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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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패는 전한 시대의 관료로, 율령에 능통했으며 무제 때 돈을 바쳐 관직에 진출했다. 형제의 죄로 파면된 후, 곡식을 바쳐 좌풍익의 졸사가 되었으나 청렴함으로 인정받아 하동의 균수장, 하남 태수의 승을 거쳐 승승장구했다. 소제 시기 온화한 통치로 명성을 얻었고, 선제 때 정위정을 거쳐 승상 장사를 지냈다. 이후 하후승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하기도 했지만, 양주 자사, 영천 태수를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원강 3년에는 경조윤으로 승진했으나 영천 태수로 복귀했고, 봉황이 나타나자 관내후에 봉해졌다. 오봉 2년에는 어사대부가 되었으며, 이듬해 승상이 되어 건성후에 봉해졌다. 감로 3년에 사망했으며, 시호는 정(定)이다.
황패는 율령을 익혀 무제 때 돈을 내고 관직에 진출했으나, 형제가 죄를 지어 파면되었다. 이후 다시 곡식을 바쳐 좌풍익의 졸사(卒史)가 되었으나, 재물로 벼슬을 얻은 사람을 천대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장부 처리 능력이 뛰어나고 청렴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법률에도 밝았으며, 온화한 성품으로 사람들을 잘 다스려 하동 균수장(均輸長)·하남태수의 승(丞)으로 출세했고, 크게 신임을 받았다. 소제 즉위 후에도 온화한 통치로 명성을 떨쳤다.[1]
황패는 젊은 시절 양가에서 유요(遊徼)를 지냈다. 어느 날 관상을 잘 보는 사람과 함께 나갔는데, 그 사람이 어떤 여자를 보고 부귀해질 상이라고 말했다. 황패가 알아보니 그 여자는 마을 무당의 딸이었는데, 황패는 바로 혼인하고 평생을 함께하였다. 결국 황패는 승상이 되어 두릉으로 이주하였다.
황패는 백성을 직접 다스리는 데는 능숙했지만, 승상으로서 백관을 통솔하는 능력은 위상, 병길, 우정국에 미치지 못했다. 감로 3년(기원전 51년)에 사망하여 정후(定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아들 황상이 건성후를 이었고, 황상의 아들 충후 황보, 황보의 아들 황충으로 이어졌으나, 왕망이 패배하면서 가문이 단절되었다.
黃霸|황패중국어는 처음 고향에서 유협(游徼)으로 활동했다. 관상가와 함께 외출했을 때 관상가가 어떤 무녀를 보고 "저 여성은 부귀해질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황패는 그 무녀를 아내로 맞이했다.[1]
2. 생애
선제는 황패의 명성을 듣고 정위정(廷尉正)에 임명하였다. 이후 수(守)승상장사가 되었으나, 장신소부 하후승이 무제의 종묘 건립에 반대한 일에 연루되어 함께 옥에 갇혔다. 이때 옥중에서 하후승에게서 《상서》를 배웠고, 3년 후 석방되었다. 좌풍익 송기가 현량(賢良)으로 천거하여 양주자사로 복직하였고, 3년 후 고제(高第)로 영천태수로 승진하였다.[1]
영천 태수로 재임하면서 황패는 가난한 이들이 닭과 돼지를 길러 생계를 잇도록 하였고, 관리와 백성들은 그의 다스림을 신묘하다고 칭송하였다. 간사한 자는 군을 떠났고, 도적은 줄어들었다.[1]
원강 3년(기원전 63년), 치적을 인정받아 수(守)경조윤으로 승진하였으나 병력 이동에 늑장을 부린 죄로 영천 태수로 되돌려졌다. 황패는 영천을 총 8년간 다스렸다.[1]
신작 4년(기원전 58년), 각지에서 봉황이 나타났는데 영천에서 가장 많이 관찰되었다. 선제는 조서를 내려 황패를 치하하고 관내후에 봉하였고, 몇 달 후 태자태부에 임명하였다.[1]
오봉 2년(기원전 56년), 황패는 어사대부가 되었다. 이듬해 승상으로 승진하였고, 건성후(建成侯)에 봉해져 열후의 반열에 올랐다. 황패는 백성을 직접 다스리는 데 능숙했지만, 백관을 호령하는 데에는 위상·병길·우정국에 미치지 못하였다.
감로 3년(기원전 51년)에 황패가 죽으니 시호를 정(定)이라 하였고, 작위는 아들 황상이 이었다. 손자 황보는 위위를 지냈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황패는 율령을 공부하였고, 무제 때 돈을 내고 관직에 진출하여 시랑알자(侍郞謁者)가 되었다. 그러나 형제가 죄를 지어 파면되었다. 이후 다시 곡식을 바쳐 좌풍익의 졸사(卒史)가 되었다. 좌풍익에서는 재물로 관직을 얻은 사람을 천대하여 황패에게 돈과 곡식을 계산하는 일을 맡겼지만, 장부를 정확히 처리하고 청렴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1] 황패는 사람의 마음을 잘 파악하고 법률에도 밝았으며, 온화한 성품으로 사람들을 잘 다스렸다. 이후 하동의 균수장(均輸長)·하남태수의 승(丞)으로 승진하여 크게 신임을 받았다.
소제 즉위 후에도 지방에서는 법률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황패는 온화한 통치를 하여 명성을 떨쳤다. 선제는 황패의 명성을 듣고 정위정(廷尉正)에 임명하였다. 이후 수(守)승상장사가 되었으나, 장신소부 하후승이 무제의 종묘 건립에 반대한 일에 연루되어 함께 옥에 갇혔다. 이때 옥중에서 하후승에게서 《상서》를 배웠고, 3년 후 석방되었다. 좌풍익 송기가 현량(賢良)으로 추천하여 양주자사로 복직하였고, 3년 후 고제(高第)로 영천태수로 승진하였다.[1]
2. 2. 지방관으로서의 치적
황패는 율령을 익혔고, 무제 때 돈을 바쳐 관직을 얻었으나 형제가 죄를 지어 파면되었다. 이후 다시 곡식을 바쳐 좌풍익의 졸사(卒史)가 되었으나, 재물로 벼슬을 얻은 사람을 천대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장부 처리 능력이 뛰어나고 청렴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사람의 마음을 잘 살피고 법률에 밝았으며, 온화한 성품으로 사람들을 잘 다스려 하동의 균수장(均輸長)·하남태수의 승(丞)으로 출세하였고, 크게 신임을 받았다. 소제 즉위 후에도 온화한 통치로 명성을 떨쳤다.[1]
선제는 황패의 명성을 듣고 정위정(廷尉正)에 임명하였다. 이후 수(守)승상장사가 되었으나, 장신소부 하후승이 무제의 종묘 건립에 반대한 일에 연루되어 함께 하옥되었다. 이때 옥중에서 하후승에게서 《상서》를 배웠고, 3년 후 석방되었다. 좌풍익 송기가 현량(賢良)으로 천거하여 양주자사로 복직하였고, 3년 후 고제(高第)로 영천태수로 승진하였다.[1]
영천을 다스릴 때, 황패는 가난한 이들로 하여금 닭과 돼지를 길러 삶에 보태게 하였다. 군의 일은 무엇이든 알았고, 관리와 백성들은 황패의 다스림이 신묘하다고 칭송하였다. 간사한 자는 군을 떠났고, 도적의 수는 날로 줄어들었다.[1]
원강 3년(기원전 63년), 치적을 인정받아 수(守)경조윤으로 승진하였으나 병력 이동에 늑장을 부린 죄로 영천태수로 되돌려졌다. 황패는 영천을 총 8년간 다스렸다.[1]
신작 4년(기원전 58년), 각지에서 봉황이 나타났는데, 영천에서 가장 많이 관찰되었다. 선제는 조서를 내려 황패를 치하하고 관내후에 봉하였고, 몇 달 후 태자태부에 임명하였다.[1]
2. 3. 중앙 관료로서의 활동과 죽음
무제 때 돈을 바쳐 관직을 얻어 시랑알자(侍郞謁者)가 되었으나, 형제가 죄를 지어 파면되었다. 이후 다시 곡식을 바쳐 좌풍익의 졸사(卒史)가 되었다. 좌풍익에서는 재물로 벼슬을 얻은 사람을 천대하였기 때문에 황패는 돈과 곡식을 계산하는 일을 맡았지만, 장부가 정확하고 스스로 청렴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황패는 사람의 마음을 잘 살피는 한편 법률에도 밝았고, 사람됨이 온화하여 사람들을 잘 다스렸다. 이후 하동의 균수장(均輸長)·하남태수의 승(丞)으로 출세하였고, 크게 신임을 받았다. 무제가 죽고 소제가 즉위한 후에도 지방에서는 법률을 엄격히 적용하여 통치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황패만은 온화하였기 때문에 명성을 떨쳤다.
소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선제는 황패의 명성을 듣고 정위정(廷尉正)에 임명하였다. 이후 수(守)승상장사가 되었으나, 장신소부 하후승이 무제의 종묘 건립에 반대한 일에 연루되어 함께 하옥되었다. 이때 옥중에서 하후승에게서 《상서》를 배웠고, 3년 후 석방되었다. 좌풍익 송기가 현량(賢良)으로 천거하여 양주자사로 복직하였고, 3년 후 고제(高第)로 영천태수로 승진하였다.[1]
영천을 다스릴 때, 황패는 가난한 이들로 하여금 닭과 돼지를 길러 삶에 보태게 하였다. 군의 일은 무엇이든 알았고, 관리와 백성들은 황패의 다스림이 신묘하다고 칭송하였다. 간사한 자는 군을 떠났고, 도적의 수는 날로 줄어들었다.
원강 3년(기원전 63년), 치적을 인정받아 수(守)경조윤으로 승진하였으나 병력 이동에 늑장을 부린 죄로 영천태수로 되돌려졌다. 황패는 영천을 총 8년간 다스렸다.
신작 4년(기원전 58년), 각지에서 봉황이 나타났는데, 영천에서 가장 많이 관찰되었다. 선제는 조서를 내려 황패를 치하하고 관내후에 봉하였고, 몇 달 후 태자태부에 임명하였다.
오봉 2년(기원전 56년), 황패는 어사대부가 되었다. 이듬해에 승상으로 승진하였고, 건성후(建成侯)에 봉해져 열후의 반열에 올랐다. 황패는 백성들을 직접 다스리기를 잘하여, 백관을 호령하는 데에는 위상·병길·우정국에 미치지 못하였다.
감로 3년(기원전 51년)에 죽으니 시호를 정(定)이라 하였고, 작위는 아들 황상이 이었다. 손자 황보는 위위를 지냈다.
3. 일화
4. 평가
『한서』 순리전에서는 황패가 백성을 다스리는 능력은 한나라 건국 이래 최고였다고 평가한다.
5. 가계
황패의 아들은 황상(黃賞)으로 건성후를 이었고, 황상의 아들 황보(黃輔), 황보의 아들 황충(黃忠)으로 이어졌지만, 왕망이 패하면서 대가 끊겼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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