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KW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DKW는 1906년 독일에서 설립된 자동차 및 오토바이 제조사이다. 2행정 엔진 기술을 활용하여 오토바이 시장에서 세계 최대 규모로 성장했으며, 1928년에는 유럽 최초의 대량 생산 전륜구동 자동차를 출시했다. DKW는 아우토 유니온에 합병된 후에도 소형차와 오토바이를 생산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서독과 브라질 등에서 생산이 이어졌다. DKW의 기술은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2행정 엔진과 전륜구동 기술은 주요 특징이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독일의 모터사이클 제조 기업 - BMW 모토라드
BMW 모토라드는 BMW의 모터사이클 사업부로, 항공기 엔진 제조업체에서 시작하여 1923년 R32 생산으로 이륜차 시장에 진출, 독자적인 기술과 다양한 모델 라인업을 갖추고 모터스포츠 분야에서도 활동하며, 대부분의 모터사이클은 독일 베를린 공장에서 생산된다. - 독일의 모터사이클 제조 기업 - BMW
BMW는 독일의 자동차, 오토바이, 엔진 제조 회사로, 항공기 엔진 생산으로 시작하여 1920년대부터 오토바이와 자동차를 생산했으며, 롤스로이스와 미니를 인수하고 전기차 시장에도 진출했다. - 아우디 - 호르히
호르히는 1899년 아우구스트 호르히가 설립한 독일의 자동차 제조사이며, 아우디, DKW, 반데러와 합병하여 아우토 유니온을 결성하고 고급차 라인을 담당했으며, 2차 세계 대전 이후 작센링과 아우디로 계승되었다. - 아우디 - 아우구스트 호르히
아우구스트 호르히는 독일의 자동차 엔지니어이자 기업가로서 호르히와 아우디 자동차 회사를 창립했으며, 아우토 우니온을 설립하고 명예 임원으로 활동하다 사망했다. - 폭스바겐 그룹 - 폭스바겐 배기가스 조작 사건
2015년 미국 환경보호청이 폭스바겐 디젤 차량에 배출가스 기준을 속이는 불법 소프트웨어가 장착되었음을 밝혀내어 환경 오염과 공중 보건 위협을 야기했으며, 폭스바겐 CEO 사임, 주가 폭락, 벌금, 손해배상, 리콜 사태를 초래하여 자동차 업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다. - 폭스바겐 그룹 - 포르쉐
포르쉐는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1931년 설립한 독일 자동차 회사로, 설계 사무소에서 시작하여 폭스바겐 비틀 설계에 참여, 이후 356 모델로 독자 브랜드 기반을 다졌으며, 911 등 스포츠카와 SUV 출시, 모터스포츠에서의 성과, 럭셔리 브랜드 명성을 쌓아 현재는 폭스바겐 그룹 자회사로 글로벌 자동차 제조업체이다.
DKW - [회사]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회사명 | Dampf Kraft Wagen |
설립 | 1916년 |
해체 | 1966년 |
운명 | 아우토 유니온에 합병 (1932년), 브랜드 소멸 (1969년) |
후신 | 아우토 유니온 AG (1932–1969) 아우디 NSU 아우토 유니온 AG (1969–1985) 아우디 AG (1985–현재) |
위치 | 초파우, 독일 (1916–1932) 켐니츠 (1932–1949) 잉골슈타트 (1949–1969) |
산업 | 자동차 |
주요 인물 | 요르겐 샤프테 라스무센(DKW 창립자) |
제품 | 자동차 오토바이 |
모회사 | 아우토 유니온 |
별칭 | |
영어 | "steam-powered car" (증기 동력 자동차) "German children's car" (독일 어린이 자동차) "the little wonder" (작은 기적) "the boy's wish" (소년의 소망) |
독일어 | Dampf Kraft Wagen (증기 동력 자동차) |
2. 역사
덴마크 출신의 기계 기술자 예르겐 스카프테 라스무센(Jørgen Skafte Rasmussen)이 1906년 독일 작센 주 켐니츠에 설립한 기계 제조 회사에서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증기 기관 기술을 활용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1918년 개발한 소형 2스트로크 엔진이 '작은 기적'(Das Kleine Wunderdeu)이라 불리며 큰 성공을 거두면서 DKW 브랜드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 엔진 기술을 바탕으로 DKW는 1921년부터 오토바이 생산에 주력하여 불과 몇 년 만에 세계 최대의 이륜차 제조사로 성장했다. 1928년에는 사륜 자동차 시장에 진출하여 2스트로크 엔진을 탑재한 소형 대중차를 선보였고, 같은 해 경영난에 빠진 아우디를 인수했다. 1931년에는 양산형 대중차로는 세계 최초로 전륜구동 방식을 채택한 DKW F1을 출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32년 대공황 시기에 DKW는 아우디, 호르히, 반더러와 합병하여 아우토 유니온을 결성했다. 아우토 유니온 내에서 DKW는 소형 자동차와 오토바이 브랜드로 명맥을 이어갔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회사의 주요 시설이 동독 지역에 편입되면서 어려움을 겪었으나, 서독에서 아우토 유니온으로 재건되어 2스트로크 엔진 기반의 DKW 차량 생산을 재개했다.
전후 DKW는 F89, F91, 아우토 유니온 1000 등 여러 모델을 출시하며 잠시 부흥했으나, 2스트로크 엔진의 기술적 한계와 시장 변화에 직면했다. 1957년 다임러 벤츠에 인수되었고, 1964년 다시 폭스바겐 그룹 산하로 들어갔다. 1966년 마지막 모델인 DKW F102의 생산을 끝으로 DKW 브랜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F102의 차체는 4스트로크 엔진을 탑재하여 아우디 브랜드 부활의 기반이 되었다. DKW 차량은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해외에서도 라이선스 생산되기도 했다.[12][17]
2. 1. 설립과 초기 (1906-1920년대)
덴마크 출신의 기계 기술자 예르겐 스카프테 라스무센(Jørgen Skafte Rasmussen, 1878-1964년)은 젊은 시절 독일로 건너가, 1906년 작센 주 켐니츠에서 '라스무센 & 에른스트 유한회사'를 창업했다.회사는 초기에 기계 제조 분야에서 사업을 확장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14년에는 라스무센의 전문 분야였던 증기 기관 기술을 이용해 증기 자동차 시제품을 만들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때 독일어로 '증기 자동차'를 뜻하는 Dampf Kraft Wagendeu의 머리글자를 따서 'DKW'라는 이름이 처음 사용되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18년, 라스무센은 엔진 기술자 후고 루페에게 25cc 2스트로크 엔진 개발을 의뢰했다. 이 엔진은 '젊은이의 꿈'이라는 뜻의 Des Knaben Wunchdeu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이는 'DKW'라는 약자에 맞춘 것이었다. 이후 이 엔진은 '작은 기적'이라는 뜻의 Das Kleine Wunderdeu로 이름이 바뀌어 자전거 보조 엔진으로 판매되었다. 작고 경제적이면서도 성능이 좋은 이 엔진은 전후 불황을 겪던 독일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이것이 DKW 브랜드의 실질적인 시작이 되었다.
DKW는 성공적인 2스트로크 엔진 기술을 바탕으로 1921년부터 본격적으로 오토바이 생산에 뛰어들었다. 당시의 4행정 엔진은 고속화와 고출력화에 한계가 있었지만, 작고 강력한 2스트로크 엔진은 오토바이에 매우 적합했다. DKW의 소형 오토바이는 뛰어난 성능으로 인기를 얻으며 회사는 불과 몇 년 만에 세계 최대 규모의 이륜차 제조사로 빠르게 성장했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DKW는 1928년 사륜차 시장에도 진출하여, 2스트로크 엔진을 탑재한 혁신적인 소형 대중차를 선보였다. 같은 해, 경영 위기에 처해 있던 아우디의 주식 과반수를 인수하여 회사를 구제하고 경영에 참여하게 되었다.
2. 2. 2행정 엔진 개발과 오토바이 생산 (1918-1930년대)
제1차 세계 대전 중 증기 자동차 개발에 실패했던 예르겐 스카프테 라스무센은 종전 직후인 1918년, 엔진 기술자 후고 루페에게 25cc 2스트로크 엔진 개발을 의뢰했다. 이 작은 엔진은 처음에는 독일어로 '젊은이의 꿈'이라는 뜻의 Des Knaben Wunsch|데스 크나벤 분슈de라고 불렸는데, 이는 회사 이름 DKW의 이니셜과 맞춘 것이었다. 이후 '작은 기적'이라는 뜻의 Das Kleine Wunder|다스 클라이네 분더de로 이름이 바뀌었고, 자전거에 부착하는 보조 엔진으로 판매되어 전후 불황 속 독일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것이 DKW 브랜드의 실질적인 시작이었다.이 성공을 바탕으로 DKW는 1921년부터 2스트로크 엔진 기술을 활용하여 본격적으로 오토바이 생산에 뛰어들었다. 당시 기술적 한계로 고출력을 내기 어려웠던 4스트로크 엔진과 달리, 작지만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는 2스트로크 엔진은 오토바이에 적합했다. DKW의 소형 오토바이는 뛰어난 성능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고, 회사는 불과 몇 년 만에 세계 최대 규모의 오토바이 제조사로 급성장했다.[19]
DKW는 오토바이 시장에서의 성공에 힘입어 1928년에는 사륜 자동차 시장에도 진출하여 2스트로크 엔진을 탑재한 소형 대중차를 선보였고, 같은 해 경영난에 처한 아우디를 인수하여 산하에 두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도 DKW는 세계 최대 오토바이 제조사의 지위를 유지했다. 특히 분리형 싱글(1기통 2피스톤) 2스트로크 엔진에 과급기를 장착한 경주용 오토바이로 당시 소배기량 및 주니어 레이스 부문을 석권하며 기술력을 과시했다.[24]
2. 3. 자동차 생산과 아우토 유니온 합병 (1928-1945년)
1928년 오토바이 생산으로 명성을 얻은 DKW는 사륜 자동차 생산에 뛰어들었다. 첫 모델은 5월 7일에 등장한 작고 비교적 단순한 구조의 DKW Typ P로, 베를린의 슈판다우 공장에서 1931년까지 생산되었다.[5] 같은 해, 회사 소유주 예르겐 스카프테 라스무센은 재정난에 처한 아우디의 과반수 지분을 인수하여 산하에 두었다.[6] 이 인수를 통해 확보한 츠비카우 공장에서는 이후 DKW의 주력 모델이 생산되었다.1929년에는 후륜구동 방식의 DKW Typ 4=8 모델(''Schwebeklasse'', ''Sonderklasse'') 생산을 시작했다. 이 차는 1,000cc 또는 1,100cc의 2행정 V4 엔진을 탑재했는데, 공기 압축을 위한 두 개의 추가 실린더가 있어 외형상 V6 엔진처럼 보이는 독특한 구조를 가졌다.[9] 이 모델은 1940년까지 생산되었다.

자동차 역사에서 더욱 중요한 이정표는 1931년에 등장한 DKW F1이었다. F1은 아우디 출신 개발진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개발되었으며, 대중차로서는 유럽 최초로 전륜구동 방식을 채택한 혁신적인 모델이었다. 횡 방향으로 배치된 2기통 2행정 엔진(584cc 또는 692cc)은 초기 15 PS에서 18 PS 또는 20 PS까지 출력을 냈고, 시동기 겸 발전기인 Dynastart가 장착되었다.[7] F1을 시작으로 F8까지 이어진 F 시리즈(F는 Front, 즉 전륜을 의미)는 1931년부터 1942년까지 츠비카우 공장에서 약 218,000대가 생산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5] F 시리즈의 인기에 힘입어 DKW는 1934년까지 독일 자동차 시장 판매 2위를 차지했으며, 1931년부터 1938년까지 189,369대를 판매하며 시장 점유율 16% 이상을 꾸준히 유지했다.[8]
1932년 대공황의 여파 속에서 DKW는 아우디, 호르히, 반더러와 합병하여 아우토 유니온을 설립했다. 이 합병으로 아우토 유니온은 오펠에 이어 독일 2위의 자동차 제조 그룹으로 발돋움했으며, DKW는 그룹 내에서 소형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담당하는 브랜드로 계속 명맥을 이었다.
1939년 DKW는 유선형 차체에 900cc 직렬 3기통 엔진을 탑재하여 30 PS의 출력과 최고 속도 115km/h를 내는 DKW F9 프로토타입을 개발했다. 그러나 같은 해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F9의 양산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DKW의 민간용 자동차 생산은 중단되었다.
2. 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1966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아우토 유니온의 주요 기반이었던 작센 주가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에 속하게 되면서 회사를 재건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회사는 1949년 서독에서 아우토 유니온 GmbH로 다시 등록되었고, 처음에는 예비 부품을 공급하다가 곧 오토바이 모델인 RT 125와 새로운 배달용 밴인 '슈넬라스터(Schnellaster)' F800 생산을 시작했다. 첫 생산 라인은 뒤셀도르프에 마련되었으며, 이 밴에는 전쟁 전에 마지막으로 생산된 F8 모델과 동일한 엔진이 사용되었다.
전후 첫 번째 승용차는 DKW F89였다. 이 차는 전쟁 전에 개발된 프로토타입 F9의 차체를 사용하고, 마지막 F8 모델에 쓰였던 2기통 2행정 엔진을 탑재했다. 이후 F89는 성공적인 3기통 엔진을 얹은 F91로 대체될 때까지 생산되었다. F91은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생산되었고, 1956년에는 더 커진 F93으로 이어졌다. F91과 F93 모델은 모두 900cc 3기통 2행정 엔진을 사용했으며, 초기에는 34마력(hp)의 출력을 냈고 후기 모델은 38마력(hp)까지 향상되었다. 점화 시스템은 각 실린더마다 독립적인 포인트와 점화 코일 세트를 갖춘 독특한 방식이었으며, 냉각은 크랭크축 풀리에 연결된 팬을 이용한 대류 방식이었다.

F93은 1959년까지 생산되었고, 아우토 유니온 1000으로 대체되었다. 이 모델은 1,000cc 2행정 엔진을 탑재하여 44마력(hp) 또는 50마력(hp) S 버전 중 선택할 수 있었으며 1963년까지 생산되었다. 이 시기에 생산 기지는 뒤셀도르프에서 현재 아우디가 생산을 담당하고 있는 잉골슈타트로 이전되었다. 1957년부터는 당시 소형차로서는 드물게 삭소마트(Saxomat)라는 자동 클러치를 옵션으로 제공했다. 아우토 유니온 1000S의 마지막 버전에는 초기 형태의 디스크 브레이크가 옵션으로 장착되기도 했다. 1957년부터 1964년까지는 2+2 좌석 구성의 스포츠 버전인 아우토 유니온 1000 SP도 생산되었는데, 처음에는 쿠페 모델만 있었고 1962년부터는 컨버터블 모델도 추가되었다.
1956년에는 소량 생산된 희귀 모델인 DKW 몬차가 개인 주도로 제작되었다. 이 차는 표준 F93 섀시에 유리 섬유로 만든 2인승 스포츠 차체를 얹은 형태였다. 처음에는 '솔리튜드'로 불렸으나, 1956년 12월 이탈리아 몬차 국립 자동차 경주장에서 세운 장거리 속도 기록을 기념하여 '몬차'라는 이름이 붙었다. 국제 자동차 연맹(FIA) G 클래스 경주에서 평균 속도 140.961km/h로 48시간, 139.453km/h로 10000km, 139.459km/h로 72시간 주행 기록을 세웠다. 몬차는 처음에는 슈투트가르트의 Dannenhauer & Strauss에서, 이후 하이델베르크의 Massholder, 마지막으로 슈투트가르트의 Robert Schenk에서 생산되었다. 총 생산 대수는 약 75대로 추정되며, 약 50대가 현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산은 1958년 말에 종료되었다. 군용 오프로드 차량인 DKW 뭉가는 1956년부터 1968년까지 생산되었다.
1959년부터는 현대적인 디자인의 주니어/F12 시리즈가 출시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리즈는 기본 모델인 주니어(1959-1961), 개선 모델인 주니어 드 럭스(1961-1963), 차체가 약간 커진 F11(1963-1965), 더 커지고 강력한 엔진을 탑재한 F12(1963-1965), 그리고 F12 로드스터(1964-1965)로 구성되었다. 주니어/F12 시리즈는 상당한 인기를 누리며 많이 생산되었다.[26] 한편, 1952년부터 약 1964년까지 아일랜드 코크 주 발린콜리그에 라이선스 조립 공장이 운영되어 약 4,000대의 DKW 차량(세단, 밴, 오토바이, 상업용 콤바인 수확기 포함)이 조립되었다. 이곳은 독일 외 유럽 지역의 유일한 DKW 공장이었으나, 2000년대 후반 철거되고 상업 시설로 재개발되었다.
모든 전후 3기통 2행정 모델들은 어느 정도 스포츠 주행 성능을 갖추고 있어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 랠리에서 많은 우승을 거두었다. 덕분에 DKW는 1950년대 유럽 랠리 리그에서 여러 해 동안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브랜드가 되었다.
1960년, DKW는 2개의 3기통 2행정 엔진을 결합한 1,000cc V6 엔진을 개발했다. 이후 배기량은 점차 늘어나 1966년 최종 버전은 1,300cc에 달했으며, 표준 사양(2개의 기화기)으로 5,000 rpm에서 83마력(hp)의 출력을 냈다. 4개의 기화기를 장착한 버전은 100마력(hp), 6개의 기화기를 장착한 버전은 130마력(hp)을 생산했다. 엔진 무게는 84kg에 불과했다. 이 V6 엔진은 DKW 뭉가와 DKW F102에 탑재될 예정이었으며, 약 100개의 엔진이 테스트 목적으로 제작되어 1960년대에 13대의 F102와 일부 뭉가 차량에 장착되었다.[10]

마지막 DKW 모델은 1964년에 구형 아우토 유니온 1000을 대체하여 출시된 DKW F102였다. 그러나 F102는 기술적 한계에 다다른 2행정 엔진 때문에 판매 부진을 겪었다. 결국 아우토 유니온의 모회사였던 다임러-벤츠는 회사를 폭스바겐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폭스바겐은 F102를 4행정 엔진으로 재설계하여 아우디 F103으로 출시했으며, 이는 DKW 자동차 브랜드의 종말과 아우디 브랜드의 부활을 의미했다. F102는 1966년 단종되었다.
=== 해외 생산 ===
- 네덜란드: 1956년부터 1961년까지 네덜란드 수입업체 Hart, Nibbrig & Greve가 사센하임에서 DKW 차량을 조립했다. 약 120명의 직원이 뒤셀도르프에서 보낸 반조립(SKD) 키트를 조립하여 약 13,500대의 차량을 생산했다. DKW 공장이 잉골슈타트로 이전하면서 비용 문제로 네덜란드 조립은 중단되었다.[11]
- 브라질: 1956년부터 1967년까지 브라질 현지 회사인 베마그(Vemag)가 DKW 차량을 라이선스 생산했다.[12] 초기에는 칸당고(Munga), 유틸리티 차량, 4도어 세단(베마게트, 벨카)을 생산할 계획이었으며, 처음 생산된 모델은 F91 유니버설이었다. 1958년에는 F94 기반의 4도어 세단과 스테이션 왜건이 출시되어 나중에 벨카와 베마게트로 명명되었다. 고급 쿠페인 DKW 피소레와 오프로더 뭉가(칸당고)도 생산되었다. 1960년부터는 아우토 유니온 1000의 더 큰 1리터 50마력(PS) 엔진이 탑재되었다.[14] 베마그는 유리섬유 차체의 쿠페 DKW GT 말조니를 통해 레이싱 팀을 운영하며 성공을 거두었고, 이는 브라질 스포츠카 브랜드 푸마의 기반이 되었다. 브라질 생산 모델들은 독일 및 아르헨티나 모델과 점차 다른 외형을 갖게 되었다. 1964-1965년 폭스바겐이 아우토 유니온을 인수하면서 베마그의 지분도 확보했고, 1967년에는 베마그를 완전히 인수했다.[15] 폭스바겐은 DKW-베마그 생산을 중단했으며, 총 109,343대의 DKW-베마그 차량이 생산된 후 해당 공장에서는 폭스바겐 1600 세단이 생산되었다.[14][16]



- 아르헨티나: 1960년부터 1969년까지 아르헨티나 산타페주 소스 비에호에서 IASF S.A.(Industria Automotriz Santa Fe Sociedad Anónima)가 DKW 차량을 생산했다. 대표 모델로는 유명 인사들이 선호했던 쿠페 피소레, 아우토 유니온 1000 S 세단(총 21,797대 생산), 아우토 유니온 1000 유니버설 S(총 6,396대 생산)[17], 그리고 아우토 유니온 콤비/픽업이 있었다. 1969년 출시된 마지막 버전인 아우토 유니온 콤비/픽업(DKW F1000 L)은 몇 달간 판매된 후 IME에 인수되어 1979년까지 생산이 계속되었다.[18]
3. 자동차
DKW 자동차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생산 중단을 제외하고 1928년부터 1966년까지 생산되었다. DKW는 세계 최대 오토바이 제조사로서의 경험을 살려 자동차에도 2행정 엔진을 고집했다.
최초 모델인 DKW Typ P (1928-1931) 이후, 1931년 등장한 DKW F1부터 시작된 F 시리즈는 전륜구동 방식을 채택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F 시리즈(F1~DKW F8)는 유럽 최초의 대량 생산 전륜구동 자동차 중 하나였으며, 1930년대 독일 자동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며 DKW의 주력 모델이 되었다.[5][6][7][8] 같은 시기, 독특한 V4 엔진을 탑재한 후륜구동 모델인 DKW Typ 4=8 시리즈(Schwebeklasse, Sonderklasse)도 생산되었다.[9]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회사는 서독에서 아우토 유니온 GmbH로 재건되어 생산을 재개했다. 초기에는 전쟁 전 모델 기반의 밴과 DKW F89 승용차를 생산했으며, 곧이어 획기적인 3기통 2행정 엔진을 개발하여 F91 (1953) 모델에 탑재했다. 이 3기통 엔진은 이후 F93, 아우토 유니オン 1000 등 후속 모델들의 기반이 되었으며, 아우토 유니온 1000 모델은 1,000cc 엔진, 자동 클러치(삭소매틱스), 디스크 브레이크 옵션 등 당시로서는 고급 사양을 갖추기도 했다.
1950년대 후반에는 현대적인 디자인의 주니어/F12 시리즈가 출시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또한, 유리 섬유 차체의 스포츠카 DKW 몬차, 사륜구동 오프로더 DKW 뭉가 등 특수 목적 차량들도 생산되었다. DKW의 3기통 엔진 차량들은 랠리 경주에서도 뛰어난 성능을 발휘하여 1950년대 유럽 랠리계를 석권하기도 했다.
DKW는 V6 엔진 프로토타입을 개발하는 등 기술 개발 노력도 이어갔으나,[10] 마지막 모델인 DKW F102 (1963–1966)는 시대에 뒤처진 2행정 엔진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판매 부진을 겪었다. 결국 모회사 다임러-벤츠는 아우토 유니온을 폭스바겐에 매각했고, 폭스바겐은 F102를 기반으로 4행정 엔진을 얹은 아우디 F103을 출시하며 아우디 브랜드를 부활시켰다. 이로써 DKW 자동차 브랜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DKW 자동차는 브라질의 Vemag|베마그por, 아르헨티나의 IASF 등 해외 여러 국가에서도 라이선스 생산되어 각 지역의 자동차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12][14][17]
3. 1. 전전 생산 (1928-1942)
DKW 자동차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생산이 중단된 시기를 제외하고 1928년부터 1966년까지 제작되었다. DKW는 1920년대 말 세계 최대의 오토바이 생산 업체였던 경험을 바탕으로 자동차에도 항상 2행정 엔진을 사용했다.최초의 DKW 자동차는 작고 비교적 단순한 구조의 DKW Typ P로, 1928년 5월 7일에 처음 등장했다.[5] 이 모델은 베를린의 슈판다우 공장에서 로드스터 형태로 생산되었고, 이후 기본적인 스포츠카 형태로 1931년까지 만들어졌다.
더 중요한 모델들은 츠비카우 공장에서 생산된 저렴한 자동차 시리즈였다. 이 공장은 DKW의 소유주였던 예르겐 스카프테 라스무센이 1928년 아우디의 지분 과반수를 인수하면서 확보한 곳이었다.[6] 1931년부터 1942년까지 생산된 DKW F1부터 DKW F8까지의 모델(F는 Front, 즉 전륜구동을 의미)은 유럽 최초로 대량 생산된 전륜구동 자동차였다. 이 차들은 가로로 배치된(횡치 엔진) 2기통 2행정 엔진을 사용했으며, 배기량은 584cc 또는 692cc였다. 초기 최고 출력은 15 PS였고, 1931년부터는 18 PS 또는 20 PS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 특징적인 기술로는 크랭크축에 직접 연결되어 시동 모터 겸 발전기 역할을 하는 다이나스타트(Dynastart)가 있었다.[7] 츠비카우 공장에서는 1931년부터 1942년까지 약 218,000대의 DKW 자동차를 생산했다.[5] 이들 대부분은 독일 내수 시장에서 판매되었으며, 1930년대 DKW 생산량의 85% 이상이 이 작은 F 시리즈였다. DKW는 1934년까지 독일 자동차 판매량 2위를 기록했고, 1931년부터 1938년까지 총 189,369대를 판매하며 시장 점유율 16% 이상을 유지했다.[8]
한편, 1929년부터 1940년까지 DKW는 후륜구동 방식의 DKW Typ 4=8 모델(Schwebeklasse, Sonderklasse 등의 이름으로도 불림)도 생산했다. 이 차들은 기술적으로 흥미로운 2행정 V4 엔진을 탑재했는데,[9] 엔진 배기량은 1,000cc에서 시작하여 나중에는 1,100cc로 늘어났다. 이 엔진은 연료 혼합기를 압축하여 실린더로 보내는 과급기 역할을 하는 추가 실린더 2개를 가지고 있어 외형상으로는 V6 엔진처럼 보였지만, 앞쪽의 두 실린더에는 점화 플러그가 없었다.
1939년에는 DKW F9 프로토타입이 개발되었다. 이 차는 DKW 최초의 직렬 3기통 엔진을 탑재했으며, 배기량 900cc에 30 PS의 출력을 냈다. 유선형 차체 덕분에 최고 속도는 115km/h에 달했다. 이 프로토타입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독의 IFA F9(이후 바르트부르크)와 서독 DKW의 3=6 또는 F91 모델의 기반이 되었다.
다음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및 전쟁 중 생산된 주요 민간 DKW 모델 목록이다.
모델 | 생산 기간 | 생산량 (추정치) |
---|---|---|
DKW Typ P | 1928–1931 | ~ 2,000대 |
DKW Typ 4=8 | 1929–1940 | ~ 24,000대 |
DKW F1 | 1931–1932 | ~ 4,000대 |
DKW F2 | 1932–1935 | ~ 17,000대 |
DKW F4 | 1934–1935 | ~ 7,000대 |
DKW F5 | 1935–1937 | ~ 60,000대 |
DKW F7 | 1937–1938 | ~ 80,000대 |
DKW F8 | 1939–1942 | ~ 50,000대 |
DKW F9 프로토타입 | 1939 | - |
전쟁 전 및 전쟁 기간 동안 생산된 민간 모델의 총 생산량은 약 250,000대에 달했으며, 이 중 약 218,000대가 전륜구동 모델이었다.
3. 2. 전후 생산 (1945-1966)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 지역이 된 작센에 기반을 두었던 아우토 유니온은 재건에 시간이 걸렸다. 회사는 1949년 서독에 아우토 유니온 GmbH로 다시 등록되었고, 처음에는 예비 부품 공급 업체로 시작했으나 곧 RT 125 오토바이와 새로운 배달용 밴인 ''슈넬라스터''(Schnellaster) F800 생산을 시작했다. 첫 생산 라인은 뒤셀도르프에 마련되었으며, 이 밴은 전쟁 전에 제작된 마지막 모델인 DKW F8과 동일한 엔진을 사용했다.전후 첫 번째 승용차는 DKW F89였다. 이 차는 전쟁 전에 개발된 DKW F9 프로토타입의 차체를 사용하고, 마지막 F8 모델의 2기통 2행정 엔진을 탑재했다. F89는 이후 성공적인 3기통 엔진을 탑재한 F91 모델이 나올 때까지 생산되었다.

=== 3기통 엔진 시대 ===
F91 모델은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생산되었으며, '3=6'이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졌다. 이 차에는 900cc 3기통 2행정 엔진이 탑재되어 처음에는 34hp의 출력을 냈다. 점화 시스템은 각 실린더마다 독립적인 단속기(포인트)와 점화 코일 세트를 사용하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냉각은 대류 방식이었고, 크랭크축 풀리에 연결된 팬의 도움을 받았다.
1956년에는 F91을 대체하는 더 큰 모델인 F93이 등장했다. F93 역시 900cc 3기통 엔진을 사용했으며, 후기 모델은 출력이 38hp까지 향상되었다. F93은 1959년까지 생산되었다.
F93의 뒤를 이은 모델은 아우토 유니온 1000이었다. 이 차는 1,000cc 2행정 엔진을 탑재하여 44hp 또는 50hp의 S 버전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으며, 1963년까지 생산되었다. 이 시기에 생산 기지는 뒤셀도르프에서 잉골슈타트로 이전되었는데, 이곳은 현재 아우디의 생산 거점이다. 1957년부터는 자동 클러치 시스템인 삭소매틱스(Saxomat)를 장착할 수 있었는데, 이는 당시 소형차 중 유일하게 제공되는 기능이었다. 마지막 버전인 아우토 유니온 1000S에는 디스크 브레이크가 옵션으로 제공되기도 했다. 1957년부터 1964년까지는 2+2 좌석의 스포츠 버전인 아우토 유니온 1000 SP가 생산되었으며, 처음에는 쿠페로, 1962년부터는 컨버터블로도 출시되었다.
=== 파생 및 특수 모델 ===
==== DKW 몬차 ====
1956년부터 1958년까지는 희귀 모델인 DKW 몬차가 개인 주도로 소량 생산되었다. 이 차는 표준 F93 차대에 유리 섬유로 제작된 2인승 스포츠 차체를 얹은 모델이었다. 이름은 1956년 12월 이탈리아 몬차 국립 자동차 경주장에서 세운 장거리 속도 기록에서 유래했다. 국제 자동차 연맹(FIA) G 클래스에서 평균 속도 140.961km/h (48시간), 139.453km/h (10,000 km), 139.459km/h (72시간)의 기록을 세웠다. 생산은 슈투트가르트의 Dannenhauer & Strauss, 하이델베르크의 Massholder, 슈투트가르트의 Robert Schenk 등 여러 업체를 거치며 이루어졌고, 총 생산 대수는 약 75대로 추정되며 50대 정도가 현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DKW 뭉가 ====

DKW 뭉가는 아우토 유니온이 잉골슈타트에서 생산한 사륜구동 오프로드 차량이다. 생산은 1956년 10월에 시작되어 1968년 12월에 종료되었으며, 총 46,750대가 생산되었다. 주로 군용 및 공공기관용으로 사용되었다.
=== 후기 모델 ===
1959년부터는 현대적인 디자인의 주니어/F12 시리즈가 출시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26] 이 시리즈는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 주니어 (Junior): 기본 모델 (1959–1961)
- 주니어 드 럭스 (Junior de Luxe): 개선 모델 (1961–1963)
- F11: 약간 더 커진 모델 (1963–1965)
- F12: 더 커지고 엔진도 커진 모델 (1963–1965)
- F12 로드스터: (1964–1965)
주니어/F12 시리즈는 상당한 인기를 누렸고 많은 수가 생산되었다.

DKW 브랜드의 마지막 모델은 DKW F102였다. 1963년에 구형 아우토 유니온 1000을 대체하며 등장했다.[26] F102는 현대적인 디자인을 갖추었지만, 기술적 한계에 다다른 2행정 엔진 때문에 판매 부진을 겪었다. 결국 아우토 유니온의 모회사였던 다임러-벤츠는 회사를 폭스바겐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폭스바겐은 F102를 기반으로 4행정 엔진을 탑재하여 아우디 F103으로 재출시했고, 이는 DKW 자동차 브랜드의 종말과 아우디 브랜드의 부활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F102는 1966년까지 생산되었다.
=== 기술 개발 및 모터스포츠 ===
1960년 DKW는 2개의 3기통 2행정 엔진을 결합한 1,000cc V6 엔진을 개발했다. 이 엔진은 계속 개량되어 1966년에는 최종적으로 1,300cc 배기량을 갖추게 되었다. 표준적인 2개의 기화기 구성으로는 5,000 rpm에서 83hp를 냈고, 4개의 기화기 버전은 100hp, 6개의 기화기 버전은 130hp를 생산했다. 엔진 무게는 84kg에 불과했다. 이 V6 엔진은 DKW 뭉가와 DKW F102에 탑재될 예정이었으며, 약 100개의 엔진이 테스트 목적으로 제작되어 13대의 F102와 일부 뭉가에 실제로 장착되기도 했다.[10]
모든 전후 3기통 2행정 모델들은 뛰어난 스포츠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에 열린 많은 랠리 경주에서 우승의 기반이 되었다. 덕분에 DKW는 1950년대 유럽 랠리 리그에서 여러 해 동안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자동차 브랜드가 되었다.
=== 해외 생산 ===
DKW 자동차는 독일 외 여러 국가에서도 라이선스 생산 또는 조립되었다.
국가 | 생산 업체 | 생산 기간 | 주요 모델 및 특징 | 생산량 |
---|---|---|---|---|
네덜란드 | Hart, Nibbrig & Greve | 1956–1961 | 사센하임에서 SKD(Semi Knocked Down) 키트 조립. 약 120명 고용. | 약 13,500대[11] |
브라질 | 베마그 (Vemag) | 1956–1967 | F91 유니버설, 벨카(Belcar, 세단), 베마게(Vemaguet, 스테이션 왜건), 피소레(Fissore, 쿠페), 칸당고(Candango, 뭉가). 1960년부터 1리터 50PS 엔진 탑재. GT 말조니 레이싱카 개발 (후일 푸마의 기반). 1967년 폭스바겐에 인수 후 단종. | 총 109,343대[14][16] |
아르헨티나 | IASF S.A. | 1960–1969 | 소스 비에호에서 생산. 쿠페 피소레, 아우토 유니온 1000 S 세단, 아우토 유니온 1000 유니버설 S, 콤비/픽업 (F1000 L). | 1000 S 세단: 21,797대 1000 유니버설 S: 6,396대[17] 콤비/픽업은 1979년까지 IME에서 생산 지속.[18] |
=== 전후 주요 모델 (1949-1968) ===
3. 3. 남아메리카에서의 생산
1956년부터 1967년까지 DKW 자동차는 브라질 현지 회사인 Vemag|베마그pt(''Veículos e Máquinas Agrícolas S.A.'', "차량 및 농업 기계 주식회사")에서 생산되었다.[12] 베마그는 이전에 스카니아-바비스 트럭을 조립했으나, 스카니아-바비스는 1960년 7월에 독립적인 회사가 되었다.[13] 초기 계획은 Candango|칸당구pt 오프로더(뭉가), 유틸리티 차량, 그리고 각각 Vemaguet|베마게치pt와 Belcar|베우카르pt로 명명된 4도어 세단을 생산하는 것이었다. 처음 생산된 모델은 900cc 엔진의 F91 유니버설이었으며, 벨카와 베마게라는 이름은 나중에 붙여졌다.1958년에는 F94 4도어 세단과 스테이션 왜건이 출시되었고, 1960년대 초에 이 모델들은 벨카와 베마게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베마그는 또한 고급 쿠페 모델인 DKW Fissore|피소레it와 오프로드 모델인 뭉가(현지에서는 칸당고라고 불림)도 생산했다. 1960년, 베마그 자동차에는 아우토 유니온 1000에서 가져온 더 큰 1리터 50 PS 엔진이 장착되었다.[14]
베마그는 유리섬유 차체를 가진 쿠페 GT Malzoni|마우조니pt를 통해 성공적인 공식 레이싱 팀을 운영했다. 이 프로젝트는 나중에 브라질의 유명 스포츠카 브랜드인 푸마의 기초가 되었다. 브라질에서 생산된 F94 라인은 여러 차례 외관 변경을 거치며 독일 및 아르헨티나 모델과 점차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베마그는 신제품 개발에 투자할 자본이 부족했고, 정부로부터 합병 압력을 받았다. 1964년부터 1965년에 걸쳐 폭스바겐은 베마그의 소수 주주였던 아우토 유니온을 점진적으로 인수했고, 1967년에는 베마그의 나머지 지분까지 모두 매입했다.[15] 폭스바겐은 곧 DKW-베마그 모델의 생산을 중단했으며, 총 109,343대의 DKW-베마그 자동차가 생산된 후 구 베마그 공장에서는 폭스바겐 1600 세단이 생산되기 시작했다.[14][16]
아르헨티나에서는 1960년부터 1969년까지 산타페주 소스 비에호에 위치한 IASF S.A.(Industria Automotriz Santa Fe Sociedad Anónima|인두스트리아 아우토모트리스 산타페 소시에다드 아노니마es)에서 DKW 차량이 생산되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생산된 모델 중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받는 쿠페 피소레는 Julio Sosa|훌리오 소사es, César Luis Menotti|세사르 루이스 메노티es 등 많은 유명 인사들이 소유하기도 했다. 다른 주요 모델로는 아우토 유니온 1000 S 세단(1969년까지 21,797대 생산)과 아우토 유니온 1000 유니버설 S 스테이션 왜건(1969년까지 6,396대 생산)이 있다.[17] 또한 아우토 유니온 콤비/픽업 모델도 생산되었다. 1969년에 출시된 아우토 유니온 콤비/픽업(DKW F1000 L)의 마지막 버전은 몇 달간 판매된 후, IME에 인수되어 1979년까지 생산이 계속되었다.[18]
4. 모터사이클과 스쿠터
1920년대 후반부터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DKW는 세계 최대의 오토바이 제조사였다.[19] 1931년 아놀드 촐러(Arnold Zoller)가 개발한 분할-단일 엔진 기술을 바탕으로, DKW는 전쟁 사이 기간 동안 가벼운 무게와 주니어 클래스 레이싱에서 두각을 나타냈다.[21] 특히 국제식스데이엔듀로와 같은 오프로드 경기와 과급기를 장착한 레이싱 오토바이 분야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22]
DKW는 다양한 종류의 모터사이클과 스쿠터를 생산했으며, 이들 중 일부 모델은 이후 오토바이 산업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4. 1. 주요 모델
DKW가 생산한 주요 오토바이 모델은 다음과 같다.- DKW ARE 175
- DKW Golem (Sesselmotorrad|제셀모토라트de, 안락의자 오토바이)
- DKW Hobby-Roller
- DKW Hummel
- DKW KM 200
- DKW KS 200
- DKW NZ 250
- DKW NZ 350
- DKW NZ 500
- DKW ORE 250
- DKW RT 100
- DKW RT 125
- DKW RT 175
- DKW RT 200
- DKW RT 200H
- DKW RT 250/2
- DKW RT 250 H
- DKW RT 350 S
- DKW SB 200
- DKW SB 350
- DKW SB 500
- DKW Sport 250
- DKW SS 500 (수냉식)
- DKW SS 600 (수냉식)
- DKW ZS 500
- DKW ZSW 500 (수냉식)
- DKW JS 500
- DKW Hercules (반켈 엔진)
특히 RT 125는 DKW의 가장 유명한 모델 중 하나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원래 공장이 있던 동독 지역에서는 MZ가 생산을 이어받아 175cc, 250cc, 350cc 모델을 만들었다.[1] 전쟁 배상 조치의 일환으로 RT 125의 설계 도면은 미국 할리데이비슨과 영국 BSA에 제공되었다. 할리데이비슨은 이 설계를 바탕으로 허머 모델(정확히는 특정 연식 모델이지만, 일반적으로 할리데이비슨 경량 모델을 통칭)을 생산했고, BSA는 밴텀 모델에 활용했다. 동독의 IFA와 이후 MZ는 1990년대까지 RT 125 기반 모델을 생산했으나 경제적인 이유로 2행정 엔진 생산을 중단했다. 이 외에도 야마하, 보스호드, 마세라티, 폴란드의 WSK 등 여러 제조사들이 공식적 또는 비공식적으로 DKW의 디자인을 모방하여 1950년대에 유사한 소형 2행정 오토바이를 다수 생산했다.
5. 기술적 특징
DKW 차량은 여러 독특한 기술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엔진 기술 면에서는 2행정 엔진을 주로 사용했으며, 몇 가지 독특한 시도가 있었다. 1929년부터 1940년까지 생산된 후륜구동 모델 ''Schwebeklasse'' 와 ''Sonderklasse''에는 공기 압축을 위한 두 개의 추가 실린더가 달린 2행정 V4 엔진(1,000cc 또는 1,100cc)이 탑재되었다. 이 엔진은 겉보기에는 V6 엔진과 유사했지만, 앞쪽 두 실린더에는 점화 플러그가 없었다.[9]
변속기와 제동 장치에서도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었다. 1957년부터 아우토 유니온 1000 모델에는 삭소매틱스(Saxomat)라는 자동 클러치를 장착할 수 있었는데, 이는 당시 소형차 중에서는 드문 옵션이었다. 아우토 유니온 1000S의 마지막 버전에는 당시로서는 초기 기술이었던 디스크 브레이크가 옵션으로 제공되기도 했다.
차체 기술 측면에서는 1956년 소량 생산된 DKW 몬차가 주목할 만하다. 이 차량은 표준 F93 모델의 차대 위에 유리 섬유로 제작된 2인승 스포츠 차체를 얹은 것이 특징이었다. DKW 몬차는 이탈리아 몬차 국립 자동차 경주장에서 열린 내구 레이스에서 평균 속도 140.961km/h, 139.453km/h, 139.459km/h 등으로 여러 장거리 속도 기록을 세우며 성능을 입증했다.
5. 1. 2행정 엔진
DKW의 역사는 2행정 엔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창업자 예르겐 스카프테 라스무센은 1918년 엔진 기술자 후고 루페에게 25cc 2행정 엔진 개발을 의뢰했다. 이 엔진은 처음에는 Des Knaben Wunch|데스 크나벤 분슈de(젊은이의 꿈)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이후 Das Kleine Wunder|다스 클라이네 분더de(작은 기적)로 개명되어 자전거 보조 엔진으로 판매되었다. 작고 경제적이면서도 성능이 우수했던 이 엔진은 전후 독일에서 큰 인기를 얻으며 DKW 브랜드의 시작을 알렸다.[20]2행정 엔진은 구조가 단순하고 가벼우면서도 상대적으로 높은 출력을 낼 수 있어 오토바이에 적합했다. DKW는 이 장점을 활용하여 1921년부터 본격적으로 오토바이를 생산했고, 불과 몇 년 만에 세계 최대 규모의 오토바이 제조사로 성장했다. 특히 분리형 싱글 방식의 2행정 엔진에 과급기를 장착한 경주용 오토바이는 1930년대 소배기량 및 주니어 레이스 부문을 석권하며 DKW의 기술력을 입증했다.[21][22][24] 국제 식스 데이 트라이얼(ISDT)과 같은 오프로드 경기에서도 가벼운 무게를 장점으로 내세워 큰 성공을 거두었다.[22] DKW RT 125와 같은 모델은 DKW 오토바이의 상징적인 모델로 남았다.[1]
DKW는 1928년 사륜 자동차 시장에도 진출하여 2행정 엔진을 탑재한 소형차를 선보였다. 1931년에 개발된 DKW F1은 양산형 대중차로서는 세계 최초로 전륜 구동 방식을 채택한 획기적인 모델이었으며,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20]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독에서 재건된 아우토 유니온은 DKW 브랜드를 통해 2행정 엔진 자동차 생산을 이어갔다. DKW F8에 사용된 2기통 2행정 엔진을 개량하여 DKW F89에 탑재했고, 이후 DKW F91과 DKW F93에는 900cc 3기통 2행정 엔진(초기 34마력, 후기 38마력)을 사용했다. 이 3기통 엔진은 각 실린더마다 독립적인 포인트와 점화 코일을 사용하는 독특한 점화 시스템과 대류 방식의 냉각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이후 아우토 유니온 1000 모델에는 1,000cc 3기통 2행정 엔진(44마력 또는 50마력 S 버전)이 탑재되었다. DKW의 3기통 2행정 엔진 차량들은 뛰어난 성능을 바탕으로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 유럽 랠리 무대에서 많은 우승을 차지하며 스포츠성을 입증하기도 했다.
1960년에는 2개의 3기통 2행정 엔진을 결합한 1,000cc V6 2행정 엔진 개발을 시도했다. 이 엔진은 1966년 최종적으로 1,300cc까지 배기량이 늘어났으며, 표준형(2개의 기화기)은 83마력, 4기화기 버전은 100마력, 6기화기 버전은 130마력의 출력을 냈다. 무게는 단 84kg에 불과했다. 약 100개의 V6 엔진이 테스트 목적으로 제작되어 일부 DKW F102와 DKW 뭉가 차량에 장착되기도 했다.[10]
하지만 2행정 엔진은 연비와 배기가스 문제 등 기술적인 한계에 부딪혔고, 이는 마지막 DKW 모델인 DKW F102(1964년 출시)의 판매 부진으로 이어졌다. 결국 폭스바겐에 인수된 아우토 유니온은 DKW 브랜드를 폐기하고, F102의 차체에 4행정 엔진을 탑재한 아우디 F103을 출시하며 아우디 브랜드를 부활시켰다. 이로써 DKW는 2행정 엔진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5. 2. 전륜구동
DKW는 1928년 아우디의 과반수 지분을 인수하며 얻게 된 츠비카우 공장에서[6] 1931년부터 중요한 전륜구동 자동차 시리즈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DKW F1 모델로 시작된 이 시리즈는 유럽 최초의 대량 생산 전륜구동 자동차였으며, 자동차 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F'는 독일어로 앞을 의미하는 'Front'에서 따온 것으로, 전륜구동 방식을 채택했음을 나타낸다. F1부터 DKW F8까지 이어진 F 시리즈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생산이 중단된 1942년까지 제작되었고, 전쟁 후 다시 생산이 재개되었다.
이들 전륜구동 모델들은 가로로 배치된 2기통 2행정 엔진을 탑재했다. 엔진 배기량은 584cc 또는 692cc였으며, 초기 모델의 최고 출력은 15 PS였으나 1931년부터는 18 PS 또는 20hp 엔진을 선택할 수 있었다.[7] 또한, 시동 모터와 발전기 기능을 겸하는 Dynastart 장치가 크랭크축에 직접 연결된 점도 특징이었다.[7]
DKW의 전륜구동 F 시리즈는 기술적 혁신성과 합리적인 가격을 바탕으로 당시 독일 시장에서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츠비카우 공장에서는 1931년부터 1942년까지 약 218,000대의 F 시리즈 자동차를 생산했는데[5], 이는 같은 기간 DKW 전체 자동차 생산량의 85% 이상을 차지하는 수치였다. DKW는 1934년까지 독일 내 자동차 판매량 2위를 기록했으며, 1931년부터 1938년까지 누적 판매량 189,369대를 기록하며 시장 점유율 16% 이상을 꾸준히 유지했다.[8] 이는 DKW의 전륜구동 방식이 소형 대중차 시장에서 소비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6. 유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작센 주에 있던 아우토 유니온의 공장들은 동독 지역에 편입되어 국유화되었고, 회사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그러나 서독으로 피난한 경영진들이 아우토 유니온을 재건하면서, DKW 브랜드의 사륜차와 오토바이는 2스트로크 엔진 기술과 함께 부활했다. 이때부터 회사 이름인 '아우토 유니온'과 'DKW' 브랜드가 함께 사용되었다.
이후 아우토 유니온은 1957년 다임러 벤츠에 인수되었고, 1964년에는 폭스바겐 그룹 산하로 편입되었다. DKW 브랜드의 마지막 자동차는 1966년까지 생산된 DKW F102 모델이었다. 이 모델을 끝으로 DKW 브랜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DKW 차량은 마지막까지 전륜 구동 방식과 2스트로크 엔진을 고수했다.
비록 DKW 브랜드는 사라졌지만, 그 기술적 유산은 이어졌다. F102의 차체는 이후 4스트로크 엔진을 탑재하여 새롭게 부활한 아우디 브랜드의 차량 개발에 활용되었다. 이를 통해 DKW가 선도했던 전륜 구동 기술 등은 아우토 유니온의 혈통을 이은 아우디를 통해 현대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참조
[1]
간행물
DKW man dies
Motor Cycle
1964-08-27
[2]
웹사이트
History of the Four Rings—Part 1—Audi Auto Union
http://www.seriouswh[...]
2018-05-08
[3]
서적
World in Motion 1939 – The whole of the year's automobile production
Belvedere Publishing
2015
[4]
웹사이트
1919 Slaby-Beringer Elektrowagen
http://heinkelscoote[...]
2017-04-17
[5]
문서
Oswald
[6]
문서
Oswald
[7]
문서
Oswald
[8]
문서
Oswald
[9]
문서
Oswald
[10]
웹사이트
DKW Specifications
http://www.dyna.co.z[...]
Dyna.co.za
2008-11-13
[11]
뉴스
Made in Holland
Autokampioen
2007
[12]
학술지
Vemag
[13]
학술지
Determinants of Firm Entry into the Brazilian Automobile Manufacturing Industry, 1956–1968
1991
[14]
웹사이트
DKWs in Brazil
http://www.team.net/[...]
KTUD Online Automotive Archive
[15]
문서
Shapiro
[16]
서적
DKW – A grande história da Pequena Maravilha
Editora Alaúde
[17]
웹사이트
Auto Union
http://www.cochearge[...]
Coche Argentino
2009-05-18
[18]
웹사이트
Auto Union
http://www.cochearge[...]
Coche Argentino
2009-05-18
[19]
웹사이트
http://bikelinks.com[...]
[20]
웹사이트
DKW Front F 1 roadster, 1931
http://www.audi.com/[...]
2018-05-08
[21]
웹사이트
DKW Supercharged Two-Strokes – Force-Fed Deeks
http://www.odd-bike.[...]
2018-05-08
[22]
웹사이트
ISDT award winning DKW 246cc 1935
http://speedtracktal[...]
2014-02-05
[23]
서적
A-Z of Cars 1945–1970
[24]
웹사이트
Adopted by Ing Zoller in 1931
http://www.classicmo[...]
[25]
웹인용
History of the Four Rings—Part 1—Audi Auto Union
http://www.seriouswh[...]
2018-05-08
[26]
서적
A-Z of Cars 1945–197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