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혼다 요이쓰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혼다 요이쓰는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이자 교육자이다. 1848년 히로사키 번에서 태어나, 유학을 통해 영어를 배우고 기독교에 입교했다. 히로사키 교회 목사로 활동하며 자유민권운동에 참여했고, 아오모리현 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미국 유학 후, 정계 진출을 포기하고 기독교 전도에 헌신했으며, 아오야마가쿠인 원장을 거쳐 일본 메소디스트 교회 초대 감독을 지냈다. 그는 1912년 사망했으며, 그의 업적을 기리는 혼다 기념 교회가 설립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막말 히로사키번 사람 - 쓰가루 쓰구아키라
    쓰가루 쓰구아키라는 우토번 번주 아들로 태어나 히로사키 번주 양자가 되었고, 바쿠마쓰 시대에 삿초 동맹과 오우에쓰 열반 동맹에 참여했으며, 메이지 시대에는 히로사키 지번사와 백작, 사업가, 와카 시인으로 활동했다.
  • 막말 히로사키번 사람 - 이치노헤 효에
    이치노헤 효에는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세운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으로, 대장까지 지냈으며, 은퇴 후에는 학습원 원장과 메이지 신궁의 궁사를 지냈다.
  •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 교수 - 시라카와 마사아키
    시라카와 마사아키는 일본의 경제학자이자 금융인으로,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일본은행 총재를 역임하며 세계 금융 위기 등 여러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고, 퇴임 후 학계와 재계에서 활동했다.
  •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 교수 - 아키미쓰 준
    아키미쓰 준은 일본의 물리학자이며, 이붕화 마그네슘에서 39K의 초전도 현상을 발견하여 주목받았고, 초전도 과학기술상 등을 수상했다.
혼다 요이쓰
기본 정보
씨명본다 요이쓰
용일
이명도쿠조
1918년
1918년
출생일1849년 1월 7일
출생지[[파일:Japanese crest Tugaru Botann.svg|25x20px]] 무쓰국히로사키번 영내 (현재 아오모리현히로사키시)
사망일1912년 3월 26일
사망지일본 나가사키현나가사키시(객사)
국적[[파일:Japanese crest Tugaru Botann.svg|25x20px]] 히로사키번 → 일본
묘지다마 묘원
학력
출신교바라 학원, 브라운 학원, 드루 신학교
직업
직업목사, 교육자, 교회 감독
가족
본다 하치로자에몬 히사모토
도모
배우자나가미네 사다 (후처)
자녀본다 아이오 (목사)

2. 생애

혼다 요이쓰는 에도 시대 말기인 1848년 히로사키 번의 번사 집안에서 태어나 번교인 게이코칸에서 한학과 유학을 배웠다. 막부 말기의 혼란 속에서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처음에는 오우에쓰 열번 동맹 측에 가담하려 했으나 번의 방침 전환에 반발하여 탈번, 쇼나이 번에 합류하여 아키타 전쟁에 참전하는 등 격동의 시기를 보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영어 학습을 위해 요코하마로 유학하여 S. R. 브라운, J. H. 바라 등 선교사들에게 배우며 기독교에 입문했다. 그는 우에무라 마사히사, 오시카와 호우기 등과 함께 일본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인 일본기독공회 설립에 참여했으며, 1872년 바라에게 세례를 받았다.

고향 히로사키로 돌아와 폐교 위기의 동오기숙을 재건하고 학원장을 맡았으며, 1876년에는 동북 지방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인 히로사키 교회를 설립하여 초대 목사를 겸임했다. 이 시기 존 잉그 선교사의 영향으로 감리교로 전환했으며, 그의 지도를 받은 히로사키 밴드는 이후 여러 분야에서 활약했다. 혼다는 자유민권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1878년 초대 아오모리현 회 의장으로 선출되는 등 지역 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했으나, 종교인의 정치 참여 금지 규정으로 인해 정계 진출을 고민하게 된다.

1886년 센다이 미이 교회 목사로 부임했으나 곧 도쿄로 옮겨 도쿄 에이와 학교(훗날 아오야마가쿠인) 교사와 쓰키지 미이 교회 목사 등으로 활동했다. 1888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드루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유학 중 겪은 열차 사고를 계기로 정계 진출의 뜻을 완전히 접고 기독교 전도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1890년 귀국 후 도쿄 에이와 학교 교장(이후 아오야마가쿠인 제2대 원장)에 취임하여 17년간 재직하며 학교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Sincerity'(지성)와 'Simplicity'(질직)를 갖춘 인물, 즉 'Man' 양성을 교육 목표로 제시했다. 복음동맹회 회장을 맡기도 했으나, 신학 논쟁으로 친구 에비나 단조가 추방되자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러일 전쟁 시기에는 기독교청년회 동맹 위원장으로서 종군 포교 활동을 지원했으며, 1904년에는 일본의 입장을 알리고 한국 주재 서양 선교사들과 교류한다는 명분으로 나카타 시게하루와 함께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1905년에는 러일 전쟁 관련 일본의 입장을 선전하기 위해 이부카 가이지노스케와 함께 미국과 유럽을 순방했다.

1907년 일본 내 감리교 교파들을 통합하여 일본 메소디스트 교회를 설립하고 초대 감독으로 선출되어 일본 감리교회의 자립과 발전에 기여했다. 1910년 에든버러 세계 선교 대회에 일본 대표로 참석하는 등 국제적인 활동도 이어갔다. 1912년 내무차관 토코나미 타케지로 주도로 열린 삼교회동에 기독교 대표로 참석하여 신토, 불교와 동등한 지위를 인정받는 데 기여했다. 같은 해 3월, 나가사키 시에서 연회 참석 중 병세 악화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아오야마가쿠인에서 거행되었으며, 아오야마 영원을 거쳐 다마 영원에 안장되었다.

2. 1. 히로사키 번사 시대 (1848년 - 1870년)

혼다 요이쓰의 선조는 도쿠가와 가문의 후다이 혼다 씨 일족이다.

그는 1848년(가에이 원년) 히로사키 번의 번사로 300석을 받던 혼다 하치로자에몬 히사모토 (1823년 - 1896년)와 혼다 토모의 장남으로 히로사키성 아래 자이후초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토쿠조(篤三)였다. 조부인 토사쿠 히사사다(藤作 久敬)는 번의 요직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1858년, 10세부터 히로사키 번의 번교인 게이코칸(稽古館)에서 한학, 유학을 배웠다. 1865년(게이오 원년), 17세에 테마와리구미(手廻組) 사(士)로 출사하여 번교의 시칸(司監)이 되었다.[3] 혼다는 양명학, 란학, 영학, 병법, 검술 등 다양한 학문을 익혔으며, 특히 병법과 검술에 능통하여 막부 말기의 혼란한 정국 속에서 활동했다.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1868년(게이오 4년) 6월 히로사키 번은 혼다와 기쿠치 구로(菊池 九郎) 등을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참여시키기 위해 시라이시성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11일, 교토 유수(留守居) 역할을 하던 니시칸 헤이마(西館 平馬)가 고노에 가문으로부터 존왕파로 전향하라는 명령서를 가지고 돌아오면서 번의 입장이 급변했다. 히로사키 번은 사쓰마 번·조슈 번 동맹 측(신정부군)에 서기로 결정했다.[4]

혼다, 기쿠치, 이시고오카 잇토쿠(石郷岡 一徳), 쿠도 미네지로(工藤 行幹), 오카 헤이이치(岡 平一) 등은 히로사키 번의 결정이 열번 동맹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는 배신 행위라며 강하게 항의했다. 이들에게는 하코다테로의 전속 명령이 내려졌으나, 혼다 등은 번주 쓰가루 쓰구아키라(津軽 承昭)와 구로이시 번주 쓰가루 쓰구미치(津軽 承叙)의 만류를 뿌리치고 쇼나이 번에서 온 사자와 함께 탈번했다. 쇼나이 번으로 가서 번의 배신을 사죄하고 할복하려 했으나, 쇼나이 번사들의 설득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후 9월 중순, 히로사키 번 병사 포로들로 부대를 편성하여 쇼나이 번 군에 가담, 아키타 전쟁에 참전했다. 이 과정에서 사쓰마 번의 사이고 주도가 지휘하는 사쓰마군 3번 소대와 교전하기도 했다. 쇼나이 번이 항복한 후 히로사키 번으로 귀환했다. 전쟁 후 히로사키 번은 그들의 탈번 행위를 신의를 지키려 한 "의거"(義挙)로 평가하며 귀국을 허락했다.

1869년 하코다테 전쟁에서는 번의 명령에 따라 아오모리 항에서 참모를 맡았다.

2. 2. 요코하마 유학 및 기독교 입교 (1870년 - 1873년)

유신 이후인 1870년(메이지 3년), 영어를 배우기 위해 요코하마로 유학을 갔다. 요코하마 슈분칸(横浜修文館)에서는 네덜란드 개혁파의 미국인 선교사인 S. R. 브라운 등에게 영어를 배웠다. 1871년에는 제임스 바라가 작은 회당에서 열었던 바라 학원에 입학했다. 바라 학원생이었던 혼다, 우에무라 마사히사, 오시카와 호우기는 바라에게 기도회를 열어달라고 요청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다음 해인 1872년 3월 10일, 일본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인 일본기독공회가 설립되었다[5]. 혼다는 잠시 히로사키(弘前)로 귀향했다가, 자비로 유학하여 1872년 5월에 바라 학원으로 복귀했다. 복귀 직후인 5월 13일, 일본기독공회의 임시 목사가 된 J. H. 바라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후 바라 학원의 학생들과 함께 1873년에 개교한 S. R. 브라운의 사숙인 브라운 학원에 입학하여 브라운에게 영어를 배웠다.

2. 3. 히로사키 교회 및 동오의숙 시대 (1873년 - 1886년)

1881년경의 혼다 요이치


1873년, 폐번치현의 영향으로 문을 닫았던 동오기숙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고향인 히로사키로 돌아와 그 해 12월부터 학원장을 맡았다. 당시 동오기숙의 교사로는 진다 스테미, 키쿠치 군노스케(키쿠치 쿠로의 동생), 가와무라 케이조, 존 잉그 등이 있었다.[6]

학원장 활동과 더불어, 1876년에는 일본 동북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프로테스탄트 교회인 히로사키 교회를 존 잉그와 함께 세우고 초대 목사를 겸임했다. 잉그가 감리교 선교사였기 때문에, 그의 영향으로 혼다와 히로사키 교회는 감리교로 전환했다. 히로사키 교회의 초기 구성원들, 이른바 히로사키 밴드로 불리는 야마가 모토지로, 고사카 케이노스케, 야마다 토라노스케, 사토 아이마로, 진다 스테미 등은 이후 전도, 교육, 정치, 산업,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7]

히로사키 교회를 이끌면서 자유민권운동에도 참여하여 지도적인 위치에 섰다. 1878년 처음으로 아오모리현 의회가 열렸을 때, 초대 아오모리현 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879년에는 국회 청원서가 제출되었고, 1881년에는 국회 개설을 약속하는 조칙이 내려졌다. 혼다의 지지자들은 그가 제1기 중의원 의원이 되기를 바랐고, 혼다 자신도 이를 원했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종교인이 국회의원이 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혼다는 정치가의 길을 걸을지 종교인의 길을 걸을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8]

2. 4. 미국 유학 및 센다이 부임 (1886년 - 1890년)

1886년 8월, 센다이에 설립된 미이 교회(美以教会, 현 일본 기독교단 센다이 고쿄 교회)의 초대 목사로 부임했다.[9] 이듬해인 1887년 4월 연회에서 혼다는 센다이 미이 교회 폐지안을 제출하여 가결되었으나, 스즈키 기이치(鈴木義一)와 H·W·슈워츠의 요청으로 교회는 존속하게 되었다. 같은 해 7월, 혼다는 도쿄 에이와 학교(東京英和学校)로 자리를 옮겼다.

도쿄에서는 쓰키지 미이 교회(현 일본 기독교단 긴자 교회)의 장로(정교사)가 되었고, 아오야마 미이 교회 목사와 도쿄 에이와 학교의 교사로 일했다. 1888년에는 나가미네 사다(長嶺サダ, 혼다 사다코(本多貞子))와 재혼했으며, 같은 해 9월부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국 유학 중,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턴 교외에서 친구 이와무라 토오루(岩村透)와 함께 철교 위를 걷다가 열차에 치일 뻔한 사고를 겪었다. 이와무라가 소리쳤지만 혼다는 열차가 코앞에 닥칠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고, 순간적으로 철교 침목에 몸을 숙여 간신히 피했다. 열차는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으며, 상의 끝자락만 찢어진 채 목숨을 건졌다. 이 경험을 계기로 그는 정계 진출의 꿈을 완전히 접고 기독교 전도에 평생을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이후 드루 신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했다.[10]

2. 5. 아오야마 가쿠인 원장 시대 (1890년 - 1907년)

1890년 6월 귀국 후, 도쿄 에이와 학교 교주(교장)에 취임했다. 1894년에는 학교 이름을 아오야마가쿠인으로 바꾸고 제2대 원장이 되어, 이후 17년간 원장직을 맡으며 학원 발전의 기초를 다졌다. 그는 "바라건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학교에서 소위 Man을 배출하게 하소서"라는 말을 남기며, 아오야마가쿠인이 "Man"을 키우는 학교임을 강조했다. 여기서 "Man"은 Sincerity(지성 - 지극히 성실함)와 Simplicity(질직 - 꾸밈없이 성실함) 두 가지 자질을 갖춘 인물을 의미하며, 이 정신은 학교의 모토인 "땅의 소금·세상의 빛"으로 이어졌다.

1897년 7월 1일 열린 제9회 복음동맹회 임원 선거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11] 그러나 재임 중 우에무라·에비나 기독교 논쟁이 발생했고, 1902년 4월 복음동맹회 총회에서는 "본 동맹이 복음주의로 인정하는 것은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완전한 규범으로 삼고, 사람과 그 구원을 위해 세상에 내려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는 자를 말한다"[12]는 선언이 채택되었다. 이로 인해 에비나 단조는 복음동맹회에서 추방되었고, 혼다는 친구인 에비나를 추방하게 된 책임을 지고 회장직을 사임했다.[13]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혼다는 기독교청년회 동맹 위원장으로서 복음동맹회 위원장 코자키 히로미치와 함께 기독교 각 파의 연합 활동을 주도했다. 전시 전도부를 설치하고, 종군 포교사나 군대 위문사를 파견하여 군 주둔지에서 전도 활동을 벌였으며, 군인용 소책자를 국내외에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이끌었다.

같은 해 5월, 대일본복음동맹회는 혼다와 나카타 시게하루를 위원으로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한국 기독교회에 서신을 보냈다. 서신에서 동맹회는 러일 전쟁을 한일 양국의 안전과 동양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 규정하며, 전쟁이 한국 영토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일본이 위원을 파견하여 위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혼다는 메소디스트 에피스코팔의 일본 연회가 임명한 한국 전도위원회 위원장 자격도 겸하여 나카타 시게하루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5월 14일 지쿠고가와마루에 승선하여 16일 부산에 상륙했고, 목포, 인천을 거쳐 18일 경성(현 서울)에 도착했다. 경성에서는 보병 제24연대 제1대대(연대장 야마모토 데이지로 대좌)에서 나카타와 함께 설교했다. 이후 각지를 순방하며 6월 10일에는 황주, 14일에는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에서 의주로 향하는 나카타와 잠시 헤어져 순안을 방문한 뒤 원산으로 향했다.

이 한국 방문의 목적은 러일 전쟁을 백인 대 황인종의 전쟁으로 보는 국제 여론에 대해 일본의 입장을 변호하고, 한국에 주재하던 서양 선교사들에게 일본인 중에도 기독교인이 있음을 알리기 위한 것으로 평가된다. 동행했던 나카타 시게하루는 당시 혼다에 대해 "선생님은 무관이나 관리에게 매우 정중하게 예의 바르게 대하고, '그들은 이렇게 해 두면 기뻐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숙소에 눕자마자 곧 잠들었다"고 회고했다.[14]

1905년에는 러일 전쟁과 관련하여 일본의 입장을 선전하기 위한 민간 사절로서 이부카 가이지노스케와 함께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했다.[15]

2. 6. 일본 감리교회 감독 시대 (1907년 - 1912년)

만년의 혼다 요이쓰


일본 내에서 통일된 조직으로 기독교 선교를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에 따라, 1907년 일본 메소디스트 교회를 설립했다. 같은 해 아오야마가쿠인 원장직을 사임하고 초대 감독으로 취임하여 일본 독자적인 선교 조직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1909년 (메이지 42년)에 열린 선교 개시 50주년 기념회에서는 감사 순서를 담당했으며, 제10강연회에서 "과거 및 장래에 있어서 선교사의 사업"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그의 아내 사다코 역시 이 행사에서 강연자로 나섰다.

1910년 (메이지 43년)에는 영국 에든버러에서 개최된 세계 선교 대회에 이부카 가지노스케, 하라다 스케 등과 함께 일본 대표로 참석하여 국제적인 교류에도 힘썼다.

1912년 (메이지 45년) 2월 25일, 당시 내무차관이었던 토코나미 타케지로의 주도로 신토, 불교, 기독교 세 종교 대표와 정부 관계자가 모이는 삼교회동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정부 측에서 하라 타카시 내무대신 등이 참석했고, 기독교 대표로는 혼다를 포함하여 미야가와 쓰네테루, 치바 유고로, 이부카 가지노스케 등 7명이 참석했다. 다음 날 세 종교 대표들은 다시 모여 결의안을 검토했으며, 기독교 측은 이 회동을 통해 신토 및 불교와 동등한 지위를 인정받게 된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16]

같은 해 3월 26일, 메소디스트 교회 서부 연회 참석을 위해 나가사키 시에 머물던 중, 양쪽 폐의 기관지 카타르와 장 출혈 등의 병세 악화로 사망했다. 4월 12일 밤, 아오야마가쿠인의 홍도관에서 추도회가 열렸고, 우에무라 마사히사, 나카다 시게하루 등 많은 이들이 참석하여 고인을 기렸다. 그의 묘소는 처음에 아오야마 영원에 마련되었으나, 이후 다마 영원으로 이장되었다. 또한 그의 고향인 히로사키 시의 혼교지에도 묘비가 세워져 있다.[17]

3. 가족 및 제자

(내용 없음)

3. 1. 가족


  • 혼다 요이오 - 야마가타 미이 교회 목사
  • 남동생: 니시타테 타케오 - 니시타테 켄큐의 양자

3. 2. 제자


  • 야마가 하키노신
  • 진다 스테미
  • 야마가 모토지로
  • 고사카 게이노스케
  • 히라타 헤이조
  • 후지타 타다시
  • 사토 아이마로
  • 이토 시게루
  • 야마다 토라노스케
  • 나카타 시게하루
  • 시라토 하치로

4. 저서

wikitext

연도제목저자/편집자출판사비고
1878동오의숙 일람혼다 요이치 발행
1892감리교 교리 및 조례메소디스트 출판사1894년 재판/개정판 발행
1892감리교 예문메소디스트 출판사
1894미이 교회 조항 및 총칙메소디스트 출판사
1894미이 교회 문답메소디스트 출판사
1894선전 조칙 속해 문답청한 사건 기독교도 동지회
1894군인 필요 정신의 양식메소디스트 출판사
1895강연집 세계의 오순절 설원저자: 소보른메소디스트 출판사
1895우리는 먼저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원저자: 워렌메소디스트 출판사
1895강연집 신의 영원원저자: 발로스메소디스트 출판사
1895기독교의 대진리원저자: 앰블러메소디스트 출판사
1899일반 교육에 관한 문부성 훈령 제12호에 대한 운동 전말 개략 및 의견교문관
1907혼다 요이치 선생님 설교집백조사문각
1908일본 메소디스트 교회 례문교문관1991년 복제판 발행
1909일본 메소디스트 교회 교의 및 조례교문관1992년 복제판 발행
1918혼다 요이치 선생님 유고편집: 다카기 미즈타로일본 기독교 흥문 협회사후 출간


참조

[1] 서적 わが音楽 わが人生 岩波書店 1995
[2] 서적 青森県百科事典 東奥日報社 1981-03
[3] 문서 藩校稽古館の取締役
[4] 서적 奥羽越列藩同盟の基礎的研究
[5] 웹사이트 日本初のプロテスタント教会のスケッチ図をバークガフニ環境・建築学部長が発見 https://nias.ac.jp/n[...] 長崎総合技術大学
[6] 서적 中田重治伝
[7] 서적 日本キリスト教歴史大事典
[8] 서적 中田重治伝
[9] 문서 美以はメソジスト監督の意
[10] 서적 キリスト教逸話例話集
[11] 서적 本多庸一伝
[12] 서적 其の時代5巻
[13] 서적 本多庸一伝
[14] 서적 中田重治伝
[15] 서적 本多庸一 1968
[16] 서적 프로테스탄트 교회 사
[17] 웹사이트 本多庸一 http://www6.plala.or[...] 2024-12-09
[18] 서적 아오모리 현 백과사전 도오 일보사 198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