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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유럽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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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세기의 유럽 문화는 17세기부터 시작된 '이성의 시대'가 더욱 발전하여, 근대 사회의 기반을 다진 시기이다. 정치적으로는 의회제 민주주의의 원형이 확립되었고, 문화적으로는 세속주의가 본격화되어 종교와 문화가 분리되었다. 계몽주의 사상이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퍼져나갔으며, 경험론과 비판 철학이 발전했다. 예술 분야에서는 로코코 양식이 유행했고, 과학 분야에서는 물리학, 화학, 생물학, 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2. 18세기 유럽의 문화

17세기부터 시작된 ‘이성(理性)의 시대’는 18세기에 한층 철저해졌다. 이 시기는 현대의 모태(母胎)라고도 할 수 있는데, 현대의 기본적 생산 양식인 대공장제 공업과 현대의 가장 전형적인 정치제도인 의회제 민주주의의 원형이 이 세기에 확립되었다. 문화면에서는 문화의 세속주의(世俗主義)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총결산이 이루어진 18세기에는 종교와 문화가 분리되어 각각 독자적인 영역을 형성했다. 성경은 정치 이념을 제시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게 되었고, 성서 속에서 과학적 진리를 발견하려는 시도도 사라졌다. 사람들은 권위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것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영국이나 스미스도덕 사상, 독일 칸트의 비판철학은 이 시대에 성장하던 시민계급의 사상을 대표한다.

2. 1. 사회·경제적 변화

18세기는 현대의 모태(母胎)라고 할 수 있는 시기였다. 현대의 기본적 생산 양식인 대공장제 공업이 이 세기 말엽에 형성되었고, 현대의 가장 전형적인 정치제도인 의회제 민주주의도 이 세기에 원형이 확립되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총결산이 이루어진 18세기에는 종교와 문화가 분리되어 각각 독자적인 영역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성경은 더 이상 정치 이념을 제시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고, 성서 속에서 과학적 진리를 발견하려는 시도는 사라졌다. 사람들은 권위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것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영국의 흄이나 스미스의 도덕 사상, 독일의 칸트 비판철학은 이 시대에 성장하던 시민계급의 사상을 대표한다. 음악은 독일을 중심으로 고전시대를 맞았으나, 건축이나 미술에는 시민계급의 성장이 아직 반영되지 못하고 절대주의 말기의 퇴폐적인 면이 나타났다. 그러나 문학에서는 디포를 비롯하여 시민계급의 소설이 출현했다. 자연과학은 뉴턴 이후 착실히 발전했고, 실용적 지식으로서 시민계급 사이에 보급되었다. 이 시대는 문화가 승려나 귀족적 지식인의 독점에서 해방되어 대중화하기 시작한 시대였다.

18세기 영국은 소설이 흥륭(興隆)했는데, 이는 명예혁명 후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언론·출판의 자유가 보장된 점, 부르주아지의 에너지가 다방면으로 해방된 점 등이 중요한 원인이었다.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은 자본주의의 성립과 금욕적 신교(新敎)주의의 관련을 시사하는 듯한 소설이다.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사회와 정치, 인간에 대한 신랄한 풍자로, 쇠퇴하는 지주계급의 불안과 초조를 반영하고 있었다.

2. 2. 사상·문화적 변화

18세기에는 17세기부터 시작된 '이성의 시대'가 더욱 철저해졌다. 이 시기는 현대의 기본적인 생산 방식인 대공장제 공업이 형성되고, 현대의 가장 전형적인 정치 제도인 의회제 민주주의의 원형이 확립된, 현대의 모태(母胎)라고 할 수 있는 시대였다. 문화면에서는 세속주의가 본격화되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총결산이 이루어지면서 종교와 문화가 분리되어 각각 독자적인 영역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성경은 더 이상 정치 이념을 제시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고, 성서 속에서 과학적 진리를 발견하려는 시도도 사라졌다. 사람들은 권위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것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프랑스 사상계를 풍미했던 계몽주의, 영국의 이나 스미스도덕 사상, 독일 칸트의 비판 철학은 이 시대에 성장하던 시민 계급의 사상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예술 분야에서는 독일을 중심으로 고전 음악이 발전했지만, 건축이나 미술에는 시민 계급의 성장이 아직 반영되지 못하고 절대주의 말기의 퇴폐적인 면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문학에서는 디포를 비롯하여 점차 시민 계급의 소설이 등장했다. 뉴턴 이후 자연 과학은 꾸준히 발전했고, 실용적 지식으로서 시민 계급 사이에 널리 보급되었다. 이 시대는 문화가 점차 승려나 귀족적 지식인의 독점에서 해방되어 대중화되기 시작한 시대였다.

독일에서는 바흐헨델이 고전 음악의 시대를 열었다. 오르간 음악에 뛰어났던 바흐는 많은 교회 교성곡, 조곡을 작곡했고, 평균율 조율을 주창하여 자유로운 전조를 연구했다. 헨델은 많은 가극오라토리오를 작사·작곡했으며, 1741년에 발표된 "구세주"는 할렐루야 합창으로 오늘날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들 뒤를 이어 하이든모차르트가 등장했다.

영국에서는 소설이 흥성했는데, 이는 명예 혁명 이후의 자유로운 분위기, 특히 언론·출판의 자유가 보장된 점, 부르주아지의 에너지가 다방면으로 해방된 점 등이 중요한 원인이었다.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는 고도에 표류된 주인공이 신앙에 의지하며 창의와 연구를 통해 섬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어 가는 이야기로, 자본주의의 성립과 금욕적인 신교주의의 관련을 시사하는 듯하다.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냉철한 관찰을 통해 사회와 정치를 풍자하고, 동시에 인간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담고 있으며, 쇠퇴하는 지주 계급의 불안과 초조를 반영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3. 주요 사상 및 철학

17세기부터 시작된 '이성의 시대'는 18세기에 한층 철저해졌다. 이 시기는 현대의 모태(母胎)라고도 할 수 있는데, 현대의 기본적 생산 양식인 대공장제 공업이 형성되었고, 현대의 가장 전형적인 정치제도인 의회제 민주주의도 이 세기에 원형이 확립되었다. 문화면에서는 문화의 세속주의(世俗主義)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총결산이 이루어져, 종교와 문화가 분리되어 각각 독자적인 영역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성경은 더 이상 정치 이념을 제시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성서 속에서 과학적 진리를 발견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도 없어졌다. 사람들은 권위(權威)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것에 회의의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의 사상계를 풍미(風靡)하고 있던 계몽주의, 영국에서의 이나 스미스도덕 사상, 독일에서의 칸트의 비판철학은 이 시대에 성장하고 있던 시민 계급의 사상을 대표하는 것이라 하겠다.

3. 1. 계몽주의

17세기부터 시작된 ‘이성의 시대’는 18세기에 더욱 철저해졌다. 이 시기는 현대의 기본 생산 양식인 대공장제 공업이 형성되고, 현대의 전형적인 정치 제도인 의회제 민주주의의 원형이 확립된, 현대의 모태(母胎)와 같은 시대였다. 문화적으로는 세속주의가 본격화되어 종교와 문화가 분리되고 각각 독자적인 영역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성경은 더 이상 정치 이념을 제시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성서에서 과학적 진리를 찾으려는 시도도 사라졌다. 사람들은 권위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것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프랑스 사상계를 풍미했던 계몽주의영국이나 스미스도덕 사상, 독일의 칸트의 비판 철학 등과 함께 당시 성장하던 시민 계급의 사상을 대표했다. 계몽주의는 모든 사물의 판단 기준을 이성에 두는 사상으로, 전통적인 가치 기준을 거부하고 외적인 권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다.

자본주의적 발전은 사회 저변에 침투하여 사람들의 합리적 태도를 강제했다. 프로이센이나 러시아와 같이 자본주의가 미발달된 나라에서도 사회 제도나 사상에서 불합리한 것을 제거해야 국가 존립이 가능했다. 이러한 계몽사상은 프랑스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8세기 프랑스영국에 비해 자본주의 발전이 늦었고 절대주의가 강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영국의 제도와 비교하며 프랑스 사회 제도의 후진성을 실감했다. 프랑스 인민을 빈궁과 무지몽매에 빠뜨린 절대 왕조와 특권적 귀족, 교회 제도에 대한 비판이 거셌다.

몽테스키외는 프랑스의 계몽사상가로 법의 정신을 저술하여 삼권분립을 주장하였다. 명문 귀족 출신인 몽테스키외는 1721년 익명으로 간행된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통해 프랑스 사회의 불합리성, 절대 왕제, 문화를 야유하고 풍자하여 자유주의 사상을 고취했다. 1748년에는 오랜 연구 결과를 《법의 정신》에 집대성하여 발표했다. 이 책은 법률 제도와 사회적 조건, 지리적 환경의 관련성을 설명하고,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을 이상적인 정치 형태로 제시하여 프랑스 혁명 사상의 원천 중 하나가 되었다.

루소는 스위스 출신의 프랑스 계몽사상가로 인간 불평등 기원론, 사회 계약론을 저술하였다. 그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통해 국가 성립에 따라 불평등이 생기고, 국가 권력이 자의적으로 악화되면서 불평등이 심화되었다고 설명했다. 《사회 계약론》에서는 국가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인민의 일반 의지에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소는 《신 엘로이즈》, 《에밀》 등의 소설과 자서전 《고백》을 저술하여 사회와 인간성의 관계를 다양한 각도에서 탐구했다. 인간의 개성과 감정을 중요하게 여겨 낭만주의에 영향을 준 사상가이기도 하다. 위선을 미워하고 사회의 부정을 폭로했기 때문에 많은 압박을 받고 불행한 말년을 보냈지만, 그의 사상은 혁명기의 자코뱅파 사상에 계승되었다.

3. 1. 1. 볼테르

프랑스계몽사상가로, 종교적 관용과 시민적 자유를 주장했다. 18세기 프랑스영국에 비해 자본주의 발전이 늦었고 절대주의가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볼테르는 이러한 프랑스의 후진성을 비판하고 시민적 자유와 종교적 관용을 강조했다.

1743년에 출판된 《영국에서 부친 서한(철학 서한)》은 3년간 영국에 체류하며 경험한 의회정치, 경제적 발전, 로크경험론 등을 소개하여 프랑스의 후진성을 지적한 저서이다. 그 외에 '인간론'이라는 시에서는 인간의 자유 의지와 종교적 관용을 주장하였고, 철학 소설 《캉디드》에서는 인간 운명의 우연성을 강조하며 숙명적 인생관에 반대했다. 또한 《백과전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글을 썼다.

볼테르는 인간 본성의 평등을 주장했지만, 재산상의 평등은 사회 질서에 위배된다고 보아 부정했다. 평생 동안 예리한 풍자를 통해 절대왕정과 교회 제도를 비판하고 시민적 자유를 강조했다.

3. 1. 2. 백과전서파

디드로와 달랑베르를 비롯하여 백과전서 편찬에 참여한 지식인들을 백과전서파라고 부른다. 이들은 계몽사상을 전파하고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백과전서는 여러 사상가들이 집필하였기 때문에 전체적인 사상적 통일성은 부족했지만, 계몽사상의 발전, 특히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준비 과정에서 큰 역할을 수행했다.

백과전서는 본래 영어 백과사전을 번역하고 개정 및 증보하는 작업에서 시작되었다. 이 작업을 맡았던 디드로는 프랑스인을 위해 전통적인 제도와 편견에 맞서 싸우는 무기로서 새로운 백과전서를 계획했다. 볼테르, 몽테스키외, 루소, 케네 등 유명 인사들을 포함한 많은 집필진의 협력을 얻어 1751년 백과전서 제1권을 출판했다. 그러나 이성을 강조하고 신학과 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이 강했기 때문에 당국의 탄압을 받아 1759년에 발행 금지 처분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드로는 1772년까지 본문 19권, 도표 11권에 달하는 방대한 사전을 완성했다.

3. 2. 경험론과 비판 철학

18세기 영국에서는 로크경험론이 지배적이었다. 은 경험론을 발전시켰고, 칸트는 라이프니츠의 독단론과 흄의 회의론을 극복하고 비판 철학을 제시하여 독일 관념론 철학의 고전 시대를 열었다.

3. 2. 1. 흄

(1710 ~ 1776)은 인간본성론을 저술하여 경험과 관찰에 바탕을 둔 인간 연구를 추진하였다. 그는 감각을 통해 받아들여진 인상(印象)과 그 인상에서 파생되는 관념(인상의 모사)을 연상심리학에 의해 관련지어 인간 인식의 가능성을 검토했다. 흄은 인간 도덕의 근원을 지적으로 인식된 이기심이 사회적 공동생활 속에서 타인에 대한 공감 감정으로 전화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여 스미스에게 영향을 주었다.

3. 2. 2. 칸트

임마누엘 칸트(1724년 ~ 1804년)는 라이프니츠의 독단론과 의 회의론을 모두 극복하고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3부작을 통해 독일 철학의 고전 시대를 열었다. 그는 선험적 관념론을 주장하며, 감각을 통한 경험만으로는 사물의 현상에만 얽매여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고 보았다. 칸트의 철학은 오늘날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3. 3. 기타 철학자

18세기에는 17세기부터 시작된 '이성의 시대'가 더욱 철저해졌다. 이 시기는 현대의 모태(母胎)와도 같았는데, 대공장제 공업과 의회제 민주주의의 원형이 확립되었고, 문화의 세속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성경은 더 이상 정치 이념을 제시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성서에서 과학적 진리를 찾으려는 시도도 사라졌다. 사람들은 권위를 거부하고 전통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으며, 프랑스의 계몽주의, 영국의 이나 스미스의 도덕 사상, 독일 칸트의 비판철학은 성장하는 시민 계급의 사상을 대표했다.

3. 3. 1. 스피노자

바뤼흐 스피노자


'''바뤼흐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la, 1632년 ~ 1677년)는 네덜란드철학자이다. 암스테르담에서 유대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는 법률학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유대교 교리에 만족하지 않고 아라비아와 르네상스, 데카르트 등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1651년경부터 독자적인 사상을 가지게 되었고, 1665년 파문되었다.

이후 여러 곳을 다니며 살다가 1670년부터 헤이그에 살면서 렌즈 연마를 직업으로 삼았다. 대학의 초빙 등을 거절하고 고독과 가난 속에서 일생을 보냈다. 그동안 데카르트적 철학 논문을 발표했고, 1670년 《신학정치론》을 익명으로 출판했으나, 무신론자로 공격받아 주저인 《윤리학》은 처음에는 출판이 금지되기도 했다.

그의 학설은 방법론에서는 기하학적 입장을 취하고, 세계관에서는 범신론적 일원론을 취하여 무신론자라기보다는 신에 심취한 사람이었다. 독일 관념론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그 밖의 저서로 《지성 개선론》, 《국가론》 등이 있다.

3. 3. 2. 라이프니츠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는 17세기 자연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폭넓은 활동을 한 독일의 철학자이자 수학자로, 독일 계몽철학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인간오성신론》은 존 로크의 이론에 대한 반론이며, 1714년에 쓴 《단자론》은 그의 철학 체계를 간략하게 묘사한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궁극적인 존재를 '단자(單子)'라고 생각하고, 전 우주의 질서를 밝히려는 형이상학을 펼쳐 칸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3. 3. 3. 볼프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f, 1679년~1754년)는 독일의 계몽 철학자이다. 신학을 배우고 철학과 자연 과학을 공부하였다. 데카르트, 특히 라이프니츠의 영향을 받아 그의 추천으로 할레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한때 무신론자로 몰려 할레 대학교에서 쫓겨났으나 프리드리히 대왕에 의하여 복직되었다.

철학적으로는 독창성이 적으나, 라이프니츠의 뒤를 이어 계몽주의 철학을 체계화하였으며, 논문 용어를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옮기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4. 경제 사상

18세기에는 케네를 중심으로 중농주의가, 애덤 스미스를 중심으로 자유주의 경제학이 발전했다. 케네는 부의 원천이 농업이라고 주장하며 중상주의에 대한 국가 간섭을 배제하려 했고,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자유로운 시장 경제를 옹호하며 독점과 경제적 집중에 비판적이었다.

4. 1. 중농주의

프랑스케네를 중심으로 발전한 경제 사상으로, 농업을 부의 원천으로 강조했다. 케네는 루이 15세의 시의(侍醫)였으며, 중상주의에 의한 경제활동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본주의적 농업의 촉진을 의도했다.

4. 1. 1. 케네

프랑수아 케네(1694년 ~ 1774년)는 루이 15세의 시의(侍醫)였으며, 영국의 칸티온에게서 경제학을 배워 스승의 학설을 발전시켜 중농주의의 창시자가 되었고, 백과전서에도 글을 썼다. 케네는 부(富)의 원천은 교역(交易)이 아니라 농업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공업은 단순히 가공할 따름이며, 새로운 부를 낳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케네의 입장은 중상주의에 의한 경제활동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본주의적 농업의 촉진을 의도한 것이었으며, 경제활동을 법칙적(法則的)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4. 2. 자유주의 경제학

영국애덤 스미스를 중심으로 발전한 자유주의 경제학은 자유로운 시장 경제를 옹호했다. 애덤 스미스는 1776년에 출판된 『국부론』에서, 사회 전체의 부를 늘리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경제 활동에 제한을 가하지 않고 자유롭게 놔두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가장 효과적인 질서가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4. 2. 1. 애덤 스미스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년 ~ 1790년)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경제학자이자 윤리학자이다.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모교의 윤리학 교수가 되었다. 1759년 『도덕감정론』을 출판하여 도덕의 기준을 제3자의 공감에서 찾았다. 케네, 튀르고중농주의자들과 교류하며 영향을 받아, 부의 원천으로 생산적 노동을 생각하고, 인간의 사회적 행동의 근저에 이기심(利己心)이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는 개개인의 이익 추구가 사회의 부를 증대시키고, 분배에 있어서 공평을 가져온다고 생각했다.

1776년 출판된 『국부론』에서 그는 이러한 이론을 전개했고, 사회 전체의 부를 늘리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경제 활동에 제한을 가하지 않고 자유롭게 놔두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가장 효과적인 질서가 형성된다고 주장하여 자유주의 경제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스미스는 시장 경제가 '구매자'와 '판매자'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오고 사회의 자원을 적절하게 배분할 수 있다고 보았으나, 모든 형태의 사적 이익 추구를 바람직하다고 본 것은 아니었다. 스미스는 독점적인 이익과 경제적 집중에 대해 비판적이었는데, 그것이 자유시장의 본질적인 능력, 즉 토지, 노동, 자본 등에 공정하고 합당한 대가를 제공하는 가격을 형성하는 능력을 왜곡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5. 예술 양식

18세기에는 로코코 양식이 유행하며 예술 분야에 변화를 가져왔다. 로코코 양식은 1723년~1760년경 프랑스에서 발생하여 전 유럽에 퍼져나갔으며, 이전의 웅장하고 호화로운 예술에서 섬세하고 화려한 예술로 변화를 가져왔다.

5. 1. 로코코 양식

로코코 양식은 루이 15세 양식이라고도 하며, 1723년~1760년경에 유행한 장식 양식으로 프랑스에서 발생하여 전 유럽에 전파되었다. 루이 15세 시대 프랑스의 궁정 생활은 안일을 찾는 귀족들의 우아한 사교장이었다. 예술도 이러한 풍조를 반영하여 전시대의 웅대호사(雄大豪奢)에서 섬세화려(纖細華麗)한 것으로 옮겨져 갔다. 로코코 양식은 본래 실내장식 양식을 가리키는 말로서, 우미(優美)한 곡선과 꽃무늬의 아라베스크를 특색으로 하고 있다. 이 양식에는 조개 껍데기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되는 곡선이 많고, C자나 S자를 기교적으로 확대한 곡선의 공상적(空想的) 조합(組合)은 비서구적(非西歐的)·비대조(非對照)의 리듬을 갖는다. 궁중(宮中)의 장중성(莊重性)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의 유락(愉樂)의 추구·관능적 황홀·사랑의 공감(共感)을 표현하였다.

5. 1. 1. 상수시 궁전

1747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랑스 문화 심취자였으며, 볼테르를 비롯한 프랑스의 계몽주의 문인들과 친교가 있었다.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 세워진 상수시 궁전은 프랑스어로 '근심 없는 궁전'(Sans-Souci|상수시프랑스어)이란 뜻이며,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한 것이다. 그러나 실내 장식은 당시 유행한 로코코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프랑스 문인들과 이야기하고 연주회를 개최한 것도 이 궁전에서였다. 로코코 양식은 루이 15세 양식이라고도 하며, 1723년~1760년경에 유행한 장식 양식이다. 프랑스에서 발생하여 전 유럽에 전파되었다. 우미한 곡선과 꽃무늬의 아라베스크를 특색으로 하고 있다.

5. 1. 2. 와토

장 앙투안 와토(Jean Antoine Watteau, 1684~1721)는 로코코 시대 초기에 시대 분위기를 빠르게 파악하여, 부드럽고 매혹적인 '아연화(雅宴畵)'를 그려 궁정 귀족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의 그림은 몽환적인 풍경과 우아한 남녀를 그린 것이 많으며, 부셰, 프라고나르에게 큰 영향을 주어 로코코 시대 융성의 기초를 닦았다.

6. 18세기 과학의 발전

17세기부터 시작된 ‘이성의 시대’는 18세기에 더욱 철저해졌다. 18세기는 현대의 모태(母胎)라고도 할 수 있는 시대로, 대공장제 공업과 의회제 민주주의의 원형이 확립되었다. 문화면에서는 세속주의가 본격화되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총결산이 이루어지면서 종교와 문화가 분리되었다. 성경은 더 이상 정치 이념을 제시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고, 성서에서 과학적 진리를 찾으려는 시도도 사라졌다. 사람들은 권위를 거부하고 전통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영국의 스미스의 도덕 사상, 독일의 칸트의 비판철학은 당시 성장하던 시민계급의 사상을 대표했다.

자연과학에서는 뉴턴라이프니츠 등에 의해 기초가 닦아진 분야가 18세기 후반에 한층 정리되어, 다방면에서 빛나는 성과를 가져왔다.

6. 1. 물리학

뉴턴의 노력으로 물리학의 체계가 완성되었고, 그 후 역학과 관련하여 해석학이 발전하여 오일러, 라그랑주 등의 학자가 활약했다. 또한 전기와 자기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어, 미국의 프랭클린은 번개가 전기 현상임을 증명하고 피뢰침을 발명했다. 블랙의 열량 연구는 와트의 증기기관 개량에 큰 영향을 주었다. 라플라스는 세기 말에 성운설을 주장했다.

6. 2. 화학

화학 분야에서는 현저한 진보를 보여, 캐번디시는 수소를, 러더퍼드는 질소를, 프리스틀리는 산소를 각각 발견했다. 프랑스의 라부아지에는 이같은 성과를 기초로 질량 불변의 법칙을 수립했다.

6. 3. 생물학 및 의학

18세기에는 생물학과 의학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발전이 있었다.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는 식물 분류의 체계적인 방법을 고안하고 《박물체계》를 저술하여 식물학 발전에 기여했다. 프랑스의 뷔퐁은 박물학의 기초를 닦았다. 프랑스의 퀴비에는 비교해부학의 과학적 기초를 구축하고 고생물학을 창시했다.

의학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해부학과 생리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비샤는 조직병리학을 확립했다. 영국의 제너는 1796년 종두법을 발견하여 천연두 예방에 큰 공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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