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브루스 이스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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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J. 브루스 이스메이는 1862년 영국에서 태어나 화이트 스타 라인의 사장으로 활동하며, 타이타닉 호를 포함한 대형 여객선 건조를 주도했다. 1902년 화이트 스타 라인을 국제 해운 상업에 매각하고 국제 상선 회사의 사장이 되었으며, 1912년 타이타닉 호 침몰 사고에서 생존했으나, 여성과 아이들을 먼저 구조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사고 이후 은둔 생활을 하다가 1937년 사망했으며, 타이타닉 침몰과 관련된 여러 영화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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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브루스 이스메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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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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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조지프 브루스 이스메이 |
출생 | 1862년 12월 12일 |
출생지 | 크로스비, 리버풀, 잉글랜드 |
사망 | 1937년 10월 17일 |
사망지 | 메이페어, 런던, 잉글랜드 |
안장지 | 푸트니 베일 묘지 |
직업 | 화이트 스타 라인의 회장 겸 경영 이사 |
배우자 | 줄리아 플로렌스 시펠린(1888년 결혼) |
부모 | 토머스 헨리 이스메이 |
경력 | |
주요 경력 | 화이트 스타 라인 회장 겸 경영 이사 |
기타 | |
참고 | RMS 타이타닉 생존자 |
2. 초기 생애
1862년 12월 12일, 랭커셔주 (현재의 머지사이드주 지역) 크로스비에서 태어났다.[2][27] 아버지는 화이트 스타 라인의 창립자이자 이스메이, 임리 앤 컴퍼니(Ismay, Imrie and Company)의 수석 파트너인 토머스 헨리 이스메이(1837–1899)였고, 어머니는 선박업자 루크 브루스의 딸인 마거릿 브루스(1837–1907)였다.[2][3]
어린 시절에는 엘스트리 학교와 해로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이후 프랑스에서 1년 동안 개인 교습을 받았다. 대학 학위는 취득하지 않았다. 1년간의 그랜드 투어를 마친 후,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4년간 견습 생활을 했다. 그 후 회사 대표로 미국 뉴욕으로 파견되어 에이전트 직급까지 올랐다.[28] 뉴욕에 머무는 동안 미국인 줄리아 플로렌스 시펠린(Julia Florence Schieffelineng)을 만나 1888년 12월 4일 결혼했다.[4][28]
1891년에는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회사인 이스메이, 임리 앤 컴퍼니의 공동 경영자가 되었다.[28]
2. 1. 가족
1888년 12월 4일 미국인 줄리아 플로렌스 시펠린(Julia Florence Schieffelineng, 1866-1963)과 뉴욕에서 결혼했다. 슬하에 4명의 자녀를 두었다.[27]이름 | 생몰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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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브루스 이스메이 (Margaret Bruce Ismayeng) | 1889-1967 | 육군 군인 조지 치프 준장과 결혼 |
헨리 브루스 이스메이 (Henry Bruce Ismayeng) | 1891-? | |
토머스 브루스 이스메이 (Thomas Bruce Ismayeng) | 1894-1954 | |
에블린 콘스턴스 이스메이 (Evelyn Constance Ismayeng) | 1897-1940 | 실업가 바실 샌더슨과 결혼 |
1899년 아버지 토마스 이스메이가 사망하자, J. 브루스 이스메이는 화이트 스타 라인의 회장직을 계승했다.[6][7] 회장직에 오른 그는 아버지가 건조한 RMS 오셔닉호를 능가하는 4척의 대형 여객선 건조를 추진했다. 이 선박들은 빅 4로 불렸으며, 속도보다는 크기와 호화로움에 중점을 두었다. 빅 4는 RMS 켈트, RMS 세드릭, RMS 발틱, RMS 애드리애틱이다.
3. 화이트 스타 라인 회장
1902년, 이스메이는 J.P. 모건 & 컴퍼니가 주도하는 대서양 해운 연합인 국제 상선 회사(International Mercantile Marine Co., IMM)에 화이트 스타 라인을 매각하는 과정을 감독했다.[8] 이는 아버지 토마스가 생전에 반대했던 일이었으나, 화이트 스타 라인의 주요 협력사인 하랜드 앤 울프 조선소 회장 윌리엄 피리 등의 설득에 따른 결정이었다. 화이트 스타 라인이 IMM 산하로 편입된 후, 이스메이는 1904년 2월 모건의 지원을 받아 IMM의 사장으로 취임했다.[9] (자세한 내용은 #국제 상선 회사 합병 참고)
IMM 사장으로서 이스메이는 경쟁사인 큐나드 라인이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건조한 루시타니아호와 모리타니아호에 대응해야 했다. 이에 그는 올림픽급 여객선인 올림픽호, 타이타닉호, 자이갠틱호(후에 브리타닉호로 변경)의 건조 계획을 추진하며 큐나드 라인과의 경쟁을 이어나갔다. (자세한 내용은 #올림픽급 여객선 건조 참고)
3. 1. 올림픽급 여객선 건조
화이트 스타 라인의 경쟁사였던 큐나드 라인은 1902년 화이트 스타 라인이 미국의 J. P. 모건이 이끄는 국제 해운 상업(International Mercantile Marine Co., IMMC)에 인수된 것을 경계한 영국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영국 기업으로 남았다. 영국 해군의 지원까지 등에 업은 큐나드 라인은 1906년 당시 가장 크고 빠른 호화 여객선 루시타니아호와 모리타니아호를 진수시키며 IMMC 소속이 된 화이트 스타 라인에 도전했다.
이에 맞서기 위해 이스메이는 올림픽호, 타이타닉호, 그리고 자이갠틱호(훗날 '브리타닉호'로 변경)라는 세 척의 거대하고 호화로운 여객선을 건조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 배들은 속도 경쟁보다는 크기와 안락함으로 승부하려 했다.
건조는 하랜드 앤 울프 조선소의 토머스 앤드루스 이사의 감독 아래 진행되었다. 1910년 초, 건조 계획 회의에서 하랜드 앤 울프의 다른 이사 알렉산더 칼라일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총 2,886명을 수용할 수 있는 48척의 구명보트를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스메이는 비용 문제를 들어 이를 거절하고, 당시 영국 상무청 규정이 요구하는 최소 기준인 16척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실제 타이타닉호에는 20척의 구명보트가 설치되었다.) 칼라일은 훗날 "우리는 일등석 카펫에 대해서는 두 시간을 논의했지만, 구명보트에 대해서는 15분밖에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회고하며 당시 안전 문제에 대한 경시 풍조를 비판했다. 건조를 총괄한 앤드루스 역시 더 많은 구명보트를 설치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이스메이는 이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11년 5월 31일 열린 타이타닉호 진수식에는 이스메이와 J. P. 모건도 참석하여 새로운 거대 여객선의 탄생을 지켜보았다. 이스메이는 1912년 4월 10일을 타이타닉호의 처녀 항해일로 정하고, 화이트 스타 라인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베테랑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에게 지휘를 맡겼다. 스미스 선장은 불과 몇 달 전인 1912년 2월, 올림픽호를 운항하던 중 영국 해군 순양함과 충돌 사고를 일으켰으나, 이스메이는 해군 측의 과실 주장을 일축하고 스미스를 예정대로 타이타닉호의 초대 선장으로 임명했다.
3. 2. 국제 상선 회사 합병
1899년 아버지 토마스 이스메이가 사망하자, J. 브루스 이스메이는 화이트 스타 라인의 회장직을 계승했다.[6][7] 그러나 이미 1898년 미국의 존 피어폰트 모건은 해운 사업 진출을 노리고 있었고, 여러 회사를 인수하고 있었다. 화이트 스타 라인도 대상이었으며, 아버지 토마스는 모건의 인수를 막기 위해 노력하다 사망했다.
브루스 이스메이도 처음에는 모건에 대항하려 했으나, 화이트 스타 라인의 하청 조선 회사인 하랜드 앤 울프의 회장 윌리엄 피리는 모건과의 가격 경쟁으로 조선 예산이 삭감될 것을 우려하여 인수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했다. 결국 1902년, 이스메이는 J.P. 모건 & 컴퍼니가 여러 주요 미국 및 영국 해운사를 흡수하여 설립을 추진하던 대서양 해운 연합인 국제 상선 회사(International Mercantile Marine Co., IMM)에 화이트 스타 라인을 매각하는 안을 받아들였다.[8] 이 합병으로 화이트 스타 라인은 IMM의 운영 자회사 중 하나가 되었고, 1904년 2월, 이스메이는 모건의 지원을 받아 IMM의 사장으로 취임했다.[9]
4. RMS 타이타닉
이스메이는 화이트 스타 라인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하랜드 앤드 울프 조선소와 협력하여 거대하고 호화로운 올림픽급 여객선 3척(올림픽호, 타이타닉호, 브리타닉호)의 건조를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비용 절감 등을 이유로 구명보트 수를 법적 최소 요구치에 가깝게 줄이는 결정을 내렸는데, 이는 훗날 타이타닉 침몰 시 인명 피해를 키운 요인 중 하나로 지적되며 큰 비판을 받았다.[11][12]
그는 1912년 4월 10일 사우샘프턴에서 출항한 타이타닉호의 처녀 항해에 승선했다.[3] 항해 중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에게 속도를 높여 예정보다 일찍 뉴욕에 도착하도록 압력을 가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18] 1912년 4월 14일 밤, 배가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이 불가피해지자, 이스메이는 4월 15일 새벽 접이식 구명보트 C에 탑승해 탈출했다.[13]
선주로서 배와 승객을 버리고 먼저 탈출했다는 비판은 생존 이후 그를 계속 따라다녔다. 특히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소유의 언론을 중심으로 그를 "타이타닉호의 겁쟁이"로 몰아세우는 등 거센 비난 여론이 일었다.[19] 뉴욕 도착 후 그는 미국 상원 조사위원회와 영국 무역위원회 조사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조사 과정에서 그를 옹호하는 증언도 있었으나,[10] 비판적인 여론을 뒤집기는 어려웠다. 영국 조사위원회는 그가 다른 승객들을 도운 후 자리가 빈 보트에 탑승했다고 결론 내렸지만,[1] 타이타닉에서의 그의 행적은 오랫동안 논란거리가 되었고, 많은 대중 매체에서 부정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결과를 낳았다.
4. 1. 타이타닉호 침몰

이스메이는 화이트 스타 라인의 새로운 주력 선박이 될 올림픽급 여객선 건조 과정에 깊이 관여했다. 1907년, 하랜드 앤드 울프 조선소의 윌리엄 피어리 경과 만나 큐나드 라인의 루시타니아와 모리타니아에 대항할 선박 건조를 논의했다. 이스메이는 속도보다는 거대한 크기와 호화로운 시설을 통해 부유층과 중산층 승객을 유치하는 전략을 세웠다. 이에 따라 올림픽, 타이타닉, 브리타닉 세 척의 건조가 계획되었다. 그러나 건조 과정에서 이스메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결정을 내렸는데, 바로 구명보트 수를 기존 계획이었던 48척에서 당시 무역 위원회 규정이 허용하는 최소치인 16척으로 줄이도록 승인한 것이다.[11][12] 이는 결과적으로 타이타닉 침몰 시 더 큰 인명 피해를 야기한 요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
이스메이는 자신이 소유한 선박의 처녀 항해에 종종 동승했으며, 1912년 4월 10일 사우샘프턴에서 출항한 타이타닉의 처녀 항해에도 탑승했다.[3] 그는 B데크의 일등석 스위트룸 B52/54/56에 머물렀다.[28] 항해 중 이스메이는 수석 엔지니어 조지프 벨 또는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과 가능한 빠른 속도로 운항하여 기록을 세우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4월 14일 오후에는 스미스 선장과 만나 "오늘은 어제보다 좋았고, 내일은 더 좋아질 것이다. 이대로라면 올림픽 호의 기록을 갱신하여 화요일(4월 16일) 밤에는 뉴욕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며 예정보다 빠른 도착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이는 수요일 조간 신문에 실려 홍보 효과를 노린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40분, 뉴펀들랜드 남동쪽 약 약 595.46km 해상에서 타이타닉호가 빙산과 충돌했을 때, 이스메이는 자신의 선실에서 잠들어 있었으나 충격으로 잠에서 깼다. 그는 즉시 잠옷 위에 코트를 걸치고 브릿지로 달려가 스미스 선장에게 상황을 물었다. 선장으로부터 빙산과 충돌했으며 선박의 손상이 심각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4월 15일 새벽, 구조 작업이 시작되자 이스메이는 우현 갑판에서 일등 항해사 윌리엄 맥마스터 머독 등을 도와 승객들을 구명보트에 태우는 작업을 도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5번 구명보트를 내릴 때 "더 내려, 더 내려"라고 재촉하다가 5등 항해사 로우로부터 "더 빨리 내리라고? 그러면 모두 익사할 거요!"라는 호통을 듣고 물러서기도 했다. 로우 항해사는 또한 오전 1시경 조난 신호탄이 발사될 때 이스메이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오전 1시 40분경, 우현의 마지막 구명보트인 접이식 보트 C가 내려질 때, 이스메이는 아직 갑판에 많은 승객들이 남아있음을 알면서도 보트의 빈자리에 올라탔다.[13] 그는 이후 조사 과정에서 배가 침몰하는 마지막 순간에는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고 증언했다. 접이식 보트 C는 약 3~4시간 후 카르파티아 호에 의해 구조되었다.
카르파티아 호에 구조된 후, 이스메이는 선의(船醫) 프랭크 맥기의 선실로 안내받았다. 그는 아서 로스트론 선장에게 화이트 스타 라인 뉴욕 사무소로 보낼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보를 요청했다. "타이타닉호가 오늘 아침 빙산 충돌 후 침몰하여 심각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으며, 자세한 내용은 추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브루스 이스메이." 이스메이는 뉴욕에 도착할 때까지 맥기의 선실에 머물며 고형 음식을 전혀 먹지 않았고, 아편의 영향을 받은 상태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17세였던 또 다른 생존자 잭 테이어는 침몰로 아버지를 잃었음에도 이스메이를 위로하려 했으나, 이스메이는 "앞만 바라보며 나뭇잎처럼 떨고 있었고... 그렇게 완전히 망가진 남자는 처음 봤다"고 회상했다.
뉴욕 도착 후, 이스메이는 공화당 상원의원 윌리엄 알덴 스미스가 주재한 미국 상원 조사위원회에 첫 번째 증인으로 소환되어 증언했다. 몇 주 후에는 머지 경이 의장을 맡은 영국 무역 위원회 조사에서도 증언했다. 침몰 직후 뉴욕 타임스 등 언론에서는 이스메이가 여성과 아이들을 먼저 태우지 않고 구명보트에 탑승한 행동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쏟아냈다.[10] 일부 생존자들은 이스메이가 승객 탑승을 도왔으며, 더 이상 여성 승객이 없을 때 보트에 탔다고 변호하기도 했다.[10]
4. 2. 생존과 비판
타이타닉호가 빙산과 충돌하고 침몰이 임박하자, 이스메이는 배가 가라앉기 약 20분 전에 내려진 접이식 구명보트 C에 탑승했다.[13] 그는 나중에 배의 마지막 순간을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고 증언했다. 구명보트 C는 약 3~4시간 후 카르파티아호에 의해 구조되었다.
구조된 후 이스메이는 카르파티아호 선의(船醫) 프랭크 맥기의 선실로 안내받았다. 그는 로스트론 선장에게 화이트 스타 라인 뉴욕 사무소로 "타이타닉호가 오늘 아침 빙산 충돌 후 침몰하여 심각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으며, 자세한 내용은 추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브루스 이스메이."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스메이는 맥기의 선실에서 나오지 않았고, 고형 음식 섭취를 거부했으며, 아편의 영향을 받은 상태였다. 당시 17세였던 또 다른 생존자 잭 테이어는 아버지를 잃었음에도 이스메이를 위로하려 찾아갔으나, 이스메이가 "앞만 바라보며 나뭇잎처럼 떨고 있었고", "그렇게 완전히 망가진 남자는 처음 봤다"고 회상했다.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이스메이는 공화당 상원의원 윌리엄 알덴 스미스가 주재하는 미국 상원 조사위원회의 첫 번째 증인으로 소환되었다. 그는 위원회에 전적으로 협력하겠다고 밝혔으나, 처음부터 적대적인 참고인 취급을 받았으며 그의 태도가 반감을 사기도 했다. 몇 주 후에는 머지 경이 의장을 맡은 영국 무역 위원회 조사에서도 증언했다.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이후 이스메이는 여성과 아이들이 여전히 배에 남아있는 상황에서 구명보트에 탑승했다는 이유로 미국과 영국 언론으로부터 거센 비난에 직면했다. 특히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언론 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소유의 신문들은 황색 언론을 통해 그를 "타이타닉호의 겁쟁이(Coward of the Titanic)" 또는 "J. 브루트(Brute, 짐승) 이스메이"라고 부르며 맹렬히 공격했고, 일부는 화이트 스타 라인의 깃발을 비겁함을 상징하는 노란색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19] 이스메이가 배를 버리는 모습을 묘사한 부정적인 만평이 실리기도 했다. 당시 시카고의 젊은 기자였던 작가 벤 헤흐트는 스미스 선장과 이스메이의 행동을 대조하며 "밤바다의 끔찍한 죽음 앞에서 / 당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 선원의 의무이지만, 군중과 함께 도망치는 것은 / 선주의 고귀한 권리이다"라는 신랄한 시를 쓰기도 했다.[14] 이스메이가 배의 운항은 전적으로 스미스 선장의 책임이며 자신은 단순한 승객이었다고 주장한 태도는 "무책임한 비겁자"라는 비판을 더욱 키웠다. 역사가 브룩스 애덤스는 당시 상원 조사위원회 위원 프랜시스 뉴랜즈 상원의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구명 보트 부족, 선장 임명, 승무원 훈련 부족, 심지어 무모한 항해 지시 가능성까지 모두 이스메이의 책임으로 돌리며, 그가 배와 함께 죽는 것만이 성의를 보이는 길이었다고 강하게 비판했는데, 이는 당시 이스메이를 향한 엄격한 여론을 보여준다.
반면, 이스메이가 여성과 아이들을 먼저 구조하는 원칙을 따랐고 스스로도 많은 이들을 도왔다는 주장도 있었다. 영국 공식 조사에서는 "이스메이 씨는 많은 승객들을 도운 후, 우현의 마지막 구명정인 'C'를 내리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그곳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 그가 탈 자리가 있었고, 그는 뛰어 들어갔다. 만약 그가 뛰어들지 않았다면, 그는 단지 자신의 목숨 하나를 잃은 사람의 수에 더했을 뿐이다"라며 그의 행동을 옹호했다.[15] 이스메이 본인과 함께 구명보트 C에 탑승했던 일등석 승객 윌리엄 E. 카터 역시 당시 주변에 더 이상 여성과 아이들이 없었다고 증언했다.[16] 그러나 윌리엄 카터의 아내 루실 카터는 1914년 이혼 소송을 제기하며 남편이 충돌 후 자신과 아이들을 버려두고 도망쳤으며 "잔혹하고 야만적인 대우와 인격 모독"을 했다고 비난하여, 윌리엄 카터의 증언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다.[17]
또한 일부 승객들은 항해 중 이스메이가 스미스 선장에게 배의 속도를 높여 예정보다 일찍 뉴욕에 도착함으로써 홍보 효과를 노리도록 압력을 가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폴 로든-브라운과 같은 역사가들은 이스메이의 평소 기록 등을 근거로 그럴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18] 미국 상원 조사 보고서에서는 "이스메이 씨와 (설계자) 앤드루스 씨의 존재가 통상보다 배의 속도를 증가시키는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 배의 소유주와 건조자가 승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선장에게 묵시적인 압력을 가했을 것이다"라고 언급하며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간접적인 영향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러한 비난과 논란 속에서 런던 사교계는 이스메이를 배척하고 겁쟁이로 낙인찍었다. 결국 그는 1913년 6월 30일, 국제 상선 회사(IMM) 사장직과 화이트 스타 라인 회장직에서 사임했다. 이후 국제 상선 회사 이사직에서도 물러났다.
이스메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이후 대중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허스트 언론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따라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그는 악당으로 묘사되었다. 1943년 나치 독일의 선전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스미스 선장에게 속도 기록을 위해 위험한 항해를 강요하는 부패한 사업가로, 1996년 미니시리즈 타이타닉에서도 비슷하게 그려졌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1997년 영화 타이타닉 역시 이스메이를 부정적으로 묘사했는데, 이는 일등실 승객 엘리자베스 라인스가 이스메이가 스미스 선장에게 자매선 올림픽호의 기록을 깨기 위해 속도를 내라고 부추기는 것을 들었다는 증언에 일부 기반한다.[20][21][22] 그러나 이 증언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줄리안 펠로우스가 각본을 쓴 2012년 미니시리즈 타이타닉에서는 이스메이가 외국인 승무원들을 가두라고 명령하는 배타주의자로 그려졌고, TV 시리즈 보이저스!의 에피소드에서는 여자로 변장해 구명보트에 타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미국 조사 이후, 이스메이는 국제 상선 회사 소속 모든 선박에 승객 전원을 수용할 수 있는 구명정을 갖추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생존한 다른 장교들과 함께 RMS 아드리아틱호를 타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5. 침몰 이후의 삶
타이타닉 침몰 후 구조된 이스메이는 1912년 4월 18일 저녁, 생존자들과 함께 카르파티아호를 타고 뉴욕에 도착했다. 도착 직후, 미국 상원 통상 위원회 특별 소위원회의 위원장 윌리엄 올든 스미스 상원 의원으로부터 가능한 한 빨리 소위원회에서 증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스메이는 다음 날인 4월 19일 오전, 월도프-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열린 심사 위원회에 출석하여 조사에 협조하겠다고 밝혔으나, 처음부터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희생양 취급을 받았다. 그의 태도는 때때로 주위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18]
조사 과정에서 이스메이는 배의 운항 책임은 전적으로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에게 있으며 자신은 단순한 승객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태도는 그에게 "무책임한 비겁자"라는 비판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다.[18] 당시 역사가 브룩스 애덤스는 심사 위원회 위원인 프랜시스 뉴랜즈 상원 의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구명보트 부족, 무모한 선장 임명, 승무원 훈련 부족, 과속 항해 지시 가능성 등을 모두 이스메이의 책임으로 돌리며, 1,500명의 승객을 뒤로하고 혼자 살아남은 그의 행동을 강하게 비난했다. 이는 당시 이스메이를 향한 엄격한 여론을 보여준다.[18]
그러나 선박 운항의 최종 권한은 선장에게 있었고, 이스메이가 선장의 권한을 침해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나오지 않으면서 심사 위원회는 이스메이에게 법적 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스미스 위원장은 5월 18일 상원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이스메이 씨와 토머스 앤드루스 씨의 존재가 통상보다 배의 속도를 증가시키는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배의 소유주와 건조자가 승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선장에게 묵시적인 압력을 가했을 것"이라고 언급하는 데 그쳤다.[18] 이후 영국 정부의 공식 조사에서도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법적인 책임은 면했지만, 이스메이는 '타이타닉' 참사로 인한 도덕적 비난과 정신적 충격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는 사고 1년 후 화이트 스타 라인 회장직에서 물러났으며, 모회사인 국제 해운 상사 내에서도 비판 여론이 높아져 결국 이사직에서도 사임하게 되었다.[18]
이후 이스메이는 대중의 시선을 피해 아일랜드 골웨이 주에 구입한 저택 등지에서 은둔에 가까운 조용한 삶을 살았다. 그의 아내 플로렌스는 "타이타닉은 우리 인생을 파멸시켰습니다"라고 말하곤 했다.[18] 그는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가족 내에서는 타이타닉에 대한 이야기가 금기시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은둔 생활과 죽음 참고) 이스메이는 만년까지 참사의 기억으로 고통받았으며, 1937년 10월 17일 런던에서 당뇨병 합병증과 뇌졸중으로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7][18]
5. 1. 은둔 생활과 죽음
영국 정부의 공식 조사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이스메이는 '타이타닉' 참사의 충격에서 결코 회복되지 못했다. 이미 참사 이전부터 정서적으로 불안정했던 그는 이 비극으로 인해 깊은 우울증에 빠졌고, 이후 조용한 삶을 살았다.이스메이는 1년 중 일부를 아일랜드 골웨이 주 코네마라의 데리니아(Derrynea) 타운랜드(카슬라 근처)에 있는 대규모 별장인 코스텔로 로지에서 보냈다. 이 별장은 침몰 1년도 채 안 된 1913년 1월 런던 캐도건 가든스의 헨리 루돌프 레잉에게서 구매한 것으로, 인접한 강과 호수의 어업권도 포함되어 있었다.
은둔 생활에도 불구하고 이스메이는 사업 활동을 계속했다. 특히 그의 아버지가 설립한 배상책임보험 회사인 리버풀 & 런던 선박 보호 및 배상 협회(Liverpool & London Steamship Protection & Indemnity Association Limited) 운영에 관여했다. 화이트 스타 라인의 역사가 폴 루든-브라운은 이스메이가 타이타닉 생존자 친척들에게 수십만 파운드의 보험금을 지급하는 과정을 굳건하게 처리했으며, "그가 쉽게 책임을 회피하고 이사회에서 사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과제를 고수했고, 25년 동안 회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회사의 회의록에서 '타이타닉' 참사에 대한 언급이 없는 페이지는 거의 없었다"고 기록했다.[18]
이스메이는 해운 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영국 상선 장교 훈련선 '머시(Mersey)'호를 출범시켰고, 실종 선원 기금을 위해 1.1만파운드를 기부했으며, 1919년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상선 선원들의 공헌을 기리는 기금으로 2.5만파운드를 기부했다.[23]
참사 이후, 이스메이의 아내 플로렌스는 가족 내에서 타이타닉에 대한 언급을 금지했다. 그의 손녀이자 역사가인 폴린 마타라소는 만년의 할아버지가 마치 "시체"와 같았다고 회고하며, "생존하는 불운(어쩌면 오판)을 겪은 그는 침묵 속으로 물러났고, 그의 아내는 이에 동조하여 가족들에게 그 침묵을 강요하여 '타이타닉'이라는 주제가 바다에서 건져낸 시체만큼이나 효과적으로 얼어붙도록 만들었다"고 술회했다.
이스메이는 사생활에서 고독한 시간을 보냈다. 여름에는 코네마라 별장에서 송어와 연어 낚시를 즐겼고, 리버풀에서는 세인트 조지 홀에서 혼자 콘서트를 보거나 영화관을 찾았으며, 공원을 산책하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한 가족 친구는 이스메이가 끊임없이 "그 재앙을 어떻게 피할 수 있었을지에 대한 쓸모없는 추측으로 자신을 괴롭혔다"고 전했다. 1936년 크리스마스, 한 손자가 난파 경험이 있는지 묻자 이스메이는 25년 만에 침묵을 깨고 "그래, 나는 한때 침몰할 수 없다고 믿었던 배에 있었다"고 답했다.

1930년대에 이스메이는 당뇨병 진단을 받고 건강이 악화되었다.[16] 1936년 초에는 병세가 심해져 오른쪽 다리를 무릎 아래까지 절단하고 휠체어에 의지하게 되었다. 1937년 10월 14일 아침, 런던 메이페어 자택에서 심각한 뇌졸중으로 쓰러져 의식을 잃고 말을 못하게 되었다. 사흘 뒤인 10월 17일, J. 브루스 이스메이는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4]
이스메이의 장례식은 1937년 10월 21일 세인트 폴 교회, 나이츠브리지에서 거행되었으며, 런던 퍼트니 베일 묘지에 안장되었다.[25] 그는 부동산을 제외하고 약 693305GBP의 상당한 개인 재산을 남겼다. 1939년 3월, 그의 아내 플로렌스는 코네마라의 재산(어업권 포함)을 아들 조지 브루스 이스메이에게 양도했다. 조지 브루스 이스메이는 1949년 11월 14일 미국 시민권을 회복하기 위해 영국 국적을 포기했다.[26]
이스메이의 아내 줄리아 플로렌스 이스메이(결혼 전 성: 시에펠린)는 1963년 12월 31일 런던 켄싱턴에서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6]
6. 유산과 평가
2014년 촬영]]
이후 그는 아일랜드 서부 골웨이주에 구입한 저택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그의 아내 줄리아는 "타이타닉은 우리 인생을 파멸시켰습니다"라고 자주 언급했다고 전해진다. 이스메이는 1937년 10월 17일 런던 메이페어의 힐 스트리트 15번지 자택에서 당뇨병 합병증으로 사망했다[27]. 그와 아내 줄리아는 런던의 퍼트니 베일 묘지에 함께 묻혀 있다.
6. 1. 대중문화 속 묘사
이스메이는 타이타닉 침몰 이후 황색 언론의 집중적인 비난 대상이 되었다. 특히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언론 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소유의 언론사들이 이러한 비난 여론을 주도했다.[19]
이러한 초기 언론의 묘사 이후, 타이타닉을 다룬 후대의 많은 영화들은 이스메이를 부정적인 인물로 그리는 경향을 보였다. 예를 들어, 1943년 나치 독일의 선전 영화인 ''타이타닉''에서는 이스메이가 스미스 선장에게 대서양 횡단 속도 기록을 세우기 위해 빙산이 많은 위험 해역에서 전속력으로 항해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부패한 영국 사업가로 묘사된다. 1996년작 TV 미니시리즈 ''타이타닉''에서도 비슷한 부정적 묘사가 이어진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1997년 영화 ''타이타닉''에서도 이스메이는 주요 악역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 이스메이가 스미스 선장에게 올림픽호의 기록을 깨기 위해 뉴욕 도착을 서두르도록 압박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실제 1등실 승객이었던 엘리자베스 라인스의 증언에 기반한 것이다.[20][21] 해당 장면은 라인스가 대화를 엿들었다고 증언한 실제 시간과 장소에서 촬영되었으며, 배경에 엘리자베스 라인스라는 인물이 등장하지만, 이스메이가 앞지르려 한 것이 "올림픽"호의 횡단 시간이라는 점은 명시하지 않는다.[22] 그러나 라인스의 증언 자체는 여러 역사가들에 의해 그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영화 제작 당시 컨설턴트 중 한 명이었던 폴 로든-브라운은 이스메이에 대한 이러한 묘사가 부당하다고 생각하여 이의를 제기했으나, 제작진은 '대중이 보고 싶어하는 것'이라며 그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줄리안 펠로우스가 각본을 쓴 2012년 TV 미니시리즈 ''타이타닉''에서는 이스메이가 배타주의자로 그려지며, 침몰 중에 비영국인 승무원들을 가두어 익사하도록 명령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또한, SF TV 시리즈 ''보이저스!''의 "타이타닉" 에피소드에서는 이스메이가 구명정에 몰래 타기 위해 여자로 변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이러한 대중 매체의 부정적인 묘사와는 달리, 1912년 ''타이타닉'' 침몰에 대한 영국 조사를 이끌었던 머시 경은 이스메이가 다른 많은 승객들을 도운 후 배의 우현에서 출발한 마지막 구명정에 자리를 잡았다고 결론 내렸다.[1]
이스메이를 연기한 배우와 관련 작품은 다음과 같다.
배우 | 작품 | 연도 | 매체 |
---|---|---|---|
에른스트 프리츠 퓌르브링거 | 타이타닉 | 1943 | 영화 (독일) |
로웰 길모어 | 유 아 데어: 타이타닉호 침몰 | 1955 | TV 에피소드 (미국) |
프랭크 로턴 | 잊을 수 없는 밤 | 1958 | 영화 (영국) |
이안 홈 | S.O.S. 타이타닉 | 1979 | TV 영화 (영국/미국) |
샘 추 주니어 | 보이저스! ("타이타닉호의 보이저스") | 1982 | TV 시리즈 (미국) |
로저 리스 | 타이타닉 | 1996 | TV 미니시리즈 (미국/캐나다) |
조나단 하이드 | 타이타닉 | 1997 | 영화 (미국) |
데이비드 개리슨 | 타이타닉 | 1997 | 브로드웨이 뮤지컬 |
데이비드 헤인스 | 타이타닉 | 2006 | 브로드웨이 뮤지컬 (캐나다 초연) |
에릭 브레이든 | 타이타닉 연대기 (The Titanic Chronicles) | 1999 | TV 다큐멘터리 |
켄 마셜 |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의 비밀 (Ghosts of the Abyss) | 2003 | 다큐멘터리 영화 |
크리스토퍼 라이트 | 타이타닉: 전설의 탄생 (Titanic: Birth of a Legend) | 2005 | TV 다큐멘터리 |
마크 탠디 | 침몰하지 않는 타이타닉 (The Unsinkable Titanic) | 2008 | TV 다큐멘터리 |
크리스토퍼 빌리어스 | 호기심: 타이타닉을 침몰시킨 것은 무엇인가? (The Curiosity: What Sank Titanic?) | 2011 | TV 시리즈 |
제임스 윌비 | 타이타닉 | 2012 | TV 시리즈 (4 에피소드) |
그레이 오브라이언 | 타이타닉: 블러드 앤 스틸 (Titanic: Blood and Steel) | 2012 | TV 시리즈 (12 에피소드) |
줄리앙 볼 | 빙산 – 바로 앞! (Iceberg – Right Ahead!) | 2012 | 연극 (런던) |
마이클 멀로니 | 셜록 홈즈: 배신자 선원의 모험 (Sherlock Holmes: The Adventure of the Perfidious Mariner) | 2012 | 오디오 드라마 |
데릭 마혼 | "타이타닉 이후" (After the Titanic) | - | 시 |
샘 투리치 | 침몰하지 않는 (Unsinkable) | 2023 |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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