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룸반외방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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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콜룸반외방선교회는 1918년 아일랜드에서 설립된 로마 가톨릭 선교 단체이다. 에드워드 갈빈 신부의 주도로 중국 선교를 목표로 시작되었으며, 이후 필리핀, 한국, 미얀마, 일본 등 아시아 지역과 라틴 아메리카, 파키스탄 등으로 선교 지역을 확장했다. 선교회는 '극동' 잡지를 발행하고, 신학교를 운영하며, 순교자를 배출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현재는 자원 감소로 인해 일부 지역 지원을 철회하는 등 변화를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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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룸반외방선교회 | |
---|---|
개요 | |
![]() | |
유형 | 교황청립 사도 생활 단체 (남성) |
본부 | 아일랜드 공화국 미스 주 나반 달간 파크 |
좌표 | 53.609144, -6.631916 |
수호 성인 | 성 콜룸반 |
웹사이트 | 콜룸반회 공식 웹사이트 |
설립 | |
설립일 | 1918년 6월 29일 |
설립 장소 | 아일랜드 메이누스, 공식화: 로마 |
설립자 | 에드워드 갤빈 신부, 존 블로윅 신부 |
구성원 | |
회원 수 | 420명 (2017년) |
리더십 | |
총장 | 안드레이 파스 신부 |
명칭 | |
라틴어 | Societas Sancti Columbani pro Missionibus ad Exteros (외방 선교를 위한 성 콜룸반회) |
약칭 | S.S.C.M.E. |
2. 설립 배경 및 초기 역사
1912년 중국 저장성에 도착한 에드워드 갈빈 신부는 4년간 선교 활동을 펼쳤다. 그는 현지인들의 가난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영적 빈곤' 상황에 깊은 인상을 받고, 아일랜드 지인들에게 도움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1916년, 패트릭 O'Reilly 신부와 조셉 O'Leary 신부가 갈빈의 사역에 합류했다. 이들은 개인적인 노력만으로는 광범위한 선교 요구에 부응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보다 조직적인 접근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동료들의 권유로 갈빈은 새로운 선교 단체 설립을 위해 아일랜드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4]
1916년 6월, 갈빈은 미국을 경유하여 아일랜드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여정 중 만난 주교들과 사제들에게 자신의 구상을 설명하며 지지를 확보했다. 그해 8월 아일랜드에 도착한 그는 모교인 메이누스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회원 모집을 시작했다. 지역 보좌 신부 토마스 로이네인의 소개로 신학교 교수 존 블로윅을 만나 그의 동참을 이끌어냈는데, 블로윅은 이후 선교회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아일랜드 도착 두 달 만에 갈빈은 5명의 사제를 추가로 확보하여, '메이누스 중국 선교회'라는 이름으로 출발할 조직의 초기 멤버는 총 8명이 되었다.[4]
2. 1. 아일랜드에서의 설립
콜룸반 외방 선교회는 아일랜드 출신의 에드워드 갈빈 신부(1882–1956, 나중에 주교가 됨)의 영감으로 시작되었다.[1] 갈빈 신부는 젊은 시절부터 선교사로서의 삶을 꿈꿨지만, 부모님의 염려로 잠시 미루어야 했다.[1] 그는 고향인 코크 교구의 사제가 되기 위해 더블린 근처의 성 패트릭 대학교(흔히 메이누스 신학교로 불림)에 입학했고, 1909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1]당시 코크 교구에는 사제가 충분했기 때문에, 갈빈 신부는 담당 주교의 제안에 따라 미국 뉴욕시의 브루클린 로마 가톨릭 교구에서 잠시 봉사하게 되었다.[1] 브루클린의 홀리 로사리 교구에서 활동하던 중, 그는 중국으로 돌아가려던 캐나다 사제 존 M. 프레이저를 만났다.[1] 갈빈 신부는 프레이저 신부에게 중국 선교에 대한 자신의 깊은 관심을 이야기했고, 브루클린 공립 도서관에서 중국에 관한 자료를 찾아 읽으며 선교의 꿈을 키웠다.[1] 그는 프레이저 신부와 함께 중국으로 가기를 원했고, 결국 주교의 허가를 받아 1912년 2월 25일 중국을 향해 떠났다.[1] 이는 훗날 콜룸반 외방 선교회 설립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
2. 2. 교황청 승인
갈빈은 그의 제안을 교황청에 제출하여 승인을 받았다. 갈빈과 블로윅은 1917년에 이 단체의 기반을 다졌다. 현재 성 콜룸반 외방 선교회로 명명된 이 단체는 1918년 6월 29일 로마에서 공식적인 승인을 받았다. 선교를 위한 새로운 단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아일랜드에 즉시 새로운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미국에서는 곧 네브래스카주 오마하 근처에 지부가 열렸고, 몇 년 안에 또 다른 신학교가 문을 열었다. 1920년까지 이 선교회는 40명의 사제와 60명의 신학생으로 성장했다.3. 중국 선교 (1920-1954)
1918년 6월 29일 교황청의 공식 승인을 받은 성 콜룸반 외방 선교회는 아일랜드와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 근처에 신학교를 설립했다.[4] 1920년까지 선교회는 40명의 사제와 60명의 신학생으로 성장했으며, 에드워드 갈빈 신부가 이끄는 첫 선교팀이 한양 지구(오늘날의 우한)에 파견되어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갈빈은 1923년 한양 자치구의 사도 지청장으로 임명되었고, 1927년에는 승격된 한양 사도 대목구의 사도 대리로 임명되어 주교로 서품되었다(이후 1946년 교구로 승격).
선교사들은 활동 초기부터 기근, 홍수 등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간의 국공 내전으로 인한 극심한 사회적 혼란에 직면했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군벌이 세력을 키웠고, 선교 기지는 강도들의 위협에 시달렸으며 물품 도난과 선교사 납치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1929년 7월 15일, 티모시 레오나드 신부가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며칠 후 살해당했으며, 코르넬리우스 티어니 신부 역시 납치되어 3개월간의 가혹한 억류 끝에 사망하는 등 순교자가 발생했다.
1932년 가을,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군대가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하면서 잠시 안정을 되찾기도 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선교 활동은 이어졌고, 콜룸반회의 한 회원은 "공포 시대가 오히려 이 지역 가톨릭교회에 대한 호소력을 강화시킨 것 같다"고 기록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가톨릭 신앙에 관심을 보였다. 1933년 교황청은 선교회에 새로운 담당 지역을 맡겼고, 패트릭 클리어리 신부가 난청 사도 대목구(난청 현)를 담당하게 되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시작되면서 선교회는 민간인과 군인 모두를 돌봐야 했으며,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에도 대처해야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국 출신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송환되거나 가택 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군이 장제스의 국민당을 격파하고 중국 대륙을 장악할 것이 확실시되었다. 1946년 교황청은 후저우 지역 선교를 콜룸반회에 추가로 위임했다. 3년 후인 1949년, 공산당이 해당 지역을 장악한 이후 선교회 활동은 큰 제약을 받게 되었다. 여러 콜룸반 회원들이 투옥되었으며, 결국 모든 콜룸반회 사제와 수녀들이 추방당했다. 갈빈 주교와 클리어리 주교는 1952년에 추방되었다.
1954년까지 중국에서 활동하던 146명의 콜룸반 회원 전원이 '영구 추방'되었다. 갈빈 주교는 1952년 9월 19일, 40년간의 선교 활동을 뒤로하고 '범죄자'라는 낙인과 함께 영국령 홍콩으로 넘어가야 했으며, 추방된 지 3년 반 후 선종했다.
4. 선교 지역 확장
1929년부터 선교회는 기존의 중국 중심 선교에서 벗어나 활동 범위를 넓히기 시작했다. 필리핀 (1929년)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1933년), 버마 (1936년), 그리고 일본 (1948년)으로 선교 지역을 확대했다.
1950년대 들어 중국 본토에서의 선교 활동이 어려워지자[5], 선교회는 새로운 선교지를 모색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요청에 응답하여 페루와 칠레에 선교사를 파견했으며, 피지 (1952년)에서도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에도 선교 지역 확장은 계속되어 파키스탄, 타이완, 브라질, 자메이카, 벨리즈 등지로 진출했다. 그러나 자원 감소 등의 문제로 벨리즈, 자메이카, 브라질에서는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다.
4. 1. 필리핀 선교 (1929-)
콜룸반외방선교회는 1929년에 필리핀에서의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50년에는 필리핀에서 활동하던 콜룸반 팔론(Fallon), 헤네건(Heneghan), 켈리(Kelly), 모나한(Monaghan) 신부가 순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마닐라 순교자'로도 불린다.4. 2. 한국 선교 (1933-)
콜룸반외방선교회는 1933년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한국 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는 선교회 소속 신부 7명(콜리어(Collier), 라일리(Riley), 매긴(Maginn), 캐너번(Canavan), 브레넌(Brennan), 커색(Cusack), 오브라이언(O'Brien))이 순교하였다.
전쟁 이후에도 한국 사회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으며, 대표적으로 제주도에 성이시돌목장을 설립하고 지적 장애인 거주 시설인 사회복지법인 무지개공동회를 운영하는 등 사회복지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4. 3. 미얀마 선교 (1936-1979)
콜룸반외방선교회는 1936년에 미얀마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활동을 이어갔으나 1979년에 미얀마에서 철수하였고, 중단되었던 선교 활동은 2016년에 미얀마(구 버마)에서 재개되었다.4. 4. 일본 선교 (1948-)
콜룸반외방선교회는 1948년에 일본에서의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이는 필리핀 (1929), 대한민국 (1933), 버마 (1936)에 이어 아시아 지역에서의 선교 범위를 확대한 것이다.4. 5. 기타 지역 선교
1950년대 중국 본토가 선교사들에게 문을 닫게 되자, 선교회는 새로운 선교지를 모색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요청에 따라 1952년 페루와 칠레의 새로운 도시 정착지에 선교사를 파견했으며, 같은 해 피지 교회의 요청에 응답하여 피지에서도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이후 선교회는 활동 영역을 더욱 확장하여 1979년에는 파키스탄과 대만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파키스탄에서는 펀자브 지방의 로마 가톨릭 라호르 교구 주교의 요청으로 처음 활동을 시작했으며, 1983년부터는 신드 지방의 로마 가톨릭 하이데라바드 교구에서도 사역을 이어갔다. 1985년에는 브라질, 1986년에는 자메이카와 벨리즈로 진출했다.
그러나 선교 자원의 감소로 인해 벨리즈, 자메이카, 브라질에서의 활동은 중단되었다. 한편, 선교회는 초기에 중국 선교를 지원하기 위해 수년 동안 호주에서도 활동한 바 있다.[5]
5. 주요 인물
콜룸반외방선교회는 아일랜드 출신의 에드워드 갈빈 신부(훗날 주교)의 영감으로 설립되었다. 젊은 시절부터 선교사의 꿈을 꾸었던 갈빈은 성 패트릭 대학교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후, 미국 브루클린 로마 가톨릭 교구를 거쳐 1912년 중국으로 떠났다. 그는 존 블로윅 신부와 함께 1917년 선교회의 기반을 다졌으며, 1918년 교황청의 공식 승인을 받았다. 갈빈 주교는 초대 한양 교구장을 지냈다.
초기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기근, 홍수, 국공 내전 등 극심한 혼란과 군벌, 강도들의 위협 속에서 활동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고난을 겪었으며, 티모시 레오나드 신부(1929년)와 코르넬리우스 티어니 신부(1931년)는 공산군 또는 강도에게 납치되어 순교하기도 했다. 패트릭 클리어리 신부는 1933년 난청 사도 대목구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나, 중일 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 그리고 국공 내전을 거치며 선교 활동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모든 콜룸반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추방되었고, 갈빈 주교와 클리어리 주교 역시 1952년 추방되었다.
중국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선교회는 필리핀(1929), 대한민국(1933), 버마(1936), 일본(1948) 등으로 선교 범위를 넓혔고, 이후 라틴 아메리카(페루, 칠레), 피지(1952), 파키스탄, 대만, 브라질, 자메이카, 벨리즈 등지로 활동을 확장했다. (자원 감소로 벨리즈, 자메이카, 브라질에서는 철수)
선교회는 설립자 에드워드 갈빈 주교를 비롯하여 역대 총장, 주요 성직자,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인물들, 그리고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 등 많은 주요 인물들을 배출했다.
선교회의 역대 총장, 주요 성직자, 기타 주요 인물 및 순교자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아래 관련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5. 1. 역대 총장
대부분의 총장은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아일랜드 출신이다.번호 | 이름 | 국가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비고 |
---|---|---|---|---|---|
1 | 에드워드 J. 갈빈 | 아일랜드 | - | 1924 | 협회 설립자, 또한 한양 초대 주교 |
2 | 마이클 오드와이어 | 아일랜드 | 1924 | 1947 | |
3 | 제레미아 데네히 | 아일랜드 | 1947 | 1952 | |
4 | 티모시 코놀리 | 아일랜드 | 1952 | 1962 | |
5 | 제임스 킬트 | 아일랜드 | 1962 | 1970 | |
6 | 리처드 스타인힐버 | 미국 | 1970 | 1976 | 유럽 외 지역 출신 최초의 총장 |
7 | 토니 오브라이언 | 아일랜드 | 1976 | 1982 | |
8 | 버나드 클리어리 | 오스트레일리아 | 1982 | 1988 | 오세아니아 지역 출신 최초의 총장 |
9 | 니콜라스 머레이 | 아일랜드 | 1988 | 2000 | |
10 | 브렌던 오설리번 | 미국 | 2000 | 2006 | |
11 | 토미 머피 | 아일랜드 | 2006 | 2012년 9월 20일 | |
12 | 케빈 오닐 | 오스트레일리아 | 2012년 9월 20일 | 2018년 9월 22일 | [6] |
13 | 팀 멀로이 | 아일랜드 | 2018년 9월 22일 | 2024년 7월 6일 | [7] |
14 | 안드레이 파즈 | 필리핀 | 2024년 7월 6일 | ~ 현재 | 아시아 출신 최초의 총장[8] |
5. 2. 주요 성직자

선종 연도순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 1949: 오언 맥폴린 (임 오엔), 광주 남한 교구 명예 교황대리
- 1952: 안 파트리치오 토마소 브레넌, 광주 (대한민국) 교황대리
- 1956: 에드워드 J. 갤빈 (선교회 설립자, 로마 가톨릭 한양 교구 초대 주교, 1946년 4월 11일 – 1956년 2월 23일)
- 1958: 패트리치오 어셔 신부, 바모 (미얀마) 교황대리
- 1970: 패트릭 클리어리 (이백고), 로마 가톨릭 난청 교구 남성 (중국) 주교
- 1970: 토마스 F. 퀸란 (구 토마), 로마 가톨릭 춘천 교구 춘천 (대한민국) 명예 주교
- 1976: 현 하롤드 헨리, 로마 가톨릭 광주 대교구 광주 (대한민국) 초대 명예 대주교 (1962–1971) 및 제주 (대한민국) 교황대사
- 1983: 헨리 번, 로마 가톨릭 이바 교구 (필리핀) 명예 주교
- 1991: 패트릭 H. 크로닌, 로마 가톨릭 카가얀 데 오로 대교구 (필리핀) 명예 관구 대주교
- 1994: 박 토마스 스튜어트, 로마 가톨릭 춘천 교구 춘천 (대한민국) 명예 주교
- 1997: 존 둘리, 인도차이나 명예 교황 사절 (교황 외교 사절)
- 2000: 존 제임스 하우, 미치나 (미얀마) 명예 주교
- 2010: 제임스 에드워드 마이클스 (권야고보), 로마 가톨릭 휠링-찰스턴 교구 (미국) 명예 보좌 주교
5. 3. 기타 주요 인물
- 존 블로윅 신부: 공동 설립자이자 두 번째 총장을 역임했다.
- W. 에이던 맥그래스 신부: 1950년대 초 중국에서 활동하던 중 부당하게 투옥되는 시련을 겪었다.
- 제임스 스튜어트 신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북부 버마에서 수많은 난민과 미국 공군 조종사의 생명을 구했다. 영국 및 미국 정보부에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 공로를 인정받아 '파이팅 신부'라는 별칭과 함께 대영 제국 훈장을 받았다.
- 닐 오브라이언 신부: 1980년대 필리핀에서 발생한 '네그로스 나인'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투옥되었다.
- 응우옌 반 흥 신부: 대만에서 인신매매 근절을 위해 헌신한 활동가이다.
- 셰이 컬렌 신부: 필리핀에서 아동 성매매 근절을 위해 노력한 활동가이자 인권 옹호자이며, PREDA 재단의 공동 설립자이다.
- 로버트 맥컬로크 신부: 오스트레일리아인으로 1978년부터 2011년까지 파키스탄에서 봉사했다. 2012년 파키스탄 정부로부터 건강 및 교육 분야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훈장을 받았다.
- 숀 맥도나 신부: 아일랜드 출신의 콜룸반 선교사이자 생태 신학자이다.
- 피터 퀸 신부: 아일랜드 메이요 출신의 전 게일릭 풋볼 선수이다.
5. 4. 순교자
콜룸반외방선교회 소속으로 활동 중 순교한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신분/직책 | 순교 연도 | 순교 장소 | 사유 |
---|---|---|---|---|
패트릭 토마스 브레넌 | 광주 사도 관구장 | 1950년 9월 24일 | 한국 전쟁 중 북한 | 북한군 포로 상태에서 살해됨 (커삭, 오브라이언 신부와 함께) |
프랭크 캐너번 | 신부 | 1950년 | 한국 전쟁 중 북한 | 공산주의 포로 수용소에서 사망 |
토니 콜리어 | 신부 | 1950년 6월 27일 | 한국 전쟁 중 한국 | 북한군에 의해 살해됨 (한국 전쟁 최초의 비한국인 사망자) |
토마스 커삭 | 목포 본당 신부 | 1950년 9월 24일 | 한국 전쟁 중 북한 | 북한군 포로 상태에서 살해됨 |
존 오브라이언 | 목포 신부 | 1950년 9월 24일 | 한국 전쟁 중 북한 | 북한군 포로 상태에서 살해됨 |
프란시스 더글라스 | 뉴질랜드 선교사 | 1943년 | 필리핀 (제2차 세계 대전 중) | 일본군에 의해 살해됨 |
루퍼스 할리 | 필리핀 선교사 | 2001년 | 필리핀 | 살해됨 |
코넬리우스 티어니 | 신부 | 1931년 | 중국 | 납치 후 억류 중 사망 |
티모시 레너드 | 신부 | 1929년 | 중국 | 공산주의 성향 무장 강도의 교회 공격으로 사망 |
피터 팰론 | 신부 | 1945년 | 제2차 세계 대전 중 | 일본군에 의해 납치 및 살해됨 |
존 헤네간 | 신부 | 1945년 | 제2차 세계 대전 중 | 일본군에 의해 납치 및 살해됨 |
토마스 플린 | 신부 | 1950년 | 필리핀 | 후크발라합 세력에게 살해됨 |
존 월시 | 선교사 | 1964년 | 미얀마 (당시 버마) | 친정부군에 의해 살해됨 |
6. 기관 및 출판물
성 콜룸반 외방 선교회는 선교 활동을 지원하고 확장하기 위해 다양한 기관을 설립하고 운영해왔다. 주요 기관으로는 선교사 양성을 위한 신학교가 있으며, 선교 소식을 전하고 후원을 독려하기 위한 공식 출판물인 잡지 ''Far East''를 발행하고 있다.
6. 1. 신학교
1918년 6월 29일 교황청으로부터 선교회 설립을 공식 승인받은 직후, 선교를 위한 새로운 단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아일랜드에 신학교가 설립되었다.[16] 처음에는 골웨이와 메이요 경계에 있는 슐(Shrule)의 달간 공원(Dalgan Park)에 성 콜룸반 대학(St Columban's College)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16]이후 선교회는 1927년 미스주 나반(Navan)에 위치한 다우드스타운 하우스(Dowdstown House)를 매입했고,[17] 1929년부터 입주하기 시작하여 1941년에는 슐에 있던 신학교를 이곳으로 완전히 이전하면서 이름을 달간 공원(Dalgan Park)으로 변경했다.[16][17] 나반의 달간 공원은 1967년까지 선교회의 본부 역할을 했으며, 1981년에는 미스 교구의 피정 센터로 지정되었다.[17] 현재 이곳에는 아일랜드 선교사 연합 연구소(The Missionary Society of St. Columban Archive)[18]와 콜룸반 평신도 선교사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콜룸반 기록 보관소(Columban Archive)도 이곳 나반에 보관되어 있다.[17] 과거 달간 공원에서는 신학 관련 파트타임 대학원 디플로마 과정과 신학 석사 과정(생태 및 종교)을 운영하기도 했다.[19] 생태와 신앙 석사 과정은 2002년 9월 웨일스 대학교의 램피터 칼리지와 협력하여 시작되었으나,[20][21] 2009년 올 할로우즈 칼리지(All Hallows College)로 이전되어 더블린 시립 대학교(DCU)의 인증을 받았다.
1958년에는 더블린에 위치한 템플로그 하우스(Templeogue House)를 매입하여 학사(House of Studies)로 사용했다. 이곳의 학생들은 양성 과정의 일환으로 더블린 대학교(University College Dublin)에서 세속 학위를 취득한 후, 신학 연구를 위해 달간 파크로 돌아갔다.[22] 선교회는 1972년에 템플로그 하우스를 매각했으며, 1975년에는 템플로그에 부지를 기증하여 선교회 창립자인 갈빈 주교(Bishop Galvin)의 이름을 딴 학교 설립을 지원했다.[22]
미국에서는 1918년 네브래스카주에 수도원이 개설되었고, 몇 년 안에 또 다른 신학교가 문을 열었다. 1921년 네브래스카주 벨뷰(Bellevue)에 콜룸반 신학교(Columban Seminary) 건설이 시작되었으며,[23] 1922년 6월 오마하 대교구의 제레마이어 J. 하티(Jeremiah J. Harty) 대주교에 의해 봉헌되었다. 같은 해 9월 첫 학생들이 입학했다.[23]
6. 2. 잡지 "Far East"
''극동(Far East)''은 1918년에 창간된 성 콜룸반 외방 선교회의 공식 잡지로, 연 7회 발행된다.[24]편집인 | 재임 기간 / 담당 | 비고 |
---|---|---|
존 헤네간 신부 | 초대 | 제2차 세계 대전 중 마닐라에서 일본군에 의해 살해됨 |
에드워드 (네드) 맥과이어 박사 | 1925–1936 | |
다니엘 코넬리 신부 | 1936–1965 | |
에드워드 퍼시 왈시 신부 | 1970–1977 | |
션 A. 던 신부 | 1977–1986 | |
알로 코나튼 신부 | 1993–2003 | |
키릴 로벳 SSC 신부 | 2003–2016 | |
사라 맥도날드 | 2016년– | 최초의 평신도 및 여성 편집장[25][26] |
W.S. 맥골드릭 신부 | 미국판 극동 담당 | |
마이클 오닐 SSC 신부 | 콜룸반 인터컴(Columban Intercom) 편집 겸임 |
현재 호주와 미국 네브래스카의 콜룸반 선교회에서 이 잡지를 발행하고 있으며, 미국판은 ''콜룸반 선교(The Columban Mission)''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7. 현대의 활동과 과제
1979년 파키스탄과 대만에서 새로운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같은 해 미얀마에서는 철수하였다. 이후 선교 지역을 다변화하여 1985년 브라질, 1986년 자메이카와 벨리즈에서도 활동을 개시하였다. 1999년에는 미국과 멕시코 국경 지역에서의 선교를 시작하며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2008년, 선교회의 운영 중심인 총 평의회를 기존의 아일랜드에서 홍콩으로 이전하였다. 이는 아시아 지역에서의 활동 중요성이 커졌음을 시사하는 변화로 볼 수 있다. 이후 2016년에는 과거 철수했던 미얀마(구 버마)에서의 선교 활동을 재개하였으며, 2018년에는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이러한 활동 지역의 변화와 확장은 현대 사회의 다양한 요구와 도전에 직면하며 선교 활동을 이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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