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메다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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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메다번은 1623년 데와노쿠니에 설치된 일본 에도 시대의 번이다. 이와키 요시타카가 초대 번주로, 이후 이와키 가문이 대대로 다스렸다. 보신 전쟁 당시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참여했으나, 신정부군에 항복하여 영지를 삭감당했고, 폐번치현으로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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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키 다카쓰구는 에도 시대 데와 가메다 번의 5대 번주로, 학문에 힘써 주자학을 배우고 국학, 와카, 서도에도 능통하여 가메다 번 학문의 기초를 다졌다.
| 가메다번 | |
|---|---|
| 개요 | |
| 공식 명칭 | 가메다 번 |
| 로마자 표기 | Kameda-han |
| 유형 | 번 |
| 역사 | |
| 성립 | 1623년 |
| 소멸 | 1871년 |
| 시대 | 에도 시대 |
| 위치 | |
| 소재지 | 가메다 성 |
| 현재 | 아키타현 일부 |
| 통치 | |
| 정치 체제 | 다이묘 |
2. 번의 역사
겐나 6년(1620년) 시나노의 나카무라 번주가 된 이와키 요시타카는 겐나 9년(1623년) 영지를 추가 받고 데와국 유리군 가메다 2만 고쿠 영지로 옮겨오면서 가메다 번이 성립되었다. 이는 1622년 데와국 대부분을 지배하던 모가미 씨가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영지를 몰수당하고, 그 영토가 히타치국에서 옮겨온 사타케 씨에게 주어져 구보타 번이 성립된 직후의 일이었다.
초대 번주 요시타카는 간에이 5년(1628년) 본가인 사타케 가문의 양자로 들어갔고, 숙부 이와키 노부타카가 2대 번주로 이와키 가문을 계승했다. 초기 가메다 번은 혈연 관계인 사타케 가문(구보타 번)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토지 조사(검지), 도시 건설 등을 진행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구보타 번이 가메다 번의 운영에 개입하면서 두 번 사이에 갈등이 생겨 관계가 악화되었다. 교호 3년(1718년) 노부타카 계통의 후사가 끊어지면서 사타케 가문과의 혈연관계도 단절되었다. 이후 6대 번주로 센다이번 다테 가문 출신의 다카요시가 양자로 들어오면서 다테 가문과의 관계가 긴밀해졌다.
게이오 4년(1868년) 발발한 보신 전쟁에서는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참여했으나, 구보타 번의 요청으로 동맹을 탈퇴하고 신정부 측에 가담했다. 그러나 신정부군의 선봉에서 큰 피해를 입고 홀대받자, 쇼나이 번의 설득에 응해 다시 동맹 측과 화의를 맺었다. 결국 쇼나이 번과 함께 신정부군에 맞서 싸우다 패배하여 항복했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변덕스러운 행보와 최종적으로 신정부의 적이 된 결과로 영지 2천 고쿠가 삭감되어 1만 8천 고쿠가 되었다.
1871년 7월 폐번치현으로 가메다 번은 폐지되어 아키타현에 흡수되었다. 마지막 번주 이와키 다카쿠니는 도쿄로 이주했고, 1884년 화족령에 따라 자작 작위를 받았다. 1869년 조사에 따르면 당시 번의 인구는 4,356가구, 23,894명이었으며, 에도의 고이시카와 다이도코로초에 주요 저택(가미야시키)을 유지했다.[1]
2. 1. 초기 역사 (이와키 가문과 가메다 지역)
센고쿠 시대의 데와국 유리군 지역은 유리 십이두라 불리는 소규모 영주들이 할거하던 곳이었다. 이들은 독자적인 다이묘 세력을 이루지 못하고 주변의 안도 씨(아키타 씨), 오노데라 씨, 다이호지 씨, 모가미 씨 등의 영향을 받으며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유리군 내 가메다 지역은 아카오츠 씨가 지배하고 있었으나, 이들의 거점은 후일 가메다성이 세워진 다카기 산 북쪽이 아닌 남쪽 기슭으로 추정된다. 아카오츠 씨는 유리 십이두 중 비교적 큰 세력이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개역당했고, 일족은 사타케 씨, 모가미 씨, 이코마 씨 등에 흩어져 섬기게 되었다. 유리 십이두 대부분이 개역되거나 사타케 씨와 교체되어 히타치국으로 옮겨가면서, 에도 시대 초기 유리군 전역은 모가미 씨의 영지가 되었다.한편, 가메다번을 세운 이와키 씨는 히타치 헤이씨의 혈통을 잇는 명문 가문이다. 가마쿠라 시대부터 무쓰국 남동부 하마도리 지역에서 12만 고쿠의 영지를 다스렸으며, 센고쿠 시대 후기에는 센다이의 다테 씨 및 히타치국의 사타케 씨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센고쿠 시대 중기 당주 이와키 시게타카는 딸 쿠보히메를 다테 하루무네에게 시집보냈고, 하루무네의 장남 이와키 지카타카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삼았다. 이로 인해 지카타카와 그의 아들 이와키 쓰네타카는 다테 씨의 혈통을 잇게 되었다. 오다와라 정벌 직후 쓰네타카가 병사했을 때, 그의 친아들 다테 마사타카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사타케 요시시게의 셋째 아들인 이와키 사다타카(어머니는 다테 하루무네와 쿠보히메의 딸)가 이와키 가문을 계승했다. 마사타카는 다테 가문으로 돌아가 센다이번의 일문인 이와야도 다테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사다타카는 이와키국 다이칸 성 12만 고쿠의 영주였다.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이와키 씨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에 속했지만, 사다타카는 맏형 사타케 요시노부와의 관계 때문에 이에야스가 아이즈와카마쓰의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공격하라는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전투 후 영지를 몰수당하는 개역 처분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개역된 형 아시나 요시히로나 동생 이와키 노리타카는 요시노부를 따라 구보타 번으로 옮겨가 그의 신하가 되었지만, 사다타카는 소마 요시타네가 개역 철회 후 옛 영지를 되찾은 것에 희망을 품고 이와키 가문 재흥을 목표로 에도에서 낭인 생활을 했다.
1616년, 도쿠가와 막부는 이와키 가문에 관용을 베풀어 시나노국에 1만 고쿠 규모의 시나노 나카무라 번을 세우는 것을 허락했다. 당시 당주는 이와키 요시타카(사다타카의 아들)였다. 1622년, 데와국의 대부분을 지배하던 강력한 모가미 씨가 막부에 의해 영지를 몰수당하자, 그 영토 대부분은 히타치국에서 옮겨온 사타케 씨에게 주어져 구보타 번이 성립되었다. 이듬해인 1623년(겐나 9년), 이와키 요시타카는 유리군 내 71개 마을로 구성된 2만 고쿠 영지로 전봉되어 가메다번을 세웠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메이지 유신까지 13대에 걸쳐 가메다 지역을 다스리게 된다.
2. 2. 가메다 번의 성립과 발전
센고쿠 시대 동안 데와국의 상당 부분은 모가미 가문이 지배했으나, 1622년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영지를 몰수당했다. 이후 데와 국의 영토 대부분은 히타치국에서 옮겨온 사타케 가문에게 주어졌고, 이들은 구보타 번을 세웠다.이와키 가문은 본래 가마쿠라 시대부터 무쓰국 남동부 하마도리 지역에서 12만 석 영지를 다스렸던 명문가였다. 센고쿠 시대 후기에는 센다이의 다테 가문 및 히타치국의 사타케 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특히, 센고쿠 시대 중기의 당주 이와키 시게타카는 딸 쿠보히메를 다테 하루무네에게 시집보냈고, 그의 장남 이와키 지카타카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삼으면서 이후 이와키 가문에는 다테 가문의 피가 섞이게 되었다. 오다와라 정벌 직후 당주 이와키 쓰네타카가 병사하자, 사타케 요시시게의 셋째 아들 이와키 사다타카(어머니가 다테 하루무네와 쿠보히메의 딸)가 가문을 계승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이와키 사다타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속했지만, 사타케 가문과의 관계 때문에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 명령에 따르지 않아 결국 영지를 몰수당하고 낭인이 되었다. 그러나 게이초 20년(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혼다 마사노부 휘하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고, 이듬해인 겐와 2년(1616년) 시나노나카무라 번 1만 석 영지를 받아 가문을 다시 일으켰다.
겐와 6년(1620년) 사다타카가 사망하자 장남 이와키 요시타카(후의 사타케 요시타카)가 뒤를 이었다. 겐와 8년(1622년) 모가미 가문이 개역된 후, 데와 국 유리 군에 1만 석을 추가로 받았다. 이듬해인 겐와 9년(1623년), 요시타카는 본거지를 데와 국 가메다로 옮기고 시나노 국의 영지도 데와 국 내 영지로 교체받으면서 2만 석 규모의 가메다 번이 공식적으로 성립되었다.
간에이 5년(1628년), 초대 번주 요시타카가 본가인 사타케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면서, 그의 숙부인 이와키 노부타카가 2대 번주로 이와키 가문을 계승했다. 이후 4대 번주 이와키 히데타카까지 사타케 가문 출신 남성이 번주 자리를 이었다. 초기 가메다 번은 토지 조사(검지), 성하 마을 건설 등에서 본가인 구보타 번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으나, 구보타 번이 기리시탄 단속 법규 등 여러 법도를 가메다 번에도 적용시키는 등, 번 경영이 안정된 후에도 번정에 대한 개입을 계속했다. 이 때문에, 가메다 번은 독립한 다이묘임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지번 취급을 받는 것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특히 구보타 번의 주요 물류 동맥인 오모노가와가 가메다 번 영지를 일부 통과했는데(현재의 아키타시 오와 신바・오와 무카이노), 가메다 번이 이 구간을 지나는 배에 세금을 부과하려 하자 두 번 사이에 격렬한 대립(오모노가와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하여, 점차 가메다 번과 구보타 번 사이에는 상호 불신이 깊어지게 되었다.
교호 3년(1718년), 4대 번주인 히데타카가 적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하여 사다타카, 노부타카의 계통이 단절된 결과, 사타케 가문과 이와키 가문 사이에는 혈연 관계가 없어졌다. 예전의 혈연을 의지하여 다테 마사타카의 후예인 이와야도 다테 가문, 다테 무라타카의 아들을 양자로 맞이하려 했지만, 무라타카의 아들은 일찍 사망했고, 타 가문에서의 양자를 중개하는 협상도 성사되지 않았다. 다음으로 사타케 가문에 양자를 요청했지만 이 역시 협상이 성사되지 않아, 다시 다테 가문과 협상한 결과, 센다이 번주 다테 요시무라의 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맞이하여, 5대 번주 이와키 다카아키가 되었다. 뒤이어 6대 번주인 이와키 다카야스는, 재차 협상으로 이와야도 다테 가문에서 맞이한 양자이며, 여기서 사다타카의 계통이 150년 만에 이와키 씨 당주로 부활하게 되었다 (다만 타카야스의 아버지인 다테 무라모치는 미사와 씨의 양자이기 때문에, 타카야스에게 이와키 씨와의 혈연은 없다). 이 이후, 카메다 번과 센다이 번과의 관계가 강해졌다.
호레키 11년(1761년), 번 재정의 궁핍과 중신의 폭정에 의해 카메다 번사 아키타 퇴산 사건이 발생한다. 관계자의 처분을 둘러싸고 카메다 번과 쿠보타 번의 협상이 결렬되었기 때문에, 양 번은 15년 정도 단교한다.
게이오 4년(1868년)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가메다 번은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참여했다. 그러나 구보타 번의 요청에 따라 혼조 번, 신조번, 야시마번과 함께 동맹을 탈퇴하고 신정부 측에 가담했다. 하지만 가메다 번은 신정부군의 선봉에 서서 혹사당하다가, 쇼나이 번에 대패한 신정부군에게 버림받고는 쇼나이 번의 설득에 응하여 다시 동맹 측과 화의를 맺는 등 변덕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이후 쇼나이 번과 함께 신정부 측에 대항하였지만 결국 패하고 항복하였다. 최종적으로 신정부의 적이 된 관계로 영지 2천 석을 삭감당하였다. 1869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당시 가메다 번의 인구는 4,356가구, 23,894명이었다. 번은 에도의 고이시카와 다이도코로초에 주요 저택(가미야시키)을 유지했다.[1]
1871년 7월 폐번치현 정책에 따라 가메다 번은 폐지되고 아키타현에 흡수되었다. 마지막 번주 이와키 다카쿠니는 도쿄로 이주했으며, 1884년 화족령에 따라 자작 작위를 받았다.
2. 3. 보신 전쟁과 가메다 번
게이오 4년(1868년)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가메다 번은 도호쿠 지역 여러 번들이 결성한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참여했다. 그러나 12대 번주 이와키 다카쿠니는 동맹 결성 이전인 4월 1일에 이미 신정부의 상경 명령에 응하여 메이지 천황을 배알했을 정도로 존왕파 성향이었다.이후 구보타 번의 요청에 따라 혼조 번, 신조번, 야시마번과 함께 오우에쓰 열번동맹을 탈퇴하고 신정부 측(오우 진무대)에 가담해, 동맹 측 쇼나이번 군대와의 전투(아키타 전쟁)에 참전했다. 가메다 번은 소번이었으므로, 신정부와 구보타 번 양측에 구보타 번의 지휘 아래 활동하기를 요청했다.[2]
오우 진무대 총독부는 소번은 협력만 하면 된다고 했으나, 7월 7일 가메다 번 영지로 진군한 야마구치 번 출신 감군 야마모토 도운스케와 우에다 유이치는 가메다 번에 반역 혐의가 있다며 결백을 증명하려면 선봉을 맡으라고 강압적으로 명령했다.[3] 어쩔 수 없이 최전선에 내몰린 가메다 군은 야마모토 등이 적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군사 회의에 자주 간섭하는 바람에, 우수한 무기와 전술을 갖춘 쇼나이 군을 상대로 큰 피해를 입었다. 야마모토 등의 횡포는 가메다 번사들 사이에서 신정부군을 '관적'(관군을 칭하는 도적)으로 여기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로 심각했다.
7월 28일 쇼나이 군의 공격으로 야시마가 함락되었고, 8월 1일 군사 회의에서는 원군을 요청한 가메다 군대장 가미야 오나리를 야마모토가 매도하고 철선으로 구타하는 모욕적인 사건까지 발생했다. 혼조 번령과 니가호령이 잇따라 함락되는 와중에 히로사키 번의 원군이 도착하고 혼조 번주 로쿠고 마사아키도 반격을 주장했지만, 8월 5일 야마모토는 혼조와 가메다를 버리고 아키타로 총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혼조 번은 성에 불을 지르고 명령에 따랐지만, 아직 적군이 오지도 않았는데 영지를 포기하라는 명령에 격분한 가메다 번사들은 번주 다카쿠니에게 신정부군 이탈을 강력히 주장했다. 다카쿠니는 신정부군에 계속 따르기를 원했지만, 영지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가신들의 간청에 마지못해 동의하고 스스로 인질을 자처하며 쇼나이로 향했다. 쇼나이 번주 사카이 타다아츠는 다카쿠니를 귀한 손님으로 대우했고, 8월 8일 가메다 군이 쇼나이 군과 함께 신정부군과 싸운다는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되었다.
이후 가메다 군은 쇼나이 군에 합류해 아키타의 신정부군과 싸웠다. 그러나 9월 11일, 구보타 성까지 약 12km 거리까지 진격했을 때 사가 번, 가고시마 번 등의 원군과 신무기로 강화된 신정부군의 강력한 반격(쓰바키다이 전투)을 받았다. 이 무렵 요네자와 번과 센다이 번이 항복하면서 남북으로 협공당할 위험이 커지자, 쇼나이 군도 철수하여 자령 방어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때 쇼나이 군은 가메다 번 병사들을 버리지 않고, 그들의 쇼나이 철수를 엄호한 뒤 자신들도 철수하며 신의를 지켰다.
9월 21일, 가메다에 진주한 구보타 번 병사들은 성 아래 마을에서 약탈을 자행했고, 야마모토의 명령으로 가메다 성에 불을 질렀다. 9월 27일, 가메다 번은 쇼나이 번과 함께 신정부군에 항복했다. 항복 탄원서는 아키타의 오우 진무대 총독부가 아닌, 에치고 방면 정벌군 참모였던 구로다 기요타카에게 제출했다. 구로다는 아키타와 쇼나이 사이에 끼어 주체적으로 행동하기 어려웠던 가메다 번의 사정을 참작하여, 최종적으로 영지 2천 석 삭감(1만 8천 석으로 감봉)과 번주 다카쿠니의 은거라는 비교적 가벼운 처분을 내렸다. 다카쿠니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 동생이 양자로 가 있던 오미 미야가와 번 호리타 가문에서 이와키 다카아키를 급히 양자로 맞이해 번주 자리를 잇게 했다.
1871년 7월 폐번치현으로 가메다 번은 폐지되어 아키타현에 흡수되었다. 마지막 번주가 된 이와키 다카쿠니는 도쿄로 이주했으며, 1884년 화족령에 따라 그와 후손들은 자작 작위를 받았다. 1869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당시 가메다 번의 인구는 4,356가구에 23,894명이었다. 번은 에도의 고이시카와 다이도코로초에 주요 저택(가미야시키)을 유지했다.[1]
3. 역대 번주

| # | 이름 | 재위 기간 | 관위 | 조정 관직 | 고쿠다카 |
|---|---|---|---|---|---|
| 1 | 이와키 요시타카|岩城吉隆일본어 | 1623년 ~ 1634년 | 종5위하 | 수리대부(修理大夫) | 2만 석 |
| 2 | 이와키 노부타카|岩城宣隆일본어 | 1628년 ~ 1656년 | 종5위하 | 단마수(但馬守) | 2만 석 |
| 3 | 이와키 시게타카|岩城重隆일본어 | 1656년 ~ 1704년 | 종5위하 | 이여수(伊予守) | 2만 석 |
| 4 | 이와키 히데타카|岩城秀隆일본어 | 1704년 ~ 1718년 | 종5위하 | 이여수(伊予守) | 2만 석 |
| 5 | 이와키 다카쓰구|岩城隆韶일본어 | 1718년 ~ 1745년 | 종5위하 | 단마수(但馬守) | 2만 석 |
| 6 | 이와키 다카요시|岩城隆恭일본어 | 1745년 ~ 1782년 | 종5위하 | 이여수(伊予守) | 2만 석 |
| 7 | 이와키 다카노리|岩城隆恕일본어 | 1782년 ~ 1817년 | 종5위하 | 이여수(伊予守) | 2만 석 |
| 8 | 이와키 다카히로|岩城隆喜일본어 | 1817년 ~ 1854년 | 종5위하 | 이여수(伊予守) | 2만 석 |
| 9 | 이와키 다카나가|岩城隆永일본어 | 1854년 ~ 1855년 | 종5위하 | 단마수(但馬守) | 2만 석 |
| 10 | 이와키 다카노부|岩城隆信일본어 | 1855년 | 종5위하 | 없음 | 2만 석 |
| 11 | 이와키 다카마사|岩城隆政일본어 | 1855년 ~ 1861년 | 종5위하 | 수리대부(修理大夫) | 2만 석 |
| 12 | 이와키 다카쿠니|岩城隆邦일본어 | 1861년 ~ 1869년 | 종5위하 | 좌경대부(左京大夫) | 2만 석 |
| 13 | 이와키 다카아키|岩城隆彰일본어 | 1869년 ~ 1871년 | 종5위 | 자작 | 2만 석 → 1만 8천 석 |
※ 2대 번주인 노부타카는 초대 요시타카의 숙부였다. 아랫 세대에서 윗 세대로의 상속은 당시 기피되었으므로, 『아키타 무감』 등의 사서에서는 노부타카를 정식 번주가 아닌 시게타카가 상속할 때까지의 반다이(藩代, 대잇기)로 취급하기도 한다.
4. 막말의 영지
참조
[1]
웹사이트
Edo daimyo.net
http://www1.parkcity[...]
[2]
논문
2007
[3]
논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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