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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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로이아 전쟁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전쟁으로, 기원전 13세기경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지만, 역사적 사실 여부와 트로이의 위치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전쟁의 원인은 파리스의 헬레네 납치, 제우스의 과도한 인구 감소 계획 등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며, 그리스와 트로이 간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른 분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전쟁은 10년간 지속되었으며, 트로이 목마 계략으로 트로이가 함락되었다. 전쟁 이후 그리스 영웅들의 비극적인 귀환과 트로이 생존자들의 새로운 정착 이야기가 전해지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등 서양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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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아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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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아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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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개요 | |
전쟁 | 트로이아 전쟁 |
장소 | 소아시아 (이리오스) |
시기 | 청동기 시대 |
연대 | 기원전 1700년 - 기원전 1200년경 |
결과 | 아카이아 (그리스 연합군)의 승리. 요새 도시 이리오스의 붕괴, 트로이아의 멸망. |
교전 세력 | |
아카이아 (그리스 연합군) | 미케네 스파르타 이타케 살라미스 섬 미르미돈인 크레타 섬 미시아 (일시적으로 오해로 적대했으나 후에 화해하고 협력) |
트로이아 | 트로이아 아마존 |
주요 인물 | |
아카이아 (그리스 연합군) | 대 아이아스 소 아이아스 아킬레우스 아가멤논 안틸로코스 이도메네우스 오디세우스 칼카스 시논 디오메데스 텔산드로스 테르시테스 팔라메데스 파트로클로스 필록테테스 프로테실라오스 네스토르 메넬라오스 마카오온 |
트로이아 | 아이네이아스 아스테ュ아낙스 (스카만드리오스) 안드로마케 에우리필로스 카산드라 사르페돈 돌론 헥토르 파리스 (알렉산드로스) 헬레네 프리아모스 (포다르케스) 헬레노스 펜테실레이아 멤논 라오콘 |
관련 신 | |
전쟁의 원흉 | 에리스 |
그리스 측 | 아테나 헤파이스토스 헤라 헤르메스 테티스 포세이돈 |
트로이아 측 | 아프로디테 아폴론 아레스 아르테미스 레토 스카만드로스 제우스 |
주요 사건 | |
주요 사건 | 불화의 사과 파리스의 심판 헬레네의 유괴 트로이아의 목마 이리오스의 함락 트로이아로부터의 귀환 오디세우스의 귀환 여행 아이네이아스와 로마의 건국 |
주요 원전 | |
주요 원전 |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서사시 순환 키프리아 아이티오피스 아이네이스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필록테테스 아이아스 트로이아의 여인들 트로이아 전쟁기 |
2. 원인
트로이아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그리스 측과 페르시아 측의 주장이 서로 다르다.
전통적으로 트로이 전쟁은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간의 다툼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새겨진 황금 사과를 던졌고, 세 여신은 각자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주장하며 사과를 차지하려 했다. 이들은 파리스에게 심판을 맡겼고, 파리스는 아프로디테가 제안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헬레네를 선택하여 아프로디테에게 사과를 주었다. 그 결과 헬레네가 남편 메넬라오스를 떠나 트로이의 파리스에게 가자, 메넬라오스는 그리스에 전쟁을 요청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는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길 것이라는 예언과 테티스의 아들이 아버지보다 위대해질 것이라는 예언 때문에 테티스를 인간 왕 펠레우스와 결혼시켰다.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에리스는 황금 사과를 던졌고, 이것이 세 여신의 다툼과 파리스의 심판, 헬레네의 납치로 이어져 결국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한편, 헤로도토스가 기록한 페르시아 측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성들의 납치는 보복성 납치의 결과였다. 이오와 에우로페의 납치 사건 이후, 그리스인들이 메데이아를 납치하는 등 보복이 이어졌고, 알렉산드로스(파리스)가 헬레네를 납치한 것도 이러한 보복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235]
2. 1. 그리스 측 주장
제우스는 인구가 너무 늘어나자, 질서의 여신 테미스와 상의하여 큰 전쟁을 일으켜 인류 대부분을 죽이기로 결정했다.[235]올림푸스에서는 인간 펠레우스와 티탄 족의 딸 테티스의 결혼식이 논의되고 있었다. 그러나 불화의 여신 에리스는 초대받지 못해 화가 났고, ‘가장 아름다운 여신(καλλίστῃ)’에게 바치는 헤스페리데스의 황금 사과(불화의 사과)를 신들에게 보냈다.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세 여신이 이 사과를 두고 다투었고, 제우스는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심판을 맡겼다. (파리스의 심판)[235]
세 여신 중 헤라는 세계를 지배할 힘, 아테나는 어떤 전쟁에서도 이길 힘, 아프로디테는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주겠다고 했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를 선택했고, 그녀의 주선으로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왕비 헬레네를 데려갔다. 파리스의 여동생 카산드라 만이 이 사건이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고 예언했으나, 아폴론의 저주 때문에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235]
메넬라오스는 형 아가멤논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오디세우스와 함께 트로이로 가서 헬레네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파리스가 거절하자, 아가멤논, 메넬라오스, 오디세우스는 헬레네를 되찾고 트로이를 벌하기 위해 원정군을 꾸렸다.[235]
이 전쟁으로 신들도 편이 갈렸다. 헤라, 아테나, 포세이돈은 그리스를, 아폴론, 아르테미스, 아레스, 아프로디테는 트로이를 편들었다.[235]
2. 2. 페르시아 측 주장
헤로도토스가 기록한 페르시아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 신화에서 지중해를 건너간 여성들은 사실 납치혼의 피해자들이었고 신화 속 파리스가 헬레네를 트로이로 데려간 것도 그 납치혼의 보복이었다는 주장이다.전설 속의 여신 이오는 사실 포이니케 사람들이 헬라스의 아르고스에서 납치한 것이었고 헬라스 측도 이에 보복해 포이니케의 영토인 튀로스에서 공주 에우로페를 납치했다고 한다. 그 뒤 그리스인들이 메데이아 공주를 납치하는 등 보복 납치혼으로 신경전을 일삼다가, 일리온(트로이)의 왕자 알렉산드로스(파리스)가 보복 목적으로 라케다이몬(스파르타)에서 헬레네를 납치했고 이것이 악화되어 전쟁으로 확대되었다는 주장이다.[235]
3. 전개 과정
트로이아 전쟁은 10년 동안 이어졌다. 보이오티아 지방 아울리스에 아가멤논을 총대장으로 하는 10만 명, 1168척의 아카이아 연합군이 집결했다.[63] 이들은 트로이아 근교 해변에 상륙하여 아킬레우스의 활약으로 트로이아군을 격퇴하고 해변에 진을 쳤다.[81] 트로이아군은 견고한 성벽을 가진 시가지에 농성하며 양군은 스카만드로스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오디세우스는 전쟁을 피하려 미친 척했지만, 팔라메데스에게 간파당해 참전했다.[39][48] 스키로스에서 아킬레우스는 데이다미아와 관계를 맺고 네오프톨레모스를 낳았다.[50] 오디세우스 일행은 아킬레우스를 데려왔다.[26][51]
아카이아군은 9년 동안 트로이를 포위했지만, 자금 부족으로 트로이 동맹국들을 약탈하고 농사를 지으며 시간을 보냈다.[86] 트로이는 완전히 포위되지 않아 소아시아 내륙과 통신을 유지했고, 증원군이 계속 도착했다.[87] 아킬레우스와 아이아스는 트로이 동맹국 영토를 약탈했다.[88] 아킬레우스는 리카온을 붙잡아 노예로 팔았다.[94] 아이아스는 트라키아 반도를 황폐하게 만들고 테크메사를 데려갔다.[96] 오디세우스는 팔라메데스를 모함하여 죽게 만들었다.[103] 아카이아 군대는 전투와 보급 부족으로 지쳐 반기를 들었지만, 아킬레우스가 억지로 머물게 했다.[39]
《일리아스》는 전쟁 10년째, 크리세스가 딸을 돌려달라고 아가멤논에게 청하면서 시작된다. 아가멤논이 거절하자 아폴론이 역병을 내렸고, 아가멤논은 크리세이스를 돌려주고 아킬레우스의 첩 브리세이스를 빼앗았다. 분노한 아킬레우스는 전투를 거부했고, 제우스는 트로이인들에게 승리를 안겨주기로 했다.
아킬레우스가 없는 동안 아카이아군은 고전했지만, 디오메데스가 활약하여 트로이 영웅들을 죽이고 신들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러나 트로이인들은 아카이아군을 야영지까지 몰아붙였다. 헥토르가 파트로클로스를 죽이자, 아킬레우스는 복수를 위해 헥토르를 죽이고 시신을 끌고 다녔다. 프리아모스가 아킬레우스를 찾아와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받았고, 헥토르의 장례식으로 《일리아스》는 끝난다.
헥토르의 장례식 후, 아마존의 여왕 펜테실레이아가 도착했지만 아킬레우스에게 죽었다.[116] 멤논이 군대를 이끌고 왔지만, 아킬레우스에게 죽었다.[116] 아킬레우스는 파리스의 독화살에 맞아 죽었다.[116][118][126]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는 헤라클레스의 활을 가진 필록테테스를 데려왔고, 필록테테스는 파리스를 쏘아 죽였다. 오디세우스는 팔라디움을 훔쳐왔다.[157]
전쟁의 종말은 오디세우스가 고안한 트로이 목마로 다가왔다. 에페이오스가 아테나의 지시를 받아[151] 아폴론에게 신성한 산수유 숲의 나무로 만들었으며,[152] "그리스인들은 귀향을 위해 아테나에게 이 감사의 제물을 바칩니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153] 오디세우스를 필두로 한 병사들이 속이 빈 말에 채워졌고,[154] 나머지 군대는 야영지를 불태우고 테네도스로 항해했다.[155]
트로이인들은 전쟁이 끝났다고 믿고 말을 성 안으로 들였다.[156] 카산드라와 라오콘은 경고했지만 무시당했다.[159] 밤에 그리스군이 나와 성문을 열었고, 아카이아군은 도시를 함락시키고 불태웠다.[163]
네오프톨레모스는 프리아모스를 죽였고,[157][165] 메넬라오스는 헬레네를 되찾았다.[157][167] 아이아스 소(小)는 카산드라를 강간했다.[157][168] 안테노르는 목숨을 건졌고,[169] 아이네이아스는 도망쳤다.[165] 그리스인들은 아스티아낙스를 성벽에서 떨어뜨려 죽이고,[172] 폴릭세네를 아킬레우스의 무덤에 제물로 바쳤다.[175]
3. 1. 아카이아 연합군의 결성과 출정
메넬라오스와 오디세우스는 외교적 수단을 통해 헬레네를 트로이에서 데려오려 했으나 실패했다.[46] 메넬라오스는 아가멤논에게 헬레네를 구하기 위해, 과거 구혼자들이 맹세했던 대로 모든 아카이아의 왕과 공작들에게 사절을 보내 맹세를 지키도록 요청했다.[47]아카이아 군대는 아울리스에 집결했다. 키프로스 왕 키니라스는 50척의 배를 보내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미그달리온의 아들이 이끄는 배 1척과 흙으로 만든 배 49척만 보냈다.[53] 이도메네우스는 크레타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공동 지휘관 자격을 얻었다.[54] 15세의 아킬레우스가 마지막으로 합류했다.

아폴론에게 희생을 바친 후, 뱀 한 마리가 제단에서 참새 둥지로 기어가 어미 새와 새끼들을 잡아먹고 돌로 변했다. 칼카스는 이를 전쟁 10년째에 트로이가 함락될 징조로 해석했다.[55]
아카이아인들이 전쟁을 위해 떠날 때 길을 잃고 미시아에 상륙하여 전투가 벌어졌다. 아킬레우스는 텔레포스에게 부상을 입혔고,[57] 텔레포스는 테르산드로스를 죽였다.[58] 텔레포스는 신탁을 통해 "상처를 입힌 자가 치유할 것이다"라는 답을 얻었다.[39] 아카이아 함대는 폭풍에 흩어졌고, 아킬레우스는 스키로스에 상륙하여 데이데이미아와 결혼했다. 아카이아 군대는 다시 아울리스에 모였다.[39]
텔레포스는 아울리스로 가서 아가멤논에게 상처를 치유해달라고 요청하거나,[59] 오레스테스를 납치하여 몸값을 요구했다.[60] 아킬레우스는 의료 지식이 없다며 거절했지만, 오디세우스가 창 조각으로 상처를 긁어 텔레포스를 치유했다.[61] 텔레포스는 아카이아인들에게 트로이로 가는 길을 안내했다.[59]
8년 후, 1,000척이 넘는 함대가 다시 모였다.[63] 바람이 멈추자, 칼카스는 아르테미스가 아가멤논에게 벌을 내리고 있다고 말했다.[39] 아르테미스를 달래기 위해 이피게네이아를 희생해야 했다.[64] 아가멤논은 거절했지만, 다른 지휘관들의 압박에 굴복하거나, 사슴을 대신 희생하거나, 아르테미스가 소녀를 불쌍히 여겨 양으로 대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39] 헤시오도스는 이피게네이아가 헤카테가 되었다고 전한다.[67]
아카이아 군대는 《일리아스》의 선박 목록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28개 파견대, 1186척의 펜테콘테르로 구성되었으며, 총 병력은 7만 명에서 13만 명으로 추정된다. 《비블리오테카》에도 다른 선박 목록이 제시되어 있지만, 숫자는 일치한다.
칼카스는 배에서 내려 땅을 밟는 첫 번째 아카이오스인이 가장 먼저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다.[79] 프로테실라오스가 가장 먼저 상륙했고,[80] 헥토르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81] 아킬레우스는 포세이돈의 아들 키크노스를 죽였다.[81] 트로이군은 도시 성벽 안으로 도망쳤다.[81]
3. 2. 10년간의 공방전
보이오티아 지방의 아울리스에 집결한 아가멤논을 총대장으로 하는 아카이아군은 총 10만 명, 1168척의 대함대였다.[63] 아카이아인 원정군은 트로이아 근교 해변에 상륙하여, 아킬레우스의 활약으로 기다리고 있던 트로이아군을 격퇴하고 해변에 진을 쳤다.[81] 트로이아군은 견고한 성벽을 가진 시가지에 농성하였고, 양군은 바다와 도시 중간에 흐르는 스카만드로스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메넬라오스와의 결혼 이후,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와 결혼하여 아들 텔레마코스를 낳았다. 그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미친 척하며 밭에 소금을 뿌렸다. 팔라메데스는 쟁기 앞에 어린 텔레마코스를 세워 그를 속였다. 오디세우스는 아들을 죽일 수 없어 쟁기를 돌렸고, 이로써 그의 정신이 온전하다는 것을 드러내어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39][48] 그러나 호메로스에 따르면, 오디세우스는 처음부터 군사적 모험을 지지했고, 필로스의 왕 네스토르와 함께 군대를 모집하기 위해 지역을 여행했다.[49]
스키로스에서 아킬레우스는 왕의 딸 데이다미아와 관계를 맺어, 네오프톨레모스라는 자식을 낳았다.[50] 오디세우스, 텔라몬의 아이아스, 아킬레우스의 스승 포이닉스는 아킬레우스를 데려오기 위해 갔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는 그가 전쟁에 가지 않도록 여자로 변장시켰지만, 한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은 뿔피리를 불었고, 아킬레우스는 침입자에게서 도망치는 대신 창을 잡아 자신을 드러냈다.[26]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은 장신구와 무기를 든 상인으로 변장했고, 아킬레우스는 옷과 보석류보다 무기를 더 좋아했기 때문에 다른 여자들과 구별되었다.[51] 파우사니아스는 호메로스에 따르면 아킬레우스는 스키로스에 숨지 않고 트로이 전쟁의 일환으로 섬을 정복했다고 말했다.[52]
아카이아 군대는 처음 아울리스에 집결했다. 키프로스의 왕 키니라스를 제외한 모든 구혼자들이 군대를 보냈다. 그는 아가멤논에게 흉갑을 보냈고 50척의 배를 보내겠다고 약속했지만, 미그달리온의 아들이 이끄는 실제 배 1척과 흙으로 만든 배 49척만 보냈다.[53] 이도메네우스는 트로이에 대한 미케네의 전쟁에서 크레타 군대를 이끌 의향이 있었지만, 공동 지휘관으로서만 가능했고, 그 요청은 받아들여졌다.[54] 마지막으로 도착한 지휘관은 당시 15세였던 아킬레우스였다.
아폴론에게 희생을 바친 후, 뱀 한 마리가 제단에서 근처 플라타너스 나무의 참새 둥지로 기어갔다. 뱀은 어미 새와 아홉 마리의 새끼를 잡아먹고 돌로 변했다. 칼카스는 이를 트로이가 전쟁 10년째에 함락될 징조로 해석했다.[55]
아카이아인들이 전쟁을 위해 떠났을 때, 그들은 길을 몰랐고 실수로 헤라클레스의 아들인 텔레포스 왕이 다스리는 미시아에 상륙했다. 텔레포스는 아르카디아인들을 이끌고 그곳에 정착했었다.[56] 전투에서 아킬레우스는 텔레포스를 부상입혔고,[57] 텔레포스는 테르산드로스를 죽였다.[58] 상처가 낫지 않자 텔레포스는 신탁에 "상처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라고 물었다. 신탁은 "상처를 입힌 자가 치유할 것이다"라고 답했다. 아카이아 함대는 출항한 후 폭풍에 흩어졌다. 아킬레우스는 스키로스에 상륙하여 데이데이미아와 결혼했다. 새로운 집결은 다시 아울리스에서 열렸다.[39]
텔레포스는 아울리스로 가서 거지 행세를 하며 아가멤논에게 상처를 치유하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하거나,[59] 오레스테스를 납치하여 몸값을 요구하며 상처를 치유해달라고 요구했다.[60] 아킬레우스는 의료 지식이 없다며 거절했다. 오디세우스는 상처를 입힌 창이 그것을 치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추론했다. 창 조각이 상처에 긁혀졌고 텔레포스는 치유되었다.[61] 텔레포스는 그 후 아카이아인들에게 트로이로 가는 길을 보여주었다.[59]
일부 학자들은 텔레포스에 대한 원정과 그 해결을 트로이 전쟁의 주요 이야기에서 파생된 요소의 재작업으로 간주했지만, 그것은 또한 주요 이야기의 사건과 주제를 예상하는 "예비 모험"의 이야기 패턴에 맞는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초기적이고 필수적"일 가능성이 높다.[62]

폭풍으로 흩어진 지 8년 만에, 1,000척이 넘는 함대가 다시 모였다.[63] 그들이 모두 아울리스에 도착했을 때, 바람이 멈추었다. 예언자 칼카스는 여신 아르테미스가 아가멤논이 신성한 사슴이나 신성한 숲의 사슴을 죽이고, 자신보다 사냥을 더 잘한다고 자랑한 것에 대해 벌을 내리고 있다고 말했다.[39] 그가 말하길, 아르테미스를 달래는 유일한 방법은 이피게네이아를 희생시키는 것이었는데, 이피게네이아는 아가멤논과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딸이거나,[64] 헬렌과 테세우스의 딸로, 헬렌이 메넬라오스와 결혼했을 때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맡겨진 딸이었다.[65]
아가멤논은 거절했고, 다른 지휘관들은 팔라메데스를 원정 지휘관으로 임명하겠다고 위협했다.[66] 어떤 버전에서는 아가멤논이 굴복하여 희생을 치렀지만, 다른 버전에서는 그가 대신 사슴을 희생했거나, 마지막 순간에 아르테미스가 소녀를 불쌍히 여겨 그녀를 자신의 신전의 처녀로 데려가고, 대신 양을 바쳤다고 한다.[39] 헤시오도스는 이피게네이아가 여신 헤카테가 되었다고 말한다.[67]
아카이아 군대는 《일리아스》의 두 번째 책인 선박 목록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그리스 본토, 펠로폰네소스, 도데카니소스 제도, 크레타, 이타카에서 온 28개 파견대로 구성되었으며, 50명의 노를 젓는 사람들이 있는 배인 1186척의 펜테콘테르로 이루어졌다. 투키디데스는[68] 전통에 따르면 약 1200척의 배가 있었고, 보에오티아의 배에는 120명의 병사가 있었지만, 필록테테스의 배에는 50명의 노를 젓는 사람들만 있었다고 말하며, 이는 아마도 최대치와 최소치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숫자는 총 7만 명에서 13만 명의 병력을 의미한다. 또 다른 선박 목록은 《비블리오테카》에 제시되어 있는데, 약간 다르지만 숫자는 일치한다. 일부 학자들은 호메로스의 목록이 청동기 시대의 원본 문서, 아마도 아카이아 지휘관의 작전 명령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69][70][71]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호메로스의 날조라고 믿는다.
《일리아스》의 두 번째 책에는 또한 트로이의 동맹군 목록이 있는데, 여기에는 헥토르가 이끄는 트로이인 자신과, 아이네아스가 이끄는 다르다니아인, 젤레이아인, 아드라스테이아인, 페르코티아인, 펠라스고이인, 트라키아인, 키코네스 창병, 파이오니아 궁수, 할리조네스, 미시아인, 프리기아인, 마이오니아인, 밀레토스인, 사르페돈과 카리아인이 이끄는 리키아인이 포함된다. 트로이 언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으며, 카리아인은 특히 카리아어를 사용하는 야만인이라고 하며, 동맹 파견대는 많은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개별 지휘관이 명령을 번역해야 했다고 한다.[72] 《일리아스》의 트로이인과 아카이아인은 같은 종교, 같은 문화를 공유하며, 적 영웅들은 같은 언어로 서로 대화하지만, 이는 극적인 효과일 수 있다.

필록테테스는 헤라클레스의 친구였는데, 다른 사람은 아무도 하려 하지 않았을 때 헤라클레스의 장례 화장을 해준 덕분에 헤라클레스의 활과 화살을 받았다.[73] 그는 아카이아인들을 위해 싸울 계획으로 일곱 척의 배에 사람들을 가득 태우고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다. 그들은 보급품을 위해 크리세 섬에 들렀거나,[74] 아니면 나머지 함대와 함께 테네도스에 정박했다.[75] 그러던 중 필록테테스는 뱀에 물렸다. 상처는 곪아 악취가 났고, 아르테이데스는 오디세우스의 조언에 따라 필록테테스에게 레므노스 섬에 머물도록 명령했다.[39] 메돈이 필록테테스의 부하들을 통솔하게 되었다. 테네도스에 상륙하는 동안 아킬레우스는 아폴론의 아들인 테네스 왕을 죽였는데, 어머니는 그렇게 하면 아폴론에게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76] 테네도스에서 아가멤논은 헬레네의 반환을 요구하는 사절단을 트로이의 프리아모스 왕에게 보냈는데, 사절단은 메넬라오스와 오디세우스로 구성되었다. 사절단은 거절당했다.[77]
필록테테스는 10년 동안 레므노스 섬에 머물렀는데, 소포클레스의 비극 《필록테테스》에 따르면 무인도였지만, 초기 전승에 따르면 미니아인이 살고 있었다.[78]
칼카스는 배에서 내려 땅을 밟는 첫 번째 아카이오스인이 가장 먼저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다.[79] 그래서 심지어 주요 그리스인들조차 상륙을 망설였다. 마침내 필라케의 지도자인 프로테실라오스가 가장 먼저 상륙했다.[80]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방패를 먼저 던져 땅에 닿게 함으로써 그를 속였고, 그가 배에서 먼저 뛰어내렸지만 트로이 땅에 가장 먼저 상륙한 사람은 아니었다. 헥토르는 일대일 전투에서 프로테실라오스를 죽였지만 트로이군은 해변을 내주었다. 두 번째 공격에서 아킬레우스는 포세이돈의 아들 키크노스를 죽였다. 그러자 트로이군은 도시의 성벽 안전 지역으로 도망쳤다.[81] 그 성벽은 그리스인에 대한 방어를 위한 튼튼한 요새 역할을 했다. 성벽의 구조는 너무 인상적이어서 전설에 따르면 라오메돈 트로이 왕에게 강제로 봉사한 1년 동안 포세이돈과 아폴론이 건설했다고 한다.[82] 프로테실라오스는 많은 트로이인을 죽였지만 이야기의 대부분의 버전에서 헥토르에게 죽임을 당했다.[83] 하지만 다른 버전에서는 아이네이아스, 아카테스, 또는 에포르보스가 그의 살해자로 언급된다.[84] 아카이오스인들은 그를 트로아드 건너편, 트라키아 반도에서 신으로 매장했다.[85] 프로테실라오스가 죽은 후 그의 형제 포다르케스가 그의 군대를 지휘했다.

아카이아군은 트로이를 9년 동안 포위했다. 이 전쟁의 이 부분은 현존하는 자료에서 가장 덜 다루어지는데, 자료들은 전쟁의 마지막 해의 사건들에 대해 더 이야기하는 것을 선호한다. 최초 상륙 후 군대는 10년째에야 다시 완전하게 소집되었다. 투키디데스는 이것이 자금 부족 때문이라고 추론한다. 그들은 트로이의 동맹국들을 약탈하고 트라키아 반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시간을 보냈다.[86] 트로이는 완전히 포위된 적이 없었으므로 소아시아 내륙과의 통신을 유지했다. 증원군은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해서 도착했다. 아카이아군은 다르다넬스 해협 입구만 통제했고, 트로이와 그 동맹국들은 아비도스와 세스토스의 최단 지점을 통제하며 유럽의 동맹국들과 소통했다.[87]
아킬레우스와 아이아스는 아카이아군 중 가장 활동적이었으며, 별도의 군대를 이끌고 트로이 동맹국들의 영토를 약탈했다. 호메르에 따르면 아킬레우스는 11개의 도시와 12개의 섬을 정복했다.[88] 아폴로도로스에 따르면, 그는 트로아드 지역에서 아이네아스의 땅을 약탈하고 그의 가축을 훔쳤다.[89] 그는 또한 리르나소스, 페다소스 및 주변의 많은 도시들을 점령하고 트로일로스를 죽였는데, 그가 20세가 되면 트로이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아킬레우스는 피시디케의 도움을 받아 페다소스, 모네니아,[92] 그리고 메팀나 (in 레스보스)를 점령했다.[93] 이 도시들에서 얻은 전리품 중에는 리르네소스 출신 브리세이스가 아킬레우스에게 주어졌고, 히포플라키아 테베 출신 크리세이스는 아가멤논에게 주어졌다.[39]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의 아들 리카온을 그의 아버지 정원에서 나뭇가지를 자르던 중 붙잡았다.[94] 파트로클로스는 그를 레므노스에서 노예로 팔았고,[39] 그곳에서 임브로스의 에에티온이 사서 트로이로 데려갔다. 파트로클로스가 죽은 지 불과 12일 후 아킬레우스는 그를 죽였다.[95]
테라몬의 아들 아이아스는 프리아모스의 사위인 폴리메스토르가 왕이었던 트라키아 반도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폴리메스토르는 그가 보호하고 있던 프리아모스의 자식 중 한 명인 폴리도로스를 넘겨주었다. 그 후 그는 프리기아 왕 텔레우타스의 도시를 공격하여 일대일 결투에서 그를 죽이고 그의 딸 테크메사를 데려갔다.[96] 아이아스는 또한 이다 산과 시골에서 트로이 목장의 가축을 사냥했다.
도자기에 그려진 수많은 그림들은 문학적 전통에 언급되지 않은 이야기를 시사한다. 전쟁 중 어느 시점에서 아킬레우스와 아이아스는 보드 게임()을 하고 있었다.[97][98] 그들은 게임에 몰두하여 주변의 전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99] 트로이인들이 공격하여 영웅들에게 다가갔고, 그들은 아테나의 개입으로 구원받았다.[100]
오디세우스는 곡물을 가지고 돌아오기 위해 트라키아로 보내졌지만 빈손으로 돌아왔다. 팔라메데스가 그를 비웃자 오디세우스는 그에게 더 잘해낼 수 있는지 시합을 걸었다. 팔라메데스는 출항하여 곡물을 가득 실은 배로 돌아왔다.[101] 오디세우스는 팔라메데스가 자신의 아들의 생명을 위협한 것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복수심에 불타는 오디세우스는 프리아모스가 팔라메데스에게 보낸 죄를 덮어씌우는 위조 편지를 꾸몄고,[103] 팔라메데스의 숙소에 금을 숨겨두었다. 이 편지와 금이 "발견"되자 아가멤논은 팔라메데스를 반역죄로 돌로 쳐 죽였다.
그러나 파우사니아스는 《키프리아》를 인용하여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가 팔라메데스가 낚시를 하는 동안 익사시켰다고 말하며, 딕티스는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가 팔라메데스를 금이 있다고 속여 우물로 유인한 다음 돌로 쳐 죽였다고 말한다.[104]
팔라메데스의 아버지 나우플리우스는 트로아드로 항해하여 정의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복수를 위해 나우플리우스는 아카이아 왕국들을 돌아다니며 왕들의 아내들에게 그들이 트로이의 첩들을 데려와 그들을 폐위시키려 한다고 말했다. 많은 그리스 아내들이 남편을 배신하도록 설득당했는데, 가장 중요한 사람은 아가멤논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로, 아이에기스토스, 티에스테스의 아들에게 유혹당했다.[105]
상륙 후 9년이 거의 다 되어갈 무렵, 아카이아 군대는 전투와 보급 부족에 지쳐 지도자들에게 반기를 들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키프리아》에 따르면, 아킬레우스는 군대를 억지로 머물게 했다.[39] 아폴로도로스에 따르면, 아가멤논은 땅에서 손만 대면 포도주, 밀, 기름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진 아니오스의 딸들인 포도 재배자들을 데려와 군대의 보급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106]
《일리아스》의 이야기는 쌍방에 희생을 내면서 9년이 지나 전쟁이 10년째에 접어든 시점을 기점으로 시작한다.
3. 3. 트로이 목마와 함락
신화에 따르면 트로이아는 목마 때문에 멸망했다고 전해진다. 그리스군은 10년 동안 트로이아와 지지부진한 싸움을 이어가다가, 목마를 이용한 계책을 생각해 내고 철수하는 척했다. 트로이아군은 이 목마를 승리의 전리품으로 여겨 성 안으로 들였다. 그러나 그날 밤, 목마 안에서 오디세우스를 필두로 한 그리스 특공대가 나왔고, 밤에 성 밖에서 숨어 기다리던 그리스 군사들과 합류하여 성문을 열었다. 그리스 본군은 트로이아 왕을 죽이고 도시를 불태워 멸망시켰다.[151][152][153][154][155][156]전쟁의 종말은 오디세우스가 고안한 새로운 책략, 즉 트로이 목마로 다가왔다. 트로이인들에게 신성한 동물이었던 거대한 속 빈 나무 말은 에페이오스가 아테나의 지시를 받아[151] 아폴론에게 신성한 산수유 숲의 나무로 만들었으며,[152] "그리스인들은 귀향을 위해 아테나에게 이 감사의 제물을 바칩니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153] 오디세우스를 필두로 한 병사들이 속이 빈 말에 채워졌고,[154] 나머지 군대는 야영지를 불태우고 테네도스로 항해했다.[155]
트로이인들은 그리스인들이 떠났다는 것을 알고 전쟁이 끝났다고 믿으며 "기뻐하며 말을 도시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156] 그들은 말을 어떻게 할지 논쟁했는데, 어떤 이들은 바위에서 던져 버리거나 불태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다른 이들은 아테나에게 헌정해야 한다고 말했다.[157][158]
카산드라와 라오콘은 말을 보관하는 것에 대해 경고했다.[159] 카산드라는 아폴로로부터 예언의 능력을 받았지만, 아폴로에 의해 결코 믿음을 얻지 못하는 저주를 받았다. 뱀들이 바다에서 나와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 중 한 명,[157] 혹은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 모두,[160] 혹은 그의 아들들만[161] 삼켰는데, 이 징조는 아이네이아스의 추종자들을 매우 두렵게 하여 그들이 이다로 물러나게 했다.[157] 트로이인들은 말을 보관하기로 결정하고 밤새 광적인 축제와 축하를 벌였다.[134] 아카이아의 스파이 시논은 "자정이 되고 맑은 달이 떠오를 때"[162] 테네도스에 주둔한 함대에 신호를 보냈고, 말 안에 있던 병사들이 나와 경비병들을 죽였다.[163]
아카이오이군은 도시로 진입하여 잠든 시민들을 살해했다. 날이 밝을 때까지 대규모 학살이 계속되었다. 절망감에 사로잡힌 트로이인들은 조직력과 지도자가 없었음에도 격렬하게 반격했다. 전투가 최고조에 달하자, 일부는 쓰러진 적의 복장을 입고 혼란스러운 시가전에서 기습 반격을 가했다. 다른 수비수들은 지붕의 기와와 무거운 물건들을 약탈자들에게 쏟아부었다. 그러나 상황은 암울했고, 결국 남은 수비수들은 도시 전체와 함께 파괴되었다.
네오프톨레모스는 제우스의 제단에 피신해 있던 프리아모스를 죽였다.[157][165] 메넬라오스는 파리스가 죽은 후 헬레네의 남편이었던 데이포보스를 죽였고, 헬레네도 죽이려 했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칼을 버리고[166] 그녀를 배로 데려갔다.[157][167]

아이아스 소(小)는 아테나의 제단에서 카산드라를 강간했는데, 카산드라는 여신상을 붙잡고 있었다. 아이아스의 부정한 행위 때문에 아카이오이군은 오디세우스의 주장에 따라 그를 돌로 쳐 죽이려 했지만, 그는 아테나의 제단으로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157][168]
헬레네의 반환을 요구하기 위해 메넬라오스와 오디세우스를 환대하고 옹호했던 안테노르는 그의 가족과 함께 목숨을 건졌다.[169] 아이네이아스는 아버지를 등에 업고 도망갔으며, 아폴로도로스에 따르면 그의 경건함 때문에 가게 되었다.[165]
그리스인들은 도시를 불태우고 전리품을 나누었다. 카산드라는 아가멤논에게 주어졌다. 네오프톨레모스는 안드로마케(헥토르의 아내)를 얻었고, 오디세우스는 헤카베(프리아모스의 아내)를 받았다.[170]
아카이오이군은[171] 헥토르의 어린 아들 아스티아낙스를 트로이 성벽에서 떨어뜨려 죽였다.[172] 이는 잔혹함과 증오심에서 비롯되었거나,[173] 왕족의 혈통을 끊고 아들의 복수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서였다.[174] 그들은 또한 (통상적인 전통에 따라 네오프톨레모스가) 트로이 공주 폴릭세네를 아킬레우스의 무덤에서 제물로 바쳤다.[175]
아이트라(테세우스의 어머니이자 헬레네의 시녀 중 한 명[176])는 그녀의 손자들, 아테네의 데이포폰과 아카마스에 의해 구조되었다.[157][177]
4. 주요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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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 전쟁은 여신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간의 다툼으로 시작되었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는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해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새겨진 황금 사과를 선물로 가져왔다. 여신들은 각자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주장하며 사과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이들은 양치기 목동에게 판단을 맡겼는데, 사실 그는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였다. 각 여신들은 그에게 권력, 지혜, 사랑을 약속했고, 파리스는 사랑을 선택하여 아프로디테에게 사과를 주었다. 아프로디테는 스파르타의 여왕 헬레네가 파리스와 사랑에 빠지게 했다. 파리스의 심판으로 인해 파리스는 헤라와 아테나의 분노를 샀다.[13][14][15][16][17][18][19][20][21][22][23][24]
펠레우스와 테티스 사이에서 아들 아킬레우스가 태어났다. 그는 평범한 삶을 살다 늙어 죽거나, 전장에서 젊어서 죽어 시를 통해 불멸을 얻을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25] 칼카스는 아킬레우스의 도움이 없이는 트로이가 함락될 수 없다고 예언했다.[26] 테티스는 아킬레우스를 스틱스 강에 담가 불사신으로 만들려 했으나, 발뒤꿈치는 강물에 닿지 않아 약점으로 남았다 ("아킬레스건"이라는 표현이 여기서 유래).[29] 이후 테티스는 아킬레우스를 스카이로스의 왕 리코메데스의 궁정에 숨겼고, 그는 소녀로 변장했다.[30]
4. 1. 그리스 연합군 측
메넬라오스의 형인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은 파리스의 모욕 때문에 아카이아 군대를 이끌고 트로이 원정을 떠났다. 10년 동안 도시를 포위한 끝에, 아킬레우스와 아이아스와 같은 아카이아인과 헥토르와 파리스와 같은 트로이인 등 많은 영웅들이 죽은 후, 도시는 트로이 목마의 계략에 의해 함락되었다.[39]아카이아 군대는 처음 아울리스에 집결했다. 키프로스의 왕 키니라스를 제외한 모든 구혼자들이 군대를 보냈는데, 그는 실제 배 1척과 흙으로 만든 배 49척만 보냈다.[53] 이도메네우스는 트로이에 대한 미케네의 전쟁에서 크레타 군대를 이끌 의향이 있었지만, 공동 지휘관으로서만 가능했고, 그 요청은 받아들여졌다.[54] 마지막으로 도착한 지휘관은 당시 15세였던 아킬레우스였다.
아폴론에게 희생을 바친 후, 뱀 한 마리가 제단에서 근처 플라타너스 나무의 참새 둥지로 기어갔다. 뱀은 어미 새와 아홉 마리의 새끼를 잡아먹고 돌로 변했다. 칼카스는 이를 트로이가 전쟁 10년째에 함락될 징조로 해석했다.[55]
아카이아인들이 전쟁을 위해 떠났을 때, 그들은 길을 몰랐고 실수로 미시아에 상륙했다. 전투에서 아킬레우스는 텔레포스를 부상입혔고,[57] 텔레포스는 테르산드로스를 죽였다.[58] 아카이아 함대는 출항한 후 폭풍에 흩어졌고, 아킬레우스는 스키로스에 상륙하여 데이데이미아와 결혼했다. 새로운 집결은 다시 아울리스에서 열렸다.[39]
텔레포스는 아울리스로 가서 거지 행세를 하며 아가멤논에게 상처를 치유하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59] 아킬레우스는 의료 지식이 없다며 거절했고, 오디세우스는 상처를 입힌 창이 그것을 치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추론했다. 창 조각이 상처에 긁혀졌고 텔레포스는 치유되었다.[61] 텔레포스는 그 후 아카이아인들에게 트로이로 가는 길을 보여주었다.[59]
폭풍으로 흩어진 지 8년 만에, 1,000척이 넘는 함대가 다시 모였다.[63] 그들이 모두 아울리스에 도착했을 때, 바람이 멈추었다. 예언자 칼카스는 여신 아르테미스가 아가멤논에게 벌을 내리고 있다고 말했다.[39] 아르테미스를 달래는 유일한 방법은 이피게네이아를 희생시키는 것이었다.[64] 아가멤논은 거절했고, 다른 지휘관들은 팔라메데스를 원정 지휘관으로 임명하겠다고 위협했다.[66] 어떤 버전에서는 아가멤논이 굴복하여 희생을 치렀지만, 다른 버전에서는 마지막 순간에 아르테미스가 소녀를 불쌍히 여겨 그녀를 자신의 신전의 처녀로 데려가고, 대신 양을 바쳤다고 한다.[39]
아카이아 군대는 《일리아스》의 두 번째 책인 선박 목록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그리스 본토, 펠로폰네소스, 도데카니소스 제도, 크레타, 이타카에서 온 28개 파견대로 구성되었으며, 50명의 노를 젓는 사람들이 있는 배인 1186척의 펜테콘테르로 이루어졌다. 투키디데스는[68] 전통에 따르면 약 1200척의 배가 있었다고 말하며, 이는 총 7만 명에서 13만 명의 병력을 의미한다.
필록테테스는 헤라클레스의 친구였는데, 헤라클레스의 장례 화장을 해준 덕분에 헤라클레스의 활과 화살을 받았다.[73] 그는 아카이아인들을 위해 싸울 계획으로 일곱 척의 배에 사람들을 가득 태우고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다. 그들은 보급품을 위해 크리세 섬에 들렀거나,[74] 아니면 나머지 함대와 함께 테네도스에 정박했다.[75] 그러던 중 필록테테스는 뱀에 물렸고, 아르테이데스는 오디세우스의 조언에 따라 필록테테스에게 레므노스 섬에 머물도록 명령했다.[39]
메돈이 필록테테스의 부하들을 통솔하게 되었다. 테네도스에 상륙하는 동안 아킬레우스는 테네스 왕을 죽였다.[76] 테네도스에서 아가멤논은 헬레네의 반환을 요구하는 사절단을 트로이의 프리아모스 왕에게 보냈는데, 사절단은 메넬라오스와 오디세우스로 구성되었다. 사절단은 거절당했다.[77]
필록테테스는 10년 동안 레므노스 섬에 머물렀다.[78] 칼카스는 배에서 내려 땅을 밟는 첫 번째 아카이오스인이 가장 먼저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다.[79] 그래서 프로테실라오스가 가장 먼저 상륙했다.[80]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방패를 먼저 던져 땅에 닿게 함으로써 그를 속였다. 헥토르는 일대일 전투에서 프로테실라오스를 죽였지만 트로이군은 해변을 내주었다. 두 번째 공격에서 아킬레우스는 키크노스를 죽였다. 그러자 트로이군은 도시의 성벽 안전 지역으로 도망쳤다.[81] 프로테실라오스는 많은 트로이인을 죽였지만 이야기의 대부분의 버전에서 헥토르에게 죽임을 당했다.[83] 아카이오스인들은 그를 트로아드 건너편, 트라키아 반도에서 신으로 매장했다.[85] 프로테실라오스가 죽은 후 그의 형제 포다르케스가 그의 군대를 지휘했다.
아카이아군은 트로이를 9년 동안 포위했다. 최초 상륙 후 군대는 10년째에야 다시 완전하게 소집되었다. 투키디데스는 이것이 자금 부족 때문이라고 추론한다. 그들은 트로이의 동맹국들을 약탈하고 트라키아 반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시간을 보냈다.[86] 트로이는 완전히 포위된 적이 없었으므로 소아시아 내륙과의 통신을 유지했다. 증원군은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해서 도착했다. 아카이아군은 다르다넬스 해협 입구만 통제했고, 트로이와 그 동맹국들은 아비도스와 세스토스의 최단 지점을 통제하며 유럽의 동맹국들과 소통했다.[87]
아킬레우스와 아이아스는 아카이아군 중 가장 활동적이었으며, 별도의 군대를 이끌고 트로이 동맹국들의 영토를 약탈했다. 호메르에 따르면 아킬레우스는 11개의 도시와 12개의 섬을 정복했다.[88] 아폴로도로스에 따르면, 그는 트로아드 지역에서 아이네아스의 땅을 약탈하고 그의 가축을 훔쳤다.[89] 그는 또한 리르나소스, 페다소스 및 주변의 많은 도시들을 점령하고 트로일로스를 죽였다.[90]
이 도시들에서 얻은 전리품 중에는 리르네소스 출신 브리세이스가 아킬레우스에게 주어졌고, 히포플라키아 테베 출신 크리세이스는 아가멤논에게 주어졌다.[39]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의 아들 리카온을 붙잡았다.[94] 파트로클로스는 그를 레므노스에서 노예로 팔았고,[39] 파트로클로스가 죽은 지 불과 12일 후 아킬레우스는 그를 죽였다.[95] 테라몬의 아들 아이아스는 트라키아 반도를 황폐하게 만들었다.[96] 아이아스는 또한 이다 산과 시골에서 트로이 목장의 가축을 사냥했다.
크리세스는 아폴론의 사제이자 크리세이스의 아버지로, 아가멤논에게 딸을 돌려달라고 청했다. 아가멤논은 거절하고 크리세스를 모욕했고, 이에 크리세스는 아폴론에게 자신의 부당한 대우에 대한 복수를 기원했다. 분노한 아폴론은 아카이아 군대에 역병을 내렸다. 아가멤논은 역병을 끝내기 위해 크리세이스를 돌려줄 수밖에 없었고, 아킬레우스의 첩 브리세이스를 빼앗았다. 아가멤논이 자신에게 가한 모욕에 분노한 아킬레우스는 더 이상 싸우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는 어머니 테티스에게 제우스에게 중재해 달라고 부탁했고, 제우스는 아카이아 최고의 전사인 아킬레우스가 없는 동안 트로이인들에게 승리를 안겨주기로 동의했다.
아킬레우스가 물러난 후 아카이아군은 초반에 성공을 거두었다. 양 군대는 상륙 이후 처음으로 완전하게 집결했다. 메넬라오스와 파리스는 결투를 벌였는데, 아프로디테가 패배한 파리스를 전장에서 데려가면서 결투가 끝났다. 휴전이 깨지자 군대는 다시 싸움을 시작했다. 디오메데스는 아카이아인들 사이에서 큰 명성을 얻어, 트로이 영웅 판다로스를 죽이고 아에네아스를 거의 죽일 뻔했는데, 그의 어머니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아테나의 도움을 받은 디오메데스는 아프로디테와 아레스 신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러나 다음 날, 트로이인들은 아카이아인들을 그들의 야영지로 몰아냈다. 그러나 다음 날, 제우스의 도움으로 트로이인들은 아카이아 야영지로 쳐들어가 아카이아 선박에 불을 지르려 했다. 아킬레우스에게 돌아와 달라는 이전의 호소는 거절되었지만, 헥토르가 프로테실라오스의 배를 불태운 후, 그는 동료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했다. 파트로클로스는 트로이인들을 트로이 성벽까지 몰아냈고, 아폴론의 개입으로 도시를 함락하는 것을 막았다. 파트로클로스는 그 후 헥토르에게 죽임을 당했고, 헥토르는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에서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빼앗았다.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대한 슬픔으로 미쳐버린 아킬레우스는 복수를 위해 헥토르를 죽이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아가멤논과 화해하고 브리세이스를 돌려받았으며, 아가멤논에게 건드려지지 않았다. 그는 신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새로운 갑옷을 받았고, 전장으로 돌아갔다. 그는 많은 트로이인들을 학살했고, 아에네아스를 거의 죽일 뻔했지만, 포세이돈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 아킬레우스는 강신 스카만드로스와 싸웠고, 신들의 전투가 벌어졌다. 트로이 군대는 도시로 돌아갔지만, 아테나의 계략에 속은 헥토르는 성벽 밖에 남아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였고, 그 후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에 매달아 끌고 다니며 트로이인들에게 장례를 치르도록 시신을 돌려주기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신은 아폴론과 아프로디테에 의해 모든 부상으로부터 보호되어 손상되지 않았다. 아카이아인들은 그 후 파트로클로스를 위한 장례 경기를 치렀다. 그 후, 프리아모스는 헤르메스의 인도를 받아 아킬레우스의 천막에 와서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아킬레우스에게 부탁했다. 군대는 죽은 자들의 매장을 위해 일시적인 휴전을 맺었다. ''일리아스''는 헥토르의 장례식으로 끝을 맺는다.
헥토르의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마존의 여왕 펜테실레이아가 전사들과 함께 도착했다.[111] 펜테실레이아는 실수로 여동생 히폴리테를 죽였다. 그녀는 프리아모스에 의해 이 행위로부터 정화되었고,[112] 그 대가로 그를 위해 싸워 마카온을 포함한 많은 적들을 죽였다.[113] 펜테실레이아는 아킬레우스에게 죽임을 당했고,[116] 아킬레우스는 그녀의 죽음 이후 그녀를 애도했다.
티토누스와 에오스의 아들인 멤논이 에티오피아에서[118] 이복 형제 프리아모스를 돕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왔다.[119] 아킬레우스처럼, 그는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갑옷을 입었다.[122] 이어진 전투에서 멤논은 안틸로코스를 죽였다.[123] 그 후 아킬레우스와 멤논은 싸웠다. 제우스는 두 영웅의 운명을 저울질했고, 멤논의 운명을 담은 저울은 가라앉았고,[124] 그는 아킬레우스에게 죽임을 당했다.[116][125]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인들을 도시까지 쫓아가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신들은 그가 너무 많은 자녀를 죽인 것을 보고 그의 죽을 때가 왔다고 결정했다. 그는 파리스가 아폴론의 인도를 받아 쏜 독화살에 맞아 죽었다.[116][118][126] 또 다른 버전에서는, 파리스에게 등 뒤(또는 아킬레스건)에 칼로 죽임을 당했다.[127] 그의 뼈는 파트로클로스의 뼈와 섞였고, 장례 경기가 열렸다.[128]
10년이 지난 후, 트로이는 헤라클레스의 활 없이는 함락될 수 없다는 예언이 있었다. 이 활은 레므노스에 있는 필록테테스에게 있었다.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는 상처가 치유된 필록테테스를 데려왔다. 필록테테스는 파리스를 쏘아 죽였다.
아폴로도로스에 따르면, 파리스의 형제 헬레노스와 데이포보스가 헬레네의 손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했다. 데이포보스가 승리했고, 헬레노스는 트로이를 떠나 이다 산으로 갔다. 칼카스는 헬레노스가 트로이의 함락에 대한 예언을 알고 있다고 말했고, 그래서 오디세우스는 헬레노스를 매복했다. 헬레노스는 강요에 의해 아카이오스인들에게 만약 그들이 펠롭스의 뼈를 되찾고,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를 설득하여 그들을 위해 싸우게 하며, 트로이의 팔라디움을 훔친다면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스인들은 펠롭스의 뼈를 되찾았고, 오디세우스를 스키로스 섬의 리코메데스 왕의 궁정에서 전쟁을 피해 숨어 있던 네오프톨레모스를 데려오도록 보냈다. 오디세우스는 그에게 그의 아버지의 무기를 주었다. 호메로스에 따르면, 텔레포스의 아들 에우리필루스가 대규모의 ''케테이오이'' 병력을 이끌었고, 아폴로도로스에 따르면 히타이트 또는 미시아인들이 트로이군을 돕기 위해 도착했다. 에우리필루스는 마카온과 페넬레오스를 죽였지만, 네오프톨레모스에게 죽임을 당했다.
오디세우스는 거지로 변장하여 트로이 내부를 염탐하러 갔지만, 헬레네에게 발각되었다. 향수병에 걸린 헬레네는 오디세우스와 음모를 꾸몄다. 나중에 헬레네의 도움으로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는 팔라디움을 훔쳤다.
전쟁의 종말은 마지막 계획으로 다가왔다. 오디세우스는 새로운 책략, 즉 거대한 속이 빈 나무 말을 고안했는데, 이 말은 트로이인들에게 신성한 동물이었다. 이 말은 에페이오스가 만들었으며, 아테나의 지시를 받아[151], "그리스인들은 귀향을 위해 아테나에게 이 감사의 제물을 바칩니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153] 속이 빈 말은 오디세우스를 필두로 한 병사들로 채워졌다.[154] 나머지 군대는 야영지를 불태우고 테네도스로 항해했다.[155]
트로이인들은 그리스인들이 떠났다는 것을 알고 전쟁이 끝났다고 믿고 "기뻐하며 말을 도시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156] 그들은 말을 어떻게 할지 논쟁했다. 어떤 이들은 바위에서 던져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어떤 이들은 불태워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또 다른 이들은 아테나에게 헌정해야 한다고 말했다.[157][158]
카산드라와 라오콘 모두 말을 보관하는 것에 대해 경고했다.[159] 카산드라는 아폴로로부터 예언의 능력을 받았지만, 아폴로에 의해 결코 믿음을 얻지 못하는 저주를 받았다. 뱀들이 바다에서 나와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을 삼켰다.[157] 트로이인들은 말을 보관하기로 결정하고 밤새 광적인 축제와 축하를 벌였다.[134] 아카이아의 스파이 시논은 테네도스에 주둔한 함대에 신호를 보냈고, 말 안에 있던 병사들이 나와 경비병들을 죽였다.[163]
아카이오이군은 도시로 진입하여 잠든 시민들을 살해했다. 대규모 학살이 뒤따랐고, 이는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절망감에 사로잡힌 트로이인들은 조직력과 지도자가 부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격렬하게 반격했다. 전투가 최고조에 달하자, 일부는 쓰러진 적의 복장을 입고 혼란스러운 시가전에서 기습 반격을 가했다. 다른 수비수들은 지붕의 기와와 무거운 물건들을 약탈자들에게 쏟아부었다. 그러나 상황은 암울했고, 결국 남은 수비수들은 도시 전체와 함께 파괴되었다.
네오프톨레모스는 제우스의 제단에 피신해 있던 프리아모스를 죽였다.[157][165] 메넬라오스는 파리스가 죽은 후 헬레네의 남편이었던 데이포보스를 죽였고, 헬레네도 죽이려 했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칼을 버리고[166] 그녀를 배로 데려갔다.[157][167]
아이아스 소(小)는 아테나의 제단에서 카산드라를 강간했는데, 카산드라는 여신상을 붙잡고 있었다. 아이아스의 부정한 행위 때문에 아카이오이군은 오디세우스의 주장에 따라 그를 돌로 쳐 죽이려 했지만, 그는 아테나의 제단으로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157][168]
헬레네의 반환을 요구하기 위해 메넬라오스와 오디세우스를 환대하고 옹호했던 안테노르는 그의 가족과 함께 목숨을 건졌다.[169] 아이네아스는 아버지를 등에 업고 도망갔으며, 아폴로도로스에 따르면 그의 경건함 때문에 가게 되었다.[165]
그리스인들은 도시를 불태우고 전리품을 나누었다. 카산드라는 아가멤논에게 주어졌다. 네오프톨레모스는 안드로마케, 헥토르의 아내를 얻었고, 오디세우스는 헤카베, 프리아모스의 아내를 받았다.[170]
아카이오이군은[171] 헥토르의 어린 아들 아스티아낙스를 트로이 성벽에서 떨어뜨려 죽였다.[172] 잔혹함과 증오심에서 비롯되었거나[173] 왕족의 혈통을 끊고 아들의 복수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서였다.[174] 그들은 또한 트로이 공주 폴릭세네를 아킬레우스의 무덤에서 제물로 바쳤다.[175]
아이트라, 테세우스의 어머니이자 헬레네의 시녀 중 한 명[176]은 그녀의 손자들, 아테네의 데이포폰과 아카마스에 의해 구조되었다.[157][177]
4. 2. 트로이 측
트로이 측은 헥토르가 이끄는 트로이인을 비롯하여, 아이네이아스가 이끄는 다르다니아인, 젤레이아인, 아드라스테이아인, 페르코티아인, 펠라스고이인, 트라키아인, 키코네스 창병, 파이오니아 궁수, 할리조네스, 미시아인, 프리기아인, 마이오니아인, 밀레토스인, 사르페돈과 카리아인이 이끄는 리키아인 등 다양한 동맹군으로 구성되었다.[72] 트로이 언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카리아인은 특히 카리아어를 사용하는 야만인이라고 불렸다. 동맹군은 여러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각 지휘관이 명령을 번역해야 했다.[72]
트로이 전쟁에서 트로이 측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인물 | 설명 |
---|---|
헥토르 | 트로이의 왕자이자 프리아모스 왕의 아들로, 트로이 군대의 총사령관. 뛰어난 용맹과 지휘력으로 트로이 방어에 핵심적인 역할 수행. |
파리스 | 프리아모스 왕의 또 다른 아들로, 헬레네를 납치하여 트로이 전쟁의 발단을 제공. |
프리아모스 | 트로이의 왕으로, 헥토르와 파리스의 아버지. |
아이네이아스 | 트로이의 영웅으로, 다르다니아인들을 이끎. 전쟁 후 생존하여 로마 건국의 시조가 됨. |
사르페돈 | 리키아인들의 왕이자 지휘관으로, 제우스의 아들. |
글라우코스 | 사르페돈과 함께 리키아 군대를 이끎. |
《일리아스》에서 트로이인과 아카이아인은 같은 종교와 문화를 공유하며, 적 영웅들끼리 같은 언어로 대화한다. 하지만 이는 극적인 효과를 위한 설정일 수 있다.[72]
4. 3. 신들
이 전쟁으로 신들도 편이 갈라져 헤라, 아테나, 포세이돈이 그리스를 편들었고, 아폴론, 아르테미스, 아레스, 아프로디테가 트로이를 편들게 되었다.[1]5. 전쟁의 결과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이 이끄는 아카이아 군대는 트로이 목마 계략으로 10년간의 트로이아 전쟁에서 승리했다. 아킬레우스와 아이아스 같은 아카이아인과 헥토르와 파리스 같은 트로이인이 전사했고, 도시는 함락되었다. 아카이아인들은 트로이인들을 학살하고 신전을 모독하여 신들의 분노를 샀다. 일부 여성과 아이들은 노예가 되었고, 아카이아인들 중 일부만이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아갔다. 많은 이들이 먼 해안에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고대 로마인들은 트로이인 아이네이아스를 그들의 기원으로 삼았다.[164]
아카이아군은 트로이 성벽을 9년 동안 포위했지만, 본격적인 전투는 주로 전쟁 마지막 해에 벌어졌다. 아카이아군은 자금 부족으로 트로이 동맹국들을 약탈하고 농사를 지으며 시간을 보냈다.[86] 아킬레우스는 11개 도시와 12개 섬을 정복하고, 리카온을 사로잡아 노예로 팔았다.[88][94]
크리세스가 딸을 돌려달라고 간청했으나 아가멤논이 거절하자, 아폴론이 아카이아 군대에 역병을 내렸다. 아가멤논은 크리세이스를 돌려주고 아킬레우스의 첩 브리세이스를 빼앗았고, 분노한 아킬레우스는 전투를 거부했다. 아킬레우스가 없는 동안 아카이아군은 고전했고, 헥토르가 파트로클로스를 죽이자 아킬레우스는 복수를 위해 헥토르를 죽였다.
헥토르 사후 아마존 여왕 펜테실레이아가 트로이를 도왔으나 아킬레우스에게 죽었다. 멤논도 아킬레우스를 상대했으나 패배했고, 아킬레우스는 파리스의 독화살에 맞아 죽었다.[116][118][126]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두고 아이아스와 오디세우스가 경쟁했고, 오디세우스가 갑옷을 차지하자 아이아스는 자살했다.
필록테테스가 파리스를 죽인 후, 헬레노스는 트로이 함락 조건을 밝혔다. 그리스인들은 펠롭스의 뼈를 되찾고, 네오프톨레모스를 참전시키고, 팔라디움을 훔쳐야 했다. 오디세우스는 거지로 변장해 트로이에 잠입했고, 헬레네의 도움으로 팔라디움을 훔쳤다.
오디세우스는 거대한 나무 말을 만들었고, 병사들을 숨겨 트로이에 잠입했다. 트로이인들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말을 성 안으로 들였고, 밤에 아카이아 군인들이 나와 도시를 함락시켰다.
네오프톨레모스는 프리아모스를 죽였고, 메넬라오스는 헬레네를 되찾았다. 아이아스 소(小)는 카산드라를 강간했고, 아카이아군은 아스티아낙스를 성벽에서 떨어뜨려 죽였다.
5. 1. 그리스 연합군의 귀향
아카이오이 군대는 신들의 분노로 인해 귀향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대부분의 영웅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거나 먼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했다.- 아가멤논: 폭풍우를 뚫고 카산드라와 함께 아르고스로 무사히 돌아왔으나, 아이기스토스(이야기의 가장 오래된 버전) 또는 아내 클리템네스트라, 혹은 둘 모두에게 살해당했다. 딸 엘렉트라와 아들 오레스테스가 아버지의 복수를 했지만, 오레스테스는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200][201][203][204]
- 네스토르: 트로이에서 가장 훌륭한 처신을 보였고 약탈에 가담하지 않아, 빠르고 안전하게 귀환한 유일한 영웅이었다.[179] 전쟁에서 살아남은 부하들과 함께 고향에 무사히 도착했으나, 후에 이탈리아 남부 이탈리아 남부에 메타폰티움을 식민지로 건설했다.[180]
- 소(小) 아이아스: 다른 이들보다 신들의 분노를 더 크게 사서 귀향하지 못했다. 아테나가 빌린 제우스의 벼락으로 배가 난파되었고, 승무원들은 바위에 간신히 매달렸으나 포세이돈이 바위를 쳐서 바다에 빠져 익사했다. 그는 미코노스[181] 또는 델로스에서 테티스에 의해 묻혔다.[182]

- 테우케르: 아이아스의 이복형제로, 이복형제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어 아버지에게 재판을 받았다.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살라미스 섬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피레우스 근처 바다에 머물렀다.[183] 그는 과실은 인정되었으나 책임은 면제되었고, 군대와 함께 떠나 키프로스에 살라미스를 건설했다.[184]
- 네오프톨레모스: 헬레누스의 조언에 따라 육로로 이동하여 안드로마케와 동행했다. 오디세우스를 만나 아킬레우스의 스승 포이닉스를 키코니안 땅에 묻었다. 몰로시아인(에피루스)의 땅을 정복하고 안드로마케와 함께 몰로소스를 낳아 왕위를 물려주었다.[185] 헬레누스는 몰로시아에 도시를 세웠고, 네오프톨레모스는 그의 어머니 데이다미아를 아내로 주었다. 펠레우스 사후 프티아의 왕위를 계승했다.[186] 메넬라오스의 딸 헤르미오네를 두고 오레스테스와 갈등을 겪다 델포이에서 살해되어 묻혔다.[187]
- 디오메데스: 폭풍에 의해 리키아 해안으로 밀려가 리쿠스 왕에게 아레스 신의 제물로 바쳐질 뻔했으나, 왕의 딸 칼리로에의 도움으로 탈출했다.[188] 아테네의 팔레론에 상륙했다가 아테네인들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189] 아르고스에 도착했으나 아내 아이기알레이아의 간통 사실을 알고 아이톨리아로 떠났다.[190] 후대 전승에 따르면 여러 모험을 겪고 이탈리아 남부에 카누시움과 아르기리파를 건설했다.[191]
- 필록테테스: 반란으로 인해 도시에서 쫓겨나 이탈리아로 이주하여 크로톤과 투리 사이의 페틸리아, 옛 크리미사, 그리고 코네 도시를 세웠다.[192] 루카니안과의 전쟁 후 방랑자 아폴론의 성소를 세우고 활을 바쳤다.[193]
- 이도메네우스: 호메로스에 따르면 무사히 귀환했다.[194] 그러나 후대의 전승에 따르면, 전쟁 후 끔찍한 폭풍을 만나 포세이돈에게 무사 귀환을 조건으로 처음 보는 생명체를 제물로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처음 본 것이 아들이었고, 이도메네우스는 약속대로 아들을 제물로 바쳤다. 신들은 분노하여 크레타에 역병을 보냈고, 백성들은 그를 이탈리아 칼라브리아로 추방했다.[195] 그는 소(小)아시아의 콜로폰으로 가서 죽었다.[196]
- 메넬라오스: 함대가 폭풍에 휘말려 크레타와 이집트로 떠내려갔다.[197] 5척의 배만 살아남았고,[179] 안전한 항해를 위해 변신하는 바다의 신 프로테우스를 붙잡아야 했다.[198] 어떤 이야기에서는 파리스가 데려간 헬레네는 가짜였고 진짜 헬레네는 이집트에 있었으며, 그곳에서 메넬라오스와 재회했다고 한다. 프로테우스는 메넬라오스에게 사후 엘리시온(천국)으로 갈 운명이라고 예언했다. 메넬라오스는 트로이를 떠난 지 8년 만에 헬레네와 함께 스파르타로 돌아왔다.[199]

- 오디세우스: 10년간의 귀향 여정을 담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따르면,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은 미지의 땅에서 키클롭스 폴리페모스와의 만남, 하데스에서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만나는 등 많은 모험을 겪었다. 트리나키아 섬에서 부하들이 태양신 헬리오스의 소를 먹는 신성모독 행위로 인해 배가 파괴되고 모두 죽었다. 오디세우스는 소를 먹지 않아 살아남아 오기기아 섬으로 떠내려가 님프 칼립소와 7년을 살았다. 이후 신들의 결정으로 작은 뗏목을 타고 파이아키아인의 고향 스케리아로 항해했고, 그들의 도움으로 이타카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늙은 거지로 변장하여 아내 페넬로페가 구혼자들에게 시달리면서도 자신에게 충실했음을 확인하고, 아들 텔레마코스 등의 도움으로 구혼자들을 모두 죽였다. 페넬로페는 각궁 시험으로 그가 오디세우스임을 확인하고 용서했다.[205] 다음 날 구혼자들의 친척들이 복수하려 했으나 아테나가 저지했다.

- 텔레고노스: ''텔레고니''에 따르면, 오디세우스와 키르케의 아들 텔레고노스가 이타카를 약탈하다 오디세우스를 죽였다.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을 깨달은 텔레고노스는 테레마코스와 페넬로페와 함께 시신을 키르케에게 가져갔다. 키르케는 그들을 불멸하게 만들었고, 텔레고노스는 페넬로페와, 테레마코스는 키르케와 결혼했다.
5. 2. 트로이 생존자들의 운명
그리스인들은 도시를 불태우고 전리품을 나누었다. 카산드라는 아가멤논에게 주어졌고, 네오프톨레모스는 안드로마케(헥토르의 아내)를 얻었으며, 오디세우스는 헤카베(프리아모스의 아내)를 받았다.[170]아카이오이군은[171] 헥토르의 어린 아들 아스티아낙스를 트로이 성벽에서 떨어뜨려 죽였는데,[172] 이는 잔혹함과 증오심에서 비롯되었거나,[173] 왕족의 혈통을 끊고 아들의 복수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서였다.[174] 또한 (통상적인 전통에 따라 네오프톨레모스가) 트로이 공주 폴릭세네를 아킬레우스의 무덤에서 제물로 바쳤다.[175]
아이트라(테세우스의 어머니이자 헬레네의 시녀 중 한 명)[176]는 그녀의 손자들인 아테네의 데모폰과 아카마스에 의해 구조되었다.[157][177]
아이네이아스는 아버지를 등에 업고 도망갔으며, 아폴로도로스에 따르면 그의 경건함 때문에 가게 되었다.[165] 헬레네의 반환을 요구하기 위해 메넬라오스와 오디세우스를 환대하고 옹호했던 안테노르는 그의 가족과 함께 목숨을 건졌다.[169]
6. 역사적 배경
전쟁사학자 정토웅 육군사관학교 교수는 트로이아 전쟁을 그리스와 트로이아 간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른 분쟁으로 해석하였다. 지중해 무역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던 양측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전쟁으로 이어졌고,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 자신의 신화적인 세계관으로 이를 설명했다는 것이다.[236]
전통적으로 트로이 전쟁은 여신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간의 다툼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해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새겨진 황금 사과를 가져왔고, 여신들은 각자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주장했다. 파리스가 사랑을 선택하여 아프로디테에게 사과를 주자, 아프로디테는 헬레나가 그와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 파리스의 심판 이후 헬레나가 남편 메넬라오스를 떠나 트로이로 가자, 메넬라오스는 그리스에 전쟁을 요청했다.
미케네의 왕이자 메넬라오스의 형 아가멤논은 아카이아 군대를 이끌고 트로이 원정을 떠나 10년간 도시를 포위했다. 아킬레우스, 아이아스, 헥토르, 파리스 등 많은 영웅들이 죽은 후, 트로이 목마 계략으로 도시가 함락되었다. 아카이아인들은 트로이인들을 학살하고 사원을 모독하여 신들의 분노를 샀다. 일부만이 고향에 돌아갔고, 나머지는 먼 해안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고대 로마인들은 아이네이아스에게 기원을 두었는데, 그는 생존자들을 이탈리아 반도로 이끌었다고 한다.
트로이아 전쟁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신화 시대의 마지막 또는 역사 시대의 첫 번째 사건으로 여겨졌기에, 트로이 함락 시기는 다양하게 제시된다.
학자 | 추정 시기 |
---|---|
에포루스 | 기원전 1135년[207] |
소시비오스 | 기원전 1172년[208] |
에라토스테네스 | 기원전 1184년/기원전 1183년[209] |
티마이오스 | 기원전 1193년[210] |
파리아 대리석 | 기원전 1209년/기원전 1208년[211] |
디카에르코스 | 기원전 1212년[212] |
헤로도토스 | 기원전 1250년경[213] |
에레테스 | 기원전 1291년[214] |
두리스 | 기원전 1334년[215] |
에포루스는 타르게리온 23/24일(5월 6일 또는 7일), 헬라니코스는 타르게리온 12일(5월 26일)[216], 다른 이들은 스키로포리온 23일(7월 7일) 또는 포나모스 23일(10월 7일)을 제시한다.
호메로스가 묘사한 도시는 트로이 VI로 여겨졌으며, 트로이 VIIa는 기원전 1180년경 파괴되어 1988년 발굴 이후 유력한 후보로 간주된다.[217][218][219]
트로이 전쟁의 역사성은 여전히 논쟁거리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대체로 역사적 사건으로 생각했지만,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과장되었다고 믿었다. 투키디데스는 사건 자체는 인정했지만, 1,186척의 배가 동원되었다는 데는 의문을 제기했다. 서기 100년경 디오 크리소스톰은 전쟁이 역사적이지만 트로이인들이 승리했고 그리스인들이 이를 숨기려 했다고 주장했다.[220]
6. 1. 고고학적 발굴


트로이 전쟁의 역사성, 즉 전쟁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여부와 트로이가 존재했다면 어디에 위치했는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대부분의 고대 그리스인들은 전쟁이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과장되었다고 믿었다. 투키디데스는 전쟁을 실제 사건으로 간주했지만, 1,186척의 배가 트로이로 보내졌다는 데 의문을 제기했다.[220] 1870년경, 서유럽에서는 트로이 전쟁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고 트로이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데 일반적으로 동의했다.[221] 그러다 하인리히 슐리만이 차나칼레 히사르릭에서 트로이 유적과 그리스 미케네 도시의 발굴을 대중화했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트로이 전쟁이 트로이 도시를 상대로 한 그리스 원정의 역사적 핵심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데 동의하지만,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전쟁의 실제 사건을 충실하게 묘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2001년 11월, 지질학자 존 C. 크라프트와 고전학자 존 V. 루스는 1977년에 시작된 이 지역의 지질학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222][223][224] 이들은 현재 지질학을 ''일리아스''와 스트라보의 ''지리학''을 비롯한 다른 고전 자료에 묘사된 풍경과 해안 특징과 비교했다. 그들의 결론은 슐리만이 확인한 트로이의 위치와 지질학적 증거, 그리고 ''일리아스''에 나오는 지형과 전투의 묘사 사이에 일관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20세기 이후, 학자들은 히타이트 및 이집트 텍스트를 기반으로 트로이 전쟁 시기에 해당하는 결론을 도출하려 했다. 앤드류 달비는 트로이 전쟁이 어떤 형태로든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 진정한 본질은 알려져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225] 타와갈라와 서한은 ''아히야와''(아카이아, 또는 그리스) 왕국을 언급하며, 밀라와타 서한은 ''윌루사''(일리오스 또는 일리움) 도시가 아수와 연합의 북쪽에 있다고 암시한다. 윌루사를 일리움(트로이)과 동일시하는 것은 논란이 있지만, 1990년대에 다수가 이를 받아들였다. 알락산두 조약에서 이 도시의 왕은 알락산두로, ''일리아스''의 파리스의 이름은 알렉산더이다. 아히야와 왕에게 보낸 타와갈라와 서한은 "이제 우리가 전쟁을 벌였던 윌루사의 문제에 대해 합의했으므로..."[226]라고 말한다.
히타이트인들은 아르누완다 3세 아래에서 에게 해 연안에서 통제하던 땅을 포기해야 했다. 트로이 전쟁은 아히야와 왕과 아수와 연합 간의 갈등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대 도시 일리온은 오랫동안 전설로 여겨졌지만, 19세기 말 하인리히 슐리만에 의해 트로이 일대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유적은 9개 층으로 되어 있으며, 슐리만은 발굴한 여러 시대의 유적 중 화재의 흔적이 있는 아래에서 두 번째 층이 트로이 전쟁 시대의 유적이라고 추측했다. 후에 두 번째 층은 기원전 2000년보다 이전의 지층으로 트로이 전쟁 시대보다 훨씬 오래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슐리만과 함께 발굴에 참여한 빌헬름 되르프펠트는 아래에서 여섯 번째인 제6층에 파괴와 화재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제6층이 트로이 시대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1930년대에 브레겐에 의해 재조사가 이루어졌고, 제6층 도시의 화재는 부분적이며 파괴에 방향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지진의 가능성이 강하다고 추측했다. 그리고 제7층 도시의 화재는 도시 전체를 덮고 있으며, 파괴의 혼란스러움으로 보아 인위적인 것이라고 추측한다. 또한 발견된 인골도, 몸통과 머리가 분리된 것이 발견되는 등 전쟁에 의한 인위적인 파괴를 간접적으로 증명했다. 현재는 제7층 A가 트로이 전쟁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시기(기원전 13세기 중기)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이 제7층 A는 아마추어인 슐리만의 발굴 당시에 거의 다 깎여 나가 사라졌다고 여겨진다[230][231]。
도시가 화재에 휩싸인 것은 고고학적으로 틀림없지만, 그것이 침략에 의한 것인지 여부는, 가능성은 꽤 높지만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6. 2. 히타이트 문헌 연구
타와갈라와 서한은 바다(에게 해) 너머에 있고 밀리완다(밀레투스와 동일시됨)를 통제하는 ''아히야와''(아카이아, 또는 그리스) 왕국을 언급한다.[225] 이 서한과 다른 서한에는 22개의 도시와 국가로 구성된 아수와 연합이 언급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윌루사''(일리오스 또는 일리움) 도시가 포함되어 있다. 밀라와타 서한은 이 도시가 세하 강 너머 아수와 연합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윌루사를 일리움(트로이)과 동일시하는 것은 논란이 있었지만, 1990년대에 다수가 이를 받아들였다. 알락산두 조약에서 이 도시의 왕은 알락산두로 나오는데, ''일리아스''(및 기타 작품)에서 파리스의 이름이 알렉산더이다. 아히야와 왕에게 보낸 타와갈라와 서한은 "이제 우리가 전쟁을 벌였던 윌루사의 문제에 대해 합의했으므로..."[226]라고 말한다.이전에는 히타이트의 지배를 받던 아수와 연합은 이집트와 히타이트 간의 카데시 전투 이후 탈퇴했다. 기원전 1230년 히타이트 왕 투달리야 4세(–1210 BC)는 이 연합에 맞서 원정을 벌였다. 아르누완다 3세(–1205 BC) 아래에서 히타이트인들은 에게 해 연안에서 통제하던 땅을 포기해야 했다. 트로이 전쟁은 아히야와 왕과 아수와 연합 간의 갈등이었을 가능성이 있다.[70][227]
트로이의 다른 이름인 일리온은 미케네 시대의 위리오스였다고 추정되며, 히타이트어 문서에 나오는 윌사(Wilusa)라는 지명이 트로이를 가리킨다는 설이 있으며, 최근에는 이 설을 지지하는 학자도 많다.[232] 최근에는 발굴이 진행되어,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 무렵에 윌사는 히타이트의 속국적 입장에 있었고 외부의 침략을 받아 히타이트에 구원을 요청했다는 점, 비슷한 인명이 나오는 서간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233]
6. 3. 미케네 문명의 몰락
하인리히 슐리만이 차나칼레의 히사르릭에서 트로이 유적을 발굴하면서 트로이 전쟁의 역사성에 대한 논쟁이 다시 불붙었다. 슐리만은 히사르릭 언덕에서 트로이 유적을 발견한 최초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221] 19세기 말 슐리만에 의해 발굴된 트로이 유적은 9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슐리만은 화재 흔적이 있는 아래에서 두 번째 층을 트로이 전쟁 시대의 유적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이후 이 층은 기원전 2000년 이전의 지층으로 밝혀져 트로이 전쟁 시대보다 훨씬 오래된 것으로 판명되었다.[230][231]슐리만과 함께 발굴에 참여한 빌헬름 되르프펠트는 아래에서 여섯 번째인 제6층에 파괴와 화재의 흔적이 있는 것을 근거로 제6층이 트로이 시대의 유적이라고 주장했다. 1930년대 브레겐의 재조사 결과, 제6층 도시의 화재는 부분적이고 파괴에 방향성이 있어 지진으로 인한 피해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되었다. 반면 제7층 도시의 화재는 도시 전체를 덮고 있으며 파괴가 혼란스러워 인위적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또한 발견된 인골 중 몸통과 머리가 분리된 것이 발견되는 등 전쟁으로 인한 인위적인 파괴를 뒷받침하는 증거도 발견되었다. 현재는 제7층 A가 트로이 전쟁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시기(기원전 13세기 중기)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제7층 A는 슐리만의 발굴 당시 대부분 깎여 나가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230][231]
20세기 이후 학자들은 히타이트 및 이집트 텍스트를 바탕으로 트로이 전쟁 시기의 정황을 추론하려 노력했다. 타와갈라와 서한에는 바다(에게 해) 너머에 있고 밀리완다를 통제하는 *아히야와*(아카이아, 또는 그리스) 왕국이 언급되어 있다. 또한 이 서한과 다른 서한에는 *윌루사*(일리오스 또는 일리움) 도시를 포함하여 22개의 도시와 국가로 구성된 아수와 연합이 언급되어 있다. 밀라와타 서한은 윌루사가 세하 강 너머 아수와 연합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알락산두 조약()에서 윌루사의 왕은 알락산두로, *일리아스*의 파리스의 다른 이름이 알렉산더이다. 아히야와 왕에게 보낸 타와갈라와 서한( 연대)에는 "이제 우리가 전쟁을 벌였던 윌루사의 문제에 대해 합의했으므로..."라는 구절이 있다.[226]
이러한 증거들을 종합해 볼 때, 트로이 전쟁은 아히야와 왕과 아수와 연합 간의 갈등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아수와 연합은 이전에 히타이트의 지배를 받다가 카데시 전투() 이후 탈퇴했다. 기원전 1230년 히타이트 왕 투달리야 4세(기원전 1240년–1210년)는 이 연합에 맞서 원정을 벌였고, 아르누완다 3세(기원전 1210년–1205년) 아래에서 히타이트인들은 에게 해 연안에서 통제하던 땅을 포기해야 했다.
트로이 전쟁에 얽힌 서사시가 전부 허구는 아니라면, 그 중심에는 일리온(트로이)의 파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시에 화재가 발생한 것은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지만, 이것이 침략에 의한 것인지는 여전히 추측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7. 문화적 영향
트로이 전쟁은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간의 다툼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수많은 문학과 예술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트로이 포위의 마지막 해를 배경으로 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그 외에도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 여인들》, 제프리 초서의 《트로일루스와 크리세이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트로일루스와 크레시다》, 엑토르 베를리오즈의 《트로이 사람들》 등이 있다.
트로이 전쟁을 바탕으로 한 영화로는 《헬렌 오브 트로이(1956)》, 《트로이의 목마(1961)》, 《트로이(2004)》 등이 있으며, 이 외에도 다양한 책, 텔레비전 시리즈, 게임 등에서도 다루어졌다.
다음은 트로이아 전쟁을 소재로 한 주요 작품들이다.
분류 | 작품명 | 작가/감독 | 비고 |
---|---|---|---|
문학 |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 호메로스 | |
문학 | 『아이네이스』 | 베르길리우스 | |
문학 | 『아가멤논』 | 아이스킬로스 | |
문학 | 『트로이아 전쟁기』 | 퀸투스 | |
문학 | 『영웅이 말하는 트로이아 전쟁』 | 필로스트라토스 | |
문학 | 『키프리아』 | 스타시노스 | [234] |
문학 | 『아이티오피스』, 『일리오스의 함락』 | 아르크티노스 | [234] |
문학 | 『필로스트라토』 | 조반니 보카치오 | |
문학 | 『트로일루스와 크레시다』 | 제프리 초서 | |
오페라 | 『트로이아의 사람들』 | 엑토르 베를리오즈 | |
영화 | 『트로이의 헬렌』 | 로버트 와이즈 | 1955년 |
영화 | 『트로이』 | 볼프강 페테르젠 | 2004년 |
게임 | 『트로이 무쌍』 | 코에이 테크모 게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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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robib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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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t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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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oma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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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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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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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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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서적
Epitome
[48]
서적
Epitome
[49]
서적
Iliad
[50]
서적
Achilleid
[51]
서적
Iliad
[52]
서적
[53]
서적
Iliad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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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oicus
[55]
서적
Epit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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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thmian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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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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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pitome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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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P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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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dyss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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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Odyssey
[197]
서적
Odyssey
[198]
서적
Odyssey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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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t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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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pit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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トロイア(9):ヒッタイト文書におけるウィルサ(1) - 神話と歴史の間のエーゲ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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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藤 浩
202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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ギリシア叙事詩断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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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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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 권으로 보는 전쟁사 101장면
가람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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