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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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푸제는 청나라 황족으로, 형 푸이의 동생이다. 신해혁명 이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국에서 군인으로 활동했다. 이후 일본 황족 사가 히로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으며, 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군에 체포되어 중국에서 재교육을 받았다. 석방 후에는 중국에서 중일 관계 개선에 기여했으며, 1994년 사망했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의 친동생으로, 순친왕 재풍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형 푸이와 함께 자금성에서 지냈으며,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가쿠슈인과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공부했다.
순친왕 재풍과 그의 적복진 여우란 사이의 차남이며, 선통제 푸이의 친동생이다.
2. 생애
1937년 관동군의 주선으로 일본 귀족 여성 사가 히로와 정략 결혼을 했으며, 이후 만주국으로 건너가 형 푸이를 보좌하고 만주국군 장교로 복무했다. 푸이에게 자녀가 없어 만주국 제위 계승법에 따라 잠정적인 황위 계승자로 지명되기도 했다.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만주국이 붕괴하자 형 푸이와 함께 소련군에 체포되어 소련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1950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어 푸순 전범 관리소에서 사상개조 교육을 받았다.
1960년 특별 사면으로 석방된 후 베이징에 정착하여 아내 사가 히로와 재회했다. 이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 민족위원회 부주임 등을 역임하며 정치적으로 복권되었고, 중일 우호 증진 활동에도 참여했다. 1987년 영화 ''마지막 황제'' 제작에 고문으로 참여했으며, 1994년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2. 1. 생애 초반
순친왕 재풍과 그의 정실 부인 유란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푸이의 친동생이다. 어머니 유란은 만주 정백기 출신 대신 영록의 딸이었다. 용모는 형 푸이와 비슷했으나, 과묵하고 온화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처음 이름은 예격(譽格)이었으나 후에 푸제(溥傑)로 개명했다. 형 푸이가 황제로 즉위하여 자금성에 들어가자, 푸제는 순친왕부의 계승자가 되어 순친왕세자(順親王世子) 칭호를 받았다.
어린 시절에는 자금성으로 불려가 형 푸이의 학우 겸 놀이 친구가 되었다. 푸제가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노란색 안감의 옷을 입자 푸이가 크게 화를 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911년 신해혁명 발발 이후 1912년 형 푸이가 퇴위하면서 청나라는 멸망했다.
1924년 3살 연상의 몽골계 만주 귀족 여성인 타타라 탕스샤(他他拉 唐石霞, 1904~1993)와 결혼했다. 탕스샤는 광서제의 측실이었던 단강태비의 조카이기도 했다. 그러나 탕스샤는 장쉐량과 내연 관계를 맺는 등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 탕스샤는 푸제와 푸이 형제의 무능함과 나태함을 비판하기도 했으며, 가치관 차이 등으로 인해 결국 친정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푸제가 일본 유학을 떠나면서 관계는 더욱 멀어졌고, 혼인 관계는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1928년 국민혁명군의 북벌군이 베이징에 입성하자, 푸제는 장쉐량에게 잠시 몸을 의탁했다. 이후 펑텐(현 선양시)에 은신하다가 일본군의 도움으로 다롄을 거쳐 톈진으로 이주했으며, 얼마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가 가쿠슈인에서 공부했으며, 일본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35년 7월 졸업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관동군의 주선으로 일본 귀족 여성과의 정략 결혼에 동의했다. 관동군이 추천한 여러 후보 중 일본 황실과 친척 관계(사가 히로의 아버지가 쇼와 천황과 모계로 8촌 관계)인 사가 히로를 직접 선택했다.[4][5] 당시 푸이에게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 결혼은 만주국 황실에 일본 혈통을 들여 양국 관계를 강화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1937년 2월 6일 도쿄의 만주국 대사관에서 약혼을 발표했고[6], 같은 해 4월 3일 도쿄 군인 회관(현 구단 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7] 결혼 중매는 혼조 시게루 육군 대장이 맡았으며, 야스쿠니 신사의 궁사가 사제를 맡았다. 결혼 당시 푸제는 일본 육군 보병 학교에 재학 중이었으며, 신혼집은 지바시 이나게구에 마련했다.[8] 히로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푸제는 소박한 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같은 해 9월 푸제가 먼저 만주국으로 갔고, 10월에는 히로가 뒤따라 만주국의 수도였던 신징(현 창춘)으로 이주했다.
2. 2. 일본 유학 및 만주국 시절
1924년 10월 펑위샹 등이 일으킨 베이징 정변으로 푸이가 자금성에서 쫓겨나 베이징의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하면서, 푸제 역시 일본 정부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4][5] 이후 1929년 3월, 완룽 황후의 남동생 궈부뤄 룬치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가쿠슈인 고등과에서 유학했으며, 이때 김병번(金秉藩)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1933년 3월 가쿠슈인 고등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9월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에 입학하여 1935년 7월 졸업 후 견습사관으로 임관했다.
일본 유학 전인 1924년 단강태비의 조카 탕스샤와 결혼했으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고, 푸제의 일본 유학으로 혼인 관계는 사실상 끝났다. 만주국 황제가 된 형 푸이는 푸제를 일본 황족과 결혼시키려 했으나, 일본 황실 전범 규정상 외국인인 푸제와의 혼인은 불가능했다.[4][5] 이에 관동군의 주도로 쇼와 천황의 먼 친척이자 후작 사가 사네카츠의 장녀인 사가 히로와의 혼담이 추진되었다. 1937년 2월 6일 약혼이 발표되었고[6], 같은 해 4월 3일 도쿄 군인 회관(현 구단 회관)에서 혼조 시게루 육군 대장의 중매와 야스쿠니 신사 궁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7] 사가 히로는 남편을 따라 아이신기오로 히로(愛新覺羅浩)로 개명했다.
당시 푸제는 일본 육군 보병 학교에 재학 중이었으며, 신혼 생활은 지바시 이나게구에서 시작했다.[8] 사가 히로는 훗날 푸제가 소박한 생활을 즐겼다고 회상했다. 명백한 정략 결혼이었으나 부부 관계는 원만했으며, 슬하에 장녀 혜생(1938년생)과 차녀 호생(1940년생)을 두었다.
1935년 9월, 푸제는 만주국으로 건너가 만주국군에 입대하고 만주국 궁내부시종무관(滿洲國宮內府侍從武官) 직책을 맡았다. 자녀가 없던 푸이를 대신하여 1937년 일본 관동군의 훈령과 일본 천황의 승인에 따라 푸제의 잠정적 황위 계승자로 결정되었다. 같은 해 3월 제정된 만주국 제위 계승법에도 관련 내용이 포함되었다. 관동군과 만주국 정부는 푸제와 사가 히로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기를 기대했으나, 푸이는 자서전에서 관동군이 아들이 태어나면 자신을 퇴위시키고 그 아들을 황제로 옹립할 것을 우려했다고 술회했다.
푸제는 만주국에서 만주국 황실 근위대 명예 대장을 역임했으며, 군사 경력도 이어갔다. 1938년 10월 만주국 주일 대사관 부속 무관실 근무를 위해 도쿄로 부임했다가 1939년 11월 펑톈의 만주보병학교 교관, 1941년에는 신경군관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신경군관학교 재직 당시 제자 중에는 훗날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박정희도 있었다.[9][10] 1943년 일본 육군대학교에 입교하여 가족과 함께 다시 도쿄로 이주했다. 1944년 12월, 가쿠슈인 초등과에 재학 중이던 장녀 혜생을 일본에 남겨두고 만주국으로 귀국했으며, 이후 혜생과 다시 만나지 못했다.
1945년 8월 소련의 만주 침공으로 만주국이 붕괴하자 푸제는 푸이와 함께 일본으로 탈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중화민국 군대에 항복하려던 시도도 무산되었다. 결국 푸제는 소련 붉은 군대에 체포되어 치타와 하바롭스크의 수용소에 약 5년간 수감되었다. 1950년 중소 관계 개선에 따라 새로 건국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었다.
2. 3. 일본 패전과 투옥
1945년 8월, 소련이 일소 중립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만주국을 침공하면서 일본의 패망이 임박했다. 주력 관동군이 소련 소련군의 공세에 밀리자, 푸제는 형 푸이를 비롯한 만주국 지도부와 함께 수도 신경을 버리고 조선과 가까운 통화성 린장 현의 다리쯔로 피난했다. 8월 15일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항복하고, 8월 18일 푸이가 황제에서 퇴위하면서 만주국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푸이와 푸제는 소련군의 추격을 피해 퉁화에서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탈출하려 했으나, 경유지인 펑톈 비행장에서 소련 공수부대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푸제는 소련 영토로 이송되어 극동부의 치타와 하바롭스크에 있는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약 5년간 소련에 억류되었다.
1950년 8월, 푸제는 새로 건국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는 전범으로 분류되어 랴오닝성 푸순의 푸순 전범 관리소와 하얼빈의 수용소 등지에서 중국공산당에 의한 사상개조 교육을 받았다.
푸제와의 연락이 두절되자, 1954년 그의 장녀 혜생(慧生)은 국무원 총리였던 저우언라이에게 중국어로 직접 쓴 편지를 보내 아버지와의 만남을 간청했다. 이에 감동한 저우언라이의 배려로 푸제는 일본에 있는 가족들과 서신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푸제는 수용소에서 모범적인 생활 태도를 보인 것으로 평가받아 1960년 11월 모범수로 지정되어 특별 사면되었다. 그는 11월 19일 석방 명령을 받았고, 11월 28일 정식으로 풀려났다.
2. 4. 석방 이후
랴오닝성 푸순시에 있는 푸순 전범 관리소에서 모범적인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60년 중국 정부로부터 사면받고 석방되어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1961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고, 당시 총리였던 저우언라이의 허가를 받아 아내 사가 히로 및 딸과 재회하여 베이징에 정착했다. 그의 딸은 나중에 일본으로 돌아가 일본 시민이 되었다.
이후 문화대혁명의 격동기를 겪었으나 살아남았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이 그의 집에 침입하여 집기를 파괴했으며, 사가 히로가 일본에서 가져온 카메라 등이 도난당하는 등으로 충격을 받았다.
1972년 중국과 일본 간의 중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자, 푸계는 중일 우호 관계 증진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중일 국교 정상화 대표단의 일원으로 7차례에 걸쳐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양국 간 교류 협력에 기여하였다.[11]
정치적으로 복권되어 여러 직책을 맡았다. 1978년 상하이시를 대표하는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 선출되었고,[2] 1980년에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과 전국인대 민족위원회 부주임위원에 임명되었다. 1983년 제6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도 민족위원회 부주임을 역임했으며,[2] 1985년부터는 중일 우호 단체 부단장을 맡았다.[2] 1986년에는 장애인 복지 기금의 명예 이사직을 맡았고,[2] 1988년 제7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는 주석단의 일원이 되었다.[2]
1987년에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마지막 황제'' 제작에 기술 고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2] 같은 해 6월 20일, 오랫동안 함께했던 아내 사가 히로가 베이징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1989년 1월 히로히토 천황이 사망하자 베이징의 일본 대사관에 마련된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1991년 10월 28일에는 일본 리츠메이칸 대학으로부터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3] 1992년 10월 25일에는 주중 일본 대사관이 주최한 행사에 참석하여 당시 중국을 방문 중이던 아키히토 천황과 면담하였다.
1993년부터 병으로 요양 생활을 하다가 1994년 2월 28일 오전 7시 55분경 베이징에서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었으며, 유해는 생전 희망에 따라 절반은 일본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의 나카야마 신사 경내에 있는 아이신카쿠라샤에 아내 사가 히로와 딸 후성의 유골과 함께 안치되었다. 나머지 절반의 유골은 중국 먀오펑산 상공에서 산골되었다.
3. 가족 관계
=== 첫 번째 부인: 탕스샤 ===
1924년 17세의 나이에 만주 타타라 씨족 출신의 탕이잉(唐怡瑩|탕이잉zho, 1904–1993)과 결혼했다. 그녀는 탕스샤(唐石霞|탕스샤zho)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광서제의 후궁 진비와 문정황귀비의 조카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 탕스샤는 푸제와 그의 형 푸이의 무능함과 게으름에 불만을 표출했으며, 가치관의 차이로 인해 갈등을 겪었다. 1926년 탕스샤는 장쉐량과 내연 관계가 되었고, 푸제가 일본 유학을 떠난 후에는 군벌 루융샹의 아들 루샤오자(盧筱嘉|루샤오자zho)와도 불륜 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베이징의 순친왕부를 약탈하기도 했으며, 결국 두 사람은 이혼했다.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1949년 탕스샤는 홍콩으로 이주하여 홍콩 대학교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 두 번째 부인: 사가 히로 ===
1935년 푸제가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자, 형 푸이는 만주족 아내를 찾아주려 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이후 관동군의 주도로 일본 화족과의 정략 결혼이 추진되었다. 당시 일본의 황실 전범 규정상 푸제와 일본 황족 여성의 직접적인 혼인은 불가능했기에[4][5], 쇼와 천황의 먼 친척이자 후작 사가 사네카츠의 장녀인 사가 히로(사가 씨 嵯峨氏|사가 씨zho; 1914년 3월 16일 – 1987년 6월 20일, 이름은 히로 浩|히로zho)와의 혼담이 진행되었다.
푸제는 맞선 사진 중에서 히로를 직접 선택했으며, 1937년 2월 6일 약혼 발표 후 같은 해 4월 3일 도쿄 군인 회관(현 구단 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중매인은 혼조 시게루 육군 대장이었고, 야스쿠니 신사의 궁사가 사제를 맡았다.[6] 당일에는 결혼을 알리는 신문 호외도 배포되었다.[7]
결혼 초기 푸제는 일본 육군 보병 학교에 재학 중이었기 때문에, 부부는 지바시 이나게에 신혼집(아이신 교로 푸제의 가거)을 마련했다.[8] 히로의 회상에 따르면, 당시 푸제는 소박한 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1937년 가을, 부부는 만주국의 수도 신징으로 이주했다. 명백한 정략 결혼이었지만, 부부 사이는 원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 자녀 ===
푸제는 사가 히로와의 사이에서 두 딸을 두었다.
1937년 만주국에서 제위 계승법이 제정되면서, 아들이 없던 푸이의 뒤를 이어 푸제와 그의 아들이 제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열렸다. 이 때문에 관동군과 만주국 정부는 푸제 부부에게서 아들이 태어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푸이는 이를 자신을 퇴위시키려는 음모로 의심하며 두려워했다고 그의 자서전 '나의 반생'에서 술회했다.
4. 학력
-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 (1927년)
- 만주국 헤이룽장 하얼빈 국방과학학교 졸업 (1935년)
- 중화민국 국방행정학교 졸업 (1943년)
- 일본 육군 대학 입교 (1943년)
5. 기타
일본 육군사관학교 재학 시절에는 자그마한 체구였지만, 성실하고 강한 정신력으로 힘든 훈련을 이겨냈다고 전해진다. 동기들 사이에서는 강한 정신력과 함께 상냥하고 쾌활하며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았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여 아내 사가 히로와 딸들은 물론 형제들과의 우애도 깊었다고 평가된다. 다른 사람에게 항상 겸손했으며 특별 대우를 받는 것을 꺼렸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관용차를 이용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시민들과 함께 노선 버스로 통근했다고 한다.[12] 일본 유학 경험으로 일본어에 능통했다.
1972년 중일 국교 정상화 이후에는 7차례 일본을 방문하며[11] 양국 우호 관계의 다리 역할을 했다. 1989년 1월 쇼와 천황이 사망했을 때는 베이징 주재 주 중화인민공화국 일본 대사관을 찾아 조문했다. 1992년 10월 25일에는 주중 일본 대사가 주최한 환영회에서 중국을 방문한 아키히토 천황과 만나기도 했다. 1991년 10월 28일 리츠메이칸 대학에서 명예 학위인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3] . 1987년 6월 20일 부인 사가 히로가 베이징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푸제는 특별히 양자를 지명하지 않았으며, 그의 지위는 이복동생 진우즈가 이었다. 생전에 딸 아이신 교로 케이세이와 아내 사가 히로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화장된 유골의 일부는 일본으로 보내졌고 나머지는 베이징 묘봉산(妙峰山) 상공에 뿌려졌다.
2013년 9월, 푸제의 둘째 딸 후쿠나가 코세이는 간사이 가쿠인 대학 박물관 개설 준비실에 푸제 가문 관련 자료들을 기증했다. 이 자료에는 푸제 본인과 아내 사가 히로, 딸 아이신 교로 케이세이, 코세이와 관련된 귀중한 사진, 원고, 서예 작품, 편지, 서적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푸제와 사가 히로 부인의 친가인 사가 후작 가문(옛 오기마치 산조 가) 관련 자료도 함께 기증되었다.[13] 이 자료들은 현재 간사이 가쿠인 대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일부는 박물관 공식 웹사이트의 "아이신 교로 푸제 가 자료 컬렉션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14]
푸제의 삶은 여러 대중문화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참조
[1]
뉴스
Pu Jie, 87, Dies, Ending Dynasty Of the Manchus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1994-03-02
[2]
서적
The Cambridge Handbook of Contemporary China
Cambridge University Press
[3]
간행물
データで見る立命館 2-3 名誉博士(2014年5月1日現在)
http://www.ritsumei.[...]
立命館大学
[4]
문서
皇室典範第39條「皇族ノ婚嫁ハ同族又ハ勅旨ニ由リ特ニ認許セラレタル華族ニ限ル」
[5]
문서
皇室典範増補(大正7年11月28日)「皇族女子ハ王族又ハ公族ニ嫁スルコトヲ得」
[6]
뉴스
溥儀皇帝の弟・溥傑が日本人女性と婚約『中外商業新聞』(昭和12年2月7日夕刊).『昭和ニュース事典第6巻 昭和12年-昭和13年』本編p688
毎日コミュニケーションズ刊
1994年
[7]
뉴스
皇弟・溥儀と嵯峨浩子の結婚式『中外商業新聞』(昭和12年4月4日号外).『昭和ニュース事典第6巻 昭和12年-昭和13年』本編p689
[8]
웹사이트
「千葉市ゆかりの家・いなげ」
http://www.city.chib[...]
[9]
뉴스
伪满军校里的“特殊”师生:溥杰与朴正熙
http://www.360doc.co[...]
2012-01-11
[10]
뉴스
"목표 위해 죽음 불사할만큼 성실"우등 성적으로 4년만에 '황군' 소위
http://www.ohmynews.[...]
2004-08-19
[11]
문서
1974年・1980年・1981年・1982年・1987年・1990年・1992年の計7回。1993年にも訪日する予定だったが、直前に病に倒れ、翌年死去する。
[12]
간행물
【あの人 あの頃 あの話】⑤ 「溥傑さんとバス」
http://www.peoplechi[...]
人民中国
[13]
웹사이트
博物館開設準備室が愛新覚羅溥傑家関係資料を受贈
http://www.kwansei.a[...]
KG News(関西学院大学)
2013-09-24
[14]
웹사이트
愛新覚羅溥傑家資料コレクション一覧
https://www.kwansei.[...]
関西学院大学博物館
2023-09-30
[15]
문서
아들이 없어서 청 황실은 5촌 조카인 [[아이신기오로 유얀]]에게, 만주국 상속권은 이복 남동생 [[진유즈|푸런(진유즈)]]에게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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