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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천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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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천 김씨는 고려 초 금양, 고려 중엽부터 조선 초기까지 통주, 조선 중기 이후 통천을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1701년 발간된 족보 초간본 《신사보》에서는 김원을 중시조로 하여 계대를 잇고 있다. 고려 시대에는 이규보의 어머니가 금양 김씨였으며, 조선 시대에는 기축옥사,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으며 가세가 기울었다. 주요 인물로는 김호, 김여산, 김중령, 김빙 등이 있으며, 진산공파, 군수공파, 전직공파로 분파되었다. 통천 김씨는 고려 문과 1건, 조선 문과 6건, 생원진사시 10건, 음사 2건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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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천 김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통천 김씨 정보
성씨통천 김씨
한자 표기通川金氏
관향강원도 통천군
나라한국
시조김교 (마의태자의 아들)
중시조김원등 (문한학사 판도판서)
집성촌전북 완주군 구이면 두현리
전주시 덕진구 우아동 안덕원, 반암리
충남 서천군 비인면 관리, 종천리
서천군 판교면 우라리
보령시 웅천읍 두룡리
주요 인물김중권 (동국이상국집 저자 이규보의 장인, 유학자)
김호 (중랑장, 현감)
김창정 (보공장군)
김훈 (남포현감)
김권 (남원도호부사)
김원 (홍문관 교리)
김익한 (전주경기전 중건)
김빙 (형조 좌랑, 기축옥사 추국관)
김진 (남계정 건립, 유학자)
김여련 (한림학사, 임진왜란 전망, 시호 서암)
김응의 (이괄의 난 평정, 봉명서원 배향)
년도2000년
인구4,981명
분파진산교도공파, 군수공파, 전직공파
이칭통주 김씨, 금양 김씨

2. 역사

통천 김씨는 고려 초 금양(金壤), 고려 중엽부터 조선 초기까지 통주(通州), 조선 중기 이후 통천(通川)으로 관향해 온 씨족이다. 1380년(고려 우왕 6년)과 1398년(조선 태조 7년)에 발간된 중랑장공 외가 호구 입안과 1427년(세종 8년)에 작성된 중령랑장공 부인 하동 정씨 분재 문권의 기록을 토대로 1701년 족보 초간본이 발간되었다.[1]

통천 김씨 중시조 김원등의 아들 김호는 1380년 중랑장공 외가호구입안에 내시직장동정, 1427년 중령랑장공 부인 하동정씨 분재 문권에는 중랑장, 조선 국조방목에는 1419년(세종 1년) 기해 식년시 대과 합격자로 기록되어 있다.[2] 김호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첫째 김여산은 진산교도를 지냈고, 둘째 김중령은 군수를 지냈으며, 김중령의 아들 김경은 부사를 지냈다.[2] 셋째는 전직을 지낸 김중복이다.[3]

김중복의 6대손 김빙은 1589년 기축옥사 때 형조좌랑 추국관으로 백유함의 모함을 받아 역적으로 몰렸다. 김빙의 아버지 김익한은 경기전 참봉으로 전주 경기전 중건 책임을 맡았으며, 1546년(명종 1년) 증광시에 합격하였다. 기축옥사로 수많은 전라도 선비들이 고초를 당하고 김빙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통천 김씨 가문은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중시조 김원등의 9세 김진의 아들 김여련이 선조를 호종하다 순절하여 서암이라는 시호와 정려를 하사받았다. 그러나 김진과 가깝게 지내던 의병장 고경명과 조헌이 순국하면서 가문의 시련은 더욱 커졌다. 임진왜란 때 전북 완주군 소양면 이림리에 세거하던 통천 김씨 군수공파 일족이 멸족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1589년 기축옥사, 1592년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통천 김씨의 가세는 완전히 기울었다.

1701년 족보 초간본을 만들 당시에는 상계의 기록은 물론 묘소도 실전된 경우가 많았다. 다행히 가전되어 오던 중랑장공 외가 호구 입안과 중령랑장공 부인 하동정씨 분재 문권, 몇몇 가승(家乘)들에 기반하여 족보가 만들어졌다. 족보가 만들어지기 전의 기록, 조선 문과방목과 사마방목, 완산읍지 등의 기록에는 통천 김씨의 본관으로 통주와 통천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지명 변천에 따라 1285년(충렬왕 11)까지는 '''금양 김씨'''(金壤 金氏), 1413년(태종 13)까지는 '''통주 김씨'''(通州 金氏), 이후 현재까지는 '''통천 김씨'''(通川 金氏)로 하였다. 고려 중기 문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연보 무자년(戊子年, 1168년)에 그의 어머니는 '''금양 김씨'''(지금의 통천 김씨)로 외조부 김중권(金仲權, 이후 이름은 시정(施政))은 당시 큰 학자(원문 中古의 名儒)로 과거에 급제하여 울진 현위(蔚珍 縣尉)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4]

2. 1. 시조 및 초기 역사

1701년 간행된 족보 초간본 《신사보》에는 통천군 김교(較)를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1] 이후의 기록은 실전되어 고려 말 상서공 광정대부 판도판서 문한학사에 오른 '''김원등'''(金遠登)을 중시조로 하여 계대를 잇고 있다.[5]

1784년 개성 어느 산기슭에서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에는 경순왕의 8아들 중 첫째 '''김일'''(金鎰)이 시조 '''김교'''의 아버지라 한다. 그는 신라 경순왕의 장자인 마의태자와 동일인으로 여겨진다.[1]

이에 따르면, '''김일'''은 마의태자와 마찬가지로 신라가 망하자 강원도 인제에서 신라 국권 회복 운동을 하다가 고려군에 패배한 후 금강산에 들어갔다. 이때 그의 차남 '''김교'''(金較)는 인제에 남겨졌고, 이후 고려 광종 때 공을 세워 통주군(通州君)에 봉해졌다고 한다.[1]

그러나 《김은열 묘지명》은 배위 및 생애 등이 누락되어 있고, 형제 서차만 기술되어 있어 완전하지 않다. 또한 1785년 경주 김씨 김사목이 족보에 옮기는 과정에서 이름을 고치고 시호를 붙이는 등 가필을 심하게 하였다. 아들들의 이름 또한 《고려사》 등의 문헌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 자료에도 찾아볼 수 없어 진위 여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1]

《증보문헌비고》·《조선씨족통보》등의 문헌에도 경순왕마의태자와 시조의 아버지라는 '''김일'''(金鎰)을 별도 인물로 기술하고 있다.[1]

1970년 《경술보》에는 정난공신 '''김위'''(金渭)와 중시조 '''김원등'''(金遠登) 사이의 7위의 계대를 「김교-김욱-김이청-'''김위-김원상-김수웅-김광중-김체-김수강-김자정-김칠수-김원등'''」으로 기록하였다.[1]

시조 '''김교'''(金較)의 유적은 강원도 통천군 통천읍 동봉곡에, 사당은 통천읍 감당면 내동에 조성하였다. 중시조 '''김원등'''(金遠登)의 단소(壇所)는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 대종산에 있다.[1]

2. 2. 고려 시대

통천 김씨는 고려 초에는 금양 김씨, 고려 중엽부터 조선 초기까지는 통주 김씨, 조선 중기 이후 통천 김씨로 관향해 온 씨족이다. 1701년 족보 초간본은 고려 우왕 6년(1380)과 조선 태조 7년(1398)에 발간된 중랑장공 외가 호구 입안과 세종 8년(1427)에 작성된 중령랑장공 부인 하동정씨 분재 문권을 토대로 발간되었다.[1]

통천 김씨 중시조 김원등의 아들 김호는 중랑장공 외가호구입안(1380년)에 내시직장동정으로 기록되어 있다.[2]

지명 변천에 따라 1285년(충렬왕 11)까지는 '''금양 김씨'''(金壤 金氏)로, 1413년(태종 13)까지는 '''통주 김씨'''(通州 金氏)로 불렸다.

고려 중기 대문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연보 무자년(戊子年, 1168년)에 그의 어머니는 '''금양 김씨'''(지금의 통천 김씨)로 외조부 김중권(金仲權, 이후 이름은 시정(施政))은 당시 큰 학자(원문 中古의 名儒)로 과거에 급제하여 울진 현위(蔚珍 縣尉)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4]

2. 3. 조선 시대

통천 김씨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통주, 조선 중기 이후 통천으로 관향해 온 씨족이다.[1] 1380년1398년에 발간된 중랑장공 외가 호구 입안과 1427년에 작성된 중령랑장공 부인 하동정씨 분재 문권의 기록을 토대로 1701년 족보 초간본이 발간되었다.[1]

김호는 통천 김씨 중시조 김원등의 아들로 1419년 대과에 합격하였다. 김호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첫째 김여산은 진산교도를 지냈고, 둘째 김중령은 군수를 지냈으며, 김중령의 아들 김경도 부사를 지냈다.[2] 셋째 아들 김중복은 전직을 지냈다.[3] 김중복의 6대손 김빙은 1589년 기축옥사 때 백유함의 모함으로 역적으로 몰렸다.[3] 김빙의 아버지 김익한은 경기전 참봉으로 전주 경기전 중건 책임을 맡았으며, 1546년 증광시에 합격하였다.

기축옥사로 김빙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통천 김씨 가문은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김원등의 9세 김진의 아들 김여련이 선조를 호종하다 순절하여 서암이라는 시호와 정려를 하사받았다.[5] 그러나 김진과 가깝게 지내던 의병장 고경명과 조헌이 순국하면서 가문의 시련은 더욱 커졌다. 임진왜란 때 전북 완주군 소양면 이림리에 세거하던 통천 김씨 군수공파 일족이 멸족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1589년 기축옥사, 1592년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통천 김씨의 가세는 완전히 기울었다.

1701년 간행된 족보 초간본 《신사보》에는 통천군 교를 시조로 하고, 이후 김원등을 중시조로 하여 계대를 잇고 있다. 통천 김씨는 김호의 세 아들로부터 진산교도공파, 군수공파, 전직공파로 분파되었다.[5] 임진, 정유 양란 이후 가세가 크게 기울어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하였다.[5]

3. 주요 인물

통천 김씨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인물을 배출했다. 1701년 족보 초간본이 발간될 당시에는 고려 우왕 6년(1380)과 조선 태조 7년(1398)에 발간된 기록, 세종 8년(1427)에 작성된 문서 등이 참고되었다.[1]

통천 김씨 중시조 김원등의 아들 김호는 1380년에 내시직장동정, 1427년에는 중랑장으로 기록되었고, 세종 1년(1419) 문과에 급제했다.[2]

김호의 후손들과 그 외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3. 1. 조선 시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한 김호는 통천김씨 중시조 김원등의 아들이다. 김호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첫째 김여산은 진산교도를, 둘째 김중령은 군수를, 셋째 김중복은 전직을 지냈다.[2] 김중복의 6대손 김빙은 1589년 기축옥사 때 형조좌랑 추국관으로 백유함의 모함을 받아 역적으로 몰렸다.[3] 김빙의 아버지 김익한은 명종 1년(1546) 병오 증광시에 합격하였고, 경기전 참봉을 지냈다.[3]

김빙이 기축옥사 때 역적으로 몰려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면서, 일부 기록에는 김빙이 통천 김씨의 시조인 것처럼 잘못 기록되기도 했다. 그러나 김빙 이전에도 김호(1419), 김권(1517), 김원(1553) 등 문과 급제자와 김득개(1534), 김익한(1548), 김진(1552), 김응개(1558) 등 생원, 진사 합격자들이 중앙과 지방에서 활약했다.[3]

1589년 기축옥사로 통천 김씨 가문은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김진의 아들 김여련이 선조를 호종하다 순절하여 서암이라는 시호를 받았다.[4] 그러나 김진과 가깝게 지내던 의병장 고경명조헌이 순국하면서 가문의 시련은 더욱 커졌다. 임진왜란 때 전북 완주군 소양면 이림리에 살던 통천 김씨 군수공파 일족이 멸족당하는 등 가세가 완전히 기울었다.[4] 이괄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우고 순절한 김응의도 있다.

4. 분파

통천 김씨는 진산공파(珍山公派), 군수공파(郡守公派), 전직공파(殿直公派) 등으로 분파된다.[1]

파명파조
진산공파김여산
군수공파김중령
전직공파김중복


4. 1. 진산공파

파조는 진산교도(珍山敎導) '''김여산'''(金如山)이다.[1]

4. 2. 군수공파

파조는 군수 '''김중령'''(金仲齡)이다.

4. 3. 전직공파

파조는 '''김중복'''(金仲福)이다.

5. 분적

금화 김씨는 통천 김씨에서 분적된 성씨이다. 금화 김씨의 시조는 조선시대에 진사를 지낸 '''김낭'''(金浪)이다.[6]

5. 1. 금화 김씨

시조는 조선시대에 진사를 지낸 '''김낭'''(金浪)이다.[6]

6. 관향 변천

관향은 지명 변천에 따라 1285년(충렬왕 11)까지 '''금양 김씨'''(金壤 金氏), 1413년(태종 13)까지 '''통주 김씨'''(通州 金氏), 이후 현재까지 '''통천 김씨'''(通川 金氏)로 불렸다.[1]

고려 중기 대문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연보 무자년(戊子年, 1168년)에는 그의 어머니가 '''금양 김씨'''(지금의 통천 김씨)이며, 외조부 김중권(金仲權, 이후 이름은 시정(施政))은 당대의 큰 학자로 과거에 급제하여 울진 현위(蔚珍 縣尉)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1]

문헌상의 시조인 '''김빙'''(金憑) 이전과 족보 초간본인 《신사보》 발간 이전의 《국조방목》, 《사마방목》의 합격자 명단, 음서, 《국조문과방목성보》의 대과 합격자 기록에는 관향이 '''통주''' 혹은 '''통천'''으로 기록되어 있다.[1]

7. 세거지

통천 김씨는 고려 초 금양, 고려 중엽부터 조선 초기까지 통주, 조선 중기 이후 통천을 관향으로 사용해 왔다.[1] 고려·조선 시대에는 후손들이 관직을 따라 강원도 통천에서 전라도 완산(현 전주시), 충청도 서천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 때 통천 김씨 가문이 큰 시련을 겪은 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일대에 거주하던 군수공파 일족들이 의병으로 출정하여 전몰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시련으로 후손들이 흩어지고 행방불명이 되어 오늘날 소족으로 남게 되었다.

8. 과거 급제자

고려 및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7]
시대구분성명(한자)급제년도(왕)비고
고려문과김중권(金仲權)
조선문과김호(金浩)1419년(세종 1년)기해 증광시 동진사 20위
김권(金權)1517년(중종 12년)정축 별시 3등
김원(金瑗)1553년(명종 8년)계축 별시 병과 12위
김빙(金憑)1580년(선조 13년)경진 별시 병과 2위
김여련(金汝鍊)1588년(선조 21년)무자 식년시 병과 21위
김응의(金應漪)



조선시대 생원시 급제자[8]
구분성명(한자)급제년도(왕)비고
생원시김호(金浩)1414년(태종 14년)갑오 식년시 생원 1등
생원시김익한(金翼漢)1546년(명종 1년)병오 증광시 생원 3등
생원시김진(金瑱)1552년(명종 7년)임자 식년시 생원 2등
생원시김응개(金應愷)1558년(명종 13년)무오 식년시 생원 2등
생원시김여순(金汝錞)1603년(선조 36년)계묘 식년시 생원 3등
생원시김오일(金五一)1673년(현종 14년)계축 식년시 생원 2등



조선시대 진사시 급제자[8]
구분성명(한자)급제년도(왕)비고
진사시김득개(金得愷)1534년(중종 29년)갑오 식년시 진사 3등
진사시김윤환(金閏煥)1891년(고종 28년)신묘 증광시 진사 3등



'''완산지 생진 기록'''[9]


  • 김여산(金汝山) : 김호(金浩)의 아들
  • 김익한(金翼漢) : 통천군 교 후


'''완산지 음사 기록'''[10]

  • 김중령(金仲靈) : 군수
  • 김경(金경) : 김중령(金仲靈)의 아들, 부사

9. 유적지

통천 김씨 관련 유적지는 강원도 통천군, 인제군, 전라북도 완주군, 전주시, 충청남도 보령시, 서천군, 경상남도 산청군 등지에 남아있다.

지역상세 위치
강원도 통천군통천읍
강원도 인제군상남면
황해도 개성시일대
전라북도 완주군구이면 두현리(청명동), 소양면 이림리
전라북도 전주시안덕원
충청남도 보령시웅천읍 두룡리(두룡산, 주렴산), 남포면 옥동리(옥마산)
충청남도 서천군비인면 장포리(포성대), 관리(안익골 완리산), 종천리(봉산), 판교면 우라리
경상남도 산청군단성면


참조

[1] 서적 통천김씨천년사 휴먼21 2010-01
[2] 서적 완산읍지
[3] 서적 조선왕조실록
[4] 서적 동국이상국집 서문
[5] 서적 회수공 가장
[6] 문서 철원군|금화(金化)
[7] 서적 국조문과방목(규장각한국학연구원[규 106])
[8] 웹인용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
[9] 서적 완산읍지
[10] 서적 완산읍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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