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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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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중 전투는 후한 말 조조와 유비 세력 간의 한중 지역을 둘러싼 일련의 군사적 충돌이다. 조조는 한중을 점령하여 익주를 위협했고, 유비는 이를 막기 위해 손권과의 동맹을 통해 대응했다. 217년부터 유비는 한중 공략을 시작하여 황충의 활약으로 정군산 전투에서 승리하며 하후연을 전사시켰다. 219년 조조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왔지만, 유비의 방어 전략과 조조군의 보급 문제로 인해 결국 조조가 철수하면서 유비가 한중을 차지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유비는 한중왕에 즉위하고 촉한 건국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관우의 형주 공략을 촉발시키는 등 삼국 시대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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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분쟁 명칭한중 전투
위치섬서성 한중
시기217년 12월 - 219년 8월
원인후한 말 권력 다툼
결과유비의 승리; 유비, 한중 점령
교전 세력
교전국 1유비
교전국 2조조
지휘관
지휘관 1유비
지휘관 2하후연 (219년 2월까지)
조조 (219년 2월부터)
관련 전투
전투 목록계변 전투
양평관 전투
정군산 전투
한수 전투

2. 배경

215년 4월, 조조는 한중군에서 군벌 장로를 공격하여 양평 전투에서 그를 격파하고, 12월에 장로는 항복하여 한중군은 조조의 통제하에 들어갔다.[1] 조조는 박호(朴胡), 두확(杜濩) 및 원약(袁約)을 세 개의 파(Ba) 군의 행정관으로 임명했으나, 이들은 황권에게 패배했고, 황권은 곧 파동(巴東), 파서(巴西) 및 파(巴) 군을 장악했다.[2][3][4] 219년, 조홍과 장합에게 명을 내려 서촉 지방을 공격하도록 함으로써 한중 전투의 막이 올랐다.

2. 1. 시대적 배경

212년, 조조위공에 올랐다. 214년에는 자신을 암살하려 한 헌제의 황후 복황후와 그 일가를 처형하고 자신의 딸을 황후 자리에 앉혔다.[1]

215년, 한중 공방전에서 승리하여 한중을 점령하고, 부하 장합하후연을 한중에 주둔시켜 지키게 했다.[1] 합비 전투216년 위왕에 올랐다.[1] 218년에는 경기와 위황의 난을 하후돈조휴에게 3만 군사를 주어 진압하게 하였다.

한편, 유비214년 익주를 점령하고, 215년에는 손권형주를 놓고 분쟁을 벌였다. 유비는 한중이 조조에게 함락되자 위협을 느껴 손권과 국경 조약을 맺었다. 손권은 형주 남부의 장사군, 계양군, 영릉군을 유비에게서 빼앗은 상태였다. 유비는 영릉군을 돌려받는 대가로 손권이 장사군, 강하군, 계양군을 통제하는 것을 인정했다.[5]

217년, 유비의 참모 법정은 조조가 내적인 문제로 수도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하후연을 한중에 남겨두고 익주 정복을 미뤘다고 판단했다. 법정은 하후연과 장합이 유비의 장수들보다 능력이 부족하여 한중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 믿었다. 법정은 유비에게 한중 공격을 촉구하며, 한중 점령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 조조를 공격하고 한나라를 부활시킬 작전 기지 역할
  • 옹주와 량주를 공격하여 세력 확장
  • 유비 정권의 생존에 장기적인 전략적 영향


유비는 법정의 분석에 동의하고 작전을 계획하게 했다.[8]

2. 2. 전략적 중요성

한중은 익주(촉)로 들어가는 북쪽 관문으로, 익주의 안전에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한중을 잃으면 익주 전체가 조조의 위협에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5] 유비 측에서는 법정이 한중 점령의 전략적 이점을 강조하며, 조조에 대항하고 한나라를 부흥시킬 발판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8]

3. 전투의 전개

217년부터 219년까지 유비와 조조는 한중 지역을 두고 전투를 벌였다.

217년, 유비는 양평관으로 진격하며 한중 공략을 시작했다. 장비, 마초 등을 무도군으로 보내 조조 군을 견제하게 했고, 저족의 뇌정은 일곱 부족을 이끌고 유비에게 합류했다.[8][9] 하변 전투에서 유비 군이 고전하고, 장비마초고산에서 조조 군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실패하고 철수했다.[9]

218년 유비는 진식을 보내 마명각을 공격하게 했으나 서황에게 패배했고, 광석에서 장합을 공격했지만 꺾지 못했다.[10][11] 제갈량양홍의 조언을 받아들여 유비에게 지원군을 보냈다.[12]

219년, 유비는 면수를 건너 정군산에 진을 쳤고, 황충법정의 계책에 따라 하후연을 기습 공격하여 죽이고 정군산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13][14][15][16] 장합곽회의 도움으로 군대를 수습하고 유비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조조 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17][18][19] 조조조진을 보내 지원했지만, 서황고상을 격파한 것을 제외하면 전세를 뒤집지 못했다.[20]

219년, 조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한중으로 왔지만, 유비는 방어에 중점을 둔 지구전을 펼치며 정면 대결을 피했다.[21] 황충은 조조 군의 보급을 차단하려 했으나 제때 돌아오지 못했고, 조운은 한수 전투에서 황충을 구출하고 조조 군을 크게 격파했다.[22]

조조의 군대는 유비와 수개월 동안 대치하면서 심각한 군수 문제를 겪었고, 병사들의 탈영도 늘어났다.[21] 결국 조조는 "계륵(雞肋중국어)"이라는 명령을 내렸다.[23] 양수는 닭갈비는 버리기에는 아깝고 먹을 것도 별로 없다는 비유를 들어 조조의 상황을 설명했지만, 조조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양수를 처형했다.[23]

219년 6월, 조조는 장안으로 후퇴하여 한중군을 유비에게 넘겨주었다.[23]

3. 1. 초기 충돌 (217년 ~ 218년)

217년, 유비는 양평관으로 진격하며 본격적인 한중 공략을 시작했다. 장비, 마초, 오란, 뇌동, 임기 등을 무도군으로 보내 조조 군을 견제하게 했다.[8][9] 이들은 하변현에 주둔했고, 저족의 뇌정은 일곱 부족을 이끌고 유비에게 합류했다.[9]

조조 측에서는 하후연이 양평관을, 장합서황은 각각 광석과 마명각을 지켰으며, 조홍과 조휴는 별도의 군대를 이끌고 장비에 대항했다.[9]

하변 전투에서 오란, 뇌동, 임기가 전사하는 등 초기에는 유비 군이 고전했다.[9] 오란은 저족에게 도망쳤으나 그곳의 족장 강단에게 살해당했다.[9] 장비마초고산에서 조조 군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실패하고 철수했다.[9]

다른 전선에서 유비는 양평관에서 하후연과 대치했다. 218년 5월에서 8월 사이, 유비는 진식을 보내 마명각을 공격하게 했으나, 서황에게 패배했다.[10] 유비는 광석에서 장합을 공격했지만, 적을 꺾지 못했다.[11]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유비익주의 수도인 성도에 있는 제갈량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제갈량은 양홍의 "한중은 익주의 목구멍"이라는 조언을 받아들여 유비에게 지원군을 보냈다.[12]

3. 2. 전세 역전 (218년 ~ 219년)

219년, 유비는 면수를 건너 정군산에 진을 쳤다. 황충법정의 계책에 따라 하후연을 기습 공격하여 죽이고, 정군산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13][14][15][16] 장합곽회의 도움으로 군대를 수습하고 유비의 공격을 막아냈지만,[17][18][19] 조조 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조조조진을 보내 지원했지만, 서황고상을 격파한 것을 제외하면 전세를 뒤집지 못했다.[20]

3. 3. 조조의 퇴각 (219년)

219년, 조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한중으로 왔지만, 유비는 방어에 중점을 둔 지구전을 펼치며 정면 대결을 피했다.[21] 황충은 조조 군의 보급을 차단하려 했으나 제때 돌아오지 못했고, 조운은 한수 전투에서 황충을 구출하고 조조 군을 크게 격파했다.[22]

조조의 군대는 유비와 수개월 동안 대치하면서 심각한 군수 문제를 겪었고, 병사들의 탈영도 늘어났다.[21] 결국 조조는 "계륵(雞肋중국어)"이라는 명령을 내렸다.[23] 양수는 닭갈비는 버리기에는 아깝고 먹을 것도 별로 없다는 비유를 들어 조조의 상황을 설명했지만, 조조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양수를 처형했다.[23]

219년 6월, 조조는 장안으로 후퇴하여 한중군을 유비에게 넘겨주었다.[23]

4. 전투의 결과

219년 유비맹달을 보내 방릉군을 공격하여 태수 괴기를 죽이고 점령했다. 또, 유봉을 보내 상용군을 공격하여 태수 신탐의 항복을 받았다. 같은 해 8월, 유비는 스스로를 "한중왕"이라 칭했다.[24]

한편, 조조는 장기에게 명령하여 적족 5만 명을 부풍군과 천수군으로 이주시켰다.[25]

유비의 한중 전투 승리 소식은 형주관우에게 전해졌고, 관우는 이를 틈타 번성 전투를 일으켰다.

4. 1. 유비의 한중 점령

219년 조조가 한중에서 철수하면서, 유비는 한중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24] 유비는 맹달을 보내 자귀현을 거쳐 방릉군을 공격하게 했고, 맹달은 방릉군 태수 괴기를 격파하고 죽였다.[24] 이어서 유비는 양아들 유봉을 보내 면수를 거쳐 상용군을 공격하게 했고, 상용군 태수 신탐은 유봉에게 항복했다.[24] 이로써 유비는 한중 지역뿐만 아니라 상용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219년 8월경, 유비는 신하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한중왕에 즉위하고,[24] 아들 유선을 왕세자로 삼았다. 제갈량을 군사로 삼아 나랏일과 군의 일을 맡도록 하고, 관우, 장비, 조운, 마초, 황충오호대장군으로 임명했다. 허정을 태부로, 법정을 상서령으로 봉했다. 이로써 촉한 건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4. 2. 형주 공방전

유비의 한중 승리 소식은 형주에 주둔하고 있던 관우에게도 전해졌다. 관우는 이 기회를 틈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형주 북부의 조조의 거점을 공격하여 219년 7월 번성 전투를 일으켰다.[24] 그러나 사마의의 진언으로 손권이 유비의 형주를 뺏도록 하였고, 손권이 이에 응하면서 오나라의 명장 여몽이 형초 지방을 공략하고 관우는 반장의 손에 사로잡혀 사망했다.

5. 삼국지연의의 묘사

장비뇌동과 함께 파서를 지키고 있었고, 마초는 하변에서 부하 오란과 임기를 선봉으로 위군을 정탐하게 했다. 오란과 임기는 조홍에게 발각되어 전투가 벌어졌고, 임기는 조홍에게 죽고 오란은 대패했다.[1] 장합은 3만 명을 이끌고 파서에서 장비와 대치했고, 장비는 뇌동과 협공하여 장합을 탕거산 요새로 후퇴시켰다.[1]

장합은 50일 동안 탕거산을 지켰으나, 장비는 위연과 함께 술잔치를 벌이는 척하며 기습하여 장합을 물리쳤다. 장합은 와구관으로 후퇴했으나 2만 명의 군사를 잃었고, 조홍에게 원병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장합은 매복계로 장비군을 공격했으나, 장비와 위연의 계략에 빠져 대패하고 와구관으로 도망갔다. 장비와 위연은 재동산 소로(小路)를 따라 와구관을 몰래 공격해 함락시켰고, 장합은 남은 군사 10명을 데리고 조홍에게 도망쳤다.[1]

장합이 대패하자 조홍은 장합을 죽이려 했으나, 곽회의 만류로 살려주고 가맹관을 치게 했다. 유비황충엄안을 가맹관으로 보냈고, 장합은 황충과 엄안의 협공으로 패배했다. 조홍은 하후상과 한호를 보내 장합을 감시하게 했고, 황충은 교병지계 계책을 써서 가맹관으로 퇴각하고 유봉을 지원군으로 받았다.[1]

황충은 밤에 기습 작전을 펴 하후상과 한호를 무찌르고, 하후상은 천탕산으로 후퇴했다. 황충은 유봉과 함께 천탕산을 공격했고, 한호는 황충에게, 하후덕엄안에게 전사했다. 하후상과 장합은 하후연이 있는 정군산으로 후퇴했다.[1]

황충이 가맹관과 천탕산에서 조조군을 연이어 무찌르자, 유비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한중 정벌에 나섰고, 조조도 40만 대군을 이끌고 한중으로 향했다.[1]

황충은 하후연이 지키는 정군산을 공격하기 위해 법정과 함께 진을 쳤고, 제갈량조운, 유봉, 맹달을 보내 황충을 지원했다. 황충은 하후연과 20합을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고, 하후연은 수비만 하며 장기전을 벌였다. 황충은 법정의 건의로 기습 공격을 하여 하후연을 죽이고 정군산을 점령했다. 장합은 조운의 기습으로 군사를 잃고 한수 기슭에 영채를 세웠다.[1]

하후연이 죽자 조조는 20만 명을 이끌고 서황을 선봉으로 한수에 도착했고, 미창산의 군량과 마초를 북산으로 옮기고 진을 쳤다. 유비는 황충을 정서대장군으로 봉하고 다시 보냈고, 조운과 장익도 보냈다. 황충은 장합과 서황의 함정에 빠졌으나, 조운이 모용렬과 초병을 죽이고 황충과 장저를 구했다. 조조군은 조운과 장익의 매복에 걸려 패배했다.[1]

유봉과 맹달은 미창산의 군량과 마초를 불태웠고, 조조는 남정으로 돌아갔다. 서황과 장합도 본채를 버리고 달아났고, 유비는 조운을 호위장군으로 봉했다. 조조는 서황과 왕평을 보내 한수를 공격했으나, 황충과 조운의 협공으로 패배했고, 왕평은 조운에게 항복하여 편장군이 되었다.[1]

조조는 오계산에서 유비군과 맞섰으나, 제갈량의 계책으로 유비, 황충, 조운의 협공을 받고, 위연장비에게 남정까지 함락당했다. 조조는 양평관으로 물러났다.[1]

유비는 제갈량에게 임무를 부여해 장비와 위연에게 조조군의 군량미를 끊고, 황충과 조운에게 양평관 주변의 산에 불을 지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허저는 식량을 호송하다 장비의 기습을 받아 패배했고, 조조는 양평관이 포위되자 후퇴했다.[1]

조창이 지원군을 이끌고 와 오란을 죽였으나, 유봉맹달에게 격파당했다. 조조는 계륵의 뜻을 알아챈 양수를 처형하고 다시 공격했으나, 마초의 습격과 위연의 화살에 맞아 큰 상처를 입고 방덕의 도움으로 후퇴했다. 조조는 야곡산에서 마초의 복병에게 추격당해 겨우 허창으로 돌아왔다.[1]

참조

[1] Sanguozhi 會魯降,漢中平
[2] Sanguozhi 然卒破杜濩、朴胡
[3] Sanguozhi 九月,巴七姓夷王朴胡、賨邑侯杜濩舉巴夷、賨民來附,於是分巴郡,以胡為巴東太守,濩為巴西太守,皆封列侯。天子命公承制封拜諸侯守相
[4] Huayang Guo Zhi 權破公所署三巴太守杜濩、朴胡、袁約等
[5] Sanguozhi 二十年,孫權以先主已得益州,使使報欲得荊州。先主言:「須得涼州,當以荊州相與。」權忿之,乃遣呂蒙襲奪長沙、零陵、桂陽三郡。先主引兵五萬下公安,令關羽入益陽。是歲,曹公定漢中,張魯遁走巴西。先主聞之,與權連和,分荊州、江夏、長沙、桂陽東屬,南郡、零陵、武陵西屬,引軍還江州
[6] Jin Shu 人苦無足,既得隴右,複欲得蜀
[7] Sanguozhi 以淵行都護將軍,督張郃、徐晃等平巴郡。太祖還鄴,留淵守漢中,即拜淵征西將軍
[8] Sanguozhi 二十二年,正說先主曰:「曹操一舉而降張魯,定漢中,不因此勢以圖巴、蜀,而留夏侯淵、張郃屯守,身遽北還,此非其智不逮而力不足也,必將內有憂偪故耳。今策淵、郃才略,不勝國之將帥,舉衆往討,則必可克之,克之日,廣農積穀,觀釁伺隙,上可以傾覆寇敵,尊獎王室,中可以蠶食雍、涼,廣拓境土,下可以固守要害,為持乆之計。此蓋天以與我,時不可失也。」先主善其策,乃率諸將進兵漢中,正亦從行
[9] Sanguozhi 備遣張飛屯固山,欲斷軍後。衆議狐疑,休曰:「賊實斷道者,當伏兵潛行。今乃先張聲勢,此其不能也。宜及其未集,促擊蘭,蘭破則飛自走矣。」洪從之,進兵擊蘭,大破之,飛果走
[10] Sanguozhi 備遣陳式等十餘營絕馬鳴閣道,晃別征破之,賊自投山谷,多死者
[11] Sanguozhi 劉備屯陽平,郃屯廣石。備以精卒萬餘,分為十部,夜急攻郃。郃率親兵搏戰,備不能克
[12] Sanguozhi 漢中則益州咽喉,存亡之機會,若無漢中則無蜀矣,此家門之禍也。方今之事,男子當戰,女子當運,發兵何疑
[13] Sanguozhi '[建安]二十四年正月,備夜燒圍鹿角。淵使張郃護東圍,自將輕兵護南圍。備挑郃戰,郃軍不利。淵分所將兵半助郃,為備所襲,淵遂戰死'
[14] Sanguozhi 建安二十四年,於漢中定軍山擊夏侯淵。淵衆甚精,忠推鋒必進,勸率士卒,金鼓振天,歡聲動谷,一戰斬淵,淵軍大敗
[15] Sanguozhi 二十四年,先主自陽平南渡沔水,緣山稍前,於定軍、興勢作營。淵將兵來爭其地。正曰:「可擊矣。」先主命黃忠乘高鼓譟攻之,大破淵軍,淵等授首
[16] Sanguozhi 二十四年春,自陽平南渡沔水,緣山稍前,於定軍山勢作營。淵將兵來爭其地。先主命黃忠乘高鼓譟攻之,大破淵軍,斬淵及曹公所署益州刺史趙顒等
[17] Sanguozhi 其明日,备欲渡汉水来攻。诸将仪众寡不敌,备便乘胜,欲依水为陈以拒之
[18] Sanguozhi 淮曰:“此示弱而不足挫敌,非算也。不如远水为陈,引而致之,半济而后击,备可破也。”既陈,备疑不渡,淮遂坚守,示无还心
[19] Sanguozhi 旣陣,備疑不渡,淮遂堅守,示無還心
[20] Sanguozhi 是時,夏侯淵沒於陽平,太祖憂之。以真為征蜀護軍,督徐晃等破劉備別將高詳於陽平
[21] Sanguozhi 及曹公至,先主斂眾拒險,終不交鋒,積月不拔,亡者日多
[22] Zhao Yun Bie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夏侯淵敗,曹公爭漢中地,運米北山下,數千萬囊。黃忠以為可取,雲兵隨忠取米。忠過期不還,雲將數十騎輕行出圍,迎視忠等。值曹公揚兵大出,雲為公前鋒所擊,方戰,其大衆至,勢逼,遂前突其陣,且鬬且却。公軍散,已復合,雲陷敵,還趣圍。將張著被創,雲復馳馬還營迎著。公軍追至圍,此時沔陽長張翼在雲圍內,翼欲閉門拒守,而雲入營,更大開門,偃旗息鼓。公軍疑雲有伏兵,引去。雲雷鼓震天,惟以戎弩於後射公軍,公軍驚駭,自相蹂踐,墮漢水中死者甚多
[23] 九州春秋 時王欲還,出令曰‘雞肋’,官屬不知所謂。主簿楊修便自嚴裝,人驚問修:‘何以知之?’修曰:‘夫雞肋,棄之如可惜,食之無所得,以比漢中,知王欲還也
[24] Sanguozhi 建安二十四年,命達從秭歸北攻房陵,房陵太守蒯祺為達兵所害。達將進攻上庸,先主陰恐達難獨任,乃遣封自漢中乘沔水下統達軍,與達會上庸。上庸太守申耽舉衆降
[25] Sanguozhi 太祖將拔漢中守,恐劉備北取武都氐以逼關中,問既。既曰:「可勸使北出就穀以避賊,前至者厚其寵賞,則先者知利,後必慕之。」太祖從其策,乃自到漢中引出諸軍,令既之武都,徙氐五萬餘落出居扶風、天水界
[26] Xiangyang Ji 钦从祖祺妇, 即诸葛孔明之大姊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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