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O.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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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 O. 윌슨은 1929년 앨라배마 주 버밍햄에서 태어난 미국의 생물학자이자 곤충학자, 작가, 환경 운동가이다. 그는 사회생물학 분야를 개척하고 생물 다양성 보존에 기여했으며, 개미 연구의 권위자로도 인정받았다. 윌슨은 인간의 행동을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 작용으로 설명하는 사회생물학적 관점을 제시하고, 종의 평형 이론, 섬 생물지리학 이론 등을 개발했다. 또한, 과학과 인문학의 통합을 주장하는 '통섭' 개념을 제시하고, 생물애 가설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조명했다. 그는 퓰리처상을 두 차례 수상했으며, 과학적 인본주의를 옹호하며 환경 보호와 종교적 신념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윌슨의 연구는 사회생물학 논쟁과 J. 필리페 러시턴 지지 논란 등 평가와 논란을 동시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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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O. 윌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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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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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에드워드 오즈번 윌슨 |
출생일 | 1929년 6월 10일 |
출생지 | 미국 앨라배마주 버밍햄 |
사망일 | 2021년 12월 26일 |
사망지 | 미국 매사추세츠주 벌링턴 |
연구 분야 | |
학문 분야 | 생태학, 진화생물학 |
세부 분야 | 곤충학 개미학 |
경력 | |
직장 | 하버드 대학교 |
소속 기관 | 자연사 박물관 |
학력 | |
학위 | 앨라배마 대학교 (BS, MS) 하버드 대학교 (PhD) |
박사 지도교수 | 프랭크 M. 카펜터 |
박사 학위 논문 제목 | 개미속 라시우스의 모노그래프적 개정 |
박사 학위 논문 URL | http://search.proquest.com/docview/301948222/ |
박사 학위 취득 년도 | 1955년 |
박사 과정 학생 | 다니엘 심벌로프 (1969년) 도널드 J. 패리시 (1970년) 제임스 D. 웨인리히 (1976년) 마크 W. 모페트 (1987년) |
업적 | |
알려진 업적 | 사회생물학 도서생물학 진화의 서사시 성격 치환 생명애 가설 분류군 순환 |
수상 | |
수상 내역 | 뉴컴 클리블랜드 상 (1967년) 국가 과학 훈장 (1977년) 레이디 상 (1979년) 퓰리처상 (1979년) 타일러 환경 업적 상 (1984년) 크라포르드 상 (1990년) 퓰리처상 (1991년) 국제 생물학상 (1993년) 칼 세이건 과학 대중화상 (1994년) 키슬러 상 (2000년) 킹 파이살 국제상 (2000년) 지구 환경 시민상 (2001년) 니렌버그 상 (2001년) BBVA 재단 지식의 최전선 상 (생태 및 보존 생물학 분야) (2010년) 국제 코스모스 상 (2012년) 큐 국제 메달 (2014년) |
기타 정보 | |
배우자 | 아이린 켈리 (1955년 결혼) |
종교 | 이신론 |
참고 사항 | 왕립 학회 외국인 회원 |
2. 성장 배경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eng)은 1929년 6월 10일 앨라배마 주 버밍햄에서 태어났다.[12]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사에 관심을 보였으며, 7살 때 부모의 이혼과 아버지의 알코올 의존 문제 등 어려운 가정 환경을 겪었다.[13][14] 같은 해 겪은 낚시 사고로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으나,[15] 이는 오히려 그가 작은 곤충의 세계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16]
미국 보이 스카우트 활동 등을 통해 자연 탐구를 이어가던 윌슨은 18세에 곤충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초기에는 파리를 연구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구 재료 수급 문제로 개미 연구로 방향을 전환했다.[16] 국립 자연사 박물관 개미학자의 격려 속에 앨라배마 주의 개미를 조사하며 미국 내 최초의 붉은불개미 군집을 발견하기도 했다.[17]
눈 장애로 군 입대가 좌절된 후,[134] 앨라배마 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하버드 대학교에서 1955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같은 해 아이린 켈리(Irene Kelley)와 결혼했으며, 1956년부터 하버드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개미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가 되었다. 1950년대 말 분자생물학의 부상 속에서도 진화학, 생태학 등 거시 생물학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학문 발전에 기여했다.[135] 1996년 정년퇴임했으며, 그의 공로를 기려 미국 내추럴리스트 협회는 'E. O. 윌슨 내추럴리스트 상'을 제정했다.[136]
2. 1. 어린 시절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eng)은 1929년 6월 10일 앨라배마 주 버밍햄에서 이네즈 리넷 프리먼과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시니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12] 그의 자서전 ''내추럴리스트''(Naturalisteng)에 따르면, 그는 미국 남부의 여러 도시, 예를 들어 모빌, 데케이터, 펜서콜라 등에서 자랐다.[13]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사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 의존 문제를 겪었으며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윌슨이 7살 때 그의 부모는 이혼했다.[14] 어린 윌슨은 검은과부거미(Latrodectus)를 집에 가져와 현관에 두기도 했는데, 부모는 이를 허락했다.[14] 부모가 이혼한 같은 해, 윌슨은 낚시 중 사고로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15] 사고 후에도 낚시를 계속했으며, 통증이 있었지만 야외 활동을 중단하고 싶지 않아 치료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몇 달 후 오른쪽 동공에 백내장이 생겨 펜서콜라의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윌슨은 자서전에서 이 수술이 매우 고통스러웠다고 회상했다. 이 사고로 입체 시력을 상실했지만, 왼쪽 눈은 20/10의 좋은 시력을 유지하여 작은 곤충의 털이나 미세한 특징들을 관찰하는 데 유리했다. 이는 그가 큰 동물보다는 작은 곤충 연구에 집중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6]
9살 때는 워싱턴 D.C.의 록 크릭 공원에서 처음으로 탐험 활동을 시작했으며,[16] 곤충 채집에 몰두했다. 처음에는 나비에 열중하여 빗자루, 옷걸이, 치즈 천 가방으로 직접 만든 채집망을 사용하기도 했다.[16] 그러던 중 썩은 나무껍질 아래에서 노란개미(Acanthomyops)를 발견한 경험은 그에게 "생생하고 지속적인 인상"을 남겼고, 이후 개미에 깊은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16] 그는 미국 보이 스카우트 활동을 통해 이글 스카우트 등급을 받았고, 여름 캠프에서 자연 담당 지도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18세에 곤충학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처음에는 파리(Diptera)를 수집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곤충 고정용 핀 부족 문제로 병에 보관이 용이한 개미로 연구 대상을 바꾸었다. 워싱턴 D.C. 국립 자연사 박물관의 개미학자 마리온 R. 스미스(Marion R. Smith)의 격려를 받아 앨라배마 주의 개미 분포 조사를 시작했다. 이 조사를 통해 13살 때 모빌 항구 근처에서 미국 내 최초의 붉은불개미 군집을 발견하여 보고했다.[17]
대학 진학 비용 문제로 미국 육군 입대를 고려했으나 눈 문제로 신체검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앨라배마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눈 부상 외에도 한쪽 귀의 청력 손실과 경미한 난독증을 겪기도 했다. 그가 어렸을 때 발견했던 붉은불개미는 앨라배마 주를 넘어 확산되고 있었고, 앨라배마 주는 윌슨에게 개미 확산 조사를 의뢰했다. 1949년에 제출한 보고서는 그의 첫 과학 출판물이 되었다.[134]
2. 2. 사고와 장애
윌슨은 7살 때 부모가 이혼한 같은 해에 낚시 사고로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15] 그는 고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야외 활동을 계속하고 싶어 의료 치료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몇 달 후 그의 오른쪽 동공에 백내장이 생겨 펜서콜라 병원에서 렌즈 제거 수술을 받았다. 윌슨은 자서전 ''내추럴리스트''에서 이 수술을 "끔찍한 [19세기] 고통이었다"고 회상했다.[15]이 사고로 입체 시력을 잃었지만, 왼쪽 눈은 20/10의 좋은 시력을 유지했다.[16] 그는 여전히 작은 곤충의 털이나 작은 글씨는 볼 수 있었고, 이 경험은 그가 포유류나 조류 대신 "작은 것들", 특히 곤충에 집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16]
이후 그는 한쪽 귀의 청력을 잃었고, 경도의 난독증을 앓기도 했다.[134] 눈의 장애 때문에 미국 육군 입대를 위한 건강 검사에서 불합격하기도 했다.[134]
2. 3. 개미 연구의 시작
윌슨은 어릴 때부터 자연사에 관심이 많았다. 그가 7살 때 부모는 이혼했고, 같은 해 낚시 사고로 오른쪽 눈을 다쳐 입체 시력을 잃었다.[15] 이 사고는 그가 큰 동물보다는 작은 곤충의 미세한 특징에 더 집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16] 그는 왼쪽 눈의 시력이 매우 좋아 작은 곤충의 털까지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16]9세 때 워싱턴 D.C.의 록 크릭 공원에서 처음으로 탐험을 시작하며 곤충을 수집했고, 특히 나비에 열정을 보였다.[16] 그러던 중 썩은 나무껍질 아래에서 노란개미(Acanthomyops)를 발견하면서 개미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다.[16] 그는 당시 발견한 개미를 "키가 작고 뚱뚱하며, 밝은 노란색이었고 강한 레몬 향을 냈다"고 묘사하며, 이 경험이 자신에게 "생생하고 지속적인 인상"을 남겼다고 회고했다.[16] 그는 미국 보이 스카우트 활동을 통해 이글 스카우트 상을 받기도 했다.[16]
18세가 되던 해, 곤충학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처음에는 파리(Diptera)를 수집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 곤충 고정용 핀이 부족해지자, 병에 보관하기 용이한 개미로 연구 대상을 바꾸게 되었다.[16] 워싱턴 국립 자연사 박물관의 개미학자 마리온 R. 스미스(Marion R. Smith)의 격려를 받아 앨라배마 주의 모든 개미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이 연구 과정에서 그는 모빌 항구 근처에서 미국 내 최초의 불개미 군집을 발견하여 보고하기도 했다.[17]
이후 앨라배마 대학교에 진학한 윌슨은, 그가 어렸을 때 발견했던 붉은 불개미가 앨라배마 주 전역으로 퍼져나가자 주 정부로부터 개미 확산에 대한 조사를 의뢰받았다. 1949년에 제출한 이 조사 보고서는 윌슨의 첫 번째 과학적 간행물이 되었다.[134]
3. 학력 및 경력
윌슨은 앨라배마 대학교에서 생물학 학사(1949) 및 석사(1950) 학위를 받았고, 이후 하버드 대학교로 옮겨 1955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16][18] 같은 해 아이린 켈리와 결혼했으며,[18][19] 이듬해인 1956년부터 하버드 대학교에서 강사로 경력을 시작하여 1964년 동물학 교수가 되었다.[135] 그는 개미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자리매김했으며, 1996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하버드에 재직하며 사회생물학 분야를 개척하는 등 학문적으로 큰 업적을 남겼다.[135] 정년퇴직 후에는 하버드 대학교 펠레그리노 대학교 명예 교수로 활동했다.[23][136]
3. 1. 학력
윌슨은 11년간 15~16개의 학교를 다녔다고 말했다.[14]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 육군 입대를 고려했으나 시력 문제로 신체검사에 통과하지 못했다.[16] 이후 앨라배마 대학교에 진학하여 1949년 이학사 학위를, 1950년에는 생물학 이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16] 앨라배마 대학교 재학 중이던 1949년, 앨라배마 주로부터 붉은 불개미 확산 조사를 의뢰받아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이는 그의 첫 과학적 간행물이 되었다.[134] 앨라배마 대학교 졸업 후 하버드 대학교로 옮겨갔다.[16]하버드 펠로우십 협회 회원으로 임명되어 쿠바, 멕시코, 호주, 뉴기니, 피지, 뉴칼레도니아, 스리랑카 등 남태평양 지역을 여행하며 개미 종을 수집하는 해외 탐험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1955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같은 해 아이린 켈리와 결혼했다.[18][19]
3. 2. 경력

윌슨은 앨라배마 대학교에서 생물학 학사(1949) 및 석사(1950) 학위를 취득한 후 하버드 대학교로 옮겨 1955년에 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아이린 켈리와 결혼했다.
1956년부터 하버드 대학교에서 강사로 시작하여 1964년 동물학 교수가 되었고, 1996년 은퇴할 때까지 재직했다.[135] 그는 개미 분류학자로 경력을 시작하여 개미의 미세진화와 환경적 불리함을 극복하고 새로운 서식지로 이동하며 새로운 종으로 분화하는 과정을 연구했다. 이 과정에서 "분류군 순환"(taxon cycle) 이론을 개발했다.[18] 또한 수학자 윌리엄 H. 보서트와 함께 곤충의 의사소통 방식에 기반한 페로몬 분류 체계를 만들었다.[20]
1950년대 말, 분자 생물학이 부상하면서 제임스 왓슨과 같은 동료들이 자연사 연구를 경시하는 경향을 보이자, 윌슨은 이에 반발하며 진화학이나 생태학과 같은 거시 생물학 분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135] 그는 로버트 맥아더, 에른스트 마이어, 로버트 트리버스, 윌리엄 보서트 등 동료들과 교류했으며, 리처드 르원틴과 리처드 레빈스를 하버드로 초빙하기도 했다.[135]
1960년대에는 수학자이자 생태학자인 로버트 맥아더와 협력하여 종 평형 이론을 개발했다. 1970년대에는 생물학자 다니엘 S. 심벌로프와 함께 플로리다 키스의 작은 맹그로브 섬에서 모든 곤충 종을 제거하고 새로운 종의 재정착 과정을 관찰하며 이 이론을 실험적으로 검증했다.[21] 윌슨과 맥아더가 공저한 ''섬 생물지리학 이론''(The Theory of Island Biogeography, 1967)은 생태학 분야의 표준 교재가 되었다.[18]
1973년에는 하버드 비교 동물학 박물관의 곤충학 큐레이터로 임명되었다.[23] 윌슨은 자신의 연구를 확장하여 여러 중요한 저서를 출판했다.
연도 | 제목 | 비고 |
---|---|---|
1971 | 곤충 사회 (The Insect Societies) | 곤충과 다른 동물의 사회적 행동 비교 연구[22] |
1975 | 사회생물학: 새로운 종합 (Sociobiology: The New Synthesis) | 곤충 행동 이론을 척추동물과 인간에게 확장 적용 |
1978 | 인간 본성에 대하여 (On Human Nature) | 인간 문화 진화에서 생물학의 역할 탐구, 퓰리처상 일반 논픽션 부문 수상[18] |
1981 | 유전자, 정신, 문화 (Genes, Mind and Culture) | 찰스 럼스덴 공저, 유전자-문화 공진화 이론 제시 |
1990 | 개미 (The Ants) | 베르트 횔도블러 공저, 개미 연구 집대성, 두 번째 퓰리처상 일반 논픽션 부문 수상[18] |
1992 | 생명의 다양성 (The Diversity of Life) | |
1994 | 내추럴리스트 (Naturalist) | 자서전 |
1998 | 통섭: 지식의 대통합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통합 주장[18] |
윌슨은 1976년 프랭크 B. 베어드 주니어 과학 교수로 임명되었고,[23] 1996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정년퇴직한 후에는 펠레그리노 대학교 명예 교수가 되었다.[23][136] 같은 해 미국 내추럴리스트 협회는 그의 공적을 기려 'E. O. 윌슨 내추럴리스트 상'을 제정하여 1998년부터 시상하고 있다.[136]
윌슨은 환경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옹호와 더불어, 종교 및 윤리 문제와 관련된 그의 세속적 인본주의 및 이신론적 관점으로도 주목받았다.[24] 그는 일생 동안 "생물 다양성의 아버지",[25][26] "개미 인간(Ant Man)",[27] 그리고 "다윈의 자연스러운 후계자"[28][29][30] 등 다양한 수식어로 불렸다. 데이비드 애튼버러 경은 PBS 인터뷰에서 윌슨을 "개미에 관한 세계 최고의 전문가"이자 "지구와 자연 세계 전체를 놀라운 세밀함과 일관성으로 바라보는 넓은 시야를 가진 인물"로 평가했다.[31]
4. 주요 연구 및 이론
윌슨은 개미 분류학 연구를 시작으로, 개미의 미세진화 과정과 환경적 어려움을 극복하며 새로운 서식지로 이동해 새로운 종으로 발전하는 방식에 대해 연구하며 "분류군 순환" 이론을 개발했다.[18] 수학자 윌리엄 H. 보서트와 함께 곤충이 페로몬을 이용해 의사소통하는 방식에 기반한 분류 체계를 만들었다.[20]
1960년대에는 생태학자 로버트 맥아더와 함께 종 평형 이론을 개발했으며, 이후 생물학자 다니엘 S. 심벌로프와 플로리다 키스의 작은 맹그로브 섬들에서 모든 곤충 종을 제거한 뒤 새로운 종에 의한 재정착 과정을 관찰하며 이 이론을 실험적으로 검증했다.[21] 윌슨과 맥아더가 공저한 ''섬 생물지리학 이론''은 생태학 분야의 중요한 교재가 되었다.[18]
1971년에는 ''곤충 사회''를 출간하여 곤충 사회와 다른 동물 사회가 유사한 진화적 압력의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했다.[22] 1975년에는 이러한 관점을 척추동물,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인간에게까지 확장한 ''사회생물학: 새로운 종합''을 출간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의 계층적 사회 구조 역시 진화하고 유전된 경향성의 영향을 받는다고 추측했다. 1978년에는 인간 문화의 진화에서 생물학의 역할을 탐구한 ''인간 본성에 대하여''를 출간하여 퓰리처상 일반 논픽션 부문을 수상했다.[18]
1981년에는 생물학자 찰스 럼스덴과 함께 유전자-문화 공진화 이론을 다룬 ''유전자, 정신, 문화''를 출간했다. 1990년에는 동물학자 베르트 횔도블러와 함께 개미에 대한 방대한 연구를 집대성한 ''개미''를 출간하여 두 번째 퓰리처상 일반 논픽션 부문을 수상했다.[18]
이후에도 활발한 저술 활동을 이어가 ''생명의 다양성''(1992), 자서전 ''내추럴리스트''(1994), 그리고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및 인문학의 통일성에 관한 ''통섭: 지식의 대통합''(1998) 등을 출간했다.[18] 윌슨은 환경 문제에 대한 옹호와 함께, 종교 및 윤리 문제와 관련된 그의 세속적 인본주의 및 이신론 사상으로도 주목받았다.[24]
그의 폭넓은 연구와 영향력으로 인해 "생물 다양성의 아버지",[25][26] "개미 사나이",[27] 그리고 "다윈의 후계자"[28][29][30] 등 다양한 칭호로 불렸다. 영국의 저명한 방송인이자 자연 다큐멘터리 제작자인 데이비드 애튼버러는 윌슨을 "개미에 대해 세상 누구보다 많이 아는 세계적인 권위자"일 뿐만 아니라, "놀라운 세부 사항과 일관성으로 행성과 그 안의 자연계를 가장 넓게 조망하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31]
4. 1. 섬 생물지리학 이론
1967년에 로버트 매카서와 함께 『섬의 생물지리학의 이론』을 저술하여 종수 평형 이론과 r-K 전략을 제창했다. 이는 생물지리학, 생태학의 중요한 분야로서 도서 생물학을 발전시키는 기념비적인 연구가 되었다.1975년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이 이론에 근거하여 자연 보호 구역은 크게 설계되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고 윌슨도 지지했지만, 윌슨의 전 제자 다니엘 심버로프는 이를 비판하며 자연 보호 지구의 SLOSS 논쟁(크게 하나일까, 작게 여러 개일까)을 일으켰다.
4. 2. 사회생물학

윌슨은 사회생물학적 및 진화적 원리를 사용하여 사회성 곤충의 행동을 설명하고, 이를 인간을 포함한 다른 동물의 사회적 행동을 이해하는 데 적용함으로써 사회생물학을 새로운 과학 분야로 확립했다.[44] 그는 사회생물학을 "모든 사회 행동의 생물학적 기초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라고 정의하며, 1970년대까지의 개체군 생태학, 집단 유전학, 동물 행동학 지식을 통합한 '새로운 종합(New Synthesis)'으로 제시했다. 이 개념에는 인류학이나 사회학과 생물학의 통합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윌슨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행동이 유전, 환경 자극, 과거 경험의 산물이며 자유 의지는 환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행동의 생물학적 기반을 "유전자 고삐(leash of genes)"라고 불렀다.[45] 사회생물학적 관점은 모든 동물 사회적 행동이 진화의 법칙에 따라 작용하는 후성 규칙(epigenetic rules, 윌슨의 용어로 현대 후성유전학과는 구별되는 개념이다)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이다. 이 이론과 연구는 획기적이고 영향력 있는 것으로 평가받았지만,[46] 특히 인간에게 적용하는 부분에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48] 이는 인간이 어떠한 선천적인 정신 내용 없이 태어나 문화가 인간의 지식을 늘리고 생존과 성공을 돕는다는 일반적인 백지설 교리를 거부하는 과학적 주장을 제시했기 때문이다.[49]
윌슨은 선택의 단위는 유전자, 즉 유전의 기본 요소이며, 선택의 ''대상''은 일반적으로 특정 유전자 조합을 가진 개체라고 주장했다. 진사회성 곤충의 행동을 설명하면서 그는 친족 선택과 더불어 집단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다윈이 처음 제시했던 아이디어라고 언급했다.[47]
1978년 그는 인간 문화의 진화에서 생물학의 역할을 다룬 ''인간 본성에 대하여''를 출판하여 퓰리처상 일반 논픽션 부문을 수상했다.[18][64] 이 책에서 그는 "진화 서사시는 아마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신화일 것이다"라고 쓰기도 했다.[63]
윌슨의 사회생물학에 대해 존 메이너드 스미스는 "귀중한 요약"이라고 평했고, 리처드 도킨스는 혈연 선택설을 집단 선택에 포함시킨 점 등을 들어 다소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생태학적 관점과 풍부한 사례는 높이 평가했다. 윌슨의 독창적인 이론적 기여는 제한적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관련 연구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새로운 분야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후속 연구자들을 이끌고 논쟁의 중심에서 사회생물학 분야의 정립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4. 2. 1. 인간 사회생물학과 논쟁
''사회생물학: 새로운 종합''은 출간 초기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7][8] 그러나 인민을 위한 과학(Science for the People)과 연계된 사회생물학 연구 그룹(Sociobiology Study Group)이 책의 내용, 특히 인간 행동에 대한 설명을 문제 삼으면서 격렬한 논쟁이 시작되었다.[7][8] 이 과정에서 윌슨은 인종차별주의, 여성혐오, 우생학을 옹호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50] 하버드 대학교 동료였던 리처드 르원틴과 스티븐 제이 굴드 등은 사회생물학 연구 그룹의 일원으로서 윌슨의 주장에 강하게 반대했다.[51] 이들은 윌슨의 사회생물학 저술, 특히 인간 사회와 행동에 대한 결정론적 시각을 비판하는 공개 서한 "사회생물학에 반대하며"를 발표하는 등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52][53] 윌슨의 저작을 비판하는 공개 강연, 독서 모임, 언론 활동 등이 이어졌고, 윌슨은 학술지 ''바이오사이언스''(BioScience)에 "학문적 자경단과 사회생물학의 정치적 중요성"이라는 글을 기고하며 반론을 펼쳤다.[54][55]1978년 2월 미국 과학 진흥 협회(AAAS) 연례 회의에서는 사회생물학 토론 중 국제 인종차별 반대 위원회(International Committee Against Racism) 회원들이 윌슨에게 물을 끼얹으며 인종차별과 생물학적 결정론을 조장한다고 비난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56][60][57][58] 이 사건에 대해 스티븐 제이 굴드와 인민을 위한 과학 측은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하며 물리적 공격 행위를 규탄했다.[59][60]
영국의 철학자 메리 미들리는 저서 ''야수와 인간''(Beast and Man, 1979)에서 윌슨의 ''사회생물학''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61] 미들리는 윌슨의 저작이 동물 행동 연구 분야에서 보여준 명료함과 학문적 깊이, 방대한 정보 등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개념적 혼란, 과학만능주의, 유전자를 의인화하는 경향 등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비판했다.[62]
윌슨은 『사회생물학』에서 사회생물학을 "모든 사회적 행동의 생물학적 기초에 대한 체계적 연구"로 정의했다. 그는 개체군 생태학, 집단유전학, 동물행동학 등의 연구 성과를 통합하여 '새로운 종합(New Synthesis)'을 이루고자 했으며, 특히 사회성 곤충 연구에서 발전시킨 진화 이론을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사회적 행동 이해에 적용함으로써 사회생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정립하려 시도했다. '새로운 종합'이라는 용어에는 생물학뿐만 아니라 인류학, 사회학 등 사회과학과의 통합이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 존 메이너드 스미스는 윌슨의 저작을 "귀중한 요약(에 불과하다)"이라고 말했고, 리처드 도킨스는 혈연선택설을 집단선택설의 일부로 간주하고 진화 게임 이론을 크게 다루지 않은 점 등을 들어 다소 시대에 뒤떨어진 종합이라고 평하면서도, 생태학적 관점과 풍부한 사례는 높이 평가했다. 윌슨의 독창적인 이론적 기여는 크지 않다는 평가도 있지만, 관련 연구들을 집대성하고 새로운 학문 분야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후속 연구자들을 이끌고 논쟁의 중심에 서서 사회생물학 분야의 정립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윌슨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행동이 유전과 환경의 상호작용으로 형성되며, 자유 의지나 문화가 인간 행동을 전적으로 결정한다는 문화 결정론은 일종의 환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문화가 완전히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유전자의 목줄(leash of genes)"에 매여 있는 것처럼 생물학적 기반 위에 형성된다고 보았다.[137] 또한 인간의 정신 발달은 진화적으로 형성된 '후성 규칙(epigenetic rules)'[138](윌슨이 만든 용어로 현대 후성유전학과는 구별되는 개념이다)의 영향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매우 독창적이었으나 동시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사회생물학에 대한 논쟁은 특히 인간에게 적용될 때 더욱 격렬해졌다. 윌슨의 이론은 인간이 아무런 본성 없이 태어나 오직 문화와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는 백지설(tabula rasa)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과학적 논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회생물학』의 마지막 장과 이후 퓰리처상을 수상한 저서 『인간 본성에 대하여』(On Human Nature)를 통해 인간의 정신 역시 문화뿐만 아니라 유전적 요인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사회나 환경이 인간 행동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에는 생물학적인 한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인간 문화의 무한한 다양성과 가능성을 강조하던 기존의 문화 결정론적 시각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윌슨은 지그문트 프로이트 학파처럼 유아기 경험이 인격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설명을 과장된 것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자폐증이나 조현병의 원인을 부모의 양육 방식 탓으로 돌리는 견해에 반대하며, 행동의 생물학적 기초를 밝히는 것이 오히려 불필요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부모들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초기에는 종교가 인간에게 부과하는 죄의식 등에도 비판적이었으나, 후기에는 종교의 사회적 기능 등에 대해 다소 유화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윌슨이 인간 사회생물학 연구의 문을 열었지만, 이후 이 분야는 어빈 드보어(Irven DeVore), 로버트 트리버스의 제자들인 레다 코스미데스와 존 투비, 그리고 리처드 알렉산더(Richard Alexander)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진화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들은 사회생물학 논쟁 과정에서 제기된 비판들을 의식하여 윌슨의 초기 접근 방식과는 다소 거리를 두는 경향을 보였다.
4. 2. 2. 진화심리학과의 관계
사회생물학은 윌슨이 그의 1975년 저서 ''사회생물학''에서 "모든 사회 행동의 생물학적 기초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라고 정의하며 제시한 개념이다. 그는 이 책에서 1970년대까지 축적된 개체군 생태학, 집단 유전학, 동물 행동학의 지식을 통합하여 "새로운 종합(New Synthesis)"을 이루고자 했다. 특히 사회성 곤충의 행동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 진화 이론을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사회적 행동 이해에도 적용하여 사회생물학이라는 새로운 과학 분야를 확립하려 시도했다. 이러한 "새로운 종합"에는 인류학이나 사회학과 생물학을 통합하려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윌슨은 1978년 저서 ''인간 본성에 대하여''에서 "진화 서사시는 아마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신화일 것이다."라고 썼다.[63] 이 표현은 이후 진화의 서사시라는 용어의 사용을 촉발하기도 했다.[24] ''인간 본성에 대하여''는 1979년 퓰리처상 일반 논픽션 부문을 수상했다.[64]
윌슨의 사회생물학적 접근에 대해 존 메이너드 스미스는 그의 저서를 "귀중한 요약" 정도로 평가했고, 리처드 도킨스는 시대착오적인 종합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는 윌슨이 도킨스와 달리 혈연 선택설을 집단 선택의 일부로 보았고, 진화 게임 이론을 크게 강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도킨스는 윌슨의 저서가 자신에게 부족했던 생태학적 관점과 풍부한 사례로 가득 차 있다고 인정했다. 윌슨의 이론적 기여 자체는 크지 않다는 평가도 있지만, 그는 여러 연구를 종합하고 새로운 분야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잠재적인 이론가들을 모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사회생물학을 둘러싼 논쟁의 중심에서 활동하며 이 분야의 성립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윌슨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행동이 유전과 환경 양쪽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며, 자유 의지나 문화 결정론은 환상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그는 문화가 "유전자의 목줄"에 매여 있으며, 생물학적 기반을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137] 이러한 사회생물학적 관점은 진화의 법칙에 따른 '후성 규칙'(epigenetic rules, 윌슨의 조어로 후성유전학과는 다른 개념)의 영향을 통해 형성된다고 설명되었다. 이 이론은 독창적이면서도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138]
사회생물학 연구는 특히 인간에게 적용되면서 큰 논쟁을 일으켰다. 윌슨의 이론은 인간이 완전히 백지 상태로 태어나 문화를 통해 모든 것을 배운다는 백지설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과학적 근거를 제시했다. 그의 저서 ''사회생물학''의 마지막 장과 ''인간 본성에 대하여''에서 윌슨은 인간의 정신이 문화뿐만 아니라 유전의 영향도 강하게 받으며, 사회나 환경 요인이 인간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문화의 다양성과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기존의 문화 결정론적 시각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윌슨은 또한 유아기 경험이 인격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프로이트식 설명이 과장되었다고 비판했다. 예를 들어 자폐증이나 정신 분열증의 원인을 부모의 애정 부족으로 돌리는 설명 대신, 생물학적 기반을 설명함으로써 고통받는 부모들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종교가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지우는 방식에도 반대하며, 과학적 이해를 통해 이러한 종교적 부담에서도 해방될 수 있다고 보았다. 다만 이후 종교에 대해서는 다소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윌슨은 명확하게 인간 사회생물학을 주창했지만, 이 분야는 이후 하버드 대학교의 동료 인류학자 어빈 데보어(Irven DeVore), 로버트 트리버스(Robert Trivers)의 제자인 레다 코스미데스와 존 투비, 그리고 미시간 대학교의 리처드 앨릭산더 등에 의해 진화심리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들은 윌슨의 사회생물학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독자적인 분야를 구축했다.
4. 3. 개미 연구
윌슨은 개미 분류학자로 연구 경력을 시작하여, 개미가 어떻게 미세진화하고 환경적 어려움을 극복하며 새로운 서식지로 이동해 새로운 종으로 발전하는지 연구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분류군 순환" 이론을 개발했다.[18] 또한 수학자 윌리엄 H. 보서트와 협력하여 곤충의 의사소통 방식에 기반한 페로몬 분류 체계를 만들었다.[20]
윌슨은 특히 동물학자 베르트 횔도블러와 함께 개미와 그 행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수행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65][139] 이들의 연구 결과는 1990년 출간된 백과사전적 저서 ''개미(The Ants)''로 집대성되었으며, 이 책으로 윌슨은 두 번째 퓰리처상 일반 논픽션 부문을 수상했다.[18]
이 책에서 윌슨과 횔도블러는 개미 사회에서 나타나는 자기 희생적 행동들이 자매 개미들의 생존을 돕는 유전적 이익(당시에는 자매 간 유전자 공유율을 75%로 보았음)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바탕으로 사회성 곤충의 행동 모델을 통해 다른 동물의 사회적 행동까지 설명하려는 사회생물학적 접근을 시도했다.[65] (다만, 이후 연구에서 일부 종의 여왕개미가 여러 수컷과 교미하는 경우 일개미 간 유전자 공유율이 75%보다 낮아질 수 있다는 점이 밝혀졌으며, 이는 유전자 선택 관점에 더 가까운 설명으로 이어졌다.)[65] 윌슨은 데보라 고든 등 후대 연구자들의 비판에 맞서 자신의 관점을 뒷받침하는 실증 연구를 계속 모색하기도 했다.
윌슨은 개미 사회의 특성을 설명하며 "카를 마르크스는 옳았다. 사회주의는 작동한다. 단지 그가 종을 잘못 골랐을 뿐이다"라고 말한 것으로도 유명하다.[66][140][141] 그는 개미와 같은 고도의 사회성을 가진 종들은 개체가 스스로 번식할 수 없기 때문에, 군집 전체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보다 우선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더 높은 다윈 적합성을 얻는다고 보았다. 반면 인간은 개별적으로 번식할 수 있으므로, 각자의 생존과 자손 번식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고 설명했다.[67]
4. 4. 통섭 (Consilience)
1998년 출간한 저서 《통섭: 지식의 대통합》(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eng)에서 윌슨은 지식을 통합하는 방법론을 제시했다. 그는 C.P. 스노우가 처음 제기했던 자연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통합하려는 논의를 더욱 발전시켰다. 윌슨은 지식이 본래 과학적 탐구와 인문학적 탐구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단일하고 통합된 것이라고 주장했다.[68][142] 그는 이렇게 인간이 탐구해 온 다양한 전문 분야의 지식들을 하나로 융합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윌리엄 휴웰이 만든 '통섭'(Consilience)이라는 용어를 가져와 사용했다.[68][142]윌슨은 인간 본성을 정신 발달의 유전적 패턴인 후성유전적 규칙들의 집합체로 정의했다.[69] 그는 문화나 의례와 같은 것들이 인간 본성을 이루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 본성으로부터 파생된 결과물이라고 보았다. 예를 들어, 만약 인간이 흰개미와 같은 생태적 조건을 가졌다면, 어둠을 선호하는 문화나 그에 맞는 윤리관이 생겨났을 것이라고 설명했다.[69][142] 또한 예술 작품 자체가 인간 본성은 아니지만, 예술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능력은 인간 본성의 일부라고 주장했다.[69]
그는 예술 감상, 뱀에 대한 공포, 또는 근친상간 금기(베스터마르크 효과, 즉 어린 시절 약 6세까지 함께 자란 아이들은 서로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현상)와 같은 개념들이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통해 충분히 연구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69][142] 이전까지 이러한 현상들은 주로 심리학, 사회학, 문화인류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졌지만, 윌슨은 이것들이 단순히 인문학적 주제에 머무르지 않고, 학제 간 연구의 일부로서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학문 간의 경계를 허물고자 했다.[69]
4. 5. 생물애 (Biophilia) 가설
생물애(바이오필리아)는 "생물, 혹은 생명 시스템에 대한 애정"을 의미한다. 이 개념은 에리히 프롬이 생물이나 생명체에 이끌리는 심리적 경향을 설명하기 위해 처음으로 제안하였다. 윌슨 역시 같은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며, 인간에게는 잠재적으로 다른 생물과 관계를 맺으려는 본능적인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관점에서 자연 보호가 인간의 생물애 본능에 부합하는 행위라고 설명했다.5. 정치 및 종교적 신념
윌슨은 과학적 탐구를 중시하는 과학적 인본주의를 지지했으며,[70] 이는 인간 조건 개선에 가장 적합한 세계관이라고 보았다.[70][71] 종교에 대해서는 초기에는 자신을 "임시적 이신론자"[72] 또는 불가지론자[73]로 규정하며 침례교 신앙을 떠났다고 밝혔다.[45] 그는 종교를 종교의 진화적 기원의 산물로 보고 과학적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74] 한때 과학과 종교의 협력을 모색하기도 했다.[75][76] 그러나 후에는 종교적 신념이 인류 진보를 저해한다고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77]
5. 1. 과학적 휴머니즘
윌슨은 "과학이 현실 세계와 자연 법칙에 대해 증가하는 지식과 양립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관"으로서 '''과학적 휴머니즘'''(또는 과학적 인본주의)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70][145] 그는 이러한 과학적 휴머니즘이 세속적 휴머니즘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인간의 조건을 개선하고 사회를 더 좋게 만드는 데 가장 적합한 접근 방식이라고 주장했다.[70][145] 2003년에는 인본주의 선언의 서명자 중 한 명이 되기도 했다.[71]5. 2. 신과 종교에 대한 관점
윌슨은 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임시적 이신론"이라고 설명했으며[72][146], 무신론이라는 꼬리표는 명시적으로 거부하고 불가지론을 선호했다.[73] 그는 자신의 신앙이 전통적인 믿음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설명하며, "교회를 떠났습니다. 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는 아니었고, 단지 더 이상 침례교 신자도 기독교인도 아니었습니다."라고 말했다.[45][137]윌슨은 신에 대한 믿음과 종교 의식이 종교의 진화적 기원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74][147] 그는 종교를 거부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기 위해 과학적으로 연구해야 할 대상이라고 보았다.[148] 그의 저서 ''창조''에서 윌슨은 과학자들이 종교 지도자들에게 "우정의 손길을 내밀어"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과학과 종교는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두 힘이며 창조(생물 다양성 보전)를 구하기 위해 함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75][148] 실제로 윌슨은 텍사스주 미들랜드 칼리지 강연 등을 통해 종교계에 이러한 협력을 호소했고, "엄청난 응답"을 받았다고 언급하며 파트너십 구축에 대한 기대를 나타내기도 했다.[76]
그러나 2015년 1월 ''뉴 사이언티스트''와의 인터뷰에서는 종교적 신념이 "우리를 억누르고 있다"고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인류의 진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종교적 신념을 제거할 정도까지 줄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종의 자연스러운 갈망이나 이러한 위대한 질문을 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77]
5. 3. 환경 보호
윌슨은 1960년대 이후 자신의 원래 연구 분야를 되살리는 것에 대해 논의하면서,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미생물 생태학을 연구할 것이라고 말했다.[78] 그는 20세기의 대량 멸종이 현대 사회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연구했으며, 이를 지구의 미래에 가장 큰 위협 중 하나로 보았다.[79] 1998년에는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생태학적 접근 방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제 숲, 특히 원시림을 베어낼 때, 여러분은 단순히 큰 나무와 수관에서 날아다니는 몇몇 새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불과 몇 제곱마일 이내의 광대한 종들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종들의 수는 수만 종에 달할 수 있습니다. ... 그들 중 많은 수가 아직 과학에 알려지지 않았으며, 과학은 균류, 미생물 및 많은 곤충의 경우와 같이, 의심할 여지 없이 그 생태계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80]
1970년대 후반부터 윌슨은 전 세계적인 생물 다양성 보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관련 연구를 수행하고 장려했다. 1984년에는 인간이 자연 환경에 본능적으로 끌리는 이유를 진화적, 심리적 관점에서 탐구한 저서 ''생물애(Biophilia)''를 출판했다. 이 책은 현대 보존 윤리 형성에 영향을 미친 생물애(biophilia)라는 개념을 널리 알렸다. 1988년에는 미국에서 처음 열린 생물 다양성 관련 전국 회의의 결과물을 바탕으로 ''생물다양성(BioDiversity)''이라는 책을 편집했으며, 이 책을 통해 생물 다양성이라는 용어가 학계와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 작업은 현대 생물 다양성 연구 분야를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81] 2011년 윌슨은 모잠비크의 고롱고사 국립공원과 남서 태평양의 바누아투 및 뉴칼레도니아 군도로 과학 원정을 이끌었다. 윌슨은 컬럼비아 대학교 지구 연구소의 컨설턴트, 미국 자연사 박물관, 국제 보존 단체, 더 네이처 컨서번시 및 세계 야생 생물 기금의 이사로 국제적인 보존 운동의 일원이었다.[18]
멸종 위기의 규모를 파악한 그는 산림 보호를 옹호했으며,[80] 여기에는 1998년에 처음 제안되었지만 2008년에 다시 제안되었고, 통과되지 못한 "미국 산림 보호법"이 포함되었다.[82] 현재 숲 선언(Forests Now Declaration)은 열대림을 보호하기 위한 시장 기반의 새로운 메커니즘을 요구했다.[83] 윌슨은 한때 경제적 이익을 위해 열대우림을 파괴하는 것은 르네상스 시기 그림을 태워 식사를 준비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84] 2014년 윌슨은 멸종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으로 지구 표면의 50%를 다른 종들이 번성할 수 있도록 할당할 것을 요구했다. 이 아이디어는 그의 저서 ''하프 어스(Half-Earth)''(2016)와 E.O. 윌슨 생물 다양성 재단의 하프 어스 프로젝트의 기초가 되었다.[85][86] 윌슨의 대중 과학을 통한 생태학에 대한 영향력은 앨런 G. 그로스가 ''과학적 숭고(The Scientific Sublime)''(2018)에서 논의했다.[87]
윌슨은 과학이 인정한 190만 종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는 글로벌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기 위한 목적으로 생명의 백과사전(Encyclopedia of Life)(EOL) 계획을 시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88] 현재, 그것은 실질적으로 알려진 모든 종에 대한 정보를 포함한다. 유기체 특성, 측정, 상호 작용 및 기타 데이터에 대한 이 개방적이고 검색 가능한 디지털 저장소는 300개 이상의 국제 파트너와 수많은 과학자들이 있으며 지구상의 생명에 대한 지식에 대한 전 세계 사용자들의 접근을 제공한다. 윌슨은 400종 이상의 개미를 발견하고 묘사했다.[89][90]
6. 평가와 논란
E. O. 윌슨은 그의 방대한 연구 업적과 더불어 여러 학문적, 사회적 논쟁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특히 그의 저서 ''사회생물학: 새로운 종합''은 출간 초기 많은 생물학자들의 호평을 받았으나,[7][8] 곧이어 인간 행동의 생물학적 기반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인종차별주의, 여성혐오, 우생학 등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격렬한 비판에 직면하며 사회생물학 논쟁을 촉발했다.[50][135][150][151] 이 과정에서 리처드 르원틴, 스티븐 제이 굴드 등 동료 학자들과 첨예하게 대립했으며,[51][149] 철학자 메리 미들리 등으로부터도 개념적 혼란과 과학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을 받았다.[61][62]
또한, 진화 이론의 핵심 쟁점인 친족 선택과 집단 선택에 대한 견해 차이로 오랜 동료였던 리처드 도킨스와 공개적인 불화를 겪기도 했다.[9][33] 도킨스는 윌슨의 곤충학, 생태학 등 다른 분야의 공헌은 높이 평가하면서도,[33] 친족 선택 이론에 대한 윌슨의 입장을 강하게 비판했다.[34][35]
사후에는 그가 생전에 과학적 인종차별주의자로 비판받던 유사과학자 J. 필리페 러시턴을 비밀리에 지지하고 학문 활동을 도왔다는 사실이 개인 서신을 통해 밝혀져,[38][39][40] 그의 학문적 유산과 윤리적 문제에 대한 논란이 재점화되었다. 이러한 논쟁들은 윌슨의 과학적 업적과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평가를 요구한다.
6. 1. 논란
E. O. 윌슨의 연구와 주장은 학문적 성과와 더불어 여러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그의 저서 ''사회생물학: 새로운 종합''은 출간 이후 격렬한 사회생물학 논쟁을 촉발했으며, 이 과정에서 윌슨은 인종차별주의, 여성혐오, 우생학 옹호 등 심각한 비판에 직면했다.[50][135][150][151] 또한 동료 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와는 진화 이론, 특히 친족 선택과 집단 선택에 대한 견해 차이로 공개적인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9][33]사후에는 그가 생전에 과학적 인종차별주의자로 비판받던 유사과학자 J. 필리페 러시턴을 여러 해 동안 비밀리에 지지하고 그의 연구 활동을 도왔다는 사실이 개인 서신을 통해 밝혀져 또 다른 논란이 되었다.[38][39][40] 이러한 논란들은 윌슨의 학문적 유산에 대한 복합적인 평가를 낳고 있다.
6. 1. 1. 사회생물학 논쟁
윌슨의 저서 ''사회생물학: 새로운 종합''은 출간 초기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7][8] 윌슨은 사회생물학을 "모든 사회 행동의 생물학적 기초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로 정의하며, 1970년대까지 축적된 개체군 생태학, 집단유전학, 동물행동학의 지식을 통합한 "새로운 종합(New Synthesis)"으로 제시했다. 그는 사회성 곤충의 행동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 진화 이론을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사회적 행동 이해에도 적용하여 사회생물학이라는 새로운 과학 분야를 확립하고자 했다.[7][8]그러나 인민을 위한 과학과 연계된 사회생물학 연구 그룹이 책에 대해 강한 비판을 제기하면서 "사회생물학 논쟁"으로 알려진 격렬한 논쟁이 시작되었다.[7][8] 윌슨은 인종차별주의, 여성혐오, 우생학을 옹호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50] 하버드 대학교의 동료 학자인 리처드 르원틴과 스티븐 제이 굴드 등은 이 그룹의 일원으로, 윌슨의 아이디어가 과학적으로 오류일 뿐 아니라 도덕적, 정치적으로도 문제가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51][149] 이들은 주로 윌슨의 사회생물학 저술, 특히 인간 사회와 행동에 대한 그의 "결정론적 견해"를 문제 삼으며 "사회생물학에 반대한다"는 공개 서한을 발표하기도 했다.[53] 이 외에도 윌슨의 연구를 비판하는 공개 강연, 독서 모임, 언론 발표 등이 조직되었다. 이에 윌슨은 ''바이오사이언스''에 "학문적 자경단과 사회생물학의 정치적 중요성"이라는 글을 기고하며 반론을 제기했다.[54][55] 사회학자 마셜 살린스는 『생물학의 이용과 남용』이라는 저서를 통해 윌슨을 직접적으로 비판했다.
윌슨은 인간 행동이 문화와 유전자 양쪽의 영향을 받는다고 거듭 주장했으며, 사회생물학 출간 직후에는 이 이론이 악용될 가능성에 대해 경고하기도 했다(Willson, 1975b). 그는 인간의 행동이나 본성이 유전자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는 비판은 왜곡이라고 반박했다. 윌슨 자신의 정치적 입장은 비판자들과 마찬가지로 좌파적이고 진보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종차별주의자, 여성 혐오자, 우생학자이며 제노사이드나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한다는 비난을 받았다.[135][150][151]
논쟁은 1978년 2월(일부 기록에는 1977년 11월[135]) 미국 과학 진흥 협회(AAAS) 연례 회의에서 극적인 사건으로 이어졌다. 사회생물학 토론회에 참석한 윌슨은 국제 인종차별 반대 위원회(The International Committee Against Racism, 이 단체는 굴드와 르원틴이 소속된 '인민을 위한 과학'과도 연관이 있었다[135]) 회원들에게 둘러싸여 비난 구호를 받으며 머리에 물세례를 당했다. 당시 목격자들은 시위대가 "인종차별주의자 윌슨, 숨을 수 없어, 대량 학살 혐의를 묻는다!"[56][60] 또는 "윌슨, 너는 wet(젖었다!/완전히 틀렸다)!"[135]와 같은 구호를 외쳤다고 증언하지만, 윌슨의 머리에 물을 부을 때 사용된 것이 컵이었는지[56][60] 주전자였는지[57][58]에 대해서는 증언이 일치하지 않는다. 이 사건에 대해, 이전에 윌슨을 비판했던 스티븐 제이 굴드와 인민을 위한 과학 측에서도 물리적 공격 행위 자체는 규탄했다.[59][60] 사회학자 울리카 세게르스트뢰레는 이러한 비판과 반론 과정을 상세히 분석하며, 비판자들 측에도 오해나 과장이 있었음을 지적했다.[151]
철학자 메리 미들리는 ''Beast and Man''(1979)을 저술하던 중 ''사회생물학''을 접하고, 윌슨의 견해에 대한 비판을 담기 위해 책 내용을 대폭 수정했다.[61] 미들리는 윌슨의 책이 동물 행동 연구, 명확성, 학문적 깊이, 백과사전적 범위 면에서는 훌륭하다고 평가했지만, 개념적 혼란, 과학만능주의, 유전학의 의인화 경향에 대해서는 광범위하게 비판했다.[62]
존 메이너드 스미스는 윌슨의 저서를 "귀중한 요약(에 불과하다)"고 평가했고, 리처드 도킨스는 시대착오적인 종합이라고 평하면서도(윌슨은 도킨스와 달리 혈연선택설을 집단 선택의 일부로 간주했고, 진화 게임 이론을 크게 강조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부족했던 생태학적 관점과 풍부한 사례가 담겨 있다고 인정했다. 윌슨의 이론적 기여 자체는 크지 않다는 평가도 있지만, 그는 여러 연구를 종합하고 새로운 분야의 등장을 선언함으로써 잠재적 연구자들을 결집시켰고, 논쟁의 중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사회생물학 분야의 성립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사회생물학 논쟁 초기에 도킨스는 윌슨을 옹호했지만,[32] 이후 진화 이론에 대한 견해 차이로 두 사람 사이에는 불화가 생겼다.[9][33] 이 불화는 2012년 도킨스가 윌슨의 저서 《지구의 사회적 정복》에 대해 《프로스펙트 매거진》에 매우 비판적인 서평을 기고하면서 표면화되었다.[9] 도킨스는 서평에서 윌슨이 친족 선택을 부정하고 집단 선택을 지지하는 것을 비판하며, 그의 주장이 "평범하고 초점이 없다"고 평가했다. 또한 책의 이론적 오류가 "중요하고 광범위하며 논지에 필수적이어서 추천할 수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34][35] 윌슨은 같은 잡지에 반박 글을 기고하며, 도킨스가 "자신이 비판하는 부분과 거의 연관이 없다"고 주장하고 그가 수사법에 의존한다고 비난했다.[33]
2014년 인터뷰에서 윌슨은 "나와 리처드 도킨스 사이에는 논쟁이 없고, 그럴 일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저널리스트이고, 저널리스트는 과학자들이 발견한 것과 제가 연구를 하고 있는 과학자들과의 논쟁을 보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33] 이에 도킨스는 트위터를 통해 "저는 EO 윌슨과 곤충학, 생태학, 생물지리학, 보존 등에 대한 그의 거대한 공헌에 크게 존경을 표한다. 그는 친족 선택에 대해 틀렸을 뿐"이라고 응수했고, "제가 다른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을 보도하는 저널리스트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확장된 표현형》을 읽어 보시기 바란다"고 덧붙였다.[33] 생물학자 제리 코인은 윌슨의 '저널리스트' 발언이 "불공정하고, 부정확하며, 비우호적"이라고 비판했다.[36] 2021년 윌슨의 부고 기사에서 도킨스는 그들의 논쟁이 "순전히 과학적인 것"이었다고 언급했다.[37] 그는 자신의 비판적 서평을 여전히 지지하며 "솔직한 어조"를 후회하지 않지만, "윌슨 교수와 그의 일생의 업적에 대한 깊은 존경"을 여전히 갖고 있다고 밝혔다.[37]
6. 1. 2. J. 필리프 러시턴 지지 논란
윌슨이 사망하기 전, 그의 개인 서신은 미국 의회 도서관의 요청에 따라 기증되었다.[38] 윌슨 사망 이후, 생물지리학과 보전 생물학 분야에서의 그의 업적과 별개로, 여러 해 동안 과학적 인종차별주의자로 비판받는 유사과학자 J. 필리페 러시턴을 지지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었다. 러시턴은 웨스턴 온타리오 대학교 소속의 논란 많은 심리학자였으며, 이후 인종차별적 연구를 지원한다는 비판을 받는 파이오니어 펀드를 이끌었다.[38][39][40]윌슨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러시턴의 동료들에게 여러 차례 이메일을 보내 그의 연구를 옹호했다. 러시턴의 연구는 학문적 부정행위, 데이터 허위 보고, 확증 편향 등 광범위한 비판에 직면해 있었으며, 인종에 대한 개인적인 편견을 뒷받침하기 위해 연구를 이용했다는 지적을 받았다.[38] 윌슨은 러시턴이 작성한 논문을 권위 있는 학술지인 ''PNAS''에 게재되도록 후원하기도 했는데,[41] 이 과정에서 논문의 전제에 동의할 가능성이 높은 검토자를 의도적으로 선정한 정황도 드러났다.[38] 그는 러시턴의 인종차별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했으며, 이는 자신의 평판 훼손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42] 윌슨은 러시턴의 두 번째 PNAS 논문 후원 요청에 대해 "당신을 여러 면에서 지지하지만, 제가 PNAS에서 인종적 차이에 대한 논문을 후원하는 것은 우리 둘 모두에게 역효과를 낼 것"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또한 러시턴의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 "...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경우 미국 학계에서 사실상 사형 선고와 같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언급하며, "저 스스로도 두려움 때문에 러시턴의 연구 주제를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38]
2022년, E.O. 윌슨 생물다양성 재단 이사회는 성명을 통해 윌슨의 러시턴 지지 및 인종차별적 관점에 대해 공식적으로 거부 입장을 밝혔다.[43]
7. 수상 및 영예
윌슨의 과학 및 보존 관련 주요 수상 및 영예는 다음과 같다.
연도 | 수상/영예 내용 | 비고 (수여 기관, 내용 등) |
---|---|---|
1959 |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회원 선출 | |
1967 | 뉴컴 클리블랜드 상 | 『화학 통신의 최근 발전』 |
1969 | 국립 과학 아카데미 회원 선출 | |
1976 | 미국 철학회 회원 선출 | |
1977 | 미국 국가 과학 메달 | 사회생물학 제창 |
1979 | 레이디 상 | 필라델피아 자연 과학 아카데미 |
1979 | 퓰리처상 (일반 논픽션 부문) | 인간 본성에 대하여 |
1984 | 환경 업적을 위한 타일러 상 | 환경 보호 |
1987 | ECI 상 | 국제 생태 연구소 (육상 생태) |
1987 | 웁살라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 | 수학 및 과학 학부 |
1988 | 업적 아카데미 골든 플레이트 상 | |
1990 | 크라포드 상 |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 생태학 분야 연구 |
1991 | 퓰리처상 (일반 논픽션 부문) | 개미 (공저 베르트 휠도블러) |
1993 | 국제 생물학상 | 생태학, 행동학, 진화생물학 공헌 및 사회생물학 제창 |
1994 | 칼 세이건 과학 대중화상 | |
1995 | 국립 오듀본 협회 오듀본 메달 | |
1995 | 타임지 선정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25인' | |
1996 | 공로 증서 | 국제 곤충학 회의 (이탈리아 피렌체) |
1998 | 과학 분야의 뛰어난 업적을 기리는 벤자민 프랭클린 메달 | 미국 철학회 |
1999 | 올해의 인본주의자 | 미국 인본주의 협회 |
2000 | 과학 저술을 위한 루이스 토마스 상 | |
2000 | 킹 파이살 국제상 (과학 부문) | 사회생물학 확립과 사회과학에 대한 생물학 도입[152] |
2000 | 키슬러 상 | 사회생물학 확립과 사회과학에 대한 생물학 도입[152] |
2001 | 니렌버그 상 | |
2002 | 버스 메달 | 왕립 지리학회 |
2004 | 탁월한 이글 스카우트 상 | |
2006 | 린네 300주년 은메달 | |
2007 | 애디슨 에머리 베릴 메달 | 피바디 자연사 박물관 |
2007 | TED 상 2007 | |
2007 | XIX 프레미 인터내셔널 카탈루냐 | |
2009 | E.O. 윌슨 바이오필리아 센터 개관 | 플로리다주 월턴 카운티 노쿠스 농장 |
2009 | 탐험가 클럽 메달 | |
2010 | BBVA 재단 지식의 최전선 상 | 생태 및 보존 생물학 부문 |
2010 | 건축 분야의 토머스 제퍼슨 메달 | |
2010 | 하트랜드 상 (소설 부문) | 첫 소설 개미 언덕: 소설 |
2010 | EarthSky 올해의 과학 커뮤니케이터 | |
2012 | 국제 코스모스상 | |
2014 | 큐 국제 메달 | |
2014 | 미국 자연사 박물관 명예 과학 박사 학위 | |
2016 | 하퍼 리 상 | |
2018 | 종명 헌정 | Myrmoderus eowilsoni |
2020 | 종명 헌정 | Miniopterus wilsoni |
(연도 미상) | 과학 인용 고전상 | 과학 정보 연구소, 곤충 사회 및 사회생물학: 새로운 종합 |
(연도 미상) | 연구선 R/V E.O. 윌슨 명명 | 도핀 아일랜드 해양 연구소 |
8. 저서
출판년도 | 원제 | 한국어 번역 제목 | 공동 저자 | 비고 |
---|---|---|---|---|
1956 | {{lang|eng|Character displacement|} | } || 생물 종 분화 || 윌리엄 브라운 주니어 || ''Systematic Zoology'' 게재 논문. 1986년 과학 인용 고전 선정.[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