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스트 이탈리아 (1922년~19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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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시스트 이탈리아 (1922년~1943년)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경제난과 사회 불안을 겪던 이탈리아에서 베니토 무솔리니가 파시즘 운동을 시작하여 수립한 정권이다. 무솔리니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하고, 로마 진군을 통해 권력을 잡은 후, 국가 파시스트당을 중심으로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파시즘은 국가주의, 전체주의, 민족주의, 제국주의, 반공주의를 표방하며, 언론 통제, 비밀 경찰 운용, 교육 통제 등을 통해 사회를 획일화했다. 이탈리아는 독일, 일본과 함께 추축국을 결성하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나, 패배하면서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이탈리아 내전이 발발, 파시스트 정권은 붕괴되었다. 파시즘은 이탈리아뿐 아니라 전 세계 극우 세력에 영향을 미쳤으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식민 통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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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스트 이탈리아 (1922년~1943년)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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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이탈리아 왕국 |
표어 | FERT |
국가 | (1861–1943) Marcia Reale d'Ordinanza (1924–1943) 조비네차 |
수도 | 로마 |
공용어 | 이탈리아어 |
데모님 | 이탈리아인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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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및 문장 | |
정치 | |
정치 체제 | 입헌군주제(1922–1925) 단일 정당 파시스트 전체주의 독재 하의 입헌군주제 (1925–1943) |
국왕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1900–1946) |
총리 | 베니토 무솔리니 (1922–1943) 피에트로 바돌리오 (1943) |
의회 | 의회 |
상원 | 상원 |
하원 | 대의원 파스치와 코르포라치오니 의회 |
역사 | |
존속 기간 | 1922년 ~ 1943년 |
시작 사건 | 로마 진군 |
시작 날짜 | 1922년 10월 31일 |
주요 사건 | 코르푸섬 사건: 1923년 8월 29일 라테란 조약: 1929년 2월 11일 스트레사 전선: 1935년 4월 14일 에티오피아 침공: 1935년–1936년 스페인 내전 개입: 1936년–1939년 알바니아 침공: 1939년 4월 7일–12일 강철 조약: 1939년 5월 22일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1940년 6월 10일 삼국 동맹: 1940년 9월 27일 파시즘 몰락: 1943년 7월 25일 |
종료 사건 | 휴전 |
종료 날짜 | 1943년 9월 3일 |
이후 사건 | 항복 |
이후 날짜 | 1943년 9월 29일 |
인구 | |
1936년 | 42,993,602명 |
면적 | |
1938년 (식민지 포함) | 3,798,000 제곱킬로미터 |
통화 | |
통화 | 리라(₤) |
2. 역사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는 심각한 경제난과 사회적 혼란을 겪었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러한 혼란을 틈타 파시즘 운동을 전개, 1922년 검은 셔츠단을 이끌고 로마 진군을 단행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무솔리니는 집권 후 일당제 국가를 수립하고 파시즘을 사회 전반에 확산시키려 했다. 1935년 ''파시즘의 교리''에서 전체주의 국가를 공식 선언했다.[3] 파시스트 정권은 고대 로마 제국을 이상으로 삼고, 이탈리아인들에게 개인주의를 버리고 국가에 헌신할 것을 요구했다.[5] 국가 파시스트당 가입과 지지는 "완전한 시민권" 획득의 필수 조건이었으며, 파시즘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추방되었다.[6]
무솔리니는 선전을 통해 자신을 국가의 구원자로 우상화했으며, 검은 셔츠단의 대규모 집회와 행진은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에 영감을 주었다. 파시스트 정권은 뉴스 영화,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선전을 강화했으며,[9] 1926년에는 모든 영화 상영 전 선전 뉴스릴 상영을 의무화했다.[10]
1929년 국민투표를 통해 국가 파시스트당 일당 목록이 98.43%의 지지를 얻어 파시스트 일당 독재 체제가 공고화되었다.[13] 같은 해, 라테란 조약을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갈등을 해소하고 교회의 지지를 확보했다.[16]
파시스트 정권은 개입주의적 외교 정책을 펼쳤다. 1923년 코르푸 섬을 점령했다가 그리스에 반환했고, 1925년 알바니아를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유고슬라비아와는 영토 문제로 갈등을 겪었으며, 크로아티아 극우 민족주의자 안테 파벨리치를 지원했다. 1939년에는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합병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패배하고, 베니토 무솔리니가 실각하면서 파시즘 정권은 몰락했다. 무솔리니는 추축국의 일원으로 참전했으나, 국내 여론 악화로 무너졌다.
2. 1. 파시즘의 등장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는 심각한 경제난과 사회적 혼란을 겪었다. 전쟁 후 이탈리아는 연합국으로부터 약속받았던 영토를 획득하지 못하면서 국민들 사이에 불만이 팽배했다. 참전 군인들의 실업 문제와 사회주의 운동의 확산은 사회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14]이러한 상황을 틈타 베니토 무솔리니는 파시즘 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전투 파쇼를 결성하여 폭력적인 방법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억압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1921년에는 국가 파시스트당을 창당하고 의회에 진출하여 정치 세력으로 성장했다.
2. 1. 1.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혼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는 경제난과 사회 불안을 경험했다. 전후 처리 과정에서 이탈리아는 연합국으로부터 약속받은 영토를 얻지 못해 불만이 커졌다. 참전 군인들의 실업 문제, 사회주의 운동의 확산 등으로 사회 갈등이 심화되었다.2. 1. 2. 무솔리니의 등장과 파시스트당 창당
베니토 무솔리니는 혼란스러운 이탈리아의 상황을 이용하여 파시즘 운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무솔리니는 전투 파쇼(Fasci di Combattimento)를 결성하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1921년에는 국가 파시스트당을 창당하고, 의회에 진출하여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였다.2. 2. 무솔리니 집권과 파시스트 독재
베니토 무솔리니 집권 이후,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은 일당 국가를 수립하고 파시즘을 사회 전반에 확산시키려는 목표를 세웠다. 1935년 ''파시즘의 교리''에서는 전체주의 국가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3]무솔리니와 파시스트 정권은 고대 로마, 개인 독재, 그리고 이탈리아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일부 미래주의적 측면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문화와 사회를 개선하려는 계획을 세웠다.[4] 파시즘 하에서 이탈리아 국민 정체성은 군국주의와 파시스트의 "새로운 인간" 이상을 기반으로 정의되었다. 충성스러운 이탈리아인들은 개인주의와 자율성을 버리고 자신을 이탈리아 국가의 구성 요소로 간주하며 국가를 위해 헌신해야 했다.[5] 이러한 전체주의 정부 하에서는 파시스트만이 "진정한 이탈리아인"으로 간주되었고, 국가 파시스트당 가입과 지지는 "완전한 시민권"을 얻는 데 필수적이었다. 파시즘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들은 공직에서 추방되고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6] 파시스트 정부는 해외 거주 이탈리아인들에게도 파시스트 대의를 지지하고 이탈리아와 동일시하도록 독려했다.[7] 새로운 문화를 만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시도는 나치 독일이나 소련과 같은 다른 일당 국가에 비해 덜 급진적이었고 성공적이지 못했다.[8]
무솔리니의 선전은 그를 국가의 구원자로 우상화했으며, 파시스트 정권은 이러한 이미지를 이탈리아 사회에 퍼뜨리려 했다.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의 매력은 무솔리니의 인기와 카리스마에 크게 기반을 두고 있었다. 무솔리니의 열정적인 웅변과 그를 둘러싼 인물 숭배는 로마에서 열린 검은 셔츠단의 대규모 집회와 행진에서 두드러졌으며, 이는 아돌프 히틀러와 독일 나치당에 영향을 주었다.
파시스트 정권은 뉴스 영화, 라디오 방송, 그리고 파시즘을 지지하는 몇몇 장편 영화를 통해 선전을 시행했다.[9] 1926년에는 모든 장편 영화 상영 전에 선전 뉴스 영화를 의무적으로 상영하도록 하는 법률이 통과되었다.[10] 당시 라디오를 보유한 이탈리아인이 적었기 때문에, 이 뉴스 영화는 선전 영화나 라디오보다 대중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파시스트 선전은 포스터와 국가 후원 예술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예술가, 작가, 출판인들은 엄격하게 통제받지 않았고, 노골적으로 국가에 반대하는 경우에만 검열되었다. "새로운 이탈리아인"의 남성성을 강조하며 공격성, 정력, 젊음, 속도, 스포츠를 부각시켰고,[11] 여성은 모성에 전념하고 공적인 문제에서 배제되어야 했다.[12]
총선은 1929년 3월 24일에 국민투표 형태로 실시되었다. 이 시점까지 국가는 국가 파시스트당이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허용된 정당인 일당 국가였다.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일당 목록을 확인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사용했다. 제시된 목록은 결국 유권자의 98.43%의 지지를 받았다.[13] 1912년부터 합법이었던 보편적 남자 보통 선거권은 노동 조합 또는 협회 회원, 군인 및 성직자로 제한되어, 950만 명만이 투표할 수 있었다.
1927년, 아르투로 보키니가 이끄는 비밀경찰 오브라(OVRA, Organizzazione di Vigilanza Repressione dell'Antifascismo|반파시즘 감시 및 탄압 기구it)가 창설되었다. 오브라는 무솔리니와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오브라는 나치 독일의 친위대(SS)나 소비에트 연방의 내무인민위원회(NKVD)에 비해 희생자 수는 적었지만, 정치적 반대자들을 공포에 빠뜨리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들의 악명 높은 고문 방법 중 하나는 파시즘 반대자들에게 피마자유를 강제로 먹여 신체적 쇠약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54]
1929년, 무솔리니는 바티칸과 라테란 조약을 체결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오랜 갈등을 끝내고 교회의 지지를 확보했다.[16] 이 조약으로 바티칸 시국은 독립국이 되었고, 가톨릭은 이탈리아의 국교로 인정받았다.[16] 가톨릭 교회는 스페인 내전에서 국민주의자들을 지지하고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지지하는 등 파시스트 정권의 외교 정책을 지지했다.[17] 그러나 가톨릭 행동 청소년 단체를 두고 갈등이 있었고, 1931년 교황 비오 11세는 회칙 ''Non abbiamo bisogno''를 통해 파시스트 정권의 교회 박해와 "국가에 대한 이교도적 숭배"를 비난했다.[18]
파시스트 정권은 교육, 문화,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파시즘 이념을 강요하고 통제했다. 1926년에는 모든 장편 영화 상영 전에 선전 뉴스릴을 상영하도록 하는 법률이 통과되었다.[10] 파시스트 선전은 포스터와 국가가 후원하는 예술에 널리 퍼져 있었지만, 예술가, 작가 및 출판인은 엄격하게 통제되지 않았고 노골적으로 국가에 반하는 경우에만 검열을 받았다.[11]
파시스트 정부는 이탈리아에서 문맹 퇴치를 목표로 강력한 교육 정책을 폈다.[44] 중퇴를 줄이기 위해 학교 졸업 최소 연령을 12세에서 14세로 변경하고 출석을 엄격하게 시행했다.[45] 조반니 젠틸레는 교육 정책이 학생들을 파시즘으로 세뇌하고 권위에 복종하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권고했다.[45] 1929년, 파시스트 정부는 모든 교과서의 승인권을 장악했고, 모든 중등학교 교사는 파시즘에 대한 충성 맹세를 해야 했으며, 아이들은 파시즘에 대한 신과 같은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고 배웠다.[45] 1933년에는 모든 대학 교수가 국가 파시스트 당의 당원이 되어야 했다.[45] 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이탈리아의 교육은 고대 로마 시대의 이탈리아를 문명의 힘으로 묘사하고, ''리소르지멘토'' 시대의 이탈리아 민족주의 부활을 보여주는 이탈리아 역사에 중점을 두었다.[45] 1930년대 후반, 파시스트 정부는 나치 독일의 신체 단련 교육 시스템을 모방하여 이탈리아인들이 신체적으로 건강해지도록 요구했다.[45] 1926년에 설립된 이탈리아 왕립 아카데미는 이탈리아의 지적 활동을 장려하고 조정했다.[46]
1925년에는 국립 여가 활동 기구(OND)가 창설되어 성인을 위한 레크리에이션 활동을 지원했다.[47] OND는 1930년대까지 이탈리아의 모든 마을에 클럽하우스를 둘 정도로 인기를 얻었으며, 스포츠 경기장, 도서관, 영화관, 극장 등을 설립하고 유지했다.[47] 1936년까지 OND는 봉급 노동자의 80%를 조직한 것으로 추정된다.[48] 1939년까지 산업 노동력의 거의 40%가 ''도폴라보로''에 가입했다. OND는 이탈리아의 대규모 파시스트 조직 중 가장 많은 회원을 보유했다.[49] 파시스트 이탈리아에서 ''도폴라보로''의 성공은 나치 독일의 ''KdF'' 프로그램 설립에 영향을 주었다.[50] 국립 발릴라 기구(ONB)는 젊은이들에게 클럽, 댄스, 스포츠 시설, 라디오, 콘서트, 연극, 서커스 및 야외 하이킹을 거의 또는 전혀 비용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51]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정부는 연금, 병가, 연차 유급 휴가를 도입했다.[52] 1933년, 정부는 실업 수당을 설립했다.[52] 1930년대 말, 1,300만 명의 이탈리아인이 국가 건강 보험 제도에 가입했으며, 1939년까지 사회 보장 지출은 정부 지출의 21%를 차지했다. 1935년에는 40시간 노동제가 도입되었으며, 노동자들은 토요일 오후를 스포츠, 준군사, 정치 활동에 참여하도록 요구받았다. 이는 ''파시스트 토요일''(Sabato fascista)이라고 불렸으며 주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했다.[53]
2. 2. 1. 로마 진군과 정권 장악
1922년 10월, 베니토 무솔리니는 검은 셔츠단을 이끌고 로마 진군을 단행했다.[54]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를 총리로 임명하여 파시스트 정권이 수립되었다.무솔리니는 집권 후, 일당제 국가를 만들고 파시즘을 삶의 모든 측면에 통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35년의 ''파시즘의 교리''에서 공식적으로 전체주의 국가가 선언되었다.[3]
베니토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정권은 이탈리아 문화와 사회를 개선하는 의제를 설정했다.[4] 파시즘 하에서, 충성스러운 이탈리아인들은 개인주의와 자율성을 버리고 자신을 이탈리아 국가의 구성 요소로 간주하며 국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야 했다.[5] 파시스트만이 "진정한 이탈리아인"으로 간주되었고, 국가 파시스트당 가입과 지지는 사람들이 "완전한 시민권"을 얻는 데 필요했다. 파시즘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은 사람들은 공공 생활에서 추방되었고 고용될 수 없었다.[6]
무솔리니의 선전은 그를 국가의 구원자로 우상화했으며, 파시스트 정권은 그를 이탈리아 사회에 만연시키려 했다. 로마에서 그의 검은 셔츠단의 대규모 집회와 퍼레이드는 아돌프 히틀러와 독일 나치당에 영감을 주었다.
파시스트 정권은 뉴스릴, 라디오 방송 및 파시즘을 의도적으로 지지하는 몇 편의 장편 영화에서 선전을 실시했다.[9] 1926년에는 모든 장편 영화 상영 전에 선전 뉴스릴을 상영하도록 요구하는 법률이 통과되었다.[10]
1929년 총선은 국민투표 형태로 실시되었다. 이 시점까지 국가는 국가 파시스트당이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허용된 정당인 일당 국가였다.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일당 목록을 확인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사용했다. 제시된 목록은 결국 유권자의 98.43%의 지지를 받았다.[13]
2. 2. 2. 일당 독재 체제 구축
무솔리니 집권 이후,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은 일당 국가를 수립하고 파시즘을 사회 전반에 확산시키려는 목표를 설정했다. 1935년 ''파시즘 교리''에서는 전체주의 국가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3]베니토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정권은 고대 로마, 개인 독재, 그리고 이탈리아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일부 미래주의적 측면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문화와 사회를 개선하려는 계획을 세웠다.[4] 파시즘 하에서 이탈리아 국민 정체성은 군국주의와 파시스트의 "새로운 인간" 이상을 기반으로 정의되었다. 이탈리아인들은 개인주의와 자율성을 버리고 국가를 위해 헌신해야 했다.[5] 이러한 전체주의 정부 하에서는 파시스트만이 "진정한 이탈리아인"으로 간주되었고, 파시스트당 가입과 지지는 "완전한 시민권"을 얻는 데 필수적이었다. 파시즘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들은 공직에서 추방되고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6]
파시스트 정부는 해외 거주 이탈리아인들에게도 파시스트 대의를 지지하고 이탈리아와 동일시하도록 독려했다.[7] 그러나 새로운 문화를 만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시도는 나치 독일이나 소련과 같은 다른 일당 국가에 비해 덜 급진적이었고 성공적이지 못했다.[8]
무솔리니의 선전은 그를 국가의 구원자로 묘사했으며, 파시스트 정권은 이러한 이미지를 이탈리아 사회에 퍼뜨리려 했다. 무솔리니의 열정적인 연설과 개인 숭배는 로마에서 열린 검은 셔츠단의 대규모 집회와 행진에서 두드러졌으며, 이는 아돌프 히틀러와 독일 나치당에 영향을 주었다.
파시스트 정권은 뉴스 영화, 라디오 방송, 그리고 파시즘을 지지하는 몇몇 장편 영화를 통해 선전을 시행했다.[9] 1926년, 모든 장편 영화 상영 전에 선전 뉴스 영화를 의무적으로 상영하도록 하는 법률이 통과되었다.[10] 당시 라디오를 보유한 이탈리아인이 적었기 때문에, 이 뉴스 영화는 선전 영화나 라디오보다 대중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파시스트 선전은 포스터와 국가 후원 예술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예술가, 작가, 출판인들은 엄격하게 통제받지 않았고, 노골적으로 국가에 반대하는 경우에만 검열되었다. "새로운 이탈리아인"의 남성성을 강조하며 공격성, 정력, 젊음, 속도, 스포츠를 부각시켰고,[11] 여성은 모성에 전념하고 공적인 문제에서 배제되어야 했다.[12]
1929년 3월 24일, 총선이 국민투표 형태로 실시되었다. 당시 국가는 국가 파시스트당만이 합법적으로 허용된 일당 국가였다.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일당 목록을 확정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이용했고, 제시된 목록은 유권자의 98.43%의 지지를 얻었다.[13] 1912년부터 합법이었던 보편적 남자 보통 선거권은 노동 조합 또는 협회 회원, 군인, 성직자로 제한되어, 950만 명만이 투표할 수 있었다.
1927년, 아르투로 보키니가 이끄는 비밀경찰 오브라(OVRA, Organizzazione di Vigilanza Repressione dell'Antifascismo|반파시즘 감시 및 탄압 기구it)가 창설되었다. 오브라는 무솔리니와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오브라는 나치 독일의 친위대(SS)나 소비에트 연방의 내무인민위원회(NKVD)에 비해 희생자 수는 적었지만, 정치적 반대자들을 공포에 빠뜨리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들의 악명 높은 고문 방법 중 하나는 파시즘 반대자들에게 피마자유를 강제로 먹여 신체적 쇠약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54]
2. 2. 3. 파시즘 체제 강화
1929년, 무솔리니는 바티칸과 라테란 조약을 체결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오랜 갈등을 끝내고 교회의 지지를 확보했다.[16] 이 조약으로 바티칸 시국은 독립국이 되었고, 가톨릭은 이탈리아의 국교로 인정받았다.[16] 가톨릭 교회는 스페인 내전에서 국민주의자들을 지지하고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지지하는 등 파시스트 정권의 외교 정책을 지지했다.[17] 그러나 가톨릭 행동 청소년 단체를 두고 갈등이 있었고, 1931년 교황 비오 11세는 회칙 ''Non abbiamo bisogno''를 통해 파시스트 정권의 교회 박해와 "국가에 대한 이교도적 숭배"를 비난했다.[18]파시스트 정권은 교육, 문화,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파시즘 이념을 강요하고 통제했다. 1926년에는 모든 장편 영화 상영 전에 선전 뉴스릴을 상영하도록 하는 법률이 통과되었다.[10] 파시스트 선전은 포스터와 국가가 후원하는 예술에 널리 퍼져 있었지만, 예술가, 작가 및 출판인은 엄격하게 통제되지 않았고 노골적으로 국가에 반하는 경우에만 검열을 받았다.[11]
1925년에는 국립 여가 활동 기구(OND)가 창설되어 성인을 위한 레크리에이션 활동을 지원했다.[47] OND는 1930년대까지 이탈리아의 모든 마을에 클럽하우스를 둘 정도로 인기를 얻었으며, 스포츠 경기장, 도서관, 영화관, 극장 등을 설립하고 유지했다.[47]
베니토 무솔리니는 선전을 통해 국가의 구원자로 우상화되었으며, 파시스트 정권은 무솔리니 숭배를 조장했다.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의 매력은 무솔리니의 인기와 카리스마에 크게 기반을 두고 있었다.
2. 3. 파시즘의 몰락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패배하고, 베니토 무솔리니가 실각하면서 파시즘 정권은 몰락했다. 무솔리니는 유럽에서 이탈리아의 지위를 강대국으로 부활시키고 지중해를 지배하는 "새로운 로마 제국"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했다. 파시스트 정부는 선전에서 지중해를 지칭하기 위해 고대 로마 용어인 ''"마레 노스트룸"(Mare Nostrum)'' (우리 바다la)을 사용했다.[74] 이러한 배경에서 무솔리니는 독일, 일본과 함께 추축국을 결성하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나, 국내 여론 악화로 파시즘 정권은 무너졌다.2. 3. 1. 제2차 세계 대전 참전과 패배
무솔리니는 유럽에서 이탈리아의 지위를 강대국으로 부활시키고 "새로운 로마 제국"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하며, 지중해를 지배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파시스트 정부는 선전에서 지중해를 지칭하기 위해 고대 로마 용어인 ''"마레 노스트룸"(Mare Nostrum)'' (우리 바다la)을 사용했다.[74] 이러한 배경에서 무솔리니는 독일, 일본과 함께 추축국을 결성하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그러나 이탈리아군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군에 패배를 거듭했다. 국내 여론은 악화되었고, 결국 파시즘 정권은 몰락했다. 이후 이탈리아는 레시스텐자와 사회공화국으로 나뉘어 내전을 겪었다.
2. 3. 2. 무솔리니 실각과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1943년 7월,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권좌에서 물러나 체포되었다. 이후 독일군 특공대에 의해 구출된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북부에 나치 독일의 괴뢰 국가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살로 공화국)을 세웠다.2. 3. 3. 이탈리아 내전과 무솔리니 처형

이탈리아는 왕당파와 공화파, 파시스트와 반파시스트 간의 내전에 휩싸였다. 1945년 4월, 베니토 무솔리니는 파르티잔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20][22]
3. 파시즘의 이념과 정책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1935년 ''파시즘 교리''에서 전체주의 국가를 공식 선언했으며, 베니토 무솔리니는 군국주의와 파시스트의 "새로운 인간" 이상을 기반으로 이탈리아 문화와 사회를 개선하는 의제를 설정했다.[4] 파시스트만이 "진정한 이탈리아인"으로 간주되었고, 파시스트당 가입과 지지는 "완전한 시민권" 획득에 필수적이었다.[6]
무솔리니의 선전은 그를 국가 구원자로 우상화했으며, 파시스트 정권은 이탈리아 사회에 이를 만연시키려 했다. 뉴스릴, 라디오 방송, 파시즘 지지 영화 등에서 선전이 실시되었고,[9] 1926년에는 모든 영화 상영 전 선전 뉴스릴 상영이 의무화되었다.[10] "새로운 이탈리아인"의 남성성을 강조하며 공격성, 정력, 젊음, 속도, 스포츠를 강조했고,[11] 여성은 모성에 전념하고 공적 문제에서 벗어나야 했다.[12]
경제적으로 파시즘은 조합주의를 제시했지만, 실제로는 대기업과 지주의 이익을 옹호하는 정책을 펼쳤다. 1929년 대공황 이후 보호 무역 관세를 제정하고 경제 방향을 설정하려 시도했다. 1936년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식민지 확장은 이탈리아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69][70]
사회적으로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가 개선되었고, 1929년 라테란 조약을 통해 바티칸 시국의 독립적 지위를 인정하고 로마 가톨릭교를 국교로 만들었다.[16] 그러나 1938년 이탈리아 인종법과 ''인종 선언''이 공포되어 이탈리아 유대인과 개신교를 탄압했다.[20][19][21][22] 무솔리니는 초기에는 반유대주의를 부정했지만,[25][26] 아돌프 히틀러의 영향으로 점차 반유대주의 정책을 강화했다.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적 팽창을 추구하며 에티오피아 침공, 스페인 내전 개입, 알바니아 병합 등을 감행했다.[95][96][97][98][99] 무솔리니는 지중해를 ''"마레 노스트룸"''(우리 바다)으로 만들어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다.
3. 1. 파시즘의 주요 이념
베니토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정권은 고대 로마, 개인 독재, 그리고 이탈리아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미래주의적 측면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문화와 사회를 개선하려는 의제를 설정했다.[4] 파시즘 하에서 이탈리아 국민성은 군국주의와 파시스트의 "새로운 인간" 이상을 기반으로 정의되었다. 충성스러운 이탈리아인들은 개인주의와 자율성을 버리고 자신을 이탈리아 국가의 구성 요소로 간주하며, 국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5]무솔리니의 선전은 그를 국가의 구원자로 우상화했으며, 파시스트 정권은 그를 이탈리아 사회에 만연시키려 했다.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의 매력은 무솔리니의 인기와 카리스마에 크게 기반을 두고 있었다. 무솔리니의 열정적인 웅변과 그를 둘러싼 인물 숭배는 로마에서 그의 검은 셔츠단의 대규모 집회와 퍼레이드에서 과시되었으며, 이는 아돌프 히틀러와 독일 나치당에 영감을 주었다.
파시스트 정권은 뉴스릴, 라디오 방송 및 파시즘을 의도적으로 지지하는 몇 편의 장편 영화에서 선전을 실시했다.[9] 1926년에는 모든 장편 영화 상영 전에 선전 뉴스릴을 상영하도록 요구하는 법률이 통과되었다.[10] 파시스트 선전은 포스터와 국가가 후원하는 예술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예술가, 작가 및 출판인은 엄격하게 통제되지 않았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국가에 반하는 경우에만 검열을 받았다. "새로운 이탈리아인"의 남성성을 강조하여 공격성, 정력, 젊음, 속도 및 스포츠를 강조했다.[11] 여성은 모성에 전념하고 공적 문제에서 벗어나야 했다.[12]
하위 섹션의 내용을 바탕으로 파시즘의 주요 이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국가주의''' 및 '''전체주의''': 개인보다 국가를 우선시하며, "모든 것은 국가 안에 있으며, 국가 밖에 아무것도 없고, 국가에 반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슬로건으로 대표된다.[3]
- '''민족주의''' 및 '''제국주의''': 이탈리아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팽창주의를 추구했다.[74]
- '''권위주의''' 및 '''반민주주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부정하고, 강력한 지도자에 의한 일당 독재를 옹호했다.[3]
- '''반공주의''' 및 '''반사회주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극렬히 반대하며, 이를 핵심 이념 중 하나로 삼았다.[1]
3. 1. 1. 국가주의와 전체주의
파시즘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보다 국가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전체주의를 추구했다. "모든 것은 국가 안에 있으며, 국가 밖에 아무것도 없고, 국가에 반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슬로건으로 대표된다.[3]베니토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정권은 이탈리아 문화와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 고대 로마, 개인 독재, 그리고 이탈리아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미래주의적 측면을 바탕으로 하는 의제를 설정했다.[4] 파시즘 하에서 이탈리아 국민성은 군국주의와 파시스트의 "새로운 인간" 이상을 기반으로 정의되었다. 충성스러운 이탈리아인들은 개인주의와 자율성을 버리고 자신을 이탈리아 국가의 구성 요소로 간주하며, 국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5] 그러한 전체주의 정부 하에서 파시스트만이 "진정한 이탈리아인"으로 간주되었고, 파시스트당 가입과 지지는 사람들이 "완전한 시민권"을 얻는 데 필요했다. 파시즘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은 사람들은 공공 생활에서 추방되었고 고용될 수 없었다.[6] 파시스트 정부는 또한 해외에 거주하는 이탈리아인들에게 파시스트 대의를 지지하고 거주지가 아닌 이탈리아와 동일시하도록 손을 내밀었다.[7] 그러나 파시즘을 위한 새로운 문화를 만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노력은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데 있어 나치 독일과 소련과 같은 다른 일당 국가에 비해 덜 급진적이었고 성공적이지 못했다.[8]
3. 1. 2.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파시즘은 이탈리아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제국주의적 팽창을 추구했다.[74] 무솔리니는 유럽에서 이탈리아의 지위를 강대국으로 부활시키고 "새로운 로마 제국"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이탈리아가 지중해를 지배할 것이라고 약속하며, 선전에서 파시스트 정부는 지중해를 지칭하기 위해 고대 로마 용어인 ''"마레 노스트룸"(Mare Nostrum)''(우리 바다la)을 사용했다.[74]파시스트 정권은 군사 프로젝트에 대한 자금 지원과 관심을 늘리고 북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에 이탈리아 식민 제국을 건설하고 지중해와 아드리아 해에서 지배력을 되찾기 위한 계획을 시작했다. 파시스트들은 달마티아, 알바니아, 그리스를 이탈리아 제국에 병합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다.[74]
1923년, 이탈리아 군인들은 그리스를 점령하려는 파시스트들의 계획의 일환으로 그리스의 코르푸 섬을 점령했다. 코르푸는 나중에 그리스로 반환되었고 그리스와 이탈리아 간의 전쟁은 피할 수 있었다. 1925년,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사실상'' 보호령으로 만들었고, 이는 그리스의 주권에 대한 이탈리아의 입장을 돕는 데 기여했다. 코르푸는 과거 베네치아 공화국에 위치해 상당한 이탈리아 문화 유산과 영향력을 남겼기 때문에 이탈리아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에 중요했지만, 그곳의 그리스인 (특히 젊은이)들은 이탈리아 점령에 격렬하게 항의했다.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에티오피아 정복으로 이탈리아 정부가 군사력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파시스트의 지중해 지배를 확보하기 위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나치 독일보다 더 광범위하게 국민주의자를 지원했다.[95] 이탈리아 왕립 해군(Regia Marinait)은 지중해 봉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궁극적으로 이탈리아는 기관총, 포병, 항공기, 전차를 제공했고, 공군군단, 자원군단을 국민주의 진영에 투입했다.[96] 이탈리아 자원군단은 최고 50,000명의 병력을 국민주의자들에게 제공했다.[96] 이탈리아 군함들은 국민주의자들이 점령한 스페인령 모로코에 대한 공화군 해군의 봉쇄를 무너뜨리고, 공화군이 점령한 말라가, 발렌시아, 바르셀로나에 대한 해상 폭격에 참여했다.[97] 또한, 이탈리아 공군은 주로 도시와 민간인을 목표로 공습을 가했다.[98] 이러한 이탈리아의 헌신은 이탈리아 본토에서 대대적으로 선전되었고, 파시스트의 자긍심이 되었다.[98] 이탈리아는 총 660대의 항공기, 150대의 전차, 800문의 포, 10,000정의 기관총, 240,747정의 소총을 국민주의자들에게 제공했다.[99]
3. 1. 3. 권위주의와 반민주주의
파시즘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부정하고, 강력한 지도자에 의한 일당 독재를 옹호했다.[3] 의회와 정당을 해산하고,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억압했다.[13] 1929년 총선은 국민투표 형태로 실시되었는데, 이때는 국가 파시스트당(PNF)만이 유일하게 합법적인 정당이었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일당 목록을 확인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사용했고, 제시된 목록은 유권자의 98.43%의 지지를 받았다.[13] 1912년부터 합법이었던 보편적 남자 보통 선거권은 노동 조합 또는 협회 회원, 군인 및 성직자에 속한 남자로 제한되어 950만 명만이 투표할 수 있었다.[13]3. 1. 4. 반공주의와 반사회주의
베니토 무솔리니 집권 초기부터 파시스트들은 정치적 반대자, 특히 사회주의자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이탈리아 파시즘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해 극렬한 반대 입장을 보였으며, 반공주의와 반사회주의를 핵심 이념 중 하나로 삼았다.[1] 이러한 이념적 배경 하에, 파시스트 정권은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고 그들의 정치적 활동을 억제했다. 이탈리아 내에서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파시즘에 의해 박해받았다.[1]3. 2. 파시즘의 주요 정책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1935년 ''파시즘 교리''에서 전체주의 국가를 공식 선언하고, 베니토 무솔리니는 군국주의와 파시스트의 "새로운 인간" 이상을 기반으로 이탈리아 문화와 사회를 개선하는 의제를 설정했다.[4] 파시스트만이 "진정한 이탈리아인"으로 간주되었고, 파시스트당 가입과 지지는 "완전한 시민권" 획득에 필수적이었다.[6]무솔리니의 선전은 그를 국가 구원자로 우상화했으며, 파시스트 정권은 이탈리아 사회에 이를 만연시키려 했다. 뉴스릴, 라디오 방송, 파시즘 지지 영화 등에서 선전이 실시되었고,[9] 1926년에는 모든 영화 상영 전 선전 뉴스릴 상영이 의무화되었다.[10] "새로운 이탈리아인"의 남성성을 강조하며 공격성, 정력, 젊음, 속도, 스포츠를 강조했고,[11] 여성은 모성에 전념하고 공적 문제에서 벗어나야 했다.[12]
경제적으로 파시즘은 조합주의를 제시했지만, 실제로는 대기업과 지주의 이익을 옹호하는 정책을 펼쳤다. 1929년 대공황 이후 보호 무역 관세를 제정하고 경제 방향을 설정하려 시도했다. 1936년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식민지 확장은 이탈리아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69][70]
사회적으로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가 개선되었고, 1929년 라테란 조약을 통해 바티칸 시국의 독립적 지위를 인정하고 로마 가톨릭교를 국교로 만들었다.[16] 그러나 1938년 이탈리아 인종법과 ''인종 선언''이 공포되어 이탈리아 유대인과 개신교를 탄압했다.[20][19][21][22] 무솔리니는 초기에는 반유대주의를 부정했지만,[25][26] 아돌프 히틀러의 영향으로 점차 반유대주의 정책을 강화했다.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적 팽창을 추구하며 에티오피아 침공, 스페인 내전 개입, 알바니아 병합 등을 감행했다.[95][96][97][98][99] 무솔리니는 지중해를 ''"마레 노스트룸"''(우리 바다)으로 만들어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다.
3. 2. 1. 경제 정책: 조합주의
파시즘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안으로 조합주의(Corporatism)를 제시했다. 이는 동일한 직업 또는 지부에 속하는 노동 조합과 고용주 단체가 직업 조합으로 조직되는 것이었다. 1935년, 무솔리니의 이름으로 《파시즘 교리》가 출판되었지만, 이는 조반니 젠틸레(Giovanni Gentile)가 쓴 것이 유력하다. 이 책은 조합주의 하에서 경제에 대한 국가의 역할을 설명했다. 《파시즘 교리》의 한 구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63]그러나 실제로는 대기업과 지주의 이익을 옹호하는 정책을 펼쳤다. 파시스트 선언의 좌익 요소들은 이탈리아를 사회주의로부터 방어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당을 지지했던 산업가와 지주들에 의해 반대받았고, 조합주의 정책은 산업에 의해 지배되었다. 처음에는 경제 법안이 사유화를 허용하고, 임대 법률을 자유화하고, 세금을 감면하고, 행정 개혁을 허용함으로써 부유한 산업 및 농업 계급을 주로 선호했다. 그러나 마테오티 사태 이후 무솔리니가 전체주의 국가를 추진하면서 경제 정책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1926년에는 로코 법이라고도 알려진 신디칼 법이 통과되어 경제를 12개의 별도 고용주 및 직원 노조로 조직했다.[64] 이 노조들은 주로 국가 통제를 받았으며, 반대를 억압하고 정치적 충성을 보상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파시스트 노조가 모든 경제적 결과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할 수는 없었지만, 사회 보장 혜택, 퇴직금 청구를 처리하고, 때로는 노동자에게 이익이 되는 계약을 협상할 수 있었다.[65]
1929년 대공황이 세계 경제를 강타한 후, 파시스트 정권은 다른 국가들을 따라 보호 무역 관세를 제정하고 경제 방향을 설정하려고 시도했다. 1930년대에 정부는 밀 생산량을 늘리고 이탈리아의 밀 자급자족을 달성하여 캐나다와 미국으로부터의 밀 수입을 중단했다.[66] 그러나 농지를 밀 생산으로 전환하면서 채소와 과일 생산이 감소했다.[66] 밀 생산을 개선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의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이탈리아 인구의 0.5% (일반적으로 부유층)가 이탈리아 전체 농지의 42%를 소유했고[67] 농민들의 소득은 증가하지 않은 반면 세금은 증가했기 때문이다.[67] 대공황으로 인해 실업률이 1933년에 30만 명에서 100만 명으로 증가했다.[68] 또한 실질 소득이 10% 감소하고 수출이 감소했다. 이탈리아는 대공황 기간 동안 대부분의 서방 국가보다 나았다. 복지 서비스가 대공황의 영향을 줄였기 때문이다.[68] 1913년부터 1938년까지의 산업 성장은 같은 기간 독일의 산업 성장보다 더 컸다. 이 기간 동안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만이 더 높은 산업 성장을 보였다.[68]
1936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식민지 확장은 이탈리아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드러났다. 1936~1937 회계 연도에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식민지의 예산은 식민지에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191억 3,600만 리라를 이탈리아에 요청했다.[69] 그 해 이탈리아의 전체 수입은 에 불과했다.[70]
3. 2. 2. 사회 정책: 통제와 억압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사회 전반을 강력하게 통제하고 억압했다. 1935년 ''파시즘 교리''에서 전체주의 국가를 공식 선언하고,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문화와 사회를 개선하는 의제를 설정했다.[4] 파시즘 하에서 이탈리아 국민성은 군국주의와 파시스트의 "새로운 인간" 이상을 기반으로, 개인주의와 자율성을 버리고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된 충성스러운 이탈리아인을 의미했다.[5] 파시스트만이 "진정한 이탈리아인"으로 간주되었고, 파시스트당 가입과 지지는 "완전한 시민권" 획득에 필수적이었다. 파시즘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들은 공공 생활에서 추방되고 고용될 수 없었다.[6]무솔리니의 선전은 그를 국가 구원자로 우상화했으며, 파시스트 정권은 이탈리아 사회에 이를 만연시키려 했다. 뉴스릴, 라디오 방송, 파시즘 지지 영화 등에서 선전이 실시되었고,[9] 1926년에는 모든 영화 상영 전 선전 뉴스릴 상영이 의무화되었다.[10] 예술가, 작가, 출판인은 엄격하게 통제되지는 않았지만, 노골적으로 국가에 반하는 경우에만 검열되었다. "새로운 이탈리아인"의 남성성을 강조하며 공격성, 정력, 젊음, 속도, 스포츠를 강조했고,[11] 여성은 모성에 전념하고 공적 문제에서 벗어나야 했다.[12]
1929년 총선은 국민투표 형태로 실시되었는데, 국가 파시스트당이 유일하게 합법적인 정당이었다. 무솔리니는 국민투표를 통해 파시스트 일당 목록을 확인했으며, 98.43%의 지지를 받았다.[13] 보편적 남자 보통 선거권은 노동 조합 또는 협회 회원, 군인, 성직자로 제한되어 950만 명만이 투표할 수 있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는 무솔리니 재임 기간 동안 개선되었다. 1929년 라테란 조약을 통해 교황청과 합의하여 바티칸 시국의 독립적 지위를 인정하고, 로마 가톨릭교를 국교로 만들었다.[16] 주교들은 파시스트 정권에 충성을 맹세하고 정권은 이들의 선출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교회는 스페인 내전에서 국민주의자들을 지지하고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지지하는 등 외교 정책을 지지했다. 교황 비오 11세는 1931년 회칙 ''Non abbiamo bisogno''을 통해 이탈리아 정권의 교회 박해와 "국가에 대한 이교도적 숭배"를 규탄했다.[18]
1938년 이탈리아 인종법과 ''인종 선언''이 공포되어 이탈리아 유대인[20]과 개신교[19][21][22], 특히 복음주의와 오순절교를 불법화하고 박해했다.[21][22] 무솔리니는 반유대주의를 "독일의 악습"으로 묘사하고[25], 유대인과 시온주의에 대해 긍정적으로 발언하기도 했지만,[26] 아돌프 히틀러를 달래기 위해 파시스트당 내 반유대주의는 증가했다.
나치 독일과의 동맹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는 나치즘의 유대인 대량 학살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채택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당국은 유대인 체포에 협조를 거부했고, 카시빌레 휴전 이후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이 형성되기 전까지 유대인들은 추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탈리아 홀로코스트 과정에서 수천 명의 이탈리아 유대인과 소수의 개신교인들이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20][22]
파시스트 정부는 문맹 퇴치를 목표로 교육 정책을 폈다.[44] 학교 졸업 최소 연령을 14세로 높이고 출석을 엄격하게 시행했다.[45] 조반니 젠틸레는 교육 정책이 학생들을 파시즘으로 세뇌하고 권위에 복종하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권고했다.[45] 1929년, 모든 교과서 승인권이 정부에 주어졌고, 중등학교 교사는 파시즘 충성 맹세를 해야 했으며, 아이들은 파시즘에 대한 충성을 배워야 했다.[45] 1933년에는 모든 대학 교수가 국가 파시스트 당원이 되어야 했다.[45] 1930년대부터 이탈리아 교육은 고대 로마 시대의 이탈리아 역사와 이탈리아 민족주의 부활에 중점을 두었다.[45] 1930년대 후반, 파시스트 정부는 나치 독일의 신체 단련 교육 시스템을 모방하여 이탈리아인들이 신체적으로 건강해지도록 요구했다.[45]
1925년 ''국립 여가 활동 기구''(OND)가 창설되어 성인을 위한 레크리에이션 활동을 지원했다.[47] 1930년대까지 모든 마을에 클럽하우스가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으며, 스포츠 경기장, 도서관, 영화관, 극장, 오케스트라 등을 설립하고 유지했다.[47] 1936년까지 봉급 노동자의 80%를 조직한 것으로 추정된다.[48]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정부는 연금, 병가, 연차 유급 휴가를 도입했고,[52] 1933년에는 실업 수당을 설립했다.[52] 1935년에는 40시간 노동제가 도입되었고, 노동자들은 토요일 오후를 스포츠, 준군사, 정치 활동에 참여하도록 요구받았다.[53]
무솔리니는 정권 안보를 위해 ''Milizia Volontaria per la Sicurezza Nazionale'' ("국가 안보 자원 민병대", 검은 셔츠단)을 창설했다. 1927년에는 비밀 경찰 ''Organizzazione di Vigilanza Repressione dell'Antifascismo'' (오브라)가 창설되어 반대파를 탄압했다.[54] 이탈리아 조직 범죄와 싸우기 위해 1925년 체사레 모리에게 팔레르모 지사로서 특별 권한이 부여되었다.[55]
파시스트들은 엘리트 여성부터 공장 노동자[58], 농민에 이르기까지[59] 여성의 역할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파시스트 지도자들은 "새로운 이탈리아 여성"의 등장을 외치면서도 여성들이 해방을 경험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60] 1935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과 국제 연맹 제재는 파시스트당 내에서 여성의 역할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제국과 여성의 기여는 파시스트 선전의 핵심 주제가 되었고, 여성 단체들은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도록 역할이 확대되었다.[61]
정부는 "식량 주권", 즉 식량 자급자족을 달성하려 했다. 새로운 정책은 음식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았다. 목표는 수입을 줄이고 이탈리아 농업을 지원하며 검소한 식단을 장려하는 것이었다. 파시스트 여성 단체들은 여성들에게 "자급자족 요리"를 훈련시켰다. 1930년대에 식료품 가격이 상승하고 유제품과 육류 소비가 억제되었으며,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암시장에 의존하게 되었다.[62]
3. 2. 3. 대외 정책: 팽창주의
파시즘은 제국주의적 팽창을 추구하며, 에티오피아 침공, 스페인 내전 개입, 알바니아 병합 등을 감행했다.[95][96][97][98][99]스티븐 리는 무솔리니의 외교 정책에서 세 가지 주요 주제를 식별했다. 첫 번째는 앞선 자유주의 정권의 외교 정책 목표의 연장이었다. 자유주의 이탈리아는 독일 및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었고 발칸 반도와 북아프리카에 대한 큰 야망을 품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1896년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심각한 패배를 겪었는데, 당시 이 국가를 점령하라는 강력한 요구가 있었다. 두 번째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막대한 손실 이후 심오한 환멸이었다. 많은 이탈리아인들의 눈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로부터 얻은 작은 영토적 이득은 전쟁의 엄청난 대가를 보상하기에 충분하지 않았고, 특히 폴란드와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국가들은 연합군의 승리에 훨씬 적게 기여했지만 훨씬 더 많은 것을 받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무솔리니가 옛 로마 제국의 자부심과 영광을 회복하겠다는 약속이었다.[74]
무솔리니는 유럽에서 이탈리아의 지위를 강대국으로 부활시키고 "새로운 로마 제국"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했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가 지중해를 지배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선전에서 파시스트 정부는 지중해를 지칭하기 위해 원래 고대 로마 용어인 ''"마레 노스트룸"(Mare Nostrum)'' (우리 바다la)을 사용했다. 파시스트 정권은 군사 프로젝트에 대한 자금 지원과 관심을 늘리고 북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에 이탈리아 식민 제국을 건설하고 지중해와 아드리아 해에서 지배력을 되찾기 위한 계획을 시작했다. 파시스트들은 달마치아, 알바니아, 그리스를 이탈리아 제국에 병합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다.
파시스트 정권은 또한 유럽에서 개입주의적 외교 정책을 펼쳤다. 1923년, 이탈리아 군인들은 그리스를 점령하려는 파시스트들의 계획의 일환으로 그리스의 코르푸 섬을 점령했다. 코르푸는 나중에 그리스로 반환되었고 그리스와 이탈리아 간의 전쟁은 피할 수 있었다. 1925년,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사실상'' 보호령으로 만들었고, 이는 그리스의 주권에 대한 이탈리아의 입장을 돕는 데 기여했다. 코르푸는 과거 베네치아 공화국에 위치해 상당한 이탈리아 문화 유산과 영향력을 남겼기 때문에 이탈리아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에 중요했지만, 그곳의 그리스인 (특히 젊은이)들은 이탈리아 점령에 격렬하게 항의했다.
프랑스와의 관계는 엇갈렸다. 파시스트 정권은 이탈리아인이 거주하는 프랑스 지역을 되찾기 위해 결국 프랑스와의 전쟁을 벌일 의도가 일관되게 있었지만, 히틀러가 부상하면서 파시스트들은 오스트리아의 독립과 티롤의 독일인 거주 지역을 요구할 경우 독일이 이탈리아에 가할 잠재적 위협에 대해 즉시 더 우려하게 되었다. 독일의 팽창주의에 대한 우려로 인해 이탈리아는 1935년부터 1936년까지 존재했던 독일을 상대로 한 프랑스, 영국과의 스트레사 전선에 참여했다. 이는 독일을 겨냥한 이전의 조약인 이탈리아-소련 조약에 따른 것이었다.
파시스트 정권은 유고슬라비아와 부정적인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는 이들이 오랫동안 유고슬라비아의 붕괴를 원하여 이탈리아의 영토를 확장하고 이탈리아의 힘을 증대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유고슬라비아에서 간첩 행위를 추구했으며, 유고슬라비아 당국은 1930년과 같이 여러 차례 유고슬라비아 주재 이탈리아 대사관에서 스파이 조직을 발견했다. 1929년, 파시스트 정부는 크로아티아 극단주의 민족주의자 안테 파벨리치를 유고슬라비아로부터 이탈리아로 망명 정치인으로 받아들였다. 파시스트들은 파벨리치에게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고 이탈리아에 그의 새로 결성된 파시스트 민병대이자 테러 단체인 우스타샤를 개발하고 훈련할 수 있는 훈련장을 제공했다. 이 조직은 나중에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통치 세력이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수십만 명의 세르비아인, 유대인, 로마인을 살해했다.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한 후, 무솔리니는 알바니아로 관심을 돌렸다. 1939년 4월 7일,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침공했고, 짧은 작전 후 알바니아는 점령되어 보호령으로 바뀌었고, 알바니아 의회는 빅토르 에마누엘 3세를 알바니아 왕으로 즉위시켰다. 알바니아 합병에 대한 역사적 정당성은 고대 로마 제국의 역사에 있었는데, 알바니아 지역은 북부 이탈리아가 로마군에 의해 점령되기 전부터 로마인들의 초기 정복지였다. 그러나 합병 당시에는 알바니아인들 사이에 이탈리아와의 연관성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알바니아는 이탈리아 침공 전에도 이탈리아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탈리아는 티라나 조약을 통해 알바니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이 조약은 이탈리아에 알바니아 경제와 군대에 대한 양보를 제공했다. 점령은 에마누엘 3세 국왕에게 환영받지 못했는데, 그는 이것이 에티오피아와의 전쟁보다 이탈리아를 더욱 고립시켰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에티오피아 정복으로 이탈리아 정부가 군사력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파시스트의 지중해 지배를 확보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하여 나치 독일보다 더 광범위하게 국민주의자를 지원했다.[95]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지중해 봉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궁극적으로 이탈리아는 기관총, 포병, 항공기, 전차를 제공했고, 공군군단, 자원군단을 국민주의 진영에 투입했다.[96] 이탈리아 자원군단은 최고 50,000명의 병력을 국민주의자들에게 제공했다.[96] 이탈리아 군함들은 국민주의자들이 점령한 스페인령 모로코에 대한 공화군 해군의 봉쇄를 무너뜨리고, 공화군이 점령한 말라가, 발렌시아, 바르셀로나에 대한 해상 폭격에 참여했다.[97] 또한, 이탈리아 공군은 주로 도시와 민간인을 목표로 공습을 가했다.[98] 이러한 이탈리아의 헌신은 이탈리아 본토에서 대대적으로 선전되었고, 파시스트의 자긍심이 되었다.[98] 이탈리아는 총 660대의 항공기, 150대의 전차, 800문의 포, 10,000정의 기관총, 240,747정의 소총을 국민주의자들에게 제공했다.[99]
이탈리아는 전쟁을 위해 군사력을 강화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개선했다. 이는 이탈리아의 대서양으로의 지중해 접근을 확보하고, 스페인의 반대 없이 ''마레 노스트룸'' 정책을 추진할 수 있게 하는 데 성공했다. 스페인 내전에 참여한 또 다른 주요 외세는 독일이었다. 이는 1870년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이탈리아와 독일군이 함께 싸운 최초의 사례였다. 1930년대에 이탈리아는 지중해를 장악하기 위해 많은 대형 전함과 기타 군함을 건조했다.
1933년 나치당이 독일에서 권력을 잡자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정권은 공개적으로 히틀러 정권을 지지하며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라고 말했다.[100] 파시스트 정권은 또한 독일의 새로운 정권과의 동맹 창설에 대해 언급했다.[101] 사적으로 무솔리니와 이탈리아 파시스트는 국가 사회주의 정부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고, 무솔리니는 이념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파시스트는 히틀러의 범게르만주의 사상을 불신했는데, 이는 이전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였던 이탈리아 영토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다른 국가 사회주의자들은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이탈리아를 비난했지만, 히틀러는 오랫동안 무솔리니의 웅변과 시각적 인물을 숭배해왔으며, 로마식, 팔을 쭉 뻗는 경례, 극적인 웅변, 정치적 폭력을 위한 제복을 입은 준군사 조직의 사용, 대중 집회를 통한 운동의 힘 과시 등 파시스트의 많은 상징을 국가 사회주의당에 도입했다. 1922년 히틀러는 자신의 "로마 진군"을 "베를린 진군"으로 조직하는 방법에 대해 무솔리니에게 조언을 구하려 했지만(이는 1923년 실패한 맥주홀 폭동으로 이어졌다),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운동에 큰 관심이 없었고 히틀러를 다소 미친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에 히틀러의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102]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국가 사회주의 운동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나의 투쟁''을 읽으려 했지만, 즉시 실망하여 ''나의 투쟁''은 "내가 결코 읽을 수 없었던 지루한 책"이라고 말하고 히틀러의 신념은 "흔해 빠진 상투적인 표현에 불과하다"고 언급했다.[90] 무솔리니는 히틀러처럼 유색인종보다 백인의 문화적, 도덕적 우월성을 믿었지만,[82]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에 반대했다. 무솔리니의 정부 마르게리타 사르파티를 포함한 많은 파시스트가 유대인이었고, 파시스트 예술 및 선전 담당자였으며, 이탈리아인들 사이에서 반유대주의에 대한 지지는 거의 없었다. 무솔리니는 또한 인종을 우월성의 전조로 평가하지 않고 문화를 평가했다.
히틀러와 국가 사회주의자들은 계속해서 무솔리니를 그들의 대의로 설득하려 했고, 결국 무솔리니는 나치당에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고 국가 사회주의 준군사 조직이 이탈리아에서 훈련하도록 허용했는데, 이는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민족주의 정부가 이탈리아에 유익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90] 1933년 이후 독일인에 대한 의심이 커지면서 무솔리니는 독일이 유럽에서 지배적인 민족주의 국가가 되지 않도록 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무솔리니는 1934년 파시스트 오스트리아 대통령 엥겔베르트 돌푸스 암살 이후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려는 독일의 노력을 반대했고, 독일이 간섭할 경우 오스트리아에 군사적 지원을 약속했다. 이 약속은 1934년 오스트리아가 합병되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되었다.
공개적인 모습과 선전은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긴밀함과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 국가 사회주의 사이의 유사성을 끊임없이 묘사했다. 두 이데올로기는 상당한 유사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두 파벌은 서로를 의심했고 두 지도자는 세계적 영향력을 놓고 경쟁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오스트리아 독립 문제가 위기에 처한 1934년 6월에 처음 만났다. 1934년 방문 후 사적으로 무솔리니는 히틀러를 그저 "어리석은 작은 원숭이"라고 말했다.
1936년 이탈리아가 고립된 후, 정부는 국제 문제에서 안정적인 협상 위치를 되찾기 위해 독일과 협력할 수밖에 없었고, 독일로부터 오스트리아 독립을 지지하는 것을 마지못해 포기했다. 1937년 9월, 무솔리니는 독일 측과의 더 긴밀한 유대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독일을 방문했다.[103] 1937년 10월 28일, 무솔리니는 이탈리아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잃어버린 독일의 식민지를 되찾는 것을 지지한다고 선언하며 "독일 국민과 같은 위대한 국민은 아프리카의 햇살 아래서 마땅히 가져야 할, 그리고 가졌던 자리를 되찾아야 한다"고 선언했다.[104]
이탈리아의 눈에 띄는 반대 없이, 히틀러는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인 ''안슐루스''를 진행했다. 독일은 나중에 대부분 독일인이 거주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지역인 주데텐란트를 주장했다. 무솔리니는 고립을 피하기 위해 독일을 도울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으로, 파시스트 정권은 남티롤의 다수 민족 독일인 인구와 그들이 대독일에 합류하고 싶어하는지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다. 파시스트는 또한 이탈리아가 동맹국으로서 이탈리아에 대해 엇갈린 감정을 가진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 국가 사회주의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1938년, 무솔리니는 동료 파시스트 회원들에게 반유대주의 정책의 시행을 지지하도록 압력을 가했지만, 많은 파시스트가 유대인이었고 반유대주의가 이탈리아에서 적극적인 정치적 개념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는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솔리니는 자신의 사위이자 저명한 파시스트인 가레아초 치아노 백작이 개인적으로 그러한 법을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반유대주의 법안을 강행했다. 매우 인기가 없는 반유대주의 법안을 시행하는 대가로,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정부는 히틀러와 국가 사회주의자에게 양보를 요구했다. 1939년, 파시스트는 히틀러에게 남티롤의 모든 독일인이 이탈리아를 떠나거나 이탈리아화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이탈리아 정부의 계획을 기꺼이 수용하도록 요구했다. 히틀러는 이에 동의했고, 따라서 남티롤 독일인으로부터 이탈리아에 대한 위협은 무력화되었다.
1939년 전쟁이 다가오자 파시스트 정권은 프랑스에 대한 공격적인 언론 캠페인을 강화하여 이탈리아인들이 프랑스에서 고통받고 있다고 주장했다.[105] 이는 양국 정권 모두 프랑스에 대한 주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동맹에 중요했다. 독일은 독일계 주민이 거주하는 알자스-로렌을, 이탈리아는 이탈리아계 주민이 거주하는 코르시카, 니차, 사보이아를 요구했다. 1939년 5월, 공식적인 동맹이 조직되었다. 이 동맹은 강철 조약으로 알려졌으며, 독일과의 전쟁이 발발할 경우 이탈리아가 독일과 함께 싸울 의무를 부과했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가 가까운 미래에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는 자신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조약에 서명해야 한다고 느꼈다. 이러한 의무는 이탈리아인들에게 그들을 위한 제국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한 것과 히틀러가 유럽의 지배적인 지도자가 되는 것을 허용하고 싶지 않다는 개인적인 욕망에서 비롯되었다.[106] 무솔리니는 자신이 위기를 중재하고 싶었기 때문에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불만을 품었지만, 공식적으로 침묵하기로 결정했다.[107]
이탈리아의 군사 및 물류 자원은 스페인,[108] 에티오피아, 리비아, 알바니아에서의 성공적인 제2차 세계 대전 전 군사 개입으로 인해 과도하게 사용되었으며, 장기적인 분쟁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정권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전쟁에 참전했는데, 이는 지중해에서 로마 제국을 재건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마레 노스트룸'').
이탈리아는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패배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자 추축국 중 하나로 전쟁에 참전했다. 프랑스 침공은 프랑스 제3 공화국이 곧 항복하면서 짧게 끝났다. 이탈리아는 "병행 전쟁"으로 알려진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대영 제국과 싸울 준비를 했으며, 유럽 전선에서 영국군의 붕괴를 예상했다. 이탈리아는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을 폭격하고, 이집트를 침공하고,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점령하여 초기에 성공을 거두었다. 이탈리아의 군사력은 1940년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에서 약점을 드러냈는데, 이 전쟁은 이탈리아가 도발적으로 시작했지만 이탈리아군은 진전을 거의 이루지 못했다. 그리스 전투에서 독일의 개입은 결국 이탈리아를 구제했고, 1942년 말까지 이탈리아의 영향력이 지중해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더 큰 야망의 일부가 충족되었다. 그리스 대부분이 이탈리아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탈리아는 코르시카와 튀니지의 프랑스 영토를 비시 프랑스의 붕괴와 독일군의 점령에 따라 관리했으며; 유고슬라비아 침공 후 크로아티아에 괴뢰 정권이 설치되었다. 알바니아, 류블랴나, 달마티아 해안 (달마티아 이탈리아인의 존재를 위해), 몬테네그로는 이탈리아 국가에 직접 병합되었다. 이탈리아-독일군은 또한 유고슬라비아 반군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가잘라 전투에서 승리한 후 엘 알라메인으로 진격하면서 영국이 점령한 이집트 일부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정복은 항상 다양한 반란(가장 두드러진 것은 그리스 저항군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 이탈리아의 참전 기간 동안 그리고 그 이후에도 지중해 전투를 벌인 연합군에 의해 심하게 저항받았다. 1941년 독일과 일본의 행동은 각각 소련과 미국을 전쟁에 참전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영국이 협상된 평화 협정에 동의하도록 하려는 이탈리아의 계획이 실패했다.[109] 궁극적으로 이탈리아 제국은 동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의 참혹한 패배 이후 붕괴되었다. 1943년 7월, 시칠리아 침공 이후 무솔리니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의 명령에 따라 체포되었고, 바돌리오가 이탈리아의 새로운 총리가 되었다. 바돌리오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모든 파시스트 조직과 국가 파시스트 당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반도의 외부에서 이탈리아 군대는 붕괴되었고, 점령 및 병합된 영토는 독일의 통제 하에 놓였다. 이탈리아는 1943년 9월 3일 연합군에 휴전 조약을 서명했다. 그리고 9월 29일, 이탈리아는 몰타에서 공식적으로 항복 문서를 서명했다.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항복한 후 이탈리아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탈리아 북부는 이탈리아 파시스트의 협력으로 독일군이 점령했으며, 베니토 무솔리니가 여전히 이끄는 친독일 괴뢰 정권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이 되어 추축국을 위해 50만 명 이상의 군인을 모집했다. 남부는 왕당파가 공식적으로 통제했는데, 이들은 이탈리아 공동 교전군(최대 5만 명 이상)으로 연합군을 위해 싸웠고, 이탈리아 전역에서 활동한 정치적 이념이 다른 약 35만 명의[110] 이탈리아 저항 운동 파르티잔(대부분 전 이탈리아 왕립군 군인)과 함께 했다. 1945년 4월 28일, 베니토 무솔리니는 아돌프 히틀러의 자살 이틀 전에 이탈리아 파르티잔에 의해 처형되었다.
3. 2. 4. 인종 정책: 인종차별과 반유대주의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이탈리아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다른 민족을 차별했다. 특히 1938년부터 반유대주의 정책을 시행하여 유대인을 탄압하고 추방했다.[20]1938년, 파시스트 정권은 이탈리아 인종법과 ''인종 선언''을 공포하여 이탈리아 유대인[20]과 개신교[19][21][22], 특히 복음주의와 오순절교를 불법화하고 박해했다.[21][22] 이탈리아 인종법은 이탈리아인이 아리아인이라고 선언하고 이탈리아인과 유대인 또는 아프리카인 간의 성관계와 결혼을 금지했다.[78]
아돌프 히틀러와 동맹을 맺기 전까지, 베니토 무솔리니는 국가 파시스트당(PNF) 내에 반유대주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1938년 중반, 히틀러의 영향으로 무솔리니는 인종에 대한 의제를 설정했고, 파시스트 정권은 인종 중심의 식민주의 의제로 전환했다.
국가 사회주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 사이의 주요 갈등 원인은 유대인에 대한 이탈리아의 입장이었다. 무솔리니는 초기에는 유대인에 대해 긍정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지만,[26] 히틀러를 달래기 위해 파시스트당 내의 반유대주의는 점차 증가했다.
1934년 몽트뢰 파시스트 회의에서 이탈리아가 주도하는 ''코미티 다치오네 페르 루니베르살리타 디 로마''(CAUR)가 파시스트 인터내셔널을 창설하려는 시도로 의장을 맡았고, 반유대주의 문제는 여러 파시스트 정당의 대표들 사이에서 논의되었다.
1938년, 독일의 압력으로 무솔리니는 반유대주의 정책을 채택하도록 명령했는데, 이 정책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파시스트당 내에서도 인기가 없었다. 로베르토 파리나치와 같은 소수의 고위 파시스트들은 반유대주의 정책에 만족했지만, 이탈로 발보는 반유대주의 법에 강력히 반대했다.
무솔리니가 히틀러의 독일과 긴밀한 동맹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는 나치즘의 유대인 대량 학살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채택하지 않았다. 카시빌레 휴전 이후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괴뢰 국가가 형성되기 전까지 유대인들은 추방되지 않았다. 수천 명의 이탈리아 유대인과 소수의 개신교인들이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20][22]
파시스트 정권은 이탈리아 식민지에서 혼혈 자녀의 수를 줄이기 위해 인종 차별을 옹호했다. 1937년 법령을 통해 식민지에서 이탈리아인과 아프리카인 간의 결혼 및 성관계는 범죄가 되었고, 이러한 관계에서 적발된 이탈리아인에게는 징역형이 선고되었다.[82]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생물학적 인종차별을 옹호하는 "인종 과학자 선언"을 받아들였으며, 이탈리아는 아리아인 기원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국가이며, 유대인은 이탈리아 인종에 속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85]
4. 파시즘 체제의 특징
파시스트 이탈리아 체제는 일당 독재, 개인 숭배, 폭력과 테러, 전체주의적 통제를 특징으로 했다.
일당 독재와 개인 숭배: 국가 파시스트당(PNF)은 유일하게 합법적인 정당이었고, 베니토 무솔리니는 '두체'(Duce, 지도자)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개인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13] 1935년 ''파시즘 교리''에서 공식적으로 전체주의 국가가 선언되었다.[3]
선전과 대중 동원: 파시스트 정권은 언론, 영화, 라디오 등 모든 매체를 통해 파시즘 이념을 선전하고 무솔리니를 국가의 구원자로 우상화했다.[9] 특히 뉴스릴은 대중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10] 검은 셔츠단의 대규모 집회와 퍼레이드는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에 영감을 주었다.[9]
폭력과 테러: 검은 셔츠단은 폭력으로 사회주의 및 노동 운동을 탄압했고,[54] 비밀경찰 오브라(OVRA)는 반파시스트 인사들을 감시, 체포, 고문했다.[55]
전체주의적 통제: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사회, 경제, 문화, 교육 등 모든 분야를 통제하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했다.[3] "새로운 이탈리아인"은 국가에 절대적으로 충성하고 복종해야 했다.[5]
종교 정책: 1929년 라테란 조약을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바티칸 시국의 독립을 인정했다.[17] 로마 가톨릭교는 국교가 되었고, 교회는 파시스트 정권의 외교 정책을 지지했다.[17]
인종 정책: 1938년 이탈리아 인종법과 ''인종 선언''을 통해 이탈리아 유대인과 개신교도를 차별하고 박해했다.[19][20][21][22] 이는 아돌프 히틀러의 영향으로, 초기에는 반유대주의를 부인했던 무솔리니의 입장 변화를 보여준다.[41]
교육 및 사회 정책: 문맹 퇴치를 위한 강력한 교육 정책을 시행하고, 학생들을 파시즘으로 세뇌했다.[44] 국립 여가 활동 기구(OND)와 국립 발릴라 기구(ONB)를 통해 대중의 여가 활동과 청소년 교육을 장려했다.[47][51]
여성 정책: 여성의 역할을 모성에 한정하고 공적 영역에서 배제하려 했으며,[12] "식량 주권" 정책을 통해 식량 자급자족을 추구했다.[62]
범죄와의 전쟁: 시칠리아의 코사 노스트라와 칼라브리아의 'Ndrangheta 등 이탈리아 조직 범죄에 대항하여 특별 권한을 부여하기도 하였다.[55]
4. 1. 일당 독재와 개인 숭배
국가 파시스트당(PNF)은 유일하게 합법적인 정당으로, 모든 권력을 독점했다.[13] 무솔리니는 '두체'(Duce, 지도자)로 불리며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개인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은 일당 국가가 되고 파시즘을 삶의 모든 측면에 통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35년 ''파시즘 교리''에서 공식적으로 전체주의 국가가 선언되었다.[3]베니토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정권은 이탈리아 문화와 사회를 개선하는 의제를 설정했다.[4] 파시즘 하에서 이탈리아 국민성의 정의는 군국주의적 기초와 파시스트의 "새로운 인간" 이상에 기반을 두어야 했다. 여기서 충성스러운 이탈리아인들은 개인주의와 자율성을 버리고 자신을 이탈리아 국가의 구성 요소로 간주하며 국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야 했다.[5] 그러한 전체주의 정부 하에서 파시스트만이 "진정한 이탈리아인"으로 간주되었고, 파시스트당 가입과 지지는 사람들이 "완전한 시민권"을 얻는 데 필요했다. 파시즘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은 사람들은 공공 생활에서 추방되었고 고용될 수 없었다.[6] 파시스트 정부는 또한 해외에 거주하는 이탈리아인들에게 파시스트 대의를 지지하고 거주지가 아닌 이탈리아와 동일시하도록 손을 내밀었다.[7] 파시즘을 위한 새로운 문화를 만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노력은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데 있어 나치 독일과 소련과 같은 다른 일당 국가에 비해 덜 급진적이었고 성공적이지 못했다.[8]
무솔리니의 선전은 그를 국가의 구원자로 우상화했으며, 파시스트 정권은 그를 이탈리아 사회에 만연시키려 했다.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의 매력은 무솔리니의 인기와 카리스마에 크게 기반을 두고 있었다. 무솔리니의 열정적인 웅변과 그를 둘러싼 인물 숭배는 로마에서 그의 검은 셔츠단의 대규모 집회와 퍼레이드에서 과시되었으며, 이는 아돌프 히틀러와 독일 나치당에 영감을 주었다.
파시스트 정권은 뉴스릴, 라디오 방송 및 파시즘을 의도적으로 지지하는 몇 편의 장편 영화에서 선전을 실시했다.[9] 1926년에는 모든 장편 영화 상영 전에 선전 뉴스릴을 상영하도록 요구하는 법률이 통과되었다.[10] 이 뉴스릴은 당시 라디오 수신기를 가진 이탈리아인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선전 영화나 라디오보다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데 더 효과적이었다. 파시스트 선전은 포스터와 국가가 후원하는 예술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예술가, 작가 및 출판인은 엄격하게 통제되지 않았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국가에 반하는 경우에만 검열을 받았다. "새로운 이탈리아인"의 남성성을 강조하여 공격성, 정력, 젊음, 속도 및 스포츠를 강조했다.[11] 여성은 모성에 전념하고 공적 문제에서 벗어나야 했다.[12]
4. 2. 선전과 대중 동원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선전과 대중 동원을 통해 체제를 유지하고 강화했다. 언론, 영화, 라디오 등 모든 매체를 동원하여 파시즘 이념을 선전하고, 베니토 무솔리니를 국가의 구원자로 우상화했다.[9] 특히 뉴스릴은 라디오 수신기가 부족했던 당시 이탈리아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10] 1926년에는 모든 장편 영화 상영 전에 선전 뉴스릴을 상영하도록 하는 법률이 통과되기도 했다.[10]무솔리니의 열정적인 웅변과 그를 둘러싼 인물 숭배는 로마에서 그의 검은 셔츠단의 대규모 집회와 퍼레이드를 통해 과시되었으며, 이는 아돌프 히틀러와 독일 나치당에 영감을 주었다.[9] 예술가, 작가, 출판인들은 엄격하게 통제되지는 않았지만, 노골적으로 국가에 반하는 경우 검열을 받았다.[11]
파시스트 정권은 "새로운 이탈리아인"의 남성성을 강조하며 공격성, 정력, 젊음, 속도, 스포츠를 장려했고,[11] 여성은 모성에 전념하고 공적 문제에서 벗어나야 했다.[12]
1929년 3월 24일에 실시된 총선은 국민투표 형태로 진행되었으며, 국가 파시스트당(PNF)이 유일하게 합법적인 정당이었다.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일당 목록을 확인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사용했고, 제시된 목록은 유권자의 98.43%의 지지를 받았다.[13] 노동 조합 또는 협회 회원, 군인 및 성직자에 속한 남자로 제한되기는 했지만, 보편적 남자 보통 선거권은 1912년부터 합법이었다. 그 결과 950만 명만이 투표할 수 있었다.[13]
1925년에는 성인을 위한 국가 최대 레크리에이션 단체인 ''국립 여가 활동 기구''(OND)가 창설되었다.[47] 1930년대까지 이탈리아의 모든 마을에 클럽하우스가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으며, 스포츠 경기장, 도서관, 영화관, 극장, 오케스트라 등을 설립하고 유지했다.[47] 회원 가입은 자발적이고 비정치적이었으며, 1936년에는 봉급 노동자의 80%를 조직한 것으로 추정된다.[48] 1939년에는 산업 노동력의 거의 40%가 가입했으며, 스포츠 활동은 많은 노동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49] OND는 이탈리아의 대규모 파시스트 조직 중 가장 많은 회원을 보유했으며,[49] 이러한 성공은 나치 독일이 자체 버전인 ''KdF''(Kraft durch Freude, "기쁨을 통한 힘")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영향을 주었다.[50]
젊은이들을 위한 조직인 국립 발릴라 기구(ONB, Opera Nazionale Balilla)는 클럽, 댄스, 스포츠 시설, 라디오, 콘서트, 연극, 서커스, 야외 하이킹 등을 거의 또는 전혀 비용 없이 제공했다.[51] 또한 토너먼트와 스포츠 축제를 후원했다.[51]
4. 3. 폭력과 테러
파시즘은 폭력과 테러를 통해 반대파를 탄압하고 사회를 통제했다. 검은 셔츠단(국가안보의용민병대)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 운동을 탄압했다.[54] 이들은 이탈리아 왕립 육군, 해군, 공군 제복의 색깔 때문에 "검은 셔츠단"이라고 불렸으며, 대부분 파쇼 전투단의 구성원이었다. 비밀경찰 오브라(OVRA)는 반파시스트 인사들을 감시하고 체포, 고문했다.[55] 오브라는 나치 독일의 친위대(SS)나 소비에트 연방의 내무인민위원회(NKVD)에 비해 훨씬 적은 수의 사망자를 발생시켰지만, 정치적 반대자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들의 가장 악명 높은 고문 방법 중 하나는 파시즘 반대자들에게 피마자유를 강제로 먹여 신체적으로 쇠약하게 만들고 때로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54]4. 4. 전체주의적 통제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1935년 ''파시즘 교리''에서 공식적으로 전체주의 국가를 선언했다. 이들은 사회, 경제, 문화, 교육 등 모든 분야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강화했다.[3]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억압되고, 국가는 개인의 삶에 깊숙이 개입했다.[3] 베니토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정권은 이탈리아 문화와 사회를 개선하는 의제를 설정했다.[4] 파시즘 하에서, 이탈리아 국민성의 정의는 군국주의적 기초와 파시스트의 "새로운 인간" 이상에 기반을 두어야 했다. 충성스러운 이탈리아인들은 개인주의와 자율성을 버리고 자신을 이탈리아 국가의 구성 요소로 간주하며 국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야 했다.[5]그러한 전체주의 정부 하에서, 파시스트만이 "진정한 이탈리아인"으로 간주되었고, 파시스트당 가입과 지지는 사람들이 "완전한 시민권"을 얻는 데 필요했다. 파시즘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은 사람들은 공공 생활에서 추방되었고 고용될 수 없었다.[6] 파시스트 정부는 또한 해외에 거주하는 이탈리아인들에게 파시스트 대의를 지지하고 거주지가 아닌 이탈리아와 동일시하도록 손을 내밀었다.[7] 파시즘을 위한 새로운 문화를 만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노력은 나치 독일과 소련과 같은 다른 일당 국가에 비해 덜 급진적이었고 성공적이지 못했다.[8]
무솔리니의 선전은 그를 국가의 구원자로 우상화했으며, 파시스트 정권은 그를 이탈리아 사회에 만연시키려 했다.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의 매력은 무솔리니의 인기와 카리스마에 크게 기반을 두고 있었다. 무솔리니의 열정적인 웅변과 그를 둘러싼 인물 숭배는 로마에서 그의 검은 셔츠단의 대규모 집회와 퍼레이드에서 과시되었으며, 이는 아돌프 히틀러와 독일 나치당에 영감을 주었다.
파시스트 정권은 뉴스릴, 라디오 방송 및 파시즘을 의도적으로 지지하는 몇 편의 장편 영화에서 선전을 실시했다.[9] 1926년에는 모든 장편 영화 상영 전에 선전 뉴스릴을 상영하도록 요구하는 법률이 통과되었다.[10] 이 뉴스릴은 당시 라디오 수신기를 가진 이탈리아인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선전 영화나 라디오보다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데 더 효과적이었다. 파시스트 선전은 포스터와 국가가 후원하는 예술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예술가, 작가 및 출판인은 엄격하게 통제되지 않았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국가에 반하는 경우에만 검열을 받았다. "새로운 이탈리아인"의 남성성을 강조하여 공격성, 정력, 젊음, 속도 및 스포츠를 강조했다.[11] 여성은 모성에 전념하고 공적 문제에서 벗어나야 했다.[12]
1929년 총선은 국민투표 형태로 실시되었다. 이 시점까지 국가는 국가 파시스트당(PNF)이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허용된 정당인 일당 국가였다.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일당 목록을 확인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사용했다. 제시된 목록은 결국 유권자의 98.43%의 지지를 받았다.[13]
1870년, 이탈리아 왕국은 남은 교황령을 합병하여 교황의 세속 권력을 박탈했다. 무솔리니 재임 기간 동안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는 상당히 개선되었다. 1929년, 무솔리니와 교황청은 186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탈리아 정부와의 격렬한 대립을 종식하는 데 합의했다. 1929년 라테란 협정은 교황을 로마 내 새로운 도시 국가인 바티칸 시국의 수장으로 인정하는 조약으로, 바티칸 시국에 독립적인 지위를 부여하고 세계 외교의 중요한 중심지로 만들었다. 1929년 정교 협약은 로마 가톨릭교를 유일한 국교로 만들었으며, 사제와 주교에게 급여를 지급하고, 종교적 결혼을 인정했으며 공립학교에 종교 교육을 도입했다. 그 대가로, 주교들은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에 충성을 맹세했으며, 정권은 이들의 선출에 거부권을 행사했다.[17] 특히 교회는 스페인 내전에서 국민주의자들에 대한 지지와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 대한 지지와 같은 외교 정책을 지지했다.
1938년, 이탈리아 인종법과 ''인종 선언''이 파시스트 정권에 의해 공포되었으며, 이는 이탈리아 유대인[20]과 개신교[19][21][22]를 불법화하고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돌프 히틀러와 동맹을 맺기 전까지, 베니토 무솔리니는 국가 파시스트당(PNF) 내에 반유대주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히틀러를 달래기 위해 파시스트당 내의 반유대주의는 꾸준히 증가했다.
국가 사회주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 사이의 주요 갈등 원인은 유대인에 대한 이탈리아의 입장이었다. 무솔리니는 처음에는 그의 정책에 반유대주의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볼셰비키 사이에 많은 수의 유대인이 있다는 관찰에 대한 응답으로, 무솔리니는 반유대주의적인 발언을 했다. 무솔리니는 볼셰비키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이 유대계 출신이라는 소문을 믿게 되었다.
유대인-볼셰비키-금권 정치적 연결과 음모에 대한 무솔리니의 성명은 파시스트 운동 내에서 반대에 직면했고, 무솔리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1919년에 이 입장을 포기했다. 반대에 굴복하여 입장을 바꾼 무솔리니는 더 이상 볼셰비즘이 유대인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지만, 러시아에서 볼셰비즘의 부상은 러시아에서 격렬한 반유대주의의 물결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반유대주의는 이탈리아 국민에게 이질적"이라고 주장했지만, 시온주의자들에게 "반유대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던 유일한 국가"에서 반유대주의를 선동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했다.
이탈리아 파시즘은 1930년대 후반에 반유대주의를 채택했고, 그 결과 무솔리니는 개인적으로 이전에 반유대주의적 발언을 했다.[41] 1938년, 독일의 압력으로 무솔리니는 정권에 이탈리아 인종법인 반유대주의 정책을 채택하도록 명령했는데, 이 정책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파시스트당 내에서도 매우 인기가 없었다.
반유대주의는 이탈리아 내에서 인기가 없었고 파시스트당 내에서도 인기가 없었다. 한 번은 파시스트 학자가 무솔리니에게 유대인 친구들의 대우에 대해 항의했을 때, 무솔리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당신에게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나는 어리석은 반유대주의 이론을 조금도 믿지 않습니다. 나는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로 나의 정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파시스트 정부는 이탈리아에서 문맹 퇴치를 목표로 강력한 교육 정책을 폈다.[44] 중퇴를 줄이기 위해 정부는 학교 졸업 최소 연령을 12세에서 14세로 변경하고 출석을 엄격하게 시행했다.[45] 1922년부터 1924년까지 파시스트 정부의 초대 교육부 장관이었던 조반니 젠틸레는 교육 정책이 학생들을 파시즘으로 세뇌하고 청소년들이 권위에 복종하고 존경하도록 교육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권고했다.[45] 1929년, 교육 정책은 세뇌 의제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다.[45] 그 해 파시스트 정부는 모든 교과서의 승인권을 장악했고, 모든 중등학교 교사는 파시즘에 대한 충성 맹세를 해야 했으며, 아이들은 파시즘에 대해 신과 같은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고 배우기 시작했다.[45] 1933년에는 모든 대학 교수가 국가 파시스트 당의 당원이 되어야 했다.[45] 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이탈리아의 교육은 고대 로마 시대의 이탈리아를 문명의 힘으로 묘사하고, ''리소르지멘토'' 시대의 이탈리아 민족주의의 부활과 이탈리아 독립 및 통일을 위한 투쟁을 보여주는 이탈리아 역사에 중점을 두었다.[45] 1930년대 후반, 파시스트 정부는 나치 독일의 신체 단련에 대한 교육 시스템을 모방하여 이탈리아인들이 신체적으로 건강해지도록 요구하는 의제를 시작했다.[45]
이탈리아의 지적 재능은 1926년에 설립된 이탈리아 왕립 아카데미를 통해 파시스트 정부에 의해 보상받고 장려되었다.[46]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사회 정책에서 주요한 성공은 1925년 ''국립 여가 활동 기구''(OND, Opera Nazionale Dopolavoro) 또는 "전국 퇴근 후 활동 프로그램"의 창설이었다. OND는 성인을 위한 국가 최대의 레크리에이션 단체였다.[47] ''도폴라보로''는 1930년대까지 이탈리아의 모든 마을에 ''도폴라보로'' 클럽하우스가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으며, 11,000개의 스포츠 경기장, 6,400개 이상의 도서관, 800개의 영화관, 1,200개의 극장, 2,000개 이상의 오케스트라를 설립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47] 1936년까지 OND는 봉급 노동자의 80%를 조직한 것으로 추정된다.[48] 1939년까지 산업 노동력의 거의 40%가 ''도폴라보로''에 가입했으며, 스포츠 활동은 많은 수의 노동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OND는 이탈리아의 대규모 파시스트 조직 중 가장 많은 회원을 보유했다.[49] 파시스트 이탈리아에서 ''도폴라보로''의 엄청난 성공은 나치 독일이 자체 버전의 ''도폴라보로'', 즉 ''KdF''(Kraft durch Freude) 또는 "기쁨을 통한 힘" 프로그램을 만들도록 자극했으며, 이는 ''도폴라보로''보다 훨씬 더 성공적이었다.[50]
또 다른 조직인 국립 발릴라 기구(ONB, Opera Nazionale Balilla)는 널리 인기를 얻었으며 젊은이들에게 클럽, 댄스, 스포츠 시설, 라디오, 콘서트, 연극, 서커스 및 야외 하이킹을 거의 또는 전혀 비용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기구는 토너먼트와 스포츠 축제를 후원했다.[51]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정부는 연금, 병가, 연차 유급 휴가를 도입했다.[52] 1933년, 정부는 실업 수당을 설립했다.[52] 1930년대 말, 1,300만 명의 이탈리아인이 국가 건강 보험 제도에 가입했으며, 1939년까지 사회 보장 지출은 정부 지출의 21%를 차지했다. 1935년에는 40시간 노동제가 도입되었으며, 노동자들은 토요일 오후를 스포츠, 준군사, 정치 활동에 참여하도록 요구받았다.[53] 이는 ''파시스트 토요일''(Sabato fascista)이라고 불렸으며 주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했다. 특별한 경우 예외가 허용되었지만 21세 미만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53]

무솔리니는 정권의 안보를 위해 완전한 국가 권력을 옹호했으며, 1923년에 ''Milizia Volontaria per la Sicurezza Nazionale'' ("국가 안보 자원 민병대")를 창설했다. 이들은 이탈리아 왕립 육군, 해군, 공군 제복의 색깔 때문에 일반적으로 "검은 셔츠단"이라고 불렸다. 검은 셔츠단의 대부분은 ''파쇼 전투단''의 구성원이었다. 1927년에는 ''Organizzazione di Vigilanza Repressione dell'Antifascismo'' ("반파시즘 감시 및 탄압 기구") 또는 오브라라고 불리는 비밀 경찰이 창설되었다. 이 기구는 아르투로 보키니가 이끌었으며, 무솔리니와 정권의 반대파를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오브라는 나치 독일의 친위대 (SS)나 소비에트 연방의 내무인민위원회 (NKVD)에 비해 훨씬 적은 수의 사망자를 발생시켰지만, 정치적 반대자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들의 가장 악명 높은 고문 방법 중 하나는 파시즘 반대자들에게 심각한 설사와 탈수를 유발하여 신체적으로 쇠약하게 만들고 때로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피마자유를 강제로 먹이는 것이었다.[54]
이탈리아 조직 범죄와 싸우기 위해, 특히 시칠리아의 코사 노스트라와 칼라브리아의 'Ndrangheta에 대항하기 위해, 파시스트 정부는 1925년 체사레 모리에게 팔레르모의 지사로서 특별 권한을 부여했다.[55] 이 권한은 그가 시칠리아 마피아를 기소할 수 있게 해주었고, 많은 마피아 조직원들이 해외로 도망가거나 (대부분 미국으로) 투옥될 위험에 처하게 했다.[56] 그러나 모리는 파시스트 정권 내의 마피아 연계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을 때 해고되었고, 파시스트 정권이 마피아의 위협이 제거되었다고 선언한 1929년에 그의 직위에서 물러났다. 모리의 행동은 마피아를 약화시켰지만 파괴하지는 못했다. 1929년부터 1943년까지 파시스트 정권은 이전에 마피아에 대해 취했던 공격적인 조치를 완전히 포기했고, 마피아 조직원들은 비교적 방해받지 않고 남겨졌다.[57]
파시스트들은 엘리트 사회 여성부터 공장 노동자[58], 농민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역할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59] 파시스트 지도자들은 "새로운 이탈리아 여성"("nuova italiana")의 등장을 외치면서도 여성들이 해방을 경험하는 것을 "구출"하려 했다.[60] 이 정책들은 가톨릭, 파시스트, 상업적 행동 모델들이 여성의 역할과 사회 전반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기 위해 경쟁하면서 근대성과 전통적인 가부장적 권위 사이의 깊은 갈등을 드러냈다. 파시스트들은 폭력적인 "남성우월주의" 정치를 찬양하고 그들의 마초성을 과장하는 동시에 독신 남성에게 아동 복지 프로그램을 위한 세금을 부과했다. 1935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과 그 결과로 이어진 국제 연맹의 제재는 파시스트당 내에서 여성에게 할당된 역할을 형성했다. 제국과 여성의 기여는 파시스트 선전의 핵심 주제가 되었다. 당의 여성들은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제국주의적 대의를 위해 동원되었으며, 이를 통해 국가 내에서 새로운 중요성을 얻게 되었다. 파시스트 여성 단체들은 집안일의 낭비를 막는 방법을 교육하는 훈련 과정을 운영하는 등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도록 역할을 확대했다. 젊은 이탈리아 여성들은 식민지 아내로서의 미래를 위해 훈련을 받도록 특별 과정을 통해 이탈리아의 "햇볕 정책"에서의 역할을 준비했다.[61]
정부는 "식량 주권" 즉, 식량 공급에 대한 완전한 자급자족을 달성하려 했다. 새로운 정책은 음식에 매우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매우 논란이 많았다. 목표는 수입을 줄이고 이탈리아 농업을 지원하며 빵, 폴렌타, 파스타, 신선한 농산물, 와인을 기반으로 하는 검소한 식단을 장려하는 것이었다. 파시스트 여성 단체들은 더 이상 수입되지 않는 품목을 대체하기 위해 여성들에게 "자급자족 요리"를 훈련시켰다. 1930년대에 식료품 가격이 상승하고 유제품과 육류 소비가 억제되었으며, 점점 더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암시장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 정책은 파시스트들이 음식과 사람들의 행동을 일반적으로 전통과 취향에 관계없이 조작할 수 있는 전략적 자원으로 간주했음을 보여주었다.[62]
5. 국제 관계
베니토 무솔리니는 유럽에서 이탈리아의 지위를 강대국으로 부활시키고 "새로운 로마 제국"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했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가 지중해를 지배할 것이라고 약속했으며, 파시스트 정권은 군사 프로젝트에 대한 자금 지원과 관심을 늘리고 북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에 이탈리아 식민 제국을 건설하고 지중해와 아드리아 해에서 지배력을 되찾기 위한 계획을 시작했다. 파시스트들은 달마티아, 알바니아, 그리스를 이탈리아 제국에 병합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다.[74]
1920년대 이탈리아령 북아프리카에서의 식민지화 노력은 아랍인들이 이탈리아 식민지 정부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 내전으로 이어졌다. 오마르 무크타르가 이끄는 아랍 저항 운동에 맞서 로돌포 그라치아니 원수가 징벌적 평정 작전을 이끌었다. 저항을 막기 위해 지중해에서 자그부브 오아시스까지 리비아 국경 철선이 건설되었고, 제벨 아크다르 사람들은 강제 수용소로 추방되었다. 전투, 기아, 질병으로 최소 8만 명의 리비아인이 사망했다.[75]
1935년, 무솔리니는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일으켜 에티오피아 제국을 침공했다.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인들에게 독가스를 사용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고, 1936년 에티오피아를 점령하여 1890년대의 실패를 복수했다.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은 에티오피아 황제로 선포되었다. 이탈리아의 호전성은 국제 연맹의 비난을 받았고, 이탈리아는 1937년 연맹을 탈퇴했다.[77]
1938년,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인종 선언을 통해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성관계와 결혼을 금지하는 등 인종법을 시행했다.[78]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에서는 인종 차별 정책이 시행되었고, 혼혈을 막기 위해 이탈리아인과 아프리카인 간의 결혼 및 성관계는 범죄가 되었다.[82] 그러나 이탈리아령 리비아에서는 아랍 지도자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인종차별 정책이 축소되었다. 1939년에는 무슬림이 국가 파시스트당에 가입하고 리비아 군부대를 창설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률이 통과되었다.[89]
프랑스와의 관계는 복잡했다. 파시스트 정권은 프랑스 내 이탈리아인 거주 지역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벌일 의도가 있었지만, 나치 독일의 팽창주의에 대한 우려로 인해 1935년부터 1936년까지 프랑스, 영국과 스트레사 전선에 참여하기도 했다.[74]
유고슬라비아와는 부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이탈리아는 유고슬라비아의 붕괴를 통해 영토 확장과 세력 증대를 꾀했다. 파시스트 정부는 크로아티아 극단주의 민족주의자 안테 파벨리치를 망명 정치인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우스타샤 조직을 지원했다.[74]
1939년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병합했다. 이는 발칸 반도에서의 영향력 확대와 제국주의적 야욕을 드러낸 사건이었다.[74]
1925년,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사실상''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1939년 4월 7일,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침공했고, 짧은 작전 후 알바니아는 점령되어 보호령으로 바뀌었고, 알바니아 의회는 빅토르 에마누엘 3세를 알바니아 왕으로 즉위시켰다. 알바니아 합병에 대한 역사적 정당성은 고대 로마 제국의 역사에 있었는데, 알바니아 지역은 북부 이탈리아가 로마군에 의해 점령되기 전부터 로마인들의 초기 정복지였다. 그러나 합병 당시에는 알바니아인들 사이에 이탈리아와의 연관성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점령은 에마누엘 3세 국왕에게 환영받지 못했는데, 그는 이것이 에티오피아와의 전쟁보다 이탈리아를 더욱 고립시켰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내전에서 이탈리아는 나치 독일과 함께 국민파를 지원했다.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지중해 봉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탈리아는 기관총, 포병, 항공기, 전차를 제공했고, 공군군단, 자원군단을 국민파 진영에 투입했다.[96]
이탈리아는 전쟁을 위해 군사력을 강화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개선했다. 이는 이탈리아의 대서양으로의 지중해 접근을 확보하고, 스페인의 반대 없이 ''마레 노스트룸'' 정책을 추진할 수 있게 하는 데 성공했다.
5. 1. 독일과의 관계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이 1933년 독일에서 권력을 잡자, 베니토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정권은 공개적으로 히틀러 정권을 지지하며 "히틀러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라고 말했다.[100] 그러나 사적으로 무솔리니와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은 국가 사회주의 정부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고, 무솔리니는 이념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파시스트들은 히틀러의 범게르만주의 사상을 불신했는데, 이는 이전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였던 이탈리아 영토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1936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이후 국제적으로 고립되자, 이탈리아는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일과의 관계를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1937년 10월 28일, 무솔리니는 이탈리아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잃어버린 독일의 식민지를 되찾는 것을 지지한다고 선언하며 "독일 국민과 같은 위대한 국민은 아프리카의 햇살 아래서 마땅히 가져야 할, 그리고 가졌던 자리를 되찾아야 한다"고 선언했다.[104]
1939년 전쟁이 다가오자 파시스트 정권은 프랑스에 대한 공격적인 언론 캠페인을 강화하여 이탈리아인들이 프랑스에서 고통받고 있다고 주장했다.[105] 1939년 5월, 강철 조약을 통해 공식적인 동맹이 조직되었다. 이 조약은 독일과의 전쟁이 발발할 경우 이탈리아가 독일과 함께 싸울 의무를 부과했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가 가까운 미래에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는 자신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조약에 서명해야 한다고 느꼈다.[106]
이탈리아는 1940년에 추축국의 일원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초반에는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을 폭격하고, 이집트를 침공하고,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점령하여 초기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940년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에서 약점을 드러냈는데, 이 전쟁은 이탈리아가 도발적으로 시작했지만 이탈리아군은 진전을 거의 이루지 못했다. 그리스 전투에서 독일의 개입은 결국 이탈리아를 구제했다.
5. 1. 1. 초기 관계: 경쟁과 협력
아돌프 히틀러와 베니토 무솔리니는 초기에는 서로를 경계하는 경쟁 관계에 있었다.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국가 사회주의 운동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나의 투쟁''을 읽으려 했지만, 즉시 실망하여 ''나의 투쟁''은 "결코 읽을 수 없었던 지루한 책"이라고 말하고 히틀러의 신념은 "흔해 빠진 상투적인 표현에 불과하다"고 언급했다.[90] 무솔리니는 히틀러처럼 유색인종보다 백인의 문화적, 도덕적 우월성을 믿었지만,[82]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에는 반대했다.1933년 나치당이 독일에서 권력을 잡자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정권은 공개적으로 히틀러 정권을 지지하며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라고 말했다.[100] 그러나 사적으로 무솔리니와 이탈리아 파시스트는 국가 사회주의 정부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고, 무솔리니는 이념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파시스트는 히틀러의 범게르만주의 사상을 불신했는데, 이는 이전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였던 이탈리아 영토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1934년 파시스트 오스트리아 대통령 엥겔베르트 돌푸스 암살 이후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려는 독일의 노력을 반대했고, 독일이 간섭할 경우 오스트리아에 군사적 지원을 약속했다. 이 약속은 1934년 오스트리아가 합병되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되었다.[90]
공개적인 모습과 선전은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긴밀함과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 국가 사회주의 사이의 유사성을 끊임없이 묘사했다. 두 이데올로기는 상당한 유사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두 파벌은 서로를 의심했고 두 지도자는 세계적 영향력을 놓고 경쟁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오스트리아 독립 문제가 위기에 처한 1934년 6월에 처음 만났다. 1934년 방문 후 사적으로 무솔리니는 히틀러를 그저 "어리석은 작은 원숭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1936년 이탈리아가 국제적으로 고립되자, 이탈리아는 독일과 협력할 수밖에 없었고, 독일로부터 오스트리아 독립을 지지하는 것을 마지못해 포기했다. 이후 1937년 9월, 무솔리니는 독일과의 더 긴밀한 유대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독일을 방문했다.[103]
5. 1. 2. 동맹 강화와 추축국 형성
1936년, 이탈리아는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에티오피아를 정복하면서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었다. 이에 무솔리니는 나치 독일에 접근하기 시작했다.[103]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잃어버린 독일 식민지를 되찾는 것을 지지한다고 선언하며, 독일과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했다.[104]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한 후, 무솔리니는 알바니아로 관심을 돌렸다. 1939년 4월 7일,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보호령으로 만들었다.[77]
1939년 5월, 이탈리아와 독일은 강철 조약을 체결하여 군사 동맹을 맺었다. 이 조약은 독일과의 전쟁이 발발할 경우 이탈리아가 독일과 함께 싸울 의무를 부과했다.[106] 무솔리니는 이탈리아가 가까운 미래에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조약에 서명했다.[106]
이탈리아는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패배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자 추축국 중 하나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이탈리아는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을 폭격하고, 이집트를 침공하고,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점령하여 초기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940년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에서 약점을 드러냈고, 그리스 전투에서 독일의 개입으로 겨우 상황을 모면했다.[109]
1943년 시칠리아 침공 이후, 무솔리니는 체포되었고, 이탈리아는 1943년 9월 3일 연합군과 휴전했다. 이후 이탈리아는 이탈리아 내전을 겪으며, 북부는 독일군과 파시스트의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이, 남부는 왕당파와 파르티잔이 대립했다. 1945년 4월 28일,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파르티잔에 의해 처형되었다.[110]
5. 2. 스페인 내전 개입
스페인 내전에서 에티오피아 정복으로 이탈리아 정부가 군사력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파시스트의 지중해 지배를 확보하기 위해 나치 독일보다 더 광범위하게 국민파를 지원했다.[95] 이탈리아 왕립 해군(Regia Marina)은 지중해 봉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탈리아는 기관총, 포병, 항공기, 전차를 제공했고, 공군군단, 자원군단을 국민파 진영에 투입했다.[96] 이탈리아 자원군단은 최고 50,000명의 병력을 국민파에게 제공했다.[96] 이탈리아 군함들은 국민파가 점령한 스페인령 모로코에 대한 공화파 해군의 봉쇄를 무너뜨리고, 공화파가 점령한 말라가, 발렌시아, 바르셀로나에 대한 해상 폭격에 참여했다.[97] 또한, 이탈리아 공군은 주로 도시와 민간인을 목표로 공습을 가했다.[98] 이러한 이탈리아의 지원은 이탈리아 본토에서 대대적으로 선전되었고, 파시스트의 자긍심이 되었다.[98] 이탈리아는 총 660대의 항공기, 150대의 전차, 800문의 포, 10,000정의 기관총, 240,747정의 소총을 국민파에게 제공했다.[99]이탈리아는 전쟁을 위해 군사력을 강화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개선했다. 이는 이탈리아의 대서양으로의 지중해 접근을 확보하고, 스페인의 반대 없이 ''마레 노스트룸'' 정책을 추진할 수 있게 하는 데 성공했다. 스페인 내전에 참여한 또 다른 주요 외세는 독일이었다. 이는 1870년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이탈리아와 독일군이 함께 싸운 최초의 사례였다. 1930년대에 이탈리아는 지중해를 장악하기 위해 많은 대형 전함과 기타 군함을 건조했다.
5. 3. 알바니아 병합
1939년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병합했다. 이는 발칸 반도에서의 영향력 확대와 제국주의적 야욕을 드러낸 사건이었다.[74]파시스트 정권은 유럽에서 개입주의적 외교 정책을 펼쳤다. 1925년,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사실상''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한 후, 무솔리니는 알바니아로 관심을 돌렸다. 1939년 4월 7일,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침공했고, 짧은 작전 후 알바니아는 점령되어 보호령으로 바뀌었고, 알바니아 의회는 빅토르 에마누엘 3세를 알바니아 왕으로 즉위시켰다. 알바니아 합병에 대한 역사적 정당성은 고대 로마 제국의 역사에 있었는데, 알바니아 지역은 북부 이탈리아가 로마군에 의해 점령되기 전부터 로마인들의 초기 정복지였다. 그러나 합병 당시에는 알바니아인들 사이에 이탈리아와의 연관성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침공 전에도 이탈리아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탈리아는 티라나 조약을 통해 알바니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이 조약은 이탈리아에 알바니아 경제와 군대에 대한 양보를 제공했다. 점령은 에마누엘 3세 국왕에게 환영받지 못했는데, 그는 이것이 에티오피아와의 전쟁보다 이탈리아를 더욱 고립시켰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6. 파시즘에 대한 저항
파시스트 정권에 대한 저항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베니토 무솔리니의 비밀경찰은 ''반파시즘 감시 진압 기구''(OVRA)로 알려졌으며, 반대자들을 탄압했다. 1920년대 이탈리아 왕국에서 많은 반파시스트들은 폭력적인 검은 셔츠단과 싸웠고, 무솔리니의 부상에 저항했다. 이탈리아 사회당(PSI)이 무솔리니와 평화 협정을 체결한 후,[111] 노동조합이 평화적인 전략을 채택하자, 이에 동의하지 않는 노동 운동 구성원들이 ''Arditi del Popolo''를 결성했다.[112]
이탈리아 총노동 연맹(CGL)과 PSI는 비폭력적 전략을 유지했고, 이탈리아 공산당(PCd'I)은 무장 단체를 조직했지만 활동은 미미했다.[113] 세베리노 디 지오반니는 파시스트 공동체를 상대로 폭탄 테러를 조직했고,[114] 베네데토 크로체는 ''반파시스트 지식인 선언''을 출판했다.[115] 피에로 고베티와 카를로 로셀리도 주목할 만한 반파시스트였다.[116]
''이탈리아 반파시스트 집중''은 반파시스트 단체들의 연합이었고,[117][118][119] 정의와 자유는 파시즘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를 추구했다.[120] 카를로 로셀리,[120] 페루초 파리, 산드로 페르티니가 공동 설립했으며,[121] 가에타노 살베미니는 이탈리아 파시즘의 현실을 국제 사회에 알렸다.
스페인 내전에 참여한 이탈리아 반파시스트들은 "오늘 스페인에서, 내일 이탈리아에서"라는 모토를 내걸었다.[122] 줄리안 변경주에서는 슬로베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 사이에서 여러 반파시스트 운동이 활동했다.[123][124] 무장 봉기 조직 TIGR는 파시스트 당과 군을 공격하고 사보타주를 감행했다.[125][126]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이탈리아 저항군은 이탈리아 파시스트와 독일 나치 군인들과 싸웠으며, 토리노, 나폴리, 밀라노 등 여러 도시가 반파시스트 봉기로 해방되었다.[128]
6. 1. 반파시즘 운동
이탈리아 내에서는 파시즘에 대한 저항 운동이 꾸준히 전개되었다.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 등 다양한 세력이 반파시즘 운동에 참여했으며, 지하 조직, 망명, 무장 투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했다.[117][118][119]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은 반대자들을 지칭하기 위해 ''반파시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무솔리니의 비밀경찰은 공식적으로 ''반파시즘 감시 진압 기구''(OVRA)로 알려졌다. 1920년대 이탈리아 왕국에서, 노동 운동 구성원과 지지자들인 많은 반파시스트들은 폭력적인 검은 셔츠단과 싸웠고, 파시스트 지도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부상에도 맞서 싸웠다. 이탈리아 사회당(PSI)이 1921년 8월 3일에 무솔리니와 그의 전투 파시와 평화 협정을 체결한 후,[111] 노동조합이 합법주의적이고 평화적인 전략을 채택하자, 이 전략에 동의하지 않는 노동 운동 구성원들이 ''Arditi del Popolo''를 결성했다.[112]
이탈리아 총노동 연맹(CGL)과 PSI는 반파시스트 민병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비폭력적이고 합법적인 전략을 유지했다. 반면 이탈리아 공산당(PCd'I)은 당원들에게 조직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PCd'I는 일부 무장 단체를 조직했지만, 그들의 활동은 비교적 미미했다.[113] 1922년 로마 진군 이후 아르헨티나로 망명한 이탈리아 아나키스트 세베리노 디 지오반니는 이탈리아 파시스트 공동체를 상대로 여러 차례 폭탄 테러를 조직했다.[114] 이탈리아 자유주의 반파시스트 베네데토 크로체는 1925년에 ''반파시스트 지식인 선언''을 출판했다.[115] 당시 다른 주목할 만한 이탈리아 자유주의 반파시스트로는 피에로 고베티와 카를로 로셀리가 있었다.[116]

''이탈리아 반파시스트 집중''(Italian Anti-Fascist Concentration영어)은 공식적으로 ''집중행동 반파시스트''로 알려졌으며, 1927년부터 1934년까지 존재했던 이탈리아 반파시스트 단체들의 연합이었다. 프랑스 네락에서 망명 이탈리아인들에 의해 설립된 CAI는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에 맞서 싸우기 위한 망명 활동을 촉진하고 조정하려는 비공산주의 반파시스트 세력(공화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의 연합이었다. 그들은 ''라 리베르타''라는 선전지를 발간했다.[117][118][119]
정의와 자유(Justice and Freedom영어)는 1929년부터 1945년까지 활동한 이탈리아 반파시스트 저항 운동이었다.[120] 이 운동은 카를로 로셀리,[120] 페루초 파리, 그리고 나중에 이탈리아 총리가 된 산드로 페르티니가 공동 설립했으며, 이들은 이 운동의 지도자였다.[121] 이 운동 구성원들은 다양한 정치적 신념을 가졌지만, 기존 이탈리아 반파시스트 정당들에 비해 파시즘에 대한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반대라는 공통된 믿음을 공유했다. ''정의와 자유''는 가에타노 살베미니의 활동 덕분에 이탈리아 파시즘의 현실을 국제 사회에 알렸다.
많은 이탈리아 반파시스트들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독재에 대한 무솔리니 정권에 대한 무장 저항의 본보기를 세우기 위해 스페인 내전에 참여했다. 그들의 모토는 "오늘 스페인에서, 내일 이탈리아에서"였다.[122]
1920년과 1943년 사이에, 줄리안 변경주로 알려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에 합병된 영토에서 슬로베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 사이에서 여러 반파시스트 운동이 활동했다.[123][124] 가장 영향력 있는 단체는 무장 봉기 조직 TIGR였으며, 파시스트 당과 군 대표들을 공격하고 수많은 사보타주를 감행했다.[125][126] 조직의 대부분 지하 구조는 1940년과 1941년에 반파시즘 감시 진압 기구(OVRA)에 의해 발견되고 해체되었으며,[127] 1941년 6월 이후에는 대부분의 전 활동가들이 슬로베니아 파르티잔에 합류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이탈리아 저항군의 많은 구성원들이 집을 떠나 산으로 가서 이탈리아 내전 동안 이탈리아 파시스트와 독일 나치 군인들과 싸웠다. 토리노, 나폴리, 밀라노를 포함한 이탈리아의 많은 도시들이 반파시스트 봉기 중에 해방되었다.[128]
6. 2. 이탈리아 레지스탕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이탈리아 레지스탕스가 결성되어 파시스트 정권과 독일군에 맞서 싸웠다. 레지스탕스는 다양한 이념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었으며, 연합군과 협력하여 이탈리아 해방에 기여했다.[110] 1945년 4월 28일, 이탈리아 파르티잔은 아돌프 히틀러의 자살 이틀 전에 베니토 무솔리니를 처형했다.[110]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은 반대자들을 지칭하기 위해 ''반파시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무솔리니의 비밀경찰은 공식적으로 ''반파시즘 감시 진압 기구''(OVRA)로 알려졌다. 1920년대 이탈리아 왕국에서, 노동 운동의 구성원과 지지자들인 많은 반파시스트들은 폭력적인 검은 셔츠단과 싸웠고, 파시스트 지도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부상에도 맞서 싸웠다. 이탈리아 사회당(PSI)이 1921년 8월 3일에 무솔리니와 그의 전투 파시와 평화 협정을 체결한 후,[111] 노동조합이 합법주의적이고 평화적인 전략을 채택하자, 이 전략에 동의하지 않는 노동 운동의 구성원들이 ''Arditi del Popolo''를 결성했다.[112]
이탈리아 총노동 연맹(CGL)과 PSI는 반파시스트 민병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비폭력적이고 합법적인 전략을 유지했으며, 반면 이탈리아 공산당(PCd'I)은 당원들에게 조직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PCd'I는 일부 무장 단체를 조직했지만, 그들의 활동은 비교적 미미했다.[113] 1922년 로마 진군 이후 아르헨티나로 망명한 이탈리아 아나키스트 세베리노 디 지오반니는 이탈리아 파시스트 공동체를 상대로 여러 차례 폭탄 테러를 조직했다.[114] 이탈리아 자유주의 반파시스트 베네데토 크로체는 1925년에 출판된 그의 ''반파시스트 지식인 선언''을 썼다.[115] 그 당시 다른 주목할 만한 이탈리아 자유주의 반파시스트들은 피에로 고베티와 카를로 로셀리였다.[116]
''이탈리아 반파시스트 집중''(Italian Anti-Fascist Concentration영어), 공식적으로는 ''집중행동 반파시스트''는 1927년부터 1934년까지 존재했던 이탈리아 반파시스트 단체들의 연합이었다. 프랑스 네락에서 망명 이탈리아인들에 의해 설립된 CAI는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에 맞서 싸우기 위한 망명 활동을 촉진하고 조정하려는 비공산주의 반파시스트 세력(공화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의 연합이었다. 그들은 ''라 리베르타''라는 선전지를 발간했다.[117][118][119]
정의와 자유(Justice and Freedom영어)는 1929년부터 1945년까지 활동한 이탈리아 반파시스트 저항 운동이었다.[120] 이 운동은 카를로 로셀리,[120] 페루초 파리, 그리고 나중에 이탈리아 총리가 된 산드로 페르티니에 의해 공동 설립되었으며 이들은 이 운동의 지도자였다.[121] 이 운동의 구성원들은 다양한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존의 이탈리아 반파시스트 정당들에 비해 파시즘에 대한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반대라는 공통된 믿음을 공유했다. ''정의와 자유''는 또한 가에타노 살베미니의 활동 덕분에 이탈리아 파시즘의 현실을 국제 사회에 알렸다.
많은 이탈리아 반파시스트들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독재에 대한 무솔리니 정권에 대한 무장 저항의 본보기를 세우기 위해 스페인 내전에 참여했다. 따라서 그들의 모토는 "오늘 스페인에서, 내일 이탈리아에서"였다.[122]
1920년과 1943년 사이에, 줄리안 변경주로 알려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에 합병된 영토에서 슬로베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 사이에서 여러 반파시스트 운동이 활동했다.[123][124] 가장 영향력 있는 단체는 무장 봉기 조직 TIGR로, 파시스트 당과 군의 대표들을 공격하는 것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보타주를 감행했다.[125][126] 조직의 대부분의 지하 구조는 1940년과 1941년에 반파시즘 감시 진압 기구(OVRA)에 의해 발견되고 해체되었으며,[127] 1941년 6월 이후에는 대부분의 전 활동가들이 슬로베니아 파르티잔에 합류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이탈리아 저항군의 많은 구성원들이 집을 떠나 산으로 가서 이탈리아 내전 동안 이탈리아 파시스트와 독일 나치 군인들과 싸웠다. 토리노, 나폴리, 밀라노를 포함한 이탈리아의 많은 도시들이 반파시스트 봉기 중에 해방되었다.[128]
7. 파시즘의 유산과 영향
파시스트 정권은 역사 기록을 통제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해석을 장려했지만, 전후 역사학계는 파시즘과 베니토 무솔리니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해 왔다.[129] 1920년대 좌파 작가들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주장에 따라 파시즘을 자본주의의 한 형태라고 강조했다.[130] 파시스트 정권은 ''역사 연구를 위한 중앙 위원회(Giunta Centrale per gli Studi Storici)''를 통해 역사 저술과 교육을 통제하고, 문서 보관소에 대한 접근을 통제했으며, 조반니 젠틸레, 조아키노 볼페, 프란체스코 살라타와 같이 정권에 우호적인 역사학자 및 학자를 지원했다.[130] 1932년 10월, 이 정권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모더니스트 예술을 특징으로 하며 로마의 영광을 표현한다고 주장하는 대규모 파시스트 혁명 전시회를 후원했다.[131]
전후 대부분의 역사 기록은 무솔리니에 대해 강하게 적대적이었으며, 파시즘과 전체주의라는 주제를 강조했다.[132] 예외적으로 역사학자 렌초 데 펠리체는 무솔리니의 전기 4권 6,000페이지(1965–1997)를 저술했는데, 이 책은 이탈리아 파시즘에 대한 공적 및 사적 문서를 가장 철저하게 조사하여 모든 학자들에게 기본적인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데 펠리체는 무솔리니가 국내 문제에서는 혁신적인 현대화가였지만, 외교 정책에서는 자유주의 이탈리아(1861–1922)의 현실 정치 정책을 계승한 실용주의자라고 주장했다.[133] 1990년대에는 "정치의 미학화"와 "정치의 성화" 관점을 사용하여 파시즘의 대중적 수용 문제를 연구하는 문화적 전환이 시작되었다.[134] 21세기에는 기존의 "반파시스트" 전후 합의가 무솔리니의 역할에 대해 국내외에서 더 호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평가를 제시한 수정주의 학자들에 의해 공격받고 있다.[135] 수정주의, 반파시스트, 의도주의 또는 문화주의적 역사 모델을 기반으로 하는 경쟁적인 해석을 사용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은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즘에 영향을 주었다.[102] 무솔리니의 웅변술, 시각적 연출, 준군사조직 활용 등은 히틀러에게 영감을 주었다.
7. 1. 이탈리아 현대 정치에 미친 영향
파시즘은 이탈리아 현대 정치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129] 전후 이탈리아는 파시즘 청산을 위해 노력했지만, 극우 세력은 여전히 존재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135] 이탈리아의 민주주의는 파시즘의 경험을 바탕으로 반파시즘적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1920년대 좌파 작가들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주장에 따라 파시즘이 자본주의의 한 형태라고 강조했다.[130] 파시스트 정권은 역사 저술과 교육을 통제하고, 문서 보관소에 대한 접근을 통제했으며, 정권에 우호적인 학자들을 지원했다.[130]
전쟁 이후, 대부분의 역사 기록은 베니토 무솔리니에 대해 강하게 적대적이었으며, 파시즘과 전체주의라는 주제를 강조했다.[132] 렌초 데 펠리체는 무솔리니가 국내 문제에서는 혁신적인 현대화가였지만, 외교 정책에서는 실용주의자였다고 주장했다.[133] 1990년대에는 파시즘의 대중적 수용 문제를 연구하는 문화적 전환이 시작되었다.[134] 21세기에는 기존의 "반파시스트" 전후 합의가 수정주의 학자들에 의해 공격받고 있다.[135]
7. 2. 전 세계 극우 세력에 미친 영향
이탈리아 파시즘은 전 세계 극우 세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여러 나라의 극우 정당과 단체들은 파시즘의 사상과 전략을 따라 하고, 무솔리니를 우상으로 삼았다.[102] 무솔리니의 열정적인 연설과 그를 둘러싼 인물 숭배는 로마에서 그의 검은 셔츠단의 대규모 집회와 행진에서 과시되었으며, 이는 아돌프 히틀러와 독일 나치당에 영감을 주었다.특히, 무솔리니의 초기 파시스트 운동의 상징과 방식은 히틀러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무솔리니가 사용한 로마식 경례, 팔을 쭉 뻗는 경례, 극적인 웅변, 정치적 폭력을 위한 제복을 입은 준군사 조직의 사용, 대중 집회를 통한 운동의 힘 과시 등은 훗날 나치당에 의해 그대로 도입되었다.
7. 3. 한국에 미친 영향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일제 강점기 조선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의 조선총독부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체제를 연구하고, 이를 조선 식민 통치에 적용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조선인들의 강한 반발과 저항으로 인해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해방 이후, 백의사나 남의사와 같은 일부 극우 단체들은 파시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반공주의, 국가주의, 권위주의 등을 내세웠다.[117][118][119]
7. 3. 1. 일제강점기 식민 통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이탈리아 파시즘을 모델로 삼아 식민 통치를 강화하려 했다. 조선총독부 관료들은 파시즘 체제를 연구하고 조선에 적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이러한 내용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내용이 없다. 따라서 주어진 `section-title`에 직접적으로 부합하는 내용을 원본 소스에서 찾을 수 없으므로, 이 섹션에는 내용을 작성할 수 없다.7. 3. 2. 해방 이후 극우 세력
해방 이후에도 일부 극우 단체들은 파시즘을 추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반공주의, 국가주의, 권위주의 등을 내세우며 파시즘의 부활을 꿈꿨다.[117][118][119] 특히, 정의와 자유(Justice and Freedom)는 1929년부터 1945년까지 활동한 이탈리아 반파시즘 저항 운동이었다.[120] 이 운동은 카를로 로셀리,[120] 페루초 파리, 그리고 나중에 이탈리아 총리가 된 산드로 페르티니에 의해 공동 설립되었으며 이들이 이 운동의 지도자였다.[121]8. 논쟁과 재평가
역사 기록에서 대부분의 논쟁은 파시즘과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에 대한 상반된 해석에 집중되어 있다.[129] 1920년대 좌파 작가들은 안토니오 그람시와 같은 공산주의 이론가들의 주장에 따라 파시즘이 자본주의의 한 형태라고 강조했다. 파시스트 정권은 '역사 연구를 위한 중앙 위원회(Giunta Centrale per gli Studi Storici)'를 통해 역사 저술과 교육을 통제하고, 문서 보관소에 대한 접근을 통제했으며, 조반니 젠틸레, 조아키노 볼페, 프란체스코 살라타와 같이 정권에 우호적인 역사학자와 학자들을 지원했다.[130] 1932년 10월, 이 정권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모더니스트 예술을 특징으로 하며 로마의 영광을 표현한다고 주장하는 대규모 파시스트 혁명 전시회를 후원했다.[131]
전후 대부분의 역사 기록은 무솔리니에 대해 강하게 적대적이었으며, 파시즘과 전체주의라는 주제를 강조했다.[132] 예외적으로 역사학자 렌초 데 펠리체(1929–1996)는 무솔리니의 전기 4권, 6,000페이지(1965–1997)를 저술했으며, 이 책은 이탈리아 파시즘에 대한 공적 및 사적 문서를 가장 철저하게 조사하여 모든 학자들에게 기본적인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데 펠리체는 무솔리니가 국내 문제에 있어서는 혁신적인 현대화가였지만, 외교 정책에서는 자유주의 이탈리아(1861–1922)의 현실 정치 정책을 계승한 실용주의자라고 주장했다.[133] 1990년대에는 "정치의 미학화"와 "정치의 성화" 관점을 사용하여 파시즘의 대중적 수용 문제를 연구하는 문화적 전환이 시작되었다.[134] 21세기에는 기존의 "반파시스트" 전후 합의가 무솔리니의 역할에 대해 국내외에서 더 호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평가를 제시한 수정주의 학자들에 의해 공격받고 있다. 수정주의, 반파시스트, 의도주의 또는 문화주의적 역사 모델을 기반으로 하는 경쟁적인 해석을 사용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135]
8. 1. 파시즘에 대한 다양한 해석
파시즘은 그 성격과 의미에 대한 해석이 학자들마다 다른 복잡하고 다양한 현상이다. 일부 학자들은 파시즘을 전체주의적이고 혁명적인 운동으로 보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운동으로 본다.[129] 1920년대 좌파 작가들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주장에 따라 파시즘이 자본주의의 한 형태라고 강조했다.[130]전쟁 이후, 대부분의 역사 기록은 파시즘과 전체주의라는 주제를 강조하며 무솔리니에게 강하게 적대적이었다.[132] 예외적으로, 역사학자 렌초 데 펠리체는 무솔리니의 전기, 4권 6,000페이지(1965–1997)를 저술했는데, 이 책은 이탈리아 파시즘에 대한 공적 및 사적 문서를 가장 철저하게 조사한 것으로 모든 학자들에게 기본적인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데 펠리체는 무솔리니가 국내 문제에 있어서는 혁신적인 현대화가였지만, 외교 정책에서는 자유주의 이탈리아(1861–1922)의 현실 정치 정책을 계승한 실용주의자라고 주장했다.[133]
1990년대에는 "정치의 미학화"와 "정치의 성화"라는 관점을 사용하여 파시즘의 대중적 수용 문제를 연구하는 문화적 전환이 시작되었다.[134] 21세기에는 기존의 "반파시스트" 전후 합의가 무솔리니의 역할에 대해 국내 및 해외에서 더 호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평가를 제시한 수정주의 학자들에 의해 공격받고 있다. 수정주의, 반파시스트, 의도주의 또는 문화주의적 역사 모델을 기반으로 하는 경쟁적인 해석을 사용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135]
8. 2. 무솔리니에 대한 평가
베니토 무솔리니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강력한 지도력과 업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과 독재, 폭력, 전쟁 범죄를 저지른 인물로 비판하는 시각이 공존한다.[129]1920년대 좌파 작가들은 공산주의 이론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주장에 따라 파시즘을 자본주의의 한 형태라고 강조했다. 파시스트 정권은 역사 연구 중앙 위원회(Giunta Centrale per gli Studi Storici)를 통해 역사 저술과 교육을 통제하고 문서 보관소 접근을 제한했으며, 조반니 젠틸레, 조아키노 볼페, 프란체스코 살라타 등 정권에 우호적인 학자들을 지원했다.[130] 1932년 10월에는 대규모 파시스트 혁명 전시회를 후원하여 모더니스트 예술을 선보이고 로마의 영광을 표현하려 했다.[131]
전후 대부분의 역사 기록은 무솔리니에게 강하게 적대적이었으며, 파시즘과 전체주의를 강조했다.[132] 예외적으로 역사학자 렌초 데 펠리체는 무솔리니의 전기 4권(1965–1997)을 저술, 이탈리아 파시즘에 대한 공적 및 사적 문서를 철저히 조사하여 모든 학자들에게 기본적인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데 펠리체는 무솔리니가 국내 문제에서는 혁신적인 현대화가였지만, 외교 정책에서는 자유주의 이탈리아(1861–1922)의 현실 정치 정책을 계승한 실용주의자였다고 주장한다.[133]
1990년대에는 "정치의 미학화"와 "정치의 성화" 관점을 사용하여 파시즘의 대중적 수용 문제를 연구하는 문화적 전환이 일어났다.[134] 21세기에는 기존의 "반파시스트" 전후 합의가 무솔리니의 역할에 대해 더 호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평가를 제시한 수정주의 학자들에 의해 도전을 받고 있다. 수정주의, 반파시스트, 의도주의, 문화주의적 역사 모델을 기반으로 하는 경쟁적인 해석을 사용하는 학자들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135]
8. 3. 파시즘의 현대적 의미
파시즘은 단순한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이다. 극우 포퓰리즘, 인종차별, 권위주의 등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은 파시즘의 유산과 연결되어 있다. 파시즘에 대한 연구와 비판은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중요한 과제이다.[129] 1920년대 좌파 작가들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주장에 따라 파시즘이 자본주의의 한 형태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전쟁 이후, 대부분의 역사 기록은 무솔리니에 대해 강하게 적대적이었으며, 파시즘과 전체주의라는 주제를 강조했다.[132]렌초 데 펠리체는 예외적으로 무솔리니의 전기, 4권 6,000페이지(1965–1997)를 저술했으며, 이 책은 이탈리아 파시즘에 대한 공적 및 사적 문서를 가장 철저하게 조사하고 있으며, 모든 학자들에게 기본적인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데 펠리체는 무솔리니가 국내 문제에 있어서는 혁신적인 현대화가였지만, 자유주의 이탈리아(1861–1922)의 현실 정치 정책을 계승한 외교 정책의 실용주의자라고 주장했다.[133] 1990년대에는 "정치의 미학화"와 "정치의 성화"의 관점을 사용하여 파시즘의 대중적 수용 문제를 연구하는 문화적 전환이 시작되었다.[134]
21세기에는 기존의 "반파시스트" 전후 합의가 무솔리니의 역할에 대해 국내 및 해외에서 더 호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평가를 제시한 수정주의 학자들에 의해 공격받고 있다. 수정주의, 반파시스트, 의도주의 또는 문화주의적 역사 모델을 기반으로 하는 경쟁적인 해석을 사용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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