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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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인벽은 1330년에 태어나 고려 말에 활약한 무신이다. 그는 한양 조씨 가문 출신으로, 쌍성총관부 수복에 기여했으며,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막는 데 공을 세웠다.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대에 걸쳐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며, 동북면원수, 강릉도원수 등을 지냈다. 조선 개창 후 회군공신으로 추록되었고, 시호는 양렬이다. 가족 관계로는 조휘의 후손이며, 이자춘의 딸인 정화택주를 부인으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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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벽 | |
---|---|
기본 정보 | |
한글 이름 | 조인벽 |
한자 이름 | 趙仁壁 |
로마자 표기 | Jo Inbyeok |
호 | 양렬 (襄烈) |
시호 | 양렬 (襄烈) |
명예 칭호 (태조가 1392/3년에 하사) | 용원부원군 (龍源府院君) |
생애 | |
출생 | 1330년 |
사망 | 1393년 |
직업 | 고려의 무신 |
2. 생애
조인벽은 1330년(충숙왕 17년)에 태어났다.[2] 그의 가문은 본래 고려의 토착 사족이었으나, 증조부 조휘가 원나라에 투항하여 쌍성총관부의 총관직을 세습하게 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3][4]
공민왕 5년(1356년), 고려가 쌍성총관부 수복에 나섰을 때, 조인벽은 아버지 조돈과 함께 고려군에 귀순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유인우의 명으로 쌍성 지역 주민들을 회유하는 임무를 맡아 영토 수복에 기여했다.[13][14]
이후 조인벽은 무관으로서 경력을 쌓았다. 공민왕 10년(1361년) 홍건적의 침입과 공민왕 12년(1363년) 김용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15][5] 또한 1372년에는 북방의 여진족을 토벌하고,[16][6] 남쪽에서는 함흥 등지를 침략한 왜구를 격퇴하는 등[17][7] 여러 차례 외적의 침입을 막아냈다. 이러한 공로로 여러 관직을 거치며 동북면원수, 강릉도원수, 문하찬성사 등 고위직에 올랐다.[19][22][25]
우왕 말기, 위화도 회군 이후 정치적 격변기를 겪었다. 창왕 즉위 후 폐위된 우왕을 문안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29][8][30] 공양왕 원년(1389년)에는 판의덕부사(判懿德府事)에 임명되었으나,[31][9] 이듬해인 1390년 회군공신으로 책봉되기 전에 사망하였다.[32][10]
조선 건국 후인 태조 2년(1393년), 회군 2등 공신으로 추증되었으며,[33][11] 시호는 양렬(襄烈)이다.[34]
2. 1. 가계와 출신
조인벽은 1330년 아버지 조돈(趙暾)과 어머니 간성 이씨(杆城 李氏, 이홍복(李洪福)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래로 남동생 조인경(趙仁瓊), 조인규(趙仁珪), 조인옥(趙仁沃) 세 명이 있었다.[2]그의 선조는 본래 고려 사람으로, 용진현(龍津縣)에 대대로 살아온 토착 사족 가문이었다. 그러나 증조부인 조휘(趙暉)가 고종 45년인 1258년(무오년)에 정주(定州, 현재의 정평군) 사람 탁청(卓靑)과 함께 쌍성(雙城) 등지에서 반란을 일으켜 화주(和州, 현재의 금야군) 이북 지역을 원나라에 넘겨주었다. 이후 원나라는 이 지역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했고, 조휘는 초대 총관, 탁청은 천호(千戶)에 임명되어 그 후손들이 직책을 세습하게 되었다.[3][4]
공민왕 5년(1356년), 고려는 원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갔던 북방 영토를 되찾기 위해 유인우(柳仁雨)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아 쌍성총관부 공격에 나섰다. 이때 이자춘(李子春)과 그의 아들 이성계(李成桂)도 고려군에 합류했다. 당시 쌍성총관은 조휘의 증손이자 조인벽의 사촌 형인 조소생(趙小生)이었다. 조소생은 아버지 조돈이 고려에 투항할 것을 염려하여 천호(千戶) 탁도경(卓都卿)과 함께 조돈을 구금하였다.
그러나 조돈은 동생 조천주(趙天柱)와 함께 탈출하여 용진으로 돌아갔고, 아들 조인벽, 조인경, 조인규, 조인옥을 데리고 밤새 200리를 달려 유인우가 이끄는 고려군 진영에 도착했다. 조돈은 쌍성이 곧 함락될 것이라 알리며, 아들 조인벽을 보내 쌍성 지역 주민들을 설득하자고 제안했다. 유인우는 이를 받아들여 조인벽을 지통주사(知通州事) 장천핵(張天翮)과 함께 보내 쌍성 지역을 회유하도록 했다.[13] 이자춘의 병력까지 합세한 고려군은 마침내 쌍성을 함락시키고 북방 영토를 수복하였다.[14]
2. 2. 쌍성총관부 수복
공민왕 5년(1356년), 고려는 원의 지배하에 있던 북방 영토를 되찾기 위해 쌍성총관부 수복 작전을 개시했다. 밀직부사 유인우가 동북면병마사로 임명되어 대호군 공천보, 종부령 김원봉, 강릉도존무사 이인임 등과 함께 출정했다.당시 쌍성총관은 조소생으로, 그는 조인벽의 증조부이자 초대 총관이었던 조휘의 증손이며 조인벽과는 사촌 관계였다. 조소생은 고려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자신의 숙부이자 조인벽의 아버지인 조돈과 조돈의 동생 조천주를 구금했다.
유인우가 이끄는 고려군은 철령을 넘어 쌍성에서 200여 리 떨어진 등주에 도착했으나, 열흘간 머무르며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구금되어 있던 조돈은 동생 조천주와 함께 탈출하여 용진현으로 돌아갔다. 그는 아들인 조인벽, 인경(仁瓊), 인규(仁珪), 인옥(仁沃)을 데리고 밤새 200리를 달려 유인우의 진영에 도착했다. 조돈은 유인우에게 쌍성이 곧 함락될 것이라 알리며, 자신의 아들 조인벽을 보내 쌍성 주민들을 설득하도록 건의했다.
유인우는 조돈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인벽에게 지통주사 장천핵과 함께 쌍성 지역 주민들을 회유하는 임무를 맡겼다.[13] 이후 이자춘이 이끄는 군대까지 합류하면서 고려군은 마침내 쌍성을 함락시키고 북방 영토를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14] 이 과정에서 조인벽은 아버지 조돈과 함께 고려의 영토 회복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2. 3. 무공과 관직 생활
공민왕 10년(1361년) 홍건적이 고려를 침공했을 때 변안열 등과 함께 공을 세웠다.[15][5] 공민왕 12년(1363년)에는 김용의 난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공민왕 21년(1372년) 2월, 호발도와 장해마 등이 이성과 강계 등지를 공격하자 판사로서 출정하여 가주(家州)에서 적을 토벌했다.[16][6] 같은 해 6월에는 왜구가 함주와 북청주를 약탈하자 만호로서 출정하여 병사를 매복시켜 왜구를 물리치고 70여 명의 목을 베었다. 이 공으로 봉익대부에 임명되었다.[17][7]
우왕 원년(1375년) 5월, 목인길과 함께 충혜왕의 서자로 알려진 석기(釋器)를 왕명으로 체포했으며, 그 공으로 안장이 딸린 말을 하사받았다.[18] 같은 해 8월, 심왕 탈탈불화 등이 고려로 오려 하자, 이를 막기 위해 밀직부사로서 동북면원수가 되어 부원수 변안열과 함께 북방을 방비했다.[19]
우왕 3년(1377년) 6월, 왜선 45척이 신주, 옹진, 문화 등의 현(縣)을 침략하자 원수로서 나세, 심덕부 등과 함께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퇴각했다. 왜구는 계속해서 신주, 문화, 안악, 봉주를 침략했고, 나세 등은 고려 조정에 병력 증원을 요청하고 심덕부, 양백익, 박보로와 함께 적을 공격했으나 패했다.[20]
우왕 4년(1378년) 3월, 찬성사 목인길과 함께 군사를 지휘하여 화포를 쏘고 수전(水戰)을 연습했다.[21]
우왕 5년(1379년) 6월, 왜구가 계림으로부터 강릉도 방면으로 향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강릉도원수로 임명되어 방어에 나섰다. 박수경은 안동도원수 겸 부윤으로 임명되었다.[22] 우왕 6년(1380년) 4월에는 삼사좌사로서 강릉도상원수에 임명되었고,[23] 우왕 8년(1382년)에는 부원수 권현룡과 함께 왜구와 싸워 30여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24]
우왕 9년(1383년) 8월, 문하찬성사로서 동북면도체찰사가 되어 변방 방어 임무를 맡았다.[25] 우왕 11년(1385년) 4월에는 교주도를 약탈하는 왜구를 막기 위한 대책으로 4도도지휘사로 임명되었으며,[26] 같은 해 10월에 다시 교주도원수가 되었다.[27][28]
2. 4. 창왕, 공양왕 대의 활동과 죽음
우왕이 강화도로 쫓겨난 뒤 그의 아들 창왕이 즉위하였다. 1388년(창왕 즉위년) 7월, 도당(都堂)에서는 폐위된 우왕의 생일을 맞아 삼사좌사(三司左使)였던 조인벽과 동지밀직(同知密直) 구성로를 우왕이 있는 강화도로 보내 의복을 전달하게 하였다.[29][8] 같은 해 9월, 우왕이 강화도에서 여흥군(驪興郡)으로 옮겨지게 되었는데, 이때 조인벽은 찬성사(贊成事) 지용기, 동지밀직(同知密直) 우홍수, 밀직부사(密直副使) 유준 등과 함께 통진(通津)에서 육지로 나온 우왕을 맞이하고 접대하였다.[30][8]얼마 지나지 않아, 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닌 신돈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폐위되고 살해되었다.
공양왕 원년인 1389년 11월 16일, 조인벽은 판의덕부사(判懿德府事)에 임명되었다.[31][9] 그러나 이듬해인 1390년 4월 9일, 회군공신으로 책봉되어 포상을 받게 되었을 때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32][10]
2. 5. 사후
조선이 건국된 후인 태조 2년(1393년) 7월 22일, 회군공신을 책록할 때 고(故) 검교시중 변안열, 판삼사사 왕안덕, 지용기, 완산군 이원계, 문하평리 정지, 충주절제사 최공철 등과 함께 2등 공신으로 정해졌다.[33][11]시호는 양렬(襄烈)이다.[34]
3. 가족 관계
- '''증조부''' : 조휘(趙暉) - 초대 쌍성총관(雙城摠管)
- '''할아버지''' : 조양기(趙良琪, 1269년 ~ ?) - 제2대 쌍성총관
- '''백부''' : 조림 - 제3대 쌍성총관
- * '''종형제''' : 조소생 - 제4대 쌍성총관
- '''아버지''' : 조돈(趙暾, 1308년 ~ 1380년) - 검교밀직부사(檢校密直副使), 용성군(龍城君)
- '''어머니''' : 증(贈) 평리(評理) 이홍복(李洪福)의 딸[35]
- '''본인''' : '''조인벽'''
- * '''배우자''' : 미상 (일부 기록에는 하동 정씨(河東 鄭氏)로 언급되나 불확실)
- ** '''장남''' : 조온(趙溫, 1347년 ~ 1417년) -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양절공(良節公)
- * '''배우자''' : 정화택주(貞和宅主) -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의 장녀[36]
- ** '''차남''' : 조연(趙涓, 1374년 ~ 1429년) - 우의정(右議政),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 양경공(良敬公)
- ** '''3남''' : 조후(趙候, 1377년 ~ 1444년) -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안정공(安靖公)
- ** '''4남''' : 조사(趙師, ? ~ 1432년)[37] -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 ** '''5남''' : 조부(趙傅)[37] -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 ** '''장녀''' : 조씨(趙氏)
'''사위''' : 황길원(黃吉源)[35] - 선공감정(繕工監正)
- ** '''차녀''' : 조씨(趙氏)
'''사위''' : 임맹양(林孟陽, ? ~ 1388년)[37] - 호군(護軍), 임견미(林堅味)의 조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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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http://sillok.histor[...]
2021-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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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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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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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ryeosa』 Vol. 43 21st Years of King Gongmin (1372) 6th month 27th day; 『Goryeosa』jeolyo』 Vol. 29 21st Years of King Gongmin (1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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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권제111 열전 제24 제신 조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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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권제39 세가 제39 공민왕 5년(1356년) 7월 정해(9일);『고려사절요』 권26 공민왕 1 공민왕 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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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권113 열전 제26 제신 안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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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권114 열전 제27 제신 나세; 『고려사절요』 권제30 신우1 우왕 3년(137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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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권134 열전 제47 우왕 6년(138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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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권134 열전 제47 우왕 8년(1382년) 4월 ;『고려사절요』 권31 신우2 우왕 8년(138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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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권제135 열전 제48 우왕 9년 ;『고려사절요』 권32 신우3 우왕 9년(138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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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권제135 열전 제48 우왕 11년 4월; 『고려사절요』 권32 신우3 우왕 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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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고려사』 권제137 열전 제50 창왕 즉위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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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권제137 열전 제50 창왕 즉위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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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권제45 세가 제45 공양왕 원년(1389년) 11월 16일 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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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권제45 세가 제45 공양왕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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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 조선 태조 2년 7월 22일 을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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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세종 11년 10월 11일 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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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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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문서
1872년 공주(公主)로 추증
[37]
문서
이자춘 신도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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