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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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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는 1548년부터 1572년까지 폴란드의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이었다. 그는 귀족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바르바라 라지비우와 결혼했으나, 바르바라의 사망 후 정치적 이유로 카타리나 폰 오스트라이히와 결혼했으나 실패했다. 야기에우워 왕조의 마지막 남성 상속자였던 그는 종교 개혁과 슐라흐타의 권력 강화, 리보니아 전쟁, 오스만 제국의 위협 등 국내외 위기 속에서 루블린 연합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수립했다. 그는 르네상스 문화를 후원하고 예술가들을 지원했으며, 1572년 사망으로 야기에우워 왕조는 단절되었고, 폴란드는 선출 군주제를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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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루카스 크라나흐 더 영거의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초상화, 1553년
루카스 크라나흐 더 영거의 초상화, 1553년
이름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폴란드어 이름Zygmunt II August
리투아니아어 이름Žygimantas Augustas
통치
작위폴란드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
공동 통치 시작1529년 1548년 4월 1일 (공동 통치자)
단독 통치 시작1548년 4월 1일 1572년 7월 7일 (단독 국왕)
대관식1530년 2월 20일
이전 통치자지그문트 1세
계승자앙리 드 발루아 (1573년 공위 시대)
가족
왕가야기에우워 왕가
왕조야기에우워
아버지지그문트 1세
어머니보나 스포르차
배우자엘리자베트 폰 외스터라이히 (1543년 결혼, 1545년 사망)
바르바라 라지비우워 (1547년 결혼, 1551년 사망)
카타리나 폰 외스터라이히 (1553년 결혼, 1572년 사망)
자녀바르바라 보로니에츠카 (사생아)
종교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출생과 사망
출생일1520년 8월 1일
출생지크라쿠프, 폴란드 왕국
사망일1572년 7월 7일
사망지크니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매장일1574년 2월 10일
매장지바벨 대성당, 크라쿠프, 폴란드
기타
서명

2. 생애

지그문트 아우구스투스는 1520년 8월 1일 크라쿠프에서 지그문트 1세보나 스포르차 사이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 쪽 조부모는 카지미르 4세와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스, 어머니 쪽 조부모는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와 아라곤의 이사벨라였다. 이사벨라는 나폴리 알폰소 2세의 딸이었다.

어린 시절 보나의 보살핌을 받았고, 왕위 계승을 위해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1529년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취임했고,[1] 1530년 폴란드 추기경 얀 라스키에 의해 아버지와 공동 통치자로 즉위했다.[1] 야기에우워 왕조의 지위 유지를 위한 아버지의 노력이었다.[1]

지그문트 2세는 세 번 결혼했으나 후사를 얻지 못했다. 첫 번째 부인 엘리자베스 폰 합스부르크는 1545년 간질로 사망했다.[3]

엘리자베스 여왕, 루카스 크라나흐 더 영거의 작품




두 번째 부인 바르바라 라지비우와의 결혼은 귀족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세 번째 부인 카타리나 폰 합스부르크와의 결혼은 정치적 동맹을 위한 것이었으나 원만하지 못했다.[12]

루카스 크라나흐(젊은이)가 그린 오스트리아의 카트린 초상화


세 부인 모두에게서 아이를 갖지 못해, 야기에우워 왕가의 마지막 남성 직계로서 왕조는 멸망 위기에 놓였다.[13]

즉위 초 슐라흐타(귀족)와 갈등을 겪었다. 귀족들은 리투아니아 귀족이자 전 애인이었던 바르바라 라지비우와의 결혼에 반감을 가졌는데, 이 결혼은 1548년 2월 2일 피오트르쿠프 트르부날스키에서 국왕 자신이 발표했다.

루카스 크라나흐 더 영거의 바르바라 라지비우 초상화, 약 1553년


바르바라는 보나 스포르차에게 멸시받았고, 첫 번째 세임 (의회)에서 의원들은 바르바라를 거부하지 않으면 충성을 포기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1550년 두 번째 세임을 소집했을 때 귀족들은 호의를 보이기 시작했다.

1550년대 지그문트 아우구스트의 갑옷 초상화


바르바라는 왕실에서 미움을 받았지만, 지그문트와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녀는 야심차고 지적이었으며 패션 감각이 뛰어났다.[6] 둘 사이의 상호 존경은 이 관계를 "폴란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랑 이야기 중 하나"로 만들었다.[7][8] 바르바라는 1551년 5월 8일 사망했고, 빌뉴스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 대공녀 카타르지나와 세 번째 결혼을 맺었다. 카타르지나는 간첩 행위를 했고, 지그문트는 그녀를 라돔으로 보내 정치에서 배제했다.[12]

국왕의 결혼은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 모두에게 중요한 정치적 문제였다. 그는 1572년 2월 28일 카타르지나가 사망하기 전까지 재혼할 수 없었지만,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그녀를 따라 죽음을 맞이했다.

휘렘 술탄(쉴레이만 대제)의 부인인 록셀라나가 지그문트 2세에게 왕위 즉위를 축하하는 편지, 1549년


그의 치세 동안 가장 큰 사건은 1569년 루블린 연합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성립되었다.

2. 1. 초기 생애

지그문트 아우구스투스는 1520년 8월 1일 크라쿠프에서 지그문트 1세와 그의 아내 보나 스포르차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 쪽 조부모는 카지미르 4세와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스였다. 지그문트의 어머니 쪽 조부모는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와 아라곤의 이사벨라였으며, 이사벨라는 나폴리의 알폰소 2세의 딸이었다.

지그문트 아우구스투스는 어린 시절 내내 어머니 보나의 세심한 보살핌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 통치 기간 동안 폴란드 왕위의 유일한 적자 상속자였기에 그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529년 지그문트 아우구스투스는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취임했으며, 그 의식은 빌뉴스 대공 궁전에서 열렸다.[1] 1530년, 열 살의 지그문트 아우구스투스는 폴란드 추기경 얀 라스키에 의해 아버지와 함께 공동 통치자로 즉위했는데, 이는 ''비벤테 레게'' 법에 따른 것이었다.[1] 지그문트 1세는 아들의 왕위 계승을 보장하고 야기에우워 왕조의 폴란드 내 지위를 유지하고자 했다.[1]

2. 2. 결혼 생활

지그문트 2세는 세 번 결혼했으나, 모두 후사를 얻지 못했다. 첫 번째 부인 엘리자베스 폰 합스부르크는 1545년 간질로 사망했다.[3] 지그문트 2세는 엘리자베스가 매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했고, 바르바라 라지비우를 비롯한 여러 정부들과 간통을 지속했다.[3]

두 번째 부인 바르바라 라지비우와의 결혼은 귀족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귀족들은 지그문트 2세가 즉위 직전 칼뱅파를 신봉하는 리투아니아 귀족 예지 라지비우의 딸 바르바라와 은밀히 혼인한 것에 대해 맹렬히 반발했다.[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바라는 1550년 폴란드 여왕으로 즉위했으나, 1551년 사망했다.[14]

세 번째 부인 카타리나 폰 합스부르크와의 결혼은 정치적 동맹을 위한 것이었으나, 원만하지 못했다.[12] 카타리나는 폴란드 궁정에서 오스트리아의 꼭두각시 역할을 하며 간첩 행위를 했고, 지그문트 2세는 카타리나의 음모를 알아차리고 그녀를 라돔으로 보내 정치 생활에서 배제했다.[12]

지그문트는 세 번째 부인에게서 아이를 가질 희망을 모두 잃었고, 야기에우워 왕가의 마지막 남성 직계였기 때문에 왕조는 멸망 위기에 놓였다.[13]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르바라 기자와 안나 자옌치코프스카와 간통했지만, 후사를 얻지 못했다.[13]

2. 3. 통치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는 즉위 초부터 슐라흐타(귀족)와 갈등을 겪었다. 귀족들은 지그문트 2세가 왕위에 오르기 전 비밀리에 바르바라 라지비우와 맺은 두 번째 결혼에 반감을 가졌다. 바르바라 라지비우는 리투아니아 귀족이자 전 애인이었으며, 헤트만 예지 라지비우의 딸이었다. 이 결혼은 1548년 2월 2일 피오트르쿠프 트르부날스키에서 국왕 자신이 발표했다.

젊고 아름다운 바르바라는 보나 스포르차 여왕에게 멸시받았고, 보나 스포르차는 결혼을 무효화하려 했다. 1548년 10월 31일에 열린 지그문트의 첫 번째 세임 (의회)에서 의원들은 새 국왕이 바르바라를 거부하지 않으면 충성을 포기하겠다고 위협했다. 귀족들은 바르바라를 국왕을 매혹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기회주의적인 인물로 묘사했고, 보나 스포르차 또한 이러한 인식을 공유했다. 젊은 군주는 심지어 퇴위를 고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1550년, 지그문트가 두 번째 세임을 소집했을 때, 귀족들은 그에게 호의를 보이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피오트르 크미타 소비에스키 원수에게 질책받았는데, 그는 귀족들이 폴란드 왕관의 입법 특권을 부당하게 축소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보나 스포르차는 바벨에서 쫓겨나 마조비아로 보내졌다.[5]

전임자와 달리 바르바라는 왕실에서 미움을 받았지만, 지그문트 아우구스트와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녀는 야심만만하고 지적이었으며 패션 감각이 뛰어났다.[6] 지그문트와 바르바라 사이의 상호 존경은 이 관계를 "폴란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랑 이야기 중 하나"로 만들었다.[7][8]

바르바라는 폴란드에서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영구적으로 거주하고 싶다는 뜻을 자주 표명했다. 상황을 완화하기 위해 지그문트 아우구스트는 1549년 2월 13일 바르바라가 크라쿠프에 도착한 이후 바벨 성에서 그녀에게 호화로운 생활 방식과 값비싼 선물을 제공했다. 또한 국왕은 바르바라에게 여러 지역을 관리하고 수입을 제공하도록 허락했다. 그녀는 정치 생활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지그문트가 내리는 결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무력 반란을 피하기 위해 지그문트는 페르디난트 1세와 동맹을 맺었고, 이를 통해 바르바라는 1550년 12월 7일 폴란드 여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10]

바르바라는 즉위 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지그문트 아우구스트는 아픈 아내를 직접 간호하며 헌신했지만, 바르바라는 1551년 5월 8일 크라쿠프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유언에 따라 시신은 빌뉴스 대성당으로 운구되어 안장되었다.

바르바라 라지비우 여왕이 사망한 후, 지그문트 2세는 오스트리아의 대공녀 카타르지나와 세 번째 결혼을 맺었다. 그녀는 지그문트 2세의 첫 번째 부인 엘리자베스의 여동생이었다. 카타르지나는 둔하고 비만하다고 여겨졌으며, 지그문트 2세는 그녀가 매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카타르지나는 폴란드 궁정에서 오스트리아의 꼭두각시 역할을 하며 간첩 행위를 했다. 지그문트 2세는 이를 알아차리고 그녀를 라돔으로 보내 정치 생활에서 배제했다.[12]

지그문트는 세 번째 부인에게서 아이를 가질 희망을 잃었고, 왕조는 멸망 위기에 놓였다. 그는 바르바라 기자와 안나 자옌치코프스카와 간통했고, 바르바라는 딸을 낳았다.[13]

국왕의 결혼은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 모두에게 중요한 정치적 문제였다. 폴란드의 개신교도들은 그가 이혼하고 재혼하여 로마와의 관계가 끊어지기를 바랐다. 그는 1572년 2월 28일 카타르지나가 사망하기 전까지 재혼할 수 없었지만,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그녀를 따라 죽음을 맞이했다.

지그문트의 통치는 일시적인 안정과 대외적 확장의 시기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종교 개혁이 도입되는 것을 목격했고, 폴란드 귀족에게 정치 권력을 넘겨준 '귀족 정치'의 격변을 보았다. 그는 검의 형제 기사단이 붕괴되어 리보니아가 루터교 공국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에 합병되고, 오스만 제국의 권력이 공고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지그문트 1세 구왕보다 효과적인 정치가였다.

지그문트 2세는 세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한 인물이었다. 오스트리아 대사와 교황 특사는 국왕이 국가를 다스리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 "모든 것이 국왕의 뜻대로 움직였고, 국왕은 성공을 거두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의 치세 동안 가장 큰 사건은 1569년의 루블린 연합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라는 두 국가가 통합된 정치체가 성립된 것이다. 이 연합 국가는 발트 해 지역에서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1572년 7월, 지그문트 2세는 크니신의 성관에서 사망했고, 야기에우워 왕조는 단절되었다. 1573년의 국왕 자유 선거를 통해 프랑스 왕샤를 9세의 동생 앙리 드 발루아(훗날의 프랑스 왕 앙리 3세)가 새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2. 3. 1. 리보니아 문제

1562년 시기즈문트의 메달 앞면, 미국 국립 미술관 (워싱턴 D.C.)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통치 기간 동안 리보니아는 정치적 혼란에 휩싸였다.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 공작개신교 종교 개혁을 도입하고 튜튼 기사단 국가의 남쪽 부분을 세속화하여 1525년 프로이센 공국을 건국하였으나, 크라쿠프 조약에 따라 폴란드 종주권을 받았다. 그러나 알브레히트가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에 개신교를 도입하려 하자, 리보니아 연합이 분열되었다. 빌헬름과 메클렌부르크의 크리스토퍼 공작이 체포되자, 폴란드 왕관의 조공 국가였던 프로이센을 돕기 위해 가톨릭 신자인 지그문트 2세는 개신교 세력을 옹호해야 했다.[1]

1557년 9월 14일 포즈볼 조약으로 대부분의 리보니아 영토는 폴란드의 보호를 받게 되었고, 사실상 폴란드의 일부가 되었다. 기사단의 마지막 단장인 고트하르트 케틀러는 새로 설립된 쿠를란트 및 세미갈리아 공국을 받았다. 빌헬름은 전직 대주교 지위를 회복했고, 루터교 교회령이 시행되었다.[1]

쿠를란트가 폴란드 영향권에 편입되면서, 러시아 차르국이 발트해 연안으로 확장하려는 계획을 위협하는 동맹이 형성되었다. 지그문트 2세는 리보니아의 무역로를 보호하기 위해 이 동맹을 이반 뇌제에 대항하게 했고, 이는 러시아 차르국에 대한 새로운 전쟁 명분이 되었다. 1558년 1월 22일 이반 4세는 발트 국가를 침공하여 1583년까지 25년간 지속된 리보니아 전쟁을 시작했다. 러시아가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리보니아는 법적으로 폴란드 (라트비아, 남부 에스토니아)와 스웨덴 (중부-북부 에스토니아) 사이에서 분할되었다. 폴란드 지역은 이후 폴란드령 리보니아 또는 ''인플란티''로 알려졌으며, 폴란드 본토에서 온 식민지인들이 정착하면서 이 땅은 체계적인 폴란드화가 이루어졌다.[1]

2. 3. 2. 북방 7년 전쟁

스웨덴이 덴마크에 불만을 품으면서 1523년 스웨덴과 덴마크 간의 칼마르 연합이 해체되었고, 이는 발트해 무역을 위협했다. 폴란드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인 그단스크(단치히)는 바다에서의 분쟁과 해적 행위로 어려움을 겪었다. 수도 크라쿠프 역시 발트해에서 그단스크를 거쳐 비스와 강을 따라 남부 지방인 소폴란드로 이어지는 무역로가 영향을 받으면서 피해를 입었다.

그단스크는 자체 군대와 정부를 갖춘 특권을 누리고 있었는데, 지그문트 2세의 사략선 파견 명령과 자치시에 최초의 폴란드 해군성 창설에 저항했다. 시의회 의원 대부분은 독일계 상인과 상공인이었고, 개신교 신자로서 스웨덴으로 기울거나 독립적인 '도시 국가' 지위를 위해 싸웠다. 지그문트 2세가 보낸 11명의 폴란드 사략선이 결국 처형되자, 폴란드는 발트해 지배를 위해 덴마크 편에 섰다.

이 전쟁은 1570년 슈체친 조약으로 종결되었으며, 마르친 크로메르 주교가 지그문트 2세를 대신하여 서명했다. 이 분쟁의 결과, 1568년 폴란드의 첫 번째 등록된 해군 함대인 해군 위원회가 설립되었다.[1]

2. 3. 3. 루블린 연합

지그문트 2세의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은 루블린 연합을 통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라는 하나의 국가로 통합한 것이다. 이 연합은 군주의 개인적인 정치적 접근 방식과 중재 능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18]

처음에 이 조약은 리투아니아의 주권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리투아니아 마그나트들은 제안된 연합이 부유한 폴란드 귀족이 아닌 하급 귀족과 동등한 수준으로 지위를 낮출 것이기 때문에 권력을 잃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이 통일은 동쪽으로부터의 러시아(모스크바)의 공격에 대항하는 강력한 동맹을 제공할 수 있었다. 리투아니아는 150년 이상 지속된 모스크바-리투아니아 전쟁으로 황폐화되었다. 2차 전쟁 동안 리투아니아는 영토를 러시아에 잃었고, 리보니아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러시아 차르국에 합병될 수도 있었다. 폴란드인은 대가 없이는 리투아니아를 돕기를 꺼렸다. 이 연합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는 지그문트의 매형인 미코와이 "레드" 라지비우(Radvila Rudasislt)였는데, 그는 이 협정을 폴란드의 "평화로운 합병"으로 간주했다. 그는 또한 민족 리투아니아인들이 이름을 변경하고 모국어를 폴란드어 또는 라틴어로 변경하도록 강요하는 폴란드화 정책에 저항했다.

러시아와의 또 다른 전쟁이 임박하자 지그문트 2세는 의회(세임) 의원들에게 연합을 압박했고, 점차 더 많은 지지자를 얻었다. 잠재적인 연합 협정은 다민족 리투아니아에서 폴란드로 영토가 이전되는 것에 반대하는 리투아니아 지주들의 추방으로 이어질 것이다. 지그문트는 이 문제에 대해 단호하고 무자비했다. 1385년 야드비가와 요가일라의 결혼으로 두 나라 사이에 형성된 크레보 연합은 완전히 헌법적이지 않았다. 야기에우워 왕조의 마지막 남성 구성원으로서 아이가 없는 지그문트 2세는 자신의 왕조의 유산을 보존하려 했다. 새롭게 제안된 헌법적 연합은 하나의 큰 연방 국가를 만들고, 하나의 선출된 군주가 두 영역을 동시에 통치하게 할 것이었다.

루블린 연합; 지그문트는 귀족, 사절, 성직자들 사이에 십자가를 들고 중앙에 서 있다.


1569년 1월 폴란드 도시 루블린 근처에서 열린 연합에 대한 초기 세임 협상은 결렬되었다. 폴란드인들이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정착하고 토지를 소유할 권리에 대해 리투아니아 사절들이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미코와이 라지비우가 1569년 3월 1일 루블린을 떠난 후, 지그문트 2세는 당시 리투아니아 포들라치아, 볼히니아, 포돌리아, 키예프 주를 폴란드에 합병한다고 발표했는데, 현지 루테니아인 (우크라이나) 젠트리의 강한 지지를 받았다. 한때 키예프 루스에 속했던 이 역사적인 지역은 리투아니아와 러시아 사이에서 분쟁이 있었다. 그러나 루테니아 귀족들은 폴란드 세력이 제공하는 정치적 또는 경제적 잠재력을 활용하고 싶어했고 그 조건에 동의했다. 갈리치아-볼히니아 전쟁의 여파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오늘날의 우크라이나를 분할한 후, 루테니아 왕국 또는 "우크라이나"는 1349년에 폐지되었다. 루블린 연합 하에서 문화, 관습, 종교 및 언어가 폴란드인과 다른 모든 우크라이나 및 루테니아 영토는 가톨릭 폴란드에 합병되었다. 강력한 서구화와 폴란드화가 뒤따랐으며, 여기에는 미래의 국왕 지그문트 3세에 의한 우크라이나 동방 정교회의 탄압이 포함되었다. 루테니아는 폴란드 지배에 대한 코사크 봉기와 폴란드 분할까지 폴란드 통치 하에 남아 있었고, 이때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었다.

리투아니아인들은 얀 히에로니모비치 호드키에비치 하에서 세임 협상에 복귀하여 협상을 계속했다. 폴란드 귀족은 다시 한번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폴란드 완전 합병을 압박했지만, 리투아니아인들은 반대했다. 당사자들은 결국 1569년 6월 28일 연방 국가에 합의했고, 1569년 7월 1일 루블린 성에서 루블린 연합이 서명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수립되었다. 지그문트 2세는 7월 4일 통일 조약을 비준했고, 이후 16세기 유럽에서 가장 크고 다문화적인 국가 중 하나를 통치했다.

2. 4. 종교 정책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아버지 지그문트 1세와 달리,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는 종교 문제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19] 그는 여러 명의 정부를 두어 성직자들에게 방탕아로 여겨지기도 했다.[19] 지그문트 2세는 소수 민족에게 비교적 관대했으며, 다양한 신앙을 가진 귀족들이 세임(폴란드 의회)에 참여하는 것을 지지했다. 그는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갔지만, 폴란드 내 종교 개혁을 더 수용했다.[19]

마르틴 루터장 칼뱅이 시작한 종교 개혁 기간 동안 스타니스와프 자모이스키, 얀 자모이스키, 미코와이 레이 등 여러 유력 인사들이 칼뱅주의나 루터교로 개종했다.[20] 16세기 안제이 프리치 모제프스키는 교황청의 권위를 포기하고 독립적인 폴란드 교회를 설립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1534년 헨리 8세가 잉글랜드 교회를 창설한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지그문트 2세는 궁정, 귀족, 농민들 사이에서 프로테스탄트교가 확산되면서 이러한 주장에 관대했다. 특히 칼뱅주의는 민주주의적 자유를 옹호하고 절대 군주제에 반대했기 때문에 폴란드 귀족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1555년 피오트르쿠프 트르비날스키에서 열린 세임에서 귀족들은 폴란드 교회에서 사제의 권리와 독신주의 폐지를 논의했다.[21] 일부 가톨릭 주교들은 폴란드, 리투아니아, 프로이센 등을 통합할 종교의 필요성을 인정하며 이를 지지했다. 지그문트 2세는 교황 바오로 4세의 동의를 조건으로 이러한 요구에 동의했지만, 바오로 4세는 격분하며 거부했다.[21] 파문 위협에 직면한 의회는 계획을 포기했지만, 프로테스탄트교는 계속 확산되었다. 1565년에는 폴란드 형제단이 칼뱅주의의 비삼위일체론 분파로 등장했다.[22]

지그문트 2세 사후 1년 만에 바르샤바 연합이 채택되어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는 최초의 유럽 법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폴란드 내 프로테스탄트교는 지그문트 3세 바사의 반종교 개혁 조치로 쇠퇴했다.[23] 폴란드 형제단은 금지되고, 지도자들은 처형되었다.[22]

지그문트 2세의 결혼 문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측에 중요한 쟁점이었다. 그는 헨리 8세처럼 세 번째 부인과의 결혼 무효를 신청했고, 이는 국내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다. 한편, 합스부르크 왕가는 폴란드 왕위를 노리고 국왕의 재혼을 막으려 했다. 지그문트 2세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측의 조정을 시도했다.

2. 5. 문화 후원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는 르네상스 문화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그는 바벨 성, 빌뉴스 성, 니에포워미체 성, 바르샤바 왕궁 등 여러 왕실 저택을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하거나 개발했다.[24] 1560년대에는 티코친 성을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했는데, 이곳은 왕실 거주지이자 왕실 보물과 도서관, 왕관의 주요 무기고로 사용되었다.[25]

방패를 든 사티로스와 국왕의 모노그램 ''S.A.'' (지그문트 아우구스투스)이 새겨진 태피스트리, 1555년경 브뤼셀에서 제작


그는 예술가와 학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특히 단편 소설, 시, 풍자를 즐겨 읽었으며, 피오트르 미슈코프스키 주교의 영향으로 당대 폴란드 최고의 작가이자 시인이었던 얀 코하노프스키가 1563년 왕실에 합류했다. 코하노프스키는 1567년 리투아니아 군사 기동과 1569년 루블린 연합 조인식에 참석하는 등 왕의 중요한 행사에 동행했다.[31]

얀 코하노프스키가 지그문트에게 자신의 작품 ''사티르''를 바치는 모습, 1884년 펠릭스 시프니에프스키의 삽화


지그문트는 아버지처럼 이탈리아 금세공인, 보석상, 메달리스트 등 외국 장인을 고용했다. 폴란드로 데려온 유명 인사 중 한 명은 조반니 자코포 카라글리오로, 그는 카메오, 메달, 동전 및 보석 제작을 맡았다.[32]

지그문트는 보석과 보석을 열정적으로 수집했다. 교황 사절 베르나르도 봉조반니의 보고에 따르면, 그의 컬렉션은 16개의 상자에 보관되어 있었다.[26]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 국왕의 수집품은 다음과 같다.

품목설명
루비카를 5세 소유, 80000이탈리아 에스쿠도 가치[26]
황제의 다이아몬드 메달한쪽에 합스부르크가의 독수리, 다른 쪽에 플러스 울트라 표식이 있는 두 개의 기둥[26]
헝가리 왕관1571년 조카 존 지그문트 자폴야 사망 후 상속[27]
스웨덴 왕관가문의 기념품으로 티코친 성의 개인 금고에 보관[28]
술탄의 검16000두카트 가치[26]
말 장식30개의 귀중한 말 장식[26]
갑옷20개의 서로 다른 개인용 갑옷[29]
태피스트리 컬렉션1550~1560년에 브뤼셀에서 의뢰한 360점[26][30]



1558년 10월 18일, 지그문트 2세는 크라쿠프에서 베네치아로 운행하는 최초의 정규 폴란드 우편 서비스 운영 권한을 부여하여 폴란드 우편을 설립했다.[33] 1562년부터 우편 경로는 비엔나와 신성 로마 제국의 도시를 포함하여 합스부르크와 지속적인 서신을 교환할 수 있었다.[34][33]

1573년에는 비스와 강의 바르샤바에 첫 번째 영구 다리가 건설되었으며, 당시 유럽에서 가장 긴 나무 다리이기도 했다. 이 다리는 지그문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2. 6. 죽음

Zygmunt II Augustpl는 1572년 7월 7일 오후 6시에 크니신에서 상원 의원들과 사절단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했다.[16] 의사들이 밝힌 공식적인 사인은 소모성 질환이었다.[16] 그의 시신은 영구차에 안치되었고, 1573년 9월 10일까지 인근 티코친 성에 머물렀으며, 그 후 바르샤바를 거쳐 크라쿠프로 옮겨졌다.[17] 바르바라 라지비우의 유해를 크라쿠프에서 빌뉴스로 옮긴 후, 지그문트는 빌뉴스 성 단지에 자신의 가족 묘소로 사용할 교회를 짓고 있었지만, 1572년에는 아직 완공되지 않았다.[17] 따라서 그는 1574년 2월 10일 바벨 대성당에 안장되었다.[17] 그의 여동생 안나 야기에우워가 참석한 성대한 장례식은 폴란드 왕국에서 마지막으로 치러진 그런 종류의 장관이었다. 그 어떤 폴란드 군주도 이처럼 화려하고 웅장하게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

얀 마테이코의 작품, ''크니신에서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의 죽음''


폴란드 크라쿠프의 바벨 대성당 지그문트 예배당에 있는 지그문트 아우구스트의 무덤


그의 죽음은 폴란드에 선출 군주제를 도입했고, 이는 18세기 말의 마지막 폴란드 분할까지 지속되었다.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는 야기에우워 왕조의 마지막 남성 구성원이었다. 그의 자녀가 없었던 여동생 안나의 1596년 사망은 왕조의 종말을 알렸다.

3. 유산

지그문트 2세의 유산은 다음과 같이 평가된다.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형성''': 1569년 루블린 연합을 통해 유럽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다문화 국가를 건설한 주요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 '''귀족 공화정 발전''': 슐라흐타 세력의 권한을 강화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독특한 정치 체제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 '''종교적 관용''': 당시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관대한 종교 정책을 펼쳐 사회 통합을 추구했다.
  • '''르네상스 문화 후원''': 폴란드 르네상스 문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하지만,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왕권과 귀족 간의 갈등이 있었으며, 특히 두 번째 부인 바르바라 라지비우와의 결혼은 귀족들의 강한 반발을 샀다. 바르바라는 리투아니아 귀족 출신으로, 보나 스포르차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550년 폴란드 여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즉위 직후 건강이 악화되어 자궁경부암 또는 난소암으로 추정되는 질병으로 1551년 사망했다.[10]

4. 평가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공존한다.

그는 뛰어난 정치인이자 외교관으로 평가받는다. 인내심과 외교적 기교를 갖추고 폴란드 의회(세임)의 본질을 철저히 이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8] 루블린 연합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라는 하나의 국가로 통합한 것은 그의 가장 두드러진 업적 중 하나이다.[18]

그러나 귀족 세력(슐라흐타)의 지나친 강화를 초래하여 왕권 약화와 사회 불평등 심화를 야기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후사를 남기지 못해 야기에우워 왕조가 단절되었다는 점도 부정적 평가 요인 중 하나이다.[15]

4. 1. 긍정적 평가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는 뛰어난 정치인이자 외교관이었다. 그는 인내심과 외교적 기교를 갖추고 있었으며, 폴란드 의회(세임)의 본질을 철저히 이해했다.[18] 오스트리아 대사와 교황 사절들은 그가 국가를 통제하는 방식에 대해 증언하며, 모든 일이 그의 뜻대로 진행되었고 그는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전한다.[18]

그는 아버지보다 더 많은 자금을 세임으로부터 얻는 데 성공했으며, 의회 회의에 예기치 않게 마조비아 영주의 단순한 회색 코트를 입고 나타나 사절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등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18]

그의 가장 두드러진 업적은 루블린 연합으로, 폴란드 리투아니아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라는 하나의 국가로 통합했다.[18] 이 업적은 그의 개인적인 정치적 접근 방식과 중재 능력 덕분에 가능했다.[18]

또한 그는 종교 개혁 시기에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펼쳐 사회 통합에 기여했으며, 문화 후원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4. 2. 부정적 평가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는 귀족 세력(슐라흐타)의 지나친 강화를 초래하여 왕권 약화와 사회 불평등 심화를 야기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는 후사를 남기지 못해 야기에우워 왕조의 단절을 초래했다.[15] 그는 통치 초기부터 왕권을 제한하려는 귀족 계급과 갈등을 겪었으며, 1569년 루블린 연합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성립시켰으나, 1572년 후사 없이 사망하여 왕조가 단절되었다.[1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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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웹사이트 Intriguojanti vieno šedevro istorija – Žygimanto Augusto vaikiškų šarvų paroda https://www.valdovur[...] 2023-04-23
[5] 간행물 Duczmal (2012), p. 119
[6] 웹사이트 Barbara Radziwiłłówna – wielka miłość Zygmunta Augusta | HISTORIA.org.pl – historia, kultura, muzea, matura, rekonstrukcje i recenzje historyczne https://historia.org[...] 2016-05-30
[7] 웹사이트 Wyborcza.pl https://wyborcza.pl/[...]
[8] 웹사이트 Był dla niej najgorszym łajdakiem i świnią. Jak NAPRAWDĘ Zygmunt August traktował Barbarę Radziwiłłównę? https://ciekawostkih[...] 2019-03-03
[9] 간행물 Duczmal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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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서적 Dynastia Jagiellonów w Polsce P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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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웹사이트 Šv. Onos ir Šv. Barboros bažnyčių pamatai – Vilniaus pilys https://www.vilniaus[...] 2021-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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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웹사이트 Geneza, upadek i dziedzictwo reformacji w Polsce – wywiad z prof. Januszem T. Maciuszką – Muzeum Historii Polski http://muzhp.pl/p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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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간행물 Albrecht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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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논문 Francesco I Sforza, duca di Milano Roma
[41] 서적 The Cambridge Modern History https://books.google[...] Macmillan 2018-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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