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통제파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통제파는 1930년대 일본 제국 군부 내 파벌로, 황도파에 대한 반발로 형성되었다. 이들은 전체주의 및 파시즘 사상을 공유하며 국가 방위력 강화를 추구했으나, 그 방식에 있어 황도파와 대립했다. 통제파는 기존 체제 내에서 개혁을 추구하며, 미래 전쟁을 총력전으로 보고 산업 및 군사력 증강을 위해 관료와 재벌의 협조를 중시했다. 나가타 데쓰잔과 도조 히데키 등이 중심 인물로, 2.26 사건 이후 군부의 주도권을 장악했으나, 태평양 전쟁 패전 이후 해체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통제파 - 도조 히데키
    도조 히데키는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육군 대신, 참모총장,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진주만 공격을 명령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전범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 통제파 - 무토 아키라
    무토 아키라는 일본 제국 육군 중장으로,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사형 판결을 받고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인물이다.
  • 일본 제국 육군 - 욱일기
    욱일기는 태양 문양 주위로 햇살을 그린 깃발로, 일본에서 경사스러운 상징으로 여겨져 왔으나,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져 한국 등 피해 국가에서는 사용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다.
  • 일본 제국 육군 - 고스톱 사건
    고스톱 사건은 1933년 오사카에서 발생한 군부와 경찰 간의 충돌로 시작되어 군부의 권위주의적 경향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 쇼와 시대 - 쇼와 천황
    쇼와 천황은 메이지 천황의 손자로 태어나 124대 일본 천황으로 즉위하여 사망할 때까지 재위하며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 침략 전쟁에 관여했다는 논란이 있으며, 전후에는 상징적인 천황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고 그의 전쟁 책임 문제는 논쟁의 대상이다.
  • 쇼와 시대 - 국가총동원법
    국가총동원법은 1938년 일본에서 전시 또는 유사시 국방 목표 달성을 위해 인적·물적 자원을 총동원할 목적으로 제정되어 국민 징용, 물자 통제 등 광범위한 권한을 정부에 부여했으나, 1945년 폐지되었고 과도한 권한 위임과 자유 침해로 비판받았다.
통제파
개요
명칭통제파
로마자 표기Tōseiha
구분일본 제국 육군의 파벌
존속 기간1920년대 ~ 1940년경
지도부
주요 인물나가타 테쓰잔
이념 및 목표
정치 성향보수주의
전체주의
군국주의
목표일본 정부의 개혁
조직 및 활동
결성 시기1920년대
해체 시기1940년경
적대 세력황도파
역사적 맥락
배경쇼와 시대 초기의 일본 정치 상황
주요 사건군사 참모국 작전반 사건 연루
관련 정보
관련 인물이시와라 간지 (주요 이론가)
특징관료 통제 강화 및 국가 총력전 체제 지향

2. 역사적 배경

일본 제국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경제 성장을 누렸지만, 1920년대 초 쇼와 금융 위기로 인해 경제 성장이 멈췄다. 사회 양극화와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사회 불안이 증가했고, 노동 조합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일본의 산업 및 금융 지도자들은 정치인과 관료와의 관계를 통해 부를 축적했다. 군부는 정치 부패에서 비교적 자유롭다고 여겨졌고, 군부 내 일부 세력은 자유민주주의의 약점과 정치 부패로 인해 발생하는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직접 행동을 모색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일본의 수상을 역임한 도조 히데키는 통제파의 일원이었다.


극우 민족주의 군부 내 파벌인 황도파아라키 사다오와 그의 제자 마사키 진자부로에 의해 결성되었으며, 산업화 이전의 일본으로 회귀를 추구했다. 통제파는 급진적인 황도파에 대한 반발로 결성되었으며, 군부 내 보수적이고 온건한 세력을 대표했다. 통제파와 황도파는 전체주의파시즘 사상을 공유하고, 국가 정치 개혁을 통해 국방을 강화해야 한다는 이상을 가졌으며, 정당 정치와 대의 민주주의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두 파벌은 이상은 같았지만, 방법론에서 차이를 보였다.

2. 1. 전사(前史)

1920년대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 양극화 심화로 사회 불안이 높아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사상이 확산되었고, 노동 운동이 활발해졌다. 일본 군부는 정치 부패와 자유민주주의 세력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국가 개조를 위한 직접 행동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21년 10월,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인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 오바타 도시로(小畑敏四郎), 나가타 데쓰잔(永田鉄山) 등은 바덴바덴의 밀약(バーデン=バーデンの密約)을 맺고, 총력전 체제 확립과 육군 내 파벌 개혁을 목표로 활동하기 시작했다.[3] 이들의 활동은 '니요바카이(二葉会)', '모쿠요카이(木曜会)'를 거쳐 '잇세카이(一夕会)'로 발전했다.

잇세카이는 육군 인사 쇄신, 만주 및 몽골 문제 해결,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 마사키 진자부로(真崎甚三郎),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郎) 등 3장군 추대를 결의했다.[4]

2. 2. 파벌 형성

1929년 5월, 육군사관학교 출신 중견 장교들을 중심으로 니요바카이(二葉会)와 모쿠요카이(木曜会)가 합류하여 잇세카이(一夕会)가 결성되었다.[3] 잇세카이는 만주 사변(満州事変)을 주도하는 등 군부 내 영향력을 강화했다.

잇세카이는 첫 모임에서 다음과 같은 결의를 하였다.[3]

결의 내용
육군 인사를 쇄신하고 여러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한다.
만몽 문제 해결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 마사키 신자부로(真崎甚三郎),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郎) 3장군을 추대한다.



위 결의 중 아라키, 마사키, 하야시의 추대는 장주파(長州閥)와 그 계보를 잇는 우가키 가즈나리(宇垣一成) 일파에 대한 대항을 의미했다.[3]

1931년 와카츠키 내각(若槻内閣)이 총사퇴하고 이누카이 내각(犬養内閣)이 들어서면서, 잇세카이가 지지하는 아라키 사다오가 육군 대신으로 취임했다. 아라키는 우가키 가즈시게 계열의 참모총장 카나야 노리미츠(金谷範三)를 간인노미야 야스히토 친왕(閑院宮載仁親王)으로 교체하고, 1932년 1월에는 마사키를 참모차장에 임명하는 등, 이 시기에 우가키 계열 육군 수뇌부는 일소되었다.

1932년 5·15 사건(五・一五事件)으로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내각이 무너진 후 사이토 내각(齋藤内閣)에서도 아라키는 육군대신에 유임되었고, 하야시 센주로가 교육총감에 취임하면서 잇세카이가 지지하는 3장군이 사실상 육군 최고위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라키의 당파적 인사와 실무 능력 부족은 군 내부의 반발을 불러왔고, 중견 참모들의 이반을 초래했다. 이와 더불어 오바타 도시시로와 나가타 데쓰잔의 대립이 표면화되면서, 아라키의 심복인 오바타는 황도파(皇道派)로, 나가타를 중심으로 한 참모들은 '''통제파(統制派)'''로 분열되었다. 이들의 대립은 1933년 4월부터 5월 사이에 발생한 것으로 여겨진다.

3. 주요 특징 및 구성

통제파는 황도파와 대립하였으며, 천황 친정 강화나 재벌 규제보다는 총력전에 대비한 고도 국방 국가 건설을 목표로 했다.[5] 참모본부, 육군성의 소령급 참모 장교를 중심으로 지지받았으며, 나가타 테츠잔, 도조 히데키 등이 중심 인물이었다.[5]

통제파는 언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선전, 선동 활동을 펼쳤다. 나가타 테츠잔의 제자이자 통제파의 이론적 지도자인 이케다 준큐는 "군부는 저널리즘의 선전 선동 기능을 계획적이고 효과적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 초기에는 폭력 혁명적인 색채도 띠었다.[5]

"통제파"라는 명칭은 경멸적인 용어였으며, 황도파 구성원과 동조자들에 의해서만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다.[5]

3. 1. 황도파와의 대립

황도파는 폭력과 혁명을 통해 쇼와유신을 추구했던 반면, 통제파는 기존 시스템 내에서 개혁을 추구했다. 통제파는 미래의 전쟁이 총력전이 될 것으로 예상했고, 일본의 산업 및 군사력을 극대화하려면 일본 관료와 자본가 재벌(財閥) 기업들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보았다.[1] 황도파는 소련에 대한 선제공격 전략인 북진론(北進論)을 강력히 지지했지만, 통제파 내에서도 북진론 지지자들이 있었지만 대체로 더 신중한 방위력 확장을 선호했다.[1]

1931년 말, 만주사변 이후 두 파벌은 군부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다.[1] 1936년 2·26 사건은 군부에서 황도파 지도부의 광범위한 숙청을 야기했고, 황도파는 사실상 해체되었으며, 통제파는 일본 군부의 주요 세력이 되었다.[1]

4. 몰락

만주사변 이후, 고도파(皇道派)와 통제파(統制派)는 군부 지배권을 놓고 경쟁했다.[1] 초기에는 고도파가 우세했지만, 1934년 아라키가 건강 문제로 사임하면서 영향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1936년 2·26 사건으로 군부 내 고도파 지도부가 대거 숙청되면서 고도파는 사실상 해체되었고, 통제파가 일본 군부의 주요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통제파는 존재 이유를 상실하면서 점차 해체되었다.

5. 한국의 관점에서의 비판적 평가

(소스 내용 없음)

참조

[1] 서적 Japan's War unknown
[2] 서적 日本の曲り角 千城出版
[3] 문서 武藤は佐賀出身で真崎甚三郎と同郷
[4] 문서 参謀総長の閑院宮載仁親王は皇族のため、参謀次長の真崎が実権を握っていた。真崎が閑院宮を差し置いて権限をふるい、嫌われたことも後の皇道派没落の遠因とされる。
[5] 서적 教科書には載せられない 日本軍の秘密組織 彩図社
[6] 서적 昭和動乱の真相 中公文庫
[7] 서적 昭和動乱の真相 中公文庫
[8] 서적 昭和の軍閥 中公新書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