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인의 왕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프랑크인의 왕은 프랑크족을 다스린 군주들을 의미하며, 초기 프랑크족 군주, 메로빙거 왕조, 카롤링거 왕조 시기를 거쳐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는 과정을 거쳤다. 초기 프랑크족 군주들은 507년 클로비스 1세가 왕으로 추대된 이후 쾰른, 캉브레, 살리 프랑크족 등 다양한 부족의 군주들이 존재했다. 메로빙거 왕조는 클로디오, 메로베크, 킬데리크 1세, 클로비스 1세로 이어졌으며, 클로비스 1세는 프랑크 왕국을 통일했다. 이후 프랑크 왕국은 클로비스 1세의 사후 분열과 재통합을 반복하며 네우스트리아, 부르군디, 아우스트라시아로 분할되었다. 679년 테우데리크 3세가 전 프랑크인의 왕으로 인정받은 이후, 프랑크 왕국은 카롤링거 왕조 시대를 맞이하여 피핀 3세가 왕위에 올랐다. 카롤링거 왕조는 샤를마뉴 대제 시기에 전성기를 누렸으나, 이후 베르됭 조약으로 동, 서, 중 프랑크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서프랑크 왕국은 프랑스 왕국으로, 동프랑크 왕국은 독일로 발전했으며, 중프랑크 왕국은 여러 국가로 분열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벨기에의 역사 -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는 1482년부터 1795년까지 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부르고뉴 공작령 상속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았으나 스페인의 가톨릭 박해와 전제정치로 80년 전쟁을 겪으며 북부 7개 주는 독립하고 남부 지역은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 벨기에의 역사 - 워싱턴 회담
워싱턴 회담은 제1차 세계 대전 후 미국 주도로 1921년부터 1922년까지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9개국 국제 회의로, 해군 군비 제한, 태평양 지역 질서 재편, 중국 문제 등을 논의하여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등 일련의 조약을 체결하고 만주사변 이전까지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규정하는 워싱턴 체제를 성립시켰다. - 프랑크인의 왕 - 위그 카페
위그 카페는 987년부터 996년까지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재위하며 카페 왕조의 시조가 되었고, 왕위 계승을 위해 아들 로베르 2세를 공동 왕으로 임명하여 카페 왕조 세습의 기반을 다졌다. - 프랑크인의 왕 - 루도비쿠스 2세 이우니오르
루도비쿠스 2세 이우니오르는 로타르 1세의 아들로 이탈리아를 수호하려 노력했으나 동생과의 갈등, 포로로 잡히는 등의 어려움을 겪고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서프랑크의 카를 2세가 황제관을 차지했다. - 유럽의 역사 - 빈 회의
빈 회의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의 정치 지형을 재편성하기 위해 1814년부터 1815년까지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국제 회의이며, 정통주의와 세력 균형을 통해 유럽의 평화를 유지하고자 했고,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 여러 국가의 영토를 조정하고 노예 무역 금지 등을 합의하여 빈 체제를 구축했다. - 유럽의 역사 - 베스트팔렌 조약
베스트팔렌 조약은 1648년 30년 전쟁과 80년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체결된 일련의 조약으로, 프랑스는 알자스 지역을 확보하고 스웨덴은 발트해 지역의 영향력을 강화했으며, 각 제후의 종교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고 신성 로마 제국 내 영방의 주권을 인정하여 유럽의 정치 지형을 변화시켰다.
프랑크인의 왕 | |
---|---|
프랑크인의 왕 | |
개요 | |
초대 | 클로비스 1세 |
성립 | 481년 |
마지막 | 루이 5세 |
폐지 | 987년 |
임기 | 종신직 |
정보 | |
칭호 | 프랑크인의 왕 (rex Francorum) |
문장 | 카롤루스 십자가 |
2. 초기 프랑크족 군주
초기 프랑크족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각 부족은 독자적인 군주를 가지고 있었다. 역사 기록이 부족하여 초기 군주들의 목록은 완전하지 않다.
살리 프랑크족의 주요 군주는 다음과 같다.
- 클로디오 (426년경–447년경)
- 메로베우스 1세 (450년경–458년경): 메로빙거 왕조의 기원이 되는 인물이다.[6]
- 힐데리히 1세 (458년경–481년경): 메로베우스 1세의 아들
- 클로비스 1세 (481년경–511년): 힐데리히 1세의 아들로, 훗날 갈리아 전체를 통합하였다.
쾰른을 중심으로 한 리푸아리아 프랑크족의 주요 군주는 다음과 같다.
- 쾰른의 힐데베르트: 리푸아리안의 클로도베크의 손자
- 클로데리히
- 문데리히
캉브레 지역 프랑크족의 군주는 다음과 같다.
- 클로디오 (426–447), 잘리어족의 왕
- 라그나카르: 클로디오의 후손이나 자세한 관계는 알려지지 않음. 클로비스 1세에게 살해됨
- 게노바우드 (3세기?)
- 메로게이스와 아스카릭 (4세기)
- 마로머 (4세기), ''두스''
- 순노 (4세기), ''두스''
- 게노바우드 (4세기), ''두스''
- 말로바우데스 (4세기)
- 테오데메르 (5세기)
- 라그나차르 ( 509년 사망), 클로비스에게 살해됨
- 차라릭 ( 509년 사망), 클로비스에게 살해됨
507년에는 리푸아리아 프랑크족도 클로비스 1세를 왕으로 받아들였다.[6]
그 외에 알려진 초기 프랑크족 군주는 다음과 같다.
지배자 | 설명 |
---|---|
아스카릭 | |
메로게 | |
말로바우데스 | |
게노바우드 | |
순노 | |
마르코메르 | |
파라몽 | 마르코메르의 아들. 반 전설적인 왕. (420년 - 448년에 클로디오와 공동 통치)[6] |
클로디오 | (420년 - 448년에 파라몽과 공동 통치)[6] |
테우데메르 | 리코메르의 아들, 422년경 왕위에 오름. |
아에기디우스 | 시아그리우스의 아버지. |
절름발이 시기베르트 | 483년 - 507년 재위, 아들 클로데릭(아버지 살해자)에 의해 살해됨. |
클로데릭 | 절름발이 시기베르트의 아들. 507년 왕위에 올랐으나, 클로비스 1세에 의해 폐위됨. |
2. 1. 살리 프랑크족
클로디오 (426년경–447년경)를 시작으로, 메로베우스 1세 (450년경–458년경)가 뒤를 이었다. 메로베우스 1세는 메로빙거 왕조의 이름의 기원이 된 인물이다.[6] 힐데리히 1세 (458년경–481년경)는 메로베우스 1세의 아들이며, 그 뒤를 이은 클로비스 1세 (481년경–511년)는 힐데리히 1세의 아들로 훗날 갈리아 전체를 통합하였다.이름과 제위 년도 | 초상 | 탄생 | 결혼과 자녀 | 사망 | 혈통 |
---|---|---|---|---|---|
메로베우스 1세 | ![]() | 411년경 | 베리카 | 458년경 | 살리 프랑크인의 왕 |
킬데리쿠스 1세 | ![]() | 437년경 | 튀링겐의 바신느 | 481년경 | 메로베우스 1세의 아들 |
클로도베쿠스 1세 | ![]() | 466년경 | 1) 이름 미상의 첩 | 511년 11월 27일 | 킬데리쿠스 1세와 튀링겐의 바신느의 아들 |
이 외에도 게노바우드(3세기?), 메로게이스와 아스카릭(4세기), 마로머(4세기), 순노(4세기), 게노바우드(4세기), 말로바우데스(4세기), 테오데메르(5세기), 라그나차르(509년경 사망), 차라릭(509년경 사망) 등의 군주들이 있었다.
초기 지배자들에 대한 역사적 자료는 많이 남아있지 않아 불완전하며, 클로비스 1세와 관련된 인물들은 509년 이전에 왕위를 잃었다.
지배자 | 설명 |
---|---|
클로디오 | 테우도메르의 아들. 뒤스부르크 및 이후 투르네의 왕 (426년경 - 447년경). |
메로비우스 | 아마도 클로디오의 아들. 투르네의 왕 (447년경 - 458년경). |
킬데리크 1세 | 메로비우스의 아들. 투르네의 왕 (458년경 - 481년경). |
클로비스 1세 | 킬데리크 1세의 아들. 투르네의 왕 (481년경 - 511년), 후년에 프랑크족의 대부분과 갈로-로마를 통일. |
지배자 | 설명 |
---|---|
카라릭 | |
라그나카르 | 486년 이전부터 캉브레의 왕, 클로비스 1세에 의해 살해당했다. |
리카리우스 | 라그나카르의 형제. 캉브레에서 클로비스 1세에 의해 살해당했다. |
리그노메르 | 라그나카르의 형제. 르망에서 클로비스 1세에 의해 살해당했다. |
2. 2. 리푸아리아 프랑크족
507년 클로비스는 리푸아리아 프랑크족의 왕으로 인정받는다.[6]쾰른 족의 주요 군주는 다음과 같다:
- 쾰른의 힐데베르트: 리푸아리아 프랑크족 클로도베크의 손자
- 클로데리히
- 문데리히
캉브레 족의 주요 군주는 다음과 같다:
- 클로디오 (426–447), 잘리어족의 왕
- 라그나카르: 클로디오의 후손이나 자세한 관계는 알려지지 않음. 잘리어 족의 클로비스 1세에게 살해됨
- 게노바우드 (3세기?)
- 메로게이스와 아스카릭 (4세기)
- 마로머 (4세기), ''두스''
- 순노 (4세기), ''두스''
- 게노바우드 (4세기), ''두스''
- 말로바우데스 (4세기)
- 테오데메르 (5세기)
- 라그나차르: 509년 사망, 클로비스에게 살해됨
- 차라릭: 509년 사망, 클로비스에게 살해됨
- 힐데베르트 (5세기)
- 절름발이 시고베르트: 509년 사망, 클로비스의 사주로 살해됨
- 살부자 클로도릭: 509년 사망, 시고베르트의 아들, 클로비스에게 살해됨
초기 지배자 목록은 역사적 자료 부족으로 불완전하다.
지배자 | 설명 |
---|---|
아스카릭 | |
메로게이스 | |
말로바우데스 | |
게노바우드 | |
순노 | |
마르코메르 | |
파라몽 | 마르코메르의 아들. 반(半) 전설적인 왕. (420년 - 448년에 클로디오와 공동 통치)[6] |
클로디오 | (420년 - 448년에 파라몽과 공동 통치)[6] |
테오데메르 | 리코메르의 아들, 422년경 왕위에 오름. |
아에기디우스 | 시아그리우스의 아버지. |
절름발이 시고베르트 | 483년 - 507년 왕위에 오름, 아들 클로데릭(살부자)에 의해 살해당함. |
살부자 클로도릭 | 절름발이 시고베르트의 아들. 507년 왕위에 오름, 클로비스 1세에 의해 폐위됨. |
2. 3. 기타 초기 군주
- 클로디오 (426-447)
- 메로베우스 1세 (450-458 (?)) : ''메로빙거 왕조의 이름은 이 왕에서 유래했다.''
- 힐데리히 1세 (458-481) : ''메로베우스 1세의 아들''
- 클로비스 1세 (481-511) : ''힐데리히 1세의 아들이며, 후에 갈리아 전체를 통합했다.''
본문 메로빙거 왕조 참조.
이름과 재위 기간 | 초상 | 탄생 | 결혼과 자녀 | 사망 | 혈통 |
---|---|---|---|---|---|
메로베우스 1세 | 411년 (?) | 베리카 | 458년 (?) | 살리 프랑크인의 왕 | |
킬데리쿠스 1세 | 437년 (?) | 튀링겐의 바신느 | 481년 (?) | 메로베우스 1세의 아들 | |
클로비스 1세 | 466년 (?) | 1) 이름 미상의 첩 | 511년 11월 27일 | 킬데리쿠스 1세와 튀링겐의 바신느의 아들 |
- 게노바우드 (3세기?)
- 메로게이스와 아스카릭 (4세기)
- 마로머 (4세기), ''두스''
- 순노 (4세기), ''두스''
- 게노바우드 (4세기), ''두스''
- 말로바우데스 (4세기)
- 테오데메르 (5세기)
- 라그나차르 (509년 사망), 클로비스에게 살해됨
- 차라릭 (509년 사망), 클로비스에게 살해됨
역사적 자료가 부족하여 초기 지배자 목록은 불완전하다.
지배자 | 설명 |
---|---|
아스카릭 | |
메로게 | |
말로바우데스 | |
게노바우드 | |
순노 | |
마르코메르 | |
파라몽 | 마르코메르의 아들. 반 전설적인 왕. (420년 - 448년에 클로디오와 공동 통치)[6] |
클로디오 | (420년 - 448년에 파라몽과 공동 통치)[6] |
테우데메르 | 리코메르의 아들, 422년경 왕위에 오름. |
아에기디우스 | 시아그리우스의 아버지. |
절름발이 시기베르트 | 483년 - 507년 재위, 아들 클로데릭(아버지 살해자)에 의해 살해됨. |
클로데릭 | 절름발이 시기베르트의 아들. 507년 왕위에 올랐으나, 클로비스 1세에 의해 폐위됨. |
클로디오 (426–447), 메로베우스 1세(450–458 (?))를 거쳐 힐데리히 1세 (458–481)대에 이르러 메로빙거 왕조가 시작되었다. 메로빙거 왕조의 이름은 메로베우스 1세에서 유래했다.[2] 클로도베쿠스 1세 (클로비스 1세) (481–511)는 힐데리히 1세의 아들로 훗날 갈리아 전체를 통합하게 된다.
3. 메로빙거 왕조
이름과 제위 년도 초상 탄생 결혼과 자녀 사망 혈통 메로베우스 1세 411년 (?) 베리카 458년 (?) 살리 프랑크인의 왕 킬데리쿠스 1세 437년 (?) 튀링겐의 바신느 481년 (?) 메로베우스 1세의 아들 클로도베쿠스 1세 466년 (?) 1) 이름 미상의 첩 511년 11월 27일 킬데리쿠스 1세와 튀링겐의 바신느의 아들
클로비스 1세 사후, 프랑크 왕국은 네 명의 아들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이후, 왕국의 통합과 분열이 반복되었다.
클로타르 2세는 브룬힐다와 그녀의 증손자 시기베르트 2세를 물리치고 왕국을 재통일했다. 그 무렵 네우스트리아, 부르군디, 아우스트라시아는 지역 정체성을 발전시켰다. 지역 귀족들을 달래기 위해 아우스트라시아는 종종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디를 통치하는 왕의 아들이나 형제와 같은 별도의 왕이 통치했다.이름
재위초상화 출생 결혼
자녀사망 참고 클로타르 2세[2] -- 584년경
파리
킬페리크 1세와 프레데군트의 아들1. 할데트루데: 아들 1명
2. 베르트루데, 613년: 자녀 없음
3. 시힐데, 618년: 아들 1명629년 10월 18일
44/45세왕국을 재통일 다고베르트 1세
629년 10월 18일
–
639년 1월 19일603년경[3]
파리
클로타르 2세와 할데트루데의 아들1. 고르마트루데: 자녀 없음
2. 난틸드, 629년 이전: 아들 1명
3. 울페군디스: 자녀 없음
4. 베르킬디스: 자녀 없음639년 1월 19일
33/34세
에피네쉬르센클로타르 2세의 아들
623-634년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카리베르트 2세
629년 10월
–
632년 4월 8일607/617년
파리
클로타르 2세와 시힐데의 아들가스코뉴의 통치자 아망의 딸, 질라: 629년
킬페리크632년 4월 8일
15/25세
블라이, 지롱드클로타르 2세의 아들
아키텐 통치클로비스 2세
639년 1월 19일
–
657년 11월 27일633년
파리
다고베르트 1세와 난틸드의 아들발틸드, 640년대: 아들 3명 657년 11월 27일
23/24세다고베르트 1세의 아들 클로타르 3세
657년 11월 27일
–
673년 봄652년
파리
클로비스 2세와 발틸드의 아들미상의 애인: 아들 1명일 가능성 673년 봄
20/21세클로비스 2세의 장남 테우데리크 3세
673년 봄654년
파리
클로비스 2세와 발틸드의 아들1. 크로틸디스, 675년 이전: 아들 2명
2. 모뵈주의 아말베르가, 674년: 딸 1명
3. 여러 첩: 최소 3명의 자녀691년 4월 12일
36/37세클로비스 2세의 셋째 아들 클로비스 (3세)
675년 9월
–
676년 6월670년경
클로타르 3세와 미상의 애인의 아들미혼 676년경
5/6세클로타르 3세의 사생아
아우스트라시아의 왕, 또한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디 주장킬데리크 2세
673년 봄
–
675년 가을653년
파리
클로비스 2세와 발틸드의 아들빌리힐드, 662년: 아들 2명 675년 가을
21/22세클로비스 2세의 차남
662-675년 아우스트라시아의 왕테우데리크 3세
675년 가을
–
691년 4월 12일-- 654년
파리
클로비스 2세와 발틸드의 아들1. 크로틸디스, 675년 이전: 아들 2명
2. 모뵈주의 아말베르가, 674년: 딸 1명
3. 여러 첩: 최소 3명의 자녀691년 4월 12일
36/37세클로비스 2세의 셋째 아들
679년 이후 아우스트라시아의 왕
피핀 가문은 처음에는 메로빙거 왕조의 왕 아래에서 궁재직을 역임했다. 687년 피핀 2세는 테르트리의 전투에서 네우스트리아를 정복한 후 ('dux et princeps Francorum')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752년 피핀 3세가 프랑크 왕이 되면서 궁재는 사라졌고, 카롤링거 왕조가 메로빙거 왕조를 대체했다.
3. 1. 모든 프랑크인의 왕 (509년–511년)
클로비스 1세는 로마 제국의 영토 뿐만 아니라 서고트족의 남부 프랑스 영토를 병합하여 갈리아 전체를 통합하였으며, 작은 프랑크 소왕국들을 하나로 통합했다. 그는 파리를 수도로 삼고, 수아송, 랭스, 메츠, 오를레앙에 각각 주요 거점을 두었다.[2]
이름 재위 기간 | 초상화 | 출생 | 결혼 자녀 | 사망 | 비고 |
---|---|---|---|---|---|
클로비스 1세 509년–511년 11월 27일 | ![]() | 투르네 힐데리크 1세와 튀링겐의 바시나의 아들 | 1. 불명의 부인: 아들 1명 2. 클로틸드, 493년: 자녀 4명 | 511년 11월 27일 44/45세 파리 | 481년부터 살리 프랑크족의 왕; 509년까지 모든 프랑크족을 통일하여 통치 |
3. 2. 클로비스 1세 사후 분열 (511년–561년)
클로비스 1세는 로마 제국의 영토 뿐만 아니라 서고트족의 남부 프랑스 영토를 병합하여 갈리아 전체를 통합하였으며, 작은 프랑크 소왕국들을 하나로 통합했다. 그는 파리를 중심으로 수아송, 랭스, 메츠, 오를레앙에 각각 주요 거점을 두었다. 클로비스 1세 사후, 프랑크 왕국은 그의 네 아들에 의해 각 거점별로 분할되었다.[2]수아송 | 파리 | 오를레앙 | 랭스 |
---|---|---|---|
클로타르 1세, 511년–561년 | 힐데베르트 1세, 511년–558년 클로타르 1세, 558년–561년 | 클로도메르, 511년–524년 힐데베르트 1세, 524년–558년 클로타르 1세, 558년–561년 | 토이데리히 1세, 511년–534년 토이데베르트 1세, 534년–548년 토이데발트, 548년–555년 클로타르 1세, 555년–561년 |
클로타르 1세는 형제들의 사망 이후 모든 프랑크 왕국을 계승받았다. 그러나 클로타르 1세 사후, 프랑크 왕국은 다시 그의 네 아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3. 3. 클로타르 1세 사후 분열 (561년–613년)
클로타르 1세가 사망한 후, 프랑크 왕국은 그의 네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클로타르 1세의 서자 군도발트는 584년 아키텐을 차지하고 스스로 아키텐 왕이 되었다.
아키텐 |
---|
이후 수아송의 왕 클로타르 2세는 아우스트라시아의 브룬힐다와 그녀의 손자를 꺾고 왕국을 통합하였다.
3. 4.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고뉴의 왕 (613년–679년)
클로타르 2세는 613년 아우스트라시아의 브룬힐다와 그녀의 손자를 꺾고 왕국을 통합했다. 629년부터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고뉴의 왕은 다음과 같다.네우스트리아와 부르고뉴의 왕 |
---|
다고베르트 1세 (629년–639년) |
클로비스 2세 (639년–658년) |
클로타르 3세 (658년–673년) |
토이데리히 3세 (673년) |
힐데리히 2세 (673년–675년) |
토이데리히 3세 (675년–691년) |
679년, 토이데리히 3세는 다시 한번 모든 프랑크의 소왕국을 통일한다.
3. 5. 아우스트라시아의 왕 (623년–679년)
클로타르 2세는 아우스트라시아의 브룬힐다와 그녀의 손자를 꺾고 왕국을 통합하였다. 그러나 623년 왕국의 국경 강화를 위해 아들 다고베르트 1세를 아우스트라시아 왕위에 앉혔다.[9]아우스트라시아의 왕 |
---|
다고베르트 1세, 623년–634년 |
지게베르트 3세, 634년–656년 |
힐데베르트 3세 양자왕, 656년–661년 |
클로타르 3세, 661년–662년 |
힐데리히 2세, 662년–675년 |
클로비스 3세, 675년–676년 |
다고베르트 2세, 676년–679년 |
3. 6. 후기 프랑크 왕 (679년–751년)
679년 토이데리히 3세는 다시 한번 모든 프랑크의 소왕국을 통일하였다. 이때부터 잠시 내전 기간을 제외하고 프랑크는 1개의 통일 왕조로 간주된다.4. 카롤링거 왕조
(노스트리아, 561-584)
(파리, 567-584)
(오를레앙 & 부르군디, 561-592)
(파리, 561-567)
(오스트라시아, 561-575)
(오스트라시아, 575-596)
(부르군디, 592-596)
(노스트리아, 584-629)
(단독 통치, 613-629)
(부르군디, 596-613)
(오스트라시아, 596-612)
(오스트라시아 & 부르군디, 613)
(오스트라시아, 623-634)
(노스트리아, 629-639)
(단독 통치, 632-634)
(아키텐, 629-632)
(아키텐, 6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