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S 괴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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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SMS 괴벤은 몰트케급 순양전함 설계를 기반으로 건조된 독일 제국 해군의 순양전함으로, 1914년 오스만 제국에 매각되어 야부즈 술탄 셀림으로 개명되었다. 28cm 주포 10문을 장착하고 최고 속도 25.5노트로 운용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독일 해군에 의해 프랑스 해안을 공격하는 데 사용되었다. 오스만 제국 해군에 편입된 후 흑해에서 활약하며 러시아 제국을 공격했고, 제2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했다. 종전 후 터키 해군에서 야우즈로 개명되어 운용되다가 1971년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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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S 괴벤 - [배(Ship)]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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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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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명 | 괴벤 |
명명 유래 | 아우구스트 카를 폰 괴벤 |
함 종류 | 순양전함 |
제원 | |
함급 | 몰트케급 순양전함 |
추진 | 4축 추진 |
추진 기관 | 4 × 파슨스 터빈 |
보일러 | 24 × 수관 보일러 |
출력 | |shp|kW|abbr=on|lk=on}} |
항속 거리 | (에서) |
승조원 | 43명 (장교), 1,010명 (병) |
무장 | 10 × /50 SK 함포 12 × 함포 12 × 함포 |
장갑 | 현측 장갑대: 포탑: 포탑: 230 mm 갑판: |
건조 및 취역 | |
발주 | 1909년 4월 8일 |
기공 | 1909년 8월 28일 |
진수 | 1911년 3월 28일 |
건조 조선소 | Blohm & Voss, Hamburg |
취역 | 1912년 7월 2일 |
역사 | |
소속 국가 | 독일 제국 (1912년 ~ 1914년) 오스만 제국 / 터키 (1914년 ~ 1950년) |
이전 함명 | Yavuz Sultan Selim (1914년), Yavuz (1936년) |
오스만 제국 인계 | 1914년 8월 16일 |
오스만 제국 취역 | 1914년 8월 16일 |
퇴역 | 1950년 12월 20일 |
제적 | 1954년 11월 14일 |
최후 | 1973년 고철 처리 |
2. 설계
몰트케급 순양전함 설계를 기반으로 건조되었다. 주포는 5개의 쌍열 포탑에 10문의 28cm SK L/50포를 장착했다. 포탑은 선수에 1개, 선체 중앙부에 엇갈린 배치로 2개, 선미에 슈퍼파이어 쌍으로 2개가 배치되었다. 부포는 12문의 15cm SK L/45포를 선체 중앙부에 개별 배치했다. 어뢰정 방어를 위해 12문의 8.8cm SK L/45포를 선수, 선미, 전방 사령탑 주변에 개별 배치했다. 4개의 50cm 잠수 어뢰 발사관을 선수, 선미, 양 현측에 각각 1개씩 장착했다.[3]
장갑은 크루프 경화 강(Krupp cemented steel)을 사용했다. 벨트 장갑은 탄약고와 추진 기관실을 덮는 구획에서 280mm 두께였고, 양 끝은 76mm로 얇아졌다. 갑판은 25mm에서 76mm 두께로, 측면에서 아래로 기울어져 벨트 하단 가장자리에 연결되었다. 주포 포탑은 230mm 두께의 면과 바벳을 가졌다.[4]
3. 독일 해군 시대 (SMS 괴벤)
괴벤de(Goebende)은 1912년 7월 2일 독일 제국 해군에 취역했다.[1] 제1차 발칸 전쟁 발발 후, 독일은 지중해 해군 사단(Mittelmeer-Divisionde)을 창설하여 괴벤de과 경순양함 브레슬라우를 오스만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했다.[2] 두 함선은 1912년 11월 15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 이후 베네치아, 풀라, 나폴리 등 지중해 항구를 방문했다.[2]
1913년 6월 제2차 발칸 전쟁 발발, 10월에는 빌헬름 조숑 소장이 함대 사령관을 맡았다.[2] 괴벤de과 브레슬라우de는 지중해에서 활동, 제1차 세계 대전 전까지 약 80개 항구를 방문했다.[2] 1914년 6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 이후, 조숑은 함선 수리를 위해 풀라로 향했고, 괴벤de은 보일러 튜브 교체 등 대대적인 수리를 받았다.[3]
1912년 11월, 몰타 섬 발레타항에서 브레슬라우와 합류한[4] 독일 지중해 전대는 그리스 왕국, 불가리아, 이탈리아, 이집트를 방문했고, 1914년 5월에는 이스탄불을 방문했다.[5]
8월 2일, 이탈리아 메시나에서 석탄을 보급받은[6] 지중해 전대는 8월 3일 프랑스 선전포고 이후, 독일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동맹에 따라 이스탄불로 회항 명령을 받았다.[7]
괴벤은 경순양함 브레슬라우와 함께 알제리 연안을 포격, 프랑스 육군 수송을 방해하려 했으나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8][9] 이후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해 오스만 제국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도주, 8월 10일 도착했다.[11][12] 8월 16일, 괴벤은 오스만 해군 순양전함 '''야우즈 술탄 셀림'''으로, 브레슬라우는 '''미딜리'''로 개명되었고, 승무원은 오스만 해군으로 옮겨 독일인 장병 지휘 아래 운용되었다.[13][14]
3. 1. 제1차 세계 대전
빌헬름 2세는 전쟁 발발 시 괴벤de과 브레슬라우de에게 서부 지중해에서 프랑스군의 북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의 귀환을 막기 위한 기습 작전을 수행하거나, 아니면 사령관의 재량에 따라 대서양으로 진출하여 독일 해역으로 귀환을 시도하도록 명령했다. 1914년 8월 3일, 두 함선은 알제리로 향하던 중, 소촌(Souchon)은 프랑스에 대한 선전 포고 소식을 받았다. 괴벤de은 8월 3일 초에 약 10분 동안 필리페빌, 프랑스령 알제리를 폭격했고, 브레슬라우de는 카이저의 명령에 따라 근처의 본을 포격했다. 이후 티르피츠(Tirpitz)와 휴고 폰 포흘 제독은 소촌에게 카이저의 지시를 직접적으로 위반하고 그의 인지 없이 콘스탄티노플로 항해하라는 비밀 명령을 전달했다.
괴벤de은 석탄 보급 없이는 콘스탄티노플에 도달할 수 없었기에, 소촌은 메시나로 향했다. 독일군은 인디퍼티거블과 인도미터블이라는 영국 순양전함과 마주쳤지만, 독일은 아직 영국과 전쟁 상태가 아니었고 어느 쪽도 발포하지 않았다. 영국은 괴벤de과 브레슬라우de를 따라갔지만, 독일 함선은 영국보다 더 빨랐고 8월 5일까지 메시나에 도착했다. 메시나에서의 연료 보급은 8월 2일 이탈리아의 중립 선언으로 인해 복잡해졌다. 국제법에 따르면, 교전 중인 함선은 중립 항구에서 24시간만 머물 수 있었다. 항구의 동조적인 이탈리아 해군 당국은 괴벤de과 브레슬라우de가 독일 석탄 수송선에서 석탄을 보급하는 동안 약 36시간 동안 항구에 머무르는 것을 허용했다. 추가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괴벤de의 연료는 콘스탄티노플로의 항해에 충분하지 않았고, 소촌은 에게해에서 또 다른 석탄 수송선과의 회합을 계획했다. 프랑스 함대는 서부 지중해에 머물렀는데, 지중해 프랑스 해군 사령관인 라페리에르 제독은 독일이 대서양으로 탈출하거나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라에 합류하려 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소촌의 두 함선은 8월 6일 초 메시나에서 메시나 해협 남쪽 입구를 통해 출발하여 동부 지중해로 향했다. 두 척의 영국 순양전함은 100마일 떨어져 있었고, 세 번째 함선인 인플렉서블은 튀니지 비제르트에서 석탄을 보급하고 있었다. 소촌의 길을 가로막는 유일한 영국 해군 부대는 어니스트 트루브리지 소장 지휘 하의 제1 순양함 전대였다. 이 전대는 장갑순양함 네 척(디펜스, 블랙 프린스, 에든버러 공작, 워리어)으로 구성되었다. 독일군은 처음에는 미끼 작전으로 아드리아해를 향했는데, 이 작전은 트루브리지를 오도하여 아드리아해 입구에서 그들을 요격하도록 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트루브리지는 진로를 바꾸어 경순양함 더블린와 구축함 두 척에게 독일군에 대한 어뢰 공격을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브레슬라우de의 감시병들은 함선을 발견했고, 어둠 속에서 그녀와 괴벤de은 추격자들의 눈에 띄지 않게 따돌렸다. 트루브리지는 8월 7일 초, 그의 네 척의 구식 장갑순양함이 더 큰 28cm 포를 장착한 괴벤de과의 공격은 자살 행위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추격을 중단했다. 이제 소촌의 콘스탄티노플로의 항해는 안전해졌다.
괴벤de은 낙소스 근처의 도누사 섬에서 석탄을 다시 채웠다. 8월 10일 오후, 두 함선은 다르다넬스 해협에 들어갔다. 그들은 오스만 제국의 초계정을 만났고, 초계정은 그들을 마르마라해로 안내했다. 중립 요건을 우회하기 위해, 오스만 정부는 함선을 "가짜 매매"를 통해 소유권을 이전할 것을 제안했다. 독일이 이를 승인하기 전에, 오스만 제국은 8월 11일에 함선을 8천만 독일 금 마르크에 구매했다고 발표했다. 8월 16일 공식적인 의식을 통해 두 함선은 오스만 해군에 취역했다. 9월 23일, 소촌은 터키 함대를 지휘하라는 제안을 수락했다. 괴벤de은 야부즈 술탄 셀림tr으로, 브레슬라우de는 미딜리tr로 개명되었고, 독일 승무원은 오스만 제국의 군복을 입고 페즈를 착용했다.
4. 오스만 제국 해군 시대 (야부즈 술탄 셀림)
1914년 8월 10일, 괴벤은 경순양함 브레슬라우와 함께 다르다넬스 해협에 도착하여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에 정박했다. 8월 16일, 괴벤은 오스만 제국 해군의 순양전함 '''야부즈 술탄 셀림'''으로, 브레슬라우는 미딜리 (''Midillitr'')로 개명되었다. 두 함정의 승무원은 그대로 오스만 해군으로 옮겨 독일인 장병(수혼 소장, 아커만 함장)의 지휘 아래 운용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괴벤과 브레슬라우를 자국 해군에 편입한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00년대 초, 오스만 제국 함대는 대부분 구식 장갑함과 소형 어뢰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선소와 독 유지 운영 예산 부족으로 함선 정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국가 재정 악화로 이탈리아나 그리스의 해군 증강에 대항하기 어려웠다. 건조 중이던 전 노급 전함 압둘 카디르 (''Abdül Kadirtr'')조차 완성될 가망이 없었다.
1908년 7월 청년 투르크당의 청년 투르크당 혁명이 발발했고, 12월에는 입헌 투르크가 부활했다. 영국은 독일 제국과의 외교로 발칸 반도 안정을 유지하려 했다. 1909년 4월 황제 압둘 하미드 2세가 추방되고 메흐메트 5세가 즉위했다. 범투르크주의와 함께 여러 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베를린 회의 체제는 붕괴되었다. 1911년 9월에는 이탈리아-투르크 전쟁이 발발했다.
1912년 러시아 제국 주도로 발칸 동맹이 체결되자, 발칸 전쟁이 발발했다. 오스만 제국 해군은 이탈리아-투르크 전쟁에서 이탈리아 왕립 해군에게 대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스만 함대 국민 원조 협회"가 설립되어 해군 정비 기금이 모금되었다. 그리스 왕국이 피사급 순양함 게오르요스 아베로프를 구입하자, 1910년 7월 터키는 일본 해군에 순양전함 구입을 타진했으나[2] 거절당했다.[3] 터키는 독일 제국에서 브란덴부르크급 전함 2척을 구입하여[4] 장갑함 바르바로스 하이레딘과 투르구트 레이스로 명명하고, 1910년 8월 21일 해군에 편입시켰다.
오스만 제국 해군은 영국 해군의 지원을 받았지만, 비커스사와 협상하여 레샤디예급 전함 건조를 결정했다.[5] 초노급 전함인 1번함은 레샤디예 (''Reşadiye''tr)로 명명되었다. 브라질이 포기한 노급 전함 리오데자네이루를 구입하여 술탄 오스만 1세 (''Sultan Osman-ı Evveltr'')로 명명했다.[6]
그러나 양 함(레샤디예, 술탄 오스만 1세) 인도 직전, 영국 정부는 두 전함을 접수했다.[7] 영국은 레샤디예를 에린, 술탄 1세를 에진코트로 개명하고 영국 해군에 편입시켰다. 이 사건으로 오스만 제국 내 반영 감정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 제국의 최신예 순양전함과 경순양함이 오게 되었고, 영국의 전함 접수 사건은 잊혀졌을 수도 있다. 영국은 이스탄불 해역에서 독일 지중해 함대의 퇴거를 요구했고,[7] 청년 투르크당 정권은 양 함의 자국 해군 편입을 주장하며 독일에 접근했다.
야부즈 술탄 셀림은 오스만 제국 해군의 주력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지중해 및 흑해에서 활동했다.
1914년 10월 29일, 오스만 해군은 흑해 연안 러시아 제국 영토를 습격했다. 야부즈 술탄 셀림은 세바스토폴을 포격했지만 반격받고 퇴피하며, 플루토를 격침하고 레이테넌트 푸시친을 손상시켰다. 이 공격으로 러시아가 선전 포고했고,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11월 18일, 야부즈와 미딜리는 사리치 곶 해전에서 30.5cm 포탄을 맞고 소파, 13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했다. 12월 야부즈 술탄 셀림은 바투미를 포격하고, 12월 26일 보스포루스 해협 입구에서 기뢰 2발에 피격되었다. 오스만 제국 해군 공창에는 대형 독이 없어, 이스티니예 만에 독일 기술자 협력으로 대형 케이슨을 제작해 수리했다.
1915년 4월 복귀한 야부즈는 보스포루스 해전에서 피탄 손상되었고, 8월 23일 케프켄 섬 해전에서 러시아 잠수함과 교전했다. 러시아 흑해 함대에 마리야 황후급 전함 2척이 배치되며 전력 우위가 흔들렸다.
1916년 1월 8일, 야부즈 술탄 셀림은 케프켄 섬 앞바다에서 러시아 전함 임페라트리차 예카테리나 벨리카야와 교전했다. 7월 4일 투압세를 포격, 2척을 침몰시켰다.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해군과의 전투는 일단락되었고, 야부즈와 러시아 전함은 결판을 내지 못했다.
1918년 1월, 임브로스 섬 해전에서 영국 전함 2척(아가멤논, 로드 넬슨) 부재 중 야부즈 술탄 셀림은 임브로스 섬에서 영국 모니터 M28 (9.2인치 포)와 아바크롬비급 래글런 (''HMS Raglan영어'')을 격침했다.[11] 이후 림노스 섬 무드로스 만으로 향하던 중 미디릴리가 기뢰에 피격되었고, 구조 중 야부즈 술탄 셀림도 피격되었다.[12]
5. 터키 해군 시대 (야부즈)
1926년부터 1930년까지 프랑스의 생나제르 페노에 조선소와 괴르쥐크 해군 공창에서 1차 근대화 개장이 이루어졌다. 이 개장을 통해 석탄 전용 보일러를 석탄·중유 혼소식 보일러로 개조하여 출력과 속력이 개선되었고, 사격 지휘 장치가 갱신되었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의 교훈에 따라 수중 어뢰 발사관을 제거하여 수뢰 방어력을 높였으며, 8.8cm 고사포와 40mm 기관포를 장비하여 대공 공격 능력을 향상시켰다.
개장 후, 터키 해군의 순양전함 '''Yavuz Selimtr'''으로 재취역했고, 1936년에 '''Yavuztr'''로 개명되었다. 1938년에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유해를 이스탄불에서 이즈미트까지 운송하여 터키에서 널리 알려졌다.
1941년의 2차 근대화 개장에서는 대공 사격에 방해가 되는 후마스트가 철거되었지만, 그 외 큰 개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야우즈는 그대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계속 운용되었다. 터키 공화국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중립을 표명했지만, 1945년 2월 23일에 연합국으로서 추축국 (나치 독일, 대일본제국)에 선전 포고를 했다. 이는 국제 연합 가입 조건이었고, 소비에트 연방의 남하 정책과 영토 할양 요구가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1948년에 야우즈는 군사적 상징적 존재가 되었지만, 1952년 NATO에 가입하면서 함번 370을 부여받았다. 1954년에 퇴역하여 예비함이 되었고, 1963년 서독 정부에서 구매를 요청했으나 터키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1966년에는 터키 정부가 서독에 매각을 제안했지만, 서독의 정치 상황 변화로 인해 기념함으로 보존하려던 계획은 무산되었다. 결국 1971년 해체 업자에게 매각되었고, 1973년 6월 7일 항구를 떠난 후 1976년 2월까지 해체 작업이 진행되어, 양 대전을 모두 경험한 마지막 순양전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현재 터키 해군의 모항이 있는 코자엘리 주 괴르쥐크 시가지에는 야우즈의 스크류 프로펠러가 전시되어 있다.
5. 1. 전후
1920년대 동안, 새로운 국가의 함대의 핵심으로 야부즈|Yavuztr를 개조하겠다는 약속이 제시된 다양한 해군 정책의 유일한 일관된 요소였다.[1] 이 순양전함은 1926년까지 이즈미트에 방치된 상태였다.[2][3][4] 보일러 2개만 작동했고, 조향이나 증기 추진이 불가능했으며, 1918년의 기뢰 피해로 인한 수리되지 않은 상처가 두 군데 있었다. 야부즈|Yavuztr가 거친 바다에서 침몰할 위험 없이 견인될 수 없었기 때문에 독일로부터 26000ton 규모의 새로운 부유식 도크를 구매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자금이 모였다.[5] 프랑스 회사 아틀리에 에 샹티에 드 생 나자르-페뇌는 1926년 12월에 후속 개장을 감독하기 위해 계약을 체결했고, 이는 괼축 해군 조선소에서 수행되었다.[3] 작업은 3년(1927~1930) 동안 진행되었으며, 도크의 여러 구획이 배수되는 동안 붕괴되면서 지연되었다. 야부즈|Yavuztr는 다시 띄우기 전에 약간 손상되었고, 수리 작업이 시작되기 전에 도크를 수리해야 했다. 그 결과 조사에서 해군부 장관인 이산 베이(İhsan Eryavuz)가 횡령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5]다른 지연은 해군부 폐지를 초래한 사기 혐의로 인해 발생했다. 터키군 참모총장 페브지 마르샬은 해군 건설에 반대했고 사기 혐의 이후 모든 해군 건설 프로그램을 늦추었다. 순양전함에 대한 집중적인 작업은 그리스 해군이 1928년 9월 터키 인근에서 대규모 해군 훈련을 실시하고 터키 정부가 그리스의 해군 우위에 대응할 필요성을 인식한 후에야 시작되었다.[6] 터키는 또한 이탈리아 조선소로부터 구축함 4척과 잠수함 2척을 주문했다.[7] 그리스 정부는 야부즈|Yavuztr가 다시 취역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워싱턴 해군 조약을 본떠 해군 건조에 대한 10년의 "휴가"를 제안했지만, 순양함 2척을 새로 건조할 권리를 유보했다. 터키 정부는 이 제안을 거부하고 이 배가 흑해에서 소련 해군의 증가하는 전력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8]
개조 과정에서 기뢰 피해가 수리되었고,[9] 배수량이 증가했으며, 선체가 약간 개조되었다. 길이는 0.5미터 줄었지만 너비는 증가했다. 야부즈|Yavuztr에는 새로운 보일러와 주포에 대한 프랑스식 사격 통제 시스템이 장착되었다. 15cm 포 2문이 포탑에서 제거되었다.[2] 장갑 보호는 유틀란트 해전의 교훈을 고려하여 업그레이드되지 않았으며, 탄약고 위에는 장갑만 있었다.[4] 야부즈|Yavuztr는 1930년에 재취역하여 터키 해군의 기함 역할을 재개했으며,[10] 속도 시험에서 예상보다 더 좋은 성능을 보였다. 이후의 사격 및 사격 통제 시험도 성공적이었다. 순양전함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구축함 4척은 1931년부터 1932년 사이에 취역했으며, 성능은 설계 사양을 충족하지 못했다.[11] 야부즈|Yavuztr의 재취역에 대응하여 소련은 1929년 말 발트 해에서 전함 파리시스카야 콤무나ru와 경순양함 프로핀테른ru을 이동시켜 흑해 함대가 터키 해군과 동등한 수준을 유지하도록 했다.[7] 그리스 정부도 구축함 2척을 주문하여 대응했다.[12]
1933년에는 총리 이스메트 이뇌뉘를 불가리아 바르나에서 이스탄불로 수송했고, 이듬해에는 이란 샤를 트레비존드에서 삼순으로 수송했다.[10] 야부즈 술탄 셀림|Yavuz Sultan Selimtr은 1930년에 공식적으로 이름을 야부즈 술탄|Yavuz Sultantr으로, 1936년에는 야부즈|Yavuztr로 줄였다.[13] 1938년에 또 다른 짧은 개조가 수행되었고, 그해 11월에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유해를 이스탄불에서 이즈미트로 운송했다.[2][3]

야부즈|Yavuztr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계속 운용되었지만 터키는 분쟁 기간 동안 중립을 유지했다. 1941년에 그녀의 대공포는 4문의 포, 10문의 포, 4문의 포로 강화되었다. 이것들은 나중에 22문의 40mm 포와 24문의 20mm 포로 증가했다.[2]
1946년 4월 5일, 미국의 전함 , 경순양함 , 구축함 가 터키 대사 뮈니르 에르테귄의 유해를 돌려주기 위해 이스탄불에 도착했다.[14] 야부즈|Yavuztr는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이 배들을 맞이했고, 그곳에서 그녀와 ''미주리''는 19발의 예포를 교환했다.[15] 1948년 이후, 이 배는 이즈미트[2] 또는 괼축에 배치되었다.[3] 이 배는 1950년까지 매년 9월에 열리는 연례 함대 훈련에 계속 참여했다. 그녀는 1950년 12월 20일에 현역에서 해체되었고 1954년 11월 14일에 해군 명부에서 삭제되었다.[2][3] 터키가 1952년에 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가입했을 때, 이 배는 선체 번호 B70을 부여받았다.
터키 정부는 1963년에 이 배를 서독 정부에 박물관선으로 판매하려고 제안했지만, 이 제안은 거부되었다.[2] 터키는 1971년에 M.K.E. Seyman에게 이 배를 해체하기 위해 판매했다.[3] 그녀는 1973년 6월 7일에 해체업자에게 예인되었고, 작업은 1976년 2월에 완료되었다.[2][3] 처분 당시 그녀는 미국 외부에 존재했던 마지막 드레드노트였다. 그녀는 독일 제국 해군이 건조한 마지막 생존 선박이었고, 어떤 해군에서도 가장 오래 복무한 드레드노트형 선박이었다. 이 배의 여러 부품이 보존되었는데, 여기에는 그녀의 스크루 3개(해군 사령부와 이스탄불 해군 박물관으로 보내짐)와 앞 돛대(해군 사관학교에 배치됨)가 포함되었다.
참조
[1]
문서
地中海方面作戦梗概
[2]
문서
土国譲渡
[3]
문서
土国譲渡
[4]
문서
土国譲渡
[5]
문서
大正3、希土軍備
[6]
문서
大正3、希土軍備
[7]
문서
大正4、英土国交断絶
[8]
서적
Battle on the Seven Seas
[9]
서적
Battle on the Seven Seas
[10]
서적
Battle on the Seven Seas
[11]
서적
Battle on the Seven Seas
[12]
서적
Battle on the Seven Seas
[13]
서적
Battle on the Seven S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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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tle on the Seven S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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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tle on the Seven S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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