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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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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주 류씨는 고려 시대 금자광록대부 중서령을 지낸 류정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진주를 본관으로 하며, 경상남도 서부에 위치한 진주는 백제의 거렬성이었으며 신라,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며 여러 차례 행정 구역 명칭이 변경되었다. 주요 인물로는 류돈식, 류염, 류순정, 류근 등이 있으며, 조선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기도 했다. 2015년 기준으로 총 93,073명이 진주 류씨 성을 사용하며, 경상남도 합천군, 경기도 안성시 등지에 집성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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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치환은 1931년 등단한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교육자로, 인간 존재의 허무와 의지를 남성적 어조로 노래하며 생명파 시인으로 불렸으나,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 논란이 있었고 광복 후에는 교육계에 종사하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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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류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나라한국
관향경상남도 진주시
시조류정(柳挺), 류인비(柳仁庇)
인구 (2015년)93,073명
주요 인물
인물류돈식
류염
류순정
류인귀
류인숙
류우
류희령
류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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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조

진주 류씨는 시조 '''류정'''(柳挺)을 시조로 하는 토진(土晉) 류씨와 문화 류씨 시조 류차달의 9대손인 류인비(柳仁庇)를 시조로 하는 이진(移晉) 류씨로 나뉜다. 류정은 고려시대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중서령(中書令)을 지내고 좌우위 상장군(左右衛上將軍)에 올라 진강부원군(晋康府院君)에 봉해졌다.

2. 1. 토진(土晉) 류씨

시조 '''류정'''(柳挺)은 고려 시대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중서령(中書令)을 지내고 좌우위 상장군(左右衛上將軍)에 올라 진강부원군(晋康府院君)에 봉해졌다.

2. 2. 이진(移晉) 류씨

문화 류씨 시조 류차달의 9대손 류인비(柳仁庇)를 시조로 한다.

3. 본관

진주(晋州)는 경상남도 서부에 위치한 지명이다. 본래 백제의 거렬성(居烈城)이었다. 663년(문무왕 3) 신라에 편입되어 거타주(居陀州)가 설치되었으며, 685년(신문왕 5)에 청주(菁州)를 설치하였다가, 757년(경덕왕 16)에 강주도독부(康州都督府)로 개칭되었다가 혜공왕 때 청주(菁州)로 개칭되었다. 고려 건국 후 940년(태조 23)에 다시 강주로 환원되었고, 983년(성종 2)에 12목의 하나인 진주목으로 개편하였다. 995년(성종 14)에는 정해군(定海軍)이라 하고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산남도(山南道)에 속하게 하였다. 1012년에 안무사(按撫使)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에 진주목으로 복구되었다. 1392년(태조 1) 조선 건국 후 현비(顯妃) 강씨(康氏)의 내향(內鄕)이므로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로 승격하였다가 1402년(태종 2)에 진주목으로 환원되었다. 1896년 경상남도 진주군으로 개편되었다. 1939년 진주읍이 진주시로 승격하면서 나머지 지역이 진양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95년 진양군이 진주시에 통합되었다.

4. 역사

진주(晋州)는 경상남도 서부에 위치한 지명이다. 본래 백제의 거렬성(居烈城)이었다. 663년(문무왕 3) 신라에 편입되어 거타주(居陀州)가 설치되었으며, 685년(신문왕 5)에 청주(菁州)를 설치하였다가, 757년(경덕왕 16)에 강주도독부(康州都督府)로 개칭되었다가 혜공왕 때 청주(菁州)로 개칭되었다. 고려 건국 후 940년(태조 23)에 다시 강주로 환원되었고, 983년(성종 2)에 12목의 하나인 진주목으로 개편하였다. 995년(성종 14)에는 정해군(定海軍)이라 하고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산남도(山南道)에 속하게 하였다. 1012년에 안무사(按撫使)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에 진주목으로 복구되었다. 1392년(태조 1) 조선 건국 후 현비(顯妃) 강씨(康氏)의 내향(內鄕)이므로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로 승격하였다가 1402년(태종 2)에 진주목으로 환원되었다. 1896년 경상남도 진주군으로 개편되었다. 1939년 진주읍이 진주시로 승격하면서 나머지 지역이 진양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95년 진양군이 진주시에 통합되었다.

5. 인물

류돈식은 토류계 시조 류정의 손자이자 최충헌의 외조카로, 1217년 거란 침입 때 후군병마사로 출전했다. 류염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세종 때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조선시대 류순정중종반정 삼대장 중 한 명이었다. 류인귀는 폐비 윤씨 추숭에 반대하다 유배되기도 했으나, 중종반정으로 복귀했다. 류희령은 류인귀의 아들로,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류조인은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호성원종공신에 임명되었고, 류근은 임진왜란정묘호란 때 왕을 호종하였다.[1]

5. 1. 고려


  • 류돈식 : 최충헌의 외조카이다. 1217년(고종 4) 거란의 대요수국(大遼收國)이 고려로 침입해 오자 후군병마사(後軍兵馬使)가 되어 출전하였다.
  • 류염 : 자는 주인(州人), 호는 묵재(默齋)이다. 고려 밀직부사 류인비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평리(評理) 류혜손(柳惠孫)이다. 진주 출신으로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우왕 때에 성균관대사성을 역임하였다. 공양왕 즉위 후 이림(李琳)의 손녀 사위라는 이유로 유배되었다가 1391년(공양왕 3)에 사면되었다.

5. 2. 조선


  • 류염: 자는 주인(州人), 호는 묵재(默齋)이다. 고려 밀직부사 류인비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평리(評理) 류혜손(柳惠孫)이다. 진주 출신으로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우왕 때에 성균관대사성을 역임하였다. 공양왕 즉위 후 이림의 손녀 사위라는 이유로 유배되었다가 1391년(공양왕 3)에 사면되었다. 조선 개국 후에는 1402년(태종 2)에 전라도관찰출척사(全羅道觀察黜陟使)를 거쳐 1417년에 판한성부사를 지냈으며, 이조판서·대제학 등을 역임하면서 세종 때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1]
  • 류순정: 중종반정의 삼대장 중 한 명이다. 사헌부헌납, 홍문관교리, 평안도절도사, 숭정대부, 우의정, 영의정을 지냈다.[1]
  • 류인귀: 1495년(연산군 1)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에 올라 폐비 윤씨(廢妃尹氏)의 추숭(追崇)을 반대하다가 회덕(懷德)으로 장류(杖流)되었으나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대사성(大司成)에 올랐다.[1]
  • 류희령: 류인귀의 아들이다. 1516년(중종 11)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1543년 호조참의에 이르렀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죽었다.[1]
  • 류조인: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평양(平壤)으로 호종(扈從)하여 세자 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가 되었다. 이듬해 사재감정(司宰監正)에 제수되고, 서울에 돌아와서는 통정대부에 승직되고 형조참의에 제수되었다. 이어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임명되고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1]
  • 류근: 1572년(선조 5) 문과에 장원하고, 1587년 이조정랑으로서 문신 정시(文臣庭試)에 다시 장원하였다. 1591년 좌승지로서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정철이 화를 당할 때 일파로 몰려 탄핵을 받았으나, 문재(文才)를 아끼는 선조의 두둔으로 화를 면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임금을 호종했으며, 예조참의·좌승지를 거쳐 예조참판에 특진되었다. 1593년 도승지로 경성안무사(京城安撫使)가 되어 민심을 수습, 이어 한성부판윤에 올라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597년 운향검찰사(運餉檢察使)로 명나라에서 들어오는 군량미의 수송을 담당하였다. 1601년 예조판서가 되어 동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고, 1603년에는 충청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온조묘를 다시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녹훈되고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에 봉해졌다. 대제학에 이어 좌찬성이 되었다. 광해군 때 대북파가 국정을 농단하고 1613년(광해군 5) 폐모론까지 일어나자, 괴산으로 물러나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아 관작이 삭탈되었다가 1619년 복관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기용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27년 정묘호란 때 강화에 왕을 호종하던 중 통진에서 죽었다.[1]

5. 3. 현대


  • 류순정(1459년 ~ 1512년): 중종반정 삼대장 중 한 명으로, 사헌부 헌납, 홍문관 교리, 평안도 절도사, 숭정대부, 우의정,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 류인귀(1463년 ~ 1531년): 1495년(연산군 1)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에 올랐으나, 폐비 윤씨 추숭에 반대하다 회덕으로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대사성에 올랐다.
  • 류희령(1480년 ~ 1552년): 류인귀의 아들로, 1516년(중종 11)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1543년 호조참의를 지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 류조인(1522년 ~ 1599년):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평양으로 호종하여 세자익위사익위가 되었다. 이듬해 사재감정에 제수되고, 서울에서는 통정대부로 승진, 형조참의에 제수되었다. 호성원종공신에 임명되고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류근(1549년 ~ 1627년): 1572년(선조 5) 문과에 장원급제, 1587년 이조정랑으로 문신 정시에 다시 장원급제하였다. 1591년 좌승지로 건저문제로 정철이 화를 당할 때 일파로 몰려 탄핵받았으나, 선조의 도움으로 화를 면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임금을 호종, 예조참의·좌승지를 거쳐 예조참판에 특진되었다. 1593년 도승지로 경성안무사가 되어 민심을 수습, 한성부판윤에 올라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597년 운향검찰사로 명나라 군량미 수송을 담당하였다. 1601년 예조판서로 동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고, 1603년 충청도관찰사로 온조묘를 다시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 3등에 녹훈, 진원부원군에 봉해졌다. 대제학, 좌찬성을 지냈다. 광해군 때 대북파가 국정을 농단하고 1613년(광해군 5) 폐모론이 일어나자, 괴산으로 물러나 정청에 참여하지 않아 관작이 삭탈되었다가 1619년 복관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기용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 강화에 왕을 호종하던 중 통진에서 사망하였다.

6. 조선 왕실과의 인척 관계

7. 항렬자

진주 류씨는 항렬자를 쓴다.

7. 1. 토류계

24세25세26세27세28세29세30세31세32세33세34세35세36세37세38세
원(遠)


8. 인구

연도가구인구
1985년17,667가구72,829명
2000년18,685가구60,104명
2015년93,073명[1]



2015년 인구는 진주 류씨(16,964명), 진양 류씨(2,580명), 진주 유씨(68,901명), 진양 유씨(4,628명)를 합한 수치이다.[1]

9. 집성촌

지역비고
경상남도 합천군 용주면 가호리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진현리
경상북도 상주시 은척면 두곡리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하정리
충청북도 청주시 현도면 노산리
경상남도 합천군 묘산면 가산리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면 하빈리
경상남도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인천광역시 서구 시천동


참조

[1] 문서 토진
[2] 문서 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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