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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충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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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채충순은 고려 목종 때 중추원부사를 거쳐 현종 옹립에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목종의 병환 중 유진, 최항과 함께 왕위 계승 문제를 논의하고, 대량원군(현종)을 옹립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현종 즉위 후에는 직중대, 이부시랑 등을 역임하며 거란의 침입 시 왕을 호종했고, 군역 면제 및 관원 임용 관련 정책을 건의했다. 이후 벼슬이 올라 이부상서, 참지정사 등을 지냈으며, 1036년에 사망하여 정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채충순은 드라마 《천추태후》와 《고려 거란 전쟁》에 등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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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충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채충순
원래 이름蔡忠順
출생일미상
출생지미상
사망일1036년 5월 15일
사망지미상
가문음성 채씨
큰제목제양현개국자
작위고려의 판서경유수사
시호정간(貞簡)
충순(忠順)
국적고려
성별남성
서훈보국공신
관직
군주고려 현종
군주 칭호국왕
재임1028년~1029년
경력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판서경유수사(判西京留守事)

2. 가족

채충순은 광종 때 남당에서 고려로 귀화한 채인범(934~998년)의 아들임이 거의 확실하다. 〈채인범 묘지명〉에 따르면 채인범은 남당[3]천주(泉州) 출신이며, 청하군대부인(淸河郡大夫人) 최씨(崔氏)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현종 때 내사시랑(內史侍郞) 동내사문하평장사(同內史門下平章事) 감수국사(監修國史)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화사비〉에 채충순의 관직이 '내사시랑(內史侍郞) 동내사문하평장사(同內史門下平章事)'로 〈묘지명〉과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기록되어 있어,[4] 채충순이 채인범의 아들임을 알 수 있다. 채충현(蔡忠顯)[5]은 항렬자로 미루어 보아 채충순의 배다른 아우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6]

2. 1. 가계 배경

채충순은 광종 때 남당에서 고려로 귀화한 채인범(蔡仁範, 934~998년)의 아들임이 거의 확실하다. 〈채인범 묘지명〉에 따르면 채인범은 남당[3] 천주(泉州) 출신이며, 청하군대부인(淸河郡大夫人) 최씨(崔氏)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현종 때 내사시랑(內史侍郞) 동내사문하평장사(同內史門下平章事) 감수국사(監修國史)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화사비〉에 채충순의 관직을 적으면서 '내사시랑(內史侍郞) 동내사문하평장사(同內史門下平章事)'를 〈묘지명〉과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똑같이 적고 있어,[4] 그의 아들이 현종 때의 재상인 채충순이며, 채충현(蔡忠顯)[5]은 항렬자로 미루어 보아 채충순의 배다른 아우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6]

2. 2. 채충순의 형제

광종 때 남당에서 고려로 귀화한 채인범(934~998년)의 아들임이 거의 확실하다. 〈채인범 묘지명〉에 따르면 채인범은 남당[3]천주(泉州) 출신이며, 청하군대부인(淸河郡大夫人) 최씨(崔氏)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현종 때 내사시랑(內史侍郞) 동내사문하평장사(同內史門下平章事) 감수국사(監修國史)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화사비〉에 채충순의 관직이 '내사시랑(內史侍郞) 동내사문하평장사(同內史門下平章事)'로 〈묘지명〉과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기록되어 있어,[4] 채충순이 채인범의 아들임을 알 수 있다. 채충현(蔡忠顯)[5]은 항렬자로 미루어 보아 채충순의 배다른 아우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6]

3. 생애

목종 때 중추원부사를 지냈으며, 현종을 옹립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현종 즉위 후 여러 관직을 거치며, 군역 및 관리 임용 제도 개선을 건의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

거란의 침입으로 왕이 피난을 갈 때에도 왕을 호종하였으며, 여러 신하들이 도망가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왕의 곁을 지켰다.

채충순은 군사(軍士) 중에 부모의 나이가 80세 이상인 사람이 있으면 군역(軍役)을 면제시켜 부모 곁에서 봉양하게 하고, 문무 관원으로서 부모의 나이가 70세 이상이되 다른 형제가 없는 사람은 지방관[外職]에 임명하지 말고, 그의 부모가 병이 나면 200일 휴가를 주어 돌보게 해달라고 건의하여 왕이 이를 따르게 하였다.[9]

1036년(정종 2년)에 죽으니 시호를 정간(貞簡)이라 하였다.[11]

3. 1. 목종 시대

목종 때 채충순은 중추원부사가 되었다. 왕이 병석에 눕자 채충순은 유진, 최항과 함께 은대에서 숙직하였다. 하루는 왕이 채충순을 불러 좌우를 물리치고, 왕위를 넘보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알고 있냐고 물었다. 채충순은 소문은 들었으나 실상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대답했고, 왕은 유충정이 올린, 김치양이 왕위를 넘보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여주었다.[7]

왕은 왕순이 올린, 간악한 무리들이 자신을 협박하고 독약을 넣은 음식을 보냈다는 내용의 편지도 보여주었다. 채충순은 형세가 급박하니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왕은 자신의 병이 위독하여 곧 세상을 뜰 것 같고, 태조의 후손으로는 대량원군만 남아 있으니, 채충순과 최항에게 정성을 다하여 나라를 바로잡고 사직을 다른 성에게 주지 말라고 당부하였다.[7]

채충순이 최항에게 이 사실을 전하자 최항도 동의하였다. 유충정고영기를 보내 채충순과 최항에게 주상이 병석에 있고 간악한 무리들이 틈을 엿보므로 태조의 후손을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고 알렸다. 채충순 등은 대량원군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분이라는 고영기의 말에 동의하며, 유충정의 제안대로 그를 찾아가 결정을 내렸다.[7]

삼각산 신혈사에 있던 대량원군을 맞이하기 위해 채충순은 왕에게 문반과 무반 각 한 사람씩을 뽑아 군교를 거느리고 가게 할 것을 건의했다. 최항 및 고영기 등과 의논하여 황보유의를 천거하였다. 채충순 등은 간악한 무리들이 먼저 손을 쓸까 두려워 십여 명만 지름길로 가서 맞이해 와야 한다고 건의했고, 왕은 이를 허락하며 빨리 보내 늦지 말라고 당부했다. 왕은 채충순에게 대량원군에게 주는 글을 초안하게 하고, 직접 먹을 갈아주었다. 왕은 글 말미에 간악한 무리들의 잠복을 조심하라는 내용을 추가했다. 유행간이 대량원군의 왕위계승을 반대했으므로 왕은 채충순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황보유의 등은 신혈사로 가서 대량원군을 맞이해 왕으로 옹립하니, 이 사람이 현종이다.[7]

3. 2. 현종 옹립

목종이 병석에 눕자, 채충순은 유진, 최항과 함께 은대(銀臺)에서 숙직하였다. 왕은 채충순을 불러 김치양과 왕순(대량원군)이 보낸 편지를 보여주며 왕위 계승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김치양은 왕위를 노리고 뇌물을 주며 심복을 심고 있다는 내용이었고, 왕순은 간악한 무리에게 협박받고 있다는 내용이었다.[7]

채충순은 상황이 급박하다 판단하여 빠른 조치를 건의했고, 목종은 태조의 후손인 대량원군을 후계자로 지목하며 채충순과 최항에게 나라를 바로잡아 달라고 당부하였다. 채충순은 최항, 유충정과 의논하여 대량원군을 왕위에 올리기로 결정했다.[7]

당시 삼각산 신혈사(神穴寺)에 있던 대량원군을 맞이하기 위해 채충순은 문반과 무반 각 한 명씩 뽑아 군사를 보내자고 건의했으나, 군사가 많으면 간악한 무리들이 먼저 손을 쓸 것을 우려해 십여 명만 보내 지름길로 가자는 의견을 냈다. 왕은 이를 허락하고 채충순에게 대량원군에게 보내는 글을 쓰도록 하고, 유행간에게는 비밀로 하라고 당부하였다. 황보유의 등이 이 글을 가지고 신혈사로 가서 대량원군을 맞이해 왕으로 옹립하니, 이가 곧 현종이다.[7]

3. 3. 현종 시대

현종은 채충순을 직중대(直中臺)로 삼았고, 얼마 뒤 이부시랑 겸 좌간의대부(吏部侍郞 兼左諫議大夫)로 승진시켰다. 거란의 침입으로 왕이 남쪽으로 피난갈 때 어가(御駕)를 호종하였다. 광주(廣州)에서 하공진 등이 포로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다른 신하들은 모두 도망쳤으나, 채충순과 충숙(忠肅)·장연우(張延祐)·주저(周佇)·유종(柳宗)·김응인(金應仁)은 왕을 떠나지 않았다.[8]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이부상서·참지정사(吏部尙書 叅知政事)가 되었고, 추충진절위사공신(推忠盡節衛社功臣) 칭호를 받았으며, 제양현개국남(濟陽縣開國男)에 책봉되어 식읍 300호를 받았다.[8]

1021년(현종 12년), 검교태위(檢校太尉)·제양현개국자(濟陽縣開國子)에 책봉되고 식읍 5백호를 받았으며, 보국공신(輔國功臣) 칭호를 받았다. 얼마 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겸 서경유수(西京留守)를 거쳐 태자 소사(太子少師)로 올랐다.

1027년(현종 18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승진했고, 1028년 판서경유수사(判西京留守事)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을 요청하였다.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10]

3. 3. 1. 개혁 정책 건의

목종이 병석에 눕자, 채충순은 유진, 최항과 함께 은대(銀臺)에서 숙직하였다. 목종은 채충순에게 김치양과 왕순이 보낸 편지를 보여주며 왕위 계승에 대한 조치를 논의했다.[7]

두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낸이내용
유충정김치양이 왕위를 노리고 사람을 시켜 선물을 뿌리며 심복을 심고 있다고 알리며, 자신에게도 은밀히 도울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했다고 밝혔다.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간악한 무리들이 협박하며 보낸 술과 음식에 독이 들어있을 것으로 의심되어 까마귀와 참새에게 주니 죽었다고 알리며, 목종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채충순은 목종에게 태조의 후손인 대량원군(왕순)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건의했고, 목종은 채충순과 최항에게 나라를 바로잡고 사직을 지켜달라고 당부하였다.[7]

이후 채충순은 최항, 유충정, 고영기 등과 논의하여 대량원군을 왕위에 올릴 계획을 세웠다. 채충순은 목종에게 문반과 무반 각 한 명씩을 뽑아 대량원군을 모셔올 것을 건의했고, 황보유의를 천거하였다. 또한, 비밀 유지를 위해 십여 명만 지름길로 보내 대량원군을 모셔오도록 건의하였다.[7]

목종은 채충순에게 대량원군에게 보내는 글을 초안하게 하고, 직접 먹을 갈아주며 간절한 마음을 전했다. 목종은 글 말미에 대량원군에게 "길이 험하니 간악한 무리들이 잠복하고 있다가 불의의 변을 일으킬까 두렵다. 부디 조심해 오도록 하라."는 내용을 추가하도록 했다. 또한 합문사인 유행간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7]

이러한 과정을 거쳐 황보유의 등이 삼각산 신혈사(神穴寺)로 가서 대량원군을 맞이해 왕으로 옹립하니, 이가 바로 현종이다.[7]

현종 즉위 후, 채충순은 군사(軍士) 중 부모의 나이가 80세 이상인 사람은 군역(軍役)을 면제하고, 문무 관원 중 부모의 나이가 70세 이상이고 다른 형제가 없는 사람은 지방관에 임명하지 말 것 등을 건의하여 왕이 따르도록 하였다.[9]

3. 4. 관직 생활과 사망

목종 때 채충순은 중추원부사가 되었다. 왕이 병석에 눕자 유진, 최항과 함께 은대에서 숙직하였다. 왕은 채충순에게 유충정과 왕순(대량원군)의 편지를 보여주며 왕위 계승 문제를 논의했다. 채충순은 왕에게 태조의 후손인 대량원군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제안했고, 왕은 이를 받아들여 채충순에게 대량원군에게 보내는 글을 초안하게 했다.[7] 왕은 이 편지를 황보유의 등에게 주어 삼각산 신혈사로 가서 대량원군을 맞이해 왕으로 옹립하게 하였는데, 이 사람이 현종이다.[7]

현종은 즉위 후 채충순을 직중대로 삼았고, 이후 이부시랑 겸 좌간의대부로 승진시켰다. 현종이 거란의 침입으로 남쪽으로 피난 갈 때 채충순은 어가를 호종했다. 여러 신하들이 흩어져 도망가는 와중에도 채충순은 왕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8] 채충순은 여러 차례 전임되어 이부상서·참지정사가 되었고, 추충진절위사공신의 칭호를 받았으며, 제양현개국남에 책봉되고 식읍 300호를 받았다.[8]

채충순은 군역 면제와 부모 봉양을 위한 휴가 제도 등을 건의하여 왕이 이를 따르게 했다.[9] 1021년(현종 12년)에는 검교태위, 제양현개국자, 식읍 5백 호로 책봉되었고, 보국공신 칭호를 받았다. 이후 내사시랑평장사 겸 서경유수로 임명되었고, 태자소사로 올랐다.

1027년(현종 18년) 문하시랑평장사로 승진했고, 1028년 판서경유수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을 요청했다.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으며,[10] 1036년(정종 2년)에 사망하여 시호로 정간(貞簡)을 받았다.[11]

4. 채충순이 등장한 드라마

KBS의 천추태후(2009년)에서 김효원이, 고려 거란 전쟁(2023년)에서 한승현이 채충순 역을 연기하였다.

4. 1. 천추태후 (2009년)

천추태후 (KBS, 2009년) - 배우: 김효원

4. 2. 고려 거란 전쟁 (2023년)

2023년 KBS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 한승현이 채충순 역을 맡았다.[1]

참조

[1] 서적 한국 중세 사회사 연구 일조각 1984
[2] 웹사이트 《고려사》 권6 세가 권제6 정종(靖宗) 2년 4월 http://db.history.go[...]
[3] 문서 묘지명
[4] 문서 현화사비
[5] 고려사 고려사
[6] 논문 「채인범 묘지명」의 복원과 그 의의 2022
[7] 웹사이트 《고려사》 권93 열전 권제6 제신(諸臣) 채충순이 목종의 명령을 받아 대량원군을 현종으로 옹립하다 http://db.history.go[...]
[8] 웹사이트 《고려사》 권93 열전 권제6 제신(諸臣) 채충순이 거란 침입으로 남행하던 현종을 호종하여 공신에 책봉되다 http://db.history.go[...]
[9] 웹사이트 《고려사》 권93 열전 권제6 제신(諸臣) 채충순이 노인을 봉양하는 집안에 혜택을 주도록 건의하다 http://db.history.go[...]
[10] 웹사이트 《고려사》 권93 열전 권제6 제신(諸臣) 채충순이 봉작과 관직을 올려 받고 퇴직하다 http://db.history.go[...]
[11] 웹사이트 《고려사》 권93 열전 권제6 제신(諸臣) 채충순이 시호를 받다 http://db.history.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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