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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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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참은 진나라 말기, 반진 전쟁과 초한 전쟁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유방을 따라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한나라가 건국된 후에는 건성후에 봉해졌다. 이후 한신 휘하에서 북방 전선에서 활약했으며, 제나라 상국을 거쳐 한나라 상국이 되었다. 상국 재임 시에는 소하의 법과 제도를 따르는 '소규조수'의 정치를 펼쳤다. 사후에는 의후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후손으로는 조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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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삼재도회에 묘사된 조참
삼재도회에 묘사된 조참
이름조참 / 조신
본명조참
로마자 표기Cao Shen / Cao Can
이칭조신
曹參
경백 (敬伯)
작위평양후 (平陽侯)
직업관료
종교중국 민간 신앙
생애
출생불명
출생지장쑤성페이 현
사망기원전 190년
관직
직위상국
재임 기간기원전 193년 – 기원전 190년
군주한 혜제
이전소하
가족
자녀조窋

2. 진나라 말기, 반진 전쟁

조참은 원래 진나라 패현(沛縣)의 옥연(獄掾)을 지냈으며, 주리(主吏) 소하와 함께 현에서 큰 관리였다.[9][10] 진 이세황제 2년(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나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패령도 이에 호응하려 했다. 조참은 소하와 함께 망명자들을 불러들이도록 조언했고, 패령이 이를 받아들여 망탕산에서 숨어 지내던 고조가 내려왔다. 도중에 패령이 후회하고 성문을 잠그고 소하와 조참을 죽이려 해, 소하와 함께 고조에게 달아났다. 고조가 패현 사람의 도움을 받아 패령을 죽이고 패성을 손에 넣었으나 패령의 직책을 사양했는데, 소하와 조참은 자신을 아끼고 일족을 보호하고자 고조를 설득해 결국 패령을 받아들이게 했다.[11] 고조가 거병하자 조참은 중연(中涓)으로서 고조를 따랐다.[10]

조참은 호릉(胡陵)과 방여(方與)를 치며 사수군감 평을 무찌르고 사수수를 쳤으며, 방여와 풍(豊)이 위나라로 배반하자 이를 쳐 칠대부의 작위를 받았다. 진나라 장수 장함의 진압군과 싸우고 원척(爰戚)과 항보(亢父)를 칠 때에는 가장 먼저 성에 올라가 오대부로 승진했다. 또 장함과 싸웠으며, 삼천수 이유(李由)를 쳐 죽였다. 고조가 초 회왕에게서 탕군의 장관직을 받자 집백(執帛)이 됐다. 이후 고조를 따라다니며 전장에서 활약해, 동군위를 쳤고, 왕리의 군대를 성양 남쪽에서 쳤고, 개봉에서는 조분을 무찌르고 개봉성에 몰아넣어 포위했고, 곡우(曲遇)에서는 양웅(楊熊)을 무찌르고 사마와 어사를 잡아 집규(執珪)로 승진했다. 또 고조가 진나라를 엿보는 사마앙을 견제해 황하의 나루를 끊었으며, 다시 돌아와 조분을 무찔렀고, 남양수 여의(呂齮)를 완(宛)에서 무찌르고 의를 사로잡아 남양을 평정했고, 무관·요관을 돌파해 마침내 진왕 자영의 항복을 받는 데까지 함께했다.[10]

장쑤성 페이현(沛縣) 출신인 조참은 젊은 시절 감옥 관리인으로 일했다. 유방(劉邦)은 죄수들을 리산(驪山)으로 이송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일부 죄수들이 탈출하여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망당산(芒砀山) (현재 허난성 용청(永城))에 피신하여 조참과 소하(蕭何)와 비밀리에 연락을 유지했다.

기원전 209년, 대택향의 난(大澤鄉起義)이 발발하자 페이현 현령 또한 진나라에 반기를 들 생각을 하였고, 소하와 조참의 조언에 따라 유방을 초청하여 지원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현령은 마음을 바꾸어 유방의 입성을 거부했다. 그는 소하와 조참이 유방을 위해 성문을 열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이들을 죽이려 했으나, 소하와 조참은 탈출하여 유방에게 합류했다. 시민들은 현령에게 반기를 들고 그를 죽였고, 유방과 그의 부하들은 도시에 입성할 수 있었다. 유방은 페이현에서 반군을 조직하였고, 조참은 그의 고문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

조참은 학국(薛國), 호령(胡靈), 방우(方羽)가 이끄는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유방에게서 높은 벼슬에 올랐다. 조참은 장한의 군대를 물리치고 장한을 푸양으로 몰아붙였다. 그는 영구(雍丘)에서 포위된 유방을 돕기 위해 돌아와 산천(三川)을 방어하는 진나라 장군 이유(李由)를 격파했다. 그때까지 조참은 총 두 개의 봉토와 122개의 현을 정복했다. 이후 진나라와의 전투에서 조참은 진나라 장군 왕리(王離)와 조번(趙賁)을 물리치고 함양(진나라 수도)으로 이어지는 오구(吳關)와 요구(姚關)를 점령했다.

유방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조참은 시종인 중연(中涓)으로서 그에게 종군하였다. 반진 연합의 일원이 된 유방을 따라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 장수 사마이를 碭현(숙현) 동쪽에서 격파하였고, 장함(章邯)과 싸워 동아현(東阿縣)복양(濮陽)정도(定陶)까지 진격하여 臨済(임제)를 점령하였다. 남하하여 雍丘(옹구)를 구원하고, 삼천군수 이유(李由)(이사(李斯)의 장남)를 토벌하는 등 여러 곳에서 전투를 치르며 활약하였다.

별동대 장수가 된 유방을 따라 서쪽으로 진군할 때, 진나라 장수 조번(趙賁)과 양웅(楊熊)을 공격하여 犨(추)를 공략하였다. 양성현(陽城縣) 동쪽에서 남양군(南陽郡) 군수(郡守) 여이(呂齮)를 격파하여 완성구(宛城区)인 완(宛)으로 패주시켰다. 남전의 동쪽에서 진나라 군대를 공격하고 야습을 가하여 대패시켰으며, 마침내 진나라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다.

3. 초한전쟁

진나라 패현(沛縣)의 옥연(獄掾)[9]을 지내고 있었으며, 주리(主吏) 소하와 함께 현에서 큰 관리였다.[10] 진 이세황제 2년(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나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패령도 이에 호응하려 했다. 조참은 소하와 함께 망명자들을 불러들이도록 조언했고 패령이 이를 받아들이니 망탕산에서 숨어 지내던 고조가 내려왔다. 도중에 패령이 후회하고 성문을 잠그고 소하와 조참을 죽이려 해, 소하와 함께 고조에게 달아났다. 고조가 패현 사람의 도움을 받아 패령을 죽이고 패성을 손에 넣었으나 패령의 직책을 사양했는데, 소하와 조참은 자신을 아끼고 일족을 보호하고자 고조를 설득해 결국 패령을 받아들이게 했다.[11] 고조가 거병하자 중연(中涓)으로서 고조를 따랐다.[10]

호릉(胡陵)과 방여(方與)를 치며 사수군감 평을 무찌르고 사수수를 쳤으며, 방여와 풍(豊)이 위나라로 배반하자 이를 쳐 칠대부의 작위를 받았다. 진나라 장수 장함의 진압군과 싸우고 원척(爰戚)과 항보(亢父)를 칠 때에는 가장 먼저 성에 올라가 오대부로 승진했다. 또 장함과 싸웠으며, 삼천수 이유(李由)를 쳐 죽였다. 고조가 초 회왕에게서 탕군의 장관직을 받자 집백(執帛)이 됐다. 이후에도 고조를 따라다니며 전장에서 활약해, 동군위를 쳤고, 왕리의 군대를 성양 남쪽에서 쳤고, 개봉에서는 조분을 무찌르고 개봉성에 몰아넣어 포위했고, 곡우(曲遇)에서는 양웅(楊熊)을 무찌르고 사마와 어사를 잡아 집규(執珪)로 승진했다. 또 고조가 진나라를 엿보는 사마앙을 견제해 황하의 나루를 끊었으며, 다시 돌아와 조분을 무찔렀고, 남양수 여의(呂齮)[12]를 완(宛)에서 무찌르고 의를 사로잡아 남양을 평정했고, 무관·요관을 돌파해 마침내 진왕 자영의 항복을 받는 데까지 함께했다.[10]

고조 원년(기원전 206년), 고조가 항우에게서 한왕으로 봉해지면서 건성후(建成侯)에 봉해졌다. 장군으로써 삼진 정벌에 종군해 특히 옹나라와의 싸움에서 활약해, 처음 옹왕 장함을 속이고 옛 길로 나오면서 하변(下辯)·고도(故道)·옹(雍)·태(斄)를 쳤고, 장함의 아우 장평을 호치(好畤) 남쪽에서 무찌르고 호치를 포위했다. 장평이 호치에서 달아나니 조분과 내사 보(保)를 무찌르고 함양을 함몰해 일신(日新)으로 이름을 고쳤다. 경릉(景陵)을 지키다 장평 등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격퇴했다. 이 공적으로 영진(寧秦)을 식읍으로 받았다. 그리고 폐구에 갇힌 장함을 포위했다.[10]

다시 중연이 돼 동쪽으로 나아가, 고조 2년(기원전 205년) 3월에 고조를 따라 임진을 건넜고, 용저와 항타를 정도에서 무찌르고 탕(碭)·소(蕭)에 서초의 서울 팽성(彭城)까지 함락했다. 4월, 팽성 대회전의 참패를 겪고 왕무(王武)·정처(程處)·주천후(柱天侯)가 모반하자 이들을 무찌르고, 고조가 항우의 진격을 저지하고 있는 형양으로 돌아왔다.[10][11]

같은 해 8월, 팽성 대회전 후 항우에게로 배반한 서위왕 위표 공격 계획이 세워지면서, 한신이 대장이 되고 자신은 관영과 함께 출진했다.[11] 위장 손속(孫遬)을 동장(東張)에서 무찌르고, 안읍을 공격해 장군 왕양(王襄)을 사로잡았고, 위표를 곡양(曲陽)에서 공격해 동원(東垣)까지 추격해 사로잡았다. 또 서위나라의 서울 평양(平陽)을 공격해 위표의 어머니와 처자를 사로잡고 서위나라를 평정해, 평양에 식읍을 받았다.[10]

한신의 조나라 공격에 종군해, 조나라의 속국인 대나라의 상국[13] 하열(夏說)의 군을 오현(鄔縣) 동쪽에서 무찌르고 하열을 죽였으며, 정형 전투에는 참전하지 않고 따로 명령을 받아 귀환하면서 조나라의 별장 척(戚) 장군을 오성(鄔城)에서 포위하고 달아나는 척장군을 죽였으며, 군사를 이끌고 당시 오창에 있는 고조를 뵈었다. 한신이 제나라 공격을 준비하자 우승상으로서 한신에게 배속돼, 역하(歷下)에서 제나라 군을 무찌르고 제나라 서울 임치까지 진입했으며, 제북군을 평정하고 그 속현인 저(著)·탑음(漯陰)·평원(平原)·역(鬲)·노(盧)를 쳤다. 초나라가 제나라의 청을 받아들여 장수 용저를 구원군으로 파견하자,[14] 상가밀(上假密)에서 용저의 군을 무찌르고 용저를 베고 아장 주란을 사로잡았다.[15] 또 제나라 왕 전광·수상 허장(許章)·장군 전기(田旣)를 사로잡았다.[10]

한신이 진(陳)으로 가 고조의 본대에 합류해 서초패왕 항우를 무찌를 때, 조참은 제나라에 남아서 아직 복종하지 않는 지역을 평정하고 있었다.[10]

고조 5년(기원전 202년), 항우가 패망하고 고조가 황제가 되자, 제나라를 폐지해 군으로 삼고 제나라 왕이던 한신은 초나라 왕으로 옮겼다. 이에 조참도 한나라로 돌아와서 재상의 인수를 반납했다. 고조 6년(기원전 201년), 제나라를 복국하고 제도혜왕을 봉하면서 조참은 제나라의 상국으로 부임했다. 또 이해에 공신들을 후작으로 봉하면서 평양에 1만 630호를 받아 새로 하동군의 평양 땅(지금의 린펀시 남서쪽에 있음)을 영토로 삼는 평양후가 됐고, 이전의 봉읍은 제했다.[10] 조참은 일흔 곳에 창상을 입었고, 그의 군공은 제장 중 제일이었기에 공신의 차례를 정할 적에 모두 조참을 제일로 하자고 했으나, 고조는 소하가 후방을 맡아 군자와 병력을 충실히 한 것을 으뜸으로 여겨 소하가 제일이 됐고,[17] 조참은 제2위에 올랐다.[16]

4. 한신의 북벌

고조 2년(기원전 205년) 8월, 팽성 대전 후 항우에게로 배반한 위표 공격 계획이 세워지면서, 한신이 대장이 되고 조참은 관영과 함께 출진했다.[11] 위장 손속(孫遬)을 동장(東張)에서 무찌르고, 안읍을 공격해 장군 왕양(王襄)을 사로잡았고, 위표를 곡양(曲陽)에서 공격해 동원(東垣)까지 추격해 사로잡았다. 또 서위나라의 서울 평양(平陽)을 공격해 위표의 어머니와 처자를 사로잡고 서위나라를 평정했다.[10]

조참은 한신의 조나라 공격에 종군해, 조나라의 속국인 대나라의 상국[13] 하열(夏說)의 군을 오현(鄔縣) 동쪽에서 무찌르고 하열을 죽였다. 정형 전투에는 참전하지 않고 따로 명령을 받아 귀환하면서 조나라의 별장 척(戚) 장군을 오성(鄔城)에서 포위하고 달아나는 척장군을 죽였다. 이후 군사를 이끌고 당시 오창에 있는 고조를 뵈었다. 한신이 제나라 공격을 준비하자 우승상으로서 한신에게 배속돼, 역하(歷下)에서 제나라 군을 무찌르고 제나라 서울 임치까지 진입했으며, 제북군을 평정하고 그 속현인 저(著)·탑음(漯陰)·평원(平原)·역(鬲)·노(盧)를 쳤다. 초나라가 제나라의 청을 받아들여 장수 용저를 구원군으로 파견하자,[14] 상가밀(上假密)에서 용저의 군을 무찌르고 용저를 베고 아장 주란을 사로잡았다.[15] 또 제나라 왕 전광·수상 허장(許章)·장군 전기(田旣)를 사로잡았다.[10]

한신이 진(陳)으로 가 고조의 본대에 합류해 서초패왕 항우를 무찌를 때, 조참은 제나라에 남아서 아직 복종하지 않는 지역을 평정하고 있었다.[10]

5. 제나라 상국

고조 5년(기원전 202년), 항우가 패망하고 고조가 황제가 되자, 제나라는 폐지되어 군으로 바뀌었고 한신은 초나라 왕으로 옮겨졌다. 조참은 한나라로 돌아와 재상의 인수를 반납했다. 고조 6년(기원전 201년), 제나라가 복국되고 제도혜왕이 봉해지면서 조참은 제나라의 상국으로 부임했다. 하동군의 평양 땅(지금의 린펀시 남서쪽)을 영토로 하는 평양후가 되었고, 이전의 봉읍은 제했다.[10]

조참은 진희의 난 진압에 참여해 진희의 장수 장춘(張春)을 무찔렀다. 영포의 난에서는 제도혜왕을 따라 12만 명을 지휘해 고조와 합류해서 영포를 무찌르고, 남쪽으로 기(蘄)까지 이르렀고, 돌아와서는 죽읍(竹邑)·상(相)·소(蕭)·유(留)를 평정했다.[10]

혜제 원년(기원전 194년), 제후국의 상국이 폐지되면서 제나라 승상이 됐다. 도혜왕이 어리고 중국이 통일된 지 얼마 안 됐으므로, 조참은 장로들과 선생들을 불러 나라를 안정시킬 방법을 물었다. 그러나 제나라 유생들은 서로 주장하는 바가 달랐다. 교서(膠西) 땅의 갑공(蓋公)이 황로의 법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 갑공을 모셨다. 갑공은 청정을 귀히 여기면 백성들이 스스로 안정될 수 있다고 했다. 조참은 갑공에게 관사를 마련하고 그의 조언에 따라 황로의 술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제나라 재상으로 9년 동안 제나라는 안정되었고, '어진 재상'[賢相]으로 평가받았다.[10]

한나라를 건국한 고조 유방(劉邦)은 서장자(庶長子) 유비(도혜왕)를 제나라의 제후왕으로 삼고, 조참을 제나라의 승상(丞相)으로 임명했다. 당시 제나라는 70여 개의 성을 거느린 대국이었다. 고조 6년(기원전 201년)에, 조참은 열후(列侯)의 작위를 받고 평양(平陽)의 1만 6300호를 영지로 받았다.

6. 한나라 상국, 소규조수

소하가 죽을 무렵, 혜제에게 후임 승상으로 천거되어 조참이 승상이 되었다.[10][17] 조참은 부임 후 소하가 만들어 놓은 것을 전혀 바꾸지 않고 그대로 따라갔다. 어눌하나 중후한 장자들을 불러 승상의 일을 맡겼고, 언변이 뛰어나거나 일을 열심히 하려는 사람은 모두 쫓아냈다. 아침저녁으로 술을 마시며 참견하러 오는 사람마다 술을 마시게 해 취하게 만들었다. 상국 관사 뒤에 있는 관리들이 매일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자, 조참을 후원으로 불러 함께 섞여 호응했다. 잘못한 사람을 봐도 덮어주어 상국부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10]

혜제는 조참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을 괴상하게 여겨 조참의 아들 조줄(曹窋)에게 물어보게 했으나, 조참은 조줄을 매질했다. 혜제가 조참을 꾸짖자, 조참은 고제와 소하가 이미 천하를 안정시키고 법을 정했으니 그들보다 못한 우리는 그들이 한 대로 따라가고 실수하지 않으면 된다고 말했다. 혜제는 조참의 말에 수긍했다.[10] 역사에서는 이를 '소하가 법을 만들고 조참이 이를 따른다'는 “소규조수”(簫規曹隨)라 한다.[4]

조참은 상국으로 재임한 지 3년 만에 죽었다.[10] 시호는 '''의'''(懿)로 정해졌다.[16]

조참 묘

7. 평가

사마천사기에서 유방의 신하들 중 전투 공헌도는 한신 다음으로 조참이 뛰어났다고 평가했다. 사마천은 조참이 소하의 통치 체계를 잘 유지하고 백성이 원하는 평화와 안정을 이룩했다고 언급했다.[1]

조참은 기원전 190년에 사망하여 의후(懿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백성들은 “소하는 법도를 만들어 명백하고 잘 정비했다. 조참이 그를 대신하여 준수하고 변경하지 않았다. 그 청렴한 정치에 백성들은 평안하고 하나가 되었다”라고 노래하였다.[1] 이후 한 왕조에서도 소하와 조참 정도의 공적을 가진 재상이 드물었기에, 이들의 자리는 영구 결번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이를 통해 후세에서도 조참에 대한 평가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1]

사마천은 “군사적 공훈은 한신 덕분이다. 진(秦)의 잔혹한 정치 이후 백성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자연에 맡겼기에 천하의 사람들은 모두 그의 덕을 칭송하였다”라고 평가하였다.[1]

8. 후손

조참 사후 아들 조줄이 평양후를 계승했고, 여태후 시절에는 어사대부를 맡았으나, 여태후 사후에는 면직돼 후작만을 누렸다.[10] 조줄의 아들 조기는 오초칠국의 난난포와 함께 교서, 치천, 교동군을 격파하였다.[18][16] 조기의 아들 조시는 무제의 누이 평양공주와 혼인하여 아들 조양을 낳았으나, 전염병에 감염되어 봉국으로 돌아갔다. 조양은 평양후를 계승하고 무제의 딸 위장공주와 혼인하였다. 조양의 아들 조종은 평양후를 계승하였으나 여태자의 반란에 연좌되어 작위를 잃었고,[10] 완형·성단의 형벌을 받았다.[20][19]

선제는 조참의 공적을 기려 그의 7세손 조희에게 가문을 일으키고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애제는 조참의 9세손 조본시에게 1천 호를 봉했고 나중에 1천 호를 더해주어 2천 호가 됐다. 조본시는 신나라 시절에 죽었다. 조본시의 아들 조굉광무제에게 항복하여 평양후에 봉해졌다. 조굉의 아들 조광이 평양후를 계승했고, 평양후는 《한서》가 집필될 때까지 후한에서 계속 세습됐다.[20][19]

후한 말의 조조 가문은 조참을 선조로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조의 조부 조등환관이었는데, 조등은 가문의 존속을 위해 조참의 동료였던 하후영의 자손 조숭을 양자로 입양하여 조씨 성을 계승시켰다. 따라서 조조는 혈통적으로는 조참의 자손이 아니고, 하후영의 자손이다. 삼국지의 군웅 조조는 자신이 조참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으나, 유전자 증거를 통해 이는 반박되었다.[5]

참조

[1] 문서
[2] 서적 Autocratic Tradition and Chinese Politics https://books.google[...]
[3] 서적 https://books.google[...]
[4] 서적 Social Power and Legal Culture: Litigation Masters in Late Imperial China https://books.google[...]
[5] 학술지 Present Y chromosomes reveal the ancestry of Emperor CAO Cao of 1800 years ago (DOI 링크 추출 불가능) 2011-12-22
[6] 서적 史記集解
[7] 서적 사기
[8] 서적 박물지
[9] 문서
[10] 서적 사기 {{위키문헌언어-줄|zh|史記/卷05[...]
[11] 서적 한서 {{위키문헌언어-줄|zh|漢書/卷00[...]
[12] 서적 한기
[13] 서적 사기 {{위키문헌언어-줄|zh|史記/卷08[...]
[14] 서적 사기 {{위키문헌언어-줄|zh|史記/卷09[...]
[15] 문서
[16] 서적 사기 {{위키문헌언어-줄|zh|史記/卷01[...]
[17] 서적 사기 {{위키문헌언어-줄|zh|史記/卷05[...]
[18] 서적 사기 {{위키문헌언어-줄|zh|史記/卷05[...]
[19] 서적 사기
[20] 서적 한서
[21] 문서
[22] 문서
[23] 문서
[24] 문서
[25] 문서
[26] 문서
[27]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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