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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하계 패럴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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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8년 하계 패럴림픽은 1988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개최된 패럴림픽으로, 올림픽과 같은 해에 같은 도시에서 열린 두 번째 대회였다. 서울은 1983년 유치 경쟁에서 멜버른을 제치고 개최지로 선정되었으며, 60개국에서 3,057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대회 엠블럼은 태극 문양을 모티브로 디자인되었으며, 마스코트는 곰두리였다. 미국이 메달 집계 1위를 차지했고, 대한민국은 종합 7위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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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하계 패럴림픽
기본 정보
1988년 하계 패럴림픽 로고
개최 도시서울, 대한민국
모토도전을 위한 화합
모토 (영어)United for the Challenge
참가 국가60
참가 선수3,057
종목16
세부 종목732
개막식1988년 10월 15일
폐막식1988년 10월 24일
개회 선언노태우 대통령
선수 선서김소부
심판 선서정봉수
성화 점화이재운, 김현미
주 경기장서울올림픽주경기장
이전 하계 패럴림픽뉴욕/스토크맨더빌 1984
다음 하계 패럴림픽바르셀로나/마드리드 1992
이전 동계 패럴림픽인스브루크 1988
다음 동계 패럴림픽티뉴/알베르빌 1992
대회 명칭
한국어1988년 하계 패럴림픽
영어1988 Summer Paralympics
일본어1988년 서울 패럴림픽
로마자 표기Cheon gubaek palsip-pal nyeon hagye paereollimpik
위치 정보

2. 대회 유치 과정

1983년 7월 28일, 영국 에일즈베리 시민 센터에서 열린 국제 패럴림픽 위원회(International Paralympic Committee) 제4차 회의에서 대한민국서울오스트레일리아멜버른 두 도시가 1988년 하계 패럴림픽 유치 의향을 밝혔다.[1] 서울은 황연대 박사의 주도로, 멜버른은 존 그랜트 박사의 주도로 유치 경쟁에 참여하였다.[1]

국제 패럴림픽 위원회(ICC)는 두 도시의 관심도와 개최 준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설문지를 발송했고, 두 후보 도시 모두 답변 기한으로 1년을 받았다.[1] 그러나 멜버른은 호주 내부에서 브리즈번1992년 하계 올림픽 유치 경쟁에 참여하면서 1992년 하계 패럴림픽 개최 가능성이 제기되자 유치 노력을 중단하였다.[1] 결국 서울만이 설문에 완성된 답변을 제출하였다.[1]

최종 결정은 1984년 6월 14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국제 패럴림픽 위원회(ICC) 제6차 회의에서 이루어졌고, 서울이 통합 패럴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었다.[1] 1988년 하계 올림픽과 패럴림픽 경기는 1964년 하계 패럴림픽 이후 처음으로 같은 도시에서 개최되었다.[1]

1988년 하계 올림픽과 패럴림픽 경기가 같은 도시에서 같은 시설을 사용하여 개최될 수 있다는 제안은, 새로운 세대와 떠오르는 세대의 패럴림픽 선수들이 이전에는 없었던 많은 올림픽 경기장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했다.[1] 이는 또한 국제 조정 위원회(ICC)의 주관 하에 열린 최초의 하계 패럴림픽이었다.[2] 1982년, 올림픽 가족은 ICC를 회원으로 받아들였고, 이는 패럴림픽 경기 조직과 관련하여 국제 패럴림픽 위원회의 협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2]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의 도움으로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SLOOC)는 패럴림픽 경기가 올림픽 경기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이해하고 서울 올림픽 인적 자원, 시설 및 장비 공유를 허용하는 지원 계획을 수립했다.[2] SLOOC는 보조금을 지원했다.[2]

2. 1. 유치 신청 및 경쟁

1983년 7월 28일, 영국 에일즈베리 시민 센터에서 열린 국제 패럴림픽 위원회(International Paralympic Committee) 제4차 회의에서 대한민국서울오스트레일리아멜버른 두 도시가 1988년 하계 패럴림픽 유치 의향을 밝혔다.[1] 서울은 황연대 박사의 주도로, 멜버른은 존 그랜트 박사의 주도로 유치 경쟁에 참여하였다.[1]

국제 패럴림픽 위원회(ICC)는 두 도시의 관심도와 개최 준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설문지를 발송했고, 두 후보 도시 모두 답변 기한으로 1년을 받았다.[1] 결과적으로 서울만이 설문에 완성된 답변을 제출하였고, 멜버른은 응답하지 않았다.[1]

같은 시기에, 오스트레일리아 내부에서는 브리즈번1992년 하계 올림픽 유치 경쟁에 참여하는 정치적 움직임이 있었고, 브리즈번이 1992년 하계 패럴림픽을 개최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멜버른의 유치 노력은 사실상 무산되었다.[1] 최종 결정은 1984년 6월 14일 뉴욕에서 열린 국제 패럴림픽 위원회(ICC) 제6차 회의에서 이루어졌고, 서울이 통합 패럴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었다.[1] 1988년 하계 올림픽과 패럴림픽 경기는 1964년 하계 패럴림픽 이후 처음으로 같은 도시에서 개최되었다.[1]

1988년 하계 올림픽과 패럴림픽 경기가 같은 도시에서 같은 시설을 사용하여 개최될 수 있다는 제안은, 새로운 세대와 떠오르는 세대의 패럴림픽 선수들이 이전에는 없었던 많은 올림픽 경기장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했다.[1] 이 대회부터 개최국의 성적은 이러한 선수들의 지원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1]

2. 2. 서울의 유치 성공

1983년 7월 28일, 영국 에일즈베리 시민 센터에서 열린 국제 패럴림픽 위원회(International Paralympic Committee) 제4차 회의에서 대한민국서울오스트레일리아멜버른 두 도시가 1988년 하계 패럴림픽 유치 의향을 밝혔다.[1] 서울은 황윤대 박사의 주도로, 멜버른은 존 그랜트 박사의 주도로 유치 경쟁에 참여하였다.[1]

국제 패럴림픽 위원회(ICC)는 두 도시의 관심도와 개최 준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설문지를 발송했고, 두 후보 도시 모두 답변 기한으로 1년을 받았다.[1] 그러나 멜버른은 호주 내부에서 브리즈번이 1992년 하계 올림픽 유치 경쟁에 참여하면서 1992년 하계 패럴림픽 개최 가능성이 제기되자 유치 노력을 중단하였다.[1] 결국 서울만이 설문에 완성된 답변을 제출하였다.[1]

최종 결정은 1984년 6월 14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국제 패럴림픽 위원회(ICC) 제6차 회의에서 이루어졌고, 서울이 통합 패럴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었다.[1] 1988년 하계 올림픽과 패럴림픽 경기는 1964년 하계 패럴림픽 이후 처음으로 같은 도시에서 개최되었다.[1]

1988년 하계 올림픽과 패럴림픽 경기가 같은 도시에서 같은 시설을 사용하여 개최될 수 있다는 제안은, 새로운 세대와 떠오르는 세대의 패럴림픽 선수들이 이전에는 없었던 많은 올림픽 경기장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했다.[1] 1964년 도쿄 대회 이후 처음으로 같은 도시에서 올림픽과 패럴림픽이 개최되었으며, 이러한 전통은 서울에서 부활하여 그 이후로도 유지되었다.[2] 이는 또한 국제 조정 위원회(ICC)의 주관 하에 열린 최초의 하계 패럴림픽이었다.[2] 1982년, 올림픽 가족은 ICC를 회원으로 받아들였고, 이는 패럴림픽 경기 조직과 관련하여 국제 패럴림픽 위원회의 협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2]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의 도움으로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SLOOC)는 패럴림픽 경기가 올림픽 경기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이해하고 서울 올림픽 인적 자원, 시설 및 장비 공유를 허용하는 지원 계획을 수립했다.[2] SLOOC는 1,285만 7,143달러의 보조금을 지원했다.[2]

3. 올림픽과 패럴림픽 조직위원회 간의 관계

서울 패럴림픽 조직위원회(SEPOC)는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SLOOC)와 다소 간접적인 관계였지만, 패럴림픽 경기를 위한 선수, 기술 직원 및 기타 공통 영역의 모집과 훈련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SLOOC는 인적 자원, 시설, 장비 공유 등 지원 계획을 수립했으며, 1,285만 7,143달러의 보조금을 지원했다.

4. 선수촌

1980년대 서울의 빈민 주거 지역 강제 철거는 저소득층 주거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증폭시켰다.[3] 학자, 정책 입안자, 변호사들은 최소 주택 기준 및 시 정부의 투명성 확보를 요구했다.[3]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88년 하계 패럴림픽 선수촌 건설은 장애인 접근성 개선 및 주거 환경에 대한 인식 제고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송파구 문정동에 위치한 서울 패럴림픽 선수촌은 1987년 4월 착공하여 1988년 서울 패럴림픽 개최를 위해 준공되었다.[4] 총 1,316세대의 10개동으로 구성된 선수촌은 지상 14층 규모였다. 휠체어 전용 아파트 3개동에는 휠체어 전용 대형 엘리베이터, 전자식 자동 출입문, 장애인 전용 화장실과 욕조 등 각종 편의 시설이 완비되었다. 아파트 현관과 거실 등에 문턱을 없애고 복도에는 핸드 레일을 부착했으며, 복도 폭을 넓혀 휠체어가 서로 비켜갈 수 있도록 하였다.

서울 패럴림픽 선수촌은 서울 올림픽 공원과 잠실종합운동장 사이 교차로에서 4km 떨어진 곳에 위치했으며, 장애인이 완전히 이용할 수 있는 아시아 대륙 최초의 주택 단지였다.

서울 패럴림픽 이후 선수촌은 '''문정시영아파트'''로 명칭이 변경되어 1989년 3월 일반에 분양되었다.

화재나 누수와 같은 상황 발생 시 휠체어 사용자 대피를 위해 각 건물에는 14층까지 올라가는 경사로가 설계되었다.[4]

4. 1. 선수촌 건설 배경 및 사회적 의미

1980년대 서울의 빈민 주거 지역 강제 철거는 저소득층 주거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증폭시켰다.[3] 학자, 정책 입안자, 변호사들은 최소 주택 기준 및 시 정부의 투명성 확보를 요구했다.[3]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88년 하계 패럴림픽 선수촌 건설은 장애인 접근성 개선 및 주거 환경에 대한 인식 제고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송파구 문정동에 위치한 서울 패럴림픽 선수촌은 1987년 4월 착공하여 1988년 서울 패럴림픽 개최를 위해 준공되었다.[4] 총 1,316세대의 10개동으로 구성된 선수촌은 지상 14층 규모였다. 휠체어 전용 아파트 3개동에는 휠체어 전용 대형 엘리베이터, 전자식 자동 출입문, 장애인 전용 화장실과 욕조 등 각종 편의 시설이 완비되었다. 아파트 현관과 거실 등에 문턱을 없애고 복도에는 핸드 레일을 부착했으며, 복도 폭을 넓혀 휠체어가 서로 비켜갈 수 있도록 하였다.

서울 패럴림픽 선수촌은 서울 올림픽 공원과 잠실종합운동장 사이 교차로에서 4km 떨어진 곳에 위치했으며, 장애인이 완전히 이용할 수 있는 아시아 대륙 최초의 주택 단지였다.

서울 패럴림픽 이후 선수촌은 '''문정시영아파트'''로 명칭이 변경되어 1989년 3월 일반에 분양되었다.

화재나 누수와 같은 상황 발생 시 휠체어 사용자 대피를 위해 각 건물에는 14층까지 올라가는 경사로가 설계되었다.[4]

5. 대회 상징

성낙훈 디자이너가 디자인하였으며, 대한민국의 전통적인 태극 문양을 모티브로 하였다.[2] 파란색, 검은색,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태극 문양은 올림픽기에 그려진 고리 문양을 본떠서 디자인했다. 1988년 하계 패럴림픽 엠블럼은 이듬해 창설된 국제 패럴림픽 위원회의 엠블럼으로 채택되었으며, 1994년 동계 패럴림픽까지 사용되었다.[2][6]

'W'자 형태로 배열된 다섯 개의 '눈물방울'(대한민국 국기에도 있는 태극 문양의 절반을 닮았다)과 올림픽 링의 색상은 5개 대양과 5개 대륙을 나타냈다.[2] 그러나 1989년부터 이 상징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5륜 마크와 너무 유사하다는 이유로 많은 논란이 있었고, 결국 변경되었다.[6]

곰두리


1988년 하계 패럴림픽의 마스코트는 곰두리로, 경기공업개방대학(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이윤수 교수가 디자인하였다.[7][8] 반달가슴곰 두 마리가 이인삼각경기를 펼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한국 전통 문화에서 곰은 용기와 지혜를 상징하며,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라는 두 자매 별자리의 존재가 이를 반영한다.[7] 마스코트로 선택된 두 마리의 곰은 아시아흑곰이며, V자 모양의 흰 가슴 표시가 특징이다. 두 마스코트는 다리에 밧줄로 묶여 있는 형제로, 이는 패럴림픽 조직위원회가 꿈꾸었던 올림픽과 패럴림픽 경기의 형제애, 인도, 일관성 있는 공존 협력 및 관계, 그리고 행사 중의 업적과 동지애를 나타낸다.[7][8]

5. 1. 엠블럼

성낙훈 디자이너가 디자인하였으며, 대한민국의 전통적인 태극 문양을 모티브로 하였다.[2] 파란색, 검은색,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태극 문양은 올림픽기에 그려진 고리 문양을 본떠서 디자인했다. 1988년 하계 패럴림픽 엠블럼은 이듬해 창설된 국제 패럴림픽 위원회의 엠블럼으로 채택되었으며, 1994년 동계 패럴림픽까지 사용되었다.[2][6]

'W'자 형태로 배열된 다섯 개의 '눈물방울'(대한민국 국기에도 있는 태극 문양의 절반을 닮았다)과 올림픽 링의 색상은 5개 대양과 5개 대륙을 나타냈다.[2] 그러나 1989년부터 이 상징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5륜 마크와 너무 유사하다는 이유로 많은 논란이 있었고, 결국 변경되었다.[6]

5. 2. 마스코트



1988년 하계 패럴림픽의 마스코트는 곰두리로, 경기공업개방대학(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이윤수 교수가 디자인하였다.[7][8] 반달가슴곰 두 마리가 이인삼각경기를 펼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한국 전통 문화에서 곰은 용기와 지혜를 상징하며,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라는 두 자매 별자리의 존재가 이를 반영한다.[7] 마스코트로 선택된 두 마리의 곰은 아시아흑곰이며, V자 모양의 흰 가슴 표시가 특징이다. 두 마스코트는 다리에 밧줄로 묶여 있는 형제로, 이는 패럴림픽 조직위원회가 꿈꾸었던 올림픽과 패럴림픽 경기의 형제애, 인도, 일관성 있는 공존 협력 및 관계, 그리고 행사 중의 업적과 동지애를 나타낸다.[7][8]

6. 황연대 성취상

국제 패럴림픽 위원회는 1988년 하계 패럴림픽부터 동하계 패럴림픽 폐막식 때마다 패럴림픽 최우수 남녀 선수에게 황연대 성취상을 수여하고 있다. 이 상은 대한민국의 소아마비 장애인 의사인 황연대 박사가 대한민국의 언론사로부터 받은 오늘의 여성상 상금을 국제 패럴림픽 위원회에 기부하면서 제정되었다.

7. 개회식

호주 대표팀 기수 폴 크로프트(Paul Croft)의 개회식 모습.


1988년 하계 패럴림픽 개회식에는 61개국에서 3,057명의 선수(당시 신기록)가 참가하여 7만 5천 명 이상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었다.[9] 대한민국노태우 대통령은 옌스 브로만 국제 패럴림픽 위원회(ICC) 회장에게 새로운 패럴림픽기를 전달했다.[10] 호주 대표팀 기수는 두 번째 패럴림픽에 출전한 폴 크로프트(Paul Croft)가 맡았다.[11]

패럴림픽 성화 봉송은 여러 단계를 거쳐 진행되었다. 먼저 한쪽 다리가 없는 대한민국 배구 선수가 성화를 들고 입장하여 뇌성마비 선수에게 전달했다. 이어서 휠체어 선수 조현희가 7살 된 딸의 도움을 받아 시각장애인 마라토너 이재운에게 성화를 넘겼다. 이재운은 여자 핸드볼 금메달리스트 기필현미와 함께 성화대에 불을 붙였다.[12] 이 장면은 2018 평창 동계 패럴림픽 개회식에서 재현되었다.[12]

개회식에서는 파랑, 검정, 빨강, 노랑, 초록의 패럴림픽 색상으로 꾸며진 낙하산 부대원들이 휠체어를 탄 어린이들의 행렬과 함께 경기장에 들어오는 순서가 있었다.[12] 패럴림픽 조직위원장 고규남은 선수들에게 용감한 도전자, 영광스러운 정복자, 공정한 참가자가 될 것을 당부하는 연설을 했다.[12]

8. 폐회식

폐막식 당일 시상식으로 인해 선수들이 폐막식에 참석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13] 스페인 당국이 개최 도시 계약 및 일부 공식 문서에 서명하지 않아 다음 대회가 바르셀로나에서 열릴지 확실하지 않아 의식의 의전 부분에서 스페인 국기와 국가가 사용될지 여부에 대한 의문도 있었다.[13] 그러나 1992년 하계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친선과 개방의 표시로 참관단을 파견하고, 기관 관계 담당 이사를 파견하여 폐막식에서 패럴림픽기를 인수받음으로써 의지를 확인했다.[13] 1992년 하계 패럴림픽 개최 도시 계약은 다음 해에 체결되었다.[13]

개막식과 마찬가지로, 올림픽 개막식의 여러 문화 요소들이 다시 제시되거나 일부 추가 요소와 함께 각색되었다.[13]

9. 논란

1988년 서울 패럴림픽은 여러 논란과 논쟁 속에서 개최되었다.[10]

남자 핸드볼 조 추첨에서 이란이스라엘 팀이 같은 조에 배정되자, 이란 핸드볼 팀은 이스라엘과의 경기를 거부하여 실격되었다.[10] 국제 패럴림픽 위원회(ICC)는 이를 "스포츠가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되어 중립성을 훼손했다"고 판단하여 이란 팀을 즉시 귀국 조치했다.[10] 이란 팀 매니저 아스가르 다드칸은 공식 사과를 하고 다른 이란 선수들은 규정을 준수하여 이스라엘 및 다른 국가들과 경쟁할 것이라고 약속했다.[10]

리비아 대표단은 대회 기간 중에 서울에 도착하여 ICC 규정을 위반했다.[10] 이들은 경기에 등록하거나 패럴림픽 선수촌에 머물 수 없었지만, 서울 패럴림픽 조직위원회(SEPOC)의 요청으로 참관인 자격으로 마라톤 종목에 출전할 수 있었다.[10] 그러나 메달이나 공식적인 결과는 인정받지 못했고, 폐막식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10]

육상 슬라럼 종목에서는 일부 선수들이 1라운드 종료 후 메달을 받았으나, 관계자들은 2라운드 경기 후에 메달을 수여해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14] 그 이후로 슬라럼 종목은 패럴림픽에서 제외되었다.[14]

10. 참가국

1988년 하계 패럴림픽에는 총 60개국이 참가했다.[16] 불가리아, 키프로스, 이란, 마카오, 모로코, 오만,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싱가포르, 소련, 튀니지 11개국이 처음으로 하계 패럴림픽에 참가하였다.[18] 소련은 1988년 동계 패럴림픽에 이어 하계 패럴림픽에도 처음으로 참가하였으며, 총 56개(금메달 21개)의 메달을 획득하였다. 이는 소련의 처음이자 마지막 하계 패럴림픽 참가였는데, 1992년 하계 패럴림픽 이전에 소련이 해체되었기 때문이다.[18]

나이지리아, 리비아, 수단, 알제리, 에콰도르, 짐바브웨 6개국은 대회 참가 신청을 했으나 선수단의 대한민국 입국 일정이 지연되면서 참가가 무산되었다. 한편, 이전 대회에 참가했던 미얀마는 8888 민주화 운동과 국가평화발전위원회를 집권하게 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지 몇 주 후에 열린 이 대회에 불참했다.[17]

참가국 및 선수단 규모는 다음과 같다:


11. 종목

1988년 서울 하계 패럴림픽에서는 17개 정식 종목과 1개의 시범 종목(휠체어 테니스)이 진행되었다.[15] 파워리프팅과 역도는 하나의 종목으로 간주되었다.[15]


  • 골볼
  • 농구
  • 론볼
  • 배구
  • 보치아
  • 사격
  • 사이클
  • 수영
  • 스누커
  • 양궁
  • 역도
  • 유도
  • 육상
  • 축구
  • 탁구
  • 파워리프팅
  • 펜싱
  • 테니스

12. 메달 집계

금메달 수 순으로 상위 10개의 NOC 목록이다. 개최국인 대한민국은 강조 표시되어 있다.

서울 패럴림픽 메달 획득 수
순위국가합계
1미국929185268
2서독776448189
3영국626651179
4캐나다544257153
5프랑스454849142
6스웨덴423822102
7대한민국40351994
8네덜란드30232982
9덴마크25182265
10오스트레일리아23343794
11폴란드22253481
12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21191555
13스페인18131243
14중국1717943
15일본17121746
16이탈리아16152758
17벨기에1517941
18이스라엘15131543
19아일랜드13131844
20오스트리아1371535
21스위스12121034
22핀란드11231549
23노르웨이11111335
24멕시코89623
25브라질491427
26쿠웨이트46818
27유고슬라비아441119
28이란4138
29포르투갈34513
30뉴질랜드241117
31아이슬란드22812
32불가리아2103
33자메이카1438
34페로 제도1337
35이집트1203
36푸에르토리코1203
37바레인1113
38과테말라1001
39아르헨티나0729
40헝가리04711
41케냐0415
42홍콩0279
43그리스0134
44인도네시아0101
44요르단0101
44태국0101
47튀니지0022
48몰타0011



대한민국은 1988년 하계 패럴림픽에서 금메달 40개, 은메달 35개, 동메달 19개를 획득하여 종합 7위를 기록했다. 이는 대한민국이 장애인 스포츠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육상, 수영, 탁구, 양궁 등에서 많은 메달을 획득하였다.

일본은 금메달 17개, 은메달 12개, 동메달 17개를 획득하여 종합 15위를 기록했다.

12. 1. 대한민국 선수단 주요 성적

대한민국은 1988년 하계 패럴림픽에서 금메달 40개, 은메달 35개, 동메달 19개를 획득하여 종합 7위를 기록했다. 이는 대한민국이 장애인 스포츠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육상, 수영, 탁구, 양궁 등에서 많은 메달을 획득하였다.

순위국가합계
7大韓民國/대한민국한국어40351994


12. 2. 일본 선수단 주요 성적

일본은 1988년 하계 패럴림픽에서 육상, 유도, 수영 등 다양한 종목에서 메달을 획득했다. 특히 육상 슬라럼 종목에서 하시바 기이치로, 하야시 세이지, 이토 유미 등 다수의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했다. 유도에서는 이소 진이치, 사이토 마사카즈, 우시쿠보 타키오, 우와노 야스히로가 금메달을 획득했다.

  • 육상
  • 남자:
  • 슬라럼: 하시바 기이치로(1C), 하야시 세이지(3), 오노데라 아키히코(1B), 타케무라 카츠아키(4)
  • 콘봉던지기: 마츠이 나오키(C6)
  • 멀리뛰기: 오자키 미네호(B1)
  • 세단뛰기: 오자키 미네호(B1)
  • 포환던지기: 야마모토 유이치(A4A9)
  • 여자:
  • 슬라럼: 이토 유미(3), 사카이 루미(4)
  • 400m: 오카다 마키(C8)
  • 800m: 오카다 마키(C8)
  • 유도
  • 남자:
  • 65kg급: 이소 진이치 (礎眞一)
  • 78kg급: 우시쿠보 타키오
  • 86kg급: 우와노 야스히로
  • 95kg급 이상: 사이토 마사카즈
  • 수영
  • 남자 400m 자유형: 모기 히데아키(A6)


이 외에도 양궁, 탁구 등에서 은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했다.

참조

[1] 서적 From Stoke Mandeville to Stratford: a history of the summer paralympic games https://pure.coventr[...] Common Ground Publishing LLC 2012
[2] 서적 Stoke Mandeville Road to the Paralympics The Peterhouse Press
[3] 뉴스 Urban improvement for the Jamsil area https://olympics.com[...] 2022-10-05
[4] 서적 From Stoke Mandeville to Stratford : a history of the summer paralympic games https://pure.coventr[...] Common Ground Publishing LLC 2012
[5] 서적 Paralympic Legacies (Sport and Society) Common Ground Publishing
[6] 학술지 An (In)convenient Truce? Paralympic Stakeholders' Reflections on the Olympic– Paralympic Relationship 2013
[7] 서적 From Stoke Mandeville to Stratford : a history of the summer paralympic games https://pure.coventr[...] Common Ground Publishing LLC 2012
[8] 뉴스 [카드뉴스] 올림픽의 얼굴, 마스코트에 숨은 비밀 http://news.naver.co[...] 2018-03-24
[9] 웹사이트 '88 Seoul Paralympics http://www.paralympi[...] International Paralympic Committee (IPC) 2015-10-20
[10] 서적 Athlete First: A History of the Paralympic Movement https://archive.org/[...] John Wiley & Sons 2008
[11] 서적 '88 Paralympics Appeal report http://www.paralympi[...] Australian Confederation of Sports for the Disabled
[12] 뉴스 Paralympics open with a joyful ceremony http://nla.gov.au/nl[...] 1988-10-16
[13] 서적 Athlete First: A History of the Paralympic Movement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2008-02-28
[14] 뉴스 Disabled athletes told to return wheelchair medals. http://nla.gov.au/nl[...] National Library of Australia 1988-10-21
[15] 웹사이트 1988 Seoul http://www.paralympi[...] International Paralympic Committee 2008
[16] 웹사이트 Medal Standings – Seoul 1988 Paralympic Games http://www.paralympi[...] International Paralympic Committee 2008
[17] 웹사이트 Burma at the Paralympics http://www.paralympi[...] International Paralympic Committee
[18] 웹사이트 Soviet Union at the Paralympics http://www.paralympi[...] International Paralympic Committee
[19] 웹사이트 全斗煥政府、大韓航空機爆実行犯の金賢姫氏を大統領選挙前にソウルへ移送しようと試みも https://web.archive.[...] 中央日報 2019-04-03
[20] 방송 修理工場は眠らない パラリンピックを支えた職人たち NHK総合テレビジョン 2016-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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