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루스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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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켈루스 궁은 포르투갈 문화의 마지막 황금기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18세기 바로크-로코코 양식의 영향을 받아 건설되었다. 17세기 초 카스텔 로드리고 후작의 소유였으나 왕실 사냥터로 사용되다가, 1747년 마테우스 비센테 드 올리베이라의 지휘 아래 건설이 시작되었다. 1755년 리스본 지진으로 공사가 중단되었지만, 지진에 대비한 설계 변경과 새로운 양식이 가미되어 1758년 재개되었다. 궁전은 기하학적인 디자인과 양파 돔 형태의 예배당, 로비용 날개, 정원, 내부 장식 등으로 유명하며, 1957년부터는 국가 원수 영빈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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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루스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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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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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궁전 |
건축 양식 | 로코코 건축, 신고전주의 건축 |
위치 | 포르투갈 리스본 지구 신트라 켈루스 |
좌표 | 38°45′11″N 9°15′34″W |
역사 | |
건설 시작 | 1747년 |
완공 | 1794년 |
건축가 | 마테우스 비센트 드 올리베이라 장바티스트 로빌리옹 마누엘 카에타누 드 소우사 |
소유자 정보 | |
소유주 | 포르투갈 정부 |
운영 기관 | 포르투갈 문화부 |
공개 여부 | 공개 |
기타 정보 | |
문화재 지정 | 포르투갈 국가 기념물 |
2. 건축과 역사
켈루스궁은 18세기 포르투갈 건축 양식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1690년 브라질에서 대량의 황금이 발견된 이후, 포르투갈은 경제적 번영과 함께 문화적 전성기를 맞이했다. 켈루스궁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건축미를 자랑한다.
궁전 건축은 1747년 주제 1세의 동생인 동 페드루 왕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여름 별궁으로 계획되었으나, 1755년 리스본 지진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재개되면서 왕실의 주요 거처 중 하나로 그 역할이 확대되었다.
1777년 마리아 1세 여왕과 페드루 3세가 공동 통치를 시작하면서 켈루스궁은 국정 운영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이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상수시 궁전을 사용했던 방식과 유사하다.[7]
켈루스궁은 원래 카스텔 로드리고 후작 마누엘 드 모라 이 코르테 레알의 소유였으나,[8] 1640년 포르투갈 복원 전쟁 이후 왕실에 몰수되었다. 주앙 4세는 이곳을 왕실 사냥터로 사용하다가 둘째 아들에게 물려주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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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건축 양식
켈루스 궁전의 건축은 1690년 브라질에서 대량의 황금이 발견된 이후 포르투갈 문화의 마지막 황금기를 대표한다.[4] 18세기가 시작되면서 많은 외국 화가와 건축가가 초빙되었고, 풍요로운 귀족 사회가 꽃피웠다. 르네상스 양식의 고전적인 가구를 사들이는 한편, 이탈리아에서 영향을 받은 바로크-로코코 양식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켈루스 궁전은 크기와 상관없이 웅장하고 고상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이유로 베르사유 궁전과 비교되기도 한다. 궁전은 주제 1세 때 건설이 시작되었다. 당시 포르투갈은 폼발 후작 세바스티앙 드 멜루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그는 왕가의 흔적을 지우고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고자 했다. 이는 당시 포르투갈 지배 계층이 누렸던 삶을 그대로 반영한다.
폼발 후작 세바스티앙 드 멜루이 물러나고 동 페드루와 그의 부인 마리아 1세가 1777년 왕위를 계승하면서 궁전도 자연스럽게 부부가 차지하게 되었다.
궁전은 원래 카스텔 로드리고 후작 마누엘 드 모라 이 코르테 레알의 소유였다. 그러나 1640년 포르투갈 복원 전쟁으로 스페인이 포르투갈에서 쫓겨나자, 후작은 스페인에 협력했다는 죄목으로 소유권을 몰수당했다. 이후 주앙 4세 대까지 포르투갈 왕실에서 궁전과 사냥을 위해 사용하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그는 후계자였던 둘째 왕자를 위해 켈루스 궁을 계속 물려주었고, 그 왕자가 동 페드루였다.
건축은 1747년에 시작하여 1755년까지 빠르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1755년 1755년 리스본 지진으로 공사가 중단되었고, 대다수의 기술자가 궁의 재건축을 권고하였다. 재건축은 포르투갈 내의 미술 양식을 한층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또 다른 지진을 대비한 기술이 마련되었고, 당대에 꽃피웠던 다른 유럽 국가의 새로운 양식도 가미되었다. 그 결과, 후에 지어진 건물은 기존 건물과는 다른 모습으로, 좀 더 복합적인 전각 형태를 띠며 거리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특징을 갖게 되었다.[11]
건축가 마테우스 비센테 드 올리베이라는 마프라 궁전과 수도원 건설 당시 주앙 프레데리코 루도비체의 지도를 받았다.[10] 더 크고 어둡고 고전적인 마프라는 켈루스의 디자인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켈루스는 더 가볍고 산뜻한 스타일이다.

3. 외부
궁전은 도시의 광장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기하학적인 디자인을 택하였다. 남쪽 부속 건물은 양파 모양처럼 둥그런 돔형을 하고 있다. 반면 북쪽은 하인과 부엌 건물이 위치한다. 전체적인 외부 장식은 거추장스러움을 피하였으며 극도로 고전적인 멋에 치중하려는 면모를 볼 수 있다.[4]
켈루스궁의 건축 양식은 18세기 초부터 많은 외국 예술가와 건축가들이 포르투갈에서 고용되면서, 르네상스 건축에서 파생된 고전적인 건축 아이디어를 가져와 발전시켰다. 켈루스의 디자인은 유럽 전역에서 로코코 건축 양식에 앞선 초기 이탈리아풍의 무겁고 과장된 바로크 건축에 대한 반란이다.
베르사유 궁전은 "웅장함의 아우라"를 가지고 있으며 "프랑스의 모든 영광"을 돌에 새기기 위해 건설되었고 헌정된 반면,[5] 켈루스의 작은 궁전은 "웅장하기보다는 절묘하다"고 묘사되었으며 "매우 비싼 생일 케이크"처럼 보였다.[6] 켈루스 건축 양식의 경박함은 건설 당시 포르투갈 왕가가 영위했던 생활 방식을 반영한다. 주앙 1세의 동생인 브라간사 가문의 페드루가 통치하던 시기였다. 이때 포르투갈은 사실상 폼발 후작 세바스티앙 드 멜루에 의해 통치되었다. 폼발은 왕족들이 시국은 그에게 맡기고 시골에서 시간을 보내도록 장려했다. 따라서 켈루스의 사치스럽고 거의 기발한 건축물은 인근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의 건축물과 매우 다르며, 이 시대의 정치 및 사회적 사건과 거주자들이 누렸던 자유롭고 화려한 삶을 나타낸다.
제안된 여름 휴양지로 선택된 부지는 외딴 곳에 위치했다.[8] 원래는 카스텔 로드리고 후작 마누엘 드 모라 이 코르테 레알 소유였다. 1640년 통치하던 스페인 사람들이 포르투갈 복원 전쟁으로 인해 포르투갈에서 쫓겨나자, 후작은 스페인과 협력한 혐의로 기소되었고 그 재산은 포르투갈 왕실에 의해 몰수되었다. 이 영지와 사냥터는 그 후 포르투갈 왕 주앙 4세의 많은 재산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그것을 재위 중인 군주의 둘째 아들을 위해 따로 지정했다.[9] 그리하여 이 재산은 주앙 5세의 둘째 아들인 브라간사의 페드루의 손에 들어갔다.
건축가 마테우스 비센테 드 올리베이라는 마프라 궁전과 수도원 건설 당시 주앙 프레데리코 루도비체와 장-밥티스트 로빌리옹|Jean-Baptiste Robillon프랑스어의 지도를 받았다.[10] 더 크고 어둡고 고전적인 마프라는 켈루스의 디자인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켈루스는 더 가볍고 산뜻한 스타일이다.
공사는 1747년에 시작되어 1755년까지 빠르게 진행되었으나, 그 해에 1755년 리스본 지진으로 중단되었고, 그 후 노동자들은 리스본 재건에 더 시급하게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진은 촉매 역할을 했으며, 도시 재건 과정이 포르투갈의 예술 발전을 자극했다. 켈루스의 이후 건축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개념의 영향을 받았다. 1758년에 공사가 재개되었을 때, 또 다른 지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설계가 변경되었다. 따라서 궁전의 후기 작업은 하나의 높은 블록보다 구조적으로 더 안정적인 낮고 긴 건물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멀리서 보면 궁전은 하나의 구조물보다는 높은 파빌리온에 의해 연결된 일련의 긴 앙필라드처럼 보인다.[11]
궁전의 공공 파사드는 마을 광장을 직접 마주하고 있으며, 작은 중앙 ''코르 드 로지''의 앞으로 뻗어나가는 날개를 곁들여 반원형의 ''명예의 안뜰''을 형성하는 두 개의 낮고 대칭적인 사분원 날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남쪽 사분원 날개는 양파 돔의 예배당으로 끝나고, 북쪽 날개에는 부엌과 하인 구역이 있다.[12] 이 파사드의 유일한 장식은 창문 위에 있는 단순한 고전적인 박공에서 나온다.
1760년, 폼발은 조제 1세의 형제인 브라간사의 페드루가 조제 1세의 딸이자 왕위 계승자인 마리아와 결혼하도록 주선했다. 그 후 폼발은 부부에게 정부 청사에서 떨어진 켈루스의 미완성 궁전에 자녀들과 함께 살도록 권장했다. 그곳은 부부가 가장 좋아하는 휴양지였으며 마리아 1세의 즉위 전 그들의 주요 거주지였다. 궁전이 시골 휴양지에서 왕궁으로 승격된 것을 반영하기 위해 더 많은 추가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여왕은 즉위 후 폼발을 해고했다. 그녀는 통치하는 군주로서 시간을 시골에서 보낼 시간이 없다고 느꼈다. 페드루 3세는 국사에 거의 관여하지 않고 종교 문제와 사냥에 시간을 보내는 것을 선호했다.[13]
1786년 페드루 3세가 사망할 무렵, 모든 내부 공사가 완료되었다.[14] 그러나 남편의 죽음 이후 여왕의 정신 건강이 극적으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1794년까지 그녀와 그녀의 궁정은 켈루스에 공식적이고 풀타임으로 거주하여 여왕이 신하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했다. 그녀의 장남이자 미래의 포르투갈 국왕인 주앙 6세가 섭정으로 임명되었고, 리스본의 마프라 궁전에서 그녀를 대신하여 통치했다.[15]
2004년, 세계 기념물 기금은 영국 조각가 존 치어의 납 조각상과 정원의 다른 특징을 복원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진행 중이다.
4. 내부
켈루스궁의 내부는 외부만큼이나 세부적인 묘사와 디자인에 많은 신경을 썼다. 프랑스 장인들이 방을 장식하기 위해 고용되었으며, 많은 방들은 규모가 작았고 벽과 천장에는 우화적이고 역사적인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 그려졌다. 윤이 나는 붉은 벽돌은 소박한 느낌을 주고 더운 날씨에 방을 시원하게 유지하기 위해 바닥재로 자주 사용되었다. 궁전의 다양한 하부 날개를 연결하는 많은 높은 파빌리온은 더 높고 밝은 방들로 나뉘어진 길고 낮은 일련의 방을 가능하게 했다. 내부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다색 아줄레주 유약 타일로, 종종 중국풍 스타일로 파란색과 노란색이 톤 다운된 빨간색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내부 전체에 사용된 다른 재료로는 제노바에서 수입한 돌, 브라질, 덴마크, 스웨덴에서 가져온 목재,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색깔 있는 대리석 등이 있다.[17]
1934년 대화재로 궁전의 많은 방들이 심하게 손상되어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다.
4. 1. 주요 공간
켈루스궁의 주요 공간은 크게 공식적인 공간과 개인적인 공간으로 나뉜다.공식적인 공간은 주로 궁전의 중앙 부분에 위치하며, 대규모 행사나 의전을 위해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공간은 다음과 같다.
- 갤러리 (살라 다스 망가스): 1934년 대화재 때 유일하게 보존된 공간으로, 타일 벽 패널로 장식되어 있다. 국빈 아파트의 유일한 방으로, 국빈실로 이어진다.
- 응접실 (살라 도스 엠바샤도르스): '대사들의 방'이라고도 불리며, 1757년 로빌론이 설계하였다. 천장에는 프란시스쿠 드 멜루가 마리아 1세 통치 기간 동안 포르투갈 왕족이 콘서트에 참석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 있다. 바닥은 흑백 대리석 타일의 체커보드 패턴이다.[23]

- 음악실: 1768년에 재설계되었으며, 금박을 입히고 칠한 나무로 장식되어 있다. 카세르타 궁전의 현관과 유사한 섬세하고 골이 있는 디자인의 천장이 특징이다.[18]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18세기 후반 바로크-로코코 시대 이후에 재설계되었음을 반영한다. 방에는 금박 장식이 있는 엠파이어 양식의 그랜드 피아노가 있으며, 마리아 1세의 초상화가 피아노 위에 걸려 있다.

- 무도회장: 1760년 로비용이 설계하였으며, 다섯 개의 작은 방을 합쳐 만든 타원형 방이다. 벽과 천장에는 오르몰루 로코코 장식이 짙은 금박 형태로 되어 있다.[21]
- 경당: 켈루스 궁에서 가장 먼저 완공된 공간 중 하나로, 1752년에 축성되었다. 밝은 색조와 실베스트르 파리아 로보가 제작한 조각, 로코코 양식의 파이프 오르간이 특징이다.

개인 공간은 공식적인 공간보다 작고 아늑하며, 왕실 가족 구성원들의 개인적인 생활을 위해 사용되었다.


- 왕의 침실: 돔형 천장과 거울 유리 기둥으로 인해 원형으로 보이는 방이다. 돈 키호테의 이야기 장면을 묘사한 카르투슈가 있다. 페드루 4세가 태어나고 사망한 방이기도 하다.


4. 1. 1. 갤러리 (살라 다스 망가스)
'''살라 다스 망가스'''(Sala das Mangas)는 켈루스궁 내부의 갤러리로 쓰이는 곳이다. 1934년 대화재 때 유일하게 보존된 공간으로, 주요 방과 연결되어 있으며 지금은 복원되어 있다.''살라 다스 망가스''는 타일 벽 패널로 장식된 긴 갤러리이며, 1934년 화재에서 온전하게 살아남은 국빈 아파트의 유일한 방이다. 이 갤러리는 국빈실의 일련의 방들로 이어지며, 이 방들은 모두 완전히 복원되었다. 궁전의 정식 방들은 ''살라 도스 엠바샤도르스'', 음악실, 무도회장 등 세 개의 큰 홀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작은 방으로는 사냥 모임이 열리곤 했던 건룸이 있는데, 이곳은 필리멘이 나무와 잎을 그려 넣은 프레스코화 살롱이다.
4. 1. 2. 응접실 (살라 도스 엠바샤도르스)
응접실은 대개 거울의 방 혹은 왕좌의 방으로 불리는 곳으로서 1757년 로빌론이 설계하였다. 포르투갈어로는 "살라 도스 엠바샤도르스(Sala dos Embaixadores)"(대사들의 방)라고 불린다.[23] 이 방은 기다랗게 지어졌으며 프란시스쿠 드 멜루가 천정에 마리아 1세 통치 기간 동안 포르투갈 왕족이 콘서트에 참석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을 그렸다. 방은 매우 넓고 밝으며 궁전의 전체 너비를 가로지르며 양쪽에 높은 창문이 있다. 각 창문 사이에는 반원형 금박 콘솔 테이블이 있고, 그 위에는 크리스탈 벽걸이 램프로 장식된 피어 글라스가 있다. 앱스에 설치된 왕좌 다이는 금박을 입힌 거울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바닥은 흑백 대리석 타일의 체커보드 패턴이다.[23]4. 1. 3. 음악실
음악실은 응접실 형태를 따랐으며 금이나 다른 색 재료로 칠한 나무 재료를 사용했다. 천장은 소용돌이 무늬로 장식된 기법을 따랐다. 정교한 디자인 계획으로 유명하다. 다른 방에 비해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르며, 18세기 후반 바로크-로코코 양식을 따르고 있다. 원래 이 방은 큰 콘서트를 위해 마련되었다. 지금도 엠파이어 그랜드 피아노가 있으며 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있다.[19]음악실은 '대사들의 방'(Sala dos Embaixadores) 다음으로, 금박을 입히고 칠한 나무로 장식되어 있으며 1768년에 재설계되었다. --은 카세르타 궁전의 현관과 유사한 섬세하고 골이 있는 디자인으로 유명하다.[18] 음악실은 다른 국빈실보다 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18세기 후반 바로크-로코코 시대 이후에 재설계되었음을 반영한다. 이 방은 궁전에서 열렸던 대규모 콘서트 장소였다.[19] 방에는 여전히 금박 장식이 있는 엠파이어 양식의 그랜드 피아노가 있다. 피아노 위에는 마리아 1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궁전의 다른 많은 방과 마찬가지로 음악실은 대형 크리스탈 샹들리에로 조명이 밝혀진다.
4. 1. 4. 무도회장
켈루스 궁전의 가장 큰 세 개의 방 중 마지막 방인 무도회장은[20] 1760년 로비용에 의해 설계되었다. 건축가는 다섯 개의 작은 방을 합쳐 이 타원형 방을 만들었다.[21] 벽과 천장에는 오르몰루 로코코 장식이 짙은 금박 형태로 되어 있는데, 그 화려함은 프랑수아 드 퀴빌리에가 님펜부르크 궁전에 지은 아말리엔부르크와 비교될 정도이다. 벽과 문에는 거울이 설치되어 있고, 칠하고 금박을 입힌 캐세트 천장은 황금 여인상이 받치고 있다.[22]4. 1. 5. 경당
돔 페드로가 머물던 때 경당은 모든 궁정 인사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가장 처음으로 완공된 곳이기도 하며 신성시되었던 곳이다. 종교는 돔 페드로가 가장 관심있던 것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나 남편이 죽자 마리아는 마리아 1세로 즉위하였고 궁전의 축제를 그만두어버렸다. 켈루스 궁 내에서도 경당이 그녀가 세상 일에서 벗어나 남편과의 일을 떠올렸던 곳이 되었다. 1807년 브라질로 망명하기 전까지 주로 머물던 곳도 이곳이었지만 그녀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1816년 죽었다.경당 아래에는 양파 돔이 있고 조각을 한 목재로 장식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밝은 색조를 띠는데 붉은 색, 녹색, 파란, 분홍 등 여러 계열의 색이 잘 나타나 있다. 포르투갈 조각가 실베스트르 파리아 로보가 제작했다. 로코코 양식의 파이프 오르간이 있다. 켈루스 궁을 마리아 1세 여왕과 페드루 3세 국왕이 사용하던 동안, 예배당은 그들의 궁정의 일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예배당이 궁전에서 가장 먼저 완공되어 1752년에 축성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페드루 3세가 사망한 후, 여왕은 국빈 접견이 종교 의식의 분위기를 띠게 되었다. 여왕의 정신 질환은 심각해졌고 그녀의 종교적 열정은 더욱 커졌다. 상층에는 왕족이 사용할 수 있는 갤러리가 있으며, 그들은 회중과 떨어져 앉았다. 이 갤러리 중 하나에는 작은 로코코 파이프 오르간이 있다. 예배당의 특징은 화려하고 휴대 가능한 세례대이며, 그 대리석 분지는 정교한 로코코 프레임에 놓여 있으며, 조각된 나무 덮개로 덮여 있다.[24]
4. 1. 6. 개인 공간
궁의 개인 공간은 공식적인 국가 공간보다 훨씬 작고 아늑하며, 이전 거주자들의 --이 많이 보관되어 있다. 이 스위트룸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방으로는 '메렌다스 홀', 여왕의 부두아, 왕의 침실 등이 있다.메렌다스 홀은 왕족의 개인 식당이었다. 이 방의 장식은 더 격식 있고 공식적인 공간에서 사용된 주제를 이어받아, 전원적인 모습을 묘사한 타일 패널로 이루어져 있다. 이 패널들은 궁궐의 다른 많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주앙 발렌팀과 조제 콘라도 로자가 제작했다.[25]
여왕의 부두아는 마리아 1세가 켈루스궁에서 머무는 동안 사용했던 사적인 방 중 하나였다. 아치형 정자 형태로 설계되었으며, 천장에는 격자무늬가 있고, 이는 상감세공 바닥의 디자인에도 반영되어 내부라기보다는 페르골라에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사적인 방의 상감세공 바닥은 더 크고 공식적인 방들과 구별되는데, 이러한 섬세한 특징들은 더 잦은 사용으로 인해 손상되었을 것이다. 부두아르의 벽은 거울로 장식되어 있으며, 조제 콘라도 로자가 제작한 문 위와 거울의 카르투슈가 있다.[26] 부두아르 옆에는 여왕의 침실이 있다. 1794년 궁전을 방문한 윌리엄 베크포드는 정신 질환을 앓던 여왕의 비명 소리가 이 밝고 통풍이 잘 되는 방에서 들렸다고 전했다.[27]
왕의 침실은 궁전에서 가장 "환상적인" 방 중 하나로 묘사되어 왔다. 실제로는 사각형이지만, 거울 유리 기둥으로 지탱되는 돔형 천장으로 인해 완전히 둥근 형태의 환상을 준다. 기둥 사이에는 돈 키호테의 이야기 장면을 묘사한 카르투슈가 있다. 페드루 4세 국왕은 1834년 이 방에서 사망했으며, 그는 1798년 이 방에서 태어났다. 방에는 그의 "늘어진 턱과 매력적이지 않은 얼굴"을 보여주는 국왕의 큰 흉상이 있다.
5. 정원
켈루스 궁은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하다. 화단과 길을 배치한 정원은 여러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네덜란드 정원가가 전체 조성을 맡아 플랑드르 미술의 영향을 받았다. 테라스와 복도에는 조각상과 분수대가 있어 더욱 멋을 더한다. 정원 내 전각은 기하학적 요소를 중시했으며, 18세기 의복을 입은 스핑크스 상 2개도 볼 수 있다. 정원에는 리스본 인근 최초의 인공 폭포도 있다.
베르니니가 만든 트리톤과 돌고래 장식 분수대가 있으며, 정원 하부에도 비슷한 분수대가 있다. 정원에는 주로 오디 나무, 주목, 사이프러스를 심었다.[31]
궁전 뒤편에는 앙드레 르 노트르 양식의 토피어리 파테르가 있다. 1760년부터 로빌론을 도운 네덜란드 정원사 헤랄드 판 데르 콜크는 정원의 수로를 포함하여 플랑드르의 영향을 주었다.[28] 조각상과 분수는 테라스와 산책로에 특별한 흥미를 더한다. 주요 파테르의 주요 특징은 ''포르티코 도스 카발리뇨스''인데, 명성을 묘사한 기마상 2개와 18세기 의상을 입은 스핑크스 2개가 있는 정원 사원이다. 이는 공식적인 것과 환상적인 것을 결합한 것이다.[29] 정원 곳곳에는 사비니 여인의 강간과 아벨의 죽음, 인간 의상을 입은 당나귀 조각상 등이 있다. 정원 깊숙한 곳에는 폭포가 있는 동굴이 있는데, 켈루스 폭포는 리스본 근처에 건설된 최초의 인공 폭포였다.
거대한 목련 가로수는 궁전의 로빌론 윙으로 이어지고, 이중 계단은 수로로 이어진다. 100m가 넘는 수로의 벽은 해양 풍경을 묘사한 타일 패널로 장식되어 있다. 이곳은 시누아즈리 스타일의 아줄레주 타일로 테두리가 있는 수로 중 가장 크다. 시냇물로 공급되는 수로의 수문은 5월에만 열린다. 18세기에는 이 수로가 ''페트 샹페트르''의 무대였으며, 배들이 알레고리 의상을 입은 인물과 함께 행렬을 이루어 항해했다.[30]
하부 정원에는 존 치어의 조각상을 포함한 분수와 조각상이 있다. 정원은 나폴레옹 전쟁 중 장-앙도슈 주노가 심은 주목(Taxus baccata), 사이프러스, 목련, 뽕나무 울타리 안에 있다.[32]
6. 그 이후의 역사
1794년 아유다 궁전 화재 이후, 섭정 주앙 6세와 그의 부인 카를로타 조아키나 데 에스파냐는 켈루스 궁전을 사용했다. 로빌론 날개는 확장되었고, 공주와 그녀의 아홉 자녀를 위해 상층이 추가되었으나,[33] 1934년 화재로 파괴되었다.
1807년 나폴레옹 1세의 군대를 피해 포르투갈 왕가는 켈루스 궁전을 떠나 포르투갈 궁정의 브라질 이주를 통해 브라질로 도망쳤다. 프랑스 점령군은 궁전을 장악했고, 사령관 장-앙도슈 쥐노는 건물에 몇 가지 변경을 가했다. 1821년 왕가가 망명에서 돌아온 후, 주앙 6세는 마프라 궁전에 거주하는 것을 선호했고, 그의 아내 카를로타 조아키나 여왕은 이모 마리아 프란시스카 베네디타 공주와 함께 켈루스 궁전에 거주했다. 국왕은 켈루스 궁전을 드물게 방문했으며, 1826년 그 드문 방문 중 한 번은 둥근 돔 형태의 왕의 침실에서 사망했다.
카를로타 조아키나는 야심만만하고 폭력적이었다고 전해진다.[34] 그녀는 켈루스 궁전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했으며, 윌리엄 토머스 베크퍼드가 유럽 최고의 오케스트라라고 묘사한 오케스트라를 고용했다. 여왕은 또한 정원에 작은 개인 극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녀는 1830년 궁전에서 사망했다.
카를로타 조아키나 사후 켈루스 궁전은 왕실 거주지로 간헐적으로 사용되었고, 다시 포르투갈 왕족의 주요 거주지가 되지는 못했다. 주앙 6세와 카를로타 조아키나의 아들 미겔 1세는 형이자 전 국왕인 페드루 4세와 포르투갈 왕위 계승 문제를 두고 벌인 포르투갈 내전 (3년간의 내전) 동안 궁전을 사용했다. 페드루 4세는 당시 브라질 황제 페드루 1세였으며, 1834년 미겔 1세를 퇴위시키고 망명하도록 강요했다. 1년 후, 페드루 4세는 켈루스 궁전에서 35세의 나이로 결핵으로 사망했다. 켈루스 궁전은 그의 출생지였다. 페드루 4세의 딸 마리아 2세는 1853년 사망할 때까지 통치했고, 그녀의 아들 페드루 5세가 계승했다. 1861년 콜레라 유행으로 페드루 5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왕위는 그의 동생 루이스 1세에게 넘어갔다. 이때부터 왕가는 주로 리스본의 재건된 아유다 궁전과 신트라의 페나 궁전에 거주했고, 켈루스 궁전은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리스본 왕실 암살 사건으로 루이스의 아들 카를루스 1세가 1908년 암살되자 궁전은 국가 소유로 넘어갔다. 포르투갈은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1910년 10월 5일 혁명으로 2년 후 군주제가 무너졌다.
7. 국가 기념물
켈루스 궁전은 18세기 포르투갈 문화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바로크-로코코 양식이 유럽 전역에 퍼져나가던 시기에 지어졌다. 웅장함으로 인해 베르사유 궁전과 비교되기도 한다. 궁전은 주제 1세 때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당시 포르투갈은 폼발 후작의 지배하에 있었다.
원래 카스텔루 호드리구 후작의 소유였으나, 1640년 스페인이 포르투갈에서 쫓겨난 후 몰수되어 왕실의 사냥터로 사용되었다. 주앙 4세는 이 궁전을 둘째 왕자에게 물려주었고, 그 왕자가 동 페드루였다.
건축은 1747년에 시작되어 1755년에 빠르게 완공되었으나,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인해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재건 과정에서 포르투갈 내 미술 양식이 발전하고, 지진 대비 기술과 새로운 유럽 양식이 도입되었다.
궁전의 공공 파사드는 마을 광장을 마주하고 있으며, 반원형의 ''명예의 안뜰''을 형성하는 두 개의 낮고 대칭적인 사분원 날개 형태를 취하고 있다.[12] 남쪽 사분원 날개는 양파 돔의 예배당으로, 북쪽 날개에는 부엌과 하인 구역이 있다.
올리베이라pt는 궁전의 핵인 "코르 드 로지"의 "의례용 파사드"와 내부 안뜰을 담당했다. 그의 스승이었던 프랑스인 장-밥티스트 로비용은 정원, 건물, 로코코 양식 실내를 담당했으며, 장-밥티스트 필르망(Jean-Baptiste Pillement) 등 다른 예술가들의 도움을 받았다. "의례용 파사드"는 트래버틴 렌더링과 창문 위 카르투슈로 장식되어 있으며, "포르투갈 바로크 양식의 조화로운 예"로 묘사된다.
로비용 날개는 궁전의 주요 부분 중 하나로, 1779년에 완공되었다. 도리아식 열주가 특징이며, 지붕은 난간 발코니로 이루어져 있다. 로비용 날개에는 독창적인 계단을 통해 궁전으로 들어갈 수 있다.
1760년, 폼발은 조제 1세의 형제인 브라간사의 페드루와 조제 1세의 딸 마리아의 결혼을 주선했다. 폼발은 부부에게 켈루스 궁전에서 살도록 권장했고, 이곳은 그들의 주요 거주지가 되었다. 1786년 페드루 3세가 사망할 무렵 내부 공사가 완료되었으나, 남편의 죽음 이후 여왕의 정신 건강이 악화되었다. 1794년부터 여왕과 궁정은 켈루스에 거주했고, 주앙 6세가 섭정으로 임명되어 마프라 궁전에서 통치했다.[15]
2004년, 세계 기념물 기금은 존 치어(John Cheere)의 납 조각상과 정원의 다른 특징을 복원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1940년부터 박물관으로 공개되었으며, 가구, 아르라이올루스 카펫, 그림, 중국 및 유럽 세라믹 및 도자기 등 왕실 소장품을 소장하고 있다.
궁전이 마주하고 있는 타운 광장인 ''Largo do Palácio de Queluz''는 18세기 이후 비교적 변하지 않고 있다. 구 왕실 경비대 숙소와 종탑은 여전히 궁전 주변에 있다.
켈루스 마을은 리스본 교외 중 하나로 확장되었으며, 켈루스 궁전은 리스본 광역권의 주요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8. 국빈 영빈관
1957년 마리아 1세 여왕 파빌리온은 방문하는 국가 원수 및 정부 수반을 위한 포르투갈 정부의 공식 국빈 영빈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개조되었다.[35] 엘리자베스 2세의 국빈 방문은 파빌리온을 국빈 영빈관으로 개조하는 주요 동기였다.[35]
오늘날 파빌리온은 계속해서 방문하는 고위 인사를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국빈실은 사전 예약된 투어 동안에만 일반에 공개된다.[3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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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ímbolos e política externa a visita da rainha Isabel II a Portugal em 1957
https://www.academ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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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a I Pavillion with a guided visit
https://www.parquesd[...]
2024-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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