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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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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기독교는 동방 정교회, 천주교, 개신교로 구분되며, 천주교는 서학으로, 개신교는 미국, 캐나다, 호주 등에서 온 선교사들에 의해 전래되었다. 발해와 신라에 네스토리우스파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객관적인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1593년 임진왜란에 참전한 예수회 사제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가 조선에 왔고, 1631년에는 기독교 관련 서적이 수입되었다. 1777년경에는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1784년 이승훈이 평양에 최초의 기독교 예배소를 설립했다. 1845년 김대건이 사제가 되어 선교를 시작했지만, 유교 사회에서 이단으로 간주되어 탄압받았다. 1866년 병인교난으로 많은 신자들이 처형되었고, 1884년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와 근대화에 기여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 의식 고취와 독립 운동에 기여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세습, 대형 교회 중심주의, 물질주의적 기복 신앙 등에 대한 비판과 타 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로 사회적 비판을 받기도 한다. 2015년 기준 한국 인구의 약 27.5%가 기독교를 믿으며, 2022년에는 개신교 신자 수가 1,031만 명으로 종교인 인구 1위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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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기독교
지도
기본 정보
문서 제목한국의 기독교
한글 표기한국의 기독교
한자 표기韓國의 基督敎
로마자 표기Hanguk-ui Gidokgyo
영어 표기Christianity in Korea
일본어 표기韓国のキリスト教
역사
초기 전래17세기 초 조선에 천주교를 통해 처음 소개됨
재도입 시기1785년 이후 재도입
최초 순교자윤지충 (부모의 신주를 불태움)
초기 자생 교회황해도 소래교회 (한국 최초의 자생교회)
최초 신앙 고백 및 강연1883년 한국인 첫 기독교 신앙고백 및 강연
교파
주요 교파개신교
천주교
성공회
교세
2005년 종교 인구 조사기독교 인구 28.3% (개신교 18.3%, 천주교 10.9%)
2008년기독교 인구 약 29%
개신교 현황
주요 교단예장합동
예장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
한국침례교회
선교 활동1980년대부터 해외 선교 급증
성장 요인서구 문화 수용
사회 변화와 개혁
한국 특유의 종교적 분위기
민족주의적 성향
천주교 현황
최초 선교사중국을 통해 서양 선교사 유입
최초 성당약현성당
주요 순교자김대건 신부 등
주요 인사정진석 추기경
성공회 현황
최초 교회성공회 내동성당
특징
정치 참여민주화 운동 등 사회 변화에 적극 참여
사회적 영향한국 사회 발전에 큰 영향
현재 문제점교회 세습
교회 재정 문제
윤리적 문제
해외 선교해외 선교 활동 활발
관련 정보
관련 문서한국의 종교, 대한민국의 종교
관련 자료한국의 100대 문화 상징
범례

2. 전래

기독교는 크게 동방 정교회, 천주교, 개신교로 나뉜다. 한국 천주교는 선교사가 아닌 '서학'이라는 학문으로 받아들여졌고, 자생적으로 교회와 조직이 형성된 후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초기에는 프랑스 가톨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82] 개신교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 온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선교사들과 잉글랜드 선교사들에 의해 전래되었다.[82] 동방 정교회러시아 정교회 선교사들에 의해 전래되었다.[82] 남북국 시대 발해신라네스토리우스파(경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83]

3. 역사

한국의 기독교 역사는 크게 조선 시대,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군사정권 시기, 민주화 이후로 나눌 수 있다.

1593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종군 사제였던 예수회 사제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가 조선에 처음으로 들어왔으나, 조선 백성을 대상으로 한 선교는 아니었다.[64] 이 전쟁에서 소서행장은 주리아 오타아라는 조선인 양녀를 얻었고, 그녀는 세례를 받았다. 따라서 역사상 최초의 조선인 기독교인(세례자)은 그녀로 여겨진다.

17세기 초, 이수광(Yi Su-gwang), 유몽인 등은 마테오 리치의 저서에 대해 비판적인 논평을 썼다. 이후 2세기 동안 유교의 장유유서와 전통을 뒤엎는다는 이유로 천주교 신앙에 대한 학계의 비판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실학 학파는 가톨릭의 평등주의적 가치에 매력을 느꼈다.

1777년경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사제의 선교 없이 사적으로 기독교를 신앙했다. 조선 최초의 기독교 예배소는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이 1784년 평양에 설립한 것이다.[64]

1845년 김대건이 상하이에서 조선 최초의 사제가 되어 귀국하여 선교를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유교가 사회의 근본 이념이었기에 가톨릭은 탄압을 받았다. 1846년 김대건과 103명의 신자는 처형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흥선대원군 정권 하의 1866년에는 병인박해가 발생하여 프랑스인 사제 9명과 가톨릭 신자 약 8,000명이 체포·처형되었다. 샤를 달레는 『조선교회사』(Histoire de L'Eglise de Corée. 1874년)를 출판했다.

1876년 개항 이후,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의료, 교육 등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배재학당, 이화학당개신교계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1883년 5월 16일 황해도 대구면 송천리에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가 조선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를 설립하였다.[85] 이는 해외 선교사가 조선에서 선교를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조선인들 스스로 교회를 세운 것이다.

일제강점기기독교는 삼일운동 등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 신자였다.[94] 그러나 이후 순교자를 배출할 정도로 탄압이 심해지자 일부를 제외하고 황민화 정책, 침략전쟁에 협력하는데 앞장섰다.[94]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북한 지역의 기독교인들이 6.25 전쟁을 계기로 남한으로 내려오면서 대한민국기독교 인구가 증가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기독교는 기독교입국론 등을 통해 해방 후 정치 판도에 영향을 주었다.

이승만 정부는 기독교를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미군정은 북한 출신 개신교인을 활용해 통치를 했고, 이는 미국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한국전쟁 이후, 기독교사회적 안정과 경제 발전에 기여하며 급성장했다. 초기에는 기복 신앙이 주를 이루었으나, 박정희 정부 이후 개발독재와 맞물려 "금전적 축복이나 물질적 풍성함이 신의 뜻"이라고 믿는 신앙이 확산되었다.[26]

박정희 정부 시기 개신교경제 성장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해석하며 군사정권을 지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 일부 개신교 단체들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며 군사정권에 저항했다.[95]

전두환 정부 시기에도 개신교는 조찬기도회 등을 통해 군사정권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폭로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군사정권에 저항했다.

민주화 이후, 개신교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며 보수적인 목소리를 높였다.[97]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한국기독교총연합회정부대북 정책과 사회 정책에 반대하며 정치적 활동을 강화했다.

개신교불교 등 타 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로 사회적 비판을 받기도 했다. 개신교는 군사정권 시절 일부 진보적인 신자들이 민주주의인권을 옹호하며 정권과 대립하기도 했지만, 보수적인 신자들은 반공주의에 입각하여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문재인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에 반대했다. 또한, 사학법 개정, 차별금지법 제정 등과 관련하여 정부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97]

3. 1. 조선 시대

1593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종군 사제였던 예수회 사제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가 조선에 처음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일본군의 종군 사제 역할에 국한되었고, 조선 백성을 대상으로 한 선교는 아니었다.[64] 가토 기요마사가 세스페데스의 선교 활동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고발하여 그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한편, 이 전쟁에서 소서행장은 주리아 오타아라는 조선인 양녀를 얻었고, 그녀는 소서행장의 정성스러운 교육을 받고 양부를 따라 세례를 받았다. 따라서 역사상 최초의 조선인 기독교인(세례자)은 그녀로 여겨진다.

17세기 초, 이수광(Yi Su-gwang), 유몽인 등은 마테오 리치의 저서에 대해 비판적인 논평을 썼다. 이후 2세기 동안 유교의 장유유서와 전통을 뒤엎는다는 이유로 천주교 신앙에 대한 학계의 비판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실학 학파는 출신 성분이 아닌 능력에 기반한 사회 구조를 믿었고, 가톨릭의 평등주의적 가치에 매력을 느꼈다. 18세기 가톨릭이 조선에 정착했을 때, 이미 상당수의 교육받은 여론이 가톨릭에 우호적이어서 1790년대 가톨릭 신앙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01년 연구에 따르면 모든 가톨릭 신자의 55%가 실학파와 가족적 연관이 있었다.

조선에서 본격적인 기독교 신자가 생겨난 것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로, 일본이나 중국 등 주변 국가들에 비해 그 역사가 길지 않다고 여겨진다. 1631년, 조선 연행사에 의해 중국을 경유하여 기독교 관련 서적(『천주실의』) 등이 수입되었다. 조선에 대한 최초의 선교는 정조 시대에 마테오 리치가 설립한 베이징의 예수회가 조선 연행사와 접촉하면서 이루어졌다.

1777년경부터, 그 책을 연구한 학자들(조선에서는 기독교를 서학이라 불렀다)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사제의 선교 없이 사적으로 기독교를 신앙했다.

조선 최초의 기독교 예배소는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이 1784년 평양에 설립한 것이다. 이승훈은 베이징에서 교구장 궝에르를 만나 세례받기로 결심했다.[64]

이 단계에서는 선교사가 조선에 파견되지 않았고, 조선에서의 가톨릭 수용은 자발적으로 계속되었다.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귀국한 후, 사적으로 서학을 신앙하던 사람들도 다시 세례를 받았고, 현재 서울에서는 정기적인 집회도 가졌다고 한다. 그 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베이징을 거쳐 조선 북부로 들어와 가톨릭 선교를 했다. 조선 최초의 선교사는 1794년에 조선에 온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이다.[64]

1845년 김대건이 상하이에서 조선 최초의 사제가 되어 귀국하여 선교를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유교가 사회의 근본 이념이었기에 가톨릭은 이단으로 간주되어 탄압을 받았다. 1846년 김대건과 103명의 신자는 "기독교 배교"를 거부하고 처형되었다. 이들은 1984년 5월 6일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흥선대원군 정권 하의 1866년에는 병인박해가 발생하여 프랑스인 사제 9명과 가톨릭 신자 약 8,000명이 체포·처형되었다. 살아남아 으로 탈출한 리델 신부는 그 후에도 조선에서의 선교를 시도했다. 샤를 달레는 당시 조선의 국내 사정을 폭넓게 서술한 『조선교회사』(Histoire de L'Eglise de Corée. 1874년)를 출판했다.

3. 2. 개항 이후

1876년 개항 이후,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의료, 교육 등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배재학당, 이화학당개신교계 학교들이 설립되어 서구적 사상을 전파하고 한글 교육을 통해 문맹 퇴치에 기여했다. 1883년 5월 16일 황해도 대구면 송천리에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가 조선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를 설립하였다.[85] 이는 해외 선교사가 조선에서 선교를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조선인들 스스로 교회를 세운 것이다. 1887년, 존 로스가 신약성서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개신교 확산에 기여하였다.[84]

3. 3. 일제강점기

기독교는 삼일운동 등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기여했다.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 신자였으며, 삼일운동으로 투옥돼 재판받은 사람 가운데 기독교인은 전체의 17.6%를 차지할 정도로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94] 그러나 이후 순교자를 배출할 정도로 탄압이 심해지자 일부를 제외하고 황민화 정책, 침략전쟁에 협력하는데 앞장섰다.[94]

3. 4. 해방 이후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북한 지역의 기독교인들이 6.25 전쟁을 계기로 남한으로 내려오면서 대한민국기독교 인구가 증가했다. 장로교와 감리교 중심으로 남한으로 이동한 개신교인은 7만~10만 명에 달했으며, 이는 한반도 전체 개신교 신자의 60%인 20만 명 중 상당수를 차지했다.[26]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기독교는 기독교입국론 등을 통해 해방 후 정치 판도에 영향을 주었다. 한국전쟁 휴전 이후 대한민국 내 기독교인은 50만 명에 달했다.

이승만 정부는 기독교를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미군정은 북한 출신 개신교인을 활용해 통치를 했고, 이는 미국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또한 일본이 남긴 종교 적산(예: 한경직 목사의 서울 영락교회)을 우선 양도받고, 군종 장교 제도를 독점하는 등 특혜를 얻어 빠르게 성장했다.

기독교반공주의 이념 확산에 기여했다. 북한 지역에서 내려온 반공주의자들은 공산주의를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붉은 용'에 비유하며 북한을 악마화했다. 서북청년단 등의 극우 단체는 제주 4·3 항쟁, 여순 사건 등에서 이승만 정부의 단독 정부 수립을 지원했다.

한국전쟁 이후, 기독교사회적 안정과 경제 발전에 기여하며 급성장했다. 초기에는 기복 신앙이 주를 이루었으나, 박정희 정부 이후 개발독재와 맞물려 "금전적 축복이나 물질적 풍성함이 신의 뜻"이라고 믿는 신앙이 확산되었다.[26]

3. 5. 군사정권 시기

박정희 정부 시기 개신교경제 성장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해석하며 군사정권을 지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 한국대학생선교회(CCC) 김준곤 목사 등은 국가조찬기도회 등을 통해 박정희 정부를 지지했다. 10월 유신 선포 후에는 "하나님의 축복"이라며 환영 메시지를 발표하기도 했다.[95] 인혁당 재건위 사건 이후에는 개신교 보수 세력이 '나라를 위한 기독교 연합 기도회'를 열어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지금 남침 야욕에 혈안이 돼 있다"고 주장하며 군사정권을 옹호했다.[95]

그러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 일부 개신교 단체들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며 군사정권에 저항했다.[95]

전두환 정부 시기에도 개신교는 조찬기도회 등을 통해 군사정권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전두환이스라엘 지도자 여호수아에 비유하며 "사회악을 제거하고 정화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의 기도회를 열기도 했다.[95]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 등은 군사정권을 지지하는 대규모 기도회를 개최했다.[95]

5공화국 초기에는 박철언 당시 청와대 정무비서관이 종교 대책반을 운영하며 한기총 창립을 지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96]

그러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폭로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군사정권에 저항했다.

3. 6. 민주화 이후

민주화 이후, 개신교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며 보수적인 목소리를 높였다.[97] 노무현 정부에서 사학법 개정을 추진하자 당시 야당과 함께 강력하게 반대하였으며, 이명박 정부 이후 일부 진보적인 개신교인이 4대강 사업 반대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97]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시기에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국교회연합 등이 탄핵 반대 집회에 참여했다.[97]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한국기독교총연합회정부대북 정책과 사회 정책에 반대하며 정치적 활동을 강화했다. 전광훈 목사가 이끄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문재인 정부를 "공산주의, 사회주의"로 규정하고 대통령 하야를 주장하는 태극기집회에 참여했다.[97]

개신교불교 등 타 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로 사회적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개신교는 19.7%를 기록하며 신자 수 1위를 차지했고, 천주교는 7.9%를 기록했다.[97] 개신교는 군사정권 시절 일부 진보적인 신자들이 민주주의인권을 옹호하며 정권과 대립하기도 했지만, 보수적인 신자들은 반공주의에 입각하여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문재인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에 반대했다. 또한, 사학법 개정, 차별금지법 제정 등과 관련하여 정부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97]

4. 현황

2015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 인구의 약 27.5%가 기독교 신자이다.[86] 2022년 기준 한국 개신교의 신자 수는 국내 인구의 20%인 1,031만 8,532명으로 대한민국 내 종교 인구 1위를 차지하고 있다.[87] 개신교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등 다양한 교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래는 주요 교단의 현황을 나타낸 표이다.

대한민국 개신교 교단 현황[98]
교단교회 수성인 교인최대치 교인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4,561772,0001,930,596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5,100830,0001,660,248
기독교대한감리회3,507503,0001,048,000
기독교한국침례회2,637717,197800,437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1,250474,2001,185,480
기독교복음교회1,623301,000601,801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901171,000427,943
예수교대한성결교회618121,408362,346
대한예수교장로회(보수)972140,000310,111
한국기독교장로회1,140126,000285,350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1,10171,500178,853
대한성공회10050,000
그리스도교회연합30956,800103,265
기타(171개 교단)15,0751,292,5383,031,457
계(185)38,8825,601,24312,049,110



천주교는 서울대교구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교구 조직을 갖추고 있다. 정교회는 한국 정교회를 중심으로 소수의 신자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2013년 기준으로 약 4,000명의 공식 신자가 있다.

대한민국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국가이다.[18] 2000년에는 156개국에 10,646명의 남한 개신교 선교사가 있었고, 2009년에는 약 2만 명의 한국 선교사가 파송되었다.[18][23][24]

일제강점기로부터 독립한 직후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리되면서, 기독교의 위상은 남북한에서 서로 크게 달라졌다. 한국 전쟁 이전에는 한국 기독교인의 3분의 2가 북한 지역에 거주했지만,[89] 대부분 대한민국으로 피난 왔다.[90] 북한에서는 기독교미국 제국주의의 침략 수단으로 이용되었다고 여겨져 성경책을 소지하면 간첩죄로 처벌받기도 한다.[91]

대한민국 내 기독교 인구 비율 변화

4. 1. 사회·문화적 영향

기독교조선의 신분사회에서 평등 사회로 나아가는 데 기여했다. 양반과 평민, 남성과 여성 구분 없이 삼위일체 하느님을 신앙하며 인간 평등을 실천했다.[93] 한글 성경 번역과 교육 사업을 통해 한글 보급과 문맹 퇴치에 기여했다. 에이비슨선교사들의 노력으로 1896년 백정들도 면천(免賤)되어 평민처럼 갓을 쓸 수 있게 되었고, 호적에도 오를 수 있게 되었다.[93] 병원 설립과 의료 사업을 통해 국민 건강 증진에도 기여했다.

실학 학자들은 가톨릭의 평등주의적 가치에 매력을 느꼈고, 이는 18세기 조선에서 가톨릭이 정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01년 연구에 따르면, 가톨릭 신자의 55%가 실학파와 가족적 연관이 있었다.

훈민정음한문의 문화적 우월성 때문에 거의 사용되지 않았지만, 천주교는 훈민정음을 공식 문자로 채택한 최초의 한국 종교 단체였다. 시몽-프랑수아 베르뇌 주교는 모든 천주교 어린이들에게 훈민정음을 가르치도록 명령했다.[29] 존 로스는 1887년 신약 성서를 한국어로 번역했고,[30] 개신교배재학당(1885년), 이화학당(1886년) 등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통해 개신교 확산에 기여했다.

일제강점기(1910~1945) 많은 기독교인들이 한국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 중 15명이 개신교인이었고, 길선주 등이 참여했다. 일본 천황 숭배 강요에 대한 일부 기독교인들의 거부는 한국 민족주의와 일제강점기 저항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대한민국 헌법종교의 자유정교분리를 보장하지만, 정부는 기독교에 우호적이었다.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은 유교의 가치를 삶에 통합하며,[36] 기독교 가르침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본질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믿음을 통해 사회적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믿는다.

한국 전쟁 이후, 기독교는 유엔군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인식과 함께 확산되었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기독교 교회는 민주화 운동의 거점이 되었고, 김대중을 지지했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이 대표적이다.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김대중김영삼민중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4. 2. 교회 개혁을 위한 논제

개신교의 세습, 대형교회 중심주의, 물질주의적 기복 신앙 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개신교가 타 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고, 사회적 문제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78][79]

사회인류학최길성은 한국 개신교에 대해 "샤머니즘과 기독교가 공존하거나 혼재하는 것 같으며, 많은 기독교인들은 샤머니즘을 미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속에 샤머니즘이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고 말했다.[78] 그는 개신교 성장의 비결이 무속 신앙을 받아들인 종교적 열광주의에 뿌리를 둔 심령부흥회에 있다고 지적하며, 한국 개신교의 감성적 신비주의 운동은 지적인 신학을 앞세워 전도에 실패한 일본 개신교와 대조를 이룬다고 설명했다.[79]

최길성은 "신령적 신비주의를 간단하게 표현하는 말로 '통성기도', '성령 임재', '방언', '삼박자 축복', '치병', '안수 치료', 피 나눔, '접신', '강신극'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러한 신흥 성령 운동은 한국 국내뿐 아니라 한국인이 사는 세계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신흥 성령 운동이 1907년 길선주 목사 주도의 대부흥회를 시작으로, 1930년대 이용도, 황국주 등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종교에서 신령성을 강조하는 신비주의를 빼면 종교성이 약해지지만, 과도하게 강조하면 신학 자체가 무시된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적절한 조화가 종교 발전에 요구된다"고 주장했다.[79]

5. 정치/사회적 문제

한국에서 기독교는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오랜 투쟁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민중신학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기독교적 개념과 한국 특유의 정서인 "한"을 결합하여, 고통받는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는 신학 사조이다.[34]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중신학을 지지했으며, 군사 정부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34]

박정희 정권 시기에는 가톨릭 농민회, 개신교 도시 산업 선교회 등 기독교 사회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군사 정부는 이러한 운동을 사회 불안 요소로 간주하여 탄압했고, 많은 지도자들이 투옥되기도 했다.[34]

1960~70년대 한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에 기독교가 기여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일부에서는 성공과 번영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해석하며, 종교가 경제 성장의 동력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37]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학계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41] 한편, 2000년대 이후 초대형교회 건설 붐이 일면서 일부 교회는 재정난을 겪기도 했다.[42]

1960년대부터 교회는 산업 노동자, 매춘부 등 소외된 이웃에게 다가갔으며, 산업 현장과 군대 내에서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43] 현재 한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국가이다.[44]

5. 1. 정치적 문제

노무현 정부가 사학법 개정을 추진하자, 일부 개신교 단체들은 사학 자율권 침해를 이유로 반대하였다.[97] 이명박 정부 이후에는 일부 진보적인 개신교인들이 4대강 사업에 반대하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시기에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국교회연합 등이 탄핵 반대 집회를 열었다.[97]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에는 전광훈 목사가 이끄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태극기 집회 등에 참여하며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고 대통령 하야를 주장하였다.[97]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문재인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에 대해 일부 보수적인 개신교 신자들은 반공주의에 입각하여 반대했다.[97]

이명박 대통령 취임 이후, 정부의 중동 지역 선교 활동 제한 방안,[44] 국가적 차원의 기독교 기도회 개최[45] 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일부 개신교인들의 불교에 대한 적대 행위는 사회적 비판과 개신교 감소 추세에 영향을 주었다는 분석도 있다.[46]

2011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일부 기독교 단체가 나경원 후보 지지 이메일을 발송하여 선거관리위원회에 기소되기도 하였다.[48]

창조과학을 주장하는 한국창조과학회(KACR) 등 일부 개신교 단체들은 창조론교육 과정에 포함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2012년, 교육부는 이들 단체의 압력을 받아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진화의 일부 예시를 삭제하려 했으나, 논란 끝에 같은 해 9월 이 시도는 무산되었다.[50]

5. 2. 종교 갈등

개신교불교 등 타 종교에 대한 공격적인 선교 활동과 종교 시설 훼손 행위는 사회적 갈등을 야기했다.[46][55]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불교 시설물에 대한 파괴 행위와 "모든 불교 사찰의 파괴를 위한 정기적인 기도"[51][52]는 큰 비판을 받았다. 불상은 우상으로 여겨져 공격받고 머리가 잘려나갔으며, 범죄자들이 야밤에 은밀하게 활동하여 체포가 어려웠다.[53] 일부 개신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행위를 지지[54]하면서, 한국인들이 개신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하고 관련 교회와 단체들을 비판하게 만들었으며, 최근에는 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는 결과를 초래했다.[46][55]

이명박 대통령 취임 이후, 한국 개신교계에 대한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비판이 제기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중동 지역 선교 활동에 종사하는 한국 국민들을 제한하려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44] 고신대학교 손봉호 교수는 2011년 3월 대통령이 참여한 국가적 차원의 개신교 기도회가 세속적인 대한민국 정치에 대한 강력한 개신교 영향력의 잠재적 위험을 시사한다고 비판했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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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서적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 나침반
[103] 서적 디트리히 본 회퍼 복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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