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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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천만리는 명나라 출신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명나라 군대의 조병영양사 겸 총독장으로 조선에 파병되어 군량 수송과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그는 몽골군 격퇴, 양릉 귀양살이, 태청전수위사 등을 거쳐 임진왜란에 참전했다. 조선에 귀화하여 선조로부터 자헌대부, 화산군에 봉해졌으며, 숙종 때 대보단에 종향되고 순조 때 신주가 부조되었다. 1910년 순종은 그에게 충장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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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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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원어 이름 | 千萬里 |
한글 | 천만리 |
한자 | 千萬里 |
로마자 표기 (문화관광부 2000년식) | Cheon Man-ri |
로마자 표기 (매큔-라이샤워식) | Ch'ŏn Man-ri |
인물 정보 | |
원어 이름 | 千萬里 |
출생일 | 1543년 8월 1일 |
출생지 | 명나라 |
국적 | 명나라 → 조선 |
본관 | 영양 |
별명 | 자(字) 원지(遠之) 호(號) 사암(思庵) 시호(諡號) 충장(忠壯) |
학력 | 1571년 무과 장원 급제 |
직업 | 군인, 정치인 |
경력 | 수위사 겸 총독장(守衛使兼總督將) |
배우자 | 영녕백(永寧佰) 허언(許彦)의 딸 |
자녀 | 천상(千祥), 천희(千禧) |
부모 | 부 : 천종악(千鐘嶽) 모 : 전탁(錢鐸)의 딸 |
2. 생애
명나라 출신의 무장으로, 1571년 무과에 급제하여 활동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명나라 황제의 명으로 조선에 파병되었다.[1] 그는 두 아들과 함께 제독 이여송을 따라 참전하여 평양 전투 등에서 군량 보급과 전투를 지휘하며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도 제독 마귀를 따라 직산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1]
전쟁이 끝난 후, 명나라의 쇠퇴와 후금(훗날 청나라)의 부상을 예견하고 조선에 귀화하기로 결심했다.[1] 선조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화산군(花山君)으로 봉하고 벼슬과 토지를 하사했으며, 아들들에게도 관직을 내려 조선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왔다.[1]
사후에도 그의 공적은 인정받아 숙종 때 대보단에 배향되었고, 1827년 순조 때 부조(不祧)의 명예를 얻었으며, 1910년 순종 황제로부터 충장(忠莊)이라는 시호를 받았다.[1]
2. 1. 초기 생애와 명나라에서의 활동
아버지는 천종악(千鐘嶽)이며, 어머니는 명나라 병부시랑 전탁(錢鐸)의 딸이다. 9세에 외삼촌 전륜(錢倫)에게 의탁되어 공부하였다.1571년 명나라 무과에 장원 급제하였고, 1575년에는 총절사(總節使)가 되어 몽골군을 격퇴하는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내직인 내위진무사(內衛鎭撫使)에 임명되었으나, 다른 이의 모함으로 인해 양릉(陽陵)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8년간의 귀양살이 끝에 복귀하여 태청전수위사(太淸殿守衛使)와 총독오군사(總督五軍司)를 겸직하였다.
태청전수위사로 재직하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의 원병 요청에 따라 명나라 황제의 명으로 조병영양사(調兵領糧使) 겸 총독장(總督將)에 임명되었다. 그는 두 아들 천상(千祥), 천희(千禧)와 함께 제독 이여송을 따라 조선으로 파병되어 군량 수송 업무를 책임졌다.
철기(鐵騎) 2만 명을 이끌고 이여송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곽산(郭山)에서 벌어진 첫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후 평양으로 진군하여 주둔 중인 일본군을 포위하였다. 제3차 평양 전투에서는 칠성문 공격을 담당하여 대포로 성문을 부수고 군사를 이끌고 들어가 싸워 1,280여 명의 적을 베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후 동래(東萊)까지 남하하며 연이어 승리하여 일본군의 기세를 꺾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제독 마귀(麻貴)를 따라 다시 조선에 파병되었다. 이때 중사마(中司馬)의 직책으로 직산에서 일본군과 싸웠는데, 매복 작전을 성공시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패주하는 일본군을 울산까지 추격하여 격파하였으며, 이 공적은 서생진(西生鎭)의 층암절벽에 새겨졌다.
2. 2.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참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선이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자, 당시 태청전수위사(太淸殿守衛使)로 있던 천만리는 명나라 황제의 명으로 조병영양사(調兵領糧使) 겸 총독장(總督將)에 임명되었다. 그는 두 아들 천상(千祥), 천희(千禧)와 함께 제독 이여송을 따라 조선으로 와서 군량 수송 업무를 담당했다.철기(鐵騎) 2만 명을 거느리고 이여송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곽산에서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평양으로 진군하여 제3차 평양 전투에 참전했다. 이때 칠성문을 대포로 부수고 군사를 정돈하여 진격했으며, 승세를 타고 싸워 1,280여 명의 적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남하하며 동래에 이르기까지 여러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일본군의 기세를 꺾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제독 마귀(麻貴)를 따라 다시 조선에 파병되었다. 중사마(中司馬)로서 직산에서 일본군과 싸웠는데, 매복 작전을 성공시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패주하는 적을 울산까지 추격하여 격파하였으며, 이 공적은 서생진의 바위에 새겨졌다.
2. 3. 조선 귀화와 여생
임진왜란이 끝나자 1600년(선조 33) 8월, 함께 파병되었던 만세덕(萬世德), 이승훈(李承勛) 등 다른 명나라 장수들은 귀국하였으나, 천만리는 조선에 남기로 결정하였다.[1] 그는 명나라의 국운이 기울고 후금(훗날 청나라)과 같은 이민족(오랑캐)의 시대가 올 것을 예감하고, 후손들이 오랑캐의 지배하에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국 땅인 조선에 남는 길을 선택했다고 전해진다.[1]조선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수도인 왕경(王京, 지금의 서울)에 살면서 금강산을 세 차례, 두류산(지리산)을 두 차례 유람하며 시를 짓고 감회를 남겼다.[1]
선조는 그의 전공을 높이 평가하여 자헌대부 품계의 봉조하 벼슬을 내리고, 화산군(花山君)으로 봉했으며, 논밭 30결(結)을 하사하였다.[1] 또한 그의 장남 천상(千祥)에게는 한성부좌윤, 차남 천희(千禧)에게는 평구도찰방(平邱道察訪) 벼슬을 내려 자손 대대로 녹봉을 이어받게 하였다.[1]
이후 숙종은 명나라 황제들을 기리는 대보단에 그를 함께 모시도록 명하였고,[1] 1827년 순조는 그의 신주를 사당에서 영구히 옮기지 않고 제사를 지내는 부조(不祧)의 은전을 내렸다.[1]
정1품 숭정대부 궁내부특진관을 지낸 김영목이 그의 시장(諡狀, 시호를 청하는 글)을 작성하였으며,[1] 1910년 7월 26일 순종은 충성스럽고 굳세다는 뜻의 충장(忠莊)이라는 시호를 내렸다.[1]
3. 가족 관계
장남 천상은 한성부좌윤과 오원도총관을 겸직하였고, 차남 천희는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이들 두 형제는 슬하에 각각 6남과 4남을 두어 한국 영양 천씨 10파의 기반을 마련했다.
4. 상훈 및 추모
숙종 때 조정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하여 종향(從享)하였다. 또한 고성의 호암서원(虎巖書院), 청도의 황강서원(皇岡書院), 문경의 노양각(魯陽閣), 진양의 만첨각(萬瞻閣), 안동의 동산서원(東山書院), 남원의 환봉사(環峰祠) 등 여러 곳에 배향되었다.
1910년 7월 26일에는 순종이 종헌의 뜻을 담아 충장(忠莊)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5. 저서
저서로 시 44수와 문 2편이 《사암천문집》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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