佐板)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로 갔다.[27]아리타 부대는 발안에 살던 일본인 사사카와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을 앞세워 “만세운동을 진압하며 너무 심한 매질을 한 것을 사과하려고 왔다.”라고 말하여, 제암리 주민 가운데 15세 이상 성인 남자들을 제암리 감리교회에 모이게 하였다.[27] 미리 명단을 파악한 듯 오지 않은 사람은 찾아가 불러왔다.[27]
아리타 중위가 모인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해 묻자, 안종후 권사로 추정되는 교인 대표가 대답하였다.[27] 아리타 중위는 교회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격 명령을 내렸고, 교회당을 포위하고 있던 군인들은 창문을 통해 안으로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27] 사격이 끝난 후, 군인들은 짚더미와 석유를 교회에 뿌리고 불을 질렀다.[27]
바람이 세게 불어 불이 교회 아래쪽 집들에 옮겨 붙었고, 위쪽 집들은 군인들이 다니며 방화하였다.[27] 교회에 불이 붙자, 홍순진으로 추정되는 인물과 안상용(으로 추정)과 노경태가 탈출을 시도했다.[27] 홍순진은 도망치다가 사살되었고, 안상용은 집으로 피신했다가 발각되어 살해되었으며, 노경태는 산으로 도망쳐 살아남았다.[27]
마을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달려온 강태성의 아내(19세)와 홍원식의 아내가 군인들에게 살해당하였다.[27]
일본군은 인근 고주리로 이동하여 천도교 지도자 김흥렬 일가 6명을 학살했다.[27]
일본 측 재판 기록에 따르면, 아리타 중위는 제암리 주민으로부터 기독교도와 천도교도가 폭동을 일으키고 있으니 이들을 섬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11] 그는 조선군의 폭동 진압 지령을 비적 토벌로 이해하고, 주모자들의 소굴을 멸망시킴으로써 화근을 끊기로 결심했다.[12] 4월 15일 천도교와 기독교 신자 18세 이상 50세 이하 남성 20여 명과 처자 1명을 모아 사살 또는 자살시켰다.[12] 그 후, 일본인 참살에 대한 보복심을 가진 병사가 교회를 불태웠고,[12] 이때 민가로 불이 번져 28호가 소실되었으며, 민간인 여성 1명이 불에 타 죽었다.[9][13]
4. 사건 은폐와 왜곡, 그리고 진실
일본은 제암리 학살 사건을 은폐하고 왜곡하려 했으나,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석호필) 등 외국인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사건의 진상이 국제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한때 교회에 가둬둔 뒤 문에 못질하여 막았다는 말이 나돌았으나, 창문조차 총으로 들이대고 있었음에도 빠져나온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못질은 하지 않았으리라 보인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은 만행이 자행되었음은 사실이다.[28]
사건 당시 일본 군인들은 3·1 운동 시위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되는 한국인 20명에서 30명을[1] 회의를 위해 교회로 데려갔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민간인들에게 총격을 가했고, 시신과 사건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교회를 불태웠다.[1][2][3] 또한 인근 민간인 가옥에도 불을 질렀다.[3]
2007년 2월 28일 아사히 신문 보도에 따르면, 사건 당시 조선군 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 대장의 일기가 발견되었다.[29][30]
4. 1. 일본의 은폐 시도
3·1 운동 이후 전라북도를 제외한 조선반도 전역에서 조선인에 의한 폭동이 발생했고, 1919년 4월 상순 경기도에서도 폭동이 발생하여 헌병 주재소, 경찰서, 민가가 파괴되거나 불타는 사건이 발생하여 일본인이 피난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9] 4월 3일에는 2천여 명의 군중이 장안면과 우정면 사무소를 습격하여 파괴하고, 화수리 주재소를 방화하여 전소시켰다. 이 과정에서 주재소에 있던 일본 순사가 살해되고 시체가 훼손되는 일까지 벌어졌다.[10]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군부는 제암리 학살 사건이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될 것을 우려하여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당시 조선군 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는 일기에서 이 사건이 일본 제국의 명성에 해를 끼칠 것이라고 기록하며, 학살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2][6] 그는 일기에서 "사실을 사실로 처분하면 가장 간단하겠지만, 이렇게 해서는 그렇게 아닌데도 독필을 휘두르고 있는 외국인 등에게 학살, 방화를 자인하는 것이 되어, 제국의 입장은 매우 불이익이 되고, 한편으로는 선내의 폭민을 증장시키고, 또한 진압에 종사하고 있는 장졸에게 의혹의 마음을 생기게 하는 불이익"이 있을 것이라 우려했다.[17]
일본 측은 학살을 주도한 아리타 토시오 중위에게 30일간의 중근신 처분을 내렸지만,[18] 군법 회의에서는 아리타 중위가 훈시 명령을 오해한 과실에 의한 범죄이며 직무상 필요하다고 확신하고 행한 것이므로 범의가 없다고 하여 무죄 판결을 내렸다.[13]
그러나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와 앨버트 테일러 등 외국인 선교사와 기자들에 의해 사건의 진상이 세계에 알려지면서,[20][21][22] 국제적인 비난 여론이 높아졌고, 결국 일본은 조선 통치를 "무단 정치"에서 "문화 정치"로 전환해야 했다.[23]
4. 2. 우발적 사건 주장
일본 학자들은 제암리 학살 사건이 조선에 주둔한 지 얼마 안 되어 현지 상황에 익숙하지 못한 일부 군인이 일본인의 희생에 흥분하여 일으킨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28] 그러나 제암리의 기독교와 천도교 지도자 명단을 미리 파악하고 소집한 점, 제암리가 아닌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까지 파악해 살해한 점 등에서 이러한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28]4. 3. 국제 사회에 알려진 진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는 1919년 4월 17일 제암리 학살 사건 현장을 방문하고, 《끌 수 없는 불꽃》이라는 책을 통해 일제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폭로했다.[28] 그는 수촌리 학살 사건 현장을 확인하러 가던 도중 우연히 제암리의 참상을 목격하였고, 이후 여러 차례 제암리와 수촌리를 방문하여 사후 수습을 돕고 진실을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앨버트 테일러 등 외신 기자들도 제암리 학살 사건을 보도하면서 일본의 만행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20][21][22] AP 통신 특파원이었던 테일러는 스코필드와 함께 이 사건을 일본군에 의한 학살 사건으로 보도했다.
미국과 영국 영사 등도 본국에 사건을 보고하자 일본 비판 여론이 높아졌고,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조선 통치의 개선을 요구받게 되었다.[23] 이는 일본의 조선 통치가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전환되는 원인이 되었다.[23]
5. 사건의 영향 및 평가
3·1 운동의 여파로 조선반도 전역에서 조선인들의 폭동이 발생했다.[9] 4월 3일에는 2천여 명의 군중이 장안, 우정의 사무소를 습격하여 파괴했고, 화수리 주재소를 방화하여 가와바타 도요타로 순사를 살해했다.[10]
4월 13일, 조선군의 아리타 토시오 중위는 제암리 주민들로부터 폭동의 주모자가 기독교도와 천도교도라는 말을 듣고[11], 4월 15일 18세 이상 50세 이하의 남성 신자 20여 명과 그 가족 1명을 사살 또는 자살시켰다. 이후 일본군 병사들이 교회에 불을 질렀고, 민가로 불이 번져 28호가 소실되고 민간인 여성 1명이 사망했다.[9][12][13]
당시 조선군 사령관이었던 우쓰노미야 타로의 일기에 따르면, 일본 군부는 학살 사실을 은폐하려 했으나[17],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학살을 인정하고 과실로 행정 처분하도록 지시하여 아리타 중위에게 30일간 중근신 처분을 내렸다.[18] 이후 군법 회의에서 아리타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13]
하세가와 조선 총독은 하라 다카시 총리대신에게 제암리 부근의 상황이 경성에 거주하는 외국인에게 알려졌다고 보고했고[19], 캐나다인 선교사 쇼필드와 AP통신의 앨버트 테일러 등에 의해 사건이 세계에 보도되었다.[20][21][22]
5. 1. 한국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3·1 운동 이후, 조선반도 전역에서 조선인들의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다[9]。일본군은 이러한 움직임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제암리 학살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쇼필드와 AP통신의 앨버트 테일러 등에 의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20][21][22]。이 사건으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일본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졌고, 미국과 영국은 일본에 조선 통치 방식의 개선을 요구했다[23]。결국 일본은 조선 통치를 "문화 정치"로 전환해야 했다[23]。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한국인들의 독립운동 의지를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5. 2. 국제 여론의 변화
3·1 운동 이후, 캐나다인 선교사 쇼필드와 AP통신 특파원 앨버트 테일러 등에 의해 제암리 학살 사건이 일본군에 의한 학살 사건으로 세계에 알려졌다[20][21][22]。 미국과 영국 영사 등도 본국에 이 사건을 보고하면서 일본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졌다. 미국과 영국은 일본에 조선 통치 방식의 개선을 요구했고, 이는 일본의 조선 통치가 "무단 정치"에서 "문화 정치"로 전환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23]。5. 3. 일본의 인식과 사죄
2019년 2월, 일본인 기독교 신자 10여 명이 제암리 순국기념관을 방문하여 학살 사건에 대해 사죄하고, 일본 정치인들의 무관심을 비판했다.[31] 같은 해, 다른 일본인 기독교인 17명도 학살 현장을 방문하여 일본을 대표해 이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7] 이는 일본 내에서도 제암리 학살 사건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움직임이 있음을 보여준다.5. 4. 한국의 인식과 평가 (중도진보적 관점)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3월 1일 삼일절 기념식 연설에서 제암리 학살 사건을 언급하며, "경기도 화성의 제암리에서도 교회를 주민들을 가두고 불을 질러 어린아이를 포함해 29명을 학살하는 만행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와 대조적으로 조선인의 공격으로 사망한 일본 민간인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2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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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The arch agitator:" Dr. Frank W. Schofield and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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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iting Japanese Christians apologize for 1919 church massac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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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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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翻訳 李徳周「初期韓国教会の民族教会的性格」(2)(2/3)
https://aichiu.repo.[...]
愛知大学語学教育研究室
20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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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国立公文書館 レファレンスコード:A04017275800 「単行書・八年陸乙七一・朝鮮騒擾経過概要」其三 四月中ニ於ケル騒擾ノ概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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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騒擾事件結審 : 内乱罪として高等法院に移さる
"http://resolver.con[...]
大阪朝日新聞
1919-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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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第096回国会 外務委員会 第24号 東中光雄議員の照会「京城発 大正八年四月廿二日後一、五〇 本局着 同後六、三一 長谷川総督から原総理大臣(拓殖局長官)宛の文書」
https://kokkai.ndl.g[...]
[12]
문서
第096回国会 外務委員会 第24号 東中光雄議員の照会「京城発 大正八年四月廿二日後一、五〇 本局着 同後六、三一 長谷川総督から原総理大臣(拓殖局長官)宛の文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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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防衛省防衛研究所 有田中尉に係る裁判宣告の件 レファレンスコード:C03022465000 1143ペー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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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南京大虐殺と原爆
東方出版株式会社
1995-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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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堤岩里3.1運動殉国記念館(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 韓国観光公社公式サイト「VISIT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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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観光公社
2024-12-04
[16]
서적
世界大百科事典(旧版)
株式会社平凡社
[17]
문서
宇都宮太郎日記 3巻 岩波書店 (四月十八日)
[18]
문서
宇都宮太郎日記 3巻 岩波書店 (四月十九日)「然るに午后に至り、総督より再び会ひ度しとのことに往訪せしに、今周知の事を全部否認するは却で不利なる無らん乎、其幾分は過失を認めて行政処分にても為し置くこと得策にはあらざる乎とのことに、此夜大野をして前決心を遂行し度内意にて明日往訪せんとするの意あることを内談せしめしに、総督は矢張行政処分丈は為し置を可とする旨復命せし故、来合せたる児島中将、大野、山本等と相談中、浄法寺、内野も来会し、虐殺放火は否認し、其鎮圧の方法手段に適当ならざる所ありとして三十日間の重謹慎を命ずることに略決心、散会せしは午前一時近かりし。」
[19]
문서
第096回国会 外務委員会 第24号 東中光雄議員の照会「京城発 大正八年四月廿二日後一、五〇 本局着 同後六、三一 長谷川総督から原総理大臣(拓殖局長官)宛の文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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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日本の朝鮮統治と国際関係―朝鮮独立運動とアメリカ 1910-1922
平凡社
20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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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2013年12月27日14時56分中央日報/中央日報日本語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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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뉴스
三・一独立運動を伝えたAP特派員の邸宅「ディルクシャ」復元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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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央日報
201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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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英米からみた日本の朝鮮支配(1)- 戦間期領事報告を中心に -梶居 佳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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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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聯合ニュース
2019-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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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3.1운동과 제암리 사건
1997
[26]
뉴스
문재인 "3.1운동 기념식, 제암리서 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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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2015-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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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 역사적 배경 / 발단 및 역사성
http://www.jeam.go.k[...]
2007-05-07
[28]
뉴스
“독립만세” 3·1 운동의 조력자…푸른 눈의 이방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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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뉴스
2018-03-01
[29]
뉴스
일제 ‘제암리 학살’ 은폐공작 드러나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30]
뉴스
일제 제암리학살 은폐 입증 조선군사령관 일기 발견
http://www.joongang.[...]
중앙일보
[31]
뉴스
일본 기독교 신자 10여 명, 제암교회 찾아 '사죄'
http://world.kbs.co.[...]
KBS
2019-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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