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에르난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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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키스 에르난데스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활약한 미국의 야구 선수로, 1루수로서 뛰어난 수비와 타격을 선보였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1979년 타격왕과 내셔널 리그 MVP를 수상했으며, 1982년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1983년 뉴욕 메츠로 트레이드된 후 팀의 주장을 맡아 1986년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은퇴 후에는 해설자로 활동하며,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2022년에는 메츠에서 그의 등번호 17번이 영구 결번되었고, 카디널스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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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에르난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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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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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 1루수 |
타석 | 좌타 |
투구 | 좌투 |
출생일 | 1953년 10월 20일 () |
출생지 |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 미국 |
프로 입단 정보 | |
데뷔 리그 | MLB |
데뷔 일자 | 1974년 8월 30일 |
데뷔 팀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최종 리그 | MLB |
최종 일자 | 1990년 7월 24일 |
최종 팀 |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
통계 (MLB) | |
타율 | 0.296 |
안타 | 2,182 |
홈런 | 162 |
타점 | 1,071 |
소속 팀 | |
선수 경력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74–1983) 뉴욕 메츠 (1983–1989)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90) |
수상 및 업적 | |
올스타 선정 | 5회 (1979, 1980, 1984, 1986, 1987) |
월드 시리즈 우승 | 2회 (1982, 1986) |
NL MVP | 1979년 |
골드 글러브 수상 | 11회 (1978–1988) |
실버 슬러거 수상 | 2회 (1980, 1984) |
NL 타격왕 | 1979년 |
명예의 전당 | 뉴욕 메츠 No. 17 영구 결번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명예의 전당 뉴욕 메츠 명예의 전당 |
2. 선수 경력
1971년 메이저 리그 드래프트 회의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42라운드(전체 776위)로 지명되어 입단했다. 1974년 8월 30일에 메이저 리그에 데뷔, 1976년 뛰어난 타격과 수비로 1루수 주전이 되었다.[8]
1979년 161경기에 출전, 타율 .344로 타격왕을 차지했고, 11홈런 105타점을 기록하며 윌리 스타젤과 함께 내셔널 리그MVP를 공동 수상했다.[8] 1982년 팀의 월드 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
1983년 6월 15일, 화이티 허조그 감독과의 불화 등으로 뉴욕 메츠로 트레이드되었다.[9] 1985년 피츠버그 약물 재판에 연루되어 코카인 사용이 드러났으나 징계는 면제받았다.[11][13] 1986년 팀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1987년 팀의 초대 주장이 되었으나, 1988년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1989년 클리블랜드 가디언스로 이적, 1990년 시즌 후 은퇴했다.
은퇴 후 해설가 및 작가로 활동 중이다. 2022년 메츠에서 등번호 17번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2. 1.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74-1983)
에르난데스는 마이너 리그에서 대부분 .250 정도의 타율을 기록했지만, 1973년 시즌 후반 툴사 오일러스로 승격되면서 .333의 타율과 5개의 홈런, .525의 장타율을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였다. 다음 시즌에는 .351의 타율로 메이저 리그로 승격되었다. 1974년 8월 30일 캔들스틱 파크에서 열린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메이저 리그 데뷔전을 치렀고, 2타수 1안타 2 볼넷을 기록했으며, 9회에 1루타를 쳐내며 첫 타점을 올렸다.[8] 시즌 후, 카디널스는 젊은 유망주를 위해 1루수 조 토레를 뉴욕 메츠로 트레이드했다.1975년 에르난데스는 툴사와 카디널스를 오가며 경기를 치렀다. 메이저 리그에서는 .250의 타율, 3개의 홈런, 20타점으로 고전했지만, 마이너 리그에서는 .996의 수비율을 기록하며 수비 능력을 인정받았다. 1976년, 미키 맨틀을 기리기 위해 등번호를 37번으로 변경했다. 타격 실력이 점차 향상되었고, 1978년에는 스티브 가비를 제치고 첫 골드 글러브를 수상하며 최고의 수비수로 인정받았다.
1979년, 에르난데스는 .344의 타율, 48개의 2루타, 116득점으로 리그를 이끌었고, 윌리 스타젤과 함께 내셔널 리그 MVP를 공동 수상했다. 이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처음이자 유일한 공동 MVP 수상이었다.
이후 에르난데스는 3할 타율을 기록하는 꾸준한 타자로 자리매김했고, 내셔널 리그를 대표하는 스타 선수 중 한 명이 되었다. 1982년 월드 시리즈에서 밀워키 브루어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는데, 6차전에서 에르난데스와 다렐 포터가 홈런을 기록하며 팀의 13-1 대승을 이끌었다. 에르난데스는 월드 시리즈 7경기에서 8타점을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화이티 허조그 감독을 포함한 카디널스 구단과의 불화 끝에, 1983년 6월 15일 투수 닐 앨런, 릭 온베이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메츠로 이적했다. 허조그는 에르난데스가 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하여 트레이드를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9]
2. 2. 뉴욕 메츠 (1983-1989)
메츠는 전 감독 케이시 스텡걸을 위해 37번을 영구 결번했기에 에르난데스는 입단 후 17번을 사용했고, 이는 선수 생활의 남은 기간 동안 사용했다. 이 트레이드의 결과로 에르난데스는 월드 시리즈 챔피언에서 백패를 간신히 면한 팀(68승 94패)으로 이적했고,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 최하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에르난데스는 허조그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로 결심했고, 1980년대 중반 두 팀 사이의 라이벌 관계에 불을 지폈다.새로운 감독 데이비 존슨 아래에서, 1984년 메츠는 1976년 이후 처음으로 승리 시즌을 보냈으며, 90승 72패를 기록했고, NL 동부 지구에서 카디널스를 6경기 차로 앞섰다(결국 지구 우승팀인 시카고 컵스보다 6.5경기 뒤짐). 에르난데스는 컵스의 2루수 라이언 샌드버그에 이어 NL 최우수 선수 투표에서 2위를 차지했으며, 1983년과 198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신인상을 각각 수상한 대릴 스트로베리와 드와이트 구든을 포함한 메츠의 젊은 핵심 선수들을 이끄는 리더로 부상했다.
에르난데스는 매우 강력하고 정확한 송구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메츠는 그를 통해 릴레이를 재경유했다. 그는 빠른 직관력 덕분에 다른 1루수보다 1루에서 더 멀리 떨어져 플레이할 수 있었고, 다른 내야수들이 오른쪽으로 더 넓게 플레이할 수 있게 했다.
에르난데스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고의 수비형 1루수 중 한 명으로 널리 여겨진다. 그는 오른쪽과 왼쪽으로 멋진 다이빙 플레이를 펼쳤다. 에르난데스는 번트 시도를 너무 적극적으로 방어하여 때로는 평판만으로도 상대 선수들이 번트를 시도하지 못하게 했다. 피트 로즈는 신시내티 레즈 감독 시절, 에르난데스를 상대로 번트하는 것을 "빌 러셀을 상대로 레인으로 돌진하는 것"에 비유했다. 애스트로스 감독 할 레이니어는 에르난데스가 1루를 보고, 메츠 투수 3명 중 한 명인 론 달링, 로저 맥도웰, 또는 제시 오로스코의 조합은 메츠를 상대로 번트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말했고, 컵스 감독 짐 프레이는 대부분의 투수에게 메츠를 상대로 번트를 시키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그냥 2루에서 포스 아웃을 시키는 것이고, 이제 당신의 투수가 베이스를 뛰게 된다"고 말했다. 에르난데스가 투구 직후에 홈 플레이트 앞에 도착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타자가 번트를 시도할 시점을 기가 막히게 알아채서, 처음부터 돌진해야 할 때를 알았다. 에르난데스가 번트 플레이에서 상대를 위협한 이후 수십 년 동안 시카고 컵스의 앤서니 리조를 제외하고는 아직 그 움직임을 따라 한 1루수는 없었다.
에르난데스는 또한 오른발을 베이스에, 왼발을 파울 지역에 두고 픽오프 송구를 받아 오른쪽으로 태그를 쉽게 할 수 있어, 1루 주자를 픽오프하는 데 능숙했다. 그 결과, 심판들은 포수 외 모든 수비 선수는 공이 투구되는 동안 페어 지역에 위치해야 한다는 수비 위치 규칙을 더 강력하게 시행하기 시작했다.
1985년, 에르난데스의 이전 코카인 사용 (그리고 다른 선수들에게 약물을 유통한 혐의)[11]는 끊임없이 소문이 돌았고, 에르난데스와 카디널스 감독 화이티 허조그 사이의 주요 갈등의 원인이었으며,[12] 약물 딜러 커티스 스트롱의 피츠버그 약물 재판의 결과로 공공 기록이 되었다. MLB 커미셔너 피터 우버로스는 에르난데스가 코카인을 사용하고 유통에 관여한 7명의 선수 중 한 명임을 밝혀냈다. 선수들은 시즌 내내 출장 정지를 받았지만, 기본 급여의 10%를 약물 남용 프로그램에 기부하고, 무작위 약물 검사를 받고, 약물 관련 지역 사회 봉사를 100시간 이행하는 조건으로 징계가 감면되었다.[11][13] 에르난데스는 자신의 코카인 사용이 당시 야구 선수들이 흔히 약물을 사용하던 시대에 레크리에이션 목적으로 제한되었으며, 약물을 유통한 적이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해 왔다. 처음에는 에르난데스는 우버로스의 판결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결국 출전 시간을 놓치지 않도록 해주는 옵션을 받아들였다. 그 이유는 1986년에 메츠가 월드 시리즈에 진출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커미셔너의 결정이 내려지기 훨씬 전부터 메츠와 카디널스는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 정상을 놓고 격렬한 라이벌 관계에 놓여 있었고, 에르난데스는 새로 영입된 올스타 포수 게리 카터 및 다른 재능 있는 베테랑들과 함께, 훌륭한 젊은 선수들과 힘을 합쳐 메츠를 이끌었다. 1985 시즌은 메츠가 98승을 거두고, 101승을 거둔 카디널스 팀에 지구 우승을 간신히 내주면서 막을 내렸다. 메츠는 그 시즌 NL MVP 투표에서 10위 안에 3명의 선수를 올렸다(구든 4위, 카터 6위, 에르난데스 8위). 한편, "레드버드"는 4명의 선수를 10위 안에 넣었다: 우승자 윌리 맥기, (토미 헤르 5위, 존 튜더는 에르난데스와 공동 8위, 잭 클라크 10위, 그리고 11위( 빈스 콜먼)를 차지했다.
에르난데스는 1985년 결승타 24개로 기록을 세웠는데, 이 기록은 1980년부터 1988년까지 공식 기록으로 인정되었다(이전 기록은 1983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해럴드 베인스의 22개). 그의 통산 기록은 129개로, 이 또한 기록이다.
에르난데스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해군에서 스탠 뮤지얼과 함께 야구를 했던 아버지 덕분에 1985년 타격 부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의 아버지는 TV로 그의 타석을 관찰했고, 키스가 타격을 잘 할 때는 타석에 들어설 때 그의 등 유니폼에서 "1"과 "7"을 모두 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두 숫자를 모두 볼 수 없다는 것은 키스가 안쪽 공에서 물러나고, 공을 당기려고 너무 애쓰고, 바깥쪽 빠른 공이나 바깥쪽 변화구에 취약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1986년 메츠는 108승을 거두며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21.5경기 차로 따돌리고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에르난데스는 .310의 타율과 83타점을 기록했다. 메츠는 1986년 월드 시리즈에서 보스턴 레드삭스를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에르난데스는 타율 .231을 기록했고, 6차전 10회말 전설적인 상황에서 중견수 깊숙한 곳으로 날아가는 아웃을 기록했다. 7차전에서 에르난데스는 6회까지 메츠를 무실점으로 막았던 레드삭스 좌완 투수 브루스 허스트를 상대로 2타점 적시타를 터뜨리며 득점에 성공했다. 또한 다음 타석에서 또 다른 중요한 타점을 올려 이 경기에서 3타점을 기록했다. 카터와 에르난데스는 각각 내셔널 리그 MVP 투표에서 3위와 4위를 기록했다.
그의 약물 복용 정지 합의와 팀의 "열심히 놀고, 더 열심히 경기한다"는 문화 때문에, 에르난데스는 일부 사람들에게 80년대 메츠의 대표 선수로 여겨졌다.[14] 1987년, 데이비 존슨은 에르난데스를 프랜차이즈 역사상 첫 번째 팀 주장을 임명했다. 1시즌 후, 카터가 공동 주장에 임명되었다.
1988년, 그는 윌리엄 골드만과 마이크 루피카의 저서 "Wait Till Next Year"에 크게 등장했는데, 이 책은 1987년 시즌 전체 동안 메츠 내부의 삶을 조명했다(다른 뉴욕 스포츠 팀들과 함께). 에르난데스는 언론과 상대하며 팀 동료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메츠 선수 중 가장 목소리가 큰 선수로 묘사되었으며, 그의 엄청난 맥주 소비와 함께 언급되었다.
1988년, 에르난데스는 통산 11번째이자 마지막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고, 팀을 또 다른 지구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압도적인 우승 후보였던 메츠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게 1988년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패했다. 에르난데스와 카터 모두 선수 경력의 황혼기에 접어들었고, 허리, 무릎, 햄스트링 문제로 인해 에르난데스는 95경기 출전에 그쳤다. 한편, 카터는 시즌 타율 0.242를 기록했고, 그의 통산 300번째 홈런을 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에르난데스의 타율은 1989년 메츠에서 75경기 출전에 그치며 0.233으로 하락했다. 메츠는 1989년 시즌 종료 후 그의 계약이 만료되자 그와 재계약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11월 13일 그는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그 다음 날, 메츠는 카터를 방출했다.
2. 3.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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