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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다 요시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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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로다 요시타카는 1546년에 태어난 무장으로, 다케나카 한베에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긴 군사로 평가받는다. 그는 하리마의 고데라 마사모토를 섬기며 히메지 성주 대리를 지냈고, 오다 노부나가의 신종을 설득하는 등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다. 임진왜란에 참전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에 서서 활약했다. 그는 뛰어난 지략으로 '조수이'라는 호를 사용했으며, 검소한 생활과 절약을 통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용병을 고용할 자금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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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다 요시타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조스이 거사 초상화 (소후쿠지 소장)
본명구로다 요시타카
이명구로다 간베에
구로다 간베
일본어 이름구로다 요시타카 (黒田 孝高)
별칭간베에 (관병위)
소관
흑관 (약칭)
여수헌 (호)
시호수경권현
계명용광원전여수원청대거사
세례명시메온
출생1546년 12월 22일
사망1604년 4월 19일
출생지히메지
사망지이이즈카
묘소후쿠오카시 하카타구 치요의 소후쿠지
교토시 기타구의 다이토쿠지 탑두 용광원
와카야마현 이토군 고야정의 고야산 오쿠노인
가문구로다 씨 (자칭 우다 겐지)
통칭간베에
법명여수원청
관위종5위하
가게유 차관
증 종3위
가계
아버지구로다 모토타카
어머니고데라 마사모토 양녀
배우자구시하시 데루
자녀나가마사
구마노스케
가즈시게
마쓰주마루
경력
주군고데라 마사모토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소속오다 씨
도요토미 씨
동군
도쿠가와 막부
봉록부젠 나카쓰 번 번주
주요 전투
전투 목록이나바야마 성 공방전
주고쿠 원정
미키 합전
돗토리 성 공방전
다카마쓰 성 수공전
야마자키 전투
시즈가타케 전투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시코쿠 정벌
규슈 정벌
이시가키바루 전투
야나가와 성 공방전

2. 생애

1546년(덴분 15년) 히메지 성에서 구로다 모토타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구로다 가문은 오미국 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요시타카의 할아버지 대에 하리마국으로 이주하여 고데라 마사모토를 섬겼다. 마사모토는 구로다 가문을 중신으로 삼고 히메지 성을 맡겼으며, 자신의 양녀를 모토타카와 결혼시켜 고데라 성씨를 사용하게 했다.

1567년(에이로쿠 10년), 가문을 물려받고 히메지 성주 대리가 되었다. 이웃한 아카마쓰 가문이 3천여 명으로 히메지 성을 공격했지만, 300여 명으로 이를 격파하여 이름을 떨쳤다.[19]

1573년(덴쇼 원년), 하리마의 고데라 씨는 오다 노부나가와 모리 가문 사이에 놓이게 되었다. 1575년(덴쇼 3년), 노부나가는 하시바 히데요시(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하리마 진군을 명했다. 요시타카는 노부나가를 높이 평가하여 주군에게 오다 가문에 신종할 것을 설득하고 주위 세력들을 회유했다.[21]

1578년(덴쇼 6년), 벳쇼 나가하루가 오다 가문에 반기를 들자 아라키 무라시게도 모반을 일으켰다. 요시타카는 무라시게를 설득하려다 붙잡혀 토굴에 갇혔다. 1년 후 구출되었으나, 오랜 토굴 생활로 다리 관절에 문제가 생겨 정상적인 보행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주군 고데라 마사모토도 모반에 동조하여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고, 오다 노부타다에게 토벌당했다. 요시타카는 구로다라는 본래 이름으로 고치고, 노부나가로부터 하리마노쿠니 내 1만 석의 영지를 받았다.

1580년(덴쇼 8년), 히메지 성을 히데요시에게 제공하고 자신은 시키토 군의 국부산성으로 이동했다. 1581년(덴쇼 9년)에는 돗토리 성을 병량 공격으로 함락시켰는데, 이 작전을 히데요시에게 제안한 것이 요시타카라는 설이 있다.

1582년(덴쇼 10년), 빗추 다카마쓰 성 공격에서 히데요시가 거대한 제방을 쌓아 수공을 가했는데, 이 역시 요시타카의 계책이라는 설이 있다. 다카마쓰 성 공략 중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요시타카는 히데요시에게 "주군에게 행운이 열릴 기회가 찾아왔다"고 진언했다. 모리 데루모토와의 화의 및 주고쿠 철수도 요시타카의 진언에 따른 것이라 전해진다.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면서, 하리마 진군을 도왔다.[5] 벳쇼 나가하루의 모반과 아라키 무라시게의 농성 때 설득에 실패하고 갇혔으나 구리야마 도시야스에 의해 구출되었다. 오다 노부타다가 주군을 토벌하자 구로다로 성을 고치고 1만 석 영지를 받았다. 히메지 성을 히데요시에게 제공하고 돗토리 성 병량 공격을 헌책했다.[18] 시미즈 무네하루의 빗추 다카마쓰 성 수공 작전과 혼노지의 변 이후 모리 데루모토와의 화의를 제안했다.[18]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 아래에서, 시즈가타케 전투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 참가하고, 시코쿠 정벌에서 조소카베 모토치카의 책략을 간파했다.[18] 1586년(덴쇼 14년) 종5위하 가게유 차관에 서임되고, 1587년(덴쇼 15년) 규슈 정벌에서 공을 세워 부젠 나카쓰 12만 5천 석 영지를 받았다.[7] 기독교 세례를 받았으나 바테렌 추방령에 솔선하여 따랐다.[8] 1590년(덴쇼 18년) 오다와라 정벌에 참가하여 호조 가문을 설득, 무혈 항복을 이끌어냈다.[18] 1592년(분로쿠 원년)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귀갑차 설계에 참여했다.[18] 이시다 미쓰나리와 다툼으로 출가하여 나카쓰 성에서 은거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우에스기 가게카쓰를 토벌하러 간 사이, 이시다 미쓰나리가 거병하여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났다. 구로다 나가마사는 동군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다.[9] 요시타카는 규슈에서 동군으로 거병하여 1만 명의 군단을 결성, 오토모 요시무네를 이시가키바루 전투에서 격파했다.[10][11][12] 이후 서군 성들을 함락시키며 규슈 통일을 노렸다는 설이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 나가마사는 지쿠젠국 후쿠오카 52만 3천 석을 받았다.

2. 1. 젊은 시절

구로다 요시타카는 1546년(덴분 15년) 음력 11월 29일, 히메지에서 구로다 모토타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구로다 가문은 오미국 이카 군 구로다 마을 출신의 무가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요시타카의 할아버지 구로다 시게타카 대에 하리마로 이주하여 고차쿠 성을 중심으로 반슈 평야를 통치하던 고데라 마사모토를 섬겼다. 마사모토는 시게타카를 중신으로 삼고 히메지 성 성주 대리로 임명했으며, 아들 모토타카에게 자신의 양녀를 시집보내 고데라 성씨를 사용하게 했다.

1567년(에이로쿠 10년), 요시타카는 가문을 물려받고 결혼하여 히메지 성주 대리가 되었다. 이웃한 아카마쓰 가문이 3천여 병력으로 히메지 성을 침공하자, 요시타카는 단 300여 명으로 이를 격파하여 이름을 떨쳤다.[19]

1573년(덴쇼 원년), 하리마의 고데라 씨는 기나이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오다 노부나가산요, 산인 지방에 세력을 가진 모리 가문 사이에 놓이게 되었다.

1575년(덴쇼 3년), 노부나가는 하시바 히데요시(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하리마 진군을 명했다. 요시타카는 노부나가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주군 마사모토에게 오다 가문에 신종할 것을 설득하고, 주위 세력들을 회유했다.[21]

1578년(덴쇼 6년), 하리마의 미키 성주 벳쇼 나가하루가 오다 가문에 반기를 들자 주변 세력도 동요했다. 노부나가의 중신 아라키 무라시게 역시 모반을 일으켜 아리오카 성에서 농성했다. 요시타카는 무라시게를 설득하려 아리오카 성에 들어갔으나 실패하고 붙잡혀 토굴에 갇혔다.

1년 후, 아리오카 성이 함락되고 요시타카는 가신 구리야마 도시야스에 의해 구출되었으나, 오랜 토굴 생활로 다리 관절에 문제가 생겨 정상적인 보행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후 전투 지휘는 가마를 이용했다.

주군 고데라 마사모토도 무라시게의 모반에 동조하여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고,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에게 토벌당했다. 요시타카는 모반인의 이름을 피하기 위해 본래의 구로다라는 이름으로 고치고, 노부나가로부터 하리마노쿠니 내 1만 석의 영지를 받았다.

1580년(덴쇼 8년), 요시타카는 "히메지 성은 하리마 통치에 최적"이라며 자신의 거성을 히데요시에게 제공하고, 자신은 시키토 군의 국부산성으로 이동했다. 1581년(덴쇼 9년)에는 이나바 돗토리 성을 병량 공격으로 함락시켰는데, 이 작전을 히데요시에게 제안한 것이 요시타카라는 설이 있다.

1582년(덴쇼 10년), 모리 씨의 명장 시미즈 무네하루가 수비하던 빗추 다카마쓰 성 공격에서 히데요시가 거대한 제방을 쌓아 수공을 가했는데, 이 역시 요시타카의 계책이라는 설이 있다. 다카마쓰 성 공략 중 교토에서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요시타카는 히데요시에게 "주군에게 행운이 열릴 기회가 찾아왔다"는 진언을 했다고 한다. 모리 데루모토와의 화의 및 주고쿠 철수도 요시타카의 진언에 따른 것이라 전해진다.

2. 2. 오다 노부나가 섬김

덴쇼 3년(1575년), 오다 노부나가는 중신 하시바 히데요시(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하리마 진군을 명했다. 요시타카는 노부나가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주군 마사모토에게 오다 가문에 신종할 것을 설득하고 주위 세력들을 회유했다.[5]

덴쇼 6년(1578년), 벳쇼 나가하루가 오다 가문에 반기를 들자 주변 세력도 동요했다. 아라키 무라시게가 노부나가에게 모반을 일으켜 아리오카 성에서 농성할 때, 요시타카는 무라시게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성에 갇혔다. 1년 후, 구리야마 도시야스에 의해 구출되었으나, 오랜 토굴 생활로 다리 관절에 문제가 생겨 이후 전투 지휘를 가마 위에서 하게 되었다.

노부타다가 주군 마사모토를 토벌하자, 요시타카는 모반인의 이름을 버리고 구로다로 성을 고쳤다. 동시에 노부나가로부터 하리마 내 1만 석 영지를 받았다.

덴쇼 8년(1580년), 요시타카는 히메지성을 히데요시에게 제공하고 자신은 시키토 군의 국부산성으로 이동했다. 덴쇼 9년(1581년), 돗토리 성을 병량 공격으로 함락시켰는데, 이 작전을 히데요시에게 헌책한 것이 요시타카라는 말이 있다.

덴쇼 10년(1582년), 시미즈 무네하루가 수비하던 빗추 다카마쓰 성 수공 작전도 요시타카가 헌책했다고 전해진다.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죽자, 요시타카는 히데요시에게 "주군에게 행운이 열릴 기회가 찾아왔다"고 진언하며 모리 데루모토와의 화의와 주고쿠 철수를 제안했다.[18]

2. 3. 도요토미 정권

덴쇼 11년(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賤ケ岳の戦い일본어)와 덴쇼 12년(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 참가했다. 덴쇼 13년(1585년) 시코쿠 정벌에 참가하여 적장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의 책략을 간파하고 역공, 적성을 함락시켰다.[18]

덴쇼 14년(1586년) 종5위하 가게유 차관(勘解油次官)에 서임되었다. 덴쇼 15년(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규슈 정벌에서 모리 가문, 우키타 가문 등의 군목부(軍目付; 군대 감시역)를 맡아 승리에 공헌, 부젠 나카쓰에 12만 5천 석의 영지를 받았다.[7]

규슈 국인세력인 기이 시게후사(城井鎮房일본어), 노나카 시게자네(野中鎮兼일본어) 등이 잇키를 일으키자 이들을 격파하고 기이씨를 모살하여 영내 안정에 성공했다.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과의 교분으로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

덴쇼 15년(1587년) 7월, 히데요시의 바테렌 추방령다카야마 우콘은 반항하다 추방되었지만 요시타카는 솔선하여 명령을 수행했다. 히데요시 측근인 요시타카의 행동은 선교사와 기독교 신자 제후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8]

덴쇼 17년(1589년) 장남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일본어)에게 가문을 물려주고 은거, 조스이칸(如水軒)이란 호를 사용했다. 이후에도 히데요시 측근으로 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 참가, 호조 가문(北条氏) 오다와라성에 들어가 호조 우지마사(北条氏政일본어), 호조 우지나오(北条氏直일본어) 부자를 설득해 무혈 항복시켰다. 호조 우지나오에게서 日光一文字 명도를 선물받았다.(국보, 후쿠오카시 박물관 소장).[18]

분로쿠 원년(1592년) 임진왜란에 참가, 주요 성곽 수호, 2차 진주성 전투에서 고토 모토쓰구(後藤基次)의 귀갑차(龜甲車) 설계에 참여했다. 분로쿠 2년(1593년)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와 다툼이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사 출가, 조스이엔쿄(如水円清일본어)란 호를 사용, 나카쓰성에서 은거 생활을 했다.

게이초 3년(1598) 8월 히데요시 사후 12월 수도로 올라와 후시미(伏見) 저택에 거주했다. 조스이가 깃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일본어)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가까운 시일 내 천하 패권을 둘러싼 대란을 예측했다.

2. 4. 세키가하라 전투

1600년(게이초 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우에스기 가게카쓰를 토벌하기 위해 동쪽으로 이동하자, 이시다 미쓰나리가 서군을 이끌고 거병하여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났다. 장남 구로다 나가마사는 이에야스의 양녀를 아내로 맞이했기 때문에 고토 모토쓰구 등과 함께 구로다 군의 주력을 이끌고 동군에 참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 측에서 전투를 벌여 무공을 세웠다.[9]

이에 호응하여 요시타카(조스이)도 규슈에서 동군으로 거병했다. 그러나 병력 대부분은 나가마사가 이끌고 상경했기에 병력이 부족했다. 때문에 요시타카는 영내 백성들에게 돈을 주고 병사로 고용하여 1만 명 정도의 백성들로 이루어진 속성 군단을 결성했다. 요시타카는 이 병력을 이끌고 9월 9일(10월 15일) 분고에 침공했다.

같은 날, 가문 재흥을 목표로 서군에 참가한 오토모 요시무네모리 데루모토의 지원을 받아 분고에 침공하여 동군의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속령이었던 기즈키 성을 포위 공격했다. 수비장수 마쓰이 야스유키와 아리요시 타치유키는 요시타카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요시타카는 원군 요청에 응하여 9월 13일(10월 19일) 이시가키바루 전투에서 오토모 군과 충돌했다. 모리 도모노부 등의 활약으로 구로다 군은 오토모 군에게 승리했다.[10][11][12]

그 후에도 요시타카는 서군에 속하던 구마가이 나오모리의 아키 성, 가키미 가즈나오의 도미쿠 성, 오타 가즈요시의 우스키 성, 모리 다카마사의 쓰노무레 성과 히구마 성, 사에키 성, 모리 가쓰노부의 고쿠라 성, 모리 노부토모의 가와라다케 성 등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이 때 요시타카의 행동은 규슈를 통일하고 그 병력을 이끌고 상경하여 이에야스와 결전을 벌여 천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야망을 갖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나가마사는 이에야스로부터 공적 1위로 지쿠젠국 후쿠오카 52만 3천 석을 하사받았다.

3. 임진왜란 참전과 조선에 대한 인식

1592년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주요 성곽의 수호 및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했고, 고토 모토쓰구가 개발한 귀갑차 등의 설계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1593년에 5봉행 중 한 명인 이시다 미쓰나리와 다툼이 있었고, 이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사 출가, 은거하여 조스이엔쿄(如水円清)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그 후에는 나카쓰성에서 유유자적한 은거 생활을 보냈다고 한다.[64]

4. 인물평

다케나카 한베에와 함께 히데요시의 쌍벽이라 일컬어지며 '양쪽의 베에(両兵衛일본어)', '두 명의 베에(二兵衛)'라 칭해졌다.[13]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요시타카를 '이 시대의 장량과 같은 인물'이라 평했다.(명장언행록) 요시타카는 매독에 걸려 머리에 흉칙한 부스럼이 있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호시탐탐 천하를 노린 야심가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주군을 배신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고데라 마사모토의 경우에도 "배신이다"라고 하지 않고 "배신당했다"라고 말해지는 경우가 많으며,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관계에서도 두 사람의 입장은 같은 도요토미 가문의 가신일 뿐 주종 관계는 아니었다. 소설가 사카구치 안고는 "천재였지만 전쟁광이었을 뿐 야심은 이류"라고 평하였다.

역사 기록과 현대 텔레비전 묘사처럼, 구로다는 자신의 지능과 영향력을 숨기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히데요시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히데요시는 구로다 요시타카에게 큰 빚을 지고 있었고, 요시타카는 히데요시의 그림자 책사로서 전국 통일을 도왔으며, 히데요시는 구로다가 자신을 전복시킬 수도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구로다는 일본 다도 "와비차"의 창시자 센노 리큐와 우정을 돈독히 했는데, 센노 리큐는 후에 히데요시에게 처형당했다.

구로다는 검소한 사람이었고, 가신들에게 낡은 군 장비와 개인 소지품을 팔았다. 그는 절약하는 마음 덕분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용병을 고용할 충분한 돈을 모았다. 그의 마지막 말은 "다른 사람의 호의를 얻으려 하지 말고 부를 바라지 말라"였다.[14] 그는 도요토미 정권 아래에서 히메지 성, 나고야 성, 오사카 성, 히로시마 성 등 주요 성 건설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명장언행록에 따르면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했을 때, 당황하는 히데요시에게 "운이 열릴 기회가 왔습니다"라고 말했고, 이후 히데요시는 요시타카의 지모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같은 책에서 히데요시는 가신에게 "나 대신 다음에 천하를 다스릴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묻자, 가신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마에다 도시이에를 거론했지만, 히데요시는 구로다 간베에(요시타카)를 지목하며 "간베에가 마음만 먹으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천하를 차지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측근이 "간베에는 10만 석 정도의 다이묘에 불과합니다만"이라고 되묻자, 히데요시는 "너희들은 저 녀석의 진정한 실력을 모른다. 저 녀석에게 100만 석을 준다면 당장 천하를 빼앗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를 전해들은 간베에는 "우리 집안의 화근이다"라며 즉시 삭발하고 뇨스이(如水)라고 호를 지었다고 한다. 또한, "히데요시는 항상 세상에서 두려운 것은 도쿠가와와 구로다이다. 그러나 도쿠가와는 온화한 사람이다. 구로다의 악창천창은 무엇에도 마음을 허락하기 어려운 자라고 말했었다"고 쓰여져 있다.[41]

분로쿠 5년 (1596년) 게이초 후시미 지진 때 뇨스이는 은거 중이었음에도 붕괴된 후시미성으로 달려갔지만, 히데요시는 가토 기요마사는 칭찬하며 경호를 허락한 반면, 뇨스이에게는 "내가 죽지 않아서 유감이었겠지"라며 가혹한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너는 동생인 코이치로(도요토미 히데나가)와 같이 마음 편하게 생각하고 있다"라고 쓰여진 덴쇼 5년 7월자 요시타카 앞으로의 히데요시 친필 서찰 등, 자료로서 사이가 좋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은 없다.[20]

요시타카는 후세에 종종 히데요시의 "군사"라고 불린다. 전국 시대에는 전투 때 방위나 날짜를 점치는 "군배자"가 존재했고, "군사"라고도 불렸다. 요시타카는 군배자는 아니지만, 군사에는 주군의 곁에서 정치·외교·군사적인 지도를 하는 의미도 있다. 요시타카는 후자의 의미로 히데요시의 군사로도 평가받지만, 히데요시의 유력 측근은 도요토미 히데나가와 센노 리큐였으며, 요시타카는 군사적인 사령관이었지만 도요토미 정권을 움직이는 발언력은 없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는 "가톨릭 세례를 받은 자 중에는 간파쿠의 고문을 맡는 한 귀인이 있었다. 그는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고, 그것 때문에 만인의 존경을 받았다"라고 하여 구로다 요시타카를 언급하며, 참모나 고문, 측근으로서 막료에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5. 일화


  • 덴쇼 15년(1587년) 7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바테렌 추방령을 발표했다. 다카야마 우콘은 이에 반항하다 추방되었지만, 구로다 요시타카는 솔선하여 명령을 수행했다. 히데요시의 측근이었던 요시타카의 행동은 선교사와 기독교 신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루이스 프로이스는 이 사실을 자신의 책에 기록했다.[64]
  • 명장언행록에 따르면,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했을 때, 요시타카는 히데요시에게 "주군의 운이 열릴 기회가 찾아왔군요"라고 말했다. 이 일로 히데요시는 요시타카의 지모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요시타카에게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부젠 나카쓰 12만 석을 하사했다.
  • 같은 책에서 히데요시는 가신들에게 "나를 대신해 천하를 얻을 자는 누구일 것 같으냐"라고 물었다. 가신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마에다 도시이에의 이름을 댔지만, 히데요시는 요시타카를 가리키며 "간베(요시타카) 그 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내게서 천하를 빼앗아버릴 것이야"라고 말했다. 측근들이 "간베 님은 10만 석 다이묘일 뿐이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하자, 히데요시는 "너희들은 그놈의 진짜 역량을 몰라. 그놈에게 100만 석을 주었다면 단숨에 천하를 빼앗아버렸을 것이야"라고 답했다. 이를 전해 들은 요시타카는 "집안의 화가 되겠다"며 곧장 머리를 깎고 조스이(如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 명장언행록에는 "히데요시는 평소 세상에 두려워한 것은 도쿠가와와 구로다였다. 도쿠가와는 온화한 사람이었다. 구로다는 두창을 앓고 아무리 해도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하였다"라는 기록도 있다.[13]
  • 요시타카가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가문을 물려주고 은거한 것은 44세 때였다.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에 은거한 이유는 히데요시에게 주살당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고, 이시다 미쓰나리 등 젊은 인재들의 대두도 또 다른 이유였다.
  • 만년에 가신에게 차갑게 대했는데, 이는 순사자(殉死者)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고, 장남 나가마사가 당주로서 가신단의 단결을 얻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
  • 아라키 무라시게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노부나가는 요시타카가 돌아오지 않자 무라시게에게 넘어간 것으로 판단하고 인질로 맡겨졌던 나가마사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다케나카 한베에가 기지를 발휘하여 나가마사를 구했다. 그 때문에 다케나카 시게하루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구로다 가문의 문장에 다케나카 가문의 문장을 함께 사용하였다.[65]
  • 세키가하라 전투 후 돌아온 나가마사가 "이에야스 님이 제 손을 잡고 공로를 치하하셨다"고 자랑하자, 요시타카는 "그때 너의 왼손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왼손으로 이에야스를 죽였어야 한다)고 말했다.
  • 요시타카는 자신의 지능과 영향력을 숨기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히데요시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14] 히데요시는 요시타카에게 큰 빚을 지고 있었고, 요시타카가 자신을 전복시킬 수도 있다고 믿었다. 게다가 요시타카는 센노 리큐와 우정을 돈독히 했는데, 센노 리큐는 후에 히데요시에게 처형당했다.
  • 요시타카는 검소한 사람이었고, 가신들에게 낡은 군 장비와 개인 소지품을 팔았다. 그는 절약하는 마음 덕분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용병을 고용할 충분한 돈을 모았다. 그의 마지막 말은 "다른 사람의 호의를 얻으려 하지 말고 부를 바라지 말라"였다.[14] 그는 또한 도요토미 정권 아래에서 히메지 성, 나고야 성, 오사카 성, 히로시마 성과 같은 주요 성을 건설하는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 요시타카에 관한 이야기는 루이스 프로이스 등 선교사나 스이후쿠 사 주지 게이테츠 겐소와 같이 직접 만났던 인물의 기록 외에도, 『가와스미 태합기』, 『조잔 기담』, 『고향 이야기』, 『명장 언행록』, 『구로다 조스이전』 등 많은 기록에 남아 있다. 빗추 다카마쓰 성 수공과 주고쿠 대반환은 효고의 헌책과 같은 이야기는 3대 후쿠오카 번주 구로다 미쓰유키의 명령으로 간분 11년(1671년)에 편찬을 시작한 『구로다 가계보』 이후의 일화이다.[30]
  • 게이초 5년(1600년) 10월 깃카와 히로이에에게 보낸 서한에 "세키가하라 전투가 앞으로 한 달 더 계속되었더라면, 주고쿠 지방으로 쳐들어가 화려한 전투를 벌일 생각이었지만, 이에야스의 승리가 일찍 확정되었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고 적혀 있다. 현대의 "천하를 노린 야심가・구로다 조스이"라는 속설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6. 평가 및 영향

일반에 알려진 구로다 요시타카의 활약은 에도시대의 군기물 등에서 과장된 부분이 많다고 전해진다. 다케나카 한베에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쌍벽으로 일컬어지며 '양쪽의 베에(両兵衛일본어)', '두 명의 베에(二兵衛)'라 칭해졌다.[13]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요시타카를 '이 시대의 장량과 같은 인물'이라 평했다. 요시타카는 매독으로 머리에 흉칙한 부스럼이 있었다고 한다.[13]

일반에는 천하를 노린 야심가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주군을 배신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고데라 마사모토의 경우에도 "배신이다"가 아니라 "배신당했다"라고 표현되며,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관계에서도 두 사람은 같은 도요토미 가문의 가신일 뿐 주종 관계는 아니었다. 소설가 사카구치 안고는 "천재였지만 전쟁광이었을 뿐 야심은 2류"라고 평가했다.[13]

역사 기록과 현대 텔레비전 묘사에 따르면, 구로다는 자신의 지능과 영향력을 숨기려 했음에도 히데요시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히데요시는 구로다 요시타카에게 큰 빚을 지고 있었고, 구로다는 히데요시의 그림자 책사로서 전국 통일을 도왔으며, 히데요시는 구로다가 자신을 전복시킬 수도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또한 구로다는 일본 다도 "와비차"의 창시자로 알려진 센노 리큐와 친분이 있었는데, 센노 리큐는 후에 히데요시에게 처형당했다.[13]

구로다는 검소한 사람이었고, 가신들에게 낡은 군 장비와 개인 소지품을 팔았다. 그는 절약하는 마음 덕분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용병을 고용할 충분한 돈을 모았다. 그의 유언은 "다른 사람의 호의를 얻으려 하지 말고 부를 바라지 말라"였다.[14] 그는 도요토미 정권 아래에서 히메지 성, 나고야 성, 오사카 성, 히로시마 성과 같은 주요 성 건설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14]

참조

[1] 문서 In Western literature, Kuroda Yoshitaka is also known as
[2] 뉴스 Samurai File 17; Kuroda Kanbei (URL 없음) Japan World 2014-01-15
[3] 서적 Kuroda Jhosui Nishi Nihon Jinbutsu shi 1996
[4] 웹사이트 黒田官兵衛の主君は誰なのか? https://rekishikaido[...] PHPオンライン 2022-06-11
[5] 문서 The Reason Why Kanbei was Imprisoned Itami
[6]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1998
[7]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1998
[8] 웹사이트 Kuroda Yoshitaka - Japanese Wiki Corpus https://www.japanese[...] 2022-03-09
[9] 웹사이트 「石田三成襲撃事件」で襲撃は起きていない? 画策した7人の武将、そして家康はどうした? https://rekishikaido[...] PHPオンライン 2024-06-11
[10] 웹사이트 牢人・宮本武蔵の関ヶ原合戦事情…東軍西軍のどちらに属し、主君は存在したのか https://sengoku-his.[...] 2024-05-26
[11] 웹사이트 大阪經大論集, Issues 282-284 https://books.google[...] 大阪經濟大學 2024-05-25
[12] 웹사이트 宮本武蔵に関する史料は、なぜ極端に少ないのか。その理由を考える https://news.yahoo.c[...] 渡邊大門 無断転載を禁じます。 © LY Corporation 2024-06-02
[13] 방송 23 Kuroda Kanbei, the man who was most feared by Hideyoshi BS-TBS 2011-09-05
[14] 웹사이트 Kanbei Kuroda's quotes Meigen Kakugen no Housekibako 2015-12-07
[15] 웹사이트 黒田孝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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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웹사이트 福岡市博物館 - 黒田家のご先祖探し http://museum.city.f[...]
[18] 서적 黒田家譜
[19] 문서 大阪城天守閣所蔵文書
[20] 문서 黒田家文書
[21] 서적 黒田如水伝 博文館
[22] 뉴스 賤ケ岳合戦:黒田官兵衛も参戦していた…秀吉の古文書発見 http://mainichi.jp/s[...] 毎日新聞 2013-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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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웹사이트 【市長フォト】黒田官兵衛正室「光姫」石造除幕式 https://www.city-nak[...] 中津市役所 2018-06-02
[64] 문서 연초
[65] 문서 이 가문 문장은 검은 떡(黑餠)을 가리킨다. 검은 떡에는 석고의 증가를 염원하는 문장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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