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코 후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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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의 아나키스트로,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성장하며 조선의 독립 운동에 공감했다. 1922년 박열을 만나 동거하며 흑도회 등 아나키즘 단체에서 활동했고, 1923년 관동 대지진 이후 박열과 함께 체포되어 대역죄로 기소되었다. 1926년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옥사했다. 201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으며, 박열의사기념관에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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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 후미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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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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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 박문자 (朴文子) 박후미코 |
출생일 | 1903년 1월 25일 |
출생지 | 가나가와현요코하마시 |
사망일 | 1926년 7월 23일 |
사망지 | 도치기현우쓰노미야시 |
매장지 | 경상북도문경시 |
로마자 표기 | Kaneko Fumiko |
한자 표기 | 金子 文子 |
한국어 표기 | 가네코 후미코 |
로마자 표기 (한국어) | Ganeko Humiko |
한국어 표기 (매큔-라이샤워 표기법) | Kanek'o Humik'o |
범죄 정보 | |
출생일 | 1903년 1월 25일 |
출생지 | 가나가와현요코하마시 |
사망일 | 1926년 7월 23일 |
사망지 | 도치기현도치기시도치기 형무소 |
죄목 | 대역죄 |
유죄 판결일 | 1926년 3월 25일 |
형벌 | 사형, 이후 은사로 무기징역으로 감형 |
상태 | 옥사 (사인 불명) |
부모 | 부: 문일 모: 국 |
사회 운동가 정보 | |
원어 이름 | 金子文子 |
다른 이름 | 박문자 (朴文子) |
출생일 | 1903년 1월 25일 |
출생지 | 가나가와현요코하마 |
사망일 | 1926년 7월 23일 |
사망지 | 도치기현우쓰노미야 형무소 |
사망 원인 | 자살 (기록상) |
매장지 |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 |
국적 | 일본 제국 |
민족 | 일본인 |
학력 | 충청북도 청원 부강소학교 중퇴 |
경력 | 불령사 행동대원 흑우회 행동위원 흑우연맹 행동위원 치안경찰법 위반 등의 혐의로서의 대역죄인 |
직업 | 사회운동가 |
소속 | 흑우회 |
배우자 | 박열(1926년) |
부모 | 부: 사에키 후미카즈 (佐伯文一) 모: 가네코 기쿠노 (金子きくの) |
상훈 | [[파일:건국훈장4애국장.png|x10px]] (건국훈장 애국장) |
2. 생애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서 태어났다.[33] 불우한 가정 환경에서 태어나 출생 신고조차 되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며, 어린 시절 조선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현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에서 약 7년간 생활하며 3·1 운동을 목격하고 조선인의 독립 의지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1919년 일본으로 돌아와 도쿄에서 노동과 학업을 병행하던 중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며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1922년 조선인 아나키스트 박열을 만나 동지이자 연인으로 함께 활동했으며, 박문자(朴文子)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기도 했다. 두 사람은 흑도회, 흑우회 활동을 거쳐 1923년 아나키즘 단체인 불령사(不逞社)[37][38]를 조직하고, 일왕 부자 폭살을 계획하며 의열단과 연계하여 폭탄 반입을 시도했다.
1923년 간토 대지진 직후 예방 검속 명목으로 박열과 함께 체포되어 대역죄로 기소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으며, 1926년 사형을 선고받았다. 며칠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가네코는 이를 거부했다. 같은 해 7월 23일, 도치기 형무소 우쓰노미야 지소에서 23세의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22] 옥중에서 박열과 혼인 신고를 했기에[39] 유골은 박열의 형이 수습하여 경상북도 문경시에 안장되었다. 그녀의 묘는 일제의 감시 속에 방치되었으나, 1973년 아나키스트 독립지사들에 의해 정비되고 기념비가 세워졌다. 2003년에는 박열의사기념공원이 조성되면서 기념관 내 현재 위치로 이장되었다.
사후 그녀가 옥중에서 쓴 자서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등이 출간되었으며, 1976년 야마나시현에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2. 1. 어린 시절과 조선에서의 생활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서 태어났다.[33] 아버지는 사무라이 가문 출신[2] 혹은 히로시마현 아키군 출신[33]의 사에키 후미카즈였고, 어머니는 농민의 딸인 가네코 기쿠노였다.[2][33]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아 후미코는 출생 신고가 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무적자'(無籍者) 신분으로 학교를 제때 다니지 못하는 등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3][33] 8살이 되어서야 외조부모의 딸로 호적에 등록되었다.[6]어린 시절 아버지가 경찰서 형사로 일할 때는 비교적 안정적이었으나,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두고 도박과 음주에 빠지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학대했으며, 결국 어머니의 여동생과 살림을 차리며 가정을 떠났다.[2][33] 이후 어머니는 여러 남자를 만났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고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어머니는 후미코를 사창가에 팔 생각까지 했으나 실행하지는 않았다.[5] 후미코는 야마나시현 등 친척 집을 전전하며 자랐고,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에게 버려졌다는 생각에 힘든 시기를 보냈다.[33]
9세가 되던 1912년, 아버지의 어머니인 무츠 사케-이와시타(친할머니)의 주선으로 아이가 없는 고모에게 입양되기 위해 조선으로 보내졌다.[6] 고모 부부는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현재의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에 살고 있었다.[33] 그러나 조선에 도착한 후미코는 기대했던 입양이나 나은 생활을 얻지 못했다. 함께 살던 친할머니와 고모 부부는 후미코가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입양을 포기하고 하녀처럼 대했다.[7] 친척들은 부유했음에도 후미코에게 최소한의 의복과 열악한 환경만을 제공했으며, 잦은 구타와 학대를 가했다. 후미코는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10]
조선에서의 생활은 약 7년간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부강심상소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으나, 친척들은 학교 공부 외의 독서를 금지하는 등 교육을 제한했다.[8] 초등학교 과정을 마친 후에는 집안일만 해야 했으며, 후미코는 이 시기를 가장 힘들었던 때로 기억했다.[9] 조선에서의 경험은 그녀가 친척들과 다른 일본인 점령자들이 조선인을 학대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는 계기가 되었다.[11]
1919년 3·1 운동을 목격하면서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훗날 예심 과정에서 "저조차 권력을 향한 반역적인 기분이 들었으며, 조선 분들이 하고 계신 독립 운동을 생각할 때면 남의 일 같지 않게 감격이 가슴에 벅차오릅니다"라고 진술한 것처럼, 자신의 처지와 조선인의 입장을 동일시하고 일본 제국주의 권력에 대한 강한 반감을 품게 되었다. 같은 해 16세의 나이로 일본으로 돌아갔다.
2. 2. 일본 귀국과 아나키즘 활동
1919년, 16세가 된 가네코는 조선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조선에 있는 동안 3·1 운동을 목격하며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고, 이는 이후 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으로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었고, 아버지와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았다. 특히 자신을 팔아넘기려 했던 아버지와 문란한 생활을 하던 외삼촌과의 갈등 끝에, 가네코는 학업에 대한 열망을 안고 1920년 4월, 17세의 나이로 홀로 도쿄로 향했다.[12]도쿄에서 가네코는 처음에는 친척 집에 머물렀으나 곧 자립하여 신문 배달, 어묵집 점원 등으로 일하며 세이소쿠 영어학교(세이소쿠 가쿠엔)와 켄스우칸 등에서 공부했다. 이 시기 노동 현장에서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며 사회 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다.[13] 그는 기독교 구세군이나 사회주의 운동에도 잠시 발을 담갔으나, 조직 내의 위선과 한계를 느끼고 점차 독자적인 노선을 모색하게 되었다.[14]
가네코의 사상적 전환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22년 야간 학교에서 만난 신야마 하츠요였다. 신야마를 통해 막스 슈티르너, 미하일 아르치바셰프, 프리드리히 니체 등의 사상을 접하며 사회주의를 넘어 아나키즘과 허무주의로 기울게 되었다.[15] 비슷한 시기인 1922년 3월, 가네코는 운명적인 동지이자 연인인 조선인 아나키스트 박열을 만났다. 두 사람은 사상적으로 깊이 공감하며 5월부터 동거를 시작했다.[16]
가네코는 박열이 조직한 조선인 사회주의자 연구회인 흑도회에 가입했으며, 흑도회가 1922년 9월 공산주의파와 아나키즘파로 분열되자 박열을 중심으로 결성된 흑우회에 참여했다. 박문자(朴文子)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박열과 함께 기관지 『굵은 조선인』(이후 『현 사회』로 개칭)을 발행하고, 조선 독립운동을 옹호하며 일제의 탄압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는 글을 썼다. 두 사람은 단순한 사상적 동지를 넘어, 의열단과 연계하여 폭탄을 반입하고 일왕 부자를 폭살하려는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하기도 했다.
1923년 4월, 가네코와 박열은 아나키즘 활동을 본격화하기 위해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했다.[37][38] 도쿄 요요기의 자택을 거점으로 삼아 집회를 열고, 모치즈키 게이, 가토 가즈오 등 저명한 아나키스트를 초청해 강연회를 열거나 나카니시 이노스케의 출옥 환영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폭탄 입수 계획을 둘러싸고 동지들과의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다.
1923년 9월 1일 간토 대지진이 발생하자, 일본 당국은 사회 불안을 잠재운다는 명목으로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 조선인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기 시작했다. 가네코와 박열 역시 불령사 활동과 폭탄 테러 계획 혐의로 9월 3일 예방 검속 명목으로 연행되었다.
2. 3. 체포와 죽음
1923년 4월 박열과 함께 아나키즘 단체인 불령사(不逞社)[37]를 조직하였다.[38] 불령사는 가네코의 설명에 따르면 정부에 대한 직접적인 행동을 옹호하고 권력에 반역하는 허무주의나 무정부주의를 품은 사람들의 모임이었다.[17]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박열과 가네코는 다이쇼 천황 또는 당시 황태자였던 쇼와 천황의 폭탄 암살을 계획하고 폭탄 입수를 시도하였다.[30][19]간토 대지진 발생 직후인 9월 3일, 사회 혼란 속에서 조선인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지자 일본 정부는 예방 검속이라는 명목으로 많은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을 체포하였다.[18] 이전부터 무정부주의 활동과 폭탄 테러 계획으로 감시 대상이었던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도 이때 함께 경찰에 연행되었다.[18] 경찰은 처음에는 보호 검속 명목이었으나, 이후 치안경찰법 위반으로 전환하여 조사를 계속했고, 폭탄 입수 계획이 드러나자 형법 73조(대역죄) 위반 혐의로 기소하여 예심으로 넘겼다.[30]
오랜 재판 끝에, 가네코와 박열은 천황 부자를 살해할 목적으로 폭탄을 구하려 했다는 대역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들은 혐의를 인정했으며, 가네코는 자신의 신념을 명확히 하기 위해 실제보다 더 죄가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진술했을 가능성이 있다.[19] 재판 과정에서 가네코는 자신의 삶과 행동 동기를 설명하는 글("내가 왜 이런 일을 했는지")을 썼고, 이는 그녀의 삶을 이해하는 주요 자료가 되었다.[20] 선고 며칠 전, 가네코와 박열은 옥중에서 법적으로 혼인 신고를 했다.[21]
1926년 3월 25일, 대심원에서 두 사람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4월 5일 천황의 은사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가네코는 이 감형 조치를 거부하며 사면장을 찢어버렸다.[22] 이후 도치기 형무소 우쓰노미야 지소에 수감되었으나, 1926년 7월 23일 감방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향년 23세였다. 형무소 측은 자살(교살)로 발표했으나,[22] 변호사 후세 다쓰지를 비롯한 동지들은 사인을 의심하여 유해를 발굴하기도 했으나 정확한 경위는 밝혀지지 않았다.
가네코는 옥중에서 박열과 서류상 혼인했기 때문에[39], 박열의 형이 유골을 인수하여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시에 안장했다. 그녀의 묘는 일제의 감시 속에 방치되었으나, 1973년 아나키스트 독립지사들에 의해 정비되고 기념비가 세워졌다. 2003년에는 박열의사기념공원이 조성되면서 기념관 내 현재 위치로 이장되었다.
3. 사상
가네코 후미코는 구세군이나 사회주의자들이 제시하는 신념을 검토했지만, 최종적으로는 니힐리즘을 자신의 철학으로 삼았다. 그녀의 니힐리즘에 대한 인식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했는데, 이는 1925년 법정 진술에서 잘 드러난다. 처음 추구했던 엄격한 부정적 니힐리즘에 대해 그녀는 "전에는 '나는 삶을 부정한다'고 말했지만... 모든 생명에 대한 나의 부정은 완전히 무의미했다... 삶에 대한 긍정이 강할수록, 반란과 함께 삶의 부정이 더 강하게 창조된다. 그러므로 나는 삶을 긍정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삶의 긍정'이 니힐리스트에게 어떤 의미인지 명확히 정의하며, 이것이 당시 공무원들의 관점과는 매우 다를 것이라고 강조했다. "산다는 것은 단순히 움직임을 갖는 것과 동의어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행위를 통해 비로소 진정으로 살기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고 이것이 자신의 몸을 파괴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할지라도, 이것은 삶의 부정이 아니다. 그것은 긍정이다."[23]
그녀가 결국 따르게 된 아나키즘적 대의는 민족주의와 천황 사상에 대한 거부, 그리고 혁명의 본질에 대한 비관적 신념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재판 증언에서 그녀는 박열과 함께 "그 역시 다른 인간처럼 죽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천황에 대한 충성심과 국가에 대한 사랑"이라는 개념을 "소수의 특권 계급이 자신의 탐욕과 이익을 충족시키기 위해 조작하는 단순한 수사적 개념"으로 일축했다.[24] 처음에는 천황제에 대한 거부가 다른 정치 체제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지만, 다른 사회 운동가들의 행동을 보면서 그녀는 천황이든, 다른 정부 관리든, 심지어 사회주의 혁명으로 세워진 새로운 정부든 어떤 지도자라도 권력을 남용하고 사람들을 억압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녀에게 "혁명은 단순히 한 권위를 다른 권위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어떤 권위 체제도 억압 없이 작동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모든 형태의 권위를 폐지하려는 아나키즘적 활동으로 나아간 것은 그녀의 사상적 흐름에서 논리적인 귀결이었다.[25] 니힐리즘적 사고에 따라 세상의 악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었지만, 아나키스트로서 그녀의 행동은 "우리가 어떤 사회적 이상을 포용할 수 없더라도, 우리 각자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의미 있는 어떤 과제를 찾을 수 있다. 우리의 활동이 의미 있는 결과를 낳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우리의 존재와 즉시 조화시킬 수 있게 해줄 것이다"라는 신념을 반영했다.[25]
비록 가네코가 공식적으로 특정 여성 운동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남녀 평등의 필요성에 대해 강한 신념을 가졌음은 분명하다.[26] 큰아버지가 반복해서 학업을 포기하고 "상업에 종사하는 남자와 결혼"하라고 설득했을 때, 그녀는 "상인의 아내가 될 수 없다"고 단호히 거부했다. 회고록에서 그녀는 독립적인 삶을 원했고 "더 이상…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않기를" 바랐다고 밝혔다.[27] 또한 가네코는 여성만을 위한 학교가 동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남녀공학 학교에서만 교육받기를 고집했다. 사회주의 그룹 내에서도 그녀가 비판적으로 보았던 위선 중 일부는 여성, 특히 자신에 대한 남성 동지들의 태도와 관련 있었다. 예를 들어, 동료 사회주의자 세가와가 관계 중 임신 가능성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자 그와의 관계를 끊었다. 그녀는 "그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한다고 기대"했지만, 자신이 "농락당하고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28]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녀는 남성에게는 자유로운 관계를 허용하면서 여성에게는 그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우는 이중 잣대에 도전했다. 더 나아가, 그녀는 이러한 남성들의 행동이 그들이 옹호하는 사회주의 사상에 진정으로 헌신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보았다. 진정한 사회주의라면 더 높은 수준의 평등을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 1. 재판과 사진 사건
박열과 후미코가 감옥에서 함께 찍힌 사진이 외부로 유출되자, 정우회와 정우본당 등 당시 야당은 이를 대역죄인을 우대하는 처사로 간주하며 와카쓰키 내각의 퇴진 운동에 이용했다. 야당은 이 사진을 인쇄하여 배포하며 정치 문제로 비화시키려 했다.[39] 이 여파로 의회가 3일간 정지되었고, 사건의 예심판사였던 다테마쓰는 1926년 8월 9일 사직서를 제출했으며 11일에 수리되었다.[39]
가네코와 박열은 함께 두 종류의 잡지를 발행하며 일본 제국 치하에서 한국인들이 겪는 어려움을 조명했다. 이는 그들의 급진적인 신념을 보여주는 활동이었으나, 직접적인 한국 독립 운동의 일부는 아니었다. 가네코가 이 잡지에 기고한 글들은 그녀의 가장 명확한 활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1922년과 1923년 사이, 그들은 '불령사(不逞社)'라는 조직을 결성했는데, 가네코는 이를 정부에 대한 직접적인 행동을 추구하는 단체로 정의했다.[17] 이러한 활동으로 박열과 가네코는 곧 일본 정부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1923년 9월, 파괴적인 간토 대지진이 발생하자 사회적 불안감이 극도로 고조되었고, 많은 일본인들은 이미 독립을 요구하던 한국인들이 혼란을 틈타 봉기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불충분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주로 한국인들을 검거했으며, 이때 박열과 가네코도 체포되었다.[18]
긴 재판 끝에 가네코와 박열은 다이쇼 천황이나 황태자(쇼와 천황) 암살을 위해 폭탄을 구하려 했다는 대역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두 사람은 혐의를 인정했으며, 특히 가네코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고자 실제보다 더 죄가 큰 것처럼 진술했을 가능성이 있다.[19] 재판 과정에서 가네코는 "내가 왜 이런 일을 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자서전을 집필했는데, 이 기록은 법원 문서와 함께 그녀의 삶을 이해하는 주요 자료가 되었다.[20] 재판 기간 동안 연인 관계를 유지했던 박열과 가네코는 선고 며칠 전 법적으로 혼인했다. 역사학자 헬렌 보웬 라데커는 이를 "일본 정부가 그들을 죽음으로 법적으로 묶기 전에, 삶에서 법적으로 결합시켰다는 명백한 아이러니를 강조"하기 위한 행동으로 해석한다.[21]
박열과 가네코는 처음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천황의 사면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가네코는 이 사면장을 찢어버리며 천황에게 감사하기를 거부했다. 박열은 옥중에서 생존하여 수년 후 석방되었지만, 가네코는 1926년 감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그녀의 죽음에는 여러 의문점이 제기되고 있다.[22]

한편, 오랫동안 신문이나 서적 등에서 '가네코 후미코'의 사진으로 사용되어 온 이미지가 실제로는 다른 인물이라는 의혹이 2010년 한 블로거에 의해 제기되었다. 가네코 후미코 현창 활동을 하는 '야마나시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가 검증한 결과, 해당 사진은 동명이인의 다른 사람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2012년 6월 17일자 요미우리 신문 칼럼에 따르면, 『가네코 후미코 나는 나 자신을 산다』를 출판한 '나뭇잎 출판사'는 사진 교체를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해당 연구회의 사토 노부코 대표는 이러한 오류가 30년 이상 밝혀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 "후미코의 생애가 22년 6개월로 짧고 관련 자료가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했다.[34] 야마나시현 야마나시시 마키오카초 소마구치에 있는 후미코의 생가 터에는 그녀의 사촌 아들이 살고 있지만, 후미코의 사진 등은 남아있지 않다고 전해진다.
3. 2. 사후 평가와 기념
박열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시에 건립된 박열의사기념관 옆에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가 있다.대한민국 정부는 가네코 후미코가 일제강점기에 저항한 공적을 기려, 2018년 3월 1일 일본인으로는 두 번째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40][42] 또한 2022년 국가보훈처는 후세 다쓰지 변호사와 함께 가네코 후미코를 2023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43]
그녀의 삶을 다룬 전기(傳記)로는 야마다 쇼지의 《가네코후미코》가 있으며, KBS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KBS 스페셜》에서도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의 삶을 조명한 바 있다.[41] 그녀가 옥중에서 쓴 자서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何が私をかうさせたか일본어)는 1931년에 출간되었고, 가집 『옥창에 생각하다』는 1927년에 간행되었으나 발매 금지 처분을 받았다.
1976년 3월에는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낸 일본 야마나시현 마키오카정 소마구치의 옛집 터에 "가네코 후미코의 비"가 세워졌다.
4. 작품 목록
아래는 가네코 후미코 또는 관련 인물 및 사건을 다룬 주요 저작물 목록이다.
연도 | 저자 | 제목 | 출판사 | 비고 |
---|---|---|---|---|
1946년 | 후세 타츠지, 장상중, 정태성 공저 | 『운명의 승리자 박열』 | 세기서방 | |
1963년 | 모리 나가에이 사부로 |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 | 『법률시보』 수록 | |
1972년 | 세토우치 하루미 | 『여백의 봄』 | 주오코론샤 | |
1973년 | 세토우치 하루미 | 『세토우치 하루미 작품집 2』 | 치쿠마 서방 | 『여백의 봄』 등 수록 |
1973년 | 김일면 | 『박열』 | 합동출판 | |
1975년 | 세토우치 하루미 | 『여백의 봄』 (중공문고) | 주오코론샤 | ISBN 4122001749 |
1977년 | (재심 준비회) | 『박열·가네코 후미코 재판 기록』 | 흑색전선사 | 손으로 쓴 공판 조서 복제본 |
1987년 | 후세 타츠지 | 『운명의 승리자 박열』 (복각판) | 흑색전선사 | 1946년판 복각 |
1988년 | 코마츠 류지 편 | 『속·현대사 자료 아나키즘』 | 미스즈 서방 | 공판 조서 활자화 수록 |
1990년 | 세토우치 쟈쿠쵸 | 『세토우치 쟈쿠쵸 전기 소설 집성 3』 | 문예춘추 | 『여백의 봄』 등 수록, ISBN 4163638806 |
1991년 | (흑색전선사) | 『박열·가네코 후미코 재판 기록』 | 흑색전선사 | 공판 조서 활자화, 관련 부록 포함 |
1996년 | 야마다 쇼지 | 『가네코 후미코 자기·천황제 국가·조선인』 | 그림자 서방 | ISBN 4877142274, 관련 문헌 목록·연표 포함 (p344-376) |
1999년 | 사토 노부코 | 「가네코 후미코를 지탱한 사람들 쿠리하라 카즈오를 중심으로」 | 『고후 문학』 12호 수록 | |
2001년 | 세토우치 쟈쿠쵸 | 『세토우치 쟈쿠쵸 전집 6』 | 신초샤 | 『여백의 봄』 등 수록, ISBN 4106464063 |
2006년 | (방황사) | 『방서월간』 2월호 | 방황사 | 특집 「가네코 후미코의 시선 또 하나의 대역 사건」 게재 |
2006년 | 스즈키 유코 편, 카메다 히로시 연표 | 『가네코 후미코 나는 나 자신을 산다 수기·노래·조서·연표』 | 배나무 숲 | ISBN 4816606076, 가네코 후미코의 수기, 노래, 조서, 연표 등 수록 |
2006년 | (야마나시 학 강좌) | 『야마나시 학 강좌 4 야마나시의 사람과 문화 일본과 아시아의 가교가 된 사람들』 | 가네코 후미코 관련 내용 포함 |
4. 1. 수기
- 何が私をこうさせたか|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jpn
5. 관련 작품
- 영화
- 박열 (2017년): 이준익 감독 작품으로, 배우 최희서가 가네코 후미코 역을 맡았다. 영화는 가네코 후미코와 그녀의 재판 과정을 묘사한다.
- 뮤지컬
- <박열>: 배우 이정화, 허혜진, 최지혜 출연.
- <22년 2개월>: 배우 최수진, 강혜인, 홍나현 출연.
- 드라마
- 미스터 션샤인: 극중에서 가네코 후미코의 사진이 실린 신문이 언급되었다.
- 연극
- <격렬하게 불타 흩어진 저 꽃꽂이여> (2019년): 신주쿠 료잔바쿠 극단 작품. 작가 시라이 케이타, 연출 김수진. 배우 미즈시마 칸나 출연.
- 도서
- 여성들의 테러 (2019년)
- <양손에 토카레프> (2022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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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Bad Youth: Juvenile Deliquency and the Politics of Everyday Life in Modern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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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子文子氏に韓国政府が勲章 独立運動家・朴烈氏の妻=日本人は2人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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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34인 선정·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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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日韓問題考えたい」新宿梁山泊が挑む、シライケイタの「烈々と~」開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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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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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府豊多摩郡代々幡町代々木富ヶ谷1474 番地に移る。現渋谷区富ヶ谷1-28 NTT裏辺り 2003年5月 現地確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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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烈クロニクル・関連文献刊行録>
https://futei7.exb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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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가네코후미코 -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대일본제국의 아나키스트
산처럼
[40]
저널
"[단독]박열 의사 부인 '가네코 후미코' 건국훈장, 한국으로 온다"
https://news.v.daum.[...]
뉴시스
2019-07-19
[41]
드라마
광복절 기획 팩션 드라마 2부작 - 가네코후미코
http://vod.kbs.co.kr[...]
KBS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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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가네코후미코
https://e-gonghun.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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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34인 선정·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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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20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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