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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렐로 라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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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오렐로 라과디아는 이탈리아계 이민자 출신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1882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그는 변호사, 통역관, 하원 의원, 뉴욕 시 의회 의장 등을 역임했으며, 1934년부터 1945년까지 뉴욕 시장으로 재직했다. 라과디아는 뉴딜 정책을 통해 도시 기반 시설을 개선하고, 부패를 척결하는 등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1946년 유엔 구호 재건 사업국 사무국장을 지냈으며, 1947년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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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렐로 라과디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라 과디아, 1940년
라 과디아 (1940년)
본명피오렐로 엔리코 라파엘로 라 과디아
출생일1882년 12월 11일
출생지미국 뉴욕주 뉴욕시
사망일1947년 9월 20일
사망지미국 뉴욕주 뉴욕시
묘지우드론 묘지
학력드와이트 학교
모교뉴욕 대학교
뉴욕 대학교 로스쿨
정당공화당
기타 정당루스벨트 진보당 (1916년)
미국당 (1916년)
민주당 (1918년)
라폴레트 진보당 (1924년)
사회당 (1924년)
진보 노동당 (1926년)
시티 퓨전 (1933년~1941년)
미국 노동당 (1937년~1941년)
독립 진보 (1937년)
통합 도시 (1941년)
배우자테아 알메리고티 (1919년 결혼, 1921년 사망)
마리 피셔 (1929년 결혼)
자녀3명
직업정치인
피오렐로 라 과디아 서명
피오렐로 라 과디아 서명
군사 경력
소속미국 육군 항공대
복무 기간1917년–1919년
계급소령
참전제1차 세계 대전
이탈리아 전선
주요 경력
임기 시작1946년 4월 1일
임기 종료1946년 12월 31일
전임허버트 H. 리먼
후임사무실 폐지됨
임기 시작1934년 1월 1일
임기 종료1946년 1월 1일
전임존 P. 오브라이언
후임윌리엄 오드와이어
임기 시작1935년
임기 종료1945년
전임다니엘 호안
후임에드워드 조셉 켈리
선거구뉴욕주 제20선거구
임기 시작1923년 3월 4일
임기 종료1933년 3월 3일
전임아이작 시겔
후임제임스 J. 란제타
선거구뉴욕주 제14선거구
임기 시작1917년 3월 4일
임기 종료1919년 12월 31일
전임마이클 F. 팔리
후임나탄 D. 펄먼
임기 시작1920년 1월 1일
임기 종료1921년 12월 31일
전임로버트 L. 모란
후임머레이 훌버트

2. 어린 시절

피오렐로 라과디아는 1882년 12월 11일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이탈리아계 아버지 아킬레와 유대인 어머니 아이린 사이에서 태어났다.[4] 그의 아버지는 미국 육군 군악대장이었으며, 이로 인해 라과디아는 어린 시절 애리조나 준주 등 여러 지역에서 성장했다.[4] 그는 애리조나주 프레스콧에서 성공회 신자가 되었다.[5]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즈음 아버지가 건강 문제로 제대한 후, 가족은 어머니의 고향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트리에스테로 이주했다.[4] 아버지는 1904년 유럽에서 사망했다.[4] 이러한 성장 배경은 그가 다양한 문화를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2. 1. 출생과 성장

13세의 라 과디아


피오렐로 라파엘 엔리코 라 과디아(Fiorello Raffaele Enrico La Guardiait)는 1882년 12월 11일 뉴욕시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탈리아 포자 출신의 아킬레 루이지 카를로 라 과디아이고, 어머니는 오스트리아 제국 트리에스테 출신의 유대인 아이린 루자토-코엔이다.[4] 그의 이름 피오렐로는 외할머니 피오리나를, 라파엘은 아버지를, 엔리코는 삼촌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나중에 라파엘은 이름에서 삭제되었고, 엔리코는 미국화하여 헨리(Henry)로 변경되었다.

아버지 아킬레는 원래 가톨릭 신자였으나 무신론자가 되었고, 어머니 아이린은 유대교 배경을 가졌으나 특정 종교를 따르지 않았다.[4] 아킬레는 1880년 아이린과 트리에스테에서 결혼한 후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자녀들에게 이탈리아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으며, 피오렐로는 나중에 영사관에서 일하면서 이탈리아어를 익혔다.

1890년대 애리조나주 포트 휘플에 있던 라과디아와 그의 가족


1885년, 아버지 아킬레는 미국 육군에 입대하여 제11 보병 연대의 악단장(수석 음악가)으로 복무했다. 이로 인해 라과디아 가족은 다코타 준주, 뉴욕주, 애리조나 준주 등 여러 지역의 군 기지(설리 요새, 매디슨 막사, 화추카 요새, 애리조나 휘플 막사)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4] 피오렐로는 애리조나주 프레스콧에서 성공회 신자로 등록했으며, 평생 이 신앙을 유지했다.[5]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하자 아킬레는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를 거쳐 앨라배마주 모빌로 배치되었다. 피오렐로는 군에 입대하려 했으나 거절당하고, 대신 ''세인트루이스 포스트-디스패치''의 종군 기자로 활동하려 했으나 쿠바에는 가지 못했다. 아버지 아킬레는 당시 논란이 되었던 미국 육군 쇠고기 스캔들로 의심되는 음식을 먹고 간염말라리아에 걸려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 결국 그는 1898년 8월 22일 질병으로 제대했고, 매달 8USD의 연금을 받게 되었다.

제대 후 라과디아 가족은 1898년 어머니의 고향인 트리에스테로 이주하여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트럭 운전, 선박 식량 공급, 호텔 운영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려 했으나 어려움을 겪었다. 아킬레는 1904년 10월 21일 카포디스트리아에서 심장 질환으로 사망했다.

피오렐로는 1901년부터 1906년까지 트리에스테, 부다페스트, 리에카의 미국 영사관에서 근무했다.[74]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뉴욕 대학교에 다니면서,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엘리스섬 이민국에서 이탈리아어, 독일어, 이디시어 통역사로 일하며 이민자들을 도왔다.

2. 2. 다양한 언어 습득

피오렐로 라과디아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여러 언어를 습득했다. 그의 아버지 아킬레는 자녀들에게 이탈리아어 사용을 금지했기 때문에, 라과디아는 영사 대리인으로 일하게 되기 전까지는 이탈리아어에 능숙하지 못했다.

1901년부터 1906년까지 그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했던 트리에스테부다페스트, 리에카(현 크로아티아)의 미국 영사관에서 근무했다.[74] 이 시기 미국 영사 서비스에서 근무하며 그는 다국어 환경인 뉴욕에서의 정치 활동에 유용하게 사용될 5개 국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1906년 미국으로 돌아온 라과디아는 1907년부터 1910년까지 낮에는 엘리스 섬 이민국에서 통역사로 일하며 다양한 배경의 이민자들과 소통했다. 이 경험은 그의 언어 능력을 더욱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기간 밤에는 뉴욕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1910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2. 3. 교육



아버지 아킬레 라과디아가 미국 육군 군악대장으로 복무하면서 가족들은 다코타 준주, 뉴욕, 애리조나 준주 등 여러 지역을 옮겨 다녔다.[4] 라과디아는 애리조나주 프레스콧에서 성공회 신자가 되었으며, 평생 신앙을 유지했다.[5]

1898년, 아버지가 건강 문제로 군에서 제대한 후 가족은 어머니의 고향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트리에스테로 이주했다.[74] 라과디아는 1901년부터 1906년까지 트리에스테를 비롯해 부다페스트와 리에카(당시 피우메)에 있는 미국 영사관에서 근무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여러 언어에 능통하게 되었고, 이는 훗날 다양한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뉴욕에서의 정치 활동에 큰 자산이 되었다.

1906년 라과디아는 영사관 직을 그만두고 다시 미국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는 낮에는 엘리스 섬 이민국에서 통역사로 일하며 이민자들을 도왔고, 밤에는 뉴욕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907년부터 1910년까지는 뉴욕 아동 학대 방지 협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통역 업무를 맡기도 했다. 마침내 1910년 법학 과정을 마치고 변호사 자격을 얻어 법조계에 입문했다.

3. 초기 경력

미국 영사 서비스에서 근무하며 여러 언어에 능통하게 된 경험은 이후 다양한 민족이 모여 사는 뉴욕에서의 정치 활동에 밑거름이 되었다. 1906년 영사직을 그만두고 뉴욕으로 돌아온 라과디아는 낮에는 엘리스 섬 이민국에서 통역사로 일하고 밤에는 뉴욕 대학교 로스쿨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1910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7] 그는 주로 가난한 이민자들을 변호하고 노동조합 관련 활동에 참여했으며, 당시 부패 문제와 아일랜드계 미국인 중심의 운영으로 비판받던 태머니 홀 민주당 조직에 반발하여 공화당에 입당했다.

1914년 라과디아는 로어 맨해튼 지역구에서 공화당 후보로 미국 하원 선거에 처음 도전했으나 아쉽게 패배했다. 같은 해 뉴욕 주 부법무장관에 임명되어 1917년까지 재직했다.[7] 1916년 선거에서는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개혁파 정치인으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주로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동할렘 지역구를 대표하며 진보주의적 신념을 펼쳤다[76]

하원의원 임기 중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잠시 의정 활동을 중단하고 미국 육군 항공대에 입대하여 이탈리아 전선에서 복무하기도 했다. 전쟁 후 1919년 뉴욕으로 돌아와 시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나 1921년 선거에서는 패배했다. 같은 해 결핵으로 아내 시아와 어린 딸을 잃는 개인적인 아픔을 겪었다.

1922년 라과디아는 이스트할렘 지역구에서 진보적인 공화당원으로 다시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1933년까지 활동했다. 1920년대 내내 그는 당시 공화당 행정부의 친기업적 정책들을 비판하며 도시의 자유주의자 및 중서부, 서부의 진보주의자들과 연대했다. 금주법, 부유층 감세, 전력 독점 등을 비판했으며, 뉴딜 정책이 나오기 전부터 공공 전력 개발, 아동 노동 금지, 노인 연금, 실업 보험 등을 주장했다. 대공황 이후에는 은행 예금 보증, 증권거래소 규제, 실업 구제 강화를 요구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입법 성과 중 하나는 노동자의 단결권과 파업권을 보장하고 황견계약을 금지한 노리스-라과디아 법 제정에 기여한 것이다.

1929년에는 개혁을 내걸고 현직 시장 지미 워커에게 도전했으나 큰 표 차이로 패배했다. 같은 해 오랜 비서였던 마리 피셔와 재혼하고 두 아이를 입양했다.

3. 1. 법조계 경력

1906년 미국 영사직을 그만두고 자신의 출생지인 뉴욕으로 돌아왔다. 드와이트 스쿨을 졸업한 후,[6] 낮에는 엘리스 섬 이민국에서 크로아티아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통역사로 일했다. 당시 그를 만났던 펠릭스 프랑크푸르터는 라과디아를 "재능있는 통역사"라고 평가했다. 밤에는 뉴욕 대학교 로스쿨에서 법학을 공부해 1910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7]

변호사로서 라과디아는 주로 가난한 이민자들을 대변했으며, 노동조합 관련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12년 약 6만 명의 의류 노동자들이 파업했을 때, 라과디아는 이탈리아어와 이디시어로 파업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부패 문제로 비판받던 태머니 홀 민주당 기관과 아일랜드계 미국인 중심의 정치 구조에 반발하여 공화당에 입당했다.

1911년 프레데릭 C. 태너의 추천으로 뉴욕주 법무 장관실에서 근무를 시작했으며, 1915년 1월 1일부터 1917년까지 부 법무 장관으로 재직했다.[7] 이후 1930년대에는 미국 변호사 협회가 "직업의 향상과 복지보다는 특정 이익에 노력을 기울였다"고 비판하며 탈퇴하기도 했다.

3. 2. 정치 입문

비행가 제복 차림의 라과디아


미국 영사 서비스에서 근무하며 익힌 5개 국어 능력은 이후 다양한 민족이 모여 사는 뉴욕에서의 정치 활동에 큰 자산이 되었다. 1906년 라과디아는 영사직을 그만두고 뉴욕으로 돌아왔다. 낮에는 엘리스 섬 이민국에서 통역사로 일하고 밤에는 뉴욕 대학교 로스쿨에서 법학을 공부해 1910년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작은 키(약 1.52m)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로 가난한 이민자들을 변호하고 노동조합 관련 사건을 맡으며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당시 뉴욕 정치를 장악하고 있던 태머니 홀 민주당 조직은 부패 문제와 함께 아일랜드계 미국인 중심으로 운영되어 이탈리아계 미국인인 라과디아가 정치적으로 성장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이에 라과디아는 공화당에 입당했다. 그는 뉴욕 대학교 로스쿨 재학 시절부터 공화당 클럽에 가입했으며, 1912년 대선에서는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를 지지했고,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진보당 캠페인을 지지했던 윌리엄 채드번을 대신해 지구 선장 역할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1913년 시장 선거에서는 공화당 내 존 퍼로이 미첼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그의 퓨전 캠페인을 지지하지 않았다.

1914년에는 뉴욕 주 부법무장관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로어 맨해튼 지역구에서 공화당 후보로 미국 하원 선거에 처음 도전했으나 아쉽게 패배했다. 1916년 선거에서는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1917년 3월 4일부터 의정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개혁파 정치인으로 평가받았으며,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는 슬럼가인 동할렘 지역구를 대표했다. 무소속에 가까운 성향 탓에 중요한 위원회 자리를 맡지는 못했지만, 진보주의 신념을 바탕으로 지칠 줄 모르는 활동을 펼쳤다[76]

하원의원 임기 중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라과디아는 미국 육군 항공대 소령으로 임관하여 이탈리아-오스트리아 전선에서 카프로니 Ca.44 폭격기 부대를 지휘했다. 전쟁이 끝난 후 1919년 12월 31일 하원의원직을 사임했다.

1919년, 당시 주지사였던 앨 스미스가 사임하면서 공석이 된 뉴욕 시의회 의장직 특별 선거에 공화당 정치 보스 새뮤얼 S. 쾨니그의 설득으로 출마하게 되었다. 라과디아는 공화당 경선에서 윌리엄 M. 베넷을 꺾고 후보가 되었으며, 폴 빈들스가 선거 운동 본부장을 맡았다. ''뉴욕 타임스''와 시민 연합의 지지를 받은 그는 민주당 후보 로버트 L. 모란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모란은 전 민주당원 마이클 켈리가 자유당 후보로 출마하면서 표가 분산되는 스포일러 효과로 인해 불리한 상황이었다. 같은 해 시아 앨메리고티와 결혼했다.

라과디아는 1920년부터 1922년까지 뉴욕 시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1920년 선거에서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 워렌 G. 하딩과 주지사 후보 네이선 L. 밀러를 지지했으나, 이후 밀러 주지사의 대중교통 정책과 복지 프로그램 축소 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밀러 주지사와의 대립은 1921년 시장 선거 공화당 후보 경선에서 불리하게 작용했고, 결국 헨리 커란에게 패배했다. 쾨니그와 빈들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선에 나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비극적이게도 같은 해 아내 시아와 어린 딸이 결핵으로 사망했는데, 라과디아는 뉴욕의 열악한 주거 환경 탓이라며 비통해했다.

1922년 주지사 선거 출마를 고려하기도 했던 라과디아는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운영하던 ''뉴욕 이브닝 저널''에 공화당 주 정책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기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쾨니그와의 타협을 통해 밀러와의 경선은 피하게 되었다. 같은 해, 노동자 계층의 이탈리아계와 유대인 이민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이스트할렘 지역구에서 진보적 공화당원으로 다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920년대 내내 라과디아는 미국 의회에서 활동하며 당시 공화당 행정부의 친기업적 정책들에 맞서 도시의 자유주의자 및 중서부, 서부의 진보주의자들과 연대했다. 그는 금주법, 재무장관 앤드루 멜런이 추진한 부유층 감세, 거대 전력 회사들의 독점 등을 강하게 비판했다. 뉴딜 정책이 시행되기 전부터 이미 공공 전력 개발, 아동 노동 금지법, 노인 연금, 실업 보험 도입 등 진보적인 정책들을 주장하며 '뉴딜의 선구자'와 같은 면모를 보였다. 대공황이 시작되자 은행 예금에 대한 정부 보증, 증권거래소 규제 강화, 실업자 구제를 위한 연방 정부의 역할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입법 성과 중 하나는 노리스-라가디아 법으로, 이는 기업주가 노동자에게 노동조합에 가입하거나 파업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강요하는 황견계약을 금지하고, 노동조합 활동을 제약하는 법원 명령의 남용을 막는 중요한 법안이었다.

1928년 대선에서는 민주당 후보인 앨 스미스를 지지하며 당파를 넘어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8] 1929년에는 개혁을 내걸고 당시 현직 시장이던 지미 워커에게 도전했으나 시기적으로 불리하여 큰 표 차이로 패배했다. 같은 해,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비서 마리 피셔와 재혼하고 두 아이를 입양했다. 라과디아는 1933년 3월 4일까지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며 총 5선 연임에 성공했다[77]

3. 3.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라과디아는 비행기에 관심을 가져 주세페 마리오 벨란카(Giuseppe Mario Bellanca)의 회사에서 이사 및 변호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17년 3월 4일 미국 하원 의원에 취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76],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위해 미국 육군 항공대에 자원 입대했다.

1917년 10월 대위로 진급한 라과디아는 이탈리아 포자에서 윌리엄 오드 라이언 소장과 함께 이탈리아 조종사들을 훈련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같은 해 12월 12일에는 조종사 면허를 취득했으며, 이후 이탈리아-오스트리아 전선에서 활약하며 카프로니 Ca.44 폭격기 부대를 지휘하는 소령으로 진급했다.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로부터 비행 십자 훈장을 받기도 했다.

라과디아가 전쟁에 참전한 동안에도 그의 하원 의원직은 유지되었다. 그의 부재 중 사무실은 앤드루스와 마리 피셔가 관리했으며, 지역구 관련 업무는 동료 의원인 아이작 시겔이 대행했다. 1918년 1월 8일, 3,000명이 넘는 서명이 담긴 라과디아의 의석을 비워달라는 청원서가 챔프 클라크 하원의장에게 전달되었으나, 클라크 의장은 라과디아의 의석을 공석으로 처리하는 안건 상정을 허용하지 않았다.

4. 정치 경력

피오렐로 라과디아는 1916년 뉴욕 제25 선거구에서 공화당 후보로 하원의원에 당선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잠시 의원직을 유지한 채 미국 육군 항공대에 복무하기도 했다.

1918년 재선 후, 1919년 말 사임하고 뉴욕 시의회 의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재직했다.[77][80] 이 시기부터 그는 당내 보수파와 거리를 두며 독자적인 진보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8]

1922년 다시 하원의원으로 복귀하여 1933년까지 활동했다.[77][81] 이 기간 동안 라과디아는 공화당 내 대표적인 진보 인사로서 금주법 폐지, 노동자 권익 보호 등을 주장했으며, 특히 황견계약을 금지하는 노리스-라과디아 법 제정에 크게 기여했다. 정당에 얽매이지 않고 1924년에는 진보당 후보를 지지하고 사회당 소속으로 선거에 나서기도 했다.

1929년 처음 뉴욕 시장 선거에 도전했으나 지미 워커에게 패배했고,[10][87] 1932년 하원의원 선거에서도 낙선하는 등 정치적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지미 워커와 태머니 홀의 부패 스캔들은 개혁적인 라과디아에게 뉴욕 시장직에 다시 도전할 결정적인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4. 1. 연방 하원의원 (1917-1919, 1923-1933)



1916년 선거에서 라과디아는 뉴욕 제25 선거구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지역 내 다양한 민족 집단에게 지지를 호소했으며,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했던 독일어 신문 ''New Yorker Staats-Zeitung''의 지지까지 확보하여 현직 의원인 민주당의 마이클 F. 팔리를 357표 차이로 꺾고 당선되었다. 그는 1917년 3월 4일부터 하원의원 임기를 시작했다.[76]

그러나 의원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라과디아는 미국 육군 항공대에 입대하여 소령으로 임관했다. 그는 비행기에 대한 관심이 많아 이전에 주세페 마리오 벨란카의 항공기 회사에서 이사 및 변호사로 활동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 전선으로 파견되어 포자에서 이탈리아 조종사들을 훈련시키는 임무를 맡았고, 1917년 12월에는 직접 조종사 면허를 취득했다.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그에게 비행 십자 훈장을 수여했다.

이후 라과디아는 카프로니 Ca.44 폭격기 부대를 지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가 전쟁에 참전한 동안 그의 의원 사무실은 보좌진들이 관리했으며, 지역구 관련 업무는 동료 의원인 아이작 시걸이 도왔다. 일부에서는 그의 의원직을 공석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청원을 제출하기도 했으나, 하원의장 챔프 클라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918년 선거에서는 특이하게도, 태머니 홀민주당이 반전(反戰) 성향의 사회당 후보 스콧 니어링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해 공화당 소속인 라과디아를 지지했다. 덕분에 라과디아는 사회당 후보를 꺾고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1919년 12월 31일 하원의원직을 사임하고, 뉴욕 시의회 의장(1920-1922)으로 자리를 옮겼다.[77]

1922년 선거에서 라과디아는 다시 하원의원직에 도전했다. 그는 은퇴하는 아이작 시걸 의원의 지역구였던 뉴욕 제20 선거구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민주당과 사회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 지역구는 이탈리아계와 유대인 노동자 계층이 많이 거주하는 이스트할렘으로, 그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그는 1923년 3월 4일부터 다시 하원의원 임기를 시작하여 1933년 3월 4일까지 5선 연임에 성공했다.[77][81]

제70대 미국 의회 시절의 라과디아, 약 1929년


하원의원으로 복귀한 라과디아는 진보적인 공화당원으로서 당시 공화당 행정부의 친기업적이고 보수적인 정책들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소수의 도시 자유주의자 및 중서부, 서부의 진보주의자들과 연대하여 활동했다. 그는 특히 금주법 시행에 반대했고, 앤드루 멜런 재무장관이 추진한 부유층을 위한 세금 감면 정책과 대기업의 전력 독점 행태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뉴딜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이전부터 이미 공공 전력 개발, 아동 노동 금지법 제정, 노인 연금 제도 도입, 실업 보험의 연방 정부 지원 등 진보적인 정책들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대공황이 발생하자 그는 은행 예금에 대한 정부 보증, 증권거래소에 대한 규제 강화, 실업자 구제를 위한 연방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하며 시대를 앞서나가는 면모를 보였다.

라과디아의 의정 활동 중 가장 중요한 성과 중 하나는 노리스-라과디아 법(Norris–La Guardia Act) 제정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이 법안은 고용주가 노동자에게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거나 파업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강요하는 소위 황견계약을 금지하고,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법원의 부당한 개입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당시 열악한 환경에 있던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중요한 진전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는다.

1924년에는 공화당의 캘빈 쿨리지 대통령 대신 진보당 후보 로버트 M. 라 폴레트를 지지하며 공화당을 탈당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등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사회당 후보로 출마하여 프랭크와 시걸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으며, 이 기간 동안 의회 내 유일한 사회당 동료 의원이었던 빅터 L. 버거와 함께 활동했다.

1926년 선거에서는 다시 공화당으로 복귀하여 출마했고, 민주당과 사회당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당시 그는 뉴욕시에서 유일하게 당선된 공화당 하원의원이었다. 이후 1928년과 1930년 선거에서도 연이어 승리하며 의원직을 유지했다.

하원의원 시절 라과디아는 미국 하원 사법 위원회에서 활동했으며, 진보 언론인 The Nation의 편집장 오스왈드 개리슨 빌라드는 그를 "오늘날 의회에서 가장 가치 있는 구성원"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는 앤드루 멜런 재무장관이 미국 내각의 각료이면서 동시에 사기업인 알코아(Alcoa)의 이사직을 유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탄핵을 지지했다. 또한 노동 운동가 토머스 무니의 사면을 촉구했으며, 1931년에는 부당하게 폭행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변호사를 선임할 형편이 못 되었던 흑인 철도 짐꾼 제임스 스미스를 위해 프로 보노(무료 변론)로 변호를 맡아 무죄 판결을 이끌어내는 등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1932년 선거에서 라과디아는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겨 출마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태머니 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국 공화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발생한 코테일 효과(정당 효과)로 인해 민주당의 제임스 J. 란제타 후보에게 패배하여 10년간의 하원의원 활동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의 낙선에 대해 동료 진보 정치인 로버트 M. 라 폴레트 주니어는 "국민들은 잠시 그들의 가장 충실한 봉사자 중 한 명을 잃었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4. 2. 뉴욕 시의회 의장 (1920-1922)

새뮤얼 S. 쾨니그 공화당 지역 책임자는 앨 스미스가 주지사가 되기 위해 사임하면서 공석이 된 뉴욕 시 의회 의장 특별 선거에 라과디아가 출마하도록 설득했다.[8] 라과디아는 공화당 후보 지명 경선에서 윌리엄 M. 베넷을 이겼고, 폴 빈들스가 그의 선거 운동을 이끌었다.[8]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라과디아는 ''뉴욕 타임스''와 시민 연합의 지지를 받았다.[8] 민주당 후보는 알프레드 스미스의 뒤를 이어 의장직을 수행하던 브롱크스구 출신의 로버트 L. 모란이었다.[78] 여기에 뉴욕 제3 "샤무록" 대대 지휘관인 마이클 "다이너마이트 마이크" 켈리가 자유당 후보로 출마했다. 태머니 홀은 켈리의 출마가 모란에게 불리하다고 보고, 켈리에게 출마를 포기하도록 설득했으나 실패했다.[79] 태머니 홀은 뉴욕주 최고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하여 켈리를 후보 명단에서 제외시키는 데 성공했지만[79], 선거 당일 3,500명이 넘는 유권자가 켈리에게 투표했다.[79] 이 스포일러 효과로 인해 모란은 라과디아에게 불과 1,363표 차이로 패배했다.[80]

라과디아는 1920년 선거에서 공화당의 워렌 G. 하딩 대통령 후보와 네이선 L. 밀러 주지사 후보를 지지했다.[8] 하지만 나중에 밀러 주지사가 추진한 대중교통 정책과 복지 프로그램 폐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8] 밀러 주지사에 대한 라과디아의 비판적인 태도는 1921년 뉴욕 시장 선거 공화당 후보 경선에 영향을 미쳤다. 결국 후보 지명은 헨리 커란에게 돌아갔다. 라과디아는 쾨니그와 빈들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비 선거에서 커란에게 도전했지만 패배했다.[8]

라과디아는 1922년 뉴욕 주 선거 출마를 고려하기도 했다. 그는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소유한 ''뉴욕 이브닝 저널''에 공화당의 주 정강 정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기고했다.[8] 쾨니그는 밀러와의 당내 경쟁을 피하기 위해 라과디아와 타협점을 찾으려 했다.[8]

4. 3. 뉴욕 시장 선거 출마 (1929, 1933)

1929년, 라과디아는 개혁을 내세우며 뉴욕 시장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는 공화당 후보로 지명되었으나,[9] 당시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현직 시장 지미 워커에게 시기적으로 불리한 선거에서 큰 표 차이로 패배하였다.[10][87]

이후 1932년 하원 의원 선거에서도 민주당의 제임스 J. 란체타 후보에게 패배하며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그러나 1933년에 이르러 상황이 반전되었다. 지미 워커 시장과 그가 속한 정치 조직 태머니 홀이 부패 스캔들에 휘말려 시정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라과디아는 개혁파 후보로서 다시 부상할 기회를 맞이하였다.

5. 뉴욕 시장 (1934-1945)

1933년 지미 워커 시장 사임 후 치러진 선거에서 라과디아는 공화당, 개혁 민주당원, 무소속 등이 연합한 융합 파티(Fusion Party) 후보로 출마하여 승리했다.[11] 이는 부패로 얼룩진 태머니 홀의 기득권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과 개혁에 대한 열망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는 1934년 1월 1일 뉴욕 시장으로 취임하여 1945년까지 세 번의 임기를 역임하며 뉴욕시 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라과디아 시장 재임 기간은 대공황 극복과 도시 현대화를 위한 노력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그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침체된 뉴욕시 경제 회복에 기여했으며,[26] 루스벨트 대통령과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막대한 연방 자금을 확보하여 도로, 교량, 공항, 공원, 공공 주택 등 대규모 도시 기반 시설 건설을 추진했다. 이러한 공공 사업은 도시의 물리적 환경을 크게 개선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시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1935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 시장 회의 회장을 맡아 연방 정부와 도시 간의 협력 강화를 주장하며 전국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12]

시정 운영 측면에서는 능력주의를 바탕으로 행정 개혁을 단행하여 관료 사회의 부패를 줄이고 효율성을 높이고자 노력했다. 특히 이전 태머니 홀 체제 하에서 소외되었던 유대인, 이탈리아계 미국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등 소수 민족에게 시 공무원직 문호를 개방하여 행정의 포용성을 확대하려 시도했다. 조직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적극적인 단속에 나서 대중적인 지지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시정에도 한계는 존재했다. 조직 범죄를 완전히 근절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으며,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지속적인 인종 차별 문제는 1935년1943년 할렘 지역에서 발생한 폭동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민방위국(OCD) 국장을 잠시 겸임했으나[30], 전쟁 말기에는 시 재정 부족으로 새로운 정책 추진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31][32][33]

이러한 도전 과제에도 불구하고 라과디아는 특유의 강력한 리더십과 개혁적인 정책, 그리고 청렴성을 바탕으로 시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확보했다. 그는 1937년1941년 선거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뉴욕시 역사상 최초로 융합 파티 소속으로 재선에 성공한 시장이 되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뉴욕시는 대공황의 위기를 극복하고 현대적인 대도시로 발전하는 중요한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5. 1. 당선 배경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과 함께


진보적인 정치 활동에도 불구하고, 라과디아는 1932년 민주당이 압승하는 분위기 속에서 태머니 홀 소속의 제임스 랜제타에게 연방 하원의원 자리를 내주었다. 이후 그는 1933년 뉴욕 시장 선거에 다시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1929년 라과디아가 당시 지미 워커 시장 행정부의 부패 문제를 제기했을 때는 경제 호황의 영향으로 시민들의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대공황으로 경제 상황이 악화된 1933년에는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새뮤얼 시버리가 주도한 세 차례의 시 정부 조사를 통해 워커 행정부의 부패 실상이 드러났고, 이는 라과디아가 제기했던 문제의 진실성을 입증했다. 결국 1932년 9월 워커 시장은 사임했지만, 태머니 홀은 그의 후임자인 존 P. 오브라이언을 내세워 시정을 계속 장악했다. 오브라이언 행정부 역시 심각한 경제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당시 뉴욕시는 파산 위기에 처해 있었고, 시 재정을 유지하기 위해 워커와 오브라이언 행정부는 은행가들로부터 자금을 빌리면서 사실상 재정 통제권을 넘겨준 상태였다. 심지어 부족한 구호 자금마저 태머니 홀의 충성스러운 지지자들에게 우선적으로 배분되었다.

이러한 심각한 상황 속에서 태머니 홀에 반대하는 민주당 내 개혁파, 시민 개혁가들, 그리고 공화당원들이 연대하여 융합 파티(Fusion Party)를 결성했다. 시버리와 루스벨트 행정부의 아돌프 A. 벌 주니어, 그리고 새롭게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던 이탈리아계 유권자들의 적극적인 지지에 힘입어 라과디아는 융합 파티의 시장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는 현직 시장인 오브라이언과, 브롱스 민주당의 유력 정치인 에드워드 J. 플린의 지원을 받는 회복당(Recovery Party) 후보 조지프 V. 매키를 상대로 선거전을 치렀다.[11] 라과디아는 더 정직하고 효율적인 시정 운영과 포용성을 약속하며 시민들의 지지를 호소했다.[11]

라과디아의 승리는 그의 뛰어난 결단력과 높은 대중적 인지도, 개혁가 시버리의 지지, 그리고 다양한 정치 세력의 연합 덕분이었다. 그의 지지 기반은 공화당원(특히 외곽 에 거주하는 중산층 독일계), 소수의 개혁적 민주당원, 사회주의자, 상당수의 중산층 유대계, 그리고 이전까지 태머니 홀의 주요 지지층이었던 이탈리아계 다수를 아우르는 복잡한 연합체였다.[11][89] 이를 통해 그는 이탈리아계, 독일계, 유대계 시민들과 WASP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자들 사이의 이례적인 정치적 연대를 성공시켰다.[90]

라과디아는 전통적인 공화당원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오히려 루스벨트 대통령을 지지하는 진보적 개혁 성향에 가까웠다. 그는 태머니 홀에 비판적이었고 노동조합을 지지하여 1936년에는 미국 노동당의 추천을 받기도 했다.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루스벨트를 적극 지지하며 조지 노리스 상원의원과 함께 루스벨트-월러스 독립 위원회의 공동 의장을 맡았다.

또한, 라과디아는 뉴욕시 최초의 이탈리아계 시장이었지만, 당시 이탈리아계 뉴요커의 일반적인 모습과는 다른 면모를 보였다. 이탈리아계 다수가 가톨릭 신자인 것과 달리, 그는 애리조나주에서 성장하며 성공회 신자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헝가리유대인이었고[91], 아버지는 가톨릭 신앙을 버리고 무신론자가 되었다. 이러한 개인적 배경은 이후 그의 정치 활동, 특히 범죄 대책 등에 영향을 미쳤다. 시장 재임 중 라과디아는 1935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 시장 회의의 회장을 역임하며 연방 정부와 도시 간의 협력 강화를 주장하는 주요 인물로 활동했다.[12]

5. 2. 주요 정책 및 업적



라과디아는 1934년 1월 1일 시장직에 취임하며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주요 목표를 제시했다.[88]

  • 도시 재정 건전성 회복 및 은행가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 실업자를 위한 연방 자금 지원 일자리 창출 프로그램 확대
  • 정부 부패 및 경제 주요 부문에서의 갈취 종식
  • 연줄주의를 능력 기반 공무원 제도로 대체하고 높은 기준 확립
  • 사회 기반 시설, 특히 교통과 공원 현대화


라과디아는 루스벨트 대통령과의 특별한 관계와 연방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 지출 의지를 활용하여 뉴욕시를 위한 막대한 지원을 확보했다. 그는 루스벨트 행정부 초기부터 긴밀히 협력했으며, 연방긴급구조청(FERA)의 해리 홉킨스와 협력하여 시민공공사업관리국(CWA) 일자리의 20%를 뉴욕시에 배정받았다. 1934년 1월까지 뉴욕 실업자들은 CWA 일자리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고, 4,000개의 CWA 프로젝트가 도시의 공원, 거리, 놀이터 등을 재건했다.

이후 라과디아는 예산 균형을 맞추기 위해 공무원 급여 삭감과 신규 세금 부과 등 강력한 조치를 시행했고, 이를 통해 시 재정 통제권을 은행가들로부터 되찾아왔다. 이를 바탕으로 내무장관 해럴드 L. 이커스가 관리하는 공공사업국(PWA)으로부터 1940년 6월까지 2.5억달러 이상의 자금을 확보했다. 또한 1935년 출범한 홉킨스의 공공사업진흥국(WPA)과는 더욱 긴밀히 협력하여 더 많은 지원을 이끌어냈다. 라과디아와 그의 공원 관리국장 로버트 모지스는 수천 개의 프로젝트를 미리 준비했고, 덕분에 1935년 10월까지 뉴욕시는 WPA 지출의 7분의 1 이상을 확보하여 208,000명의 시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확보한 연방 자금을 바탕으로 라과디아는 대규모 공공 사업을 추진하여 뉴욕시의 모습을 크게 변화시켰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이루어진 주요 성과는 다음과 같다.

분야주요 내용
도로 및 간선도로 약 3218.68km 정비, 주요 고속도로 건설 (웨스트 사이드 고속도로, 이스트 리버 드라이브), 주요 교량 3개 및 소규모 교량 100개 건설 (트라이보로 다리 등), 주요 터널 건설 (브루클린 배터리 터널), 뉴욕 지하철 시스템 공공 인수 완료 (1939년)
뉴욕 시립 공항(라과디아 공항) 및 이후 존 F. 케네디 국제공항 건설
신규 공원 5000acre 개발, 수영장 17개 건설
학교 92개, 놀이터 255개, 진료소 15개 신설, 시립 병원 병상 8,000개 증설
낡은 주택 철거 및 공공 주택 프로젝트 13개 건설 (17,000 가구 입주)
메카 사원을 뉴욕 시티 센터 음악 및 무용 공연장으로 개조 (1943년)[27]



라과디아는 연방 자금 확보와 인프라 건설 외에도 시정 개혁에 힘썼다. 그는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적 임명자들을 해고하고 능력 있는 인물들을 등용했다. 공무원 시험을 통한 채용 비율은 1933년 55%에서 1939년 74%로 증가했다. 또한, 이전 태머니 홀 체제 하에서 소외되었던 유대인, 이탈리아계, 흑인 등 소수 민족에게 시 공무원직을 개방하여 관료 사회의 인종적, 민족적 구성을 크게 변화시켰다. 예를 들어, 1934년 3명에 불과했던 흑인 소방관은 1941년 46명으로 늘어났고, 시가 뉴욕 지하철을 인수한 후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처음으로 차장, 발차원, 운전사 등으로 고용되었다. 부패로 얼룩진 시의회를 개혁하기 위해 1938년에는 강력한 뉴욕 시 평가 위원회 설립을 포함한 시 헌장 개정을 성공시켰다.

라과디아는 조직 범죄와의 전쟁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시장 취임 직후 경찰에 마피아 보스 럭키 루치아노 체포를 명령했고, 특별 검사 토머스 E. 듀이를 임명하여 루치아노를 성공적으로 기소하고 투옥시켰다. 또한 프랭크 코스텔로가 운영하던 슬롯 머신 수천 대를 압수하여 공개적으로 파괴했으며, 갱단이 가격을 부풀린 아티초크 판매를 일시적으로 금지하기도 했다. 핀볼 게임 역시 도박 기계로 간주하여 금지했는데, 이 금지령은 1976년까지 유지되었다.[24][25]

그는 또한 사회적 기준을 강조하여 자신의 도덕적 감성에 맞지 않는 부르레스크 극장을 폐쇄했다.[22] 나치 독일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독일 상품 보이콧을 지지하고, 반나치 집회를 주도했으며, 1939년 뉴욕 세계 박람회에 히틀러를 위한 "공포의 방"을 만들자고 제안하기도 했다.[18][11] 그는 유대인 난민 구제를 위한 법안을 추진하고, 인종 및 종교적으로 다양한 판사들을 임명하여 나치즘에 맞섰다.[11]

하원의원 시절부터 라과디아는 미국의 진보주의를 위한 확고한 옹호자였다. 그는 이민 제한 완화, 니카라과 주둔 미군 철수[85], 노동자 권리 보호, 누진세 도입, 월가 규제 강화, 실업 보험 도입 등을 지지했다.[86] 그의 가장 중요한 입법 업적 중 하나는 1932년 조지 노리스 상원의원과 공동 발의한 노리스-라과디아법이다. 이 법은 법원이 노동조합 활동을 제약하기 위해 금지 명령을 내리는 것을 제한하고, 노동자가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계약(황견 계약)의 강제성을 없애 노동자의 권리를 크게 신장시켰다.[41] 그는 미국 금주법에도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으며, 의원 면책 특권을 이용하여 직접 저알코올 맥주를 만들어 시음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44]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인 1941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라과디아를 신설된 민방위국(OCD)의 초대 국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뉴욕 시장직을 유지하며 워싱턴 D.C.와 뉴욕을 오갔으나, 두 직책을 동시에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OCD 운영 방식에 대한 비판으로 인해 곧 교체되었다.[30] 전쟁은 뉴욕시의 대공황을 종식시켰지만, 높은 전시 세금과 방위 산업의 부재로 인해 도시는 큰 호황을 누리지는 못했다.[31] 전쟁 말기에는 시 재정 부족으로 새로운 정책 추진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는 그의 인기 하락으로 이어져 1945년 4선 출마를 포기하게 만들었다.[32][33]

그러나 그의 정책에도 한계는 있었다. 도박 단속은 조직 범죄 근절에 큰 효과를 보지 못했으며, 흑인에 대한 지속적인 차별은 1935년1943년 할렘에서 대규모 폭동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벌레스크 극장과 포르노그래피 금지 등은 시민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라과디아는 정직함, 효과적인 행정 능력, 그리고 소수 민족 및 노동자 계층에 대한 관심으로 폭넓은 지지를 받아 1937년1941년 재선에 성공했다. 이는 이전의 어떤 융합당 시장도 이루지 못한 성과였다. 그의 정책과 리더십은 뉴욕시의 물리적, 사회적 환경을 크게 변화시켰으며, 뉴딜 정책 시대의 가장 성공적인 도시 행정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5. 3. 1935년 할렘 폭동

1935년, 할렘에서는 흑인에 대한 지속적인 차별 문제 등이 원인이 되어 폭동이 일어났다. 1935년 할렘 폭동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주로 인명 피해보다는 재산 피해에 집중되었다는 점에서 최초의 현대적 인종 폭동으로 평가받는다.[11] 폭동 발생 당시 라과디아 시장은 휴버트 딜레이니와 함께 직접 거리를 순찰하며 사태를 진정시키려 노력했다.[11]

폭동 이후, 라과디아는 원인 규명을 위해 '할렘 상황에 관한 시장 위원회'를 소집하여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했다.[11] 이 보고서는 "고용 차별,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 인종 분리 정책" 등이 폭동의 주요 원인이었음을 지적했다.[11] 그러나 라과디아 시장은 이 위원회 보고서를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고 보류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은 나중에 뉴욕의 흑인 사회 신문인 ''암스테르담 뉴스''가 연재 형식으로 게재하면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13] 라과디아 행정부 시기에는 1943년에도 할렘에서 주요 폭동이 다시 발생했다.

5. 4. 한계

라과디아의 시정 운영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한계점이 지적된다. 도박이나 슬롯머신 등 조직 범죄와 관련된 문제들을 뿌리 뽑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차별 문제는 여전히 존재했으며, 이는 1935년1943년 할렘 지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폭동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시민 자유 측면에서는 비판의 여지가 있었다. 예를 들어, 벌레스크 극장 공연이나 포르노그래피 유통을 금지하는 등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6. 은퇴와 죽음

라과디아의 묘지


1946년 라과디아는 시장직에서 물러났다. 퇴임 후 잠시 국제 연합의 유엔 구호 재건 사업국(UNRRA) 사무국장을 맡았으며, 음악 동호회인 파이 뮤 알파 심포니아의 회원이 되기도 했다.

1947년 9월 20일, 라과디아는 브롱크스 필드스톤 지역의 자택(5020 굿리지 애비뉴)에서 췌장암으로 사망했다.[63] 향년 64세였다. 그의 장례는 브롱크스에 있는 우들론 묘지에서 치러졌고 그곳에 안장되었다.[64]

라과디아는 키가 작은 편이었는데, 약 1.52m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2006년 뉴욕 타임스 기사에서는 그의 키가 약 1.52m라고 보도했다.[62]

7. 유산 및 평가



생전에 라과디아는 판사 시절 공정하고 빈민에게 우호적인 판결로 명판관으로 명성을 얻었고, 정치인 시절에는 청렴결백함과 진보적 성향으로 대중의 칭송을 받으며 '뉴욕의 영웅'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라과디아의 마지막 임기는 이전만큼 성과가 크지는 않았다. 1941년 일본진주만 공격 이후 연방 정부의 도시 지원이 줄어들면서 건설 프로젝트들이 중단되었고, 뉴욕시는 새로운 시설 유지와 확장된 서비스 제공에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라과디아는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는 예산 삭감 대신 차입을 늘렸다. 또한, 연방 정부의 내각 직책이나 군사위원회 자리를 얻으려는 성과 없는 노력과 민간 방어 국장으로서의 짧은 재직 등으로 인해 뉴욕 시정에 집중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기 말에 뉴욕시는 미국 내에서 주택 및 고용 차별에 반대하는 가장 선도적인 법률을 통과시켰고, 최초의 관리형 의료 프로그램인 보건 보험 계획(Health Insurance Plan, HIP)을 구상했으며, 유엔 본부를 뉴욕에 유치하는 데 성공하는 등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1946년 라과디아는 시장직에서 물러난 후 잠시 유엔 구제·재활 행정부(UNRRA)를 이끌었다. 1947년 9월 29일 췌장암으로 사망하여 브롱크스의 우들론 묘지에 안장되었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공황 시기에 라과디아는 전례 없는 연방 정부와 도시 간의 협력 관계를 구축했고, 뉴욕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뉴욕시에 가장 정직하고 효율적인 행정을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3년 일리노이 대학교 시카고 캠퍼스의 멜빈 G. 홀리가 실시한 역사학자, 정치학자, 도시 전문가 대상 설문 조사에서 라과디아는 1820년부터 1993년 사이에 재임한 미국 대도시 시장 중 최고의 시장으로 선정되었다.[65] 전기 작가 메이슨 B. 윌리엄스는 라과디아가 루스벨트뉴딜 정책과 긴밀히 협력하여 연방 정부의 재정과 지역의 필요를 성공적으로 연결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유대인과 이탈리아인처럼 기존 정치 시스템에서 소외되었던 집단들이 정치적으로 인정받는 길을 열었다. 그의 행정부는 로버트 모세와 협력하여 뉴욕에 현대적인 기반 시설을 마련했다.[26] 그의 선구적인 목표는 도시 발전의 가능성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토마스 케스너는 라과디아 이후에는 그와 같은 강력한 권력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기 어려워졌다고 평가했다.

라과디아의 묘비


사후 뉴욕 퀸스에 설립된 공항은 그를 기리기 위해 라과디아 공항으로 명명되었다. 이 외에도 라과디아 커뮤니티 칼리지, 라과디아 플레이스(LaGuardia Place)를 비롯하여 뉴욕시 곳곳의 다양한 공원과 건물들이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음악 애호가로 알려진 라과디아는 전문 및 학생 오케스트라를 즉흥적으로 지휘하기도 했으며, 1936년 피오렐로 H. 라과디아 음악 & 예술 고등학교로 개명된 음악 예술 고등학교 설립에 기여했다.[66] 1935년 5월, 그가 시장으로 재임하던 시기 뉴욕주 체스터에 노숙자와 실업자를 위해 마련된 258acre 규모의 도시 쉼터가 캠프 라과디아(Camp LaGuardia)로 개명되었다. 이 캠프는 72년간 운영되다가 2006년에 폐쇄되었다.[67]

오른쪽


1972년, 미국 우정청은 라과디아를 기리는 14센트 우표를 발행했다.[68] 이스라엘 텔아비브에는 그의 이름을 딴 라과디아 거리(LaGuardia Street)와 라과디아 인터체인지(LaGuardia Interchange)가 있다.[69] 크로아티아의 리에카에도 피오렐로 라과디아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라과디아는 1903년부터 1906년까지 리예카에서 미국 영사 대리인으로 근무했는데, 당시 이 도시는 피우메(Fiume)로 알려졌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헝가리 행정부 관할 하에 있었다. 이 시기 리예카 항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미국을 잇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리예카와 뉴욕 간 직항 여객선이 운항되었다.[70]

역사학자들은 종종 라과디아를 뉴욕뿐 아니라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장 중 한 명으로 평가하지만, 일부 전문가는 그를 루돌프 줄리아니와 동등한 수준으로 평가하기도 한다.[101]

8.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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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1914년 미국 하원의원 선거하원의원 (뉴욕 제14선거구)64대공화당33.93%5,331표2위낙선
1916년 미국 하원의원 선거하원의원 (뉴욕 제14선거구)65대공화당43.28%7,272표1위
뉴욕주 하원의원 당선
1918년 미국 하원의원 선거하원의원 (뉴욕 제14선거구)66대공화당69.74%14,523표1위
1922년 미국 하원의원 선거하원의원 (뉴욕 제20선거구)68대공화당38.30%8,492표1위
1924년 미국 하원의원 선거하원의원 (뉴욕 제20선거구)69대진보당42.70%10,756표1위
1926년 미국 하원의원 선거하원의원 (뉴욕 제20선거구)70대공화당47.06%9,122표1위
1928년 미국 하원의원 선거하원의원 (뉴욕 제20선거구)71대공화당50.11%11,956표1위
1929년 뉴욕 시장 선거뉴욕 시장97대공화당25.73%367,675표2위낙선
1930년 미국 하원의원 선거하원의원 (뉴욕 제20선거구)72대공화당52.08%10,606표1위
1932년 미국 하원의원 선거하원의원 (뉴욕 제20선거구)73대공화당46.95%15,227표2위낙선
1933년 뉴욕 시장 선거뉴욕 시장99대공화당40.35%868,522표1위
뉴욕 시장 당선
1937년 뉴욕 시장 선거뉴욕 시장99대공화당60.09%1,344,630표1위
1941년 뉴욕 시장 선거뉴욕 시장99대공화당52.35%1,186,518표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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