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토-스탈린 결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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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티토-스탈린 결렬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와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 간의 관계가 악화되어 발생한 사건이다. 전쟁 중 양측의 갈등, 영토 분쟁, 동유럽의 정치적 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관계가 악화되었고, 스탈린은 티토를 비판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에 티토는 스탈린에게 저항했고,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의 지원이 끊긴 채 경제적 위기를 겪었다.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았으며, 중립국으로 외교 노선을 변경했다. 이 사건은 동유럽 공산당 내 숙청을 유발하는 등 냉전 시대의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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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토-스탈린 결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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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명칭 | 티토-스탈린 결렬 |
로마자 표기 | Tito-Seutallin gyeolyeol |
별칭 | 유고슬라비아-소련 분쟁 |
로마자 표기 | Yugoseullabia-Soryeon bunjaeng |
러시아어 명칭 | Советско-югославский конфликт (Sovetsko-yugoslavskiy konflikt) |
관련 정보 | |
시기 | 냉전 |
원인 | 이오시프 스탈린의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소련의 우위 강요 유고슬라비아의 독립적인 정책 추구 |
결과 | 코민포름에서 유고슬라비아 축출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압박 유고슬라비아의 비동맹 운동 참여 |
관련 인물 | |
주요 인물 | 이오시프 티토 이오시프 스탈린 |
관련 인물 |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밀로반 질라스 알렉산다르 란코비치 에도바르트 카르델리 |
관련 사건 | |
주요 사건 | 1948년: 코민포름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비판 1949년: 코민포름의 유고슬라비아 축출 1955년: 니키타 흐루쇼프의 유고슬라비아 방문 및 관계 정상화 시도 |
2.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와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관계는 복잡했다. 스탈린은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추구했고,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KPJ)을 통해 독자 노선을 걸으려 했으며, 페타르 2세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망명정부와의 대립도 있었다.
1941년 6월, 티토는 코민테른과 스탈린에게 추축군 점령군에 대항하는 봉기 계획을 알렸으나, 스탈린은 티토의 파르티잔이 공산주의 상징을 많이 사용하는 것에 우려를 표했다.
1943년,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민족해방을 위한 반파시스트 평의회(AVNOJ)를 유고슬라비아 최고 의결 및 입법 기구로 선언하고 망명 정부를 비난했으며, 국왕의 귀환을 금지했다. 테헤란 회담에 참석 중이던 스탈린은 이를 소련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했다. 1944-1945년, 스탈린이 유럽 공산주의 지도자들에게 부르주아 정치인과 연정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유고슬라비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2. 1.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티토-스탈린 갈등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와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 사이의 관계는 복잡했다. 스탈린은 소련의 영향력을 확장하려 했고,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KPJ)을 통해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또한, 유고슬라비아 국왕 페타르 2세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망명정부와의 대립도 있었다.1941년 4월, 추축국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하여 11일 만에 항복시켰다.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해외로 망명했고, 영토는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불가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대부분의 영토는 독일과 이탈리아군이 주둔하는 괴뢰국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으로, 베오그라드 주변은 독일 점령하의 세르비아 군정청으로 편성되었다. 소련은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을 유지하며 유고슬라비아 정부와 관계를 단절하고, 크로아티아 독립국 내에 KPJ와는 독립된 새로운 공산주의 조직을 수립하려 했다. 또한, 불가리아의 유고슬라비아 영토 점령에 따라 불가리아 노동자당의 조직 개편을 묵인했다. 소련은 추축국의 소련 침공 이후인 1941년 9월에야 KPJ의 항의로 이러한 지지를 철회했다.
1941년 6월, 티토는 코민테른과 스탈린에게 추축군 점령군에 대항하는 봉기 계획을 알렸다. 그러나 스탈린은 티토의 파르티잔이 공산주의 상징을 많이 사용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 스탈린은 영국과 미국과의 동맹이 "민주적 자유" 파괴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추축국 점령하의 유럽 공산주의 세력은 민주적 자유 회복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고슬라비아의 경우, 스탈린은 KPJ가 망명 정부 복원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대령이 이끄는 체트니크는 이미 유고 왕정 복고를 내세우고 있었다.


1941년 10월, 티토는 미하일로비치와 두 차례 만나 추축국에 대항하는 공동 전선을 제안했지만, 미하일로비치는 이를 거절했다. 10월 말, 미하일로비치는 공산당이 진정한 적이라고 결론 내리고, 추축군과 협력하여 파르티잔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1월부터 파르티잔은 체트니크와 교전하면서, 미하일로비치를 찬양하는 소련의 선전에 항의하는 전문을 모스크바에 보냈다.
1943년,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민족해방을 위한 반파시스트 평의회(AVNOJ)를 유고슬라비아 최고 의결 및 입법 기구로 격상시키고 망명 정부를 비난했으며, 국왕의 귀환을 금지했다. 이는 망명 정부를 적대시하지 말라는 소련의 조언에 반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테헤란 회담에 참석 중이었는데, 이 움직임을 소련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했다. 1944-1945년, 스탈린이 유럽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에게 부르주아 정치인과 연정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유고슬라비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1944년 모스크바 회담에서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과 스탈린 사이에 맺어진 퍼센트 협정이 공개되면서 이러한 충격은 더욱 커졌다. 이 협정은 동유럽 국가를 영국과 소련의 영향권으로 나누고 유고슬라비아는 50:50으로 분할한다는 내용이었다.
2. 2. 트리에스테 및 카린티아 영토 분쟁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오스트리아 케른텐 지역 일부를 점령하고 전쟁 전 이탈리아 영토로 진격했다. 서방 연합국은 스탈린이 이러한 움직임을 지시했다고 믿었지만, 사실 스탈린은 소련이 지원하는 카를 레너의 Provisorische Staatsregierung Renner 1945|제4차 레너 정부|오스트리아 정부de를 우려했고, 트리에스테를 둘러싼 연합국과의 더 광범위한 분쟁을 우려하여 반대했다. 스탈린은 티토에게 케른텐과 트리에스테에서 철수하라고 명령했고, 파르티잔은 이에 따랐다.그럼에도 유고슬라비아는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에 대한 영유권을 계속 주장했다. 이스트라 북서부와 트리에스테 시 주변 영토 분쟁 때문에 이탈리아와의 평화 조약은 1947년까지 지연되었고, 트리에스테 자유 지구가 설립되었다. 티토는 트리에스테 주변과 케른텐 국경 재조정을 요구했기 때문에 이는 티토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서방 연합국은 유고슬라비아의 점령을 막기 위해 트리에스테에 주둔군을 유지했다. 티토가 트리에스테 획득을 고집하는 것은 스탈린에게 이탈리아 공산당에 대한 망신으로 여겨졌다.
2. 3. 1945년~1948년 동유럽의 정치적 상황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은 동유럽 국가에 연립정부를 수립하여 붉은 군대가 점령한 영토에서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고자 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공산당 세력이 적었기 때문에 곧바로 일당제 공산당 통치를 달성한 경우는 없었다. 공산당 지도부는 이러한 전략적 접근 방식을 일당제 공산당 통치가 가능해지는 상황이 올 때까지 일시적인 조치로 생각했다. 그러나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에서 비롯된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과 알바니아의 국민해방운동에서 이어진 알바니아 노동당은 대중의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제2차 세계 대전 마지막 몇 달과 전후 몇 년간 소련의 영향을 받았지만, 스탈린은 여러 차례 유고슬라비아를 소련의 관심 지역 밖이라고 선언했고 위성국처럼 취급했다.동유럽의 다른 지역과 달리, 1944년 10월 소련의 공세 이전에 티토의 파르티잔은 독자적으로 활동하며 독일 국방군과 그 동맹군을 세르비아 북부에서 몰아내고 베오그라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원수 표도르 톨부힌의 제3우크라이나전선군은 유고슬라비아 영토에 진입하기 위해 티토의 임시정부에 공식 허가를 받아야 했고, 해방된 모든 영토에서 유고슬라비아 민간 정부의 통치를 인정해야 했다.
3. 악화되는 관계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지도자였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와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관계는 복잡했다. 소련과의 동맹, 스탈린의 소비에트 제국 영향권 확장 욕구,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KPJ)과 페타르 2세 국왕이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망명정부 사이의 대립 등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1941년 4월, 추축국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하자 유고슬라비아는 11일 만에 항복했고, 정부는 런던으로 망명했다. 유고슬라비아 영토는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불가리아 왕국, 헝가리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베오그라드 주변은 독일이 점령한 세르비아 군정청으로 편성되었다. 소련은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을 유지하면서도 유고슬라비아 정부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KPJ와는 별개의 새로운 공산주의 조직을 수립하려 했다. 또한 불가리아 노동자당의 재편을 묵인했는데, 이는 불가리아의 유고슬라비아 영토 점령과 관련이 있었다. 소련은 1941년 9월에야 KPJ의 항의로 이러한 조치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1941년 6월, 티토는 코민테른과 스탈린에게 추축군 점령군에 대항하는 봉기 계획을 알렸지만, 스탈린은 티토의 파르티잔이 공산주의 상징을 많이 사용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 스탈린은 영국, 미국과의 동맹을 "민주적 자유" 파괴에 반대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추축국 점령 지역의 공산주의 세력은 민주적 자유 회복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고슬라비아의 경우, 이는 스탈린이 KPJ가 망명 정부 복원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음을 의미한다.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대령이 이끄는 체트니크 유격대는 이미 유고 왕정 복고를 내세우고 있었다.
1941년 10월, 티토는 미하일로비치와 두 차례 만나 추축국에 대항하는 공동 전선을 제안했지만, 미하일로비치는 이를 거절했다. 10월 말, 미하일로비치는 공산당을 진정한 적으로 간주하고, 처음에는 파르티잔과 추축군 양쪽 모두와 교전했지만 몇 달 만에 추축군과 협력해 파르티잔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1월부터 파르티잔은 체트니크와 교전하면서 미하일로비치를 찬양하는 소련의 선전에 항의하는 전문을 모스크바에 보냈다.
1943년, 티토는 AVNOJ를 선언하고 망명정부를 비난했으며 국왕의 귀환을 금지했다. 이는 망명 정부에 적대적이지 말라는 소련의 조언에 반하는 조치였고, 테헤란 회담에 참석 중이던 스탈린은 이를 소련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했다. 1944-1945년, 스탈린이 유럽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에게 부르주아 정치인과의 연정을 지시하자 유고슬라비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1944년 모스크바 회담에서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과 스탈린이 맺은 퍼센트 협정이 공개되면서 이러한 충격은 더욱 커졌다. 이 협정은 동유럽 국가를 영국과 소련의 영향권으로 나누고 유고슬라비아는 50:50으로 분할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외교 정책은 소련과의 관계 악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3. 1. 1945년~1947년 유고슬라비아의 외교 정책
유고슬라비아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과 우호 조약을 맺었지만, 주변 국가들에 대한 영토적 야심과 독자적인 외교 정책으로 인해 소련과 갈등을 빚었다. 특히 이스트라반도 북서부와 트리에스테를 둘러싼 영토 분쟁은 이탈리아와의 평화 조약 체결을 지연시켰고, 트리에스테 자유 지구 설립의 원인이 되었다. 티토는 트리에스테와 오스트리아 케른텐주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이탈리아와 서방 연합국뿐만 아니라 소련과도 갈등을 빚었다.티토는 알바니아, 불가리아, 그리스 등 주변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시도했다. 1943년, 티토는 국가 파르티잔 활동 조정을 위한 지역 본부 설립을 제안했지만,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다른 국가들의 참여를 거부했다. 마케도니아 (지역) 문제와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인구 문제는 지역 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1946년, 티토는 알바니아 노동당 제1서기 엔베르 호자와 알바니아와의 국가 통합을 합의했지만, 소련은 유고슬라비아에 통합을 서두르지 말라고 경고했다.
1946년 8월, 유고슬라비아 공군이 미국 육군 항공대의 C-47 스카이트레인 수송기를 격추시킨 사건은 서방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미국은 스탈린이 티토를 부추겼다고 믿었지만, 스탈린은 서방과의 대립을 피하고자 했다.
1947년, 유고슬라비아는 블레드 협정을 통해 불가리아와 우호 및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지만,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이를 비난했다. 소련은 유고슬라비아를 동구권의 모범으로 선전했지만, 베오그라드 주재 소련 대사관의 내부 보고서는 유고슬라비아 지도자들을 비우호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3. 2. 알바니아와의 통합 시도와 그리스 내전 지원
1947년 중반부터 소련은 자체 고문단을 알바니아에 파견하기 시작했는데, 티토는 이를 알바니아의 유고슬라비아 통합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위협으로 간주했다. 그는 이 움직임이 엔베르 호자, 내무부 장관 코치 조제, 경제 및 산업부 장관 나코 스피루를 포함한 알바니아 노동당(PKSH) 중앙 위원회 내 권력 투쟁 때문이라고 여겼다. 스피루는 유고슬라비아와의 연결에 가장 반대하고 알바니아와 소련 간의 더 긴밀한 관계를 옹호하는 인물로 여겨졌다. 유고슬라비아의 비난과 조제의 압박을 받은 호자는 스피루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며칠 후, 스피루는 불분명한 상황에서 사망했고, 그의 죽음은 공식적으로 자살로 선언되었다. 스피루의 사망 이후, 통합 문제에 대한 유고슬라비아와 소련 외교관 및 관리들의 일련의 회담이 열렸으며, 1947년 12월과 1948년 1월에 스탈린과 유고슬라비아 공산당(KPJ) 관계자 밀로반 질라스의 회담으로 절정에 달했다. 그 회담에서 스탈린은 알바니아의 유고슬라비아 통합을 지지했지만, 더 적절한 시기에 알바니아인들의 동의를 얻어 실행할 것을 전제로 했다. 스탈린이 그의 지지에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지연 전술을 사용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지만, 질라스는 스탈린의 지지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다.유고슬라비아의 그리스 공산당(KKE)과 KKE가 이끄는 그리스 내전의 그리스 민주군(DSE)에 대한 지원은 알바니아가 유고슬라비아와의 더 긴밀한 관계를 맺도록 간접적으로 장려했다. 그리스 내전은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 국경이 그리스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는 알바니아의 인식을 강화시켰다. 또한 DSE는 그리스에서 권력을 잡으면 유고슬라비아의 지원을 대가로 에게해 마케도니아를 유고슬라비아에 양도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은 이 나라에서 정보 수집 작전을 수행했다. 1947년, 12명의 영국 비밀정보국 훈련 요원이 봉기를 시작하기 위해 알바니아 중부에 공수되었지만, 이는 현실화되지 않았다. 유고슬라비아는 인지된 그리스의 위협이 유고슬라비아와의 통합에 대한 알바니아의 지지를 증가시킬 것이라고 기대했다. 알바니아에 파견된 소련 특사들은 알바니아인들에게 그리스인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주고 알바니아가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고 판단했지만, 소련 자료는 그리스의 알바니아 침공 위협은 실제 없었다고 밝혔다. 티토는 DSE 전투원 중 많은 수가 민족 마케도니아인이었기 때문에, DSE와 협력하면 DSE가 권력을 잡는 데 실패하더라도 유고슬라비아가 에게해 마케도니아로 확장하여 그리스 영토를 병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질라스와 스탈린이 만난 직후, 티토는 호자에게 알바니아가 잠재적인 그리스 및 영미 공격에 대비하여 코르처 근처, 알바니아-그리스 국경 근처에 유고슬라비아가 군사 기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1월 말까지 호자는 그 아이디어를 받아들였다. 게다가 조제는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 군대의 통합이 승인되었음을 나타냈다. 이 문제는 비밀리에 진행된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소련은 알바니아 정부의 소식통으로부터 이 계획에 대해 알게 되었다.
3. 3. 불가리아와의 연방 결성 시도
1944년 말, 이오시프 스탈린은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의 연방을 제안했다. 스탈린은 불가리아가 연방의 절반을, 유고슬라비아가 나머지 절반을 차지하는 이원적 국가를 구상했다. 그러나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불가리아가 연방의 7개 구성 단위 중 하나가 되어야 하고, 피린 마케도니아를 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 연방 단위에 양도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양측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스탈린은 1945년 1월 중재를 위해 양측을 모스크바로 초청했다. 스탈린은 처음에는 불가리아의 입장을 지지했지만, 며칠 후 유고슬라비아의 입장으로 선회했다. 결국 1946년 1월 26일, 영국 정부는 불가리아가 연합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기 전에는 유고슬라비아와 어떤 연방 협정도 맺지 말라고 경고했고, 이 연방은 보류되었다.1948년, 티토와 엔베르 호자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을 알바니아에 배치하려 할 때, 불가리아 노동자당 지도자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동구권을 연방 국가로 만들자는 구상을 서방 언론인들에게 밝혔다. 그는 그리스를 "인민 민주주의" 목록에 포함시켰는데, 이는 서방과 소련 양측의 우려를 샀다. 소련은 디미트로프의 발언이 발칸반도에서 유고슬라비아의 의도에 영향을 받았다고 의심했다.
3. 4. 1948년 2월 스탈린과의 회담
1948년 2월, 이오시프 스탈린은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 지도자들을 모스크바로 불렀다. 티토는 에드바르드 카르델과 블라디미르 바카리치를 보냈고, 이들은 모스크바에서 밀로반 질라스와 합류했다. 스탈린은 블레드 협정을 통해 소련을 무시하고 불가리아 및 유고슬라비아와의 연방에 그리스를 포함시키려 한 것에 대해 유고슬라비아와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불가리아 지도자를 비난했다.스탈린은 그리스 내전 지원 중단을 요구하며, 추가 지원은 미국 및 영국과의 더 큰 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1944년 윈스턴 처칠과의 비율 협정을 통해 그리스를 영국의 세력권에 두기로 한 것을 준수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불가리아와 유고슬라비아의 즉각적인 연방 결성을 요구했고, 알바니아는 나중에 합류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헝가리-루마니아,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간의 연합도 지지했다.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 대표들은 실수를 인정했고, 스탈린은 카르델리와 디미트로프에게 모든 외교 정책 문제에 대해 소련과 협의하는 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정치국은 2월 19일 비밀 회의를 열고 불가리아와의 연방에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티토, 카르델리, 질라스는 니코스 자하리아디스 그리스 공산당 사무총장에게 스탈린의 무장 투쟁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가 계속 지원할 것이라고 알렸다.
4. 스탈린의 서한과 공개적인 갈등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소련은 붉은 군대가 점령한 동유럽 국가들에 연립정부를 세워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려 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공산당의 세력이 약했기 때문에, 일당제 공산당 통치는 즉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산당 지도부는 이러한 전략적 접근을 일당제 통치가 가능해질 때까지의 일시적인 조치로 보았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과 알바니아 노동당은 대중의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스탈린은 티토의 유고슬라비아를 위성국처럼 취급했지만, 여러 차례 유고슬라비아를 소련의 관심 지역 밖이라고 선언했다. 1944년 10월 소련의 공세 이전에 티토의 파르티잔은 독일 국방군과 그 동맹군을 세르비아 북부에서 몰아내고 베오그라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표도르 톨부힌의 제3우크라이나전선군은 유고슬라비아 영토로 들어가기 위해 티토 임시정부의 공식 허가가 필요했고, 해방된 모든 영토에서 유고슬라비아 민간정부의 통치를 받아들여야 했다.
4. 1. 첫 번째 서한
1948년 3월 27일, 스탈린은 티토와 에드바르트 카르델리에게 첫 번째 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에서 스탈린은 유고슬라비아 지도부를 "의심스러운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그는 티토와 카르델리뿐만 아니라 밀로반 질라스, 스베토자르 부크마노비치, 보리스 키드리치, 알렉산다르 란코비치를 지목하며 유고슬라비아의 반소련 분위기를 조성했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유고슬라비아의 안보, 경제, 정치 임명에 대한 정책을 비판했다.특히 스탈린은 유고슬라비아가 소련보다 더 혁명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불만을 표하며, 이를 레온 트로츠키의 입장과 비교했다. 이 편지는 충성스러운 공산주의자들이 "의심스러운 마르크스주의자"를 제거하도록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4. 2. 두 번째 서한
1948년 5월 4일, 스탈린은 유고슬라비아 공산당(KPJ)에 두 번째 서한을 보냈다. 그는 소련 지도부가 유고슬라비아 상황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받았다는 주장을 부인하고, 이견은 원칙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또한 헤브랑이 KPJ 내 소련 정보원이라는 것을 부인했지만, 주요비치는 실제로 정보원임을 확인했다. 스탈린은 KPJ의 성과 규모에 의문을 제기하며, 어떤 공산당의 성공도 붉은 군대의 지원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KPJ가 권력을 유지하는 데 소련 군대가 필수적임을 시사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 문제를 코민포름에서 제기할 것을 제안했다. 티토와 카르델은 제2차 서한에 대한 답변에서 코민포름의 중재를 거부하고 스탈린이 분쟁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다른 공산당에 로비를 벌였다고 비난했다.4. 3. 세 번째 서한과 코민포름 결의안
1948년 5월 19일,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KPJ)의 상황을 논의하기 위한 코민포름 회의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그러나 KPJ 중앙위원회는 다음 날 이 초대를 거부했다. 이후 스탈린은 티토와 헤브랑에게 세 번째 서한을 보냈는데, 코민포름 앞에서 KPJ를 대변하지 않는 것은 묵시적인 유죄 인정과 같다고 주장했다. 1948년 6월 19일, KPJ는 이틀 뒤 부쿠레슈티에서 열리는 코민포름 회의에 참석하라는 공식 초대를 받았으나, KPJ 지도부는 코민포름에 대표단을 파견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코민포름은 1948년 6월 28일 KPJ에 대한 결의안을 발표하여 갈등을 폭로하고 KPJ를 반소련주의와 이념적 오류, 당내 민주주의 부족, 비판 수용 능력 부족으로 비판했다. 또한 코민포름은 KPJ가 조직 내 정당에 반대하고, 통일된 사회주의 전선에서 이탈하고, 노동자들의 국제적 연대를 배신하고, 민족주의적 입장을 취했다고 비난했다. 마지막으로 KPJ는 코민포름에서 제명되었다. 결의안은 스탈린의 카리스마만으로 달성될 것으로 기대하면서, 티토와 그의 지도부를 전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KPJ의 "건강한" 당원들의 충성심을 측정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KPJ가 물러서서 "미심쩍은 마르크스주의자"를 희생하고 자신과 재정렬할 것을 기대했다.
5. 결과
유고슬라비아는 소련과의 결렬로 모든 경제, 정치, 군사적 원조가 중단되어 심각한 재정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중국에 접근하며 재정 상황이 다소 개선되기 시작했다. 이후 중국이 비동맹국 회의에 참여하자 유고슬라비아도 이 흐름에 동참하여 중립국이자 비동맹국으로 인식되었다.
5. 1. 코민포름 시대

티토는 스탈린에게 저항할 것인지 복종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파르티잔 운동을 통해 구축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KPJ)의 광범위한 조직 기반을 믿고 저항을 선택했다. KPJ 구성원의 최대 20%가 티토 대신 스탈린을 지지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 지도부는 이를 인지했고, 헤브랑과 주요비치와 같은 주요 인물들을 포함하여 광범위한 숙청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숙청은 "코민포름 시대"로 불리게 되었다. 스탈린의 실제 또는 추정 지지자들은 코민포름의 공식 명칭인 공산당 및 노동자당 정보국(Information Bureau of the Communist and Workers' Parties)의 처음 두 단어에서 유래한 "코민포름주의자" 또는 "'이베오브치'"라고 불렸다. 수천 명이 투옥, 살해 또는 추방되었으며, 랑코비치에 따르면 51,000명이 살해, 투옥 또는 강제 노동형을 선고받았다. 1949년에는 남성과 여성 코민포름주의자를 위해 각각 고리 오토크와 스베티 그르구르라는 사람이 살지 않는 아드리아해 섬에 특별 목적 수용소가 건설되었다.
5. 2. 미국의 유고슬라비아 지원
미국은 티토-스탈린 결렬을 냉전에서 승리할 기회로 여겼다. 그러나 이 균열이 영구적인지, 유고슬라비아의 외교 정책이 변할지에 대해서는 불확실했기 때문에 신중하게 접근했다.유고슬라비아는 1948년 여름에 처음으로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1949년 2월, 미국은 티토에게 경제 원조를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티토가 스탈린에 맞서 승리하려면 유고슬라비아의 5개년 계획이 성공해야 하며, 티토 정권의 성격과 관계없이 티토를 지원하는 것이 미국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원조는 유고슬라비아가 1948년, 1949년, 1950년의 흉작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유고슬라비아는 1949년에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의석을 확보하는 데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
1949년에 미국은 유고슬라비아에 대출을 제공했고, 1950년에는 대출을 늘렸으며, 그 후에는 대규모 보조금을 제공했다. 1951년, 유고슬라비아는 상호 방위 지원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군사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5. 3. 소련의 군사적 위협과 쿠데타 시도
소련은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고려했다. 1956년 미국으로 망명한 헝가리 벨라 키라이 소장은 소련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계획이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헝가리 역사학자 라슬로 리터는 소련 또는 바르샤바 조약 기밀 문서에 그러한 계획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반박했다.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의 침공 가능성에 대비하여 방어 계획을 수립했다.소련은 유고슬라비아 내 친소 세력을 지원하여 쿠데타를 시도했다. 유고슬라비아 참모총장 아르소 요바노비치 등이 주도한 친소 쿠데타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요바노비치는 루마니아로 도주하려다 국경 경비대에 의해 사살되었고, 다른 주동자들은 체포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은 스탈린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계획을 단념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소련은 유고슬라비아 국경 지역에 정보 작전 기지를 설립하고, 티토에 대한 선전전을 펼쳤다.
5. 4. 동구권의 반유고슬라비아 정책
1948년 갈등이 공개되자 스탈린은 티토에 대한 선전전을 시작했다. 소련의 동맹국들은 유고슬라비아와의 국경을 봉쇄했고, 7,877건의 국경 충돌이 발생했다. 1953년까지 소련 또는 소련의 지원을 받은 침략으로 유고슬라비아 보안 요원 27명이 사망했다. 티토의 신뢰를 떨어뜨리기 위해 소련은 불가리아가 유고슬라비아 국경을 따라 비딘, 슬리브니차, 두프니차에 3개의 정보 작전 기지를 설립하도록 도왔다. 그 목적은 티토에 대한 선전 자료를 배포하고 유고슬라비아의 코민포름 지지자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채널을 구축하는 것이었다.동구권 정치에서 유고슬라비아와의 분열은 스탈린의 동구권 공산당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소위 티토주의자들을 비난하고 기소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서기장인 루돌프 슬란스키, 헝가리 내무 및 외무부 장관 라슬로 라이크, 불가리아 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트라이초 코스토프와 같은 고위 관리들에 대한 재판으로 이어졌다. 또한, 알바니아와 불가리아는 유고슬라비아를 버리고 소련과 완전히 손을 잡았다. 그리스 공산당(KKE) 또한 코민포름 편에 섰으며, 유고슬라비아의 분열과 마케도니아의 독립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1949년 7월, 유고슬라비아가 그리스 게릴라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면서 DSE는 거의 즉시 붕괴되었다.
6. 영향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으로부터 경제, 정치, 군사적 원조가 모두 중단되어 재정적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중국에 접근하기 시작했고, 재정 상황도 점차 나아졌다. 이후 중국이 비동맹국 회의에 참여하자 유고슬라비아도 이에 동참하여 중립국이자 비동맹국으로 인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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