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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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는 1727년 파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경제학자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소르본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파리 고등법원 검사총장 보좌관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튀르고는 중농주의 학파의 영향을 받아 경제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1761년부터 1774년까지 리모주 지방의 행정관으로 재직하며 개혁을 추진했다. 1774년에는 루이 16세에 의해 재정총감으로 임명되었으나, 자유주의적인 개혁 정책이 특권층의 반대에 부딪혀 1776년 사임했다. 튀르고는 사회 발전 단계론을 제시하고, 경제학 분야에 기여했으며, 1781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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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 - [인물]에 관한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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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년과 초기 활동 (1727-1761)
1727년 파리에서 미셸-에티엔 튀르고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튀르고 가문은 노르망디의 오래된 가문 출신이었다.[5] 교회에서 교육을 받았고, 1749년 소르본 대학교(당시에는 '브르코르의 수도원장'이라는 칭호를 사용)에 입학하여 두 편의 주목할 만한 라틴어 논문을 발표했다.[6] 1750년 사제 서품을 받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평생 가면을 쓰고 사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7]
1752년 파리 고등법원의 대리인(substitut), 이후 고문(conseiller)이 되었고, 1753년에는 청원 담당관(maître des requêtes)이 되었다. 1754년에는 고등법원의 추방 기간 동안 열린 왕실 의회(chambre royale)의 일원이었다. 파리에서 살롱에 자주 다녔으며, 케네와 구르네 등 중농주의 학파 지도자들과 경제학자들을 만났다.[6]
1743년과 1756년 사이, 상업 감독관인 구르네의 지방 시찰 여행에 동행했다.[27] 1760년 프랑스 동부와 스위스를 여행하던 중 볼테르를 방문했고, 볼테르는 그의 주요 친구이자 지지자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다양한 과학 분야와 고대 및 현대 언어를 공부했다. 1753년에는 조시아스 터커의 ''Questions sur le commerce''를 번역했으며, 1754년에는 종교적 관용을 지지하는 팸플릿인 ''Le Conciliateur''(조정자)를 썼다. 1755년에서 1756년 사이에는 ''백과전서''를 위해 다양한 기사를 썼으며,[9] 1757년에서 1760년 사이에는 ''Valeurs des monnaies''(화폐 가치)에 대한 기사를 썼을 것이다.[6] 1759년에는 ''Eloge de Gournay''(구르네 찬사)가 출판되었다.[10]
2. 1. 초년
1727년 5월 10일 파리에서 상인 미셸 에티엔 튀르고와 마들렌 프랑수아즈 마르티노 사이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5] 아버지는 파리의 "상인 조합장"이었다.[5] 튀르고 가문은 오래된 노르망디 가문이었다.[5]어릴 때부터 신학 교육을 받고, 1749년 소르본 대학교(파리 대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뿐만 아니라 경제, 수학, 언어, 역사, 철학, 자연 철학(물리학) 등 광범위한 학문을 습득했다.[24] 1750년 소르본 수도원장에 선출되었다.[24] 소르본 대학교에서 그는 기독교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사람 마음의 역사적 과정에 대한 두 편의 라틴어 논문을 제출하였다.[6]
1750년, 튀르고는 성직자가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7] 뒤 퐁 드 느무르에 의하면 그 이유는 '평생 동안 가면을 쓰고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7] 1751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성직에서 물러나 1752년 파리 고등법원 검사총장 보좌관 직을 사서 국왕 정부의 일을 시작했다.[25]
2. 2. 초기 활동
1752년 튀르고는 파리 시의회의 대리인(substitut프랑스어)이 되었고, 이후 조언자(conseiller프랑스어)가 되었다. 1753년에는 청원심사관(maître des requétes프랑스어)으로 임명되었다.[5] 1754년 튀르고는 의회가 추방 중일 때 설립된 왕실회의소(chambre royale프랑스어)의 일원이었다.[5] 파리에서 튀르고는 여러 살롱에 출입했는데, 특히 리그빌레 양의 조카인 그라피니 부인의 살롱을 자주 방문하였다.[5] 이후에는 헬베티우스 부인과 평생 친구가 되었고, 조프랭 부인, 드팡 부인, 레스피나스 양, 엥빌 공작부인 등의 살롱에도 출입했다.[5] 이 기간 동안 튀르고는 프랑수아 케네, 뱅상 드 구르네를 포함하여 뒤 퐁 드 느무르, 앙드레 모렐레 등 많은 경제학자들을 만났다.[5]1755년과 1756년에는 뱅상 드 구르네를 수행하여 각 지방을 조사했고,[5] 1760년에는 동부 프랑스와 스위스를 방문 중일 때 볼테르를 만났는데, 볼테르는 이후 튀르고의 중요한 친구이자 지지자가 되었다.[5]
1753년 튀르고는 조사이어 터커의 책을 번역하여 ''Questions sur le commerce''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고, 종교적 관용을 지지하기 위해서 소책자인 ''Le Conciliateur''를 저술하기도 하였다.[6] 1755년과 1756년에는 《앙시클로페디》(Encyclopédie프랑스어)의 여러 항목을 저술하였고,[9] 1757년에서 1760년까지 ''Valeurs et monnaies''에 기사를 작성하였다.[6] 1759년에는 뱅상 드 구르네에 대한 추도사를 연설하였다.[10]
3. 리모주 행정관 (1761-1774)
1761년 튀르고는 프랑스에서 가장 가난하고 과세가 심했던 지역 중 하나인 리모주의 ''감독관(intendant)''(세금 징수관)으로 임명되어 1774년까지 13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튀르고는 프랑수아 케네와 뱅상 드 구르네의 경제 이론에 영향을 받아, 이를 자신의 지역에 적용하고자 했다.
그는 전임자 투르니가 시작한 토지 조사(지적도) 작업을 계속하여, 타유 (토지세)의 공정한 평가에 도달하고자 했다. 또한 지역의 기여금을 대폭 삭감했다. 튀르고는 ''Avis sur l'assiette et la repartition de la taille''(1762–1770)을 출판했으며, 리모주 농업 협회의 회장으로서 과세 원리에 대한 에세이에 상을 수여했다. 케네와 미라보는 비례세를 옹호했지만,[11] 튀르고는 누진세를 제안했다.
부역 대신 전체 지역에 금전적 세금을 부과하고 도로 건설을 계약업자에게 넘겨, 튀르고는 고속도로 시스템을 잘 갖춘 지역을 떠날 수 있었고, 건설 비용을 더욱 공정하게 분배했다.[6]
튀르고는 행정관 재임 기간 동안 ''Mémoire sur les mines et carrières''와 ''Mémoire sur la marque des fers''를 썼으며, 국가 규제 및 간섭에 반대하고 자유 경쟁을 옹호했다. 동시에 농업과 지역 산업, 특히 리모주 도자기 제조를 장려했다.
3. 1. 행정관으로서의 활동
1761년 8월, 튀르고는 프랑스에서 가장 가난하고 과세가 심했던 지역 중 하나인 리모주 지방의 행정관으로 임명되어 1774년까지 13년간 일했다.[25] 그는 프랑수아 케네와 뱅상 드 구르네의 이론에 심취하여, 그들의 이론을 리모주에 적용하기 위해 노력했다.튀르고는 전임자가 시작한 토지 측량(지적도) 작업을 계속하여 타유의 공정한 평가에 도달하고자 했다. 그는 또한 지역의 세금 부담을 대폭 삭감했다. 1762년부터 1770년까지 ''Avis sur l'assiette et la répartition de la taille''를 출판했으며, 리모주 농업 협회의 회장으로서 과세 원리에 대한 에세이에 상을 수여했다. 케네와 미라보는 비례세를 옹호했지만,[11] 튀르고는 누진세를 제안했다.
튀르고는 부역을 금전적 세금으로 대체하고, 도로 건설을 계약업자에게 넘겼다. 그 결과 튀르고가 떠날 쯤에는 리모주는 좋은 고속도로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고, 건설 비용도 더욱 공정하게 분배되었다.[6]
1770년과 1771년에 기근이 발생하자, 튀르고는 토지 소유주에게 "빈곤층, 특히 그들에게 의존하는 소작인을 구제할 의무"를 강조했다. 또한 각 지역에 건강한 사람들을 위한 작업과 환자를 위한 구호를 제공하기 위한 ''아틀리에''와 ''부로 드 샤리테''를 조직하는 한편, 무차별적인 자선을 비난했다. 튀르고는 가능한 한 항상 교구 사제를 자신의 자선 활동과 개혁의 대리인으로 삼았다.
1770년 튀르고는 감사원장 테레이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인 ''Lettres sur la liberté du commerce des grains''를 저술했다. 이 편지들은 이후 국왕 루이 16세에게도 보내졌는데, 곡물 자유 무역이 토지 소유주, 농부 및 소비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며, 모든 제한을 제거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6]
1769년, 튀르고는 앙굴렘에서 발생한 금융 위기를 계기로, 이자로 돈을 빌리는 문제를 처음으로 종교적 관점이 아닌 과학적으로 다룬 ''Mémoire sur les prêts à intérêt''를 썼다. 튀르고의 의견은 두 가지 방법 사이에서 타협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국가 규제 및 간섭에 반대하고 자유 경쟁을 옹호했다. 동시에 농업과 지역 산업을 장려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특히 리모주에서 도자기 제조를 설립했다.

3. 2. 저술
1769년 튀르고는 앙굴렘의 경제 위기에 대해 《이자론》(''Mémoire sur les prêts à intérêt'')을 저술하였다. 이 논문에서 그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에 대해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독특하게,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지에 대한 종교적 관점이 아닌 과학적으로 접근하였다.[6] 튀르고가 감독관으로 있을 시절에 쓴 다른 논문으로는 《광산과 채석장에 대한 논문》(''Mémoire sur les mines et carrières'')과 《철의 표시에 대한 논문》(''Mémoire sur la marque des fers'')이 있다. 두 논문에서 그는 국가의 규제와 개입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고 시장에서의 자유 경쟁을 주장하였다.[6]튀르고의 가장 널리 알려진 저술 중 하나는 부의 형성 및 분배에 대한 고찰(''Réflexions sur la formation et la distribution des richesses'')로, 감독관 재직 시절 초기에 쓰여졌다.[12] 1766년 저술된 ''Ephémérides du citoyen''는 1769년과 1770년 뒤 퐁 드 느무르가 발행한 간행물에 실렸고, 1776년 독립적으로 출판되었다. 뒤 퐁은 이 글을 프랑수아 케네의 이론에 더 충실하게 하기 위해 많은 수정을 가하였고, 이로 인해 튀르고는 뒤 퐁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였다.[6][15] 튀르고는 상업의 기원을 조사한 후 땅이 부의 원천이라는 케네의 이론을 전개하였고, 사회를 생산 계층(농업 계층), 봉급 계층(기술 계층), 지주 계층의 세 계층으로 나누었다. 또한 농작의 여러 방법과 교환과 교역, 돈의 성질, 자본의 기능들에 대해 논한 후 땅의 순 생산량을 기준으로 과세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상업과 공업의 완전한 자유를 주장하였다.[6]
4. 재정총감 (1774-1776)
튀르고는 루이 16세 즉위 직후 내각에 합류하여, 1774년 8월 24일 재무 총감에 임명되었다.[16] 그의 임명은 대체로 지지를 받았으며, ''철학자''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튀르고는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파산 금지, 증세 금지, 차입 금지"라는 원칙을 내세웠다. 그는 모든 부서의 지출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세출 예산을 폐지하는 등 강력한 긴축 정책을 펼쳤다.[16] 또한 ''세금 징수청'' 개혁을 고려하고, 화약 제조와 왕실 우편 행정 등의 특정 임대차를 개선하는 조치를 취했다.
튀르고의 노력으로 적자는 상당히 줄었고, 국가 신용은 높아져 1776년 실각 직전에는 네덜란드 은행가들과 4%의 이율로 대출을 협상할 수 있을 정도였다.[16] 그러나 적자는 여전히 컸고, 튀르고가 추진하려던 토지에 대한 단일세 부과는 실현되지 못했다. 그는 여러 ''관문세''와 소규모 관세를 폐지하고, 경제적인 이유로 미국 독립 전쟁에 프랑스의 참전을 반대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774년 9월 13일, 튀르고는 곡물 자유 무역을 확립하는 칙령을 발표했다.[16] 그러나 이 칙령은 국왕 자문회에서조차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튀르고는 아베 테레이의 통치하에서 곡물 투기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여기에는 왕족 몇몇도 포함)에게 미움을 받았다. 게다가 ''곡물 거래''는 살롱에서 인기 있는 주제였고, 갈리아니 등 중농주의자 반대자들은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랑게와 네케르 역시 튀르고의 정책에 반대했다.
튀르고는 루이 16세의 신임을 유지했지만, 다른 각료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친구 말제르브조차 그를 경솔하다고 생각했으며, 모르파 백작과의 불화도 심화되었다. 튀르고에 대한 풍자를 담은 팸플릿이 등장하기도 했다.[6]
4. 1. 개혁의 시도
1774년 7월 20일 튀르고는 해양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계몽사상가들의 반대로 승인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8월 24일 재정총감으로 임명되어 본격적인 경제 개혁을 추진했다. 튀르고는 '파산 없음, 세금 인상 없음, 차입 없음'이라는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며, 강력한 긴축 재정 정책을 추진하였다.[16] 모든 부서의 지출을 재정총감의 승인을 받도록 하고, 한직에 있는 사람들을 압박하는 등 재정 개혁을 단행했다. 튀르고는 개인적으로 왕의 사치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튀르고의 정책은 적자 폭을 감소시키고 국가신용도를 향상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의 퇴임 직전에는 네덜란드의 은행가들로부터 4%의 이자로 대출이 가능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여전히 적자의 폭은 커서 튀르고가 시행하고자 했던 간접세로의 치환, 토지세의 일원화 등은 시행되지 못하였다. 여러 물품입시세와 다른 작은 의무들을 축소시키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튀르고는 1774년 9월 13일 곡물 자유 무역을 확립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칙령은 국왕 자문회에서조차 강력한 반대에 직면했다. 칙령에 대한 반대는 강력했는데, 튀르고는 아베 테레이의 통치하에서 곡물 투기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여기에는 왕족 몇몇도 포함)에게 미움을 받았다. 게다가 ''곡물 거래''는 수년 동안 살롱의 인기 있는 주제였고, 갈리아니 등 중농주의자의 반대자는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1774년의 흉작으로 1774년 겨울과 1775년 초 봄에 빵 가격이 눈에 띄게 상승했다. 1775년 4월과 5월 초, 농민들이 디종의 총독에게 빵을 구걸했을 때, 그는 프랑스 혁명 동안 회상될 유명한 말을 했다. "풀이 돋아났으니, 들판으로 가서 그것을 뜯어먹으시오." 이 극심한 빵 폭동은 '곡물 전쟁'으로 알려졌으며, 다가올 프랑스 혁명을 불길하게 예고했다. 튀르고는 폭동을 진압하는 데 있어 굳건함과 결단력을 보여주었지만, "모든 군대 징집은 폭동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듯이 군인을 사용하는 데 약간의 신중함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루이 16세가 발코니로 나가 군중을 만나 빵 가격 인하를 말하려 하자, 튀르고가 이를 만류하여 왕족과 갈등을 빚었고, 빵 가격은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17]
튀르고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프랑스의 미국 독립 전쟁 참전을 반대하였으나, 결국 프랑스는 참전을 하였다. 1774년부터 1776년까지 해군 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튀르고는 미국 독립 전쟁에 대한 재정 지원을 반대했다. 그는 혁명의 미덕과 불가피한 성공을 믿었지만, 프랑스가 공개적으로 혁명을 지원할 재정적, 사회적 여유가 없다고 경고했다.
4. 2. 반대파
튀르고의 개혁 정책은 특권층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귀족, 의회, 가톨릭 성직자, 자본가, 파리의 중산층 등 다양한 계층이 튀르고의 정책에 반대했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튀르고를 싫어했다.1774년의 흉작으로 인해 1774년 겨울과 1775년 초봄에 빵 가격이 상승하여, 1775년 4월에는 디종에서, 5월에는 '밀가루 전쟁'이라고 불리는 폭동이 일어났다. 튀르고는 폭동 진압 과정에서 확고부동함과 결단력을 보여주었으며, 왕실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17]
4. 3. 6개항의 포고령
1776년 1월, 튀르고는 왕실고문회에 6개항의 포고령을 제출했다. 이 중 4개는 큰 중요성을 가지지 않았으나, 나머지 2개, 즉 부역 폐지와 길드 폐지 포고령은 상당한 반대를 불러일으켰다.[18]- 부역 폐지 포고령: 특권 폐지와 가톨릭 성직자, 귀족, 제3계층 모두에 대한 과세를 목표로 했다. (이후 모르파의 요청으로 가톨릭 성직자 계층은 제외되었다.)
- 길드 금지 포고령: 모든 사람은 제한 없이 일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원칙에 기반을 두었다.
6개항의 포고령은 3월 12일에 승인되었지만, 이로 인해 튀르고는 거의 모든 고위층들을 적으로 두게 되었다. 상위 계층의 특권에 대한 튀르고의 공격은 귀족과 의회,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반발을 샀다. 왕실 재산에 대한 개혁은 법원, 자유 무역에 대한 법률 제정은 자본가, 관용과 개신교에 대한 옹호는 가톨릭 성직자, 길드에 대한 칙령은 파리의 중산계층과 콩티 공 등 길드를 통해 이익을 얻던 사람들과 마찰을 빚었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튀르고가 자신의 후견인들에게 하사품을 주는 것을 반대하고 폴리냐크 부인의 비슷한 행동을 비판했기 때문에 그를 싫어했다.[6]
4. 4. 튀르고의 계획
계몽절대주의를 신봉한 튀르고는 왕이 개혁을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의회가 정의의 테두리 밖에서는 권한을 가지지 못한다고 보아 법률 제정에 외부가 개입하는 것을 반대했다. 튀르고는 말제르브가 제안한 삼부회 소집에 반대했는데, 특권 신분인 두 계층이 삼부회에서 지나치게 큰 권력을 가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20]튀르고의 계획은 비공식적으로 왕에게 제출된 ''Mémoire sur les municipalités''에 잘 나타나 있다. 튀르고는 이 논문에서 토지 소유자만이 투표권을 가지며, 세 계층(성직자, 귀족, 평민) 사이에 차별 없이 의회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계획에 따르면, 마을이나 도시의 투표권자들이 해당 지역 대표를 선출하고, 이 대표들은 다시 주 단위 대표를 뽑으며, 이렇게 뽑힌 대표가 최상위 의회에 참석하는 방식이었다. 이 최상위 의회는 입법 권한은 없지만, 징세 관리에 대해 논의할 수 있었다.
튀르고의 계획은 교육, 하층민에 대한 복지 등과도 연결되어 있었다.[20] 그러나 루이 16세는 튀르고의 계획을 과감하다고 여겨 따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왕과 튀르고 사이의 근본적인 의견 차이로 갈등이 심화되었다.[20]
5. 실각과 그 후 (1776-1781)
1776년 5월 12일 튀르고는 해임되었다.[6] 해임 직후 튀르고는 라 로슈 기용에 위치한 엥빌 공작부인의 샤토에 머무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로 돌아왔다.[6] 그는 파리에서 남은 일생을 과학과 문학 연구에 매진하였고, 1777년 인문학 학회인 Académie des Inscriptions et Belles-Lettres의 부회장이 되었다.[6] 튀르고는 1781년 3월 18일 파리에서 사망하였다.[6]
튀르고의 실각 원인은 명확하지 않다. 자크 네케르의 음모, 마리 앙투아네트의 압력, 모르파 백작의 음모 등 여러가지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추정된다.[6] 네케르는 왕비에 대한 공격이 포함된 날조된 편지를 왕에게 보이고, 튀르고의 무능함을 보이기 위해 왕 앞에서 튀르고의 예산안에 대해 논하였다고 한다.[6] 1776년 4월 말제르브가 사임한 후 튀르고와 모르파는 말제르브의 후임 문제로 다투었고, 이 과정에서 튀르고가 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르파를 심하게 비난한 일로 인하여 결국 튀르고는 모르파를 적으로 두게 되었다.[6]
6. 사상
튀르고는 프랑수아 케네 등의 중농주의 체계에 자본 개념을 도입하고, '잉여' 개념을 명확히 하여 '잉여'와 '성장'의 연관성을 밝혔다.[6] 또한 이자율과 금리를 연결하고, '시장 가격'과 '자연 가격'을 명확히 구분했다.[6] 튀르고는 기존의 중농주의자들과 달리 잉여가 농업뿐만 아니라 산업에서도 발생한다고 생각했다.[6] 이러한 발상은 애덤 스미스와 고전파에 계승되었다.[6]
튀르고는 한계 혁명의 선구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의 저서 『가치와 화폐』(''Valeurs et Monnaies'', 1769)는 가격의 수요 기반 이론을 포함하고 있으며, 거래자 수가 많아지면 교환의 비결정성 정도가 낮아진다는 점을 논의했다.[6] 이 주제는 나중에 에지워스가 다루었다. 1768년의 ''Observations''에서는 생산에서 투입 비율을 가변적으로 할 수 있다는 점을 도입했으며, 요소 생산에 대한 한계 생산성 체감 개념을 제시했다.[6] 1766년의 화폐 관련 논의에서는 실질 금리와 명목 금리를 구분했다.[6]
6. 1. 사회 발전론
튀르고는 역사상 처음으로 기술적, 경제적 진보에 의한 사회 발전 단계론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8] 이는 당시 프랑스를 휩쓸었던 아메리카 원주민 정치가 칸데야롱크 등에 의한 자유롭고 평등한 미개 사회로부터 부자유하고 불평등한 프랑스 사회에 대한 비판에 대한 응답이었다. 즉, 튀르고는 미개인의 자유와 평등은 누구나 평등하게 가난한 사회에서만 가능하며, 사회가 발전하고 기술이 진보하며, 개인의 능력 차이가 커지고, 분업이 진전되어 복잡한 "농업 문명", "상업 문명"으로 발전한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일부 인간의 빈곤이 사회 전체의 번영을 위한 필요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사회의 진화는 수렵 사회에서 목축, 농경을 거쳐 현대와 같은 도시 상업 문명의 단계에 이른다고 한다.[8] 이러한 사회 진화론은 애덤 스미스, 애덤 퍼거슨, 존 밀러 등에 의해 인류사의 일반 이론으로 편입되었다.[8]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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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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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Anne-Robert-Jacques Turgot (1727–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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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Norman family names of Viking ori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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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got, Anne Robert Jacq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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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rench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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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Cl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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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the Idea of Prog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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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irs and markets and Fond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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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Notices sur les auteurs des 17 volumes de « discours » de l'Encyclopédie (suite et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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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mpôt de quotité is the result of the application of a tax where the result cannot be calculated in adv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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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lections on the Formation and Distribution of Weal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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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Chinois de Turg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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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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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terary device adopted by Turgot allows for the presentation of the subject from the ground up, without appearing to undervalue the reader's intelligence. Compare the Persian Letters of Charles de Secondat, Baron de Montesquieu|Montesquieu, with their solemn explication of European customs to an outsider, in Montesquieu a vehicle for sat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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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ighteenth-century Economics: Turgot, Beccaria and Smith and Their Contempora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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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olog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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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 French Revolution, 1789–1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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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nd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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啓蒙主義経済学者たち(The Enlightenment Econom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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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ンヌ・テュルゴー (Anne-Robert-Jacques Turgot), 1727-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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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1. [西洋経済古書収集 <テュルゴー>]を中心に 2.[https://cruel.org/econthought/profiles/turgot.html アンヌ=ロベール=ジャック・テュルゴー(Anne-Robert-Jacques Turgot), 1727-1781.] 3.{{harv|中川辰洋|2011|p=126}}を混合'
[25]
문서
'1.{{harv|西洋経済古書収集 <テュルゴー>}}
2.{{harv|アンヌ=ロベール=ジャック・テュルゴー(Anne-Robert-Jacques Turgot), 1727-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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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十八世紀とフランス革命の回想」(アンドレ・モルレ著、鈴木峯子訳、国書刊行会、280頁)
[27]
문서
『テュルゴー資本理論研究』(中川辰洋著、日本経済評論社、205-206頁)
[28]
문서
『テュルゴー資本理論研究』(中川辰洋著、日本経済評論社、206-207頁)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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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テュルゴー資本理論研究』(中川辰洋著、日本経済評論社、23-24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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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18世紀フランスの法と正義』(石井三記著、名古屋大学出版会、229-235頁)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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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経済思想の歴史
https://cruel.org/ec[...]
2015-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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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万物の黎明』2023年 光文社 p6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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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nald L. Meek "Social Science and the Ignoble Savage"1976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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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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