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돈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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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돈은 고려 시대 인물로, 쌍성총관부 출신 조휘의 손자이다. 그는 충숙왕을 섬기며 백성들을 추쇄하는 공을 세웠고, 공민왕 5년(1356) 고려가 쌍성총관부를 수복할 때 조카 조소생을 배신하고 고려에 귀순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후 홍건적 격퇴에 기여하고 공부상서 등을 역임했으며, 말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용성군에 봉해졌다.
조돈의 증조부는 한양 조씨 시조 조지수이다. 조부는 초대 쌍성총관 조휘이며, 아버지는 제2대 쌍성총관 조양기이다. 어머니는 박씨이다. 형은 제3대 쌍성총관 조림이며, 조카로 조소생, 조도치가 있었다. 처는 군부인 간성 이씨로 평리 이홍복의 딸이며, 슬하에 조인벽, 조인경, 조인규, 조인옥 등 네 아들을 두었다. 동생은 조천주이다.[1]
2. 가계
2. 1. 가계도
조휘의 손자인 조돈은 고종 1258년 조휘가 쌍성총관부를 원에 바친 이후, 대대로 용진(龍津)에서 살았다. 그는 젊은 나이에 충숙왕을 섬기며 여진 경내로 도망친 고려 백성들을 추쇄해 온 공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3. 생애
공민왕 5년(1356년), 고려가 쌍성총관부 수복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을 때, 조돈은 조카 조소생에게 구금되었다. 그러나 탈출하여 고려군에 합류, 조소생의 참모였던 조도치를 설득하여 고려군에 협력하게 하였다. 조돈과 그의 동생 조천주는 앞장서서 삼기강을 건넜고, 추격하는 기병 100여 명을 따돌렸다.
조돈은 아들 넷을 데리고 유인우의 진영으로 가서 조소생과 천호 탁도경이 곧 달아날 것이며, 아들 조인벽을 보내 쌍성 사람들을 회유할 것을 제안하였다. 유인우는 이를 받아들였고, 조인벽은 쌍성 사람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자춘도 고려군에 내응하여 쌍성총관부 공격에 참여, 고려군은 쌍성총관부를 함락시켰고, 조소생과 탁도경은 도망쳤다.
조돈은 개경으로 돌아와 예빈경, 태복경 등의 벼슬을 받았다. 그러나 유인우 등이 북방 주민들에게 재물을 탐하고 살육을 자행하여 민심을 잃었고, 조소생과 탁도경은 고려에 항복하려다 조도치가 살해된 것을 보고 옥새가 찍힌 문서를 요구하며 항복을 거부했다. 조돈은 공민왕의 옥새 문서를 가지고 이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조소생 등은 다시 배반하여 조돈은 배를 타고 돌아왔다.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조돈은 지병마사로서 안우 휘하에서 홍건적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후 판사농시사, 공부상서 등을 역임하고, 복주로 피난 가는 왕을 호종하였다. 해주목사로 나갔다가 어머니 상을 당했고, 기복하여 예의판서, 검교밀직부사를 지냈다. 홍건적 격퇴 공로로 1등에 녹선되었다.
1372년 관직에서 물러나 우봉현에서 살았고, 1375년 용성군에 봉해졌다. 1379년 고향 용진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아들 조인옥이 따라가려는 것을 만류하며 왕실에 힘쓸 것을 당부했다. 이듬해(1380년) 고향 용진에서 73세로 사망하였다.[1]
3. 1. 초기 생애와 고려 귀순
조휘(趙暉)의 손자이며, 고종 때 쌍성총관부 설치의 원인이 된 인물이다. 대대로 용진(龍津)에서 살았고, 젊은 시절 충숙왕을 섬겨 여진 경내로 도망친 백성들을 추쇄해 온 공으로 벼슬을 얻었다. 공민왕 5년(1356년) 고려가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당시, 조카 조소생(趙小生)에게 구금되었으나, 고려군의 밀서를 받고 탈출하여 고려군에 협조하였다.[1]
조돈은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쌍성 사람 조도치(趙都赤)에게 "그대는 본래 고려 사람이고 그대의 선조는 우리 선조와 함께 모두 한양에서 왔는데, 지금 본국을 배반하고 역적을 따르다니, 도대체 무슨 마음인가?"라며 설득했고, 조도치는 "숙부가 저를 살렸습니다. 공께서 먼저 하시면 제가 따를 것입니다."라고 화답하였다.[1] 이에 조돈은 동생 조천주(趙天柱)와 함께 앞장서서 고려군에 합류하였고, 그의 아들 조인벽은 쌍성 사람들을 회유하여 고려군에 항복하도록 이끌었다.[1]
3. 2. 쌍성 수복과 배신
1258년 조휘가 쌍성(雙城) 등지에서 군사를 일으켜 원(元)에 투항하면서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고, 화주(和州) 이북 지역은 원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1]
공민왕 5년(1356년) 고려가 원의 지배하에 있던 북방 영토를 수복하고자 유인우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아 출정하게 하였는데, 당시 쌍성총관은 조돈의 조카인 조소생이었다.[1] 조소생은 천호(千戶) 탁도경과 함께 수비할 계책을 세우면서, 숙부인 조돈을 불러 "숙부가 고려에서 벼슬하면서 여러 왕들로부터 총애를 받았는데, 오늘 숙부께서 남쪽 고려로 향하시면 쌍성 땅 12개 성 중에 누가 우리를 따르겠습니까?"라며 구금하였다.[1]
이때 이인임은 유인우에게 조돈을 설득하면 쌍성을 평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고, 유인우는 밀랍으로 글을 써서 조돈에게 보냈다.[1] 조돈은 조소생의 참모로 있던 백호(百戶) 조도치(趙都赤)에게 "두 녀석(조소생, 탁도경)이 조정(고려)의 명령을 거역한 것은 그대를 복심(腹心)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역리(逆理)를 버리고 순리(順理)를 따르며 위험을 버리고 편안함을 취하면 공명과 부귀를 얻을 것이로다."라며 설득했고, 조도적은 "숙부가 저를 살렸습니다. 공(公)께서 먼저 하시면 제가 따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1] 이에 조돈은 동생 조천주와 함께 앞장서서 삼기강(三岐江)을 건너 탈출하였다.[1]
조돈은 유인우에게 조소생과 탁도경은 곧 힘이 다해서 북쪽으로 달아날 것이며, 자신의 아들 조인벽을 보내어 쌍성 사람들을 회유할 것을 진언하였다.[1] 유인우도 이에 동의하여 조인벽을 보내었고, 쌍성 사람들은 "조 별장(別將)이 왔으니 우리들은 다시 살았다."라고 하며 고려군에 항복하였다.[1] 고려군은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파괴하고, 동북면은 99년만에 고려의 영토로 회복되었다. 조소생과 탁도경은 도망가서 이판령(伊板嶺) 북쪽 입석(立石) 땅으로 들어갔다.[2]
그러나 단주(端州) 이북 주민들이 항복하는 과정에서 유인우가 재물을 탐내어 살육을 자행하고, 조도치가 공민왕으로부터 호군(護軍)에 동북면천호(東北面千戶)로 임명된 것을 시기하여 죽였다.[1] 한편 조소생과 탁도경은 쌍성이 고려에 점령된 뒤에 여진 땅에 숨었다가 형세가 궁해져 항복하고자 했지만, 조도치가 죽는 것을 보고 고려 국왕의 옥새(玉璽)로 자신들의 목숨을 보장한다는 문서를 받기 전에는 항복하지 않겠다고 했다.[1] 이에 고려 조정은 1359년 조돈에게 새서를 주어 효유하였다. 조돈이 해양(海陽)에 이르러 공민왕의 옥새가 찍혀 있는 문서를 내려주었고, 조소생 등은 조돈을 따라 입조하려고 했다가 다시 다른 마음을 품고 갑옷을 입고 기다렸으며, 조돈도 곧 배를 타고 돌아왔다.[1]
3. 3. 홍건적 격퇴와 말년
공민왕 5년(1356년), 고려가 쌍성총관부 수복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을 때, 조돈은 조카 조소생에게 구금되었다가 탈출하여 고려군에 합류하였다.[1] 조소생은 천호 탁도경과 함께 쌍성총관부를 지키려 했으나, 조돈은 조소생의 참모였던 조도치를 설득하여 고려군에 협력하게 하였다.[1] 조돈과 그의 동생 조천주는 앞장서서 삼기강을 건넜고, 추격하는 기병 100여 명을 따돌렸다.[1]
조돈은 아들 넷을 데리고 유인우의 진영으로 가서 조소생과 탁도경이 곧 달아날 것이며, 아들 조인벽을 보내 쌍성 사람들을 회유할 것을 제안하였다. 유인우는 이를 받아들였고, 조인벽은 쌍성 사람들의 항복을 받아냈다.[1] 이자춘도 고려군에 내응하여 쌍성총관부 공격에 참여하였다. 고려군은 쌍성총관부를 함락시켰고, 조소생과 탁도경은 도망쳤다.[2]
조돈은 개경으로 돌아와 예빈경, 태복경 등의 벼슬을 받았다.[1] 그러나 유인우 등이 북방 주민들에게 재물을 탐하고 살육을 자행하여 민심을 잃었고, 조소생과 탁도경은 고려에 항복하려다 조도치가 살해된 것을 보고 옥새가 찍힌 문서를 요구하며 항복을 거부했다.[1] 조돈은 공민왕의 옥새 문서를 가지고 이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조소생 등은 다시 배반하여 조돈은 배를 타고 돌아왔다.[1]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조돈은 지병마사로서 안우 휘하에서 홍건적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1] 이후 판사농시사, 공부상서 등을 역임하고, 복주로 피난 가는 왕을 호종하였다. 해주목사로 나갔다가 어머니 상을 당했고, 기복하여 예의판서, 검교밀직부사를 지냈다. 홍건적 격퇴 공로로 1등에 녹선되었다.[1]
1372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우봉현에서 살았고, 1375년에 용성군에 봉해졌다. 1379년에 고향 용진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아들 조인옥이 따라가려는 것을 만류하며 왕실에 힘쓸 것을 당부했다.[1] 1380년에 고향 용진에서 7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1]
참조
[1]
서적
고려사 권제111 열전제24 제신 조돈
[2]
서적
고려사절요 권26 공민왕 1 공민왕 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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