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북핵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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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북핵 위기는 1980년대 중반 북한의 핵 개발 의혹 제기 이후, 1990년대 초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 거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 '서울 불바다' 발언 등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고조되었다. 1994년 미국은 북한 핵 시설 공습을 고려하고, 김영삼 정부는 강경 대응 기조를 유지하며 한반도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으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과 김일성 사망 이후 체결된 제네바 합의를 통해 1차 북핵 위기는 해소되었다. 하지만 이후 북한의 핵 프로그램 재개로 이어졌으며, 팀 스피리트 훈련 재개는 북핵 위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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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825호는 북한의 핵확산 금지 조약 탈퇴 결정 재검토 및 IAEA 안전 조치 협정 이행을 촉구하며 핵무기 개발 의도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모든 유엔 회원국에게 북한이 결의를 수용하도록 설득할 것을 요청한 결의안이다. - 북핵문제 - 2018년 북미정상회담
2018년 북미정상회담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싱가포르에서 개최한 사상 최초의 정상회담으로, 공동성명 발표에도 불구하고 비핵화 조치와 상응 조치에 대한 이견으로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한반도 비핵화 문제의 미해결 과제를 남겼다. - 북핵문제 - 6자 회담
6자 회담은 북한 핵무기 개발 문제 해결을 위해 대한민국, 북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6개국이 참여하는 다자 회담으로, 2003년부터 베이징에서 개최되었으나 2009년 북한의 탈퇴 선언 이후 재개되지 못하고 있다.
제1차 북핵 위기 - [전쟁]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분쟁 이름 | 1994년 북한 핵 위기 |
장소 | 한반도, 동해 |
일부 | 남북 관계 |
날짜 | 1993년 3월 12일 – 1994년 10월 21일 |
결과 | 미국과 북한 간 합의된 틀 서명 북한 핵무기 프로그램의 일시 중단 팀 스피리트 훈련 중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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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조선인민군 |
교전국 2 | 미국 태평양 육군 태평양 공군 미국 7함대 USS 키티호크 CVW-15 USS 인디펜던스 CVW-5 대한민국 국군 |
지휘관 및 지도자 | |
지휘관 1 | 김일성 (1994년 7월 8일 이전) 김정일 (1994년 7월 8일 이후) |
지휘관 2 | 빌 클린턴 김영삼 |
2. 배경
북한은 1985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했으나, 핵 개발 의혹은 계속 제기되었다.[6] 1991년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술 핵무기를 철수했지만,[2][7] 북한은 핵 시설 사찰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1][7]
1992년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북한의 핵 개발 의혹을 제기하며 특별 사찰을 요구했다. 1992년부터 6차례 사찰이 이루어졌지만, 북한은 보고된 플루토늄 양과 실제 양의 차이, 미신고 시설 사찰 거부 등으로 의혹을 키웠다. 1993년 1월, 한국과 미국이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를 발표하자 북한은 반발했고, 3월에 훈련이 실시되자 NPT 탈퇴를 선언했다.
한국과 미국은 대화를 통해 북한을 NPT 체제로 복귀시키려 노력했으나, 1993년 11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입장 변화로 남북관계가 악화되었다.
1994년, 미국은 북한의 핵 개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표명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의 핵 개발을 묵인하지 않겠다고 경고하며, 북한이 핵을 사용할 경우 "북한의 최후"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28][29] 미국은 핵시설 타격을 계획했으나, 큰 피해를 우려하여 중지했다.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김일성의 회담을 통해 위기가 해결되었다. 북한은 미국의 군사공격 중단과 경수로 지원을 조건으로 핵시설 동결, NPT 복귀, IAEA 사찰에 합의했다.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에서 '조미 기본합의문'이 채택되면서 제1차 북핵 위기는 종결되었다.
2. 1. 초기 핵 개발 의혹 (1980년대)
황장엽 등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의 핵 개발 계획은 이미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14][15][16] 1997년 망명한 황장엽은 북한에서 핵무기 보유는 상식이었으며, 1985년 소련이 핵 개발을 문제 삼자 김일성 부자가 묵살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1994년 러시아 관계자들도 1985년부터 소련이 북한의 핵 개발을 인지하고 핵 전문가들을 본국으로 송환했다는 증언을 했다.[17][18]1994년 러시아 일간지 〈이즈베스티야〉는 KGB 보고서를 인용, 북한이 1990년에 이미 핵 기폭 장치 개발을 완료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또한, 같은 해 탈북한 강명도 씨와 조명철 씨는 북한이 핵무기 5개를 보유하고 있으며, 추가 개발 후 국제사회에 발표할 예정이라고 증언했다.[19]
3. 주요 사건 전개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개발 의혹을 제기하며 시작된 1차 북핵 위기는 1994년까지 긴박하게 전개되었다. 1993년 3월, 북한은 핵무기 비확산 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며 국제사회를 긴장시켰다.
1993년 11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사전 통보 없이 대북 강경 입장으로 선회하면서 남북관계는 악화되었다. 1994년에는 북한 측의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남북 관계는 더욱 경색되었다.
1997년 망명한 황장엽은 북한이 1980년대 중반부터 핵 개발을 시작했으며, 김일성이 소련의 문제 제기를 묵살했다고 증언했다.[14][15][16] 1994년 러시아 언론은 KGB 문서를 인용해 북한이 1990년에 핵 기폭 장치 개발을 완료했다고 보도했다.
1994년 7월 27일, 탈북한 강명도 씨와 조명철 씨는 북한이 이미 핵무기 5개를 보유하고 있으며, 추가 개발 후 국제사회에 공개할 예정이라고 주장했다.[19] 당시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북한의 핵 개발을 "엄청난 악몽"이라고 칭하며, 북한이 핵을 사용하면 "북한의 최후"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28][29]
미국은 핵시설 타격을 계획했으나, 막대한 피해를 우려하여 중지했다. 결국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김일성의 회담을 통해 위기는 해결 국면을 맞았다.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에서 북한은 핵 개발 포기 대가로 미국의 경제적 보상, 안전 보장, 북미 관계 정상화, 남북 대화 추진 등을 약속받으며 제1차 북핵 위기는 일단락되었다.
3. 1.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과 NPT 탈퇴 (1992-1993)
1992년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개발 의혹을 제기하며 특별 사찰을 요구했다. 1992년부터 6차례 사찰이 이루어졌으나, 북한은 보고서에 적힌 플루토늄의 양과 실제 양이 다르다는 이유로 미신고 시설에 대한 사찰을 거부했다.[1] 1993년 1월, 대한민국과 미국이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를 발표하자, 북한은 이에 반발하여 1993년 3월 12일, 핵무기 비확산 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3. 2. '불바다' 발언과 남북 관계 악화 (1994)
1994년 3월 19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특사 교환 실무 회담에서 북한 측 대표인 박영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부국장은 '서울 불바다' 발언을 하였다.[31] 이 발언은 남북 관계를 급격히 냉각시켰다.김영삼 정부는 강경 대응 기조를 유지했다. 1994년 6월 6일,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이 무모한 모험을 감행한다면 자멸과 파멸의 길로 갈 것"이라고 경고했다.[33] 이러한 강경 기조는 북핵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당시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 핵 개발에 대해 매우 강경한 입장을 취하며, 북한이 핵을 개발해 사용한다면 북한의 최후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29] 미국은 핵시설 타격을 계획하고 추진했으나, 전쟁 시 미국의 피해를 우려하여 중지했다.[3]
3. 3. 미국의 대북 군사적 압박
1994년 미국은 북한의 핵 개발에 대응하여 작전 계획 5027 실행을 검토했다.[10] 이 계획은 북한의 공격에 대비한 것이었지만, 미군 증강과 대피가 북한의 공격 징후로 해석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10]미국은 펜타곤의 '중간 옵션'에 따라 약 10,000명의 병력, 여러 대의 F-117A, 항모 타격단을 한반도 인근으로 이동시켰다.[3] 1994년 9월에는 USS ''키티호크''[11], USS ''인디펜던스''[12] 등 항공모함 2척과 구축함 33척이 원산 인근 동해에 집결하여 영변 핵시설 공습을 준비했다.[13]
또한 미국은 F-117 스텔스 전폭기와 순항 미사일을 이용하여 영변 핵 시설을 제거하는 계획도 검토했다.[3] 그러나 이러한 군사적 압박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김일성 북한 주석과 만나 합의하면서 중단되었다.[3][4][5]
4. 김영삼 정부의 대응과 국내 혼란
김영삼 정부는 북핵 문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1993년 11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사전 통보 없이 입장을 바꿔 남북관계를 악화시켰다.[14] 1994년 3월 19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특사교환 실무회담에서 북한 대표 박영수는 '서울 불바다' 발언을 했고, 이는 9시 뉴스를 통해 전국에 방영되었다.[31]
김영삼 정부는 대화보다는 압박에 치중했다. 1994년 6월 6일,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이 무모한 모험을 감행한다면 자멸과 파멸의 길로 갈 것"이라고 경고했다.[33] 정부의 강경 대응과 언론 보도는 국민들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1994년 6월 8일, KBS <9시 뉴스>는 "한반도, 전쟁 위기인가?"라는 특집 뉴스를 통해 전쟁 위기론을 제기했고, MBC도 북핵 관련 보도를 늘렸다.[30]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94년 6월 13일부터 3일 동안, 특히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사재기 현상이 나타났다. 라면, 참치캔 등의 생필품 판매량이 급증했고, 일부 백화점에서는 '비상 용품 판매 코너'를 설치해 방독면을 판매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신용카드를 사용하거나 아파트 관리비 납부를 미루기도 했다. 서울 압구정동 일대 은행에서는 환전 규모가 평소보다 크게 늘었다.[30]
5. 위기 해소 노력
1992년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북한의 핵개발 의혹을 제기하며 특별 사찰을 요구했고, 북한은 이를 일부 수용했지만 미신고 시설에 대한 사찰은 거부했다. 1993년 3월, 팀스피리트 훈련이 실시되자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한다.[14][15][16]
이에 대한민국과 미국 정부는 대화와 '포괄적 접근'을 통해 북한을 NPT 체제로 복귀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1993년 11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사전 통보 없이 입장을 바꾸면서 남북관계는 악화되었고, 3차 북미 회담도 무산되었다.
1994년 7월 27일, 탈북한 강명도 씨와 조명철 씨는 북한이 이미 핵무기 5개를 보유하고 있으며, 추가 개발 후 국제사회에 발표할 예정이라고 주장했다.[19] 당시 월리엄 페리 미국 국방장관은 북한이 핵무기를 1~2개 정도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했다.[26][27]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북한의 핵 개발을 결코 묵인할 수 없다고 경고하며, 북한이 핵을 사용하면 "북한의 최후"가 될 것이라고 강력히 경고했다.[28][29]
미국은 핵시설 타격을 계획했으나, 전쟁 시 발생할 막대한 피해를 우려하여 중지했다. 결국 위기는 김일성-카터 회담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5. 1.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방북
1994년 6월 15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부인 로절린과 함께 판문점을 통해 평양을 방문하여 다음날 김일성 주석과 협상을 가졌다.[33] 이 회담을 통해 북한은 미국이 군사 공격을 하지 않고 경수로 지원을 약속하는 조건으로 핵시설 동결, 핵확산금지조약(NPT) 복귀,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에 합의할 것을 약속했다.[4][5]5. 2. 김일성 주석 사망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한반도 정세는 더욱 불안정해졌다.[11] 김일성의 사망으로 USS ''키티호크'', CVW-15 및 그들의 타격단은 페르시아만 파견에서 전환되어 서태평양과 한반도에 머물도록 명령받았다.[11] USS ''인디펜던스'' (일본 요코스카 주둔) 또한 한반도에서 작전을 수행했다.[12] 김영삼은 2009년에 동해에 "33척의 구축함과 2척의 항공모함"이 북한을 공격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13]5. 3. 제네바 합의 (1994)
1994년 10월 21일 미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한의 핵 동결과 경수로 지원, 관계 정상화 등을 약속하며 1차 북핵 위기를 해소했다.[2] 이 합의에서 '조미 기본합의문'을 채택하고, 북측은 핵 개발 포기에 대한 미국의 경제적 보상, 대북한 안전 보장, 북미 관계의 완전한 정상화, 남북 대화 추진을 약속받았다.이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1994년 6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방북하여 김일성 주석과 회담한 결과였다. 이 회담에서 북한은 미국이 군사 공격을 하지 않고 경수로 지원을 약속하는 조건으로 북한 핵시설 동결, 핵확산금지조약(NPT) 복귀,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에 합의할 것을 약속했다.
6. 결과 및 영향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에서 '조미 기본합의문'이 채택되면서, 북한은 핵 개발 포기에 대한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보상, 대북한 안전 보장, 북미 관계의 완전한 정상화, 그리고 남북대화 추진을 약속받았다. 이로써 제1차 북핵 위기는 일단락되었다.[2]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에서 제네바 합의가 서명되면서 북한의 핵 프로그램은 사실상 동결되었다.[2] 그러나 약 10년 후, 북한이 이란에 미사일을 이전하면서 미국과 북한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고, 북한은 핵무기 프로그램을 재개하게 된다.[2]
7. 팀 스피리트 훈련
1992년 미국과 대한민국은 팀 스피리트 '92 연합 훈련을 취소했지만, 1993년 2월에 팀 스피리트 '93이 실시되었다.[8] 1976년부터 1993년까지(1992년 제외) 주한 미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합동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1991년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국제적 흐름에 맞춰 1992년에는 실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출범 직전인 1993년 1월 팀 스피리트 훈련 재개가 발표되자, 북한은 이에 강력히 반대하며 남북관계 중단을 경고했다.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1993년 3월 8일 훈련이 실시되자 북한은 이를 남북관계 및 북미관계의 중단으로 받아들였고, 이는 곧 제1차 북핵 위기의 원인이 되었다.
1994년, 미국과 한국은 북한과의 대화를 유도하기 위해 팀 스피리트 '94를 취소하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팀 스피리트 '93 훈련이 마지막 팀 스피리트 훈련이 되었다.[13] 1994년부터 2007년까지는 RSOI (Reception, Staging, Onward Movement and Integration of Forces)로 명칭이 변경되어 실시되었으며, 2008년 3월부터는 '키 리졸브 훈련'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현재까지 매년 실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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