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SS의용기갑척탄병사단 네데를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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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3SS의용기갑척탄병사단 네데를란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무장친위대에 소속된 네덜란드 의용병 부대였다. 네덜란드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한 후, 네덜란드 국가사회주의 운동(NSB)의 지지를 받아 결성되었으며, 동부 전선과 유고슬라비아에서 전투에 참여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 나르바 전투 등에서 활약했으나, 종전 후 부대원들은 전범 재판을 받았으며, 일부 지휘관은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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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SS의용기갑척탄병사단 네데를란트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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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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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기간 | 1941년 ~ 1945년 |
국가 | 나치 독일 |
소속 | 무장친위대 |
병과 | 기갑척탄병 |
규모 | |
병력 | 40,000명 |
별칭 | |
별명 | 정복자 네덜란드 |
전투 | |
주요 전투 | 제2차 세계 대전 독소 전쟁 나치 보안 전쟁 나르바 교두보 전투 존넨벤데 작전 |
해체 | |
해체일 | 1945년 |
독일어 명칭 | |
독일어 명칭 | 23. SS-Freiwilligen-Panzergrenadier-Division "Nederland" (niederländische Nr. 1) |
네덜란드어 명칭 | |
네덜란드어 명칭 | Vrijwilligerslegioen Nederland |
지휘관 | |
주요 지휘관 | 헤르베르트 가르테 오토 라이히 아르페트 토이어만 요제프 프리츠툼 위르겐 바그너 |
관련 부대 | |
관련 부대 | 4. Freiwilligen-Panzergrenadier-Brigade Nederland |
2. 역사적 배경
1940년 5월 네덜란드 침공 이후, 나치 독일은 점령지 네덜란드 내에서 권위주의와 반민주주의 이념에 동조하는 세력들을 활용하고자 했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인 세력은 안톤 뮈세르트가 이끌던 네덜란드 국가사회주의 운동(Nationaal-Socialistische Beweging in Nederland|나시오날-소시알리스티서 베베힝 인 네데를란트nl, NSB)으로, 이들은 독일 나치당을 모방하여 활동하며 독일 점령 정책에 협력했다.
한편, 1939년 폴란드 침공 성공 이후 SS의 수장 하인리히 힘러는 무장친위대를 확장하기 위해 독일 외 다른 국가의 이른바 "게르만" 민족 자원병 모집을 추진했다. 네덜란드에서도 이러한 모집 활동이 이루어졌으며, 전 네덜란드 육군 중장 헨드릭 세이파르트의 공개적인 지지는 네덜란드인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배경 아래 네덜란드인 자원병으로 구성된 무장친위대 부대가 창설되었고, 이는 이후 제23SS의용기갑척탄병사단 네데를란트의 모태가 되었다.
2. 1. 나치 독일의 점령과 네덜란드 협력자들
1939년 9월, 독일 국방군의 폴란드 침공 성공 이후 서유럽의 파시즘 정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독일이 볼셰비키 문제의 해결책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1940년 후반, 독일의 서유럽 점령이 일단락되자 친위대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는 아돌프 히틀러의 승인을 받아 유럽의 게르만계 민족으로 구성된 무장 친위대 소속 외국인 의용병 부대 편성을 추진했다.이러한 배경 속에서 나치 독일의 네덜란드 점령 이후, 네덜란드 내 파시즘 정당인 '''NSB'''(Nationaal-Socialistische Beweging|국가 사회주의 운동nld)를 비롯한 여러 친독 조직들은 적극적으로 독일에 협력했다. NSB는 안톤 무세르트가 이끌고 있었으며, 독일 나치당을 모델로 삼았다. 힘러와 고틀로프 베르거 등이 주도한 외국인 의용병 모집 운동은 NSB와 같은 협력 조직들의 지원에 힘입어 네덜란드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전 네덜란드 육군 중장이자 NSB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헨드릭 알렉산더 세이파르트가 공개적으로 SS 모집 운동을 지지하면서 더 많은 네덜란드인들이 의용병으로 지원하게 되었다. 이들 중 다수는 무장 친위대 복무를 통해 히틀러가 구상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 네덜란드가 중요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독일은 네덜란드인 의용병 부대를 마치 네덜란드 전체의 희망인 것처럼 선전하며, 독립된 네덜란드가 독일과 함께 연합국에 맞서 싸우는 듯한 인상을 만들려 했다. 세이파르트는 이러한 선전 활동에서 상징적인 인물로 이용되었고, 모든 네덜란드인 의용병에게는 비공식적인 오라녜 공의 기를 본뜬 방패 모양 완장을 군복 왼쪽 소매에 부착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많은 의용병들이 부대가 독립적일 것이라 믿었던 것과 달리, 세이파르트는 부대가 실제로는 무장 친위대의 완전한 지휘 아래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독일에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이파르트는 확고한 반공주의자였으나, 나치즘의 이데올로기 자체에 깊이 동조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편, NSB 지도자 안톤 무세르트는 이 의용 부대를 장차 새로운 네덜란드군의 모체로 여겼다.
2. 2. 무장친위대 네덜란드 의용부대의 창설
1939년 9월, 독일 국방군의 전격전을 통한 폴란드 침공 성공 이후, 서유럽 국가들의 파시즘 정당 지지자들은 나치 독일이 볼셰비키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1940년 5월 네덜란드 침공 이후, 네덜란드 내 여러 정당들이 독일의 권위주의 및 반민주주의 이념에 동조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세력은 1931년 독일 나치당을 모방하여 안톤 뮈세르트가 이끈 네덜란드 국가사회주의 운동 (Nationaal-Socialistische Beweging in Nederland|나시오날-소시알리스티서 베베힝 인 네데를란트nl, NSB)이었다. NSB는 초기에 중하류층의 제한적 지지를 받았으나 광범위한 기반을 얻지는 못했고, 1939년 선거에서는 3%의 지지율을 기록했다.독일이 서유럽 국가 점령을 마무리한 1940년 후반, SS의 수장인 친위대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는 아돌프 히틀러의 승인을 받아 유럽의 게르만 계 민족 중에서 자원병을 모집하여 무장친위대 소속 외국인 부대를 창설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1940년 4월,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자원병을 위한 무장친위대 노르트란트 연대와 네덜란드 및 플라망 자원병을 위한 무장친위대 베스트란트 연대가 창설되면서 본격적인 모집이 시작되었다. 일부 자료에서는 네덜란드 및 플라망 의용병으로 구성된 SS 의용 연대 "노르트베스트"(Nordwest|노르트베스트de)가 1941년 4월에 창설되었다고도 한다.
네덜란드에서의 모집 활동은 NSB와 같은 친독 조직 및 전 네덜란드 육군 중장이자 NSB의 열렬한 지지자인 헨드릭 세이파르트 (Hendrik Alexander Seyffardt|헨드릭 알렉산더 세이파르트nl)의 지원에 힘입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세이파르트의 지원은 모집 활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 많은 네덜란드 의용병들은 무장친위대 복무를 통해 히틀러가 구상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 네덜란드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1941년 4월까지 네덜란드 자원병들은 함부르크에 도착하여 신체검사, 신원조회, 계약 체결 등의 절차를 거쳤다.
1941년 7월, 기존의 "노르트베스트" 연대는 해체되고 소속 플라망인과 네덜란드인 의용병은 각각 별도의 국별 부대(Legion)로 재편성되었다. 네덜란드인들은 5개의 기동 중대를 갖춘 강화된 보병 대대 규모의 SS 의용부대 "니더란데" (SS-Freiwilligen-Legion "Niederlande"|SS-프라이빌리겐-레기온 "니더란데"de)로 편성되었다. 이 부대는 이후 세이파르트 장군의 지휘 아래 SS 의용 군단 네데를란트로 다시 명칭이 변경되었다. NSB 관계자가 다수였던 네덜란드 의용병들은 SS와의 계약을 유지하며 새 부대에서 복무를 이어갔다.
더 나은 훈련을 위해 부대는 동프로이센의 아리스(현 폴란드 오르지슈)로 이동했지만, 함부르크에서 기본 훈련을 받던 신병들은 무장친위대 훈련 교관들의 오만하고 가혹한 태도에 실망감을 느끼기도 했다. 일부는 귀향을 시도하거나 자살하는 경우까지 발생했지만, 많은 의용병들은 목표 달성을 위해 혹독한 훈련을 계속했다.
독일은 이러한 네덜란드 의용부대 창설 활동을 마치 네덜란드 전체의 희망인 것처럼 선전하며, 독일과 함께 연합국에 맞서 싸우는 독립 네덜란드의 군대라는 인상을 주려 했다. 세이파르트는 이 부대의 상징적 인물로 내세워졌고, 의용병들은 비공식적인 네덜란드의 국기 문양의 완장을 왼쪽 소매에 착용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세이파르트 자신은 부대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무장친위대의 완전한 통제 하에 있음을 깨닫고 독일에 항의했지만 묵살당했다. 그는 강경한 반공주의자였으나, 나치 이데올로기에는 완전히 동조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41년 겨울까지 의용 부대 "니더란데"는 1개 보병 연대 규모로 확장되었고, 5개의 자동차화 중대를 포함한 여러 지원 중대를 갖추게 되었다. NSB 지도자 안톤 뮈세르트는 이 부대가 장차 새로운 네덜란드군의 모태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1941년 11월, 훈련을 마친 부대는 북방군 집단 소속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레닌그라드) 근교의 동부 전선으로 파견되어 육군 집단 북부 후방 지역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2. 3. 주요 지휘관
취임 | 퇴임 | 계급(당시) | 성명 |
---|---|---|---|
1941년 11월 | 1942년 2월 | SS 소령 | Herbert Garthe|헤르베르트 가르테de |
1942년 2월 | 1942년 4월 1일 | SS 여단지도자 | {{lang |
1942년 4월 1일 | 불명 | SS 중령 | Arved Theuermann|아르베트 토이만de |
불명 | 불명 | SS 대령 | {{lang |
1944년 4월 20일 | 1945년 5월 1일 | SS 소장 | {{lang |
네데를란트 사단의 전신인 의용 부대 "네데를란트"는 1942년 1월 중순 동부 전선의 볼호프 강 유역에 투입되어 후방 경계 활동과 소련군과의 교전을 시작했다. 같은 해 6월 말에는 레닌그라드 포위전에 참여하는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했으며, 이후 라도가 호수 근처에서 격전을 치렀다.[1]
3. 주요 전투 및 활동
1943년 4월, 부대는 독일에서 SS 의용 기갑척탄병 여단 "네덜란드"로 재편성된 후, 9월에는 독립국 크로아티아(유고슬라비아)로 파견되어 펠릭스 슈타이너의 제3SS기갑군단에 배속되었다. 이곳에서 여단은 SS 사단 비킹에서 차출된 네덜란드인 병력을 보충받고 파르티잔 토벌 등 후방 경계 작전에 참여했다.
1944년 초, 여단은 다시 동부 전선으로 복귀하여 레닌그라드 남쪽 오라니엔바움 전선에 배치되었다. 소련군의 대공세로 인해 에스토니아의 나르바로 후퇴하여 나르바 전투에 참여, 격렬한 방어전을 치렀다. 이 전투 과정에서 여단은 큰 피해를 입기도 했으나, 전선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후 바그라티온 작전 등 소련군의 계속된 공세 속에 쿠를란트 포켓에 고립되기도 했으며, 종전 직전에는 명목상 사단으로 승격되어 독일 본토 방어전에 투입되었다.
3. 1. 동부 전선
1941년 11월, SS 의용 군단 네데를란트는 육군 집단 북부 후방 지역의 지휘 하에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 전선으로 파견되었다.
1942년 1월 중순, 부대는 볼호프 강 전선에 도착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고 후방 경계 활동에 참여했다. 도착 후 몇 주 동안 부대는 소련군이 볼호프 강 서안에 교두보를 구축하는 것을 막았으며, 소련군의 방어 거점 및 유격대에 대한 소탕 작전에도 참여했다. 2월 초, NSB 지도자 안톤 뮈세르트가 전선을 방문하여 부대 사기를 높였으나, 며칠 후인 2월 10일 소련군이 레닌그라드를 방어하기 위한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 이후 6월 전반까지 부대는 끊임없는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내며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방어선을 유지했다.
1942년 6월, 네덜란드 부대는 처음으로 반격에 나서 소련군 부대 일부를 무력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부대는 후에 러시아 해방군의 지도자가 되는 안드레이 블라소프 장군을 포함한 소련군 3,500명을 포로로 잡았다. 6월 말, 부대는 레닌그라드 포위전에 참여하는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이후 노르트리히트 작전에 참여할 예정이었으나, 소련의 시냐비노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작전이 취소되면서 라도가 호수 근처로 이동했다. 1942년 말에는 제2SS보병여단과 합병되어 노르웨이 의용병 부대인 의용 부대 "노르웨겐"과 함께 전선에 복귀했다. 이 시기 라도가 호수에서의 격렬한 전투는 '제1차 라도가 호수 전투'로 알려지게 된다.
1943년 1월 초, 소련군은 레닌그라드 포위를 풀기 위해 '제2차 라도가 호 전투'로 알려진 공세를 시작했다. 네덜란드와 노르웨이 의용병 부대는 프랑스군에게서 노획한 7.5cm PaK 97/98 대전차포 등으로 소련군의 T-34 중전차 공세를 방어했다. 특히 2월 13일 시작된 소련군의 대공세에서, 제14(전차 사냥꾼) 중대 소속의 19세 SS 상등병 헤라르두스 모이만(Gerardus Mooyman)은 자신의 Pak 40 대전차포로 T-34 13대(초기 7대, 이후 6대)를 격파하며 적의 돌파를 저지했다. 모이만은 이 전투를 포함하여 총 19대의 소련 전차(T-34, KV-1 등)를 격파한 공로로 1943년 2월 20일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는 독일인이 아닌 외국인 의용병으로서는 최초의 사례였으며, 나치 독일은 이를 유럽 전역에 선전하며 모이만을 네덜란드 젊은이들의 본보기로 내세웠다.[1] 한편, 1943년 2월 6일 암스테르담에서 신병 모집 활동을 하던 헨드릭 세이파르트 장군은 네덜란드 저항군에게 암살당했다.
1943년 4월, 부대는 SS 의용 기갑척탄병 여단 네덜란드로 재편성되기 위해 독일로 이동했다. SS-Oberführer 위르겐 바그너의 지휘 아래 2개의 기갑척탄병 연대로 구성될 예정이었다. 1943년 9월, 여단은 독립국 크로아티아(유고슬라비아)로 파견되어 펠릭스 슈타이너의 제3SS기갑군단에 합류했으며, SS 사단 비킹에서 차출된 1,500명의 네덜란드 신병을 받았다. 이 기간 동안 여단은 제4SS 의용 기갑척탄병 여단 네덜란드로 재지정되었고 후방 경계 작전에 참여했다.
1944년 1월, 여단은 다시 동부 전선으로 복귀하여 레닌그라드 남쪽 오라니엔바움 서부 루츠키에 배치되어 독일 제18군 소속으로 레오니트 고보로프가 이끄는 소련 레닌그라드 전선군과 대치했다. 1월 14일, 러시아와 발트 3국에서 독일군을 몰아내기 위한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었다. 레닌그라드 전선군과 볼호프 전선군(키릴 A. 메레츠코프 사령관)의 협공으로 독일군의 공군 야전 사단 방어선이 돌파되자, '네덜란드' 여단은 제11SS 의용 기갑척탄병 사단 '노르트란트'와 함께 레닌그라드 전선군을 저지하려 했으나, 볼호프 전선군에 의한 포위 위험 때문에 후퇴해야 했다. 1월 26일부터 오라니엔바움 포위망에서 철수를 시작하여 150km에 걸쳐 철수전을 벌였고, 1월 30일 에스토니아의 나르바 시 북방 케이키노를 거쳐 나르바로 이동, 나르바 강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고 나르바 교두보 북방 중심부 방어를 담당하게 되었다.
소련군의 다음 목표는 에스토니아의 관문인 나르바였다. 1944년 2월 3일, 소련군의 나르바 교두보 공격이 시작되었다. '네덜란드' 여단은 격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나르바 강 동쪽 교두보를 유지했다. 3월 초, 소련군의 공격은 교두보 북부 포포프카를 방어하던 제48SS 의용 기갑척탄병 연대 "헤네랄 세이파르트"에 집중되었으나, 연대장 볼프강 옐히엘(Wolfgang Jörchel) SS 중령의 지휘 아래 공격을 막아내고 반격에 성공했다. 이후 소련군은 릴리엔바흐를 방어하던 제49SS 의용 기갑척탄병 연대 "데 로이터"(연대장: 한스 콜라니(Hans Collani) SS 중령)를 공격했다. 격전 끝에 네덜란드 의용병들은 소련군을 격퇴했지만, 고보로프는 다시 제49연대에 공격을 집중시켰다. 방어선에 균열이 생기자 '노르트란트' 사단의 전차가 투입되었으나 진흙탕에 빠져 기동 불능 상태가 되었고, 콜라니 SS 중령은 연대를 릴리엔바흐 방면으로 철수시켰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의 격렬한 포격으로 제49연대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중대장 헬무트 숄츠(Helmut Scholz) SS 소위가 생존 병력을 모아 반격하여 원래 지점을 탈환하고 전선 붕괴를 막았다. 3월 22일, 소련군의 공격으로 제49연대가 다시 위기에 처하자 제II대대장 하인츠 프뤼아우프(Heinz Frühauf) SS 대위는 대대 본부 인원으로 전투단을 편성, 연대 후방으로 침투한 소련군 약 150명을 습격하여 무력화하고 주변의 적을 소탕했다. 이러한 여단의 활약에 대해 군단장 슈타이너는 감사를 표했다.
교두보 북부 돌파에 실패한 고보로프는 공격 주축을 남부의 '노르트란트' 사단 제24SS장갑척탄병연대 '단마르크'로 옮겼다. 1944년 6월 22일, 소련군의 하계 대공세 바그라티온 작전이 시작되면서 나르바 전선에 대한 압박도 거세졌다. 7월 초 소련군이 나르바 강 서안에 교두보를 확보하자, 7월 23일 슈타이너는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고 제IIISS기갑군단을 나르바 시 서쪽의 방어선 '탄넨베르크 선'(Tannenbergstellung)으로 후퇴시키기로 결정했다. 7월 24일 밤 11시 30분부터 나르바 교두보의 독일군 부대가 철수를 시작했고, '네덜란드' 여단의 제49연대 제I대대와 제48연대는 후위 부대로 남아 24시간 동안 나르바 시에 잔류한 후 철수했다.
3. 2. 유고슬라비아
1943년 9월, 여단은 독립국 크로아티아(유고슬라비아)로 파견되어, 당시 그 지역에서 창설 중이던 SS-Obergruppenführer 펠릭스 슈타이너의 제3SS기갑군단에 합류했다. 도착 후, 여단은 SS 사단 비킹에서 차출된 1,500명의 네덜란드 신병을 추가로 받았다. 유고슬라비아 주둔 기간 동안 여단 부대는 후방 경계 작전에 참여했다. 이 시기에 여단은 제4SS 의용 기갑척탄병 여단 네덜란드로 부대명이 변경되었으며, 병력은 9,342명에 달했다.
3. 3. 후퇴와 종전
1944년 초,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에 밀려 오라니엔바움에서 후퇴한 여단은 에스토니아의 나르바 강 방어선으로 이동하여 나르바 전투에 참여했다. 여단은 나르바 교두보 북쪽을 방어했으나, 1944년 6월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작전 개시 이후 전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7월 23일, 군단장 펠릭스 슈타이너는 히틀러의 현지 사수 명령을 어기고 탄넨베르크 선으로의 전술적 후퇴를 명령했다. 그러나 철수 과정에서 큰 혼란이 발생했다. 특히 제48SS의용장갑척탄병연대 "헤네랄 자이페르트"는 새로 부임한 연대장 리하르트 베너(Richard Benner) SS 중령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계획된 철수 경로를 벗어났다가 소련군에게 포위되었다. 7월 30일, 포위망 돌파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베너 SS 중령을 포함한 연대 대부분의 병력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고, 연대는 사실상 전멸했다. 소수의 생존자만이 탄넨베르크 선에 도달했으며, 전멸한 제48연대는 슐로하우(현 폴란드 Człuchów)에서 재편성 명령을 받았다.
1944년 9월, 여단은 쿠를란트로 철수하여 10월 중순에 도착했다. 그러나 도착 직후 소련군의 공세에 휘말려 격전을 치렀고, 결국 다른 북부 집단군 부대들과 함께 쿠를란트 포켓에 고립되었다. 여단은 라트비아의 항구 도시 리예파야 방어선의 일부를 담당했다. 쿠를란트에서의 전투 중, 여단장 위르겐 바그너 SS 소장은 빨치산의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 학살을 명령하는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1945년 1월 말까지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고, 특히 1월 24일 소련군의 대규모 포격과 공격으로 제49SS의용장갑척탄병연대 "데 로이터" 제I대대가 큰 피해를 입고 괴멸했다. 이 와중에 덴마크 출신 요하네스 헬머스(Johannes Hellmers) SS 중위는 1월 25일 칼레치(Kaleti) 지역에서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소련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하여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1945년 1월 26일, 여단은 해상 수송을 통해 쿠를란트 포켓을 탈출하여 독일 본토의 오데르 방어선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리예파야 항구를 통해 철수한 부대는 2월 4일 슈비네뮌데(현 폴란드 Świnoujście)-슈테틴(현 폴란드 Szczecin) 지역에 도착했다. 2월, 여단은 네덜란드의 국가사회주의운동(NSB)의 요구에 따라 '''제23SS의용기갑척탄병사단 "네덜란드"'''로 승격되었으나, 실제 병력은 1,000여 명에 불과한 명목상의 사단이었다. 사단은 펠릭스 슈타이너 SS 대장이 지휘하는 제11SS 기갑군 소속으로 존넨벤트 작전(Operation Sonnenwende)과 알트담(현 폴란드 Dąbie) 근교 전투에 참여했다.
1945년 4월, 사단은 제48SS 의용 장갑척탄병 연대 "헤네랄 자이펠트"와 제49SS 의용 장갑척탄병 연대 "데 로이터"를 기반으로 한 두 개의 전투단(Kampfgruppe|캄프그루페de)으로 재편성되었다. 4월 16일 시작된 소련군의 베를린 공세 과정에서 독일 전선이 붕괴되면서 두 전투단은 서로 분리되었다. "데 로이터" 전투단은 북서쪽으로 후퇴하며 파르힘(Parchim) 근처에서 소련군의 진격을 잠시 저지한 후, 5월 3일 서쪽으로 이동하여 접근해오는 미군에게 항복했다. 반면, 남쪽으로 밀려난 "헤네랄 자이펠트" 전투단은 다른 부대에 흡수되었으나, 할베 전투의 참혹한 포위전 속에서 대부분의 병력이 사망하거나 포로가 되어 사실상 전멸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부대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살아남은 네덜란드 출신 부대원들은 네덜란드로 송환되어 나치 부역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며, 일부는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여단장(후일 사단장)이었던 위르겐 바그너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민간인 학살 등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4. 한국의 시각에서 본 역사적 평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협력하여 동부 전선 등에서 전투에 참여한 네덜란드인 의용병 부대, 특히 제23SS의용기갑척탄병사단 네데를란트의 존재와 활동은 현대 한국의 역사적 경험과 가치관에 비추어 볼 때 비판적인 평가를 받는다. 이는 자국의 주권을 침해한 침략 세력에 자발적으로 동조하고 부역했다는 사실 자체에 기인한다.
이들 네덜란드인 의용병 다수는 파시즘 정당인 '''NSB'''(Nationaal-Socialistische Beweging|국가 사회주의 운동nld)와 같은 친독 조직의 영향을 받았으며,[1] 다양한 동기로 무장 친위대에 합류하여 독일의 전쟁 수행에 동원되었다.[1] 이들의 부역 행위는 일제강점기 친일파 문제를 경험한 한국 사회의 입장에서 민감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 각국에서 진행된 나치 부역자 처벌과 과거사 청산 노력은, 한국 사회에서 친일 청산 문제와 관련하여 역사적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하는 사례로 종종 언급된다. 특히 중도진보적 시각에서는 이러한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청산이야말로 민족 정체성을 회복하고 건강한 공동체를 재건하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네데를란트 사단과 같은 나치 부역 조직의 활동은 개인적 신념이나 동기를 넘어선 명백한 역사적 과오로 평가되며, 과거사 청산의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사례로 이해된다.
4. 1. 일제강점기 친일파와의 비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 점령 하의 네덜란드에서 나타난 일부 네덜란드인들의 부역 행위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활동했던 친일파의 사례와 비교될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외부 침략 세력에 협력하여 자국과 민족 공동체에 반하는 행위를 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비판의 대상이 된다.[1]1940년 서유럽 점령 이후, 하인리히 힘러는 아돌프 히틀러의 승인 하에 유럽 내 게르만계 민족으로 구성된 무장 친위대 외국인 의용병 부대 창설을 추진했다. 네덜란드에서는 파시즘 정당인 '''NSB'''(Nationaal-Socialistische Beweging|국가 사회주의 운동nl)와 같은 친독 조직의 지원 및 전 네덜란드 육군 중장 헨드릭 알렉산더 세이파르트의 공개적인 지지에 힘입어 많은 네덜란드인들이 무장 친위대에 자원했다.[1] 이들은 볼셰비키에 대한 공동 대응이나, 히틀러가 구축할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 네덜란드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협력을 선택했는데,[1] 이는 일제강점기 일부 친일파들이 일제의 대동아 공영권과 같은 허황된 선전을 믿고 협력했던 것과 유사하다.
독일은 이들 네덜란드인 의용병으로 구성된 SS 의용 부대 "니더란데"(SS-Freiwilligen-Legion "Niederlande"de)를 마치 네덜란드 전체의 희망이자 연합국에 맞서 싸우는 독립 네덜란드의 군대인 것처럼 선전했다. 의용병들에게 비공식적인 네덜란드의 국기(오라녜 공의 기)를 본뜬 완장 착용을 허가하는 등 상징 조작도 이루어졌다.[1] 그러나 실제 부대는 무장 친위대의 완전한 통제 하에 있었으며, 네덜란드의 독립적인 지위와는 무관했다. 세이파르트조차 이러한 현실을 깨닫고 독일에 항의했지만 묵살당했다.[1] 이는 내선일체나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워 조선인의 자발적 협력을 유도하려 했던 일제의 선전과, 그 이면에 숨겨진 식민 통치 강화 및 전쟁 동원이라는 현실 사이의 괴리와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네덜란드인 의용병들은 동프로이센 등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고, 일부는 무장 친위대 교관들의 가혹한 태도에 실망하여 귀향을 시도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1] 그럼에도 다수는 훈련을 마치고 1941년 말 독일 북방군 집단 소속으로 동부 전선의 레닌그라드 전선에 투입되어 소련군과 싸웠다.[1] 이들은 이후에도 나치 독일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하며,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자 히틀러에게 지지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1]
결론적으로, 나치 독일에 협력한 네덜란드인들과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사례는 외부 침략이라는 엄중한 상황 속에서 일부 세력이 어떻게 자국과 민족을 등지고 침략자에 동조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부역 행위는 자국 네덜란드가 아닌 침략국 독일의 전쟁 수행에 기여함으로써 민족 정체성을 심각하게 훼손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이후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우는 과정에서도 큰 장애물이 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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