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9~1800년 콘클라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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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99년에서 1800년까지 열린 콘클라베는 교황 비오 6세의 사망 이후 새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베네치아에서 개최되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교황령이 붕괴되고 추기경들이 로마에서 추방된 상황에서, 콘클라베는 1798년 교황 비오 6세의 칙령에 따라 베네치아의 산 조르조 수도원에서 열렸다. 34명의 추기경이 참여한 가운데, 오스트리아의 영향력과 후보 간의 교착 상태로 인해 선출 과정이 길어졌다. 결국, 1800년 3월 14일, 이몰라 주교인 바르나바 니콜로 마리아 루이지 키아라몬티가 교황 비오 7세로 선출되었다. 이후 비오 7세는 로마로 돌아와 교황령을 재건하고 나폴레옹과의 관계를 맺었으나, 결국 나폴레옹에 의해 유폐되는 시련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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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9~1800년 콘클라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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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클라베 정보 | |
월 | 1799년 11월 - 1800년 3월 |
년도 | 1799–1800 |
일반 명칭 | 콘클라베 |
날짜 | 1799년 11월 30일 – 1800년 3월 14일 |
장소 | 산 조르조 수도원, 베네치아, 오스트리아 대공국 |
수석 추기경 | 잔프란체스코 알바니 |
부수석 추기경 | 해당 정보 없음 |
교황청 камерленго | 공석, 로무알도 브라스키-오네스티가 기능 대행 |
수석 사제 추기경 | 프란체스코 카라파 델라 스피나 디 트라이에토 |
수석 부제 추기경 | 안톤마리아 도리아-팜필리 |
서기 | 에르콜레 콘살비 |
후보 | 해당 정보 없음 |
거부권 행사 | 해당 정보 없음 |
투표 횟수 | 해당 정보 없음 |
선출된 교황 | 바르나바 키아라몬티 |
선택된 이름 | 비오 7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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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콘클라베 년도 | 1774–75 |
이전 콘클라베 링크 | 1774–1775년 교황 콘클라베 |
다음 콘클라베 년도 | 1823 |
다음 콘클라베 링크 | 1823년 교황 콘클라베 |
2. 역사적 배경
1799~1800년 콘클라베는 나폴레옹 전쟁 와중에 진행되었다.
교황 비오 6세의 치세는 그의 권위와 유럽 군주 및 다른 세속적, 교회적 기관 사이의 긴장으로 특징지어졌으며, 이는 주로 그의 온건한 자유주의적 개혁적 의도 때문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비오 6세는 독립적인 갈리아 교회가 탄압받고, 프랑스 내 교황령과 교회 재산이 몰수되며, 자신을 묘사한 조각상이 팔레 루아얄에서 대중에게 불태워지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1793년 1월, 로마 거리에서 공화주의자 요원 위고 바세빌의 살해 사건은 새로운 불쾌감을 주었고, 교황청은 프랑스 국민 공회에 의해 공모 혐의를 받았으며, 비오 6세는 프랑스 제1공화국에 대항하는 제1차 대프랑스 동맹과 운명을 함께 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96년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하여 교황군을 격파하고 안코나와 로레토를 점령했다. 1797년 2월 19일, 비오 6세는 톨렌티노 조약을 통해 평화를 요청했고, 로마냐는 보나파르트가 새로 세운 치스파다나 공화국에 넘겨졌다. 프랑스 지배 지역에서는 여러 개혁이 이루어졌고, 교회의 많은 재산이 몰수되었다. 1797년 12월 28일, 이탈리아와 프랑스 혁명가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프랑스 대사관의 마튜린 레오나르 뒤포 장군이 사망하면서, 프랑스에게 새로운 침략 명분이 생겼다. 1798년 2월 13일,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는 저항 없이 로마에 입성하여 로마 공화국을 선포하고 교황에게 교황령 포기를 요구했다. 비오 6세는 거부하고 포로로 잡혔으며, 1799년 8월 29일 발랑스, 드롬의 요새에서 사망했다.
2. 1. 교황 비오 6세와 프랑스 혁명
교황 비오 6세의 치세는 그의 권위와 유럽 군주 및 다른 세속적, 교회적 기관 사이의 긴장으로 특징지어졌다. 이는 주로 그의 온건한 자유주의적 개혁적 의도 때문이었다. 교황 재위 초기에 그는 1773년 교황 칙서 ''도미누스 아크 레뎀토르''에서 예수회 해산을 발표한 그의 전임자 클레멘스 14세의 업적을 이어갈 것을 약속했다. 친 예수회 세력은 비오 6세를 클레멘스 14세보다 더 예수회에 기울어져 있다고 생각하며 그를 지지했다.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통치자 요제프 2세가 교황청의 권한과 충돌하는 내부 개혁을 단행하면서 위협이 되었다. 게다가 1786년 엠스 회의에서 독일 대주교들은 독립성을 보였지만 곧 제압되었다.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비오 6세는 독립적인 갈리아 교회가 탄압받고, 프랑스 내 교황령과 교회 재산이 몰수되며, 자신을 묘사한 조각상이 팔레 루아얄에서 대중에게 불태워지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1793년 1월, 로마 거리에서 공화주의자 요원 위고 바세빌의 살해 사건은 새로운 불쾌감을 주었고, 교황청은 프랑스 국민 공회에 의해 공모 혐의를 받았으며, 비오 6세는 프랑스 제1공화국에 대항하는 제1차 대프랑스 동맹과 운명을 함께 했다.
2. 2. 교황령의 멸망과 비오 6세의 죽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96년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하여 교황군을 격파하고 안코나와 로레토를 점령했다. 그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평판이 나빠질 것을 우려하여 프랑스 총재정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로마를 점령하지는 않았다. 1797년 2월 19일, 비오 6세는 톨렌티노 조약을 통해 평화를 요청했고, 이는 받아들여졌다. 이 조약에 따라 로마냐는 보나파르트가 새로 세운 치스파다나 공화국(1796년 12월 레조 에밀리아, 모데나, 볼로냐, 페라라의 합병으로 설립)에 넘겨졌다. 프랑스 지배 지역에서는 여러 개혁이 이루어졌고, 교회의 많은 재산이 몰수되었다.1797년 12월 28일, 이탈리아와 프랑스 혁명가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프랑스 대사관의 마튜린 레오나르 뒤포 장군이 사망하면서, 프랑스에게 새로운 침략 명분이 생겼다.
1798년 2월 13일,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는 저항 없이 로마에 입성하여 로마 공화국을 선포하고 교황에게 교황령 포기를 요구했다. 이는 프랑스 총재정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비오 6세는 거부하고 포로로 잡혔다. 그는 2월 20일 바티칸에서 시에나로, 이후 피렌체, 이탈리아 근처의 체르토사로 호송되었다. 토스카나 대공국의 페르디난트 3세에 대한 프랑스의 선전포고로 비오 6세는 파르마, 피아첸차, 토리노, 그르노블을 거쳐 발랑스, 드롬의 요새로 이송되었고, 1799년 8월 29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나폴레옹은 이 과정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으며, 당시 근동에 있었다. 그는 1799년 11월 9일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를 일으킨 후에야 프랑스로 돌아왔다.
3. 콘클라베
이번 콘클라베는 나폴레옹 전쟁 와중에 진행되었다. 모든 추기경들은 프랑스 점령 당국에 의해 로마 시에서 추방되었고, 1798년 비오 6세가 발표한 교회 칙령에 따라 가장 많은 추기경이 있는 도시인 베네치아에서 콘클라베를 열 수밖에 없었다.[1]
베네딕토회 산 조르조 수도원이 콘클라베 장소로 선정되었고, 투표는 야간 예배당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이 도시와 북부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에 의해 점령되었고, 신성 로마 황제 프란츠 2세는 콘클라베 비용을 지불하기로 했다. 추기경단 서기가 로마를 떠나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추기경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몬시뇰 에르콜레 콘살비를 서기로 선출했다. 콘살비는 이후 선거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부상했다.
1799년 11월 30일에 시작된 콘클라베는 1800년 3월까지 카를로 벨리소미와 알레산드로 마테이 간의 교착 상태를 극복하지 못했다.[2] 체세나-사르시나 로마 가톨릭 교구의 벨리소미 추기경은 약 18표를 확보하여 유력한 후보(''파파빌레'')였지만, 페라라 대주교인 마테이 추기경을 선호하는 오스트리아 파벌은 벨리소미에게 필요한 3분의 2의 표를 얻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로 인해 벨리소미에게는 사실상 거부권이 적용되었다.[2]
콘클라베는 세 번째 후보인 야킨토 지그몬드 게르딜 CRSP 추기경을 고려했지만, 오스트리아는 그가 너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82세) 콘클라베 시작 전부터 거부했다. 콘클라베가 3개월째에 접어들자, 벨리소미와 마테이 모두를 지지하지 않는 추기경 모리는 이몰라 주교인 그레고리오 바르나바 키아라몬티를 제안했다.
결국 키아라몬티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당시 알프스 공화국 이몰라 주교였으며, 1797년 보나파르트 군대가 자신의 교구를 점령한 후에도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는 좋은 크리스찬은 좋은 민주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연설로 유명했는데, 이 연설은 보나파르트 자신에 의해 "자코뱅"이라고 묘사되었다. 그는 새 통치 하에서 교회 개혁과 몰수를 막을 수는 없었지만, 프랑스와 달리 교회가 해산되는 것을 막았다.
3. 1. 개최 장소와 준비
나폴레옹 전쟁 와중에 교황 비오 6세가 발표한 교회 칙령에 따라, 콘클라베는 로마가 아닌 추기경이 가장 많은 도시인 베네치아에서 열리게 되었다.[1] 모든 추기경들은 프랑스 점령 당국에 의해 로마 시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이다.[1]
베네딕토회 산 조르조 수도원이 콘클라베 장소로 선정되었고, 투표는 야간 예배당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1] 오스트리아 대공국이 베네치아와 북부 이탈리아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고, 신성 로마 황제 프란츠 2세가 콘클라베 비용을 지불하기로 동의했다.[1] 추기경단의 서기가 로마를 떠나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몬시뇰 에르콜레 콘살비가 거의 만장일치로 서기 자리에 선출되었다.[1]
3. 2. 진행 과정과 주요 쟁점
이번 콘클라베는 나폴레옹 전쟁 와중에 진행되었다. 교황 비오 6세가 1798년에 발표한 교회 칙령에 따라, 콘클라베는 로마에서 열릴 수 없는 경우 가장 많은 추기경이 있는 도시에서 열리게 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모든 추기경들은 프랑스 점령 당국에 의해 로마 시에서 추방되었고, 베네치아에서 콘클라베를 열 수밖에 없었다.[1]콘클라베 장소로는 베네치아의 베네딕토회 산 조르조 수도원이 선정되었고, 투표는 야간 예배당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통치자였던 신성 로마 황제 프란츠 2세는 콘클라베 비용을 지불하기로 했다. 추기경단의 서기가 로마를 떠나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추기경들은 몬시뇰 에르콜레 콘살비를 서기로 선출했다. 콘살비는 선거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부상했다.
1799년 11월 30일에 시작된 콘클라베는 1800년 3월까지 카를로 벨리소미와 알레산드로 마테이 간의 교착 상태를 극복하지 못했다.[2] 처음에 34명의 추기경이 참석했고, 프란츠 2세의 제국 전권 대사인 추기경 프란치스쿠스 헤르잔 폰 하라스가 12월 10일에 늦게 나타났다. 그는 제국의 명령을 가지고 왔는데, 그 중 첫 번째는 추기경 알레산드로 마테이를 교황으로 선출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1799년 12월 28일까지 추기경 헤르잔은 제국 전권 대사로서 추기경단에 자신의 신임을 제시하지 않아 특별한 지위가 없었다.[1]
체세나-사르시나 로마 가톨릭 교구의 카를로 벨리소미 추기경은 약 18표를 확보하여 유력한 후보(''파파빌레'')로 보였다. 그러나 페라라 대주교인 추기경 알레산드로 마테이를 선호하는 오스트리아 파벌은 벨리소미에게 필요한 3분의 2의 표를 얻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벨리소미에게는 사실상 거부권이 적용되었다.[2]
콘클라베는 세 번째 후보인 야킨토 지그몬드 게르딜 CRSP 추기경을 고려했지만, 오스트리아는 그가 너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82세) 콘클라베 시작 전부터 그를 거부했다. 콘클라베가 3개월째에 접어들자, 벨리소미와 마테이 모두를 지지하지 않는 추기경 모리는 이몰라 주교인 그레고리오 바르나바 키아라몬티를 제안했다.
2월 중순, 헤르잔과 모리는 키아라몬티가 약 12명의 지지자를 가지고 있다고 계산했다. 3월 11일, 안토넬리 추기경과 헤르잔 추기경은 칼카니, 벨리소미, 게르딜, 마테이, 발렌티의 후보가 모두 실패했음을 인정하는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 중에 두냐니 추기경이 키아라몬티를 제안했고, 마테이 지지자들 중 많은 수가 그에게 넘어갈 의향이 있었다. 3월 12일, 스페인 에이전트인 프란시스코 로렌자나 추기경은 마드리드에서 추기경 마테이를 공식적으로 배제할 수 있다는 허가를 받았다는 소식을 받았다. 그러나 벨리소미의 지지자들이 이미 그에게 사실상 거부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필요는 없었다. 결국 3월 14일, 콘클라베 서기 콘살비의 지원을 받아 키아라몬티 추기경이 선출되었다.
키아라몬티는 당시 알프스 공화국의 이몰라 주교였다. 그는 1797년 보나파르트 군대가 자신의 교구를 점령한 후에도 그 자리에 머물렀고, 좋은 크리스찬은 좋은 민주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연설을 했는데, 이는 보나파르트 자신에 의해 "자코뱅"이라고 묘사되었다. 그는 새 통치 하에서 교회 개혁과 몰수를 막을 수는 없었지만, 프랑스와는 달리 교회가 해산되는 것을 막았다.
3. 3. 교황 비오 7세의 선출
나폴레옹 전쟁 와중에 1799년~1800년 콘클라베가 소집되었다. 모든 추기경은 프랑스 점령 당국에 의해 로마 시에서 추방되었고, 베네치아의 베네딕토회 산 조르조 수도원에서 콘클라베를 열어야 했다. 신성 로마 황제 프란츠 2세는 콘클라베 비용을 지불하기로 했다. 추기경단의 서기가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몬시뇰 에르콜레 콘살비가 거의 만장일치로 서기로 선출되었다. 콘살비는 이후 선거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평가받는다.[1]
콘클라베는 1799년 11월 30일에 시작되었고, 1800년 3월까지 카를로 벨리소미 추기경과 알레산드로 마테이 추기경 간의 교착 상태를 극복하지 못했다. 벨리소미 추기경은 유력한 후보였지만, 오스트리아 파벌은 마테이 추기경을 선호하여 벨리소미에게 사실상 거부권을 행사했다.[2] 야킨토 지그몬드 게르딜 추기경도 후보로 고려되었지만, 오스트리아는 그가 너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콘클라베가 3개월째에 접어들자, 이몰라 주교인 그레고리오 바르나바 키아라몬티 추기경이 새로운 후보로 제안되었다. 3월 11일, 레오나르도 안토넬리 추기경과 프란치스쿠스 헤르잔 폰 하라스 추기경은 여러 후보가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키아라몬티 추기경을 고려하기로 했다. 마테이 추기경 지지자들 중 많은 수가 키아라몬티 추기경에게 넘어갈 의향이 있었고, 3월 12일에는 마테이 추기경이 공식적으로 배제되었다. 결국 3월 14일, 콘살비의 지원을 받아 키아라몬티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키아라몬티 추기경은 당시 알프스 공화국의 이몰라 주교였다. 그는 1797년 프랑스 군대가 자신의 교구를 점령한 후에도 그 자리에 머물렀으며, "좋은 크리스찬은 좋은 민주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연설로 유명했는데, 이 연설은 보나파르트에 의해 "자코뱅"이라고 묘사되었다.
교황 대관식은 베네치아에서 서둘러 진행되었다. 교황의 보물이 없었기 때문에, 베네치아의 귀부인들이 파피에마셰 교황 삼중관을 만들고 그들 자신의 보석으로 장식했다. 키아라몬티 추기경은 교황 비오 7세로 선포되었고, 3월 21일 산 조르조 수도원 교회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4. 주요 인물
1799년부터 1800년까지 진행된 콘클라베는 나폴레옹 전쟁의 와중에 열렸다.[3] 이 콘클라베에는 다수의 추기경들이 참여하거나 불참했다.
4. 1. 참여 추기경
이름 | 출신 | 직책 | 비고 |
---|---|---|---|
잔 프란체스코 알바니 | 우르비노 | 오스티아-벨레트리 주교 | 수석 추기경 |
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 | 프라스카티 주교 | ||
레오나르도 안토넬리 | 팔레스트리나 주교 | ||
루이지 발렌티-곤자가 | 알바노 주교 | ||
프란체스코 카라파 디 트라제토 | |||
프란체스코 사베리오 데 젤라다 | |||
구이도 칼카니니 | 오시모-칭골리 주교 | ||
베르나르디노 오노라티 | 세니갈리아 주교 | ||
안드레아 조안네티 | 볼로냐 대주교 | ||
자신트 지기스몽 게르딜 | CRSP | ||
카를로 주세페 필리포 디 마르티니아나 | 베르첼리 주교 | ||
알레산드로 마테이 | |||
프란치스쿠스 헤르잔 폰 하라스 | |||
조반니 안드레아 아르케티 | 아스콜리피체노 대주교-주교 | ||
주세페 마리아 도리아 팜필리 | |||
바르나바 니콜로 마리아 루이지 키아라몬티 | 이몰라 주교 | OSB, 비오 7세로 선출 | |
카를로 벨리소미 | 체세나 주교 | ||
카를로 리비차니 포르니 | [3] | ||
프란시스코 안토니오 데 로렌사나 | 스페인 | 톨레도 대주교 | |
이냐치오 부스카 | |||
스테파노 보르자 | |||
잠바티스타 카프라라 | |||
안토니오 두냐니 | |||
이폴리토 빈첸티-마레리 | |||
장-시프랭 모리 | 프랑스 | 파리 대주교 | |
잠바티스타 부시 데 프레티스 | 예지 주교 | ||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냐텔리 | |||
아우렐리오 로베렐라 | |||
줄리오 마리아 델라 소마글리아 | |||
안토니오마리아 도리아-팜필리 | |||
로물알도 브라스키-오네스티 | |||
필리포 카란디니 | |||
루도비코 플랑기니 조바넬리 | |||
파브리지오 디오니지 루포 | |||
조반니 리누치니 |
4. 2. 불참 추기경
추기경 | 직책 및 국가 |
---|---|
크리스토프 안톤 폰 미가치 폰 발 운 존넨투른 | 빈 대주교, 오스트리아 |
도미니크 드 라 로슈푸코 | 루앙 대주교, 프랑스 |
요안네스-헨리쿠스 데 프랑켄베르크 | 메헬렌 대주교, 벨기에 |
루이 르네 에두아르 드 로앙게메네 | 스트라스부르 대주교 |
주세페 마리아 카페체 주를로 | 나폴리 대주교 |
비첸초 라누치 | 안코나 에 우마나 주교 |
무치오 갈로 | |
조제 프란시스쿠 드 멘돈사 | 리스본 총대주교, 포르투갈 |
안토니오 데 센트메나트 이 카스테야 | 서인도 총대주교, 스페인 |
루이 조제프 드 라발몽모렌시 |
5. 교황 비오 7세 즉위 이후
이번 콘클라베는 나폴레옹 전쟁 와중에 진행되었다. 비오 7세 즉위 이후 교황령은 나폴레옹과의 관계가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5. 1. 교황령 복원과 나폴레옹과의 관계
마렝고 전투에서 프랑스가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승리하면서 1800년 6월 14일 북부 이탈리아를 탈환했다. 이후 보나파르트는 새 교황을 인정하고 교황령을 톨렌티노에서 정한 국경으로 복원하기로 결정했다.새 교황 비오 7세는 로마로 향했고, 1800년 7월 3일 로마에 입성하여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추가적인 침략을 우려하여 교황령이 북부의 나폴레옹 이탈리아와 남부의 나폴리 왕국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당시 나폴리 왕국은 부르봉 왕가의 일원인 페르디난도 4세가 통치하고 있었다.
콘클라베의 서기였던 에르콜레 콘살비는 1800년 8월 11일에 추기경으로 임명되었고 교황의 국무원장이 되었다. 1801년 7월 15일, 프랑스는 1801년의 정교 조약을 통해 가톨릭교회를 다수 종교(국교는 아님)로 공식적으로 재인정했고, 교회는 성직자들의 갈리아 헌법에 따라 어느 정도의 자유를 얻었다. 정교 조약은 또한 교황령과 이 지역 점령 기간 동안 몰수 및 판매된 교황령을 인정했다. 1803년 뤼네빌 조약에 의해 교황령의 복원이 공식화되었다.
나폴레옹은 작고 독립적인 영토의 세속화를 추진했고, 외교적 압력을 통해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1806년)를 꾀했다. 교황이 1805년 제롬 보나파르트와 엘리자베스 패터슨 보나파르트의 이혼을 거부하면서 교회와 프랑스 제1제국 간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새로 즉위한 프랑스 황제는 팽창주의 정책을 재개하여 안코나, 나폴리 (아우스터리츠 전투 이후 그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새로운 왕으로 임명), 폰테코르보, 베네벤토를 장악했다. 이러한 변화는 교황을 분노하게 했고, 교황이 이를 수용하지 않자 나폴레옹은 1808년 2월, 교황에게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과의 프랑스 군사 분쟁에 대한 지원을 요구했다. 교황이 다시 거부하자 우르비노, 안코나, 마체라타와 같은 영토의 추가 몰수가 이어졌다. 마침내 1809년 5월 17일, 교황령은 공식적으로 프랑스 제1제국에 병합되었고 비오 7세는 퐁텐블로 성으로 이송되었다.
5. 2. 교황령의 재병합과 비오 7세의 유폐

1800년 6월 14일 마렝고 전투에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군으로부터 북부 이탈리아를 탈환했다. 이후 보나파르트는 새 교황을 인정하고 톨렌티노 조약에서 정한 국경으로 교황령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새 교황은 로마로 향했고, 7월 3일 로마에 입성하여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추가적인 침략을 우려하여 교황령이 북부의 나폴레옹 이탈리아와 남부의 나폴리 왕국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당시 나폴리 왕국은 부르봉 왕가의 일원인 페르디난도 4세가 통치하고 있었다.
콘클라베의 서기였던 에르콜레 콘살비는 8월 11일에 추기경으로 임명되었고 교황의 국무원장이 되었다. 7월 15일, 프랑스는 1801년의 정교 조약에서 가톨릭교회를 다수(국교가 아닌) 종교로 공식적으로 재인정했고, 교회는 성직자들의 갈리아 헌법에 따라 어느 정도의 자유를 얻었다. 정교 조약은 또한 교황령과 이 지역 점령 기간 동안 몰수 및 판매된 교황령을 인정했다. 1803년 뤼네빌 조약에 의해 교황령의 복원이 공식화되었다.
나폴레옹은 작고 독립적인 영토의 세속화를 추진했고, 외교적 압력을 통해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1806년)를 꾀했다. 교황이 1805년 제롬 보나파르트와 엘리자베스 패터슨 보나파르트의 이혼을 거부하면서 교회와 프랑스 제1제국 간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새로 즉위한 프랑스 황제는 팽창주의 정책을 재개하여 안코나, 나폴리 (아우스터리츠 전투 이후 그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새로운 왕으로 임명), 폰테코르보, 베네벤토를 장악했다. 이러한 변화는 교황을 분노하게 했고, 교황이 이를 수용하지 않자 나폴레옹은 1808년 2월, 교황에게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과의 프랑스 군사 분쟁에 대한 지원을 요구했다. 교황이 다시 거부하자 우르비노, 안코나, 마체라타와 같은 영토의 추가 몰수가 이어졌다. 마침내 1809년 5월 17일, 교황령은 공식적으로 프랑스 제1제국에 병합되었고 비오 7세는 퐁텐블로 성으로 이송되었다.
6. 트리비아
이번 콘클라베는 나폴레옹 전쟁 와중에 진행되었다.
참조
[1]
서적
Memoires ... Maury
[2]
서적
The Conclave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03
[3]
간행물
Correspondence diplomatique et mémoires inédits du Cardinal Maury
Lille
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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