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칭 대공습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충칭 대공습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이 중화민국 임시 수도 충칭을 대상으로 감행한 대규모 전략 폭격이다.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지속된 이 공습으로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가옥 2만 채가 파괴되는 등 막대한 피해가 있었다. 일본군은 육군과 해군 항공대를 동원하여 다양한 기종의 폭격기를 투입했고, 중국군은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전투기로 이에 맞섰다. 1941년에는 방공호에서 질식사하는 대터널 참변이 발생하기도 했다. 전후,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으나, 일본 법원은 배상 청구를 기각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이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하자(난징 공략전),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정부는 1937년 11월 20일 충칭을 새로운 전시 수도로 결정했다. 한편, 일본 대본영은 광대한 중국 대륙에서의 지상전 확대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육로를 통한 공세 대신 국민정부를 굴복시키고 항복을 유도하기 위해[48] 새로운 수도 충칭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계획했다.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후 수도 난징이 함락되자,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같은 해 11월 20일 충칭을 전시 수도로 삼았다. 일본군은 국민정부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48] 1938년 2월부터 충칭에 대한 폭격을 시작했으며, 이는 점차 강도를 더해갔다.
2. 배경
2. 1. 중일 전쟁 발발과 국민정부의 충칭 천도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이 당시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했다(난징 공략전). 이에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 정부는 수도 기능을 한커우로 이전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세가 계속되어 한커우마저 함락되자, 국민정부는 더욱 내륙인 쓰촨성의 충칭으로 수도를 옮기기로 하고 1937년 11월 20일부로 충칭을 전시 수도로 결정하였다.
한편, 일본 대본영은 난징 공략전 이후 광대한 중국 대륙으로 더 깊숙이 진격하여 지상 전선을 확대하는 것이 일본의 국력과 전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대소련 관계 등 전반적인 국제 정세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여, 육로를 통한 추가적인 대규모 공세를 사실상 포기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2. 2. 일본군의 초기 폭격 계획과 무차별 폭격으로의 전환
1938년 12월 2일, 대본영은 중지나 방면군에게 항공 침공을 통해 적의 전략 중추를 공격하고 항공 격멸전을 수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당시 일본 육군과 해군은 즉시 대규모 폭격을 실행할 능력이 부족했고, 중국군 항공 부대의 요격 능력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에 따라 중앙 통수부는 현지 부대에 "항공 침공 작전은 대략 1939년 가을 이후에 실시할 예정이니, 각 부대는 이를 목표로 장비 정비와 훈련에 힘쓰라"고 전달했다.
초기 폭격에 사용된 이식 중폭격기(이탈리아 피아트사 제작 BR.20)는 가동률과 비행 성능이 떨어졌고, 93식 중폭격기는 방어 화력이 빈약하여 중국군의 요격이나 대공포화에 의한 피해가 늘어났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방비가 견고한 충칭에 대해서는 보다 신형 기종인 97식 중폭격기와 96식 육상 공격기를 주력으로 하는 육해군 항공 병력을 동원한 장거리 침공을 실시하게 되었다.
3. 경과
본격적인 폭격은 1938년 12월 26일 시작되었고, 1939년부터는 해군 항공대까지 가담했다. 초기 공습만으로도 1939년 5월까지 약 5,0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47] 특히 1939년 5월 초(이른바 '100호 작전')에는 대규모 폭격으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5·3·5·4 대공습'), 일본군이 소이탄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자 피해는 더욱 커졌다. 이에 미국은 일본에 항공기 부품 수출을 금지하며 첫 경제 제재를 가했다.[47][14]
1939년 여름부터 일본군은 중국 공군의 요격을 피하기 위해 야간 폭격을 늘렸고, 중국 공군은 지상 탐조등과 연계한 "외로운 늑대" 전술로 맞섰다. 1940년에 들어서면서 일본 해군은 '101호 작전'을 개시, 목표를 특정하지 않는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다. 또한, 성능이 향상된 신형 폭격기(G3M 모델 22/23)와 고속 정찰기(Ki-15)를 이용한 새로운 전술을 도입하여 제공권 장악을 시도했다.[15][16] 같은 해 6월 나치 독일의 프랑스 점령 이후, 일본은 비시 프랑스로부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비행장 사용을 허가받아 폭격 작전을 더욱 용이하게 수행했다. 7월에는 영국이 일본의 압력으로 버마 로드를 폐쇄하면서 중국의 보급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20] 1940년 9월 13일, 일본 해군의 최신예 전투기 A6M 제로가 처음 실전에 투입되어 중국 공군에 압도적인 피해를 입혔다(이른바 '제로 쇼크').[21][22][24]
1941년은 폭격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로, 일본군은 '102호 작전'을 통해 공세를 더욱 강화했다. 3월 14일 청두 상공에서는 대규모 공중전이 벌어져 중국 측의 피해가 컸으며,[25][26] 6월 5일에는 장시간의 폭격 중 방공호(제18제대터널)로 대피했던 시민들이 질식사하는 '6·5 대터널 참변'이 발생하여 약 1,200명[48]에서 4,000명[28]에 달하는 인명 피해가 났다. 8월 30일에는 일본 육군 제3비행단장 엔도 사부로 소장이 직접 장제스 총통 암살을 위한 정밀 폭격을 시도했으나, 격렬한 대공 포화로 5500m 상공에서 폭격하여 실패했다. 이 사건 이후 엔도 사부로는 폭격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충칭 폭격 무용론'을 상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한편, 1941년 여름 미국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대한 일본의 침공에 대응하여 대일 석유 금수 조치 등 강력한 제재를 단행했다.[27]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랜드리스 법 지원이 중국으로 확대되었고[29], 험프 루트를 통한 물자 수송이 시작되었다.[30][31] 일본의 전쟁 역량이 태평양 전선으로 집중되면서 충칭에 대한 공습은 점차 약화되었다. 미국의 지원과 신형 장비 도입으로 전력을 회복한 중국 공군은 1943년 8월 이후 제공권 다툼에서 점차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충칭에 대한 마지막 공습은 1943년 8월 23일(육군 항공대 기록) 또는 1944년 12월 19일(다른 기록)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1. 주요 작전
1938년 12월 2일, 일본 대본영은 화북·화중 폭격 계획에 관한 대륙명 제241호를 통해 "정략 중추를 제압하고 교란함과 동시에 적 항공 전력의 격멸"을 목표로 설정하고 해군과의 협동을 지시했다. 같은 해 12월 26일, 중지나 파견군의 요청으로 육군 항공병단이 한커우에서 출격하여 첫 폭격을 실시했다. 1939년부터는 해군 항공대도 폭격에 가담했다.
충칭은 중국의 중요 공업 도시였으며, 국민정부가 천도하기 전인 1938년 2월부터 이미 시험적인 폭격이 시작되었다. 폭격은 주로 시계 확보가 용이한 봄부터 가을 사이에 유시계 비행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집중되었다. 1940년 한 해에만 총 4333ton의 폭탄이 투하되었다.[38] 육군은 산시성 윈청에서, 해군은 후베이성 한커우 및 효감의 비행장에서 출격했다.
일본 육군 항공본부는 이미 1937년의 『항공 부대 용법』에서 주민을 직접 공격하여 공포심을 유발하고 전쟁 의지를 꺾는 정략 폭격을 전법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었다. 1938년 12월 26일 폭격 전날, 육군 제1비행단장 데라쿠라 소장은 "주력으로 충칭 시가지를 공격하여 적 정권의 상하를 뒤흔들겠다"는 지시를 내려, 초기부터 무차별 폭격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또한, 폭격 명령인 "대륙 지시 제345호" 제6항에서는 특수 연막탄 사용 시 시가지와 제3국인 거주 지역을 피하도록 명시했지만, 이는 시가지 폭격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초기에는 비행장, 군사 시설 등을 목표로 했으나, 충칭 특유의 안개와 흐린 날씨로 인해 정밀 폭격이 어려워 목표 외 민간 지역 피해가 빈번했다. 이로 인해 실질적인 무차별 폭격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목표 시설 파괴 효과가 미미하자, 일본군은 수도 기능 마비와 시민들의 반전 여론을 유도하기 위해 소이탄을 이용한 무차별 폭격으로 전환했다.[39] 당시 일본 신문들은 비행장, 군수 공장 등 군사 시설 파괴를 성과로 보도했지만, 1939년경 전투 상세 보고에는 공격 대상에 시가지가 명시적으로 포함되기 시작했다.
=== 100호 작전 (1939년) ===
1939년 5월 3일과 4일에 걸쳐 대규모 폭격이 감행되었다. 이는 '100호 작전'의 일부였다.
이 이틀간의 참혹한 폭격은 중국에서 "5·3·5·4 대공습"으로 불린다. 두 달 뒤, 일본군이 소이탄을 사용하여 수만 명을 추가로 살상하자 미국은 항공기 부품 수출을 금지하며 일본에 대한 첫 경제 제재를 가했다.[47][14]
1939년 여름부터 일본군은 중국 공군의 방어를 피하기 위해 야간 폭격을 늘렸다. 이에 중국 공군은 난징 전투에서 사용했던 "외로운 늑대" 전술(독일 공군의 Wilde Sau 전술과 유사)을 활용하여 야간 요격에 나섰다. 지상 탐조등으로 폭격기를 비추면 단독 전투기가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전투기 에이스 류저성은 1939년 8월 3일 밤, I-15bis를 몰고 이 전술로 폭격기 1대를 격추했으며, 이후에도 여러 대를 더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다음 날 밤에는 첸젤리우 대위 역시 야간 폭격기 격추를 보고했다. 소련 조종사 콘스탄틴 콕키나키는 당시 야간 공습 상황을 목격하고 "별이 빛나는 하늘을 쓸어버리는 거대한 불의 빗자루와 같았다"고 묘사했다.
=== 101호 작전 (1940년) ===
1940년 5월 18일부터 9월 4일까지 해군 항공대는 101호 작전을 개시하여 목표를 특정하지 않은 무차별 폭격을 지속했다. 육군 항공대도 이 작전에 일시적으로 협력했다.
1940년 중반, 일본 해군은 성능이 향상된 G3M 모델 22/23 폭격기를 주간 공습에 투입했다. 이 폭격기는 고출력 엔진(미쓰비시 킨세이)을 장착하여 속도와 고도 성능이 우수했고, 구식화된 중국 공군 전투기들(폴리카르포프 I-15, 폴리카르포프 I-16)은 효과적인 요격에 어려움을 겪었다.[15] 일본군은 또한 중국 공군의 조기 경보 시스템을 역이용하는 새로운 전술을 사용했다. 고속 정찰기(C5M/Ki-15)가 중국 전투기의 출격을 감시하고 폭격기 편대에 우회 기동을 지시했으며, 중국 전투기가 연료 부족으로 귀환하면 폭격기 편대가 다시 방향을 틀어 공격하는 방식이었다.[16] 중국은 곧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고 대응책을 마련했지만, 폴리카르포프 전투기의 성능 한계로 인해 요격 성공률은 여전히 낮았다.[17] 1940년 5월 20일, 20mm 기관포(ShVAK 기관포)를 장착한 신형 I-16 Type 17 전투기들이 C5M 1대와 G3M 3대를 격추했으나, 중국 측도 I-16 2대를 잃었다.[17]
1940년 6월,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비시 프랑스 정부는 일본의 요구에 굴복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현 베트남) 내 비행장 사용을 허가했다. 이를 통해 일본군은 윈난성 공격을 용이하게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6월 10일, 12일, 16일에는 각각 129대, 154대, 114대의 대규모 폭격 편대가 충칭을 공습했다. 중국 공군은 13대의 폭격기를 격추하고 일부 폭격기가 목표를 벗어나도록 강제했지만, 피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940년 7월, 영국이 일본의 압력에 굴복하여 버마 로드를 폐쇄하면서 중국의 물자 및 연료 보급선이 차단되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20]
1940년 8월 11일, 제4항공대 사령관 정사오유 소령은 에이스 조종사 류저성 대위, 가오유신 중위 등을 포함한 팀을 구성하여 옌레이 교관이 개발한 공중 폭발 폭탄을 이용한 요격 실험을 감행했다. 90대의 G3M 폭격기 편대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하여 편대를 분산시킨 뒤 공격을 가해 5대 격추(2대 확인)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중국 측 전투기 8대도 피해를 입었다.
1940년 9월 13일, 최신예 전투기인 A6M 제로가 처음으로 충칭 공습 호위 임무(폭격기 27대 호위)에 투입되었다. 신도 사부로 중위가 이끄는 13대의 제로기는 루이임췬 소령과 양멍징 대위가 이끄는 34대의 중국 공군 폴리카르포프 전투기 편대와 교전했다. 약 30분간의 공중전에서 제로기의 압도적인 성능 앞에 중국 공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일본 측은 27대의 중국 전투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으며, 중국 측은 조종사 10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했다. 가오유신 중위가 제로기 1대 격추를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4대의 제로기가 경미한 손상을 입었을 뿐이었다.[21][22] 이 사건은 중국 공군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이후 "제로 쇼크"로 알려지게 되었다.[24][22] 중국 공군 지휘부는 제로기와의 교전을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조종사들은 열악한 상황에서도 계속 맞서 싸웠다.
=== 102호 작전 (1941년) ===
1941년 5월 3일부터 8월까지 일본군은 102호 작전을 개시하여 충칭 폭격을 재개했다. 폭격 강도는 더욱 심해져, 육해군 합동으로 공습당 150~200대 이상의 폭격기가 동원되기도 했다.
1941년 3월 14일, 청두 상공에서 또다시 대규모 공중전이 벌어져 황신루이 소령, 천젤리우 대위, 그리고 건축가 린후이인의 남동생인 린헝 중위 등 8명의 중국 조종사가 전사했다.[25][26]
1941년 6월 5일, 5시간 동안 이어진 일본군의 폭격 중 공습을 피해 제18제대 터널로 피신했던 시민 약 4,000명 중 1,200여 명이 환기 불량으로 질식사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6·5 대터널 참변"으로 불린다.[48][28]
1941년 8월 11일, 진주만 공격 준비를 위해 제로기 부대가 중국 전선에서 철수하기 전 마지막 공중전이 벌어졌다. 일본 에이스 조종사 미야자키 기타로와 사카이 사부로 등이 포함된 제로기 편대가 중국 공군 기지를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중국 조종사 4명이 사망했다. 사망자 중 황롱파 중위의 약혼녀 양콴팡은 8월 16일 추모식에서 권총으로 자결했으며, 두 사람의 유해는 충칭 난산 공군 순교자 기념 공원에 합장되었다.[26]
1941년 8월 30일, 일본 육군 제3비행단장 엔도 사부로 소장은 장제스 총통의 회의 참석 정보를 입수하고, 205대의 폭격기를 동원하여 장제스가 머물던 윈슈 빌라에 대한 암살 폭격을 시도했다. 엔도 소장 자신이 직접 저공 정밀 폭격을 시도했으나 격렬한 대공 포화로 인해 고도를 높여 폭격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장제스 암살에는 실패했다.
엔도 사부로는 직접 폭격기에 탑승하여 융단 폭격으로 폐허가 된 구시가지 옆에 신시가지가 확장되는 것을 목격하고 폭격의 무의미함을 주장하며, 1941년 9월 3일 상급 부대장인 기노시타 사토시 중장에게 "충칭 폭격 무용론"을 제출했다. 이 주장은 일본 육군 참모본부 작전과에 전달되어 채택되었고, 이후 육군의 충칭 폭격 중단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해군 항공대의 충칭 폭격은 1941년 9월 1일 102호 작전 중단으로 종료되었으나, 육군 항공병단에 의한 폭격은 1943년 8월 23일까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고 한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이 참전하면서 중국에 대한 지원(랜드리스 법)이 강화되었고, 험프 루트를 통한 물자 수송이 이루어졌다.[30][31] 일본의 전쟁 초점이 태평양 전쟁으로 이동하면서 충칭에 대한 공세는 크게 약화되었다. 1943년 8월 이후, 레이더 등 신기술과 미국의 지원으로 강화된 중국 공군은 제공권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충칭 대공습의 마지막 공습은 1944년 12월 19일에 발생했다.
3. 2. 주요 전투 및 사건
1939년 5월 3일과 5월 4일, 일본군은 이른바 '작전 100호' 폭격 작전의 일환으로 충칭에 대규모 공습을 감행했다. 3일에는 54대, 4일에는 27대의 폭격기가 동원되어 고성능 폭탄(3일 98개)과 소이탄(3일 68개)을 집중적으로 투하했다.[47] 3일 공습으로 약 700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350명 이상이 부상했으며, 4일 새벽 공습에서는 3,000명 이상이 사망하고 거의 2,000명이 부상하는 등 이틀간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중국 측에서는 이를 "5·3·5·4 대공습"이라 부른다. 5월 3일 공습 당시, 덩밍더(鄧明德) 소령이 이끄는 중국 공군 제22추격대대의 폴리카르포프 전투기들이 요격에 나서 일본 폭격기 7대를 격추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부사령관이자 베테랑 조종사인 장밍셩(張明生) 등 조종사 2명을 잃는 피해를 입었다. 장밍셩은 격추 후 낙하산으로 탈출했으나 심한 화상을 입었고, 일본군 조종사로 오인받아 지상에서 공격당했으며, 4시간 뒤 구조되었으나 다음날 병원에서 사망했다. 5월 4일 새벽 공습 때는 중국 공군 기지의 야간 작전 준비 미비로 효과적인 요격이 이루어지지 못해 피해가 더욱 컸다.
1939년 여름부터 일본군은 중국 전투기의 요격을 피하고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야간 폭격을 시도했다. 이에 맞서 중국 공군은 지상 탐조등과 연계하여 단독으로 야간 요격 임무를 수행하는 이른바 "외로운 늑대" 전술(독일 공군의 Wilde Sau 전술과 유사)을 사용했다. 전투기 에이스 류저성(柳哲生)은 1939년 8월 3일 밤, I-15bis 전투기를 몰고 이 전술로 폭격기 1대를 격추했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야간 격추 기록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다음 날 밤에는 천젤리우(陳其光) 대위 역시 I-15bis로 야간 폭격기 격추를 기록했다.
1940년 중반, 일본 해군은 성능이 향상된 G3M 모델 22/23 폭격기를 주간 공습에 투입했다. 이 신형 폭격기는 속도와 고도 성능이 우수하여, 구형 전투기가 주력이던 중국 공군이 고속/고고도 폭격에 대응하기 매우 어려웠다.[15] 또한 일본군은 고속의 Ki-15 정찰기를 이용하여 중국 전투기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중국 전투기가 요격을 위해 상승하면 폭격 편대에 무선으로 연락하여 사정거리 밖으로 우회하도록 지시했다. 이후 중국 전투기가 연료 부족으로 기지로 복귀하면, 정찰기는 폭격 편대를 다시 유도하여 연료 보급을 위해 분산 착륙하는 중국 전투기를 공격하는 전술을 사용했다.[16] 중국은 곧 일본군이 사용한 암호를 해독했지만, 폴리카르포프 전투기로는 신형 G3M 폭격기를 효과적으로 요격하기 어려웠다.[17]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중국 공군은 1940년 5월 20일, 소수의 신형 I-16 Type 17 전투기로 일본 정찰기 1대와 폭격기 3대를 격추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I-16 2대가 손실되었다.[17]
1940년 8월 11일, 제4비행전대 사령관 정사오유(鄭少愚) 소령은 류저성, 가오유신(高又新) 등 정예 조종사들과 함께 옌레이펑(晏래풍) 교관이 개발한 공중 폭발 폭탄을 이용한 특수 작전을 감행했다. 접근하는 일본 폭격기 편대 위로 날아가 폭탄을 투하하여 편대를 분산시킨 후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이 작전으로 일본 폭격기 5대를 격추(2대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중국 전투기 8대도 피해를 입었다.
1940년 9월 13일, 일본 해군은 최신예 전투기인 A6M 제로센 13대를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하여 충칭으로 향하는 G3M 폭격기 27대를 호위했다. 신도 사부로(進藤三郎) 중위가 이끄는 제로센 편대는 정사오유 소령 등이 지휘하는 중국 공군의 I-15bis 및 I-16 전투기 34대와 교전을 벌였다. 약 30분간의 공중전 결과, 중국 공군은 압도적인 성능의 제로센에게 일방적으로 격파당하며 10명의 조종사가 사망하고 8명이 부상하는 등 참패를 겪었다. 일본 측 조종사들은 27대의 중국 전투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으며, 제로센은 4대가 약간 손상되었을 뿐 전원 무사히 귀환했다.[21][22] 정사오유 소령과 가오유신 중위는 다른 중국 전투기를 구하기 위해 제로기를 유인하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 중국 공군 지휘부는 제로센과의 교전을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중국 조종사들은 이후에도 불리한 상황 속에서 용감하게 맞서 싸웠다.
1941년 3월 14일, 청두 상공에서 또다시 대규모 공중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일본 제로센은 이전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전술을 사용했으며, 중국 공군은 황신루이(黃新瑞) 소령, 천젤리우 대위, 그리고 유명 건축가 린후이인의 남동생인 린헝(林徽因) 중위를 포함한 8명의 조종사를 잃는 비극을 겪었다.[25][26]
1941년 6월 5일, 일본군은 24대의 항공기를 동원해 5시간 동안 충칭을 폭격했다. 이때 공습을 피해 방공호인 제18제대터널로 피신했던 수많은 시민들이 과밀과 통풍 불량으로 인해 질식사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약 1,200명[48](다른 기록에는 약 4,000명[28])이 희생되었으며, "6·5 대터널 참변"으로 불린다.
1941년 8월 11일, 제로센 부대가 진주만 공격 준비를 위해 중국에서 철수하기 전 마지막 공중전 중 하나가 벌어졌다. 사카이 사부로 등 일본 에이스 조종사들은 원장 비행장에서 중국 공군의 I-153 및 I-16 전투기들과 교전했다. 사카이 사부로는 한 중국 조종사가 "스냅 롤, 나선형, 루프 및 마치 불가능한 기동으로 회전했다... 마치 유령처럼" 비행하며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격추했다고 기록했다. 이 전투에서 중국 조종사 4명이 사망했는데, 그중 황롱파(黃榮發) 중위의 약혼녀 양콴팡(楊全芳)은 그의 추모식에서 권총으로 자결하여 충칭 난산 공군 묘지에 합장되는 비극적인 일화가 남았다.[26]
1941년 8월 30일, 일본 육군 제3비행단장 엔도 사부로 소장은 장제스 총통이 참석하는 군사 회의 정보를 입수하고, 205대의 폭격기를 동원하여 장제스 암살을 시도했다. 엔도 소장은 직접 폭격기를 타고 장제스가 머물던 윈슈 빌라(雲岫別墅)를 정밀 폭격하려 했으나, "몇 번이나 좌석에서 밀려났다"고 할 정도로 격렬한 중국군의 대공 포화에 막혀 어쩔 수 없이 5500m 상공으로 고도를 높여 폭격해야 했다. 폭탄은 목표를 빗나가 빌라 서쪽에 떨어져 경비병 2명이 사망했을 뿐, 장제스 암살에는 실패했다. 엔도 소장은 자신의 일기에 총통 암살 실패와 더불어 국민들이 겪는 고통을 느꼈다고 기록했다. 이 작전 실패 후 엔도 사부로는 충칭 폭격의 효과에 회의를 느끼고 9월 3일 "충칭 폭격 무용론"(重慶爆擊無用論)을 상부에 제출했다.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일본군의 주력이 태평양 전선으로 이동하면서 충칭에 대한 폭격은 점차 줄어들었다. 미국의 랜드리스 지원과 험프 공수를 통한 보급, 신형 전투기 도입 및 조종사 훈련 강화로 중국 공군의 전력도 점차 회복되었다. 충칭 대공습의 마지막 공습은 일본 육군 항공대 기록으로는 1943년 8월 23일에 이루어졌으며, 다른 기록으로는 1944년 12월 19일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4. 일본군 및 중국군의 전력
제2차 중일 전쟁 초기, 중화민국 공군은 중앙 집권화된 지휘 체계 아래 이전 군벌들의 항공기와 조종사, 그리고 외국인 자원 조종사들을 통합하여 구성되었다. 초기에는 주로 미국산 항공기와 훈련 방식에 의존했으며, 이탈리아 및 일본 육군 항공대 교관의 영향도 받았다.[1] 그러나 중국은 당시 항공 산업 기반이 취약했고, 1937년 상하이 전투, 난징 전투, 타이위안 전투, 우한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막대한 항공 전력 손실을 입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7년 체결된 중소 불가침 조약은 중국 공군에게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었다. 1938년 초부터 중국 공군은 소련제 폴리카르포프 I-15 및 폴리카르포프 I-16 전투기로 기종을 전환하기 시작했으며,[2][3] 일부 구형 커티스 호크 III 전투기도 계속 운용했다.[4] 프랑스 자원 조종사들이 운용했던 듀보틴 D.510 전투기 등 다른 기종들도 있었으나, 성능의 한계로 미쓰비시 A5M과 같은 일본군 신형 전투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중국은 쿤룬 관 전투 승리로 버마 로드를 확보했지만, 남녕 전투 패배로 해상 보급로가 차단되는 등 일본의 봉쇄는 강화되었다. 유럽에서의 전쟁 발발 또한 중국으로의 물자 지원을 어렵게 만들었다. 중국 공군은 소련제 전투기의 성능 및 유지보수 문제에 더해, 일본군이 90+ 옥탄 연료를 사용하여 더 빠르고 높이 비행하는 신형 항공기를 대규모로 투입하면서 기술적 열세에 직면했다. 이는 당시 자체 항공 산업 기반과 고옥탄 연료 생산 능력을 갖춘 영국 공군 등이 성능 향상을 이룬 것과 대조적이었다.[5][6]
충칭 및 청두 방어 구역에서 중국 공군이 사용한 주요 비행 기지로는 바이시이, 펑황산, 광양바, 량산, 솽류, 쑤이닝, 타이핑시, 원장, 신진 등이 있었다.[7] 또한 1939년부터 1942년까지 충칭 주변에는 18개의 주요 대공포대가 배치되어 방공망을 구축했다.
한편, 일본 제국 육군 항공대는 1938년 초부터 충칭에 대한 탐색 공격을 시작했고, 일본 제국 해군 항공대는 당시 임시 수도였던 우한 등 주요 전선을 공습했다. 1939년 5월 3일 ''작전 100호''가 시작되면서, 일본군은 우한 등 새로 점령한 지역의 비행장을 발판 삼아 해군과 육군 항공대가 연합하여 충칭에 대한 대규모 폭격을 본격화했다.[10]
특히 1940년,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전투기로 평가받던 미쓰비시 A6M ''제로''가 실전에 투입되면서 일본은 제공권을 거의 완벽하게 장악하게 되었다.[11] 제로센의 등장은 성능이 뒤처지는 중국 공군에게 심각한 위협이었으며, 효과적인 대응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미국은 1941년 일본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공과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일본에 대한 석유 및 철강 금수 조치를 단행하고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본격화했다. "험프"로 알려진 히말라야 산맥을 넘는 항공 수송로를 통해 100 옥탄 항공 가솔린을 포함한 군수 물자가 중국으로 공급되기 시작했다. 미국 육군 항공대(USAAF)의 작전 지원도 이루어졌다. 미국은 중국 공군에 리퍼블릭 P-43 랜서 전투기를 제공했는데, 이 전투기는 고고도 성능과 강력한 화력을 갖추어 이론적으로는 일본군 항공기에 대항할 수 있는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심각한 신뢰성 문제로 인해 전투 중 손실보다 기체 결함으로 인한 사고가 더 많았으며, 제4비행단 지휘관 정소유 소령이 P-43 기체 화재로 인한 추락 사고로 사망하는 등 오히려 아군에게 피해를 입히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12][13]
4. 1. 일본군
1938년 12월 2일, 대본영은 중지나 방면군에 "항공 침공으로 적의 전략 중추에 공격을 가함과 동시에 항공 격멸전을 결행"하라는 지시(대륙명 제241호)를 내렸다.[38] 이는 충칭을 포함한 중국 후방 지역에 대한 대규모 폭격의 시작을 알리는 명령이었다. 초기에는 군사 시설을 목표로 한 정밀 폭격을 표방했으나, 충칭의 잦은 안개와 흐린 날씨로 인해 목표 식별이 어려워지면서 민간인 지역 피해가 속출했다.
주요 사용 항공기충칭 대공습에는 육군 항공대와 해군 항공대의 다양한 항공기가 동원되었다. 초기에는 성능이 떨어지는 구형 기체도 사용되었으나, 점차 신형 고성능 폭격기가 주력을 이루었다.
구분 | 기종 | 별명/코드명 | 주요 역할 | 운용 주체 |
---|---|---|---|---|
폭격기 | 미쓰비시 G3M | 넬 | 중(中)폭격기 (96식 육상공격기) | 해군 |
미쓰비시 Ki-21 | 샐리 | 중(重)폭격기 (97식 중폭격기) | 육군 | |
피아트 BR.20 | 루스 / 치코냐스 | 중폭격기 (이식 중폭격기) | 육군 | |
가와사키 Ki-48 | 릴리 | 경폭격기 | 육군 | |
미쓰비시 G4M | 베티 | 중폭격기 | 해군 | |
아이치 D3A | 발 | 급강하 폭격기 | 해군 | |
기타 | 나카지마 B5N (케이트), 미쓰비시 Ki-67 (페기), 나카지마 Ki-49 (헬렌), 요코스카 P1Y (프랜시스) | 폭격기/공격기 | 육군/해군 | |
전투기 | A6M 제로센 | 제로 | 호위/제공 전투기 | 해군 |
정찰기 | C5M (Ki-15) | 바브스 | 정찰/경폭격기 | 해군/육군 |
전술 변화와 무차별 폭격초기의 정밀 폭격 시도는 기상 조건과 중국군의 방어로 인해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일본군은 점차 민간인 거주 지역을 포함한 무차별 폭격으로 전술을 전환했다. 특히 소이탄을 대량으로 사용하여 도시 전체를 불태우고, 시민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어 항전 의지를 꺾으려 했다.[39]
1939년 5월 3일과 4일에는 ''작전 100호''라는 이름 아래 대규모 공습이 감행되었다. 이틀간 수백 톤의 폭탄과 소이탄이 투하되어 수천 명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수많은 가옥이 파괴되었다. 중국에서는 이를 "5·3·5·4 대공습"이라 부르며 당시의 참상을 기억하고 있다. 중국 공군은 폴리카르포프 I-15와 폴리카르포프 I-16 전투기 등으로 요격에 나섰으나 역부족이었고, 많은 조종사들이 희생되었다.
일본군은 중국 전투기의 요격을 피하기 위해 1939년 여름부터 야간 폭격을 시작했다. 이에 중국 공군은 탐조등을 이용해 야간에 침투하는 폭격기를 비추고 단독 전투기가 요격하는 "외로운 늑대" 전술을 사용해 일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940년 중반부터는 성능이 향상된 미쓰비시 G3M 모델 22/23 폭격기가 주간 폭격에 투입되었다. 이 폭격기들은 고고도 고속 비행 능력을 갖추어 구식화된 중국 전투기들의 요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15] 또한, 일본군은 고속 정찰기 C5M (Ki-15)을 이용해 중국 전투기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폭격기 편대에 회피 기동을 지시하는 기만 전술을 사용하기도 했다.[16]
A6M 제로센 투입과 제공권 장악 시도1940년 9월 13일, 일본 해군은 최신예 전투기인 A6M 제로센을 충칭 공습 호위에 처음 투입했다. A6M 제로센은 당시 중국 공군의 주력 전투기였던 폴리카르포프 시리즈보다 월등한 성능을 자랑하며 제공권 장악을 시도했다. 이날 공중전에서 중국 공군은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A6M 제로센의 압도적인 성능 앞에 큰 피해를 입었다. 10명의 조종사가 사망하고 다수의 전투기가 격추되거나 파손되었다.[21][22] 이 사건 이후 중국 공군은 A6M 제로센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용감하게 맞서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1941년 3월 14일 청두 상공에서 벌어진 공중전에서는 황신루이 소령, 천젤리우 대위 등 8명의 조종사가 전사하는 비극이 발생했다.[25][26]
작전 101호, 102호와 폭격 강화1940년 5월부터 시작된 ''작전 101호''와 1941년 5월부터 시작된 ''작전 102호''는 충칭에 대한 폭격을 더욱 강화하는 작전이었다. 특히 해군 항공대는 목표를 특정하지 않고 도시 전체를 파괴하는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다. 육군 항공대도 이에 협조하여 공습당 150~200대 이상의 폭격기가 동원되기도 했다.
이 시기 폭격은 극도로 잔혹해져, 1941년 6월 5일에는 장시간의 공습을 피해 방공 터널로 대피했던 시민 약 4,000명이 질식사하는 참사가 발생하기도 했다.[28] 일본군은 충칭 내 외국 공관에 안전 구역으로 이동할 것을 통보했지만, 독일 대사관조차 폭격을 피하지 못했다.[18][19]
1941년 8월 30일에는 엔도 사부로 육군 소장이 직접 폭격대를 이끌고 장제스 총통 암살을 시도했으나, 강력한 대공 방어와 부정확한 폭격으로 실패했다.
충칭 폭격 무용론과 폭격 축소무차별 폭격의 비인도성과 비효율성에 대한 비판은 일본군 내부에서도 제기되었다. 특히 ''작전 101'', ''102''를 지휘했던 엔도 사부로 소장은 폭격 효과가 미미하고 연료 소모만 심하며 국제법에도 위반된다는 이유로 "충칭 폭격 무용론"을 주장했다. 그는 직접 폭격기에 탑승하여 폐허가 된 구시가지 옆에 신시가지가 건설되는 모습을 확인하고 폭격의 무의미함을 역설했다. 이 주장은 일본 육군 상층부에 받아들여져 이후 육군의 충칭 폭격 중단에 영향을 미쳤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군의 주력 항공 부대와 자원이 태평양 전선으로 이동함에 따라 충칭에 대한 폭격은 점차 축소되었다. 미국이 연합국으로 참전하면서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랜드리스)이 증가했고, 중국 공군도 신형 전투기와 레이더 장비 등을 도입하며 방공 능력을 강화했다.[30][31] 이후에도 산발적인 공습은 계속되었으나, 대규모 폭격은 점차 줄어들었다. 마지막으로 기록된 공습은 1944년 12월 19일이었다.
4. 2. 중국군
5. 피해
일본군의 충칭에 대한 공습은 1938년 2월부터 1943년 8월까지 이어졌으며, 특히 1939년부터 1942년 사이에 집중되어 약 3000ton의 폭탄이 투하되었다.[28] 총 268회의 공습으로 도시 기반 시설과 민간인에게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공식 집계에 따르면 사망자 1만 명 이상, 부상자 1만 4천 명 이상, 소실·파괴된 가옥은 2만여 채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40][41]
중국 측은 충칭의 지형을 활용하여 다수의 방공호(방공동)를 건설하고 피난 조직을 운영하는 등 대응에 나섰으나,[42] 대규모 공습 앞에서 한계에 부딪혔다. 1941년 6월 5일에는 방공호 내에서 질식 및 압사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는 비극(충칭 터널 학살 사건)도 있었다.
일본군은 중국군의 고사포를 피해 4000m에서 5000m의 고고도에서 폭격을 감행했으며, 야간 폭격을 주로 실시하여 군사 목표 외 민간인 지역까지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41] 이러한 무차별 폭격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정부를 굴복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5. 1. 인명 피해
1939년 5월까지 이어진 공습으로 5천여 명의 중국 민간인이 사망하였다.[47] 1938년 2월부터 1943년 8월까지 전체 공습 기간 동안의 피해는 사망자 11,889명, 부상자 14,100명, 소실·파괴 가옥 2만여 채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40] 일본의 군사 저널리스트 마에다 테츠오는 사망자 1만 1천 명에서 1만 8천 명, 부상자 4만 명으로 추산하기도 했으며,[41] 중국 연구자 장산은 중국 내 연구에서는 사망자가 2만 명, 부상자가 3만 명을 넘는다는 결과도 있다고 지적했다.[41]특히 1941년 6월 5일에는 일본군 항공기 24대가 5시간 동안 폭격을 가했는데, 이때 충칭 시내의 제18제대터널 방공호로 피신했던 시민들이 너무 많아 내부 통풍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1,200여 명이 질식사하는 참사가 발생했다.[48] 이 사건은 '6·5 대터널 참변'으로 불리며, 당시 미흡한 피난 시설과 공습 상황 속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비극적인 사례이다. 도시 전략 폭격이라는 미증유의 사태 앞에서 사람들의 대처는 미흡했고, 방공호에 피난민이 몰리면서 압사나 질식으로 인한 사망자가 다수 발생했다.
5. 2. 재산 피해
1939년부터 1942년까지 충칭에는 총 3000ton의 폭탄이 투하되었으며,[28] 총 268회의 공습이 이루어졌다. 이 폭격으로 인해 1938년 2월부터 1943년 8월까지 소실되거나 파괴된 가옥은 2만여 채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40]사진작가 칼 마이던스는 1941년 봄의 폭격을 당시 "도시를 대상으로 한 가장 파괴적인 포격"이라고 묘사했지만,[32] 제2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면서 공포 폭격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예를 들어 베를린 공방전 당시 연합군은 단 하룻밤에 베를린에 2300ton의 폭탄을 투하하기도 했다.[33]
일본군 폭격기 부대는 고사포의 사정거리를 피해 4000m에서 5000m 고도에서 폭격했으며, 특히 초기 96식 육공은 더 높은 고도로 비행하기 어려웠고 제로센과 같은 장거리 호위 전투기도 부족했다. 이 때문에 적의 요격 전투기를 피하고자 야간 공격을 주로 실시하게 되었는데, 이는 군사 목표에 대한 정확한 조준을 어렵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무차별 폭격으로 이어지는 한 원인이 되었다.[41] 이러한 무차별적인 폭격은 도시의 기반 시설과 민간인 거주 지역에 막대한 재산 피해를 입혔다.
5. 3. 사회적 영향
1938년 2월부터 1943년 8월까지 이어진 일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충칭 시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총 268회의 공습이 이루어졌으며, 사망자 11,889명, 부상자 14,100명, 소실·파괴된 가옥은 2만여 채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40] 군사 저널리스트 마에다 테츠오는 사망자를 1.1만에서 1.8만 명, 부상자를 4만 명으로 추산하기도 했으며, 중국 연구자 장산은 사망자가 2만 명, 부상자가 3만 명을 넘는다는 연구 결과를 언급하기도 했다.[41]당시 충칭에는 수많은 난민이 몰려들었다. 중국 측은 경사가 많은 사암 지형을 이용해 1937년부터 방공호(현지에서는 방공동이라 불림) 건설을 계획했다. 주로 지하 70m 부근에 다수가 굴착되었으며, 여러 지선 터널을 갖춘 대형 터널 7개를 포함하여 공공용 600개, 사적인 용도 500개, 차량·창고용 100개 등 총 1,200여 개의 방공호가 마련되어 약 45만 명의 시민을 수용할 수 있었다.[42] 또한 중국 측은 피난 대책, 공습 시 교통 정리, 장시간 피난 시 식량 및 생필품 지급을 담당하는 '배도공습복무총부대'와 등화 관제, 피난 유도, 구조, 소방 등을 담당하는 '방호단'을 조직하여 대응했다. 이들은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다 순직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도시 전체를 대상으로 한 전략 폭격이라는 미증유의 사태 앞에서 시민들의 의식이나 대처는 충분하지 못했다. 특히 1941년 6월 5일에는 공습을 피해 방공호로 피난민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수많은 사람이 압사하거나 질식사하는 참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관련 사건: 충칭 터널 학살 사건) 이는 당시 라이프지의 사진작가 칼 마이던스에 의해 기록되기도 했다.[32]
일본군 폭격기 부대는 중국군의 대공포 사거리를 피하기 위해 고도 4000m에서 5000m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했으며, 특히 적의 요격 전투기를 피하기 위해 야간 공격을 주로 감행했다. 이러한 부정확한 야간 폭격은 군사 목표뿐만 아니라 민간인 거주 지역까지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막대한 민간인 피해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41]
6. 전후 논의 및 소송
당시 충칭에서 직접 폭격을 경험한 미국인 저널리스트 에드가 스노는 일본군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공중 폭격만으로는 부족하며 지상 부대의 충칭 진입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장훙펑은 이러한 스노의 견해가 엔도 사부로의 주장과 일치한다고 평가했다. 요시다 고지에 따르면, 당시 일본 육군과 해군 부대는 장기간의 충칭 전략 폭격으로 항공 연료와 전쟁 물자를 크게 소모했으며, 약 80만 명에 달하는 육군 지상 병력 또한 소련-만주 국경부터 중국 대륙 각지에 분산되어 있어 충칭에 병력을 집중시켜 국민정부의 수도를 점령할 여력이 없었다고 분석된다.
6. 1. 국제법 위반 논란과 전쟁범죄 비판
마에다 데쓰오 前田哲男일본어는 일본군의 도시 무차별 폭격이 미군의 도쿄 대공습이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망설임을 약화시켰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요시미 슌야 吉見俊哉일본어는, 마에다가 공습으로 인해 외국 자산에 피해가 발생했을 경우 오폭의 결과라는 형식을 일본군이 취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무차별 공격을 하면서도 끝까지 표면상으로는 "충칭 시내외 군사 시설 공격"이라는 명분에 집착했다고 말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43] 요시미는, 충칭에는 구미 각국의 외교 기관이나 기업 지사, 교회, 병원이 많이 입지해 있었고, 일본 측은 공습을 반복하면서도 구미의 여러 시설에 피해가 미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일본 측은 무차별 공격을 부정하고 그 형식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1940년 6월에는 일본 정부가 안전 지대를 지정하고 구미 영사관이 그곳으로 이전하도록 권고하기도 했다.한편, 쓰촨성 충칭, 러산, 쯔궁, 청두에서 일본군 폭격으로 인한 피해자 188명은 당시 일본군의 폭격 행위를 국제법 위반으로 간주하여,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일본 측 협력자를 얻어 2006년부터 2009년까지 4차례에 걸쳐 소송을 제기했다. 국가 무책임의 법리에 의해 원고는 패소했지만, 법정 의견은 충칭 폭격은 무차별 폭격이었고, 당시의 국제 관습법에 위반되었다고 판시했다.[44]
6. 2. 피해자 소송과 일본 법원의 판결
쓰촨성 충칭, 러산, 쯔궁, 청두 등지에서 일본군의 폭격으로 피해를 입은 피해자 188명은 당시 일본군의 폭격 행위가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하며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다. 이들은 일본 내 협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총 4차례에 걸쳐 소송을 제기했다.그러나 국가 무책임의 법리에 따라 원고는 최종적으로 패소했다. 다만, 일본 법원은 판결 과정에서 충칭 폭격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폭격이었으며, 이는 당시의 국제 관습법에 명백히 위반되는 행위였다는 점을 인정했다.[44]
7. 한국의 관점
충칭 대공습은 일본 제국주의가 중일 전쟁 기간 중 저지른 대표적인 비인도적 전쟁 범죄로 평가된다. 특히 민간인 거주 지역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격은 당시의 국제 관습법을 명백히 위반한 행위였다는 점에서 한국에서도 강하게 비판받는다.
쓰촨성 등지의 피해자들이 제기한 충칭 대폭격 배상 청구 소송에서 일본 법원은 비록 국가 무책임의 법리를 들어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지만, 충칭 폭격 자체가 국제법에 위반되는 무차별 폭격이었음은 인정하였다[44]. 이는 일본 사법부가 과거 침략 전쟁 당시 자행된 불법 행위를 일부 시인한 사례로서 의미가 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일본의 과거 침략 행위와 전쟁 범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역사적 사실에 대한 책임 있는 자세와 반성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7. 1. 충칭 폭격과 한국 독립운동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충칭 폭격과 한국 독립운동' 섹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해당 섹션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7. 2.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평가
마에다 데쓰오 前田哲男일본어는 일본군의 도시 무차별 폭격이 미군의 도쿄 대공습이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망설임을 약화시켰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요시미 슌야 吉見俊哉일본어는, 마에다가 공습으로 인해 외국 자산에 피해가 발생했을 경우 오폭의 결과라는 형식을 일본군이 취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무차별 공격을 하면서도 끝까지 표면상으로는 "충칭 시내외 군사 시설 공격"이라는 명분에 집착했다고 말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43]。요시미는, 충칭에는 구미 각국의 외교 기관이나 기업 지사, 교회, 병원이 많이 입지해 있었고, 일본 측은 공습을 반복하면서도 구미의 여러 시설에 피해가 미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일본 측은 무차별 공격을 부정하고 그 형식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1940년 6월에는 일본 정부가 안전 지대를 지정하고 구미 영사관이 그곳으로 이전하도록 권고하기도 했다.당시 혼자 충칭에서 취재를 하면서 충칭 폭격을 체험한 미국인 저널리스트 에드가 스노는, 충칭 폭격을 통해 일본군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늘뿐만 아니라 지상 부대의 충칭 돌입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장훙펑 張鴻鵬중국어은 스노의 이 지적이 앞서 언급한 엔도 사부로 遠藤三郎일본어의 주장과 일치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요시다 고지 吉田曠二일본어에 따르면, 당시 "일본 육해군 부대는 장기간에 걸친 충칭 전략 폭격으로 그 항공 연료와 전쟁 자원을 소모했고, 80만 명의 육군 지상 부대도 소만 국경에서 중국 대륙 각지에 분산된 채여서, 도저히 충칭에 집중하여 적의 수도에 돌입할 여력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한편, 쓰촨성 충칭, 러산, 쯔궁, 청두에서 일본군 폭격으로 인한 피해자 188명이 당시 일본군의 폭격 행위를 국제법 위반으로 간주하여,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일본 측 협력자를 얻어 2006년부터 2009년까지 4차례에 걸쳐 소송을 제기했다. 국가 무책임의 법리에 의해 원고는 패소했지만, 법정 의견은 충칭 폭격은 무차별 폭격이었고, 당시의 국제 관습법에 위반되었다고 판시했다[44]。 이는 일본 사법부가 충칭 대공습의 불법성을 일부 인정한 사례로 평가된다.
참조
[1]
웹사이트
World War 2 Flying Ace Arthur Chin's Amazing True Story
https://disciplesoff[...]
2020-12-10
[2]
웹사이트
China's Air Forces in the Struggle Against Japan
http://worldatwar.ne[...]
2021-03-31
[3]
웹사이트
China Lost 14 Million People in World War II. Why Is This Forgotten?
https://psmag.com/ne[...]
2021-01-03
[4]
웹사이트
Shanghai 1937 – Where World War II Began
http://www.shanghai1[...]
2021-05-13
[5]
간행물
Aces of the Republic of China Air Force
Osprey Publishing
2015
[6]
웹사이트
Gassed up: The juice that fuelled victory in the Battle of Britain
https://legionmagazi[...]
2020-11-16
[7]
웹사이트
Chongqing issues 'Chongqing Airport History Map' – Chongqing News – CQNEWS_English
http://english.cqnew[...]
2020-11-16
[8]
웹사이트
The Shanghai Incident, 1932
https://pacificeagle[...]
2020-12-28
[9]
웹사이트
The Mitsubishi A6M Zero
http://www.airvector[...]
2020-12-28
[10]
웹사이트
Operation 100: The Bombing of Chungking
https://pacificeagle[...]
2020-12-04
[11]
웹사이트
Japan's World War II Zero Fighter Terrified the Allies
https://nationalinte[...]
2020-11-16
[12]
웹사이트
The 1 Reason Imperial Japan Attacked Pearl Harbor: Oil.
https://nationalinte[...]
2020-11-16
[13]
웹사이트
The Hump: Death and Salvation on the Aluminum Trail
https://www.historyn[...]
2020-11-16
[14]
서적
Hirohito and the Making of Modern Japan
[15]
문서
[16]
웹사이트
Mitsubishi Ki-15 Type 97 / C5M Type 98 "Babs"
https://pacificeagle[...]
2020-11-12
[17]
문서
[18]
웹사이트
Operation 101: Chungking, the Underground City
https://pacificeagle[...]
2020-11-13
[19]
웹사이트
The Chongqing Bombing and the foreign embassies in Chongqing during wartime
http://www.galileiin[...]
2021-03-29
[20]
문서
[21]
문서
[22]
간행물
Dealing with the Japanese Zero
https://www.jstor.or[...]
[23]
문서
[24]
웹사이트
Pearl Harbor Scourge: Mitsubishi A6M Zero
https://visitpearlha[...]
2020-12-09
[25]
웹사이트
314 Air Battle over Shuangliu
https://air.mnd.gov.[...]
2020-12-08
[26]
문서
[27]
간행물
War in the Pacific – Strategy and Command: The First Two Years
2020-11-13
[28]
서적
China-Burma-India
https://archive.org/[...]
Time-Life
[29]
웹사이트
How Much of What Goods Have We Sent to Which Allies? {{!}} AHA
https://www.historia[...]
2021-01-08
[30]
웹사이트
Forgotten theater' pilot recalls crossing Himalayas
https://www.tampabay[...]
2020-12-10
[31]
웹사이트
Over the Hump to China
https://www.airforce[...]
2020-12-09
[32]
서적
China-Burma-India
https://archive.org/[...]
Time-Life
[33]
웹사이트
World War 2 Timelines 1939–1945 – European Air War 1944
http://www.worldwar-[...]
2019-03-03
[34]
뉴스
Chongqing bombing victims sue
http://www.japantime[...]
2013-01-03
[35]
서적
世界戦争犯罪事典
"[[文藝春秋]]"
2002-08-10
[36]
서적
日中戦争全史
高文研
2017-07-18
[37]
서적
中國方面陸軍航空作戦
https://www.nids.mod[...]
朝雲新聞社
2024-10-26
[38]
서적
昭和史の事典
東京堂出版
[39]
서적
[40]
서적
重庆大轰炸 1938-1943
重庆出版社
1992-07
[41]
서적
[42]
뉴스
重慶の防空壕 死相をもった洞窟
1941-08-20
[43]
웹사이트
"「空襲」と「植民地主義」はいかにして結びついてきたか? その意外な歴史(5/5)"
https://gendai.media[...]
講談社
2023-01-21
[44]
웹사이트
加害と被害の事実は東京地裁が認定――重慶大爆撃裁判で原告敗訴
https://www.kinyobi.[...]
週刊金曜日株式会社
2024-04-20
[45]
웹사이트
戦争のはじまり重慶爆撃は何を招いたか|NNNドキュメント
https://www.ntv.co.j[...]
日本テレビ
2023-08-14
[46]
뉴스
충칭 대폭격 생존자의 증언: 일본비행기의 폭격 뒤에 본 참기 어려운 광경(重庆幸存者见证:日机轰炸后惨不忍睹)
http://www.cq.xinhua[...]
신화통신사
2005-07-27
[47]
서적
Hirohito and the Making of Modern Japan
[48]
서적
미래를 여는 역사
한겨레출판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