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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3·1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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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해 3·1 독립운동은 1919년 4월 초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이다. 설천면에서 시작되어 남해읍, 고현면 등으로 확산되었으며, 이예모 선생 등이 주도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남해읍 장터에서는 1,000여 명의 군중이 참여하여 군청, 학교, 우체국 등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고, 고현면 포상리에서도 시위가 벌어져 일본 경찰의 발포로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운동으로 설천면 의거 관련자 23명이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일부는 옥중에서 순국하거나 출옥 후 사망했다. 남해군은 이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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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3·1독립운동
남해 3·1 운동
날짜1919년 4월 2일 - 1919년 4월 6일
지역' 일제 감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상도 남해군'
목적' 조선의 독립'
원인'대한제국의 국권 피탈'
'한국의 민족주의'
'2·8 독립 선언'
'파리 강화 회의'
'고종 독살설'
결과일제의 무력 진압
결과 상세' 일제의 문화 통치 시작'
'{{국기그림|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국외 무장 독립 투쟁 촉진
'5·4 운동을 비롯한 세계 독립 운동에 영향'
시위대 1'남해 군민'
시위대 2'일본 제국'
시위 인원 11000명 이상
시위 인원 2일본 헌병
주요 인물 1민중 주도
주요 인물 2고현면장 김치관, 일본 헌병
사망자1명
부상자미상

2. 진행 과정

경상남도 남해군에도 3·1운동 후 전국적으로 퍼져가고 있는 독립을 요구하는 민족의 의거 소식과 함성이 계속적으로 들려왔다. 척박한 토양, 섬이라는 지리적 어려움과 끊임없이 마주하고 이를 이겨 낸 이곳 사람들에게 '일제 강점'이라는 역사적 고난도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1919년 3월 1일 전국을 뒤덮은 항일독립만세 물결이 남해에 도달한 것은 한 달여 뒤인 4월 초였다.

설천에서 독립만세 기운이 시작되었고, 1919년 3·1독립만세 메아리를 남해군 전역에 봉화처럼 전파한 시발점이기도 하다. 3월 중순 하동 전역을 한바탕 휩쓸고 간 항일독립만세 열풍이 4월 2일 이곳 설천에 닿았다.

이후 설천면에서의 독립만세운동, 남해읍 장터에서의 독립만세운동, 고현면 포상리에서의 독립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2. 1. 설천면에서의 독립만세운동

1919년 4월 2일, 이예모 선생은 하동에서 독립선언서를 구해 고향으로 돌아와 정순조, 정몽호, 윤주순 선생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4월 3일, 설천면민들은 남양리 노상에 집결하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남해읍을 향해 만세 시위를 행진하였다. 큰 태극기는 정순조가 들고, 이예모 선생이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시위대는 장대에 높이 매단 태극기를 펄럭이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고현면 이어리(당시 고현면 사무소 소재지)에 이르렀을 때, 고현면장 김치관경찰 주재소에 밀고하여 날이 어두워지자 시위대는 다음 날을 기약하며 해산하였다.

2. 2. 남해읍 장터에서의 독립만세운동

1919년 4월 4일은 남해읍 시장 장날이었다. 전날의 독립 만세시위에서 자신감을 얻은 사람들은 근처 여러 곳에서 더 많은 군중을 모아 장꾼으로 가장하고 남해읍 시장으로 모여들었다.

일본 순사들은 남해읍으로 가는 길목을 막고 경계했지만, 모여드는 사람들의 기세를 꺾을 수는 없었다. 시위대 중 일부는 이날이 장날임을 이용해 장꾼으로 위장해 장터로 향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오후 1시 남해읍 장터에는 시위 군중 1,000여 명(일본 경찰 기록은 약 750명)이 모여들었다. 이예모 선생 등 중심인물 16명은 미리 약속한 계획에 따라 신호에 맞춰 일제히 가슴에 숨겨 온 태극기를 꺼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오후 3시경 1,000여 명의 장꾼들이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여 만세를 외쳤다.

이들 중 정흥조(鄭興祚)와 정임춘(鄭任春) 선생 등 10여 명은 사람들을 지휘해 군청, 공립보통학교, 우편국, 경찰 주재소까지 들어가 순사들을 내동댕이치고 유치장에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또한 남해군수와 순사, 금융조합 조합장도 독립만세를 함께 외치도록 했다.

성난 파도와 같은 시위 군중의 힘을 이기지 못한 경찰은 결국 발포를 하여 시위를 진압하려 했다. 이때 일제주구(走狗) '''김치관'''(金致寬)은 경찰의 경비전화를 빌려 사천경찰서에 이곳 상황이 위급함을 알리면서 경찰과 일본군을 보내달라고 '''응원'''(應援)을 요청하였다.

군중이 해산할 무렵 김치관이 사천경찰서에 일본군의 출동을 요청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군중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군중은 일제히 고현면 이어리(伊於里)에 있는 김치관의 집을 습격했으나 김치관은 없었다. 격분한 군중은 김치관의 집을 부순 후 해산했다. 이때 김치관은 남해주재소 마루 밑에 숨어 있었다.

김치관의 '''응원''' 요청에 따라 사천 경찰서 경관과 일본 헌병 수십 명이 급파되어 와 주동 인물 검거에 나섰고, 일본 경찰은 군중이 흩어지는 틈을 타 주동 인물, 시위 참여자들을 잡아들였는데 23명이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2. 3. 고현면 포상리에서의 독립만세운동

1919년 4월 6일 오후 3시, 고현면 포상리(浦上里)에서 약 700명(일본 군경 기록에는 약 500명)의 군중이 다시 봉기하여 마을 산 위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포상리 산 위에 모인 주민들은 만세를 외치며 남해 장터를 향해 행진했다.

소식을 들은 일본 경찰은 총검으로 위협하며 제지하려 했으나, 시위대는 굴하지 않고 계속 전진했다. 겁을 먹은 일본 경찰과 일본군 보병들은 평화적인 시위 군중에게 총을 쏘아댔고, 이로 인해 애국 군중 1명(성명 미상)이 현장에서 즉사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3. 결과

설천면 의거로 23명이 검거되어 1년에서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정학순, 유찬숙은 복역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고, 정갑린은 출옥 직후 순국하였다. 창선면 출신 양태환은 이후에도 항일투쟁을 계속하다 대구에서 다시 검거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의 옥고를 치렀다.

이곳 남해 의거 주동 인물들의 형량이 1년 내지 3년이라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중형을 받은 것은 그만큼 이곳의 저항이 완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이곳 연해 민중에 대한 일제의 경제적 수탈이 그만큼 심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4. 평가

남해군의 3·1 운동은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희생정신을 보여주었으며,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 의지를 표명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남해군은 3·1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남해 3·1독립운동 기념비남해 3·1독립운동 발상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역사 현장에 관련 표지가 없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5. 관련 자료


  • 1919년 7월 15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 판결문
  • 1919년 8월 27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 판결문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273·275면
  • 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73~76쪽
  • 이용락, <<3.1 운동 실록>> 700~702, 711~713쪽
  • <<조선소요사건상황>>(조선 일군 헌병대사령부 편) 109~110쪽
  • <<고등경찰관계적록>>(1936년 12월 경상남도 경찰부) 18쪽
  • <<고등경찰관계적록>>(1936년 12월 경상남도 경찰부) 18.~19쪽
  • <<조선소요사건상황>>(조선 일군 헌병사령부) 109~110쪽

6. 관련 기념물



남해 3·1독립운동 발상 기념탑은 1919년 4월 2일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에서 남해 지역의 3·1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탑이다.

남해 3·1독립운동 기념비는 1968년 3월 남해군에서 3·1 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들을 추모하고 그 정신을 본받기 위하여 군민의 정성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남해읍 서변리 남산공원 입구에 있으며, 3단 기단 위에 검은색 화강석 비신(碑身)을 세운 형태로 개석(蓋石)은 없다. 기단 밑변은 가로와 세로 각각 1.6m, 높이는 1.8m이며, 부지 면적은 67m2이다. 비신 앞면에는 '남해三一독립운동기념비'가, 뒷면에는 이은상이 지은 비문이 김충현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옆면에는 남해의 독립유공자 23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6. 1. 남해 3.1 독립운동 발상 기념탑

1919년 4월 2일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에서 남해 지역의 3·1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남해군이 주관하여 건립한 탑이다. 원래 1985년 12월 23일에 만세운동 당시 시위대가 남해읍으로 향하던 길목인 문항리에 가로 2m, 세로 1m, 높이 2.7m 규모의 '남해3·1운동발상기념비'를 세웠다가 2007년에 높이 11m 규모인 지금의 기념탑으로 재정비하였다. 기념탑은 기단부 중앙에 옛 남해3·1운동발상기념비의 비문을 새긴 오석판(烏石板)을 배치하고 탑신에는 '남해 3·1운동 발상 기념탑'이라는 탑명을 새겼으며, 상륜부는 두 손으로 태극을 받치고 있는 형상으로 마무리하였다. 기념탑 주변에 당시 만세운동 주동자들인 정순조와 정임춘의 묘가 있다. 2003년 5월에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소재지 :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문항리 1146'''

6. 2. 남해 3.1 독립운동 기념비

남해군에서 3·1 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기념비이다. 2003년 5월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소재지는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서변리 산1-1이다.

7. 기타 관련 인물 및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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